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인 대규모 국민동원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혁명기의 프랑스 였지만 이것을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프로이센이었습니다. 론Albrecht von Roon의
군제개혁은 프로이센식의 동원체제를 확립했고 보불전쟁 이후로는 세계 각국의 모델이 되기도 했지요. 그런데 론의 군제개혁은
병력동원의 효율성에 초점을 맞춘 것 이었습니다. 징병제를 옹호하는 측에서 지지하는 "무장한 시민"의 개념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론의 군제개혁은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1813년 독일 민족 정신의 발현으로, 그리고 "무장한 시민"의 상징으로
생각한 향토방위군Landwehr를 축소하고 그 대신 국가가 "통제"하는 현역 자원을 늘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징병제를 옹호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사실들은 골치아픈 진실입니다. "무장한 시민"으로서의 징병제를 옹호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채택한 징병제는 "무장한 시민"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단지 병력자원 확보에 초점을 맞춘 프로이센 방식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한국의 징병제는 프로이센 지배층의 구상과 비슷한 바탕에서 움직이고 있지요;;;;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한
문제인데 좀 더 정리된 글을 하나 쓰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2011년 8월 20일 토요일
2009년 7월 5일 일요일
프랑스혁명-나폴레옹전쟁기의 보병창
배군님이 쓰신 17세기 스웨덴군 병종과 전술에 대한 글을 읽고 곁다리로 씁니다. 배군님의 글에 보병창에 대한 언급이 있기에 프랑스혁명-나폴레옹전쟁 시기의 보병창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 보겠습니다.
프랑스군은 17-18세기에 군사기술에서 많은 혁신을 이룩하면서 다른 유럽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총검(Bayonet)’의 도입이었습니다. 총검의 도입으로 보병들은 소총만을 장비하고도 충격력과 화력을 동시에 이용해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군사사가는 수발총과 총검의 도입으로 유럽 군대가 오스만투르크로 대표되는 비유럽 군대에게 확고한 전술적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Black, 1995, p.101] 총검이 차지하는 지위가 높아진 결과 보병창이 차지하는 지위는 점차 낮아져 17세기 말에는 사실상 프랑스군에서 퇴출되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총검을 사용한 것은 1642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네덜란드 전쟁(1672-1678)에서는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대규모 총검돌격을 실시해 총검의 전술적 위력을 과시합니다.[Lynn, 1999, p.60] 프랑스군의 대대전술대형을 보면 총검의 도입에 따라 보병창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낮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0년전쟁기 프랑스군의 보병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의 비율이 1:1이었습니다. 그러나 1650년경에는 그 비율이 2:1로 역전되고 프랑스-네덜란드전쟁에서 대규모의 총검이 사용된 직후인 1680년에는 3:1로, 그리고 9년전쟁 기간 중인 1695년에는 4:1이 되다가 1705년에는 창병이 완전히 사라집니다.[Lynn, 1997, p.476] 이미 9년전쟁(1688-1697) 기간 중 일부 보병대대는 전체가 소총병으로 편성된 경우도 있었으며 루이 14세는 9년전쟁 종결 뒤 모든 보병의 기본 장비를 화승총에서 수발총으로 바꾸고 총검을 장비하도록 명령했습니다.[Lynn, 1997, p.472]
이렇게 해서 18세기로 들어오면 프랑스군에서 보병창은 완전히 퇴출됩니다. 기병을 상대로 유용하다는 점 때문에 일각에서 보병창을 부활시키자는 의견도 나오긴 했습니다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실제로 보병창이 다시 사용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말이죠.
마침내 프랑스혁명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자 혁명정부는 대규모 모병을 시작합니다. 1792년까지는 혁명의 정신에 입각해 자원병 모집이 주를 이루었으나 전쟁이 임박하자 사정이 달라집니다. 정부가 목표로 한 30만명의 육군을 자원병으로만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혁명 이념 같은 추상적 문제에 목숨을 내거는 사람이 많을 리는 없으니 말입니다. 혁명정부는 1793년 봄부터 강제 모병으로 전환했는데 어찌나 성과가 좋았는지 여름이 오기 전에 30만명을 모으는데 성공합니다. 비록 혁명정부가 목표로 한 75만명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프랑스군은 60만 대군으로 불어납니다.[Forrest, 2003, p.12] 사실 당시의 기준이건 현대의 기준이건 60만은 엄청난 대군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적들 중에서 이 정도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국가는 당시에는 전무했습니다.
그런데 대군을 만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소총이 부족했던 것 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 조병창인 파리 조병창의 연간 소총 생산량은 9천정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군대는 갑자기 60만명으로 불어나 버렸으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혁명정부는 땜빵용 무기를 찾았고 그것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보병용 무기로 다시 창을 지급하는 것 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1792년 보병창을 다시 보병의 정식 장비로 부활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전쟁부 장관 세르방(Joseph Servan)은 보병에게 창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명령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삽입했다고 합니다.
립서비스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총이 없어 창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정부의 일각에서는 창을 다시 쓰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 내내 프랑스의 많은 군사이론가들은 프랑스군이 사격에서 프로이센과 영국을 앞서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총검에 의존하는 충격 전술은 프랑스군에게 잘 맞는 방식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습니다. 삭스(Maurice de Saxe) 원수가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삭스 원수는 보병창을 다시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 까지 했습니다. 삭스 원수 외에도 많은 군사이론가들이 충격전술을 중심으로 하는 보병전술을 옹호했습니다.[Lynn, 1977, p.2]
혁명정부도 이러한 주장의 영향을 받았고 1791년의 전술교범도 충격전술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혁명전쟁시기 근거리 일제 사격 후의 총검돌격은 일반적인 전술이 되었습니다. 전쟁 발발 직전 소총 부족에 직면한 혁명정부의 입장에서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는 것은 꽤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습니다. 총검전술에 의한 충격을 강조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입장이니 보병대대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 편제로 만드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입니다. 총검 자체가 소총을 보병창의 대용으로 만들기 위해 나온 물건이니 말입니다.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카르노(Lazare Carnot)는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 25일 의회에 출석해 보병창이 근접전에 있어 매우 유용한 무기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의회는 카르노의 주장을 받아들여 군사위원회에 보병대대 편제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편제로 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합니다.[Lynn, 1977, p.3]
군사위원회는 소총병과 창병을 한 개 대대로 편성하는 방안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회의 방안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모병 계획이 시작되면서 보병창의 도입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코뱅과 같은 과격파들은 대규모 ‘정규군’은 민주적 정부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기반한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창은 그 군대에 적합한 무기였습니다. 일단 군대로 끌고 왔으면 손에 뭔가를 쥐어주긴 해야지요. 혁명정부는 1792년 8월 1일, 50만 자루의 창을 생산하는 결정을 내립니다.[Lynn, 1996, p. 190]
이미 혁명정부가 보병창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부터 지방에서는 의용군 모집과 함께 자발적으로 창 생산이 시작됐습니다. 전선으로 나가는 의용군 대대들은 대부분 창으로 무장하고 나갔다고 하지요. 전선에서 다시 소총을 받기는 했지만. 매우 드물긴 하지만 후방 사단의 경우 1개 사단 전체가 창으로 무장한 경우도 있긴 했다고 합니다.[Lynn, 1996, p. 190] 그러나 혁명정부가 전시 생산을 독려하면서 소총생산이 급증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파리 조병창의 경우 연간 생산량이 9천정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시동원이 시작되자 1793년 9월부터 1794년 10월까지 14만5천정의 소총을 생산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 조병창은 생산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하루에 600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Forrest, 2003, p.18]
보병창의 옹호론자들은 프랑스군의 소총부족이 해소된 1794년 이후에도 기병전에 유용하다는 이유로 창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시계를 거꾸로 돌리지는 못 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프로이센도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게 됩니다. 역시 소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센은 1806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완패 당한 뒤 병력을 4만2천명으로 제한당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의 주도 하에 재무장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의 공업생산력은 프로이센군의 요구 사항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1803년에 채택된 신형 노타드 소총(Nothard Gewehr)은 1806년 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겨우 7개대대만이 장비하는데 그쳤고 이 소총을 생산하는 쉬클러(Schikler) 조병창(슈판다우와 포츠담 두 곳에 공장을 둔)의 생산능력으로는 4만2천명의 프로이센군에게 노타드 소총을 보급하는데 최소 6년에서 8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67] 결국 프로이센군의 대부분은 계속 1782년형 보병총(Infanterie-gewehr M1782)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의 감시 때문에 기존의 조병창에서 조약이 규정한 한도 이상의 소총을 생산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대안으로 프랑스의 감시가 느슨한 실레지엔(Schlesien)에 새로운 조병창을 건설하는 방안이 추진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이 1809년 이후 점령지에서 철수하면서 프로이센의 소총 생산은 탄력을 받아 1809년 1월부터 1810년 3월 까지 44,329정의 소총이 생산됩니다. 여기에는 1809년에 채택된 M1809가 포함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71-372]
프로이센군은 1811년 까지 95,180정의 소총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 수량으로는 전시 동원으로 소집될 병력을 완전히 무장 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에게서 소총 6만정의 원조를 약속 받고 별도로 오스트리아로부터 5만정의 소총을 구매합니다. 동시에 실레지엔에 건설한 조병창의 확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쪽박을 차면서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프로이센은 즉시 전쟁에 참전하긴 했는데 1792년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동원 능력에 비해 확보한 소총이 부족했습니다. 프로이센은 전쟁에 참전할 당시 65,675명의 예비군만을 확보한 상태여서 추가로 12만명의 향토방위군(Landwehr)을 더 소집하려 했습니다.[Rothenberg, 1980, pp.192-194] 그런데 소총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여서 1813년 4월에 새로 편성한 7개 예비군 연대는 병력 5,000명 중 소총을 가진 병사가 912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비군도 이 지경이라 긴급히 소집된 향토방위군 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을 혼합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영국 등 외국의 원조였습니다. 동프로이센의 향토방위군은 러시아로부터 1만5천정의 프랑스 소총을 지원받아 무장을 할 수 있었으며 폼메른의 경우는 영국, 스웨덴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원조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영국이었는데 영국 정부는 프로이센이 전쟁에 참전하자 5월부터 10월까지 총 10만 정의 소총을 원조합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군은 1813년 9월까지 잡다한 소총을 긁어 모아 27만5천정의 소총을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Showalter, 1972, p.377-378]
표준화는 물 건너 갔지만 나폴레옹의 군대를 상대로 창질을 하는 것 보다는 백 배 나았을 겁니다.
참고문헌
Jeremy Black, ‘A Military Revolution? A 1660-1792 Perspective’,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Westview, 1995
Alan Forrest, ‘La patrie en danger :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First Levée en masse’, 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o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John A. Lynn, ‘French Opinion and the Military Resurrection of the Pike, 1792-1794’, “Military Affairs” Vol.41 No.1(Feb, 1977)
John A. Lynn, The Bayonets of the Republic : Motivation and Tactics in the Army of Revolutionary France 1791-94, Westview, 1996
John A. Lynn, Giant of the Grand Siécle : The French Army 1610-171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John A. Lynn, The Wars of Louis XIV 1667-1714, Longman, 1999
Denis E. Showalter, ‘Menifestation of Reform : The Rearmament of Prussian Infantry, 1806-13’,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44 No.3(Sep, 1972)
프랑스군은 17-18세기에 군사기술에서 많은 혁신을 이룩하면서 다른 유럽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총검(Bayonet)’의 도입이었습니다. 총검의 도입으로 보병들은 소총만을 장비하고도 충격력과 화력을 동시에 이용해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군사사가는 수발총과 총검의 도입으로 유럽 군대가 오스만투르크로 대표되는 비유럽 군대에게 확고한 전술적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Black, 1995, p.101] 총검이 차지하는 지위가 높아진 결과 보병창이 차지하는 지위는 점차 낮아져 17세기 말에는 사실상 프랑스군에서 퇴출되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총검을 사용한 것은 1642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네덜란드 전쟁(1672-1678)에서는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대규모 총검돌격을 실시해 총검의 전술적 위력을 과시합니다.[Lynn, 1999, p.60] 프랑스군의 대대전술대형을 보면 총검의 도입에 따라 보병창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낮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0년전쟁기 프랑스군의 보병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의 비율이 1:1이었습니다. 그러나 1650년경에는 그 비율이 2:1로 역전되고 프랑스-네덜란드전쟁에서 대규모의 총검이 사용된 직후인 1680년에는 3:1로, 그리고 9년전쟁 기간 중인 1695년에는 4:1이 되다가 1705년에는 창병이 완전히 사라집니다.[Lynn, 1997, p.476] 이미 9년전쟁(1688-1697) 기간 중 일부 보병대대는 전체가 소총병으로 편성된 경우도 있었으며 루이 14세는 9년전쟁 종결 뒤 모든 보병의 기본 장비를 화승총에서 수발총으로 바꾸고 총검을 장비하도록 명령했습니다.[Lynn, 1997, p.472]
이렇게 해서 18세기로 들어오면 프랑스군에서 보병창은 완전히 퇴출됩니다. 기병을 상대로 유용하다는 점 때문에 일각에서 보병창을 부활시키자는 의견도 나오긴 했습니다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실제로 보병창이 다시 사용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말이죠.
마침내 프랑스혁명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자 혁명정부는 대규모 모병을 시작합니다. 1792년까지는 혁명의 정신에 입각해 자원병 모집이 주를 이루었으나 전쟁이 임박하자 사정이 달라집니다. 정부가 목표로 한 30만명의 육군을 자원병으로만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혁명 이념 같은 추상적 문제에 목숨을 내거는 사람이 많을 리는 없으니 말입니다. 혁명정부는 1793년 봄부터 강제 모병으로 전환했는데 어찌나 성과가 좋았는지 여름이 오기 전에 30만명을 모으는데 성공합니다. 비록 혁명정부가 목표로 한 75만명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프랑스군은 60만 대군으로 불어납니다.[Forrest, 2003, p.12] 사실 당시의 기준이건 현대의 기준이건 60만은 엄청난 대군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적들 중에서 이 정도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국가는 당시에는 전무했습니다.
그런데 대군을 만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소총이 부족했던 것 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 조병창인 파리 조병창의 연간 소총 생산량은 9천정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군대는 갑자기 60만명으로 불어나 버렸으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혁명정부는 땜빵용 무기를 찾았고 그것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보병용 무기로 다시 창을 지급하는 것 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1792년 보병창을 다시 보병의 정식 장비로 부활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전쟁부 장관 세르방(Joseph Servan)은 보병에게 창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명령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삽입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자유로운 인민들이 이 무기를 다시 사용할 때가 왔다. (창은) 이미 혁명의 무기로 영광을 얻었으며 이제는 승리의 무기가 될 때이다!”
John A. Lynn, ‘French Opinion and the Military Resurrection of the Pike, 1792-1794’, “Military Affairs” Vol.41 No.1(Feb, 1977), p.1
립서비스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총이 없어 창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정부의 일각에서는 창을 다시 쓰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 내내 프랑스의 많은 군사이론가들은 프랑스군이 사격에서 프로이센과 영국을 앞서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총검에 의존하는 충격 전술은 프랑스군에게 잘 맞는 방식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습니다. 삭스(Maurice de Saxe) 원수가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삭스 원수는 보병창을 다시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 까지 했습니다. 삭스 원수 외에도 많은 군사이론가들이 충격전술을 중심으로 하는 보병전술을 옹호했습니다.[Lynn, 1977, p.2]
혁명정부도 이러한 주장의 영향을 받았고 1791년의 전술교범도 충격전술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혁명전쟁시기 근거리 일제 사격 후의 총검돌격은 일반적인 전술이 되었습니다. 전쟁 발발 직전 소총 부족에 직면한 혁명정부의 입장에서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는 것은 꽤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습니다. 총검전술에 의한 충격을 강조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입장이니 보병대대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 편제로 만드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입니다. 총검 자체가 소총을 보병창의 대용으로 만들기 위해 나온 물건이니 말입니다.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카르노(Lazare Carnot)는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 25일 의회에 출석해 보병창이 근접전에 있어 매우 유용한 무기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의회는 카르노의 주장을 받아들여 군사위원회에 보병대대 편제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편제로 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합니다.[Lynn, 1977, p.3]
군사위원회는 소총병과 창병을 한 개 대대로 편성하는 방안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회의 방안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모병 계획이 시작되면서 보병창의 도입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코뱅과 같은 과격파들은 대규모 ‘정규군’은 민주적 정부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기반한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창은 그 군대에 적합한 무기였습니다. 일단 군대로 끌고 왔으면 손에 뭔가를 쥐어주긴 해야지요. 혁명정부는 1792년 8월 1일, 50만 자루의 창을 생산하는 결정을 내립니다.[Lynn, 1996, p. 190]
이미 혁명정부가 보병창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부터 지방에서는 의용군 모집과 함께 자발적으로 창 생산이 시작됐습니다. 전선으로 나가는 의용군 대대들은 대부분 창으로 무장하고 나갔다고 하지요. 전선에서 다시 소총을 받기는 했지만. 매우 드물긴 하지만 후방 사단의 경우 1개 사단 전체가 창으로 무장한 경우도 있긴 했다고 합니다.[Lynn, 1996, p. 190] 그러나 혁명정부가 전시 생산을 독려하면서 소총생산이 급증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파리 조병창의 경우 연간 생산량이 9천정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시동원이 시작되자 1793년 9월부터 1794년 10월까지 14만5천정의 소총을 생산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 조병창은 생산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하루에 600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Forrest, 2003, p.18]
보병창의 옹호론자들은 프랑스군의 소총부족이 해소된 1794년 이후에도 기병전에 유용하다는 이유로 창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시계를 거꾸로 돌리지는 못 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프로이센도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게 됩니다. 역시 소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센은 1806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완패 당한 뒤 병력을 4만2천명으로 제한당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의 주도 하에 재무장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의 공업생산력은 프로이센군의 요구 사항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1803년에 채택된 신형 노타드 소총(Nothard Gewehr)은 1806년 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겨우 7개대대만이 장비하는데 그쳤고 이 소총을 생산하는 쉬클러(Schikler) 조병창(슈판다우와 포츠담 두 곳에 공장을 둔)의 생산능력으로는 4만2천명의 프로이센군에게 노타드 소총을 보급하는데 최소 6년에서 8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67] 결국 프로이센군의 대부분은 계속 1782년형 보병총(Infanterie-gewehr M1782)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의 감시 때문에 기존의 조병창에서 조약이 규정한 한도 이상의 소총을 생산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대안으로 프랑스의 감시가 느슨한 실레지엔(Schlesien)에 새로운 조병창을 건설하는 방안이 추진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이 1809년 이후 점령지에서 철수하면서 프로이센의 소총 생산은 탄력을 받아 1809년 1월부터 1810년 3월 까지 44,329정의 소총이 생산됩니다. 여기에는 1809년에 채택된 M1809가 포함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71-372]
프로이센군은 1811년 까지 95,180정의 소총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 수량으로는 전시 동원으로 소집될 병력을 완전히 무장 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에게서 소총 6만정의 원조를 약속 받고 별도로 오스트리아로부터 5만정의 소총을 구매합니다. 동시에 실레지엔에 건설한 조병창의 확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쪽박을 차면서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프로이센은 즉시 전쟁에 참전하긴 했는데 1792년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동원 능력에 비해 확보한 소총이 부족했습니다. 프로이센은 전쟁에 참전할 당시 65,675명의 예비군만을 확보한 상태여서 추가로 12만명의 향토방위군(Landwehr)을 더 소집하려 했습니다.[Rothenberg, 1980, pp.192-194] 그런데 소총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여서 1813년 4월에 새로 편성한 7개 예비군 연대는 병력 5,000명 중 소총을 가진 병사가 912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비군도 이 지경이라 긴급히 소집된 향토방위군 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을 혼합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영국 등 외국의 원조였습니다. 동프로이센의 향토방위군은 러시아로부터 1만5천정의 프랑스 소총을 지원받아 무장을 할 수 있었으며 폼메른의 경우는 영국, 스웨덴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원조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영국이었는데 영국 정부는 프로이센이 전쟁에 참전하자 5월부터 10월까지 총 10만 정의 소총을 원조합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군은 1813년 9월까지 잡다한 소총을 긁어 모아 27만5천정의 소총을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Showalter, 1972, p.377-378]
표준화는 물 건너 갔지만 나폴레옹의 군대를 상대로 창질을 하는 것 보다는 백 배 나았을 겁니다.
참고문헌
Jeremy Black, ‘A Military Revolution? A 1660-1792 Perspective’,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Westview, 1995
Alan Forrest, ‘La patrie en danger :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First Levée en masse’, 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o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John A. Lynn, ‘French Opinion and the Military Resurrection of the Pike, 1792-1794’, “Military Affairs” Vol.41 No.1(Feb, 1977)
John A. Lynn, The Bayonets of the Republic : Motivation and Tactics in the Army of Revolutionary France 1791-94, Westview, 1996
John A. Lynn, Giant of the Grand Siécle : The French Army 1610-171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John A. Lynn, The Wars of Louis XIV 1667-1714, Longman, 1999
Denis E. Showalter, ‘Menifestation of Reform : The Rearmament of Prussian Infantry, 1806-13’,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44 No.3(Sep, 1972)
2009년 4월 2일 목요일
Women, Armies, and Warfare in Early Modern Europe by John A. Lynn II
Women, armies, and warfare in Early Modern Europe
저자 : John A. Lynn II
출판사 :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7세기 중반까지 유럽 각국의 군대는 군병력 만큼이나 많은 수의 비전투원을 동반하고 움직였습니다. 규모가 큰 군대는 어지간한 대도시의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민간인을 달고 다녔다고 하니 재미있지요. 군대를 따라다니는 민간인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고 그 규모는 수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군대에 속한 여성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듭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저자인 린(John A. Lynn II)은 근대 초기 유럽군대에서 여성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절대왕정의 강화와 함께 군대가 상비군화 되어 가면서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근대 유럽의 군대의 성격과 군부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간인 집단, campaign community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근대 초기 유럽군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운영, 유지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집단이 형성되는 과정과 민간인 집단이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6~17세기의 유럽군대는 용병집단으로 구성되었고 보급의 대부분을 약탈에 의존했습니다. 직업군인인 용병들은 자신의 급여로 부양하는 가족들을 동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군대가 편성되면 군대의 규모와 비슷한 숫자의 민간인이 모여들었습니다. 또한 보급을 약탈에 의존하는 특성 때문에 상업적 이익, 또는 단순한 생존을 위해서 모여드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근대 초기의 유럽군대는 군사작전에 지장을 초래하는 대규모의 민간인 집단, 특히 많은 여성들을 포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장에서는 군대를 따른 여성들의 성격에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군대에 동반된 여성 집단을 크게 매춘부(Prostitutes), 애인(Whores : 이 글의 저자는 whore를 매춘부가 아니라 미혼이되 한 명의 남자를 따르는 여자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군인의 부인(Wives)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매춘부와 애인의 경우 17세기 중반까지 많은 수가 군대와 함께 생활했지만 용병군대가 점차 상비군화 되어 가면서 군 규율의 유지를 위해 제도적으로 추방되어 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군인의 부인들이 부업 차원에서 매춘에 나서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군인의 부인들 또한 점차 군대에서 추방되어갔고 많은 유럽군대는 군인의 결혼을 엄격히 통제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여성들이 전투와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해서 간략히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러 사례를 통해 군대와 함께 생활한 여성들은 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군대 외부의 여성들에 대한 가해자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3장에서는 여성들이 군대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남성이 하지 않는 ‘여성적인’ 일, 빨래와 바느질, 요리와 청소 등의 일을 수행했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부대 내의 상업과 수공업 등의 영역에 종사했으며 전투에서 일어나는 약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외에도 육체적으로 힘든 수송, 특히 군인들의 짐꾼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으며 공성전시 참호를 파는 사실상의 ‘공병’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근대 초기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한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군대와 함께 생활한 여성들은 민간 사회의 여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존재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군대의 상비군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체계적인 보급체계가 자리 잡아갔고 동시에 여성들이 수행하는 역할도 축소되어 갔습니다.
4장에서는 여성들의 실제 전투참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먼저 대중문화에서는 여성의 전투 참여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본 뒤 실제 여성의 전투 참가 사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17~18세기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남성에 비해 낮았고 여성이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가하는 것은 터부시 되었지만 대중문화에서 전투에 참여하는 여성은 흥미의 대상으로서 자주 다루어 졌습니다. 반면 실제 군대에서 여성의 전투 참가는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전투에 참가한 여성들은 대부분 남장을 하고 정체를 남자로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남자로서 군인이 된 여성들 중 동성애자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프랑스혁명도 전체적인 틀을 바꾸어 놓지는 못 했습니다. 프랑스혁명 초기에는 구체제의 악습을 타파하는 차원에서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군대에 입대하는 경우가 늘어났지만 대부분 선전적인 의도에서 이루어 졌으며 결국 혁명의 열기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혁명정부는 ‘쓸모 없는’ 여군들을 군대에서 추방했습니다. 저자의 지적 처럼 혁명 군대 또한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구체제의 군대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저자는 근대초기의 자율적인 용병군대가 점차 절대왕정 아래의 규율 잡힌 상비군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여성이 수행하던 역할의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근대국가의 군대로 개편되어 가면서 군대가 국왕의 신민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밖에 없는 약탈 보급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보급에 부담을 초래하는 불필요한 민간인, 특히 여성들은 퇴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근대 초기의 유산인 군대를 따르는 민간인 사회는 군대의 근대화와 함께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이 저작은 16세기부터 19세기 초 까지 전쟁과 여성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좋은 개설서 입니다. 특히 19세기부터 최근까지 연구사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여성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비록 저자가 자신의 연구가 논리적으로 약간의 비약이 있으며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훌륭한 저작입니다.
잡담 하나. 읽다 보니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눈에 띄더군요.
In any case, officer’s wives were at the top of the hierarchy where her husband’s rank determined her position.(p.89)
사단장 마누라는 사단장 행세를 하고 연대장 마누라는 연대장 행세를 한다는 한국 군대가 생각이 났습니다;;;;
잡담 둘. 많은 저작들은 책의 앞 부분에 ‘이 책을 000에게 바칩니다’ 라는 문구를 적어 넣지요. 이 책의 저자는 이 책을 자신의 손녀인 Helena Grace Lynn에게 바치고 있군요. Miss Lynn, 훌륭한 할아버지를 두어서 좋겠습니다!
저자 : John A. Lynn II
출판사 :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7세기 중반까지 유럽 각국의 군대는 군병력 만큼이나 많은 수의 비전투원을 동반하고 움직였습니다. 규모가 큰 군대는 어지간한 대도시의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민간인을 달고 다녔다고 하니 재미있지요. 군대를 따라다니는 민간인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고 그 규모는 수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군대에 속한 여성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듭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저자인 린(John A. Lynn II)은 근대 초기 유럽군대에서 여성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절대왕정의 강화와 함께 군대가 상비군화 되어 가면서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근대 유럽의 군대의 성격과 군부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간인 집단, campaign community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근대 초기 유럽군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운영, 유지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집단이 형성되는 과정과 민간인 집단이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6~17세기의 유럽군대는 용병집단으로 구성되었고 보급의 대부분을 약탈에 의존했습니다. 직업군인인 용병들은 자신의 급여로 부양하는 가족들을 동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군대가 편성되면 군대의 규모와 비슷한 숫자의 민간인이 모여들었습니다. 또한 보급을 약탈에 의존하는 특성 때문에 상업적 이익, 또는 단순한 생존을 위해서 모여드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근대 초기의 유럽군대는 군사작전에 지장을 초래하는 대규모의 민간인 집단, 특히 많은 여성들을 포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장에서는 군대를 따른 여성들의 성격에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군대에 동반된 여성 집단을 크게 매춘부(Prostitutes), 애인(Whores : 이 글의 저자는 whore를 매춘부가 아니라 미혼이되 한 명의 남자를 따르는 여자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군인의 부인(Wives)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매춘부와 애인의 경우 17세기 중반까지 많은 수가 군대와 함께 생활했지만 용병군대가 점차 상비군화 되어 가면서 군 규율의 유지를 위해 제도적으로 추방되어 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군인의 부인들이 부업 차원에서 매춘에 나서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군인의 부인들 또한 점차 군대에서 추방되어갔고 많은 유럽군대는 군인의 결혼을 엄격히 통제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여성들이 전투와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해서 간략히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러 사례를 통해 군대와 함께 생활한 여성들은 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군대 외부의 여성들에 대한 가해자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3장에서는 여성들이 군대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남성이 하지 않는 ‘여성적인’ 일, 빨래와 바느질, 요리와 청소 등의 일을 수행했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부대 내의 상업과 수공업 등의 영역에 종사했으며 전투에서 일어나는 약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외에도 육체적으로 힘든 수송, 특히 군인들의 짐꾼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으며 공성전시 참호를 파는 사실상의 ‘공병’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근대 초기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한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군대와 함께 생활한 여성들은 민간 사회의 여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존재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군대의 상비군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체계적인 보급체계가 자리 잡아갔고 동시에 여성들이 수행하는 역할도 축소되어 갔습니다.
4장에서는 여성들의 실제 전투참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먼저 대중문화에서는 여성의 전투 참여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본 뒤 실제 여성의 전투 참가 사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17~18세기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남성에 비해 낮았고 여성이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가하는 것은 터부시 되었지만 대중문화에서 전투에 참여하는 여성은 흥미의 대상으로서 자주 다루어 졌습니다. 반면 실제 군대에서 여성의 전투 참가는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전투에 참가한 여성들은 대부분 남장을 하고 정체를 남자로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남자로서 군인이 된 여성들 중 동성애자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프랑스혁명도 전체적인 틀을 바꾸어 놓지는 못 했습니다. 프랑스혁명 초기에는 구체제의 악습을 타파하는 차원에서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군대에 입대하는 경우가 늘어났지만 대부분 선전적인 의도에서 이루어 졌으며 결국 혁명의 열기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혁명정부는 ‘쓸모 없는’ 여군들을 군대에서 추방했습니다. 저자의 지적 처럼 혁명 군대 또한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구체제의 군대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저자는 근대초기의 자율적인 용병군대가 점차 절대왕정 아래의 규율 잡힌 상비군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여성이 수행하던 역할의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근대국가의 군대로 개편되어 가면서 군대가 국왕의 신민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밖에 없는 약탈 보급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보급에 부담을 초래하는 불필요한 민간인, 특히 여성들은 퇴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근대 초기의 유산인 군대를 따르는 민간인 사회는 군대의 근대화와 함께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이 저작은 16세기부터 19세기 초 까지 전쟁과 여성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좋은 개설서 입니다. 특히 19세기부터 최근까지 연구사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여성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비록 저자가 자신의 연구가 논리적으로 약간의 비약이 있으며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훌륭한 저작입니다.
잡담 하나. 읽다 보니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눈에 띄더군요.
In any case, officer’s wives were at the top of the hierarchy where her husband’s rank determined her position.(p.89)
사단장 마누라는 사단장 행세를 하고 연대장 마누라는 연대장 행세를 한다는 한국 군대가 생각이 났습니다;;;;
잡담 둘. 많은 저작들은 책의 앞 부분에 ‘이 책을 000에게 바칩니다’ 라는 문구를 적어 넣지요. 이 책의 저자는 이 책을 자신의 손녀인 Helena Grace Lynn에게 바치고 있군요. Miss Lynn, 훌륭한 할아버지를 두어서 좋겠습니다!
2008년 5월 23일 금요일
프랑스군의 사단편제 : 1763~1804
며칠 전에 썼던 보병사단 편제의 변화 : 1909~1916라는 글에 대해 배군님이 혁명군에서 대육군으로라는 아주 근사한 답 글을 써 주셨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더군요. 그러고 보니 삼각편제와 사각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18세기 후반 사단편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먼저 하는게 나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18세기 후반 프랑스 육군의 보병사단 편제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해보려 합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전쟁은 기껏해야 5~6만 수준의 야전군들에 의해 수행됐습니다. 연대 이상으로는 상설 편제된 부대 단위가 없다 보니 전쟁이 터지면 급히 만들어지는 군사령부에 의해 지휘가 이뤄졌고 이런 비효율적인 지휘에 의한 전투는 ‘결정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양측 모두 사상자만 줄줄이 내는 비효율적인 전쟁이었던 셈입니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으니 전쟁은 장기전이었습니다. 에스파냐 계승전쟁은 1701년부터 1713년까지 계속되었고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은 1740년부터 1748년 까지, 7년전쟁은 1756년부터 1763년까지 계속됐지요.
당연히 당대의 군사 사상가들에게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나가니국가재정은 거덜이 나고 승리를 거둬도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은 간당간당하니 해결책을 모색하는건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공통적인 관심사는 이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인 지휘통제를 가능하게 해서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까?
처음으로 연대 이상의 부대단위를 생각한 인물은 삭스(Maurice de Saxe) 원수였다고 합니다. 삭스 원수가 구상한 부대 단위는 4개 연대로 편성되며 각 연대는 기병과 포병부대를 배속받는 legion이었습니다. 기본적인 구성은 뒤에 만들어지는 사각편제 사단과 얼추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을 뜻하는 Division이라는 용어는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당시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야전군 주력과 별도로 움직이는 부대를 일컬을 때 Divisio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군요.
그렇다면 본격적인 사단은 언제 만들어졌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루이 16세 시기에 만들어진 Division과 혁명 이후 확립된 Division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이 어린양은 프랑스어를 모르는지라 영미권의 군사학계에서 이뤄진 논의를 중심으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먼저 이미 구체제하에서 사단편제가 자리를 잡았다는 주장은 윌킨슨(Spencer Wilkinson, 1915)과 큄비(Robert. S. Quimby, 1957)가 대표적입니다. 윌킨슨의 저작은 읽어보질 못 했으니 넘어가고요.;;;;; 큄비는 1957년에 출간한 The Background of Napoleonic Wafare라는 저작에서 1763년 Broglie 원수가 편성한 보병사단과 기병사단 편제가 최초의 근대적 사단편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큄비의 설명에 따르면 이때 편성된 사단은 2개 연대가 1개 여단을 구성하며 2개 여단이 사단을 구성하는 편제로서 각 여단 예하로 포병이 편제된 구조였습니다.
반면 프랑스혁명 이후에야 사단편제가 본격적으로 자리잡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로스(Steven T. Ross)는 1965년에 발표한 The Development of the Combat Division in eighteenth-century French Armies라는 논문에서 프랑스혁명 이후에야 사단편제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로스는 큄비 등이 주장하는 것 과는 달리 7년 전쟁 당시의 사단도 상설 편제가 아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작전에 돌입해서 각 야전군의 지휘관이 임시로 편성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고있는 것 입니다.
로스에 따르면 프랑스가 7년 전쟁 이후 군제개편을 하면서 1776년에 전국을 16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 Division이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이것이 처음으로 Division이 상설편제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Division은 전투 부대가 아니라 행정을 담당하는 군관구에 가까운 편제였습니다. 로스에 따르면 각 Division의 기능은 병력의 모집, 보급, 훈련 및 주둔지의 치안 담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788년에는 Division이 18개로 늘어납니다. 이때 처음으로 연대들이 여단본부 예하로 편성되었으며 이들 여단은 전투사단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즉 루이 16세 말기에는 행정적 단위의 ‘사단’과 전투 부대로서의 ‘사단’이 병존했다는 주장입니다. 루이 16세 당시의 사단은 포병과 기병 등 지원 병과는 결여한 편성이었습니다.
로스에 따르면 구체제하에서는 사단편제가 확립되지 못했습니다. 로스의 주장에 따르면 사단편제가 확립되는 것은 혁명이후인데 그 과정은 대략 이렇습니다.
먼저 1792년에 2개여단으로 구성되는 보병사단 편제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때 만들어진 사단은 보병만 가지고 있었으며 포병과 공병 등의 지원부대가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혁명으로 장교들이 대량으로 망명한 이유로 사단 단위에서는 보병과 포병을 조율할 수 있는 장교가 부족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은 연대 이하의 편제도 변화시켰습니다. 이미 1793년 무렵부터 숙련된 병력의 부족으로 여단의 편성을 2개연대-4개 대대에서 2개연대-6개대대로 바꾸는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즉 1개연대에 전투경험을 가진 1개대대와 전투경험이 없는 2개대대를 혼성 편성하는 편제였습니다. 결국 이것이 1794년에는 공식적인 편제가 됩니다. 즉 4개대대의 여단 대신 3개대대로 편성된 연대를 반여단(demi-brigade)로 하고 2개의 반여단이 다시 여단을 이루며 2개의 여단은 상급제대로 ‘사단’을 두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편제’이고 실제로는 전쟁이 진행중인 와중이라 일선부대의 편성은 중구난방이었습니다. 공식편제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일선의 상황은 엉망이라 대개는 사단의 바로 아래로 여단본부 없이 3개의 반여단을 두는 경우가 가장 흔했습니다. 1개 사단에 배속되는 반여단의 숫자가 들쑥날쑥 이다 보니 사단의 병력은 7,000명에서 13,000명 수준까지 다양했다고 합니다. 결국 공식편제가 있긴 했으나 이때 까지도 기본적으로는 구체제하의 임시적 성격이 남아 있었던 것 입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단이 포병을 배속받은 점은 특기할 만 했으며 1796년 이후로는 사단에 배속된 지원 부대의 규모도 체계화되고 충실화되어 갑니다.
이후의 발전과정은 연구자들의 견해가 거의 일치합니다.
1796년 이후 프랑스군의 사단은 일시적으로 여단 본부 없이 사단 예하로 3개 반여단이 배속되는 편제를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1799년에 다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1794년 처럼 사단 편제가 야전군 별로 들쑥날쑥한 형태를 취했다고 합니다. 결국 통령정부 하에서 비로서 사각편제의 사단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참고로 실험적으로 운용되던 군단(corps d’armee) 편제도 1800년에 확립되고 1802~1804년을 거치면서 야전군-군단-사단(사각편제)가 완성됩니다. 또한 1790년대에 광범위하게 시도했던 모든 병종을 단일 사단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기병도 사단 단위로 편제하게 됩니다. 이렇게 효율적 지휘통제 체제를 확립한 프랑스군은 1805~1806년에 걸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러시아를 차례대로 풍비박산 내면서 전 유럽을 벌벌떨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요.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전쟁은 기껏해야 5~6만 수준의 야전군들에 의해 수행됐습니다. 연대 이상으로는 상설 편제된 부대 단위가 없다 보니 전쟁이 터지면 급히 만들어지는 군사령부에 의해 지휘가 이뤄졌고 이런 비효율적인 지휘에 의한 전투는 ‘결정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양측 모두 사상자만 줄줄이 내는 비효율적인 전쟁이었던 셈입니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으니 전쟁은 장기전이었습니다. 에스파냐 계승전쟁은 1701년부터 1713년까지 계속되었고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은 1740년부터 1748년 까지, 7년전쟁은 1756년부터 1763년까지 계속됐지요.
당연히 당대의 군사 사상가들에게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나가니국가재정은 거덜이 나고 승리를 거둬도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은 간당간당하니 해결책을 모색하는건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공통적인 관심사는 이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인 지휘통제를 가능하게 해서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까?
처음으로 연대 이상의 부대단위를 생각한 인물은 삭스(Maurice de Saxe) 원수였다고 합니다. 삭스 원수가 구상한 부대 단위는 4개 연대로 편성되며 각 연대는 기병과 포병부대를 배속받는 legion이었습니다. 기본적인 구성은 뒤에 만들어지는 사각편제 사단과 얼추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을 뜻하는 Division이라는 용어는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당시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야전군 주력과 별도로 움직이는 부대를 일컬을 때 Divisio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군요.
그렇다면 본격적인 사단은 언제 만들어졌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루이 16세 시기에 만들어진 Division과 혁명 이후 확립된 Division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이 어린양은 프랑스어를 모르는지라 영미권의 군사학계에서 이뤄진 논의를 중심으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먼저 이미 구체제하에서 사단편제가 자리를 잡았다는 주장은 윌킨슨(Spencer Wilkinson, 1915)과 큄비(Robert. S. Quimby, 1957)가 대표적입니다. 윌킨슨의 저작은 읽어보질 못 했으니 넘어가고요.;;;;; 큄비는 1957년에 출간한 The Background of Napoleonic Wafare라는 저작에서 1763년 Broglie 원수가 편성한 보병사단과 기병사단 편제가 최초의 근대적 사단편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큄비의 설명에 따르면 이때 편성된 사단은 2개 연대가 1개 여단을 구성하며 2개 여단이 사단을 구성하는 편제로서 각 여단 예하로 포병이 편제된 구조였습니다.
반면 프랑스혁명 이후에야 사단편제가 본격적으로 자리잡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로스(Steven T. Ross)는 1965년에 발표한 The Development of the Combat Division in eighteenth-century French Armies라는 논문에서 프랑스혁명 이후에야 사단편제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로스는 큄비 등이 주장하는 것 과는 달리 7년 전쟁 당시의 사단도 상설 편제가 아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작전에 돌입해서 각 야전군의 지휘관이 임시로 편성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고있는 것 입니다.
로스에 따르면 프랑스가 7년 전쟁 이후 군제개편을 하면서 1776년에 전국을 16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 Division이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이것이 처음으로 Division이 상설편제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Division은 전투 부대가 아니라 행정을 담당하는 군관구에 가까운 편제였습니다. 로스에 따르면 각 Division의 기능은 병력의 모집, 보급, 훈련 및 주둔지의 치안 담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788년에는 Division이 18개로 늘어납니다. 이때 처음으로 연대들이 여단본부 예하로 편성되었으며 이들 여단은 전투사단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즉 루이 16세 말기에는 행정적 단위의 ‘사단’과 전투 부대로서의 ‘사단’이 병존했다는 주장입니다. 루이 16세 당시의 사단은 포병과 기병 등 지원 병과는 결여한 편성이었습니다.
로스에 따르면 구체제하에서는 사단편제가 확립되지 못했습니다. 로스의 주장에 따르면 사단편제가 확립되는 것은 혁명이후인데 그 과정은 대략 이렇습니다.
먼저 1792년에 2개여단으로 구성되는 보병사단 편제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때 만들어진 사단은 보병만 가지고 있었으며 포병과 공병 등의 지원부대가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혁명으로 장교들이 대량으로 망명한 이유로 사단 단위에서는 보병과 포병을 조율할 수 있는 장교가 부족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은 연대 이하의 편제도 변화시켰습니다. 이미 1793년 무렵부터 숙련된 병력의 부족으로 여단의 편성을 2개연대-4개 대대에서 2개연대-6개대대로 바꾸는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즉 1개연대에 전투경험을 가진 1개대대와 전투경험이 없는 2개대대를 혼성 편성하는 편제였습니다. 결국 이것이 1794년에는 공식적인 편제가 됩니다. 즉 4개대대의 여단 대신 3개대대로 편성된 연대를 반여단(demi-brigade)로 하고 2개의 반여단이 다시 여단을 이루며 2개의 여단은 상급제대로 ‘사단’을 두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편제’이고 실제로는 전쟁이 진행중인 와중이라 일선부대의 편성은 중구난방이었습니다. 공식편제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일선의 상황은 엉망이라 대개는 사단의 바로 아래로 여단본부 없이 3개의 반여단을 두는 경우가 가장 흔했습니다. 1개 사단에 배속되는 반여단의 숫자가 들쑥날쑥 이다 보니 사단의 병력은 7,000명에서 13,000명 수준까지 다양했다고 합니다. 결국 공식편제가 있긴 했으나 이때 까지도 기본적으로는 구체제하의 임시적 성격이 남아 있었던 것 입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단이 포병을 배속받은 점은 특기할 만 했으며 1796년 이후로는 사단에 배속된 지원 부대의 규모도 체계화되고 충실화되어 갑니다.
이후의 발전과정은 연구자들의 견해가 거의 일치합니다.
1796년 이후 프랑스군의 사단은 일시적으로 여단 본부 없이 사단 예하로 3개 반여단이 배속되는 편제를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1799년에 다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1794년 처럼 사단 편제가 야전군 별로 들쑥날쑥한 형태를 취했다고 합니다. 결국 통령정부 하에서 비로서 사각편제의 사단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참고로 실험적으로 운용되던 군단(corps d’armee) 편제도 1800년에 확립되고 1802~1804년을 거치면서 야전군-군단-사단(사각편제)가 완성됩니다. 또한 1790년대에 광범위하게 시도했던 모든 병종을 단일 사단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기병도 사단 단위로 편제하게 됩니다. 이렇게 효율적 지휘통제 체제를 확립한 프랑스군은 1805~1806년에 걸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러시아를 차례대로 풍비박산 내면서 전 유럽을 벌벌떨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요.
2007년 5월 22일 화요일
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o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군사사에서 제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동원” 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아직 공부가 부족하고 읽은 것도 부족하긴 하지만 확실히 전쟁과 “동원”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징병제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는 국가에서 살고 있으니 “동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는 주로 경제적 동원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은 정도였고 “인적 동원”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언급된 서적을 일부 읽은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석달 전에 The People in Arms라는 서적을 구매했습니다. 이 책은 2003년에 출간됐는데 IAS(Institute for Advanced Study)에서 열린 “역사에서의 무장력(Force in History)”라는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엮은 것 입니다.
이 책에 실린 논문의 저자는 John Whiteclay Chambers II, Owen Connelly, Alan Forrest, Michael Geyer, John Horne, Greg Lockhart, Daniel Moran, Douglas Porch, Mark von Hagen, Arthur Waldron 등인데 이 중 Alan Forrest, John Horne, Mark von Hagen 등 세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이 책에서 처음 접한 사람들입니다.
Chambers는 서문과 19세기 후반 독일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징병제 논의에 대한 글을 썼으며 Forrest와 Connelly는 1793년 혁명당시 프랑스의 국민 동원에 대해서, Moran은 18세기 중반 독일의 국민 동원 논의에 대해서, Horne은 보불전쟁부터 세계대전기 사이의 국민 동원 논의에 대해서, Geyer는 1차 대전 말기 패전에 직면한 독일 사회 내부의 국민 총동원 논의에 대해서, Hagen은 19세기 후반에서 스탈린에 이르는 시기 러시아와 소련의 사례를, Waldron은 신해혁명부터 중일전쟁 시기까지 중국 군사사상가들(주로 국민당 계열)의 동원에 대한 논의와 결론부를, Lockhart는 베트남 사회주의자들의 사례를, Porch는 알제리 전쟁시기 FLN과 OAS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Mark von Hagen과 Arthur Waldron의 글 인데 Hagen의 글은 러시아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약간은 익숙한 내용도 있었던 반면 Waldron의 글은 거의 아는게 없는 중국 현대사인지라 매우 생소하고 한편으로는 재미있었습니다.
Waldron은 신해혁명 이후 근대교육을 받은 중국의 군사사상가들이 새로 습득한 근대 군사사상, 특히 “동원”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려 했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글은 청나라 말기 양무운동 같이 외형만 유럽을 모방한 개혁의 실패를 경험한 중국의 사상가들이 근대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유럽식의 국민 동원에 주목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유럽, 특히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국의 군사사상가들이 중국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국민을 동원하는 체제를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중국의 사회체제는 유럽식의 국민 동원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례는 근대화를 타율적으로 경험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석달 전에 The People in Arms라는 서적을 구매했습니다. 이 책은 2003년에 출간됐는데 IAS(Institute for Advanced Study)에서 열린 “역사에서의 무장력(Force in History)”라는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엮은 것 입니다.
이 책에 실린 논문의 저자는 John Whiteclay Chambers II, Owen Connelly, Alan Forrest, Michael Geyer, John Horne, Greg Lockhart, Daniel Moran, Douglas Porch, Mark von Hagen, Arthur Waldron 등인데 이 중 Alan Forrest, John Horne, Mark von Hagen 등 세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이 책에서 처음 접한 사람들입니다.
Chambers는 서문과 19세기 후반 독일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징병제 논의에 대한 글을 썼으며 Forrest와 Connelly는 1793년 혁명당시 프랑스의 국민 동원에 대해서, Moran은 18세기 중반 독일의 국민 동원 논의에 대해서, Horne은 보불전쟁부터 세계대전기 사이의 국민 동원 논의에 대해서, Geyer는 1차 대전 말기 패전에 직면한 독일 사회 내부의 국민 총동원 논의에 대해서, Hagen은 19세기 후반에서 스탈린에 이르는 시기 러시아와 소련의 사례를, Waldron은 신해혁명부터 중일전쟁 시기까지 중국 군사사상가들(주로 국민당 계열)의 동원에 대한 논의와 결론부를, Lockhart는 베트남 사회주의자들의 사례를, Porch는 알제리 전쟁시기 FLN과 OAS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Mark von Hagen과 Arthur Waldron의 글 인데 Hagen의 글은 러시아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약간은 익숙한 내용도 있었던 반면 Waldron의 글은 거의 아는게 없는 중국 현대사인지라 매우 생소하고 한편으로는 재미있었습니다.
Waldron은 신해혁명 이후 근대교육을 받은 중국의 군사사상가들이 새로 습득한 근대 군사사상, 특히 “동원”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려 했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글은 청나라 말기 양무운동 같이 외형만 유럽을 모방한 개혁의 실패를 경험한 중국의 사상가들이 근대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유럽식의 국민 동원에 주목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유럽, 특히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국의 군사사상가들이 중국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국민을 동원하는 체제를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중국의 사회체제는 유럽식의 국민 동원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례는 근대화를 타율적으로 경험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2007년 1월 8일 월요일
한국의 모병제 논의에 대한 짧은 생각
노무현 대통령의 “군대가서 썩는다”는 발언은 지난 연말 최고의 히트작 이었습니다. 현직 대한민국 최고의 강태공 노무현 대통령답게 이 발언을 통해 수많은 월척을 낚았지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구조적으로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 한국의 “국민개병제”에 대한 대안으로 “모병제”가 꾸준히 논의되고 있는 와중에서 튀어 나왔다는 점에서 더 흥미 있었습니다.
한국의 “모병제”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모병제에 대해 더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진보적”인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의는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의 논의와 유사하다는 점이지요.
닉슨의 참모 중 하나였던 밀튼 프리드먼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가지고 징병제를 공격했던 대표적 인사입니다. 프리드먼은 “국민개병제”로 만들어진 군대는 노예의 군대라고 조소하기도 했습니다.(이건 프리드먼이 국민 개병제의 정치적 의미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무시했다는 이야기죠)
당시 모병제에 찬성하는 시장주의자들은 모병제를 실시하더라도 육군이 필요로 하는 병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으며 군대의 효율도 보장될 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모병제를 실시한 직후부터 심각한 인건비 상승과 효율 저하에 시달렸습니다. 1968년 미군은 320만명의 병력에 320억달러(국방비의 42%)의 인건비를 지출했지만 징병제 폐지 2년차인 1974년에는 병력 220만에 439억달러(국방비의 56%)의 인건비를 지출했습니다. 직업군인의 증가로 이에 필요한 부대비용(특히 가족 부양에 필요한)이 급증했고 전반적인 급여가 증가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정치적 논의가 활발한 유럽의 경우는 “진보” 또는 “좌파”로 자처하는 인사들이 “국민개병제”를 옹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J. Erickson의 기념비적인 저작, The Soviet High Command는 혁명 초기 소련에서 전개된 국방제도의 골격에 대한 공산당내 좌우파의 논의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소련의 공산당 좌파들은 9차 전당대회에서 “전문화된 군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에 대해 군사력이 민중으로부터 괴리될 경우 그 군사력은 민중을 압제하는 도구가 된다고 주장하며 민병대 체제를 소련 군사력의 근간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모병제나 전문적인 군인 집단에 거부감을 가졌던 이유는 19세기 초 까지도 용병으로 이뤄진 직업군대가 민중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던 유럽의 역사에 기인합니다. V. G. Kiernan이 여러 사례를 들어 잘 지적했듯 절대 왕정시기 주로 외국인으로 만들어진 용병군대는 국민을 억압하는 도구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고용주인 부르봉 왕가에 충성하며 시민들을 상대로 최후까지 항전한 스위스 용병들의 이야기는 슬프기도 하지만 역으로 뒤집어보면 용병군대가 얼마나 절대권력의 이익에 충실히 복무하면서 국민을 짓밟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절대왕정의 성립과정에서 중앙 권력에 의한 무력 장악이 중요한 과정이었다는 것은 정치사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이죠.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런 역사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개병제에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장 경제 원리에 따라 모병제를 도입한 미국의 군대가 과연 모든 조건에서 잘 돌아가고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닉슨은 선거운동 기간에 모병제가 사실상의 용병제라는 국민개병제 옹호자들의 주장에 대해 미국의 모병제는 미국 시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현재 미국은 모병율 저하로 시민권이 없는 영주권자까지 모병 범위를 확대하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병사 일인당 소요되는 인건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비용 대 효용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지요. 미국은 꾸준히 모병에 따른 인건비 증가와 병력 확충의 어려움에 따른 전쟁 수행능력 부족을 겪고 있습니다.
모병제로 움직이는 이라크의 미군은 징병제로 움직였던 40년 전 베트남의 미군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전 하에서 어려움에 봉착해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교리와 전술의 문제입니다. 모병제로 만들어지는 오늘날의 미군은 분명히 강력하고 매우 우수한 군대입니다. 하지만 이라크에서는 여전히 40년 전 징병제 시절과 마찬가지의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모병제가 만능이 아님을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 입니다. 모병제로 만들어진 군대도 적절한 교리와 전술이 없다면 국민개병제로 이뤄진 군대만도 못 한 것이 현실입니다. 즉 뒤집어 말하면 합리적으로 운영 되고 적절한 교리와 전술이 있다면 국민개병제로 만들어진 군대도 충분히 잘 움직일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지금 한국의 국민개병제가 수많은 문제점을 노출 시키고 있고 비능률적이라고 혹평 받는 것은 운영 방식이 잘못된 것이지 국민개병제가 모병제보다 나쁜 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은 국민개병제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굳이 제가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많은 분들이 군대를 다녀오셨기 때문에 그 폐해를 경험적으로 잘 아실 것 입니다. 하지만 폐해가 많다고 하더라도 모병제 말고도 현재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은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칭 진보들은 모병제냐 징병제냐의 단순한 이분법적 논지만 전개하고 있습니다. 답답할 따름입니다.
사족 하나 더. 모병제로 이뤄진 군대가 국민개병제로 이뤄진 군대보다 더 우수하다면 극도로 우수한 전투력을 보여줬던 2차대전기의 독일 국방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핸슨 볼드윈 같은 초기의 미국 모병제 지지자들은 국민개병제의 비효율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독일의 “전격전”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전격전”을 수행한 독일의 군대는 국민개병제로 만들어진 군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웃기는 일 이지요.
국내에서 진보로 자처하는 인사들의 모병제 논의가 단순히 겉멋만 잔뜩 든 언어유희에 불과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저 혼자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칭 진보들이 시장논리를 만병통치약인 양 전면에 내세우고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군사력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무관심 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물론 시장의 논리도 중요하며 많은 경우 사회에 유익한 작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한국의 “모병제”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모병제에 대해 더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진보적”인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의는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의 논의와 유사하다는 점이지요.
닉슨의 참모 중 하나였던 밀튼 프리드먼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가지고 징병제를 공격했던 대표적 인사입니다. 프리드먼은 “국민개병제”로 만들어진 군대는 노예의 군대라고 조소하기도 했습니다.(이건 프리드먼이 국민 개병제의 정치적 의미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무시했다는 이야기죠)
당시 모병제에 찬성하는 시장주의자들은 모병제를 실시하더라도 육군이 필요로 하는 병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으며 군대의 효율도 보장될 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모병제를 실시한 직후부터 심각한 인건비 상승과 효율 저하에 시달렸습니다. 1968년 미군은 320만명의 병력에 320억달러(국방비의 42%)의 인건비를 지출했지만 징병제 폐지 2년차인 1974년에는 병력 220만에 439억달러(국방비의 56%)의 인건비를 지출했습니다. 직업군인의 증가로 이에 필요한 부대비용(특히 가족 부양에 필요한)이 급증했고 전반적인 급여가 증가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정치적 논의가 활발한 유럽의 경우는 “진보” 또는 “좌파”로 자처하는 인사들이 “국민개병제”를 옹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J. Erickson의 기념비적인 저작, The Soviet High Command는 혁명 초기 소련에서 전개된 국방제도의 골격에 대한 공산당내 좌우파의 논의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소련의 공산당 좌파들은 9차 전당대회에서 “전문화된 군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에 대해 군사력이 민중으로부터 괴리될 경우 그 군사력은 민중을 압제하는 도구가 된다고 주장하며 민병대 체제를 소련 군사력의 근간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모병제나 전문적인 군인 집단에 거부감을 가졌던 이유는 19세기 초 까지도 용병으로 이뤄진 직업군대가 민중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던 유럽의 역사에 기인합니다. V. G. Kiernan이 여러 사례를 들어 잘 지적했듯 절대 왕정시기 주로 외국인으로 만들어진 용병군대는 국민을 억압하는 도구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고용주인 부르봉 왕가에 충성하며 시민들을 상대로 최후까지 항전한 스위스 용병들의 이야기는 슬프기도 하지만 역으로 뒤집어보면 용병군대가 얼마나 절대권력의 이익에 충실히 복무하면서 국민을 짓밟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절대왕정의 성립과정에서 중앙 권력에 의한 무력 장악이 중요한 과정이었다는 것은 정치사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이죠.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런 역사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개병제에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장 경제 원리에 따라 모병제를 도입한 미국의 군대가 과연 모든 조건에서 잘 돌아가고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닉슨은 선거운동 기간에 모병제가 사실상의 용병제라는 국민개병제 옹호자들의 주장에 대해 미국의 모병제는 미국 시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현재 미국은 모병율 저하로 시민권이 없는 영주권자까지 모병 범위를 확대하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병사 일인당 소요되는 인건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비용 대 효용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지요. 미국은 꾸준히 모병에 따른 인건비 증가와 병력 확충의 어려움에 따른 전쟁 수행능력 부족을 겪고 있습니다.
모병제로 움직이는 이라크의 미군은 징병제로 움직였던 40년 전 베트남의 미군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전 하에서 어려움에 봉착해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교리와 전술의 문제입니다. 모병제로 만들어지는 오늘날의 미군은 분명히 강력하고 매우 우수한 군대입니다. 하지만 이라크에서는 여전히 40년 전 징병제 시절과 마찬가지의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모병제가 만능이 아님을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 입니다. 모병제로 만들어진 군대도 적절한 교리와 전술이 없다면 국민개병제로 이뤄진 군대만도 못 한 것이 현실입니다. 즉 뒤집어 말하면 합리적으로 운영 되고 적절한 교리와 전술이 있다면 국민개병제로 만들어진 군대도 충분히 잘 움직일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지금 한국의 국민개병제가 수많은 문제점을 노출 시키고 있고 비능률적이라고 혹평 받는 것은 운영 방식이 잘못된 것이지 국민개병제가 모병제보다 나쁜 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은 국민개병제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굳이 제가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많은 분들이 군대를 다녀오셨기 때문에 그 폐해를 경험적으로 잘 아실 것 입니다. 하지만 폐해가 많다고 하더라도 모병제 말고도 현재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은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칭 진보들은 모병제냐 징병제냐의 단순한 이분법적 논지만 전개하고 있습니다. 답답할 따름입니다.
사족 하나 더. 모병제로 이뤄진 군대가 국민개병제로 이뤄진 군대보다 더 우수하다면 극도로 우수한 전투력을 보여줬던 2차대전기의 독일 국방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핸슨 볼드윈 같은 초기의 미국 모병제 지지자들은 국민개병제의 비효율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독일의 “전격전”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전격전”을 수행한 독일의 군대는 국민개병제로 만들어진 군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웃기는 일 이지요.
국내에서 진보로 자처하는 인사들의 모병제 논의가 단순히 겉멋만 잔뜩 든 언어유희에 불과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저 혼자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칭 진보들이 시장논리를 만병통치약인 양 전면에 내세우고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군사력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무관심 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물론 시장의 논리도 중요하며 많은 경우 사회에 유익한 작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2006년 4월 25일 화요일
두개의 군대, 두개의 혁명(재탕+약간 수정)
정치는 현실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래서 그런지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도 정권을 잡으면 그들이 뒤엎은 세력들 보다 더 정치적이 된다. 하기사. 대한민국의 얼치기 혁명가들은 이상도 없는 주제에 현실 감각도 없지...
이상주의자들이 가장 현실과 타협을 잘 하게 되는 것이 정치고 정치 중에서도 군사문제가 최고인 듯 싶다.
그 사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건 아마도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오늘날 책을 통해서 접하는 절대 왕정시기 일반 사병의 군대 생활은 안락하고 좋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던 것 같다. 기본적인 의식주 자체가 형편 없었고 당시의 보병 전술 상 엄한 군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군대내에서 구타도 공식적으로 장려 되었다고 하니까. 1764년에 베를린을 방문했던 보스웰(James Boswell)이란 영국인은 한 프로이센 보병연대의 훈련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유럽 최고의 군대라는 프로이센 군대의 훈련을 참관한 보스웰의 소감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공원에서 한 프로이센군 연대가 훈련하는 것을 구경했다. 병사들은 매우 겁에 질려있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훈련 중 조금만 실수하더라도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평상시의 생활이 이렇게 가혹하니 전쟁 때는 오죽 했을까. 7년 전쟁 다시 프로이센군의 병력 손실 중에서 약 8만 명이 탈영으로 인한 손실이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프로이센군대의 탈영에 대해 연구한 단행본도 한 권 있는 모양이다.
이러던 와중에 프랑스 혁명이 터졌다. 혁명으로 멋진 신세계로 변한 프랑스에서는 군대까지 멋진 신세계가 돼 버렸다. 평소 군생활이 비참했으니 이참에 한번 갈아보자!! 하는 게 정상이긴 하겠지만 그게 좀 정도가 지나쳤던 것 같다. 혁명 덕택에 대부분 귀족 출신인 장교들의 권위는 땅바닥에 처 박히게 됐다.
혁명으로 귀족들의 권위를 지탱해주던 사회 구조가 통째로 붕괴되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1788년 당시 9,478명이던 장교 중 약 6,000명 정도가 1791년에서 1792년 사이에 군대를 그만 두고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숨어 버렸다고 한다.
그 덕택에 프랑스 군대는 매우~ 매우~ 자율적인 군대가 되어 버렸다. 이제 장교를 병사들의 투표로 선출하고 갈아 치워 버렸으니 군대꼴이 제대로 돌아갈리가 없었다. 빠 드 깔레 연대 1 대대는 고다르(Godart)라는 부사관을 대대장으로 선출했는데 고다르가 훈련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당장 들고 일어나서 고다르를 교수형에 처하려 했다고 한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다행히도 고다르는 목숨을 건져서 나폴레옹이 황제가 됐을 때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자율적으로 험악하게 나가니 차라리 탈영을 하는 병사는 양반축에 들어갔다. 물론 탈영도 너무 많이 하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혁명 직전에 182,000명이었던 정규군은 1792년에는 11만 명으로 격감했다. 많은 병사들은 귀찮게 자율적으로 부대를 운영하는 것 보다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쪽을 더 선호했던 모양이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어쨌든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도 혁명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군대의 규율을 바로 잡아야 했다. 결국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은 체제 유지를 위해서 군사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그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잘 잡힌 규율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시작한 군대 개혁이란 솔직히 말해서 구체제하의 엄격한 규율을 다시 도입하는 것 이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헌병이야 말로 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 했다고 한다. 결국 혁명으로 인한 자유의 열기는 최소한 군대에서는 완전히 사그러 들었다.
사회는 자유로울 수 있어도 군대는 결코 그럴 수가 없는 조직이니.
그리고 대략 130년 뒤에 역사는 비슷하게 반복 됐다.
1917년, 이번에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 군대도 구타라면 유럽에서 손꼽히는 국가였다. 요즘도 러시아 군대의 구타는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하는걸 보면 러시아 군대는 별로 진보한 것 같진 않지만. 군인에 대한 처우도 좋지 않아서 하급 장교들은 기차의 2등 칸을 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예산 절감을 위해서 하급 장교들에게는 3등칸 요금만 지급했다나?
러시아는 표면상으로는 19세기 중반의 농노 해방 등의 개혁을 취해서 18세기 말의 프랑스 같은 체제는 아니었다. 실제로 장교 집단의 계급 구성을 보면 대령급 이하 장교의 40%는 과거의 농노 계급 출신이었다고 한다. 특히 보병 병과는 과거 농노였던 계층 출신의 장교들이 많았다고 한다.(상대적으로 기병 병과는 귀족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근위사단 같은 핵심 보직은 귀족 출신 장교들이 차지했다. 농노 계층 출신 장교들의 교육 수준과 자질이 낮았기 때문에 귀족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봐야 서유럽,특히 독일 장교단과 비교하면 러시아 장교들의 수준은 도토리 키재기 였지만.
러시아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혁명이 터지자 군대의 규율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이미 2월 혁명당시 군대는 충분히 엉망이 된 상태였다. 전쟁에 염증을 느낀 병사들은 제멋대로 탈영해서 귀향해 버리거나 부대에 남아 있더라도 장교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레닌이 10월 혁명을 일으킬 무렵에는 러시아 군대의 상태가 충분히 엉망이었다. 볼셰비키들의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한 정부군은 오히려 사병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해 버리면서 그대로 붕괴되었고 총사령관 두호닌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모길료프역 앞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오오 혁명 만세! 혁명 직후 볼셰비키는 장교 계급을 폐지하고 호칭을 사단지휘관, 연대지휘관 같은 식으로 바꿔 버렸다. 그리고 역시 프랑스 처럼 지휘관을 투표로 선출했다. 대개는 인기 많은 부사관들이 중대장이나 포대장으로 많이 선출 되었다고 한다. 35 보병사단의 경우 혁명 전에는 상병이었던 병사가 투표에 의해 사단 참모장으로 선출 됐다고 한다.
귀족 출신 장교들을 불신했던 자코뱅들처럼 볼셰비키들도 짜르 체제에서 양성된 장교들을 혐오했다. 혁명 직후에 약 8,000명의 장교가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지만 많은 볼셰비키들은 노동자 계급으로 새로운 장교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교들에게는 다행히도 내전이라는 불씨가 볼셰비키들의 발등에 떨어졌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투표로 선출된 지휘관들 상당수는 지휘 능력이 없다는게 드러났고 지나치게 “민주화된” 군대는 제대로 전투를 하지 못 했다.
트로츠키는 내전 초반에 30개 사단을 조직할 계획이었지만 전황이 악화되자 1918년 5월에는 추가로 58개 사단을 더 편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신규 부대 편성은 한시가 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짜르 시절의 장교들은 거의 대부분 지원만 하면 받아 들여졌다. 결국 구 체제의 장교들은 슬금 슬쩍 새로운 체제에 편입될 수 있었다. 내전이 끝난 뒤에 공산당은 다시 장교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30년대에 들어가면서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중단되고 장교의 권위는 상승했다. 그리고 2차 대전을 거친 뒤 등장한 “소련군(소련 군대가 정식으로 “소련군”이라고 불린 것은 2차 대전 이후라고 한다.)”은 장교의 권위가 절대적이 된 강압적인 군대가 돼 버렸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잘 보여주듯이 혁명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전쟁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는 절대 수행할 수 없는 일 이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구 체제의 군사 엘리트들을 불신했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이 만든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구체제 하에서 육성된 군사 엘리트들에 의존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정말 세상은 재미있는 곳이다. 뭐, 이런 몇 개의 사례를 보면 역사라는 건 돌고 도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는 대략 아래와 같다.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Gunther E. Rothenberg, The Art of Warfate in the Age of Napoleon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
Mark von Hagen, Soldiers in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 The Red Army and the Soviet Socialist State, 1917-1930
M. S. Anderson, War and Society in Europe of the old regime 1618-1789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Victor Serge, 러시아 혁명의 진실(한국어판)
그래서 그런지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도 정권을 잡으면 그들이 뒤엎은 세력들 보다 더 정치적이 된다. 하기사. 대한민국의 얼치기 혁명가들은 이상도 없는 주제에 현실 감각도 없지...
이상주의자들이 가장 현실과 타협을 잘 하게 되는 것이 정치고 정치 중에서도 군사문제가 최고인 듯 싶다.
그 사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건 아마도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오늘날 책을 통해서 접하는 절대 왕정시기 일반 사병의 군대 생활은 안락하고 좋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던 것 같다. 기본적인 의식주 자체가 형편 없었고 당시의 보병 전술 상 엄한 군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군대내에서 구타도 공식적으로 장려 되었다고 하니까. 1764년에 베를린을 방문했던 보스웰(James Boswell)이란 영국인은 한 프로이센 보병연대의 훈련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유럽 최고의 군대라는 프로이센 군대의 훈련을 참관한 보스웰의 소감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공원에서 한 프로이센군 연대가 훈련하는 것을 구경했다. 병사들은 매우 겁에 질려있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훈련 중 조금만 실수하더라도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평상시의 생활이 이렇게 가혹하니 전쟁 때는 오죽 했을까. 7년 전쟁 다시 프로이센군의 병력 손실 중에서 약 8만 명이 탈영으로 인한 손실이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프로이센군대의 탈영에 대해 연구한 단행본도 한 권 있는 모양이다.
이러던 와중에 프랑스 혁명이 터졌다. 혁명으로 멋진 신세계로 변한 프랑스에서는 군대까지 멋진 신세계가 돼 버렸다. 평소 군생활이 비참했으니 이참에 한번 갈아보자!! 하는 게 정상이긴 하겠지만 그게 좀 정도가 지나쳤던 것 같다. 혁명 덕택에 대부분 귀족 출신인 장교들의 권위는 땅바닥에 처 박히게 됐다.
혁명으로 귀족들의 권위를 지탱해주던 사회 구조가 통째로 붕괴되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1788년 당시 9,478명이던 장교 중 약 6,000명 정도가 1791년에서 1792년 사이에 군대를 그만 두고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숨어 버렸다고 한다.
그 덕택에 프랑스 군대는 매우~ 매우~ 자율적인 군대가 되어 버렸다. 이제 장교를 병사들의 투표로 선출하고 갈아 치워 버렸으니 군대꼴이 제대로 돌아갈리가 없었다. 빠 드 깔레 연대 1 대대는 고다르(Godart)라는 부사관을 대대장으로 선출했는데 고다르가 훈련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당장 들고 일어나서 고다르를 교수형에 처하려 했다고 한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다행히도 고다르는 목숨을 건져서 나폴레옹이 황제가 됐을 때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자율적으로 험악하게 나가니 차라리 탈영을 하는 병사는 양반축에 들어갔다. 물론 탈영도 너무 많이 하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혁명 직전에 182,000명이었던 정규군은 1792년에는 11만 명으로 격감했다. 많은 병사들은 귀찮게 자율적으로 부대를 운영하는 것 보다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쪽을 더 선호했던 모양이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어쨌든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도 혁명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군대의 규율을 바로 잡아야 했다. 결국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은 체제 유지를 위해서 군사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그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잘 잡힌 규율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시작한 군대 개혁이란 솔직히 말해서 구체제하의 엄격한 규율을 다시 도입하는 것 이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헌병이야 말로 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 했다고 한다. 결국 혁명으로 인한 자유의 열기는 최소한 군대에서는 완전히 사그러 들었다.
사회는 자유로울 수 있어도 군대는 결코 그럴 수가 없는 조직이니.
그리고 대략 130년 뒤에 역사는 비슷하게 반복 됐다.
1917년, 이번에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 군대도 구타라면 유럽에서 손꼽히는 국가였다. 요즘도 러시아 군대의 구타는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하는걸 보면 러시아 군대는 별로 진보한 것 같진 않지만. 군인에 대한 처우도 좋지 않아서 하급 장교들은 기차의 2등 칸을 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예산 절감을 위해서 하급 장교들에게는 3등칸 요금만 지급했다나?
러시아는 표면상으로는 19세기 중반의 농노 해방 등의 개혁을 취해서 18세기 말의 프랑스 같은 체제는 아니었다. 실제로 장교 집단의 계급 구성을 보면 대령급 이하 장교의 40%는 과거의 농노 계급 출신이었다고 한다. 특히 보병 병과는 과거 농노였던 계층 출신의 장교들이 많았다고 한다.(상대적으로 기병 병과는 귀족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근위사단 같은 핵심 보직은 귀족 출신 장교들이 차지했다. 농노 계층 출신 장교들의 교육 수준과 자질이 낮았기 때문에 귀족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봐야 서유럽,특히 독일 장교단과 비교하면 러시아 장교들의 수준은 도토리 키재기 였지만.
러시아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혁명이 터지자 군대의 규율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이미 2월 혁명당시 군대는 충분히 엉망이 된 상태였다. 전쟁에 염증을 느낀 병사들은 제멋대로 탈영해서 귀향해 버리거나 부대에 남아 있더라도 장교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레닌이 10월 혁명을 일으킬 무렵에는 러시아 군대의 상태가 충분히 엉망이었다. 볼셰비키들의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한 정부군은 오히려 사병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해 버리면서 그대로 붕괴되었고 총사령관 두호닌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모길료프역 앞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오오 혁명 만세! 혁명 직후 볼셰비키는 장교 계급을 폐지하고 호칭을 사단지휘관, 연대지휘관 같은 식으로 바꿔 버렸다. 그리고 역시 프랑스 처럼 지휘관을 투표로 선출했다. 대개는 인기 많은 부사관들이 중대장이나 포대장으로 많이 선출 되었다고 한다. 35 보병사단의 경우 혁명 전에는 상병이었던 병사가 투표에 의해 사단 참모장으로 선출 됐다고 한다.
귀족 출신 장교들을 불신했던 자코뱅들처럼 볼셰비키들도 짜르 체제에서 양성된 장교들을 혐오했다. 혁명 직후에 약 8,000명의 장교가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지만 많은 볼셰비키들은 노동자 계급으로 새로운 장교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교들에게는 다행히도 내전이라는 불씨가 볼셰비키들의 발등에 떨어졌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투표로 선출된 지휘관들 상당수는 지휘 능력이 없다는게 드러났고 지나치게 “민주화된” 군대는 제대로 전투를 하지 못 했다.
트로츠키는 내전 초반에 30개 사단을 조직할 계획이었지만 전황이 악화되자 1918년 5월에는 추가로 58개 사단을 더 편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신규 부대 편성은 한시가 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짜르 시절의 장교들은 거의 대부분 지원만 하면 받아 들여졌다. 결국 구 체제의 장교들은 슬금 슬쩍 새로운 체제에 편입될 수 있었다. 내전이 끝난 뒤에 공산당은 다시 장교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30년대에 들어가면서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중단되고 장교의 권위는 상승했다. 그리고 2차 대전을 거친 뒤 등장한 “소련군(소련 군대가 정식으로 “소련군”이라고 불린 것은 2차 대전 이후라고 한다.)”은 장교의 권위가 절대적이 된 강압적인 군대가 돼 버렸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잘 보여주듯이 혁명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전쟁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는 절대 수행할 수 없는 일 이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구 체제의 군사 엘리트들을 불신했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이 만든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구체제 하에서 육성된 군사 엘리트들에 의존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정말 세상은 재미있는 곳이다. 뭐, 이런 몇 개의 사례를 보면 역사라는 건 돌고 도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는 대략 아래와 같다.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Gunther E. Rothenberg, The Art of Warfate in the Age of Napoleon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
Mark von Hagen, Soldiers in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 The Red Army and the Soviet Socialist State, 1917-1930
M. S. Anderson, War and Society in Europe of the old regime 1618-1789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Victor Serge, 러시아 혁명의 진실(한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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