군사사에 관심 없는 일반인이라도 ‘전격전’이라는 단어는 들어 봤을 정도로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기동전(Bewegungskrieg)’과 ‘섬멸전(Vernichtungskrieg)’ 개념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짧은 시기에 독일의 일부 군사사상가들은 미래에는 ‘기동전’과 ‘섬멸전’을 통한 전쟁의 승리가 어려워 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1차대전을 경험한 독일 군인들은 ‘기동전’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며 1차대전에서 패배한 것은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한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은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이질적 존재였던 소모전략(Ermattungsstrategie)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1980년대에 새로 공개된 독일 사료를 바탕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자료를 통해 흥미로운 논의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보고 있는 것은 소모전략이 등장하는 과정입니다.
독일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 der Ältere)나 유명한 군사사가이자 군사평론가였던 델브뤽(Hans Delbrück)은 보불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몇 차례의 결정적인 전술적 승리를 통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러일전쟁의 결과 델브뤽은 자신의 견해를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수백만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유럽국가들이 전쟁을 할 경우 한 번의 전투로 수십만의 적을 섬멸하더라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점은 너무나도 명백했습니다. 유럽국가들간의 전쟁에 비해 작은 규모였던 러일전쟁에서 조차 러시아와 일본 양 측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델브뤽은 보불전쟁과 러일전쟁 등을 관찰한 결과 미래의 전쟁은 소모전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부에서는 기동전 사상이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 외부의 이질적인 사상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 했습니다.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현대전의 변화된 환경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우수한 전술로서 충분히 단기간의 결정적 섬멸전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슐리펜은 델브뤽과 달리 러일전쟁을 통해 신속한 승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전술적으로 무능하고 전쟁의 패배로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양면전쟁이 발발하더라도 프랑스를 신속히 격파한 다음에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쉽게 붕괴하지 않았고 러시아군의 동원속도는 슐리펜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결국 전쟁 전에 예상했던 신속한 승리는 오지 않았고 독일군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저자는 다음으로 마른 전투의 패배 이후 새로이 총참모장이 된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이 소모전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팔켄하인은 독일군 장교단의 주류와는 달리 ‘기동전’과 ‘섬멸전’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총참모장에 임명될 당시 빌헬름 2세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지만 팔켄하인은 근본적으로 독일군 고위장교단 내에서 비주류였으며 결국은 기동전 지지자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됩니다.
팔켄하인의 전략구상은 서부전선에서의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와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을 맺은 뒤 동부전선의 러시아를 정리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저자는 1915년의 경험을 통해 팔켄하인이 소모전으로 프랑스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주장합니다. 프랑스군이 1915년 9월에 야심차게 실시한 대공세 당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충분한 예비대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공세 초기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주면서 전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동부전선에서는 1915년의 대공세를 통해 러시아군에게 포로 1백만을 포함한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팔켄하인은 이를 통해 1916년에는 서부전선에서 대규모의 소모전을 벌여 프랑스를 전열에서 이탈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저자는 1916년 전역에 대한 설명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몇 가지 더 하고 있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주장은 영국군의 솜 공세는 팔켄하인이 미리 예측하고 자신의 소모전략의 일부로 포함시켰다는 것 입니다. 팔켄하인의 원래 계획은 베르덩 공세를 통해 프랑스군을 소모시키며 동시에 프랑스가 영국에 구원 공격을 요청하도록 하는 것 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군이 구원공격에 나서면 1915년 가을과 마찬가지로 방어를 통해 영국군을 소모시킨 뒤 그동안 확보해 둔 전략예비를 통해 반격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팔켄하인의 구상은 독일군의 전투력은 과대평가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상태에서 이루어 진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가 없었습니다. 베르덩 공세는 예상보다 완강한 프랑스군의 저항으로 독일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영국군의 공세는 팔켄하인의 예측보다 늦게 이루어 진데다 결정적으로 예상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팔켄하인이 반격에 투입하기 위해 확보한 예비대들은 영국군의 솜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소모되었습니다. 결국 원래부터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1916년의 실패를 계기로 반대파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총참모장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전후 독일의 역사서술에서 팔켄하인이 정치적 반대파, 특히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와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등 ‘섬멸전’ 지지자들에 의해 폄하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총참모장 해임과 함께 전후 독일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지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탄넨베르크’의 영웅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섬멸전’ 옹호자들은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이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살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소모전’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섬멸전’에 입각해 미래의 전쟁을 준비한 독일군은 2차대전에서 또 다시 ‘소모전’에 의해 패배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기동전’과 ‘섬멸전’은 작전단위의 방법론으로 적당한 것이지 ‘전략’ 단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1차대전 이후의 독일 군사사상가들은 현대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작전’의 수단을 ‘전략’에 까지 확대 적용한 결과 철저한 패배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폴리의 연구는 풍부한 자료에 근거해 새롭고 흥미로운 주장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전후한 시기 독일의 군사사상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기동전’과 ‘섬멸전’에만 주목한 나머지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소모전’에 대해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1차대전 당시 팔켄하인의 전략이 단순히 팔켄하인 개인의 돌출적인 산물이 아니라 19세기 말 이후의 군사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팔켄하인의 군사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고찰이 부족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잡담 하나. 독일 군사사상의 발전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싶으신 분은 시티노(Robert M. Citino)의 The German Way of War: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를 추천합니다.
시티노의 저작들에 대해서는 채승병님이 쓰신 ‘전격전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2009년 4월 29일 수요일
간만에 모형을 만졌습니다.
어제 원고를 마감해서 넘겼습니다. 한동안 스트레스를 주던 물건을 처리하니 마음이 홀가분해 지더군요. 오늘은 책을 읽고 예전에 만들어 둔 모형들을 칠했습니다.
사진으로 찍으니 실제 색 보다는 좀 밝게 나온 것 같군요. AFV클럽에서 발매한 이 티거 I 후기형은 만들때 전차장 큐폴라의 손잡이를 날려 먹어서 대충 비슷한 다른 손잡이 부품을 붙여 버렸습니다. 이것은 505중전차대대 형식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궤도가 말랑말랑한게 한편으론 좋지만 다른 한편으론 좀 불안하더군요. 그냥 타미야처럼 반조립식으로 된 궤도를 넣어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타미야 티거 I은 세트로 3호전차 N형을 같이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 말고 예전에 윤민혁님이 주신 티거도 한 대 있는데 그것은 다른 3호전차와 함께 503중전차대대로 만들 계획입니다.
이 4호전차는 티거 두대를 칠하고 남은 걸로 칠했습니다. 사실 장포신 4호전차 보다는 단포신을 선호하는데 당분간 제품으로 나오기는 어려울 듯 싶으니 이정도로 만족해야 겠습니다.
손재주가 없어서 잘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만드는 재미는 정말 쏠쏠합니다.
사진으로 찍으니 실제 색 보다는 좀 밝게 나온 것 같군요. AFV클럽에서 발매한 이 티거 I 후기형은 만들때 전차장 큐폴라의 손잡이를 날려 먹어서 대충 비슷한 다른 손잡이 부품을 붙여 버렸습니다. 이것은 505중전차대대 형식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궤도가 말랑말랑한게 한편으론 좋지만 다른 한편으론 좀 불안하더군요. 그냥 타미야처럼 반조립식으로 된 궤도를 넣어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타미야 티거 I은 세트로 3호전차 N형을 같이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 말고 예전에 윤민혁님이 주신 티거도 한 대 있는데 그것은 다른 3호전차와 함께 503중전차대대로 만들 계획입니다.
이 4호전차는 티거 두대를 칠하고 남은 걸로 칠했습니다. 사실 장포신 4호전차 보다는 단포신을 선호하는데 당분간 제품으로 나오기는 어려울 듯 싶으니 이정도로 만족해야 겠습니다.
손재주가 없어서 잘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만드는 재미는 정말 쏠쏠합니다.
2009년 4월 26일 일요일
만약 한국에 거대한 화교 공동체가 존속하고 있었다면?
요 며칠간 이글루스를 뜨겁게 달군 '전라도 떡밥'을 보니 지역감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청년층이라 하더라고 그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긴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연히도 지역감정 문제가 잠깐 언급되었습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만약 다른 민족집단이 상당한 규모로 존재할 경우에도 전라도 차별이 심했을까 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친구 중 한명이 지적하기를, 다민족 사회의 경우 사회 내부의 갈등을 가장 만만한 소수집단에 발산하곤 하는데 남한에서는 그것이 전라도가 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렇다면 전라도 대신 두들겨 팰 더 만만한 대상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야기를 나누던 모두가 그렇다면 상당한 규모의 화교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면 화교가 그 역할을 했을 것 같다는데 동의했습니다.
물론 화교 사회가 상당한 규모를 유지했다면 그 특성상 경제적으로도 영향력을 확보했을 테니 전라도 차별과는 다른 양상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것 입니다. 사실 한국의 전라도 차별은 흑인차별에 가깝고 동남아시아의 화교는 유태인에 가깝죠. 물론 경제적으로 별 볼일 없는 오늘날의 화교는 흑인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만.
요즘은 외국인 이주자에 대해 적개심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뭐, 저도 외국인 이주자들이 별로 반가운 입장은 아닙니다만 적개심까지 불태울 필요는 있는가 싶더군요. 전라도를 대체할 새로운 샌드백이 등장한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연히도 지역감정 문제가 잠깐 언급되었습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만약 다른 민족집단이 상당한 규모로 존재할 경우에도 전라도 차별이 심했을까 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친구 중 한명이 지적하기를, 다민족 사회의 경우 사회 내부의 갈등을 가장 만만한 소수집단에 발산하곤 하는데 남한에서는 그것이 전라도가 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렇다면 전라도 대신 두들겨 팰 더 만만한 대상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야기를 나누던 모두가 그렇다면 상당한 규모의 화교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면 화교가 그 역할을 했을 것 같다는데 동의했습니다.
물론 화교 사회가 상당한 규모를 유지했다면 그 특성상 경제적으로도 영향력을 확보했을 테니 전라도 차별과는 다른 양상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것 입니다. 사실 한국의 전라도 차별은 흑인차별에 가깝고 동남아시아의 화교는 유태인에 가깝죠. 물론 경제적으로 별 볼일 없는 오늘날의 화교는 흑인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만.
요즘은 외국인 이주자에 대해 적개심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뭐, 저도 외국인 이주자들이 별로 반가운 입장은 아닙니다만 적개심까지 불태울 필요는 있는가 싶더군요. 전라도를 대체할 새로운 샌드백이 등장한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2009년 4월 25일 토요일
기술의 진보
예전에 읽었던 책의 서문에서…
사실 웃길 것도 없는 내용인데 이상하게 웃기더군요;;;; 80년대 중반의 39메가바이트라면 확실히 엄청난 용량인데 이걸 21세기에 읽자니;;;;
전자제품과 관련된 기술의 발전은 정말 눈에 확 띄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기술의 발전 정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기술이라서 실제로 와 닫는 정도가 높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처음 구상하게 된 것은 대략 7~8년전(1986~87년) 이 책의 공동 저자 중 한 명과 매릴랜드 베데스다(Bethesda) 소재 육군 개념분석국(Concepts Analysis Agency) 국장이었던 밴다이버 3세(Edward B. Vandiver III)와 나눈 대화가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그때까지 육군에서 기획(planning) 및 예산편성(budgeting)을 위해 사용되던 컴퓨터 전투 모델 중에서 실증된(validated) 것이 없다는 점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모델은 실제 세계의 경험을 안정적으로 모사할 수 있어야 ‘실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증되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모델을 활용한 계획이나 예측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에드 밴다이버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모델에 입력할 현대 제병협동전투에 대한 역사적인 세부적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 입니다.”
그는 오늘날 사용할 모델이 묘사할 미래의 전쟁에는 대량의 전차가 투입될 것이기 때문에 (데이터를 확보할 대상으로는) 많은 수의 전차가 투입된 전투를 선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만약 중동에서 벌어진 1973년 10월 전쟁의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이스라엘, 이집트, 시리아의 데이터를 입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도 동의했다.
“그렇다면 벌지전투는 어때요?”
공동저자 중 한 명이 물었다. 밴다이버는 그것이 좋은 구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밴다이버는 그날의 대화에 대해 잊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의 사무실로 돌아가 제안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짧게 말하자면, 몇 달 뒤 이 제안서는 밴다이버에게 보내졌고 승인되었으며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우리 회사는 나중에 공식적으로 “아르덴느 전역 시뮬레이션 데이터 베이스(The Ardennes Campaign Simulation Date Base)” 약자로 ACSDB로 알려진 작업에 들어갔다. 2년 뒤 ACSDB는 공식적으로 밴다이버의 개념분석국에 납품되었다.
ACSDB는 약 39메가바이트의 데이터가 포함된 엄청난(massive) 컴퓨터 프로그램이었다.
여기에는 1944년 12월 16일에서 1945년 1월 16일의 32일에 걸친 기간 동안 약 100개의 부대에 대한 매일 매일의 세부적인 정보가 담겨 있었다. 포함된 부대는 1개의 독일군 집단군, 4개의 독일군 야전군, 8개의 독일군 군단, 35개의 독일군 사단, 3개의 독일군 여단과 그외의 소규모 부대, 2개의 연합군 집단군, 2개의 미국 야전군, 6개의 미군 군단, 42개의 미군 사단, 미군의 소규모 부대, 1개의 영국군 군단, 2개의 영국군 사단, 2개의 영국군 여단, 독일공군 부대, 영국공군부대, 미국 육군항공대 부대가 포함되었다.
Trevor N. Dupuy, David L. Bongard and Richard C. Anderson. Jr, Hitler’s last gamble : The battle of the bulge, December 1944-January 1945, Harper Perennial, 1994/1995, pp.xv-xvi
사실 웃길 것도 없는 내용인데 이상하게 웃기더군요;;;; 80년대 중반의 39메가바이트라면 확실히 엄청난 용량인데 이걸 21세기에 읽자니;;;;
전자제품과 관련된 기술의 발전은 정말 눈에 확 띄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기술의 발전 정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기술이라서 실제로 와 닫는 정도가 높은지도 모르겠습니다.
2009년 4월 24일 금요일
1942년 8월 28일, 스탈린그라드의 대공황
마이클 존스(Michael K. Jones)의 Stalingrad는 참전자들의 증언을 통해 전투의 진행과정을 따라가는 내용입니다. 개개인의 체험을 통해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은 군사작전을 중심으로 내용을 건조하게 서술하는 것에 비해 훨씬 재미있게 읽힙니다.(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작전 중심의 딱딱한 내용을 선호하긴 합니다만) 내용은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되어 독일군의 공세를 격퇴한 62군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시기도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해 오던 1942년 8월부터 독일군이 시가지에 대한 최후의 공세를 펼친 11월 중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반격작전 이후의 내용은 에필로그 형식으로 짧게 서술되어 있는데 저자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소련군이 독일군의 포위 공세에 대한 공황상태에서 벗어나 조직적인 반격능력을 되찾아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개인 체험 위주의 서술이어서 소련 시절에는 검열 등의 문제로 논의 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는 점은 큰 장점입니다. 전장에서의 비겁행위라던가 독일군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이 체험자들의 경험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그만큼 잘 와 닫는다고 할 수 있지요.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해오던 1942년 8월 말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벌어진 대규모 공황사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전쟁 이야기에서 제 관심을 가장 끄는 것은 이러한 집단 공황상태입니다. 통제 불가능한 혼란 상태에서 표출되는 인간의 다양한 본성은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 입니다.
물론 제3자의 입장에서.
제가 당사자가 된다면 그건 진짜 고역이겠죠. 그런 사태를 제 생전에 겪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이것과 비슷하게 1945년 독일이 붕괴될 무렵 동부 독일의 이야기나 1975년 베트남 붕괴시의 이야기도 많은 관심을 끕니다. 요즘도 가끔씩 읽는 안병찬 기자의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 같은 책은 전체 내용이 이런 혼란으로 가득 차 있지요.
개인 체험 위주의 서술이어서 소련 시절에는 검열 등의 문제로 논의 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는 점은 큰 장점입니다. 전장에서의 비겁행위라던가 독일군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이 체험자들의 경험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그만큼 잘 와 닫는다고 할 수 있지요.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해오던 1942년 8월 말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벌어진 대규모 공황사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1942년 8월 28일, 전후 모든 소련의 역사서술에서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던 일이 일어났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대규모의 피난이 시작된 것이었다. 세르게이 자차로프는 당시 시내의 레닌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독일군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병원의 기능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유지되었다. 그런데 8월 28일에 매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간호사도 없었고 의사도 없었다.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다. 병원 원장이 우리를 돌봐주기 위해서 나타났다. 그가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병원의 직원들이 모두 떠났습니다. 모두 도망쳤습니다.’
우리는 병원 바깥의 불안한 움직임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창가 쪽으로 갔다. 우리는 엄청난 혼란을 목격했다. 모두가 공포에 빠져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집단적인 광란에 빠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상점과 건물들에 들어가 물건을 약탈했다. 모두가 소리를 질렀다. ‘도데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그리고 여기에 대한 답변이 돌아왔다. ‘도시가 텅 비었어’, ‘ 공무원들이 모두 사라졌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독일놈들이 온다!’
우리는 창 밖으로 계속해서 펼쳐지는 장면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갑자기 엄청난 힘이 밀려왔다. 모든 사람들이 가능한 모든 운송수단을 찾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가족이 말 한마리가 끄는 수레에 가재도구를 싣고 거리를 지나가던 장면을 기억한다. 모두가 스탈린그라드를 떠나고 있었다! 내가 속한 연대의 지휘관이 나타났다. 그가 말했다. ‘동무들을 병원에서 이송할 것이오! 이 도시는 포기되었소!’
우리는 움직일 수 있는 환자는 모두 불러모았다. 백 명 정도가 병원에서 나왔다. 우리는 시가지를 따라 볼가강 쪽으로 이동했다. 그때 갑자기 여러 대의, 아마도 열 다섯 대에서 스무 대 정도의 독일군 비행기가 나타났다. 독일 비행기들은 병원 쪽으로 가서 연속적으로 병원에 폭탄을 투하했다. 아마도 병원에 남아있던 환자 대부분이 죽었을 것이다. 우리는 폭격이 있기 직전에 빠져 나온 것 이었다.
내가 속한 일행은 순간 조용해 졌다. 기분 나쁜 침묵이 이어졌다. 모두가 기력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밤이 되어야 볼가강을 도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의 지휘관 알렉세이는 우리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제군들, 보급품을 구해야 겠네’ 버려진지 얼마 되지 않은 민간인의 아파트나 주택에서 식량을 가져 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우리는 일반 상점으로 갔다. 상점들은 모두 문이 열린 채 방치되어 있었고 과자, 꿀, 빵, 소시지 같은 각종 식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식량을 구한 뒤 강변으로 다시 집합했다.
우리는 오후 내내 강을 건너기를 기다리다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트랙터 공장의 노동자들이 긴급회의를 가진 뒤 스탈린그라드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탱크 생산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단호한 결심을 내린 일부의 시민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망치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를 버리는 것을 거부하고 지하실이나 방공호로 들어갔다.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다. 집단적인 공황이 단호한 저항 의지로 바뀌었다.
스탈린그라드는 살아 남았다.”
발렌티나 크루토바는 이 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상점들은 그냥 열린 상태로 방치되었고 수천명의 사람들은 갈 수 있는 모든 방향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남았다. 우리는 여전히 스탈린그라드가 포위를 면할 수 있을 것 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대규모의 피난 사태를 촉발한 것은 스탈린그라드 경찰과 민병대가 갑자기 시내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Michael K. Jones, Stalingrad : How the Red Army Survived the German Onslaught, Casemate, 2007, pp.59~61
전쟁 이야기에서 제 관심을 가장 끄는 것은 이러한 집단 공황상태입니다. 통제 불가능한 혼란 상태에서 표출되는 인간의 다양한 본성은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 입니다.
물론 제3자의 입장에서.
제가 당사자가 된다면 그건 진짜 고역이겠죠. 그런 사태를 제 생전에 겪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이것과 비슷하게 1945년 독일이 붕괴될 무렵 동부 독일의 이야기나 1975년 베트남 붕괴시의 이야기도 많은 관심을 끕니다. 요즘도 가끔씩 읽는 안병찬 기자의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 같은 책은 전체 내용이 이런 혼란으로 가득 차 있지요.
너무 노골적이잖아!
일하다가 잠시 인터넷을 하는 중인데 이런 재미있는 사설을 봤습니다.
[사설]읽기 문화와 신문 발전, 민주주의 기반이다
그래도 제법 긴 역사를 자랑하는 보수 일간지인데 사설 치고는 너무 천박하군요;;;; 대놓고 배고프다고 악을 쓰는게 안스럽니다.
먹고 살기 힘든건 알겠지만 정론지 행세를 하려거든 그래도 품위를 지켜야지요. 그게 싫으면 그냥 정식 옐로페이퍼로 나가던가.
일 때문에 피곤해서 머리도 멍~한데 이런 사설을 읽으니 정말 안드로메다가 눈 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설]읽기 문화와 신문 발전, 민주주의 기반이다
그래도 제법 긴 역사를 자랑하는 보수 일간지인데 사설 치고는 너무 천박하군요;;;; 대놓고 배고프다고 악을 쓰는게 안스럽니다.
먹고 살기 힘든건 알겠지만 정론지 행세를 하려거든 그래도 품위를 지켜야지요. 그게 싫으면 그냥 정식 옐로페이퍼로 나가던가.
일 때문에 피곤해서 머리도 멍~한데 이런 사설을 읽으니 정말 안드로메다가 눈 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2009년 4월 21일 화요일
타블렛을 샀습니다.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불만
요즘 읽는 책 중에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 1870~1916이 있습니다. 독일의 군사상에서 다소 특이한 위치에 있는 소모전 전략의 등장과 퇴조를 다룬 연구인데 팔켄하인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이 재미있군요.
그리고 역시 두 세계대전을 다루는 연구 답게 2차대전 말기 연합군의 폭격으로 소실된 독일 사료의 문제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불만 중 하나가 1945년의 포츠담 폭격으로 이곳에 소장 중이던 프로이센군 및 제3제국기 독일육군의 1차사료들이 대량으로 유실되었다는 점 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폭격에서 살아남은 문서들은 소련군이 수집해 갔고 이것들은 1988년 고르바초프 정권기에 동독정부에 반환되었다는 정도 입니다. 소련이 문서를 반환한 뒤 1차대전과 관련된 새로운 연구가 여럿 발표되었지요.
육군 뿐 아니라 공군의 경우도 전쟁 말기 문서가 대량으로 파기되어 골치아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에 대한 언급을 처음 접한 것은 코럼(James Corum)의 독일 공군 창설기에 대한 연구 였는데 읽는 입장에서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군의 경우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기 때문에 독일군에 비해서 훨씬 미시적인 부분까지도 서술이 가능합니다. 대대 단위의 전투일지를 종합해 일일 전투식량 재고량까지 파악할 수 있으니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가 지적한 것 처럼 미군은 자료가 많아 문제고 독일군은 자료가 적어 문제라는 말이 허언은 아닙니다.
군사사에 많은 관심을 가진 입장인지라 자료의 소실을 아쉬워하는 연구자들의 한탄을 읽을 때 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독일인들이 마이크로 필름 사본이라도 만들어서 별도로 보관했다면 전쟁통에 중요한 사료들이 완전히 소실되는 참사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도 하지요.
쿠르스크 전투와 관련해서 소련군이 프로호로브카 전투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 이유도 전투에 참여한 무장친위대의 일지가 1980년대 까지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찾아보면 1차대전의 경우도 비슷한 문제가 있을 것 입니다.
잡담을 조금 더 하자면.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인데 한국전쟁 초기에 서울이 순식간에 함락되다 보니 국방부의 주요 문서들을 이송하지 못한 채 상당수를 잃어 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결국 빈 공백을 미국 군사고문단의 문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데 그럴 때 마다 우리가 남긴 기록이 단 한 장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선엽 장군도 한국전쟁 당시 우리가 남긴 기록이 너무 없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한 일이 있지요.
조지 오웰이 남긴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은 정말 핵심을 찌르는 것 같습니다. 미군 기록에 많이 의존하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정말 미국의 시각으로만 문제를 바라보게 되더군요. 그럴때는 정말 식은 땀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역시 두 세계대전을 다루는 연구 답게 2차대전 말기 연합군의 폭격으로 소실된 독일 사료의 문제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불만 중 하나가 1945년의 포츠담 폭격으로 이곳에 소장 중이던 프로이센군 및 제3제국기 독일육군의 1차사료들이 대량으로 유실되었다는 점 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폭격에서 살아남은 문서들은 소련군이 수집해 갔고 이것들은 1988년 고르바초프 정권기에 동독정부에 반환되었다는 정도 입니다. 소련이 문서를 반환한 뒤 1차대전과 관련된 새로운 연구가 여럿 발표되었지요.
육군 뿐 아니라 공군의 경우도 전쟁 말기 문서가 대량으로 파기되어 골치아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에 대한 언급을 처음 접한 것은 코럼(James Corum)의 독일 공군 창설기에 대한 연구 였는데 읽는 입장에서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군의 경우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기 때문에 독일군에 비해서 훨씬 미시적인 부분까지도 서술이 가능합니다. 대대 단위의 전투일지를 종합해 일일 전투식량 재고량까지 파악할 수 있으니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가 지적한 것 처럼 미군은 자료가 많아 문제고 독일군은 자료가 적어 문제라는 말이 허언은 아닙니다.
군사사에 많은 관심을 가진 입장인지라 자료의 소실을 아쉬워하는 연구자들의 한탄을 읽을 때 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독일인들이 마이크로 필름 사본이라도 만들어서 별도로 보관했다면 전쟁통에 중요한 사료들이 완전히 소실되는 참사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도 하지요.
쿠르스크 전투와 관련해서 소련군이 프로호로브카 전투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 이유도 전투에 참여한 무장친위대의 일지가 1980년대 까지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찾아보면 1차대전의 경우도 비슷한 문제가 있을 것 입니다.
잡담을 조금 더 하자면.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인데 한국전쟁 초기에 서울이 순식간에 함락되다 보니 국방부의 주요 문서들을 이송하지 못한 채 상당수를 잃어 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결국 빈 공백을 미국 군사고문단의 문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데 그럴 때 마다 우리가 남긴 기록이 단 한 장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선엽 장군도 한국전쟁 당시 우리가 남긴 기록이 너무 없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한 일이 있지요.
조지 오웰이 남긴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은 정말 핵심을 찌르는 것 같습니다. 미군 기록에 많이 의존하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정말 미국의 시각으로만 문제를 바라보게 되더군요. 그럴때는 정말 식은 땀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2009년 4월 18일 토요일
책을 읽던 중 떠오른 민족주의에 대한 잡상
어제 낮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50~60년대 경제개발에 대한 책 몇권을 꺼내 놓고 두서없이 읽었습니다. 원고마감이 코앞에 닥쳤는데 이게 무슨 미친짓 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근로의욕이 뚝 떨어졌는지라 어쩔 수 없더군요. 다행히 오후 늦게 근로의욕을 회복하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어제 오후에 읽던 책들은 내용이 내용인지라 50~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될 무렵 한국의 민족주의적 정치세력과 미국의 대한정책이 가지는 시각차이에 대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1950년대의 미국은 아시아에서 높아져 가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사회주의화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이때문에 4.19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미심쩍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민족주의적 성향은 5.16 쿠데타 주도세력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이야 박정희의 독재적 측면이 부각되어 일반적으로는 5.16 쿠데타가 가진 민족주의적 성향을 간과하는 분들이 많은데 60년대에는 그렇지가 않았지요.
결국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이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으로의 선회한데에는 미국의 정책적인 압력이 많이 작용했습니다. 사실 미국의 원조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이 무리하게 내포적 공업화를 추진했다면 북한이 70년대 부터 겪었던 경제적 파탄을 조기에 겪고 남한의 국가 자체가 붕괴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여튼 40~60년대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우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그런데 어제 오후에 읽던 책들은 내용이 내용인지라 50~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될 무렵 한국의 민족주의적 정치세력과 미국의 대한정책이 가지는 시각차이에 대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1950년대의 미국은 아시아에서 높아져 가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사회주의화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이때문에 4.19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미심쩍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민족주의적 성향은 5.16 쿠데타 주도세력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이야 박정희의 독재적 측면이 부각되어 일반적으로는 5.16 쿠데타가 가진 민족주의적 성향을 간과하는 분들이 많은데 60년대에는 그렇지가 않았지요.
결국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이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으로의 선회한데에는 미국의 정책적인 압력이 많이 작용했습니다. 사실 미국의 원조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이 무리하게 내포적 공업화를 추진했다면 북한이 70년대 부터 겪었던 경제적 파탄을 조기에 겪고 남한의 국가 자체가 붕괴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여튼 40~60년대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우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2009년 4월 16일 목요일
별로 좋지 않다
연합뉴스를 보다 보니 찝찝한 소식이 하나 눈에 들어오는 군요.
李대통령 "한국경제, 긴 터널의 중간쯤"
눈꼽만큼 좋은 일이 있어도 호들갑 떨기 좋아하는 가카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면 앞으로도 짜증나는 일이 많을 듯 싶군요. 약간 면피성 발언으로 들립니다.
李대통령 "한국경제, 긴 터널의 중간쯤"
눈꼽만큼 좋은 일이 있어도 호들갑 떨기 좋아하는 가카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면 앞으로도 짜증나는 일이 많을 듯 싶군요. 약간 면피성 발언으로 들립니다.
2009년 4월 13일 월요일
부족사회의 폭력성
漁夫님께서 뉴기니의 어떤 부족 촌장들이 새로운 문명을 접한뒤 보여준 놀라운 창의력에 대해 글을 써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댓글도 많았는데 그 중에서 漁夫님의 답변 하나가 눈에 쏙 들어오더군요.
예.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漁夫님이 말씀하신 대로 부족사회의 폭력 정도는 현대 사회 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전에 한 번 간략하게 내용을 소개했었던 킨리(Lawrence H. Keeley)의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라는 책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킨리의 연구에 따르면 야노마뫼(Ya̧nomamö) 족의 경우 전쟁시 남성의 사망률이 전체 남성의 37%에 달하고 에콰도르 등에 거주하는 히바로(Jivaro) 족의 경우 59%라고 합니다. 반면 1차대전과 2차대전을 통틀어 유럽과 미국의 남성 사망률은 전체 남성의 1%를 조금 넘는 수준이라고 하지요. 전체 인구집단의 규모나 전쟁 방식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높은 사망률인 것은 사실입니다.
킨리가 책 전체에 걸쳐 주장하듯 평화로운 야만(Peaceful Savage) 같은 것은 상상속에나 존재하는 것이죠.
예.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漁夫님이 말씀하신 대로 부족사회의 폭력 정도는 현대 사회 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전에 한 번 간략하게 내용을 소개했었던 킨리(Lawrence H. Keeley)의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라는 책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킨리의 연구에 따르면 야노마뫼(Ya̧nomamö) 족의 경우 전쟁시 남성의 사망률이 전체 남성의 37%에 달하고 에콰도르 등에 거주하는 히바로(Jivaro) 족의 경우 59%라고 합니다. 반면 1차대전과 2차대전을 통틀어 유럽과 미국의 남성 사망률은 전체 남성의 1%를 조금 넘는 수준이라고 하지요. 전체 인구집단의 규모나 전쟁 방식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높은 사망률인 것은 사실입니다.
킨리가 책 전체에 걸쳐 주장하듯 평화로운 야만(Peaceful Savage) 같은 것은 상상속에나 존재하는 것이죠.
목수정과 일부 진보신당 당원의 주장은 왜 불편하게 들리는가
목수정 사태(?!)가 예상외로 장기화 되고 있습니다. 그 발단은 3월 23일에 진보신당 당원인 목수정이 ‘레디앙’에 올린 정명훈에 대한 비난 기사였으니 이미 20일 째로군요. 이번 사태가 장기화 된 데에는 진보신당 당원이나 진보성향의 블로거들이 꾸준히 목수정의 변론에 나선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국립오페라합창단’이 아닌 ‘목수정에 대한 변론’이 이 정도로 질질 끌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참 신기한 일 입니다.
이번 사태는 정명훈의 공식적인 반론이 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목수정의 3월 23일 기사만을 가지고 이야기 해야 합니다. 앞으로도 정명훈이 반론을 제기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판단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은 목수정의 ‘지극히 주관적인’ 기사 뿐이고 그에 대해 판단할 제 3자들은 그 ‘지극히 주관적인 기사’에서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 만을 뽑아내어 판단해야 할 것 입니다.
목수정의 3월 23일 기사에서 알아낼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은 이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1. 2009년 3월 20일, 목수정은 국립오페라합창단원들의 복직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기 위해서 정명훈을 만났다.
2. 정명훈은 목수정의 요청을 거부했다.
목수정의 기사에는 정명훈이 엄청난 폭언과 모욕을 가한 것 처럼 되어 있으나 목수정의 일방적인 주장 뿐이니 그대로 믿긴 어렵습니다. 목수정에 대한 일부 변론자들은 ‘정명훈의 폭언’을 언급하면서 목수정의 과격한 반응을 옹호하고 있는데 목수정의 일방적인 주장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제3자를 납득시키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A가 한 말이 B를 통해 어떻게 왜곡되어 전달되는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목수정의 주장을 교차검증 할 방법이 없는 이상 목수정의 기사에 나타난 ‘정명훈의 폭언’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조금 더 합리적일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수정의 기사’에 실린 정명훈에 대한 내용만을 가지고 목수정의 행동을 변호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진보신당 내부에서 목수정을 옹호하는 당원들을 결집시키기에는 충분한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진보신당이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고 말 그대로 서민을 위한 대중정당을 지향한다면 이런 자폐적인 태도는 버리는 것이 좋을 것 입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사태 전개를 봐서는 목수정을 옹호하는 진보신당 지지자들이 그럴 생각이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대략 20일 동안 사태의 전개를 지켜본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평가한다면 목수정과 진보신당 지지자들은 대중의 지지를 잃고 거부감만 일으킨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국립오페라합창단원들의 복직 문제는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으니 원래 목수정이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목수정과 그를 변호하는 진보신당 지지자들이 국립오페라합창단원들의 복직을 지원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목수정은 기사 하나를 정명훈에 대한 비난에 할애했기 때문에 정작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던 국립오페라합창단원의 복직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애초에 좋은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들의 행동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은 다른 문제겠지요. 왜 온라인 진보들의 대중을 향한 외침은 정작 그 대상인 대중들에게 불편하게 들릴까요?
목수정 사태를 계기로 많은 분들이 그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capcold님의 경우 이것을 ‘지사정신’이라는 단어로 설명하셨고 sonnet님은 ‘길거리 전도에 나선 종교인’의 예를 들어 설명하셨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sonnet님의 종교인에 대한 비유가 흥미롭습니다.
재미있게도 목수정을 변론하는 블로거들은 약자의 ‘연대’를 강조하면서 목수정의 글을 비판하는 제 3자도 언젠가는 ‘자본’의 희생양이 되어 ‘연대’를 필요로 하는 약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동시에 지금 ‘연대’ 하지 않으면 훗날 누가 당신을 위해 ‘연대’에 참여하겠느냐는 위협으로 들립니다. 이것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지옥의 유황불’ 이야기를 하면서 신앙을 강요하는 길거리 전도사의 태도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상대가 바보라면 모를까, 공공연히 ‘공포’를 조장하는데 누가 기분 좋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목수정의 태도도 매우 우려 스럽습니다. 인터넷 언론의 ‘기사’라는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목수정의 기사는 정명훈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길거리 전도사가 자신의 신앙을 거부하는 다른 종교 신도를 저주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목수정의 글을 읽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할 것 입니다. 훗날 ‘연대’를 필요로 하게 될 사람도 있겠지만 ‘연대’의 필요성이 거의 없는 사회적 강자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런 불특정 다수를 향해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방법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연대’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사람이라도 대놓고 협박하면 듣기 싫을 것이고 ‘연대’가 필요 없는 사람은 속으로 비웃겠지요.
현재의 진보신당 지지자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소통방식이 필요합니다. 진보신당 내부의 논리는 진보신당 내부에서나 통할 뿐 입니다.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싶다면 진보신당 외부의 제 3자도 동의할 수 있는 논리와 소통방법을 강구해야 겠지요. 목수정에 대한 비판에 대해 비판자들이 잘못됐다는 방식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왜 비판자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목수정과 그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좁은 의미의 ‘사회적 연대’를 목표로 하는 것 이라면 그들의 전술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넓은 ‘사회적 연대’를 필요로 한다면 자신들만의 소통방식이 아닌 조금 더 광범위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소통방식을 강구해야 할 것 입니다. 길거리 전도사들이 1년 365일 지옥의 공포를 조장하며 돌아다니고 있지만 왜 호응이 낮은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활동이라고 별 다를거 있겠습니까.
이번 사태는 정명훈의 공식적인 반론이 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목수정의 3월 23일 기사만을 가지고 이야기 해야 합니다. 앞으로도 정명훈이 반론을 제기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판단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은 목수정의 ‘지극히 주관적인’ 기사 뿐이고 그에 대해 판단할 제 3자들은 그 ‘지극히 주관적인 기사’에서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 만을 뽑아내어 판단해야 할 것 입니다.
목수정의 3월 23일 기사에서 알아낼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은 이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1. 2009년 3월 20일, 목수정은 국립오페라합창단원들의 복직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기 위해서 정명훈을 만났다.
2. 정명훈은 목수정의 요청을 거부했다.
목수정의 기사에는 정명훈이 엄청난 폭언과 모욕을 가한 것 처럼 되어 있으나 목수정의 일방적인 주장 뿐이니 그대로 믿긴 어렵습니다. 목수정에 대한 일부 변론자들은 ‘정명훈의 폭언’을 언급하면서 목수정의 과격한 반응을 옹호하고 있는데 목수정의 일방적인 주장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제3자를 납득시키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A가 한 말이 B를 통해 어떻게 왜곡되어 전달되는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목수정의 주장을 교차검증 할 방법이 없는 이상 목수정의 기사에 나타난 ‘정명훈의 폭언’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조금 더 합리적일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수정의 기사’에 실린 정명훈에 대한 내용만을 가지고 목수정의 행동을 변호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진보신당 내부에서 목수정을 옹호하는 당원들을 결집시키기에는 충분한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진보신당이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고 말 그대로 서민을 위한 대중정당을 지향한다면 이런 자폐적인 태도는 버리는 것이 좋을 것 입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사태 전개를 봐서는 목수정을 옹호하는 진보신당 지지자들이 그럴 생각이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대략 20일 동안 사태의 전개를 지켜본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평가한다면 목수정과 진보신당 지지자들은 대중의 지지를 잃고 거부감만 일으킨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국립오페라합창단원들의 복직 문제는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으니 원래 목수정이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목수정과 그를 변호하는 진보신당 지지자들이 국립오페라합창단원들의 복직을 지원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목수정은 기사 하나를 정명훈에 대한 비난에 할애했기 때문에 정작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던 국립오페라합창단원의 복직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애초에 좋은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들의 행동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은 다른 문제겠지요. 왜 온라인 진보들의 대중을 향한 외침은 정작 그 대상인 대중들에게 불편하게 들릴까요?
목수정 사태를 계기로 많은 분들이 그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capcold님의 경우 이것을 ‘지사정신’이라는 단어로 설명하셨고 sonnet님은 ‘길거리 전도에 나선 종교인’의 예를 들어 설명하셨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sonnet님의 종교인에 대한 비유가 흥미롭습니다.
재미있게도 목수정을 변론하는 블로거들은 약자의 ‘연대’를 강조하면서 목수정의 글을 비판하는 제 3자도 언젠가는 ‘자본’의 희생양이 되어 ‘연대’를 필요로 하는 약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동시에 지금 ‘연대’ 하지 않으면 훗날 누가 당신을 위해 ‘연대’에 참여하겠느냐는 위협으로 들립니다. 이것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지옥의 유황불’ 이야기를 하면서 신앙을 강요하는 길거리 전도사의 태도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상대가 바보라면 모를까, 공공연히 ‘공포’를 조장하는데 누가 기분 좋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목수정의 태도도 매우 우려 스럽습니다. 인터넷 언론의 ‘기사’라는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목수정의 기사는 정명훈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길거리 전도사가 자신의 신앙을 거부하는 다른 종교 신도를 저주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목수정의 글을 읽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할 것 입니다. 훗날 ‘연대’를 필요로 하게 될 사람도 있겠지만 ‘연대’의 필요성이 거의 없는 사회적 강자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런 불특정 다수를 향해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방법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연대’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사람이라도 대놓고 협박하면 듣기 싫을 것이고 ‘연대’가 필요 없는 사람은 속으로 비웃겠지요.
현재의 진보신당 지지자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소통방식이 필요합니다. 진보신당 내부의 논리는 진보신당 내부에서나 통할 뿐 입니다.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싶다면 진보신당 외부의 제 3자도 동의할 수 있는 논리와 소통방법을 강구해야 겠지요. 목수정에 대한 비판에 대해 비판자들이 잘못됐다는 방식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왜 비판자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목수정과 그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좁은 의미의 ‘사회적 연대’를 목표로 하는 것 이라면 그들의 전술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넓은 ‘사회적 연대’를 필요로 한다면 자신들만의 소통방식이 아닌 조금 더 광범위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소통방식을 강구해야 할 것 입니다. 길거리 전도사들이 1년 365일 지옥의 공포를 조장하며 돌아다니고 있지만 왜 호응이 낮은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활동이라고 별 다를거 있겠습니까.
2009년 4월 9일 목요일
승리의 셔먼! 승리의 셔먼!
재미있는 이야기가 몇 가지 있어서 글로 쓰려는데 잘 안 써지는군 요;;;; 땜빵 포스팅 하나를 올립니다.
Steven Zaloga의 Armored Thunderbolt 부록에는 2차대전 중 서유럽 전역에서 미군이 상실한 셔먼 전차의 대수와 손실율이 실려있씁니다. 꽤 재미있어서 표를 만들어 올려봅니다.
역시 압권인 것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증가하는 전체 대수입니다. 손실 대수 대 손실율은 이 점을 잘 보여주는데 1944년 8월에는 셔먼 557대 손실에 손실율 21.8%인데 1945년 1월에는 이보다 더 많은 585대를 잃고도 손실율은 12.8%로 훨씬 낮습니다;;;;
아무리 쳐부숴도 꾸역꾸역 밀려드는 셔먼의 대군이 떠오릅니다;;;;
할 말은 그저 이것 뿐.
승리의 셔먼! 승리의 셔먼!
그리고 상대를 잘못 만난 총통께 다시한번 위로를.
Steven Zaloga의 Armored Thunderbolt 부록에는 2차대전 중 서유럽 전역에서 미군이 상실한 셔먼 전차의 대수와 손실율이 실려있씁니다. 꽤 재미있어서 표를 만들어 올려봅니다.
역시 압권인 것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증가하는 전체 대수입니다. 손실 대수 대 손실율은 이 점을 잘 보여주는데 1944년 8월에는 셔먼 557대 손실에 손실율 21.8%인데 1945년 1월에는 이보다 더 많은 585대를 잃고도 손실율은 12.8%로 훨씬 낮습니다;;;;
아무리 쳐부숴도 꾸역꾸역 밀려드는 셔먼의 대군이 떠오릅니다;;;;
할 말은 그저 이것 뿐.
그리고 상대를 잘못 만난 총통께 다시한번 위로를.
2009년 4월 5일 일요일
(밥 굶은) 아줌마의 힘!
노서아 천지에 소 잡는 소리와 돼지 멱 따는 소리가 진동하던 때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밥 굶은 아줌마는 정말 무섭습니다.
소련의 사회경제적 위기는 더욱 더 심화되어 갔으며 특히 농촌지역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정부의 무거운 징세에 억눌린 농민들은 굶어 죽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집단농장에서 달아났다. 1932년 상반기에 집단농장에 속한 가구의 숫자는 러시아공화국에서 137만800가구, 우크라이나에서는 4만1200가구로 줄어들었다. 농촌지역의 사회적 불안은 심각했다. 연방국가정치보안부(OGPU, Объединённое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е политическое управление)가 작성한 1931년 10월에서 1932년 3월 시기의 자료 중 일부에 따르면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카자흐스탄 공화국에서 총 616건의 폭동이 발생했으며 총 5만5400명이 폭동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가장 일반적으로 일어난 사건은 굶주린 농민들이 곡물의 강제 징발에 저항하고 정부의 곡물 저장소를 습격하는 것 이었다. 우크라이나 지역을 시찰하고 돌아온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의 간부 중 한 명이 인민위원협의회 의장 몰로토프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폴타바 부근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1932년 5월 3일 우스티노브치(Устиновцы)에서 여성 300여명 정도가 마을 인민위원장을 사로잡은 뒤 검은 깃발을 앞세우고 고골레보(Гоголево) 기차역으로 행진한 뒤 그곳의 창고 문을 때려 부쉈다. 처음에는 창고 관리인이 소화기를 뿌려 군중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여자들은 소화기를 뿌리자 유독한 가스라고 오인했다. 그러나 다음날 농민들은 다시 몰려들었다. 무장한 경찰과 정치보안부에서 파견한 인력이 혼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파견되었다. 창고에 있던 곡물들은 다음날 이송되었다.
그 다음날인 5월 5일, 챠스니코브카(Часниковка) 마을에서 출발한 비슷한 숫자의 여성들이 센챠(Сенча) 기차역의 창고를 습격해 밀가루 서른 일곱 자루를 가져갔다. 5월 6일에는 바로 전날의 성공에 크게 고무된 농민들이 기차역을 다시 습격해 150푸드(пуд, 약 2.5톤)의 밀을 털어갔다. 공산당원들은 허공에 총을 쏘며 농민들을 해산시키려 하다가 그냥 달아나 버렸다. 저녁 무렵이 되어 50명의 무장 경찰과 공산당원들이 기차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약 400명의 군중들이 역에 몰려들어 화물차의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5월 7일에는 기마 경찰과 무장한 공산당원들이 더 많은 농민들을 상대해야 했다.
5월 5일 에는 사가이닥(Сагаидак) 기차역에서 약 800명의 군중이 곡물창고를 지키고 있던 경찰 두 명과 마을 당원들을 습격해 창고 문을 열었다. 이들은 약 500푸드의 곡식을 빼앗아 이 중 400푸드를 현장에서 배분한 뒤 나머지 100푸드를 가지고 갔다. 5월 6일에는 리만(Лиман)과 페둔키 마을의 농민 400여명이 곡물을 약탈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비슷한 사건들이 전국 방방곳곳에서 일어났다.
Oleg V. Khlevniuk, Master of the House : Stalin and his inner circle, Yale University Press, 2009, pp.42~43
밥 굶은 아줌마는 정말 무섭습니다.
광명성 2호는 어떤 노래를 송신할까요?
오늘 북한이 인공위성 '광명성 2호'를 발사했다고 하지요. 현재 미국과 우리나라의 소식통들은 '광명성 1호'에 이어 '광명성 2호' 또한 궤도 진입에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뭐, 그러나 '광명성 1호' 때에도 그랬던 것 처럼 평양에서만은 '광명성 2호'의 신호가 포착될 것 입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광명성 1호'는 지구 궤도를 돌면서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김정일 장군의 노래'를 송신했다고 합니다. 북한 말고는 '광명성 1호'가 송신하는 노래를 들은 곳이 없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광명성 2호'는 어떤 노래를 송신할 예정이었을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이 노래일것 같습니다.
아니면 말고요.
그렇다면 '광명성 2호'는 어떤 노래를 송신할 예정이었을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이 노래일것 같습니다.
아니면 말고요.
2009년 4월 2일 목요일
Women, Armies, and Warfare in Early Modern Europe by John A. Lynn II
Women, armies, and warfare in Early Modern Europe
저자 : John A. Lynn II
출판사 :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7세기 중반까지 유럽 각국의 군대는 군병력 만큼이나 많은 수의 비전투원을 동반하고 움직였습니다. 규모가 큰 군대는 어지간한 대도시의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민간인을 달고 다녔다고 하니 재미있지요. 군대를 따라다니는 민간인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고 그 규모는 수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군대에 속한 여성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듭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저자인 린(John A. Lynn II)은 근대 초기 유럽군대에서 여성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절대왕정의 강화와 함께 군대가 상비군화 되어 가면서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근대 유럽의 군대의 성격과 군부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간인 집단, campaign community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근대 초기 유럽군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운영, 유지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집단이 형성되는 과정과 민간인 집단이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6~17세기의 유럽군대는 용병집단으로 구성되었고 보급의 대부분을 약탈에 의존했습니다. 직업군인인 용병들은 자신의 급여로 부양하는 가족들을 동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군대가 편성되면 군대의 규모와 비슷한 숫자의 민간인이 모여들었습니다. 또한 보급을 약탈에 의존하는 특성 때문에 상업적 이익, 또는 단순한 생존을 위해서 모여드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근대 초기의 유럽군대는 군사작전에 지장을 초래하는 대규모의 민간인 집단, 특히 많은 여성들을 포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장에서는 군대를 따른 여성들의 성격에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군대에 동반된 여성 집단을 크게 매춘부(Prostitutes), 애인(Whores : 이 글의 저자는 whore를 매춘부가 아니라 미혼이되 한 명의 남자를 따르는 여자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군인의 부인(Wives)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매춘부와 애인의 경우 17세기 중반까지 많은 수가 군대와 함께 생활했지만 용병군대가 점차 상비군화 되어 가면서 군 규율의 유지를 위해 제도적으로 추방되어 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군인의 부인들이 부업 차원에서 매춘에 나서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군인의 부인들 또한 점차 군대에서 추방되어갔고 많은 유럽군대는 군인의 결혼을 엄격히 통제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여성들이 전투와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해서 간략히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러 사례를 통해 군대와 함께 생활한 여성들은 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군대 외부의 여성들에 대한 가해자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3장에서는 여성들이 군대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남성이 하지 않는 ‘여성적인’ 일, 빨래와 바느질, 요리와 청소 등의 일을 수행했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부대 내의 상업과 수공업 등의 영역에 종사했으며 전투에서 일어나는 약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외에도 육체적으로 힘든 수송, 특히 군인들의 짐꾼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으며 공성전시 참호를 파는 사실상의 ‘공병’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근대 초기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한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군대와 함께 생활한 여성들은 민간 사회의 여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존재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군대의 상비군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체계적인 보급체계가 자리 잡아갔고 동시에 여성들이 수행하는 역할도 축소되어 갔습니다.
4장에서는 여성들의 실제 전투참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먼저 대중문화에서는 여성의 전투 참여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본 뒤 실제 여성의 전투 참가 사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17~18세기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남성에 비해 낮았고 여성이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가하는 것은 터부시 되었지만 대중문화에서 전투에 참여하는 여성은 흥미의 대상으로서 자주 다루어 졌습니다. 반면 실제 군대에서 여성의 전투 참가는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전투에 참가한 여성들은 대부분 남장을 하고 정체를 남자로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남자로서 군인이 된 여성들 중 동성애자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프랑스혁명도 전체적인 틀을 바꾸어 놓지는 못 했습니다. 프랑스혁명 초기에는 구체제의 악습을 타파하는 차원에서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군대에 입대하는 경우가 늘어났지만 대부분 선전적인 의도에서 이루어 졌으며 결국 혁명의 열기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혁명정부는 ‘쓸모 없는’ 여군들을 군대에서 추방했습니다. 저자의 지적 처럼 혁명 군대 또한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구체제의 군대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저자는 근대초기의 자율적인 용병군대가 점차 절대왕정 아래의 규율 잡힌 상비군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여성이 수행하던 역할의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근대국가의 군대로 개편되어 가면서 군대가 국왕의 신민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밖에 없는 약탈 보급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보급에 부담을 초래하는 불필요한 민간인, 특히 여성들은 퇴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근대 초기의 유산인 군대를 따르는 민간인 사회는 군대의 근대화와 함께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이 저작은 16세기부터 19세기 초 까지 전쟁과 여성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좋은 개설서 입니다. 특히 19세기부터 최근까지 연구사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여성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비록 저자가 자신의 연구가 논리적으로 약간의 비약이 있으며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훌륭한 저작입니다.
잡담 하나. 읽다 보니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눈에 띄더군요.
In any case, officer’s wives were at the top of the hierarchy where her husband’s rank determined her position.(p.89)
사단장 마누라는 사단장 행세를 하고 연대장 마누라는 연대장 행세를 한다는 한국 군대가 생각이 났습니다;;;;
잡담 둘. 많은 저작들은 책의 앞 부분에 ‘이 책을 000에게 바칩니다’ 라는 문구를 적어 넣지요. 이 책의 저자는 이 책을 자신의 손녀인 Helena Grace Lynn에게 바치고 있군요. Miss Lynn, 훌륭한 할아버지를 두어서 좋겠습니다!
저자 : John A. Lynn II
출판사 :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7세기 중반까지 유럽 각국의 군대는 군병력 만큼이나 많은 수의 비전투원을 동반하고 움직였습니다. 규모가 큰 군대는 어지간한 대도시의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민간인을 달고 다녔다고 하니 재미있지요. 군대를 따라다니는 민간인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고 그 규모는 수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군대에 속한 여성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듭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저자인 린(John A. Lynn II)은 근대 초기 유럽군대에서 여성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절대왕정의 강화와 함께 군대가 상비군화 되어 가면서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근대 유럽의 군대의 성격과 군부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간인 집단, campaign community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근대 초기 유럽군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운영, 유지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집단이 형성되는 과정과 민간인 집단이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6~17세기의 유럽군대는 용병집단으로 구성되었고 보급의 대부분을 약탈에 의존했습니다. 직업군인인 용병들은 자신의 급여로 부양하는 가족들을 동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군대가 편성되면 군대의 규모와 비슷한 숫자의 민간인이 모여들었습니다. 또한 보급을 약탈에 의존하는 특성 때문에 상업적 이익, 또는 단순한 생존을 위해서 모여드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근대 초기의 유럽군대는 군사작전에 지장을 초래하는 대규모의 민간인 집단, 특히 많은 여성들을 포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장에서는 군대를 따른 여성들의 성격에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군대에 동반된 여성 집단을 크게 매춘부(Prostitutes), 애인(Whores : 이 글의 저자는 whore를 매춘부가 아니라 미혼이되 한 명의 남자를 따르는 여자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군인의 부인(Wives)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매춘부와 애인의 경우 17세기 중반까지 많은 수가 군대와 함께 생활했지만 용병군대가 점차 상비군화 되어 가면서 군 규율의 유지를 위해 제도적으로 추방되어 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군인의 부인들이 부업 차원에서 매춘에 나서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군인의 부인들 또한 점차 군대에서 추방되어갔고 많은 유럽군대는 군인의 결혼을 엄격히 통제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여성들이 전투와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해서 간략히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러 사례를 통해 군대와 함께 생활한 여성들은 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군대 외부의 여성들에 대한 가해자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3장에서는 여성들이 군대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남성이 하지 않는 ‘여성적인’ 일, 빨래와 바느질, 요리와 청소 등의 일을 수행했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부대 내의 상업과 수공업 등의 영역에 종사했으며 전투에서 일어나는 약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외에도 육체적으로 힘든 수송, 특히 군인들의 짐꾼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으며 공성전시 참호를 파는 사실상의 ‘공병’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근대 초기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한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군대와 함께 생활한 여성들은 민간 사회의 여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존재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군대의 상비군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체계적인 보급체계가 자리 잡아갔고 동시에 여성들이 수행하는 역할도 축소되어 갔습니다.
4장에서는 여성들의 실제 전투참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먼저 대중문화에서는 여성의 전투 참여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본 뒤 실제 여성의 전투 참가 사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17~18세기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남성에 비해 낮았고 여성이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가하는 것은 터부시 되었지만 대중문화에서 전투에 참여하는 여성은 흥미의 대상으로서 자주 다루어 졌습니다. 반면 실제 군대에서 여성의 전투 참가는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전투에 참가한 여성들은 대부분 남장을 하고 정체를 남자로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남자로서 군인이 된 여성들 중 동성애자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프랑스혁명도 전체적인 틀을 바꾸어 놓지는 못 했습니다. 프랑스혁명 초기에는 구체제의 악습을 타파하는 차원에서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군대에 입대하는 경우가 늘어났지만 대부분 선전적인 의도에서 이루어 졌으며 결국 혁명의 열기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혁명정부는 ‘쓸모 없는’ 여군들을 군대에서 추방했습니다. 저자의 지적 처럼 혁명 군대 또한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구체제의 군대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저자는 근대초기의 자율적인 용병군대가 점차 절대왕정 아래의 규율 잡힌 상비군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여성이 수행하던 역할의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근대국가의 군대로 개편되어 가면서 군대가 국왕의 신민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밖에 없는 약탈 보급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보급에 부담을 초래하는 불필요한 민간인, 특히 여성들은 퇴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근대 초기의 유산인 군대를 따르는 민간인 사회는 군대의 근대화와 함께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이 저작은 16세기부터 19세기 초 까지 전쟁과 여성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좋은 개설서 입니다. 특히 19세기부터 최근까지 연구사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여성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비록 저자가 자신의 연구가 논리적으로 약간의 비약이 있으며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훌륭한 저작입니다.
잡담 하나. 읽다 보니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눈에 띄더군요.
In any case, officer’s wives were at the top of the hierarchy where her husband’s rank determined her position.(p.89)
사단장 마누라는 사단장 행세를 하고 연대장 마누라는 연대장 행세를 한다는 한국 군대가 생각이 났습니다;;;;
잡담 둘. 많은 저작들은 책의 앞 부분에 ‘이 책을 000에게 바칩니다’ 라는 문구를 적어 넣지요. 이 책의 저자는 이 책을 자신의 손녀인 Helena Grace Lynn에게 바치고 있군요. Miss Lynn, 훌륭한 할아버지를 두어서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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