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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3일 수요일

Tank Gun Systems : The First Thirty Years, 1916-1945, A Technical Examination

 캐나다군 사관학교(잘 아시겠지만 캐나다는 3군 통합사관학교입니다.) 명예교수인 윌리엄 앤드류스(William Andrews)가 제1차 세계대전 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시기 전차포 체계를 정리한 Tank Gun Systems : The First Thirty Years, 1916-1945,  A Technical Examination를 출간했습니다. 한번 읽어보니 기갑차량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전차의 화력체계를 개괄적으로 해설하는 부분으로 2장 부터 5장까지 입니다. 2장에서는 전차의 화력체계를 구성하는 주포, 포가, 조준장치, 주퇴복좌기 등의 요소를 간략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3장은 전차포가 사용하는 각종 탄약과 장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4장은 전차포의 탄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5장은 전차포의 반동 제어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차포 체계에 대해 개괄적으로 다룬 다음에는 시기별 주요 전차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의 전차포를 종류별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전부 세개 장 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전차를 '대량으로' 생산한 국가가 영국과 프랑스 뿐이다 보니 영국(7장)과 프랑스(8장)의 전차포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고작 20대의 전차를 생산하는데 그쳤기 때문에 생략을 했습니다.


세 번째 부분은 1919년 부터 1939년 까지 '전간기'의 전차포를 다루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이 좋은 점은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군소국가의 전차포도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독일(10장), 프랑스(11장), 영국(12장), 소련(13장), 일본(14장), 이탈리아(15장), 체코슬로바키아(16장) 등 7개국의 전차포 발전에 대해 설명합니다.


마지막 네번째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시기 전차포의 발전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독일(18장), 체코슬로바키아(19장), 이탈리아(20장), 일본(21장), 소련(22장), 미국(23장), 영국(24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당한 상태였지만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개발한 37mm 전차포가 독일군에 의해 대규모로 사용됐기 때문에 별도의 장으로 분리했습니다.


이 책의 장점은 전차포라는 무기 체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기술적인 배경을 정리한 뒤, 국가별로 '실전에 사용한' 전차포를 정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반면 실전에 투입되지 못한 실험 단계의 전차포들을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종합적으로 봤을때 정리가 아주 잘되어 있어서 기갑차량의 발전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읽어볼 가치가 충분합니다. 추천합니다.


2023년 10월 3일 화요일

프랑스 싱크탱크 Institut Action Resilience의 러시아 기갑 전력 분석

 프랑스의 싱크탱크인 Institut Action Resilience에서 올해 8월 말에 How many tanks left for Russia now? - Study of Russian Army's tanks stockpile since the beginning of Ukraine's invasion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이후 수많은 보고서가 발표됐습니다. 특히 러시아군 기갑부대의 형편없는 작전 능력과 막대한 피해, 그리고 현황에 관해서도 많은 보고서가 발표됐습니다. 이 보고서는 우크라이나군의 공세가 시작된 이후 발표됐다는 점에서 관심을 끕니다.  Institut Action Resilience에서는 9월에 이 보고서의 부분 개정판을 발표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러시아의 예비 기갑차량 비축기지의 현황과 여기에 비축된 전차의 숫자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련이 붕괴한 뒤 러시아가 인계받은 예비 비축기지들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러시아군은 9개의 예비 전차 비축기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중 다수는 중부군관구와 동부군관구에 있습니다. 중부군관구에는 제349, 1311, 2456, 2544, 6018기지가, 동부군관구에는 제111, 769, 1295기지가 있습니다. 또한 다른 예비 비축기지에도 소량의 기갑차량이 비축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에 가까운 서부군관구에는 제22기지 한 개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군은 전차를 정비하기 위해 8개의 정비공장을 운영 중 이라고 합니다.(제61, 71, 72, 81, 103, 144, 163, 560공장)

 2022년 전쟁 발발 이전에 러시아군이 비축한 전차는 최대 7,000대 가량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이 중에서 야외에 보관된 차량이 5,538대입니다. 야외에 보관된 차량을 세부적으로 분석해 보면 형식이 확인된 예비차량 중 T-72가 1,945대이고 T-62는 1,239대라고 봅니다. 예비 차량 중 T-72와 T-62의 수량이 큰 차이가 안나는게 인상적입니다. 물론 실내에 보관된 차량과 형식을 알 수 없는 차량도 있으므로 이걸 액면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만 이번 전쟁에서 T-62 같은 고물들이 대량으로 튀어나온 이유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전쟁 발발 직전 러시아군의 비축 차량들을 분석해 보면 거의 대부분이 1980년 이전에 생산된 차량들이라고 합니다. 특히 T-72 중 1,100대가 우랄, 또는 A형이라고 하는 군요. B형은 330대 정도라고 평가합니다. T-90 같은 최신 차량은 극소수가 서부군관구의 제22기지에만 보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이 보고서의 내용 중 흥미로운 부분은 전쟁 발발 이후 비축차량의 감소를 분석한 부분입니다. 가장 많은 차량이 줄어들은 기지는 T-62등의 구식 차량을 보관하던 동부군관구의 제769기지입니다. 전쟁 발발 직전 1,117대의 차량을 야외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전쟁 발발 이후인 2023년 4월에는 630대 까지 감소했다고 평가합니다. 역시 T-62와 T-54/55, 소수의 T-80을 보관하고 있던 동부군관구의 제111기지는 전쟁 발발직전 890대에서 전쟁 발발이후 690대로 감소했습니다. 러시아군이 전쟁 초기에 대량의 전차를 상실해 이른 시기 부터 T-54/55와 T-62를 동원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T-72를 보관하고 있던 기지들도 마찬가지로 비축차량들이 줄어든 징후가 뚜렷하다고 평가합니다.

 러시아군이 비축 차량 재생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습니다. 예비기지에서 바로 가져온 전차를 재생하는데는 일반적으로 30일에서 최대 60일 가량이 걸린다고 합니다. 예비기지에 보관된 차량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아서입니다. 전쟁 이전의 통계를 보면 제103공장은 3년 동안 92대의 T-72B1을 재생했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이후의 재생 실적은 더 좋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제103공장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1개월에 평균 8대 가량의 전차를 재생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제61공장은 2016년 부터 2019년 까지 약 120대의 T-80BV를 재생했는데 이를 기반으로 평가하면 이 공장도 현재 제103공장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정부의 목표에 미달한다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여기에 예산 문제도 있습니다. T-72 한대를 창정비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3천만 루블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T-72B를 T-72B3 사양으로 개량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120만 달러, T-90을 T-90M 사양으로 개량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280만 달러 정도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전쟁 발발 이후 국방예산을 대폭 증액한 상황이라고는 해도 전차를 대량으로 생산/개량하는건 큰 부담입니다.

 이 보고서에서는 2022년 우랄바곤자보드의 신규 전차 생산을 10대, 구형전차 개량을 174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옴스크트란스마쉬는 구형전차 31대를 개량했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같은 기간 제61, 103, 163공장 세곳을 합쳐 90대에서 최대 180대의 창정비를 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서방의 경제제재와 러시아의 노동력 문제가 있으니 러시아의 생산 역량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보는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전차 생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므로 생산 능력은 다소 증가할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현재 추세가 계속되면 2024~2025년에는 러시아가 연간 최대 390대의 신형 전차를 신규생산/개량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여기에 창정비를 한 구식 전차까지 포함하면 상당한 규모가 될 겁니다.

 러시아가 전차를 확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서 현재 러시아군의 전차 보유량은 전쟁 발발 당시 보다 근소하게 증가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2022년 가을 이후 러시아군이 수세로 전환하면서 전차 손실이 감소했기 때문입니다. 이 보고서에서는 2023년 8월 말 러시아군이 보유한 전차 중 작전가능한 차량을 3,044대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전쟁 발발직전 2,987대의 작전가능한 전차가 있었으므로 아주 근소하게 증가한 셈 입니다. 물론 이중 상당수가 구식인 T-54/55 및 T-62이지만 일단 구식 전차라도 있으면 쓸 수 있습니다.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지요.

 향후 전망에 대해서는 3개의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러시아군의 전차 손실이 2022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계속되는 경우 입니다. 이 경우에는 2025년 1/4분기에 러시아군의 가용 전차 전력이 400~600대 수준으로 감소할 거라고 예측합니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이 성공할 경우입니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러시아군의 기갑전력이 급속히 감소합니다. 2025년 1/4분기가 되면 러시아군의 가용 전차 전력이 250대 가량으로 급감하는 시나리오입니다. 이 경우에는 방어작전 조차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은 지지부진하고 러시아군 기갑전력도 작년 처럼 큰 피해를 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는 경우입니다. 이건 우크라이나에게 비관적인 시나리오입니다. 이 경우 러시아군은 현재의 생산역량으로도 2024년 쯤 되면 상당한 규모의 기갑전력을 확보할 수 있을 거로 보고 있습니다.

 현재 전선의 교착상태를 보면 세 번째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제법 있어 보입니다.  만약 러시아의 전차 생산/재생 역량이 이 보고서에서 예측하는 것 이상으로 높다면 더 희망이 없을 겁니다. 우크라이나가 승리하는걸 바라는 입장에서 썩 기분이 좋지 않군요.

2023년 4월 23일 일요일

러시아의 전차 생산에 볼베어링 수급이 끼치는 영향

지난 4월 19일 포브스에 아주 재미있는 기사가 한 편 올라왔습니다. 


What’s Perfectly Round, Made Of Metal, And Keeping Russia From Replacing the 2,000 Tanks It’s Lost In Ukraine?


이 기사의 요점은 러시아의 정밀기계공업 수준이 너무 낮아서 전차 생산 및 개량에 필요한 볼베어링 수급이 어렵다는 겁니다. 러시아군이 T-62나 T-55 같은 고철을 끌고나오는 이유도 이런 고물들은 저급한 볼베어링을 사용하기 때문이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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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잃은 2,000대의 전차를 보충하는데 필요한 강철로 만들어진 완벽한 구체는 무엇인가?

데이비드 액스(David Axe)


러시아는 현대적인 광학부품이 부족해서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전쟁에서 잃어버린 수천대의 전차를 대체할 신형 T-72B3M, T-90M 전차의 신규생산과 구형 T-72, T-80, T-90을 정비하는데 제약을 받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전차 생산 기업들이 부족한건 광학부품 뿐이 아니다. 러시아는 볼베어링도 심하게 부족하다.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 산업계에 대한 제재조치를 강화하기 전 까지는 볼베어링을 미국과 유럽에서 수입했었다.

워싱턴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에서 발표한 최근의 연구를 보면 독립 연구자들이 이 문제를 수개월 전 부터 언급해왔다. 전차를 비롯한 현대적인 기갑차량들은 볼베어링이 많이 들어간다. 그리고 러시아는 신형 기갑차량을 꾸준히 생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볼베어링이 없다.

특히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 또 러시아 경제 전체가 철도 수송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점도 생각해 봐야 한다. 열차 또한 대량의 볼베어링이 필요하다. 러시아는 선택을 해야 한다. 전차를 더 생산하는 대신 철도 교통 체계가 붕괴하도록 두는 것이다. 아니면 철도 교통 체계를 유지하면서 전차 생산 속도를 늦추는 방법도 있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의 분석가 맥스 버그만(Max Bergmann), 마리아 스네고바야(Maria Snegovaya), 티나 돌바야(Tina Dolbaia), 닉 펜튼(Nick Fenton), 새무얼 벤데트(Samuel Bendett)는 이 문제를 지적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최고급 베어링을 서구 기업에서 수입해 왔다. 예를들어 2020년에 러시아는 4억1900만 달러 상당의 볼베어링을 수입했는데 이 중 55퍼센트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최대 무역 상대국인 독일은 2020년 한해 동안 러시아가 수입한 볼베어링의 17%를 공급했다.

2022년 2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북부, 동부, 남부로 진격해 들어가 전쟁이 확대되고 양측에서 수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우크라이나를 돕는 나라들은 러시아의 전략 산업에 대한 제재를 강화했다.

볼베어링 수출은 최우선 순위에 있었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의 분석가들은 이렇게 지적했다.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된 이후 서구의 베어링 제조기업들은 러시아에서 철수하고 러시아에 대한 판매를 중단했다."

볼베어링 수출 중단의 영향은 아주 빠르게 나타났다. 중단 조치를 취한지 몇 주 되지도 않아서 러시아의 신형 전차 생산과 구형 전차 정비를 담당하는 스베르들롭스크의 우랄바곤자보드와 시베리아의 옴스크트란스마쉬는 일시적으로 생산을 중단했다.

얼마 있지 않아 생산이 재개되기는 했지만 러시아 전차 제조업의 장기적 전망은 매우 나쁘다. 신형전차인 T-72B3M과 T-90M은 신형 광학장비가 필요하지만 이것들은 대개 프랑스에서 수입했다. 프랑스 정부가 제재를 강화하자 러시아 전차생산기업들은 신형 전차의 소스나U 디지털 조준기에 필요한 부품을 얻을 수 없었다.

러시아 정부는 소스나U 조준기 부족분을 러시아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한 아날로그 방식의 1PN96MT-02 조준기로 교체했다. 이 조준기는 소스나U 만큼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최소한 러시아 전차병들이 우크라이나 전차병들과 교전을 할 수는 있게 했다.

그런데 볼베어링 문제는 러시아 정부가 해결하기에는 더 어려울 수 있다. 소스나U 조준기를  1PN96MT-02 조준기로 교체한 이후에도 우랄바곤자보드와 옴스크트란스마쉬는 곤란한 상황에 있었다. 노동자들이 전차를 거의 생산하거나 정비한 상태에서 부품이 떨어져 버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14개월간 악전고투를 하면서 잃어버린 2,000대의 전차를 대체하는데 애를 먹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러시아군은 전선의 전차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1개월에 최소 150대의 신규 생산, 또는 재생한 전차가 필요하다.

물론 전쟁이 장기화 되기 시작했을때 러시아는 소량의 볼베어링 재고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철도  교통도 비축된 볼베어링을 필요로 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보충병력과 장비를 실어나르면서 러시아가 보유한 13,000대의 기관차들은 더 많은 볼베어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전차를 적게 생산할 것이냐 아니면 러시아 전역의 교통망을 마비시킬 것이냐는 선택지 중에서 현명한 선택을 했다. 전차 생산을 줄인 것이다.

우랄바곤자보드와 옴스크트란스마쉬의 활동을 신중하게 분석한 결과 이 두 공장은 매달 몇십대 정도의 신형 전차를 출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형 전차란 새로 생산한 T-72B3M이나 T-90M 또는 기술자들이 장기간 보관되어 있던 것을 가져와 재생한 T-72, T-80, T-90 등이다.

그러니 러시아가 '기술적인 면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80년대 이래 보관 상태로 썩어가고 있던 1960년대의 골동품 T-62나 1950년대의 골동품 T-55를 다시 끌고나온 이유를 알 수 있다.

구식 전차들은 최신 부품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고 볼베어링도 적게 들어간다. 이런 구식전차들은 장비 상태가 좋은 우크라이나군을 상대로 정면 대결을 하기에는 답이 없지만 최소한 우크라이나군의 발을 묶는 정도는 할 수 있다. 어떤 러시아 당국자는 볼랴 미디어에 이렇게 말했다. "이런 면에서 T-55는 자원을 절약하고 시간을 벌 수 있는 수단입니다."

수백대의 T-62와 T-55가 일시적으로 러시아군의 뚫린 구멍을 메우는 동안 러시아의 산업계는 다른 볼베어링 수급처를 찾아 신형 전차 생산을 재개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가장 확실한 대체처는 중국과 말레이시아이다. 하지만 중국제와 말레이시아제 볼베어링은 미국제나 유럽제 베어링에 비해 품질이 떨어진다. CSIS의 분석팀이 지적한 것 처럼 질이 떨어지면 치러야 할 댓가가 있다.

"러시아는 서구로 부터 수입하던 베어링의 대체품을 찾아서 전쟁을 계속할 수 있을 정도로 군수 분야의 생산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체품으로 들여온 베어링은 대부분 질이 떨어지는 것들이라 신뢰성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니 러시아가 품질 좋은 베어링을 질이 낮은 베어링으로 교체해서 전차 생산을 늘리는데 성공할 수는 있다.  또한 현대적인 디지털광학장비를 질이 떨어지는 아날로그광학장비로 교체했던 것 처럼 말이다. 이렇게 만든 전차를 최신형 전차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이렇게 만든 물건들도 껍데기만 보면  T-72B3M이나 T-90M 같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내부를 뜯어보면 성능도 떨어지고 내구도도 낮은 전차일 것이다.

2016년 12월 4일 일요일

[번역글] 전차는 1918년에 영국군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



불법날림번역 한 편 나갑니다. 원래 전차 등장 100주년을 맞아 기념 포스팅(?)을 하나 하려다가 정신이 없어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그냥 넘어가기는 찝찝해서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논문 한편을 번역해 봅니다. 이 논문은 좀 오래된 논문인데, 1992년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27-3에 실린 팀 트래버스Tim Travers의 “Could the Tanks of 1918 Have Been War-Winners for the British Expeditionary Force?”입니다. 이 글은 1차대전 당시 전차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는 전통적인 시각의 연구입니다. 전차 등장 100주년에 알맞은 글이 아닐까 싶네요. 이 글에서는 영국원정군 사령부가 전차 운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상반되는 견해도 존재합니다. 관련된 글도 나중에 소개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 영국쪽 직제의 번역어는 마땅한게 생각나지 않아서 임시로 붙인게 많습니다. 적합한 번역어가 있으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번역어에 대한 조언 환영합니다.



전차는 1918년에 영국군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

팀 트래버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차에 관해서는 다양한 평가와 주장이 있다. 가장 먼저 윌리엄스-엘리스Clough Williams-Ellis 소령, 풀러J. F. C. Fuller 소장, 리델 하트B. H. Liddell-Hart소령 등의 전차 옹호자들이 집필한 영국원정군 전차군단Tank Corps의 공간사에서는 전차를 제병협동전투의 한 요소였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전차야 말로 1918년의 승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혁명적인 무기체계였다는 주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그 뒤 영국 기갑병과에서는 1918년 당시의 전차에 약점이 많았고, 기계적인 신뢰성도 낮았으며, 손실율이 높았다는 점을 들어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러한 비판적인 평가 중 하나로는 군사사가 존 터레인John Terraine의 주장이 있다. 그는  “1918년 당시의 전차는 기계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그것을 운용했던 인간의 관점에서 볼때 결코 승리를 가져다 준 무기가 아니었다.”라고 잘라말했다. 비드웰Bidwell과 그레이엄Graham은 터레인 보다는 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들은 전차를 보병과의 적절한 협동을 통해 운용했을때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당시 전차의 신뢰성이 부족했다는 점이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1)
 만약 전차를 올바르게 운용했고, 대량으로 투입할 수 있었다면 전차가 ‘승리의 무기’는 못 됐더라도 최소한 1918년 전역에서 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 하려면 밀접하게 연관된 두 가지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첫 번째는, 1918년 당시 일련의 연속적인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을 만큼 많은 수의 전차를 확보해서 기계화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핵심 무기체계로 사용할 수 있었는가 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1918년 전역에서 전차를 보다 효율적인 방식으로 운용했다면 더 큰 성과를 거두고 실제 역사와는 달리 막대한 손실도 없었을 것인가 이다. 만약 그렇다면 충분한 준비와 병과간 협동이 이루어진 주요 공세작전에서 전차를 보다 많이 운용했을 것이며, 공세에 투입할 수 있는 전차의 숫자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투입가능한 전차의 숫자에 대한 첫번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기 전에, 1917년 말 부터 1918년 중반까지 영국 육군과 육군최고회의Army Council, 영국 전시 내각에서 ‘기계화 전쟁’이라고 불리게 될 전쟁 방식을 지지하는 집단과 전통적인 전쟁 방식을 지지하는 집단 간에 중요한 논쟁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논쟁은 인력 부족 문제로 인해 시작되었는데, 캉브레Cambrai, 아멜Hamel, 아미앵Amiens 등의 성공적인 제병협동 공세로 인해 기계화 전쟁의 지지자들이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2)
기계화 전쟁의 지지자들은 기계화된 수단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며, 전차ㆍ항공기ㆍ기관총ㆍ박격포ㆍ화학무기와 포병에 중점을 두고 보병은  공격이나 방어시 이를 지원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전통적인 전쟁 방식의 지지자들은 보병(인력)을 중점에 두고 포병, 그리고 전차와 항공기 같은 기계들은 보병의 전진을 지원하는 보조적인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육군은 이 두가지 주장으로 양분되지는 않았다. 많은 장교들이 두 주장 사이의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 논쟁은 전쟁에 대한 태도와 관점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주장은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영국원정군 사령관 더글라스 헤이그Douglas Haig 장군은 전통적인 관점을 지지하고 있었다. 반면 군수장관 윈스턴 처칠, 전차 및 기관총 병과의 장교 대부분, 병기감Master General of the Ordnance 윌리엄 퍼즈Sir William Furse 장군, 총참모장CIGS 헨리 윌슨Henry Wilson 장군, 부참모장DCIGS 팀 해링턴Tim Harington 장군을 비롯한 집단은 기계화 전쟁을 지지했는데 기계화의 수준에 대한 입장은 상이했다.3)
기계화의 수준이 다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중 하나는 퍼즈 장군의 입장이다. 퍼즈 장군은 공세시 보병을 대규모로 집중하는 것에 반대하고 그 대신 전차와 연막탄, 포병 활용을 늘리고 보병은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국 제1군 사령관 혼Lord Horne 장군은 1918년 6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계화 장비를 늘려 대응해야만 한다. 나는 이것을 기계력machine-power이라고 정의한다. 기계력이란 포병, 기관총, 자동소총, 전차를 비롯해  보병을 지원하여 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포함한다.”

영국 제1군의 기관총 참모Machine Gun Advisor 린제이Lindsay 중령도 기계화를 지지하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1918년 7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미래의 공격 작전에서는 항공기, 전차와 같은 기계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며 자동화기와 박격포를 주무장으로 한 병력과 함께 작전을 펼칠 것이다.”4)

이 글에서는 해당 논쟁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논쟁이 특히 헤이그 장군과 영국원정군사령부 단위에서 전차를 평가하고 운용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제 전차의 숫자라는 첫번째 질문으로 돌아가자. 1918년 8월 8일 부터 12일에 걸쳐 진행된 아미앵의 보전포 협동 공세 이후 비슷한 규모의 공세를 계속할 만큼의 전차가 부족했다는 통념이 있다. 이러한 통념은 아미앵 공세 당시의 전차 손실 통계로 인해 생겨났는데, 통계를 오독한 결과였다. 여러 역사가 중, 존 터레인은 그의 저서 To Win a War에서 아미앵 공세가 끝난 1918년 8월 12일 당시 가동 가능한 전차는 단 여섯대만 남아있었으며, “독일 제국을 전차 여섯대로 무너트릴  수는 없은 것 이었다.”고 평했다. 마찬가지로 비드웰과 그레이엄도 아미앵 공세당시 414대의 전차가 투입됐으나 “공세 이틀째에는 185대로 줄어들었고, 사흘째에는 85대, 나흘째에는 38대,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6대로 줄어들었다.”고 서술했다. 이 통계는 영국육군 공간사Official History에서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할 것이다.5)
아미앵 공세에서 전차 손실이 많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당시에 작성된 영국육군 전차군단의 기록에도 유사한 통계가 나타난다. 영국육군 전차군단이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8월 8일 공세 시작당시에는 425대의 전차가 있었으나 8월 9일에는 145대로 줄어들었고, 8월 10일에는 74대, 8월 11일에는 39대만이 남아있었다. 이것은 8월 11일까지 386대의 전차가 손실처리되었다는 의미이다.(425대 중 39대 만이 남았으므로) 하지만 이 기록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수치는 해당 날자가 시작했을때 투입할 수 있었던 전차의 숫자를 집계한 것이지, 가동가능한 전차를 모두 집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풀러에 따르면 8월 8일 저녁 당시 전차 승무원들의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장거리를 진격한 끝에, 그리고 하루 종일 격렬한 전투를 치른 탓에 극도로 피로한 상태였다.(가장 많이 진격한 곳에서는 7.5마일을 진격했다.) 이때문에 다음날의 작전을 위해 혼성중대를 편성하기 위해서라도 휴식이 필요했다. 예비 전차는 몇대 없는 상태였다….”

이 글에 따르면 문제는 실제 전차 손실 보다는 예비 전차가 부족했던데 있었다. 아미앵 공세의 마지막 날이었던 8월 12일에 전차군단 본부가 작전을 중단한 이유는 전차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령관GOC, General Officer Commanding 휴 엘리스Hugh Elles 소장이 전장의 지형을 공세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아미앵 공세의 마지막날 영국군은 과거 솜 전투가 있었던 지역에 도착했다.) 그래서 제10전차대대만 제3군단을 지원해 계속 작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1918년 8월 17일 전쟁성War Office이 군수산업부Ministry of Munitions에 보낸 서신을 보면 “아미앵 방면의 작전에서 포병 사격에 의해 상실된 전차는 120대에 달한다.”는 내용이 있다. 즉 실제로 여러가지 원인으로 가동불능이 된 전차가 많기는 해도 독일군에 의해 격파된 전차는 425대 중 120대 정도에 불과했다는 뜻이다.6)
이 통계는 실제로 전투 손실 처리된 전차가 통념에 비해 훨씬 적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통계를 뒷받침 해 줄 자료가 더 있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아미앵 공세가 끝나고 5일이 지난 뒤인 1918년 8월 17일 당시의 전차 통계를 알 수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의 영국원정군이 1918년 8월 17일 당시 보유한 가동 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 마크V(병력 수송형) 122대, 마크V 중전차 242대, 마크IV 중전차 250대, 중형전차A 휘펫 124대, 야포 견인용 전차 29대, 수송용 전차Tank Tender 175대, 르노 경전차 10대, 장갑차 16대 등 총 968대의 기갑차량이 있었다.
이 통계에는 전장에서 회수해 수리중인 것은 빠져있다. 당시 마크V 중전차 153대가 수리중이었다. 그런데 이 문서에서는 별도로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영국군이 보유한 968대의 기갑차량 중에는 당시 프랑스의 훈련소에 배치되어 훈련용으로 사용되던 차량도 포함되어 있다.7) 그렇다면 5일간의 아미앵 공세에서 가동 가능한 전차 중 많은 수가 상실되었다는 주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실제로는 격파됐다고 간주된 전차 중 많은 수가 경미한 수준의 손상, 일시적인 전열 이탈, 혹은 기계적 고장, 연료 부족, 또는 정비를 위해 후방으로 이동 했거나 승무원의 피로로 인해 작전 수행이 불가능해 진 것을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승무원의 피로가 누적되어 작전 수행이 어려워 진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전차 승무원들은 보통 하루 평균 여덟시간 이상의 작전을 버틸 수 없었다. 기계적 고장이나 전차 승무원의 피로와 같은 문제들은 대부분 단기간 내에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8)
즉 아미앵 전투 당시 다수의 전차와 전차 승무원은 일시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며, 단기간 내에 전열에 복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전투 불능이 되어 후방의 대규모 정비소에서 수리를 받아야 했던 차량은 386대가 아니라 200대 정도였을 것이다. 아미앵 공세 당시 전차군단이 대규모의 전차로 공세를 계속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은 예비 전차와 예비 승무원의 부족이었다. 전차 숫자를 추정할 수 있는 다른 요소는 심각한 손상을 입은 전차를 수리하는 속도이다. 영국군의 전차 정비 기간을 알 수 있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918년에는 정비에 소요되는 시간이 단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8년 8월 하순에는 일주일에 수리되는 전차가 18대 정도였고 9월 초에는 20~30대 수준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10월 하순에는 일주일에 정비되는 마크V 중전차의 숫자가 33~35대 수준으로 늘어났다.9) 아미앵 공세와 그 직후에 전차군단의 가용 전력이 회복된 데는 전차 정비의 효율이 높아진 것이 부분적으로는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큰 손상을 입은 전차를 수리한 것이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에 큰 영향을 끼칠 수준은 아니었다. 아미앵 공세 이후 가용 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전차 생산량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18년 6월까지 400대의 마크V 중전차가 생산될 예정이었고, 동시에 마크IV 전차의 생산이 중단되면서 마크VIII 전차와 중형C 전차의 생산이 개시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군수산업부의 통계에 따르면 1918년 7월까지 생산된 전차는 129대에 불과했으며, 8월에는 81대가 생산되는데 그쳤다. 프랑스의 전장에 보급된 전차의 숫자는 1918년 9월 첫째주에 총 34대에 불과했으며, 10월에 배치된 숫자도 평균적으로 이 수준에 머물렀다.10)  다양한 생산차종과 영국의 노동력 및 생산 문제로 인한 전차 생산 부족은 전선에 배치된 전차의 숫자를 늘리는데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대규모 전투 직후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전차를 회수하는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전차의 높은 내구성과 전차 승무원들의 빠른 회복, 그리고 경미한 손상을 입은 전차를 신속하게 수리해 투입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전선에 배치된 전차의 숫자는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전차의 내구성은 전차를 완전히 파괴하고 승무원을 살상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는 점과 연관되어 있다.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된 전차는 극소수였다. 1918년 8월 8일에서 11월의 종전시까지 전투에 투입된 1,993대의 전차와 장갑차 중에서 손상을 입거나 참호에 빠져 회수된 것은 총 887대였다. 그러나 윌리엄스-엘리스와 풀러의 저작에 따르면 이중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을 입은 것은 15대에 불과했으며 완전 손실로 처리된 비율은 0.75%라는 극히 낮은 수준이었다. 비록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으나, 전차군단 사령관이었던 엘리스 소장에 따르면 실제로는 이보다 약간 높은 손실율을 예측했다고 한다. 1918년 9월 5일, 엘리스는 8월 8일 부터 투입한 1,173대의 전차와 장갑차 중에서 30~40대 가량의 완전 손실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이것은 완전손실율이 2.5~3.4%라는 뜻이었다. 1918년 10월 말 엘리스는 실제로 완전 손실로 처리된 전차가 50대 정도로 완전손실율이 2.5%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어떤 통계를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더라도 손상을 입거나 참호에 빠진 전차와 장갑차는 대부분 수리를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미한 손상은 승무원들이 직접 수리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다면 회수하여 수리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계속해서 진격했기 때문에 전장에 남은 전차들을 대부분 회수하는 것이 가능했다. 회수된 전차 중에서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된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1918년 10월 12일 전차군단의 기록을 보면 8월 8일 부터 전투에 투입되어 손상을 입거나 참호에 빠진 전차들은 사실상 모두 회수되었다.11)
전차와 전차 승무원들이 쉴새 없이 전투에 투입됐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배치된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높은 수준을 꾸준히 유지했다. 일반적으로 전쟁 말기에는 영국원정군에 가용가능한 전차가 격감했을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마크IV, 마크V, 마크V*와 중형A 전차를 모두 합쳐서, 10일간의 격전에도 불구하고 8월 30일에는 261대(마크V 127대 포함), 9월 7일에는 177대(마크V 85대 포함), 10월 15일에는 357대(마크V 125대 포함), 10월 19일에는 317대(마크V 134대 포함), 11월 9일에는 235대(마크V 98대 포함)의 전차가 가용가능한 상태였다.  이것은 훈련소에 배치된 전차와 수리중인 전차는 제외한 통계다.12) 또한 이 통계로는 고질적으로 부족했던 예비부품 문제를 파악할 수 없다. 더 많은 예비부품이 있었다면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더 많아졌을 것이다. 부품부족이 초래된 것은 기계화전투 보급국MWSD, Mechanical Warfare Supply Department의 앨버트 스턴Albert Stern대령의 책임이었는데, 그는 예비부품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차의 숫자만 늘리려 했다. 새로 생산된 전차 한대와 이에 필요한 완전한 예비 부품의 비율은 1대 3이 되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1918년 10월까지도 이 비율을 맞추지 못했다. 1917년에 추산한 바에 따르면 마크IV 전차 한대가 하루에 3마일씩 이동할 경우 14일간의 작전에 필요한 예비 부품은 20톤에 달했고, 한달간 작전할 경우에는 50톤이 필요했다. 그 결과 1916년 말 부터 1918년 말 까지 프랑스의 영국 전차군단과 기계화전투 보급국 간에는 ‘예비 부품을 확보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차군단의 전차 수리 능력은 실제로 필요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많은 편이었다.13)
전차의 내구성과 관련해서, 전차 자체가 생산되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완전손실로 처리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전차 승무원은 어땠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전차 승무원도 대부분의 피격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18년 8월 23일의 전투에서, 한 지역에 투입된 전차 중 8대가 피격됐으나 인명 손실은 경상 1명에 그쳤다. 물론 피격된 전차가 ‘단기간 가동 불능’ 상태에 빠지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전차군단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부대였으며 이때문에 전차 승무원들은 쉴새없이 전투에 투입될 수 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1918년 8월에는 장교의 사상율이 27.5%, 부사관과 사병의 사상율이 20.56%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을 실제 사상자 숫자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아미앵 공세당시 전차군단의 사상자 숫자는 700여명에 불과했다. 사상율을 계산하는데는 부상, 전사, 포로가 된 인원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탈진, 그리고 전차의 부실한 환기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 및 체온 상승으로 인한 손실까지 집계했다. 마찬가지로 마크V* 전차에 탑승한 보병들도 전차 내부의 과열로 인해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전차 내부의 온도는 습구온도계 기준으로 화씨 86도에 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것은 인간이 체온 조절 능력을 상실하는 것 보다 겨우 3도 낮은 수준이었다.14)  아미앵 공세당시 전차 승무원의 사상율은 낮은 편이었지만, 만약 8월 8일 이후의 공세에서 더 많은 포병 지원을 받으면서 충분한 예비대와 함께 대규모로 작전을 펼칠수 있었다면 훨씬 더 낮아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서두에서 제기한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가도록 하자. 과연 1918년 당시 전차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을까?

영국원정군이 전차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랬더라면 1918년의 전역에서 전차는 더욱 더 결정적인 병기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몇가지 있다. 전차가 보다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헤이그 장군과 영국원정군 사령부의 부정적인 태도에 있었다. 풀러가 지적한 것 처럼 비판의 대상은 전차 자체가 아니라 전차군단이 전차를 다루는 태도였다. 이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기계화 전쟁 방식과 전통적인 전쟁 방식을 두고 전개된 논쟁에서 헤이그 장군과 영국원정군 사령부가 취한 입장과는 별개로,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 전차군단은 자체적인 장성급 사령관과 참모부 조직을 갖추고 전차군단의 작전, 훈련, 정보 및 행정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전차 운용 교리와 개념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있었다. 1918년 6월, 전차군단 감찰감Director-General of the Tank Corps 캐퍼John. E. Capper 소장은 이 구조적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다른 모든 특수한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황은 전차에 관해 이렇다 할 경험이 없는 고급 지휘관들과 총참모부가 전차와 전차의 운용에 대해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총참모부가 다른 병종과 동일하게 전차의 운용과 한계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한 전차의 대규모 운용을 통해 실질적인 성공을 거두기란 어렵다.”

캐퍼 소장은 영국원정군 사령부 참모부가 전차를 병기로서 연구하고 이해하려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으며, 육군본부 참모부와 다른 고위 장성들도 전차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차군단 사령관도 포병과 마찬가지로 영국원정군 사령부에 병과 참모로 참여해야 하며, 육군본부 내에도 포병과 마찬가지로 전차병단Tank Group을 두고 고급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기갑전술학교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엘리스 소장도 이 견해야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동안의 가장 큰 과오는 총참모부가 전차에 관해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육군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각 야전군은 위로 부터 어떠한 지침도 받을 수 없었으며 받은 것은 기껏해야 제안 수준에 불과했다.”15)
이러한 조직 구조는 최종적으로 전차군단이 전장에서 필요로 한 것들이 대부분 묵살되도록 만들었다. 한 소령은 아미앵 공세와 같은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예비 차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전차를 보급받아, 전차와 승무원을 교체해 가면서 효율성을 잃지 않고 공세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할 수 없었던 점을 지적했다. 1918년 10월, 풀러는 100%의 예비 차량이 없으면 ‘전차 부대의 전투 효율성은 전투 개시 72시간 내에 격감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풀러의 주장은 아미앵 고에 당시 가용 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격감했던 사실에서 도출한 것이었다. 비록 손실 원인의 대다수는 적의 공격 이외의 것이었지만, 리델 하트는 전차의 손실로 인해 투입 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감소했음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100%의 예비 차량을 갖추고 전차가 대규모로 공격에 투입된다면 다른 모든 요인들이 동일할 경우 전차가 큰 우위를 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충분한 예비 차량을 확보할 수 없었던 원인 중 하나는 전차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데 있었고, 또 하나는 영국원정군 사령부의 무관심 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전차의 숫자가 부족했던데 있었다. 영국육군의 공간사 저자 중 한명이었던 제임스 에드몬즈James Edmonds 준장은 전차의 부족을 초래한 원인이 전차를 소규모로 무분별하고 비효율적으로 분산 운용한데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아미앵 공세 이후) 공세작전에 전차를 집중적으로 투입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러한 계획조차 수립하지 못한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공세 마다 충분한 숫자의 전차를 확보하고 충분한 예비 차량을 마련하는 한편, 초기 돌파를 달성한 뒤인 공세 2~3일 차에는 전차 부대를 후방으로 돌리는 등의 적절한 전술을 사용했다면 전차는 1918년의 전역에서 훨씬 큰 활약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16)

전술은 전차군단에 있어서 또 하나의 큰 문제였다. 전차는 아군 포병의 지원이 없을 경우 독일군의 포병 사격에 취약했으며, 보병의 근접지원, 연막이나 안개, 또는 여명의 보호 아래 움직여야 했으며, 기습적인 운용도 필요했다. 전차를 지원하기 위한 연막 및 포병 사격 훈련, 보병과의 사전 훈련(특히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이 전차와의 협동 작전에 탁월했다.) 강화, 항공기 정찰 및 적의 대전차 화점에 대한 공습 등이 실시됐다. 그러나 영국원정군 사령부와 고급 참모들은 전차를 단지 지원 수단으로 간주하고, 보병과 포병을 중시했기 때문에 전차군단의 요구 사항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이로인해 전차 부대는 필요이상으로 손실을 입었다. 예를들어 아미앵 전투 당시 제5전차여단은 공세 이틀째인 8월 9일에는 포병이 적절한 지원 사격을 해 주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제5전차여단의 보고에 따르면 이날 여명에 맞춰 연막의 보호를 받으며 공격을 시작했지만 해가 뜬 뒤에는 ‘포탄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 포병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공격에 나서야 했다. 이때문에 아미앵 공세가 진행되면서 전차에 대한 지원 체계는 무너지고 양적으로도 감소했다. 8월 11일 한 캐나다 여단 지휘관은 파르빌리에Parvillers 외곽에서 15대의 전차가(실제로는 16대 중 12대였다.) 단 1문, 혹은 1개 대전차포대에 의해 격파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고를 했다. “이것은 극히 곤란한 상황에서 전차가 연달아 격파됐으며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엄청난 일 이지만 이걸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즉 전차 부대는 아무런 지원도 없이 소모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8월 21일 이후 독일군의 대전차 방어는 강화되었고, 전차 부대는 소규모의 취약한 집단으로 운용되기 시작하면서 역량 이상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사례 중 하나는 전차군단의 고위 참모 장교 한명의 회고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8월 25일에 있었던 제9전차대대의 작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날 야간에 10대의 전차가 이동을 시작했다. 이 부대는 다음날 여명에 캐나다 제2보병사단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전차병들은 피로한 상태였으며 정찰을 실시할 시간도 부족했고 보병과의 연락 체계도 없었기 때문에 만약 다음날 그대로 투입할 경우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이었다.”17)
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난 뒤 전차군단의 참모 장교였던 마텔le Q. Martel 장군은 일부 사단장들은 전차 부대가 할 수 있는 이상의 역할을 요구했다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하지만 전차부대 지휘관들이 이러한 요구에 반대할 경우 영국원정군 사령부와 그 예하 사령부의 지휘관들은 군기가 빠졌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사례 중 하나가 1918년 9월 27일에 캐나다 군단에서 있었다. 한 캐나다 여단장은 그의 여단에 배속된 전차가 세 대 밖에 되지 않았는데, 부를롱Bourlon 숲 외곽 까지 진출했을 때 배속된 전차 부대 지휘괸이 전차들을 후방으로 돌려 연료를 보급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전차들의 기계적 상태가 좋지 않고(마크IV로 추정) 승무원들의 상태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캐나다 여단장은 전차부대가 이렇다 할 지원을 해 주지 못했으며 전차 부대 지휘관과 그의 전차들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기는 싫었다고 비난했다.  이 여단장은 고작 세대 밖에 되지 않는 배속된 전차부대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며, 이들의 처지를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제4전차여단은 1918년 9월 말에서 10월에 걸친 기동작전이 전차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했다고 보고했다. 보병 지휘관들은 전차가 매일 기동하면서 받는 기계적 피로에 대해 이해하질 못했으며, 계속해서 기동을 하는 상황에서는 전차를 이틀 연속으로 운용할 수는 없다는 점도 이해하지 못했고, 네대의 전차만 투입해도 충분한 상황에서 세배나 되는 전차를 투입했으며, 단지 전차를 배속받았다는 이유 만으로 불필요하게 전차를 투입했다. 이 보고서에는 1918년 10월 5일 보르부아르Beaurevoir 마을에 대한 공격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제25사단의 보병은 두 차례나 전차를 따라잡지 못했지만, 전차들은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아마도 보병부대 지휘관들이 전차가 배속된다는 사실을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기 때문에, 전차를 어떻게 운용해야 할 지 미처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 수 있다. 어쨌거나 이로 인해서 “보병과 전차 부대의 협동 작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18)
이때문에 1918년 8월 말 부터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두가지 방식의 완전히 상이한 전술이 사용됐다. 하나는 전차를 중심으로 한 기계화 전술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방식의 전술이었다. 만약 전차가 화력 지원을 받고, 정찰 및 타 병과와의 연락을 취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보병이 전차와의 협동작전을 위해 사전에 훈련을 받은 상태였다면 전차 부대는 보병의 피해를 줄이고 동시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공식 문건인 ‘전차부대 주간 활동 요약Weekly Tank Notes’에는 아미앵 전투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이 전차와의 협동 작전에 탁월했으며, “전차를 일렬 종대로 운용했으며, 전차가 돌파를 하면 그것을 곧바로 활용하여” 보병의 손실이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개가 낀 상태에서 보병의 근접지원을 받을 경우 전차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으며 보병의 손실도 적었다. 이를 입증해 주는 통계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은 아미앵 전투 당시 전차와의 협동 작전에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캐나다 군단은 전차와의 협동에서 나쁜 평가를 받았다. 캐나다 군단의 사상자는 3,500명이었는데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의 사상자는 3,000명 미만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은 독일군 장교 183명, 사병 7,742명을 포로로 잡고 야포 173문을 노획했는데, 캐나다 군단은 장교 114명과 사병 4,919명을 포로로 잡고 야포 161문을 노획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군단과 여기에 배속된 전차 부대는 인접 부대인 제3군단이 Chippily 능선을 점령하는데 실패해 이 능선의 독일군의 포격과 기관총 사격에 측면을 공격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손실이 적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19)

미시적인 단위에서 전차의 효율성을 평가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으로는 각 전차장(전차장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을 경우는 그 다음 계급)이 전투가 끝난뒤 2~3일 내에 작성하는 전투보고서Tank Battle Sheet를 분석하는 것이 있다. 전투보고서는 단차 단위의 전투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각각의 전차가 지원한 부대, 작전 시작 및 종료 시간, 전차와 승무원의 상태, 승무원의 피해 상황, 6파운드 포탄과 기관총탄의 소모, 작전 시간, 전차와 전술 개선에 유용한 지적, 그리고 작전 진행 상황에 대한 서술 등이 실려있다. 기존의 연구들은 개별 전차의 전투 보고서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서는 전차가 실제로 운용된 방법을 분석하는데 극도로 유용하다. 예를들어 아미앵 전투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제4보병사단과 함께 작전을 했으며, 위에서 언급한 Chippily 능선으로 부터 측면을 공격받았던 제8전차대대의 전투 보고서들을 살펴보면, 전차 승무원들은 일반적으로 아래에서 언급할 세 가지 상황 중 한가지를 겪었다. 첫 번째는 기계적 문제나 승무원의 상태 때문에 전차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경우이다. 예를 들자면 작전 중 전차의 기계적 문제로 인해 보병에 대한 지원에 실패했거나 아예 지원에 나서지 못한 경우라던가, 전차병들은 보병을 지원하려 했으나 차내의 연기와 열기 때문에 작전을 중단해야 했던 경우 등이다. 두 번째는 전차가 피격되거나 참호에 빠지기 전 까지 보병과 함께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이다. 세 번째는 전차가 피격되거나 참호에 빠지지 않고 보병과 함께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이다. 제8전차대대의 작전 결과를 모두 살펴본 결과 작전에 투입된 36대의 전차 중에서 8대가 첫번째 사례(기계적 문제)에 해당했으며, 16대가 두번째 사례(유용했지만 피격되거나 방기됨)에 해당되었으며, 12대가 세번째 사례(유용했으며 피해가 없었음)에 해당되었다.(1개 전차대대는 36대의 전차로 구성되었으며, 제8전차대대의 경우 마크V 전차와 6대의 훈련용 전차로 편성되었다.) 피격되거나 참호에 빠진 전차들은 거의 대부분 수리해서 다시 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사례와 세번째 사례를 합치면 제8전차대대는 잘 조직된 보전합동 작전으로 77%의 전차가 성공을 거뒀음을 알 수 있다.20)
 
그러나 전차를 평가하는데 있어 보다 위험한 방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아미앵 공세에 참여한 전차장들이 그들의 작전을 서술한 글에서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를 포착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번째 사례에 해당되는 마크V 전차 9363호의 전차장이었던 브라운 중사의 기록을 살펴보자.(브라운 전차의 전차는 수컷형식으로 2문의 6파운드포와 4정의 기관총을 장비했다. 암컷형은 이와 달리 6정의 기관총을 장비했다.)

“오전 5시 집결지를 출발해 오전 7시 30분 공격개시선인 그린 라인에 도달했다. 오스트레일리아군 제13보병대대가 합류해 전차들을 그린 라인까지 인도했다. 작전 시작후 4시간 뒤 우리는 제13보병대대와 함께 그린 라인을 출발했다. 보병은 1/100야드의 속도로 따라왔다. 전진하는 도중 전차들이 급경사 지대를 통과할 때를 제외하면 보병들은 대형을 유지하며 잘 따라왔다. 우리는 적의 기관총과 보병들, 그리고 3문의 야포를 호치키스 기관총과 6파운드 포로 공격했다. 가까이 접근하자 적은 야포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작전을 마칠 무렵 우리는 참호가 구축된 가파른 능선에 도착했다. 나는 참호 중 하나로 들어가 약 50명의 적군을 포로로 잡았다. 보병이 도착한 뒤 총 300여명을 생포한 것으로 기억한다. 사수 한명, 홰틀링(부 조종수), 버처트(사수)가 피로와 차내의 열기로 약간 탈진했다. 작전 시작후 6시간 뒤 우리는 목표인 레드라인에 도착했다. 여기서 한시간 동안 보병이 재집결 하는 동안 우리는 전차 집결지인 던전 숲에서 반장의 지휘하에 집결했다.”21)

브라운 중사의 전차는 큰 문제 없이 작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머레이 중위의 9152호차는 이보다 운이 없었다. 이 차량의 사례는 위에서 언급한 두번째 사례에 해당된다.

“나의 전차는 오전 8시 20분 그린라인을 출발해 공격개시선 800야드 전방에서 적 보병과 조우했다. 여기서 부터 2km를 전진하는 동안 적의 기관총 진지와 보병들을 6파운드 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남북방향의 배수로에 도착했을때 … 은폐된 기관총 진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을 마주쳤다. 하지만 아군은 아무 손실 없이 보병을 적 기관총 진지로 돌입시켰다. 작전 지역의 지형 문제와 함께 내가 전차의 바깥에서 차량을 지휘해야 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무렵 승무원 중 네명이 차내의 열기와 배기가스 때문에 탈진했고 주포를 조작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직접 6파운드 포를 조작해야 했다. 이때 전투가 가능한 승무원은 조종수, 사수 한명과 나 뿐이었다. 레드 라인으로 진격하면서 수많은 적을 쓰러트렸으며 레드 라인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나는 보병의 최종 목표로 전진했으며, 200야드 앞에서 50명 정도의 적을 포로로 잡았다. 이때 나는 좌익의 보병이 원래 목표에서 다소 못미친 지점에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는 보병들에게 가서 지원을 부탁했으며 보병들은 전진했다. 나는 다시 전과확대선인 블루 라인으로 전진해 몇개의 적 참호를 마주쳤다. 조준 사격을 하자 참호에서 무장한 적 몇명이 나타났으며 내 조종수와 나는 15야드 거리에서 권총 사격으로 9명을 사살했다. 나머지 적 30여명은 항복했으며 나는 포로들을 아군 보병에게 인계했다. 그리고 나는 다른 마크V 전차들과 함께 계속 전진하다가 직격을 맞아 승무원 한명이 전사하고 네명이 부상당했다. 또 다른 명중탄으로 한쪽 궤도가 끊어졌다. 결국 나는 아군의 집결지로 돌아갔다.”22)

머레이 중위의 전차는 직격을 당할때 까지 먼 거리를 진격했는데, 이것은 두번째 사례에 속하는 다른 전차들도 비슷했다. 하지만 첫번째 사례에 속하는 전차의 전차장들은 기계적 고장으로 인해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조종수와 부조종수가 열기로 인해 탈진해 전차를 후퇴시켰다고 보고한 암컷형식인 9385호차의 전차장 셔우드Sherwood 중사와 같은 보고 사례도 있었다. 실제로 많은 전차장들이 차내의 열기와 탈진에 대해 보고했다. 하지만 제8전차대대의 전투보고서들을 분석해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은 전차가 아미앵 공세가 성공하는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특히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격파해 오스트레일리아군 보병의 손실을 줄이는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공을 거둘수 있었던 원인은 오스트레일리아 제4보병사단의 작전 구역에서는 전차와 보병의 상호 지원이 잘 이루어졌으며, 전투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했을때 전차가 보병을 선도하고 보병은 전차의 150~200야드 후방에서 근접하여 전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Chippily 능선의 독일군이 측면에서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기습효과와 안개, 그리고 연막으로 제8전차대대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23)

마지막으로, 전차를 중심으로 한 전쟁 수행방식의 효율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사상자 통계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아미앵 공세당시 영국원정군의 인명손실은 22,000명이었는 데, 전차의 지원 없이 작전한 프랑스 제1군의 사상자는 24,000명이었다. 8월 21일에서 9월 17일 사이에 영국원정군의 보병과 기병 사상자는 105,943명이었는데, 8월 1일 부터 31일 시기에 가용가능했던 전차의 숫자는 1,184대였다. 그리고 9월 18일에서 11월 11일까지 영국원정군의 보병 및 기병 사상자는 158,440명이었는데 9월 1일에서 10월 20일 사이에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706대로 줄어들었다. 비록 기간이 완전히 같지는 않고 다른 변수도 고려해야 하지만 이와같이 대조되는 통계로 미루어 볼때 잘 준비된 대규모의 보전포 협동 작전이 적은 숫자의 전차의 지원을 받는 보병 공격보다 적은 수의 사상자를 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차군단이 아미앵 공세에서 입은 사상자는 앞서 언급한대로 대략 700명 정도였으며, 8월 8일에서 10월 10일 까지의 사상자는 총 3,188명이었다.24)
그리고 군수참모부의 자료Munutions files에 있는 일련의 통계자료들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들어 1918년 7월 아멜Hamel에서 실시된 보전포 협동 작전에서 전차 2개대대의 지원을 받는 보병사단 한개는 전차의 지원이 없는 3개 보병사단에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풀러도 1918년 7월에 낸 전차의 효율성에 대한 연구에서 전차를 중심으로 한 전투 수행 방식이 사상자를 크게 줄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918년 9월에 기계화 장비 보급 부부장ACMS, Assistant Controller of Mechanical Supply 데이비슨G. F. Davidson은 1,000야드의 공격정면에서 공격을 감행하려면 1야드 당 여러명의 소총병과 함께 1,000,000발의 소총탄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10대의 전차만 배속시킨다면 전차 한대당 10명의 보병만 배속시키고 탄약 소모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다.25)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두 가지의 질문을 제기하려고 한다. 과연 1918년 전역에 기존에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많은 전차를 투입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1918년 전역에서 전차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을까?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아미앵 공세 직후 968대의 가용 가능한 전차와 장갑차가 있었으며, 아미앵 전투 부터 종전시 까지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전차의 숫자가 많았다’는 표현은 가용가능한 전차의 수가 충분했다는 것을 뜻하며, 아무런 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전차를 투입하는 대신 전차를 아껴서 사용하고 충분한 숫자를 모을 수 있었다면 1918년 말에도 대규모의 보전포 협동 작전을 펼칠 수 있을 만큼 많은 수의 전차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적절한 운용이 무엇이냐는 두 번째 질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한 답은 충분한 예비 전차를 확보하고 전차에 대한 지원을 충분히 하는 상태에서 공세 시작 2~3일차 까지만 전차를 투입했다면 전차는 아미앵 전투 당시처럼 1918년 말에 있었던 일련의 대규모 공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영국원정군 총사령부와 고위 지휘관들의 태도가 바뀌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1918년 8월 말 생포된 한 독일군 장교가 진술한 것 처럼, 영국군이 보전포 협동 공격을 해 올 경우에는 독일군의 방어선이 대부분 붕괴됐다. 하지만 이 포로는 다른 방식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26) 이 주장을 입증하는 자료는 많다. 하지만 전차군단을 다른 방식으로 운용하고 지원을 했다면 어떤 결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완벽한 답을 할 수 는 없다. 그렇지만 전차만 가지고 전쟁을 승리할 수 는 없었지만 전차 덕분에 보병의 희생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는 주장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자료는 많다. 그리고 캉브레, 아멜, 아미앵에서 실시한 기습적인 보전포 협동 공격이 거둔 성공을 가지고 평가한다면, 전차는 적합한 지형이라면 어디에서건 돌파에 성공하여 기동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918년 당시의 전차는 기계적 신뢰성이 낮았고 전차 및 예비 부품 생산도 문제가 있었으며, 1939~40년 시기의 전차가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에 비교하기도 어렵다. 또한 1918년에 전차를 통해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영국의 동맹군들도 비슷한 수준으로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물론 1917~1918년 시기 전차의 문제가 기계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요소에도 기인했으며, 정신적인 문제가 영국원정군 사령부와 전차의 중요성에 반대해 전차군단의 인력과 물자를 감축하려 한 고위 지휘관들에 기인하는 것이냐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만약 전차를 낭비하지 않고 적적하레 운용하는 한편 최고사령부 단위에서 전차 부대에 충분한 지원을 해 줬다면 전차는 훨씬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며 1918년에 연합군의 승리를 훨씬 더 적은 희생으로 앞당길 가능성도 있었다. 전차만 가지고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한 것은 아니며, 전차군단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주장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좀 더 공정하게 평가 한다면, 철학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전차는 반드시 필요한 무기였지만 1918년에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꼽기에는 충분치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Major Clough Williams-Ellis and A. Williams-Ellis, The Tank Corps (London 1919); Brevet Colonel J.F.C.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1914-1918 (London and New York 1920); Captain B.H. Liddell Hart, The Tanks. The History of the Royal Tank Regiment and its Predecessors, Vol. 1, 1914-1939 (London 1959); John Terraine, To Win A War. 1918. The Year of Victory (London 1978, Papermac edition, 1986), 117; the same idea is noted in Terraine, White Heat. The New Warfare, 1914-1918 (London 1982), 224, and in Daniel Dancocks, Spearhead to Victory: Canada and the Great War (Edmonton 1987), 556; Shelford Bidwell and Dominick Graham, Fire-
Power, British Army Weapons and Theories of War, 1904-1945 (London 1982, 1985), 137. A recent book, which emphasizes the problems of tank production is A. J. Smithers, A New Excalibur: The Development of the Tank, 1909-1939 (London 1986). 또한 David Fletcher, Landships: British Tanks in the First World War (HMSO:403 London 1984), 와 Fletcher in J.M. Winter, The Experience of World War I(London 1988), 100도 참고하라. 플레처는 “전차로 인해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하지만 전차는 참호전이라는 교착 상태에 해답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2. 이 논쟁은 Tim Travers, 'The Evolution of British Strategy and Tactics on the Western Front in 1918: GHQ, Manpower and Technology'.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4, 2 (April 1990), 179 ff.에서 다루고 있다.
3. ibid.
4. W.T. Furse, MGO, 'Notes on the Report of a Conference', 17 December 1917, J.F.C. Fuller papers, 1/299, Liddell Hart Centre for Military Archives, King's College, London University (hereafter KCL). General Lord Home, GOC First Army, to GHQ, 16 June 1918; and Lindsay to HQ, First Army, 2 July 1918; in 'Pr6cis of Lectures' by Lindsay on the Machine-Gun Corps, December 1918, Lindsay Papers, Royal Armoured Corps Tank Museum, Bovington, Dorset.
5. Terraine, To Win a War, 116; Bidwell and Graham, Fire-Power, 137; Brigadier-General Sir James Edmonds, Military Operations France and Belgium, 1918 (London 1947), vol. 4, 517, and vol. 5, 95.
6. 아미앵 공세 시작 당시 공식적인 전차 숫자에 대해서는 Tank Note #7, in MUN 4/4979/2, Public Record Office, Kew Gardens (hereafter PRO). J.F.C.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224. For Elles on 12 August 1918, Minutes of Tank Corps Conferences, 12 August 1918, WO 158/840, PRO. For numbers lost to artillery fire, see Cubitt (War Office) to Ministry of Munitions, 17 August 1918, MUN 4/2799, PRO.등을 참고하라.
7. 'Return of tanks, week ending 17th August 1918', signed by J. Keane, Assistant Director of Artillery, MUN 4/348, PRO.  An exactly similar return for the week ending 19 August 1918 occurs in MUN 4/4979, PRO에는 1918년 8월 19일을 종결일로 하는 한 주간의 보고 내용이 실려있는데 거의 동일하다.
8. 5th Tank Brigade, 'Report of Operations with Australian Corps from 8 August to 15 August, 1918, Supplementary Report', vol. 4, 1/259, J.F.C. Fuller Papers, KCL.
9. Tank Note #4, concerning 21-25 August 1918, MUN 4/4979/2; Tank Board Committee, 5 September 1918, and 24 October 1918, MUN 4/4949/4; PRO.
10. Official M.W.D. '[Mechanical Warfare Department] Programme, 1st April 1918 to 30th March 1919'. MUN 4/348; 'Comparative Tables Showing Estimates of Tank Production 27 February 1918 and September 1918'. MUN 4/2801. On tank delivery, Tank Board Committee, 12 September 1918, and 10 October 1918, MUN 4/4979/4; PRO.
11. 전차 손실 통계는 Williams-Ellis, The Tank Corps, 271;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286-7; and Major-General Elles, speaking at the Tank Board Committee, 5 September 1918, MUN 4/4979/4, PRO를 참고하라. 풀러는 같은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8월 8일 부터 21일 까지의 전차 통계를 정리했다. 회수한 장비의 통계는 Tank Note #10, 12 October 1918, MUN 4979/2, PRO를 참고하라.
12. 전차 숫자는 'Weekly Tank State' figures in MUN 4/6400, PRO, except for the 15 October figures which come from History of the Ministry of Munitions (HMSO: London 1922), 12 volumes, vol. 12, part 3, 69에 실린 자세한 통계에서 인용한 것이다.
13. 스턴에 대한 불평은 Liddell Hart, Talk with Sir John Keane (Assistant Director of the Artillery in 1918), 9 November 1947, 11/1947/20, Liddell Hart Papers, KCL을 참고하라.; 필요한 예비 부품 통계는 Lt.-Col Searle (Technical Advisor to Heavy Branch, Machine-Gun Corps [forerunner of the Tank Corps]). 'Report on Tanks', 24 March 1917, WO 158/838, PRO를 참고하라.; 예비 부품의 부족에 대한 불평은 Elles to Capper (Director-General Tank Corps), 26 April 1918; Capper to Elles, 29 April 1918; and Elles to Capper, 15 June 1918; WO 158/816, PRO을 참고하라.; 그리고 2년 뒤 예비부품 문제를 해결한 것은 Fuller to Tank Board, no date, in Tank Board Committee, 10 October 1918, MUN 4/4979/4, PRO를 참고하라.
14. Weekly Tank Note #4, Concerning Operations 21-25 August, 1918; 사상자의 백분율통계는, Weekly Tank Note #10, 12 October 1918; MUN 4/4979/2를 참고하라.; 마크V전차의 차내 과열 문제에 대해서는 Tank Corps HQ Report, 21 September 1918, MUN 4/4979/4를 참고하라.; 아미앵 전투 당시 전차군단의 사상자에 대해서는 Major-General Elles to GHQ, 20 October 1918, WO 95/94; PRO를 참고하라.
15.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xviii. Major-General Sir J.E. Capper to Elles, 'Proposed reorganization of the Tank Corps to bring it more into the Army', 18 June 1918; and Elles to Capper, 23 June 1918; WO 158/816, PRO.
16. J.F.C. Fuller to Tank Board, no date, in Tank Board Committee, 10 October 1918, MUN 4/4979/4, PRO; Edmonds, Military Operations France and Belgium. 1918, vol. 4, 156; Liddell Hart, The Tanks, 184.
17. 5th Tank Brigade. 'Report of Operations with the Australian Corps from 8 August to 15 August 1918', Appendix G; and 'Report on Operations with the Australian Corps, 23 August 1918', 4; vol. 4, Tank Corps Operations, 4th and 5th Brigade, J.F.C. Fuller Papers, 1/259, KCL. Brigadier-General Griesbach to 1 Canadian Division, 'Lessons from the recent fighting', 24 August 1918, 5, vol. 5, Griesbach Papers, MG30 El5, Public Archives, Canada. Major Hotblack (GSO 1,
Tank Corps HQ), '3rd Tank Brigade State [includes 9th Tank Battalion] 8pm 25 August 1918', 25 August 1918, WO 95/94, PRO.
18. Liddell Hart, Talk with General Martel, 29 March 1948, 11/1948/7/, Liddell Hart Papers, KCL. Brigadier-General Victor Odlum, GOC I th Canadian Brigade, 'Narrative of Operations . .. from September 27th to October 2nd, 1918', 4 December 1918, 2, vol. 22, Odlum Papers, MG30 E300, Public Archives, Canada. 4th Tank Brigade, 'Report on Operations, September 27 to October 17, 1918', 11, vol. 4, Tank Corps Operations, 4th and 5th Tank Brigades, J.F.C. Fuller Papers, 1/259, KCL.
19. Weekly Tank Notes #2 and #3, referring to Amiens, 8 August to 12 August 1918, MUN 4/4979/2, PRO. Terraine, To Win A War, 111.
20. 8th Tank Battalion Battle Sheets, Tank Museum, Bovington.
21. Ibid.
22. Ibid.
23. Ibid. Liddell Hart, The Tanks, 180-1.
24. Liddell Hart, The Tanks, 185, for French and BEF Amiens figures. The other statistics come from Edmonds, Military Operations France and Belgium, 1918, vol. 5, 562; 'Operations on the Western Front', Green File, 2, 'Total Estimated Casualties', Lawrence Papers, National Library of Scotland; Major-General Elles to GHQ, 29 October 1918, WO 95/94, PRO.
25. Tank Statistics, MUN 4/6400; J.F.C. Fuller, 'Notes on Tank Economics', 25 July 1918, MUN 4/4979/27; G.F. Davidson, ACMS, 'Comparison of Utility of Armament, CMS', 18 September 1918, MUN 4/6400; PRO.
26. General Sir John Coleridge to Edmonds, 12 March 1938, recalling the statement of the German officer captured on 21 August 1918, CAB 45/184, PRO.

2011년 9월 8일 목요일

재활용 (2)

한국전쟁 직전까지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가 매우 제한적이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전차라던가 105mm M2 같은 사단 포병급 이상의 화포는 전혀 지원되지 않았지요. 하지만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중장비의 지원은 크게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105mm M2나 107mm 중박격포가 원조되긴 했지만 사단의 편제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라서 한국전쟁의 나머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한국군의 보병사단은 사단 외부에서 배속되는 부대를 제외하면 사단 당 1개 대대의 포병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한동안 한국군의 전투력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장비의 지원은 전쟁 이후에도 최대한 자제했습니다. 미국이 계속해서 한국군 보병사단을 경장비 사단 수준으로 묶어둔 덕분에 한국전쟁 내내 한국군 보병사단을은 부족한 화력으로 싸워야 했지요.

이 점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측의 불만요인이었습니다. 이승만이 다양한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군사원조의 증대를 요청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실제로 국민방위군 창설 초기에는 미국이 국민방위군에 대한 장비 제공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 캐나다를 상대로 소총구매를 추진한 일 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어쨌든 미국이 중장비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자 이승만은 좀 색다른 방안을 강구했던 것 같습니다. 이승만은 1951년 2월 10일 임병직(林炳稷) 외무부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습니다.

(전략)

(미국의 고철 수집과 관련해서)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본인의 관심을 끌고 있소. 장관은 북한 공산도당이 전차와 중포를 가지고 쳐들어 왔을 때 우리 국민이 끔찍한 피해를 입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오. 우리 국민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도 전차와 중포를 가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소. (버려진) 전차와 기관총이 매우 많이 있소. 이중 대부분은 파손된 상태지만 우리 기술자들에 따르면 이것들은 80% 정도 수리가 가능하다고 하오. 제8군은 버려진 전차와 장비들을 긁어모아 분해한 뒤 고철로 만들려 하고 있소. 미국측의 당국자들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그것들을 인수하는 대신 고철을 공급하겠다고 요청하시오. 그리고 만약 미국측이 그것들을 판매하려 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사겠다고 하시오. 이렇게 한다면 대한민국의 방위를 준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오. 미국측이 버려진 장비들을 매일 같이 파괴하고 있으니 빨리 미국의 동의를 받도록 하시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의 사령부나 무초 대사에게 우리가 버려진 장비들을 가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시오. 맥아더 장군과 무초 대사에게 이것은 우리 정부의 요청이라고 하시오.

「이승만 대통령이 임병직 장관에게」(1951. 2. 10), Oliver Paper 1951-2(국사편찬위원회 등록번호 HA0000004648)

하지만 버려진 전차와 중화기를 한국이 인수하는 것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사실 미국이 원조를 하는 것이나 버려진 전차를 회수해서 쓰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인력과 기술, 물자의 지원이 필요한 일이니 쉽게 승인해 주기는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승만과 한국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원조 요청을 하고 독자적인 장비 획득을 추진한 것이 미국의 일정한 반응을 이끌어 내기는 했으니 비판적으로만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 과정이 깔끔하진 않지만 어쨌든 조금 더 많은 원조를 뜯어내는 데는 도움이 되긴 했으니 말입니다.


2010년 4월 4일 일요일

국공내전 시기 인민해방군의 대전차전투 사례 하나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족들의 경험담을 정리해놓은 『승리』라는 책을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말단 사병에서 간부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계급의 회고담이 있어서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더군요. 그중 북평전투 당시 전차를 앞세운 국민당 군의 포위망 돌파를 대전차팀으로 격퇴하는 내용이 하나 있어서 해당 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제가 보기에 오타로 생각되는 부분은 일부 수정했습니다.)

1949년 1월 14일, 인민해방군 모 부 제3영(대대)의 전사들은 북평시 광안문 밖의 곽공장 재묘신 일선에서 북평시안에 포위된 적들을 엄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장지초 단장은 적들이 풍대를 탈취하고 천진을 증원한 다음 당고를 거쳐 남쪽으로 뺑소니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3영 지휘부에 전화로 알린 다음 다른 부대와 배합작전하여 풍대를 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단장은 적들의 땅크를 까부시기 위하여 로케트발신관(바주카포)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교도원 마부증은 지휘소에 있다가 9련 진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9련은 조선족들이 비교적 많은 련이었다. 9련의 진지는 재묘신에 있었다. 북평으로 부터 풍대로 가는 신작로가 재묘신의 옆을 거쳐 서남쪽으로 뻗어나갔다. 이곳을 잘 지키면 적들은 천진방향으로 도망칠 수 없었다.

전사들은 어두움도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전투준비를 다그치고 있었다. 1패(排, 소대)의 전사들은 괭이로 대피호를 파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제일 힘차게 괭이를 휘두르는 사람은 조선인 전사 리윤태였다. 교도원은 리윤태의 곁으로 다가서며 한마디 던졌다.

"땅이 대단히 얼었군."

"그래도 우릴 당해내지 못하지요."

리윤태는 괭이끝에 묻은 흙을 발끝으로 비벼 떨구면서 천천히 대답하였다.

한창 궁금해 있는데 전사들 앞에 교도원이 나타났으니 물어볼 좋은 기회나 얻은 듯이 욱- 모여들었다.

" 교도원 동지, 담판을 한다던데 어떻게 되였습니까? 적들이 투항 했습니까?"

어둑시근한 곳에서 서툰 한어로 한 전사가 물었다.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한 교도원은 "적들은 투항은 고사하고 풍내를 탈취한 다음 포위를 뚫고 도망치려 하오" 라고 대답했다. 그는 적의 이러한 동태를 전사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도망을 친다! 놈들은 꿈을 꾸고 있구만."

"내 생각 같아선 담판이고 무엇이고 걷어치우고 답새겨야 해(때려야 해)."

교도원이 1패의 작업현장을 떠나 9련 련부에 이르자 리윤태가 따라왔다. 그의 뒤에는 조선인전사 박현길이 따랐다. 리윤태가 교도원을 보고 청을 했다.

"교도원 동지, 땅크를 까부시는 임무를 저희에게 주십시오."

"땅크를?" 교도원의 반문이다.

" 그렇습니다" 하고 리윤태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 적의 땅크가 우리의 엄폐호를 파괴할 뻔 했습니다. 놈들의 위풍을 꺾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리윤태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참군한지 오래서 로전사들처럼 아주 민감하고 노련하였다. 교도원이 리윤태, 박현길에게 단부에서 이미 로케트발신관을 발급했으며 땅크를 까부시는 임무를 꼭 그들에게 맡기겠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무척 기쁜 심정이였다.

15일 이른 새벽이다. 자욱한 안개가 넓은 벌을 뒤덮었다. 적들은 옹근 하루동안 준비하더니 또 발악하기 시작했다. 포탄이 광안문 안에서 련이어 3영 진지로 날아와 터졌다. 약 10분 가량 발광적으로 포를 쏘아대더니 뒤이어 땅크를 내몰았다.

로케트발신관 반장 진봉상은 로케트 발신관으로 땅크를 겨누었다. 제일 앞에서 달려오던 땅크가 신작로 굽인돌이(커브길)에 나타났다. 진봉상의 로케트발신관 아구리에서 "씽" 하고 불줄기가 뻗어나갔다. 땅크의 무한궤도가 끊어졌다. 땅크는 신작로에 박힌채 꼼짝 못했다.

"명중이다, 명중이다."

전사들은 좋다고 소리쳤다. 적의 땅크 웃뚜껑이 열리더니 한놈이 상반신을 내밀다가 리윤태의 총에 맞아 거꾸러졌다.

적은 그래도 전진을 중지하지 않았다. 아군의 화력권안에 기여든 적을 발견하자 9련 련장이 명령을 내렸다. 아군의 각종 무기가 적들을 향해 일제히 불을 토했다. 아군의 포탄들도 수구자와 련꽃못쪽 적진지를 향해 연거퍼 날아갔다.

3영의 정면에는 10여대의 땅크와 장갑차가 나타나고 그 뒤에는 적 보병이 따르고 있었다. 적들은 9련 1패 리윤태네 앞까지 접근하였다. 전사들에게는 반땅크 무기가 없었다. 사태는 대단히 위급했다. 이때 리윤태와 박현길이 교도원에게 달려갔다.

"교도원 동지, 제가 가서 저 땅크를 폭파해 버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리윤태의 손에는 수류탄묶음이 쥐여져 있었다.

"좋습니다! 동무들은 잠시 저 작은 다리에 가서 엄폐하고 있으면서 저놈들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하시오!"

교도원의 말이 끝나자 리윤태와 박현길은 탄우를 맞받아 다리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적의 땅크도 거의 다리 가까이에 다가왔다. 앞에서 오던 땅크가 다리우에 오르자 불빛이 번쩍하더니 그만 연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런데 연기가 흩어지자 그놈의 땅크는 계속 이쪽으로 움직였다. 리윤태와 박현길은 어느사이에 땅크 우에 올라섰다. 리윤태가 땅크 웃뚜껑을 열다가 박현길과 함께 땅크에서 떨어졌다.
적의 땅크는 기관총과 대포를 마구 갈기면서 덮쳐왔다. 두번째 땅크도 다리를 거의 건너오고 있었다. 이때 리윤태는 힘겹게 첫번째 땅크 뒤로 부터 기여오고 있었다. 적탄은 사정없이 그의 앞뒤에 박혔다. 그의 솜옷에서 솜이 삐죽삐죽 나왔다. 그는 계속 기다가 갑자기 몸을 날려 땅크 우로 올라갔다.
갑자기 첫번째 땅크에서 불기둥이 일더니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터졌다. 땅크는 폭파되어 불덩이로 변했다. 뒤따라 오던 땅크와 장갑차는 앞길이 막혀 어쩔바를 몰라 쩔쩔매였다.

비록 적들의 땅크는 길이 막혔으나 적의 보병들은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어떤 놈들은 제1패 진지앞에 덮쳐들었다. 7련과 8련도 적과 백병전을 벌렸다. 이때 단부에서는 1련을 보내왔다. 1련은 오른켠에 있는 개천을 신속하게 점령하고 덮쳐오는 적들의 길을 차단하였다. 앞의 놈들이 물러가지 못하자 뒤의 놈들도 전진할 수 없게 되였다.

뒤이어 아군의 대포가 노호하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포탄들이 적의 땅크무리에, 돌격해오는 적 보병들 속에서 터졌다. 힘찬 나팔소리가 울렸다. 돌격이다. 전사들은 엄폐호에서 뛰쳐나와 "돌격!" 하면서 도망치는 적을 족쳤다. 적들은 완전히 실패했다. 전사들은 포로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잔뜩 메고 진지로 돌아왔다.

지휘원과 전사들은 리윤태와 박현길이 보이지 않아 속을 태웠다. 진지에서 떨어져 있는 몇 곳을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한창 안타깝게 찾고 있는데 리윤태와 박현길이 서루 부축하고 쩔룩거리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둘은 모두 다리를 상했다. 특히 리윤태의 상처는 더욱 심했다. 그의 솜바지가 선지피에 시뻘겋게 물들었고 심한 동통으로 해서 얼굴은 해쓱해졌다. 모자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없었고 머리칼은 새노랗게 그을었다. 교도원이 그의 앞에 다가오자 리윤태는 신작로에 박혀있는 땅크와 늘어져있는 적들의 주검을 가리키며 힘겹게 이렇게 말하는 것 이였다.

" 교도원동지, 보십시오. 적들은 꼼짝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녁노을은 마치 래일의 맑은 날씨를 알려주기나 하듯 서켠 온 하늘을 피빚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천진해방소식이 날아왔다. 북평성 안에 포위된 적들의 환상이 부서졌다.

1949 년 1월 16일, 중국인민해방군 평진전선사령부에서는 적의 북평수비사령 부작의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였다. 아군의 강대한 군사적 압력 밑에 부작의는 저항을 그만둘 결심을 내렸고 북평은 드디여 평화적으로 해방되였다.

중국조선족역사족적 편집위원회편,『승리 :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5』 (北京, 민족출판사, 1992), 637~640쪽

이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인민해방군의 장비 부족을 반영하는 것인지 바주카포 팀을 단(연대)에서 예하 부대에 파견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바주카포는 연대급 단위로 운용되고 있고 소대 단위에서는 변변한 대전차무기가 없다는 게 안습입니다. 이런 상황이니 미군이 공여한 M5 같은 경전차들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이 글의 본문에서는 국민당군의 전차 종류를 명시하고 있지 않아 아쉽군요. 결국 리윤태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제대로 된 대전차 무기가 없기 때문에 국민당군의 전차에 대해 집속수류탄을 사용한 육박공격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집속수류탄은 1차대전 부터 사용된 꽤 유서깊은(???) 대전차 무기죠. 본문에서 리윤태의 용맹성을 강조하는 것 처럼 대전차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는 보병 개개인의 전투 경험과 강인한 정신력이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정신력 타령만 하면 곤란하겠습니다만.

국공내전기의 대전차 전투 양상을 잘 보여주는 꽤 재미있는 글 입니다.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1954년에 제안된 어떤 한국군 해병대 개편안

한국전쟁 직후 한국군의 재편성 시기의 기록을 보면 꽤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특히 미국측이 검토하다가 폐기한 한국군 편제를 보면 아주 재미있지요. 여기서는 1954년에 검토되었던 한국군 해병사단 창설안 중 하나를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1954년 5월 17일자로 되어 있는 미해군 군사고문단 소속의 해병대 군수고문관이 작성한 문서를 보면 한국군 해병여단을 미군 해병사단의 편제에 근접하는 규모로 확대개편하고 이에 필요한 지원부대를 편성할 경우 필요한 군수지원품목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한국군 해병여단을 사단으로 확대 개편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 전투장비는 다음과 같습니다.*

카빈(M2) : 876정
소총 (M1) : 2,206정
자동소총(M1918A2) : 212정
권총(M1911A1) : 1,247정
기관총 (M1917A1) : 118정
기관총(50구경 M2) : 87정
유탄발사기 : 1,400정
105mm 유탄포 : 42문
155mm 유탄포 : 18문
3.5인치 바주카포 : 320문
60mm 박격포 : 53문
81mm 박격포 : 89문
4.2인치 박격포 : 30문
75mm 무반동포 : 15문
화염방사기 : 188대
전차 (M26/M4A3 105mm) : 85대
40mm 대공포 : 32문
LVT-A : 18대
LVT-4 : 224대

이 안에 따르면 한국군 해병대를 사단급으로 확대개편하고 지원부대를 증편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총 2786만6452달러가 소요되었고 여기에 1년치의 군수품을 합하면 총 비용은 8500만3349달러에 달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미국정부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위해 1950년 회계연도 예산으로 배정한 비용이 1천만 달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지원이 아닐수 없었습니다.(그 사이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더라도) 지원내역에 들어있는 장비를 보면 M-26전차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 한국 육군에 배치되고 있던 전차가 M4A3E8이었다는 것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약 이 원조안 대로 한국 해병사단을 편성했다면 장비상으로 한국군 최강의 전력이 되었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여기에 언급된 원조안은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한국 육군 20개 사단 계획에 필요한 예산만 해도 막대한 규모였기 때문에 해병대까지 요란하게 무장시킬 비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실현되지 못하고 폐기되는 계획들은 실제로 실행되는 계획보다 근사한 법이지요.

*'Expansion Program for the Korean Marine Corps plus support for one(1) year, Cost of', RG 330, 330.2 General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OSD), 1941-87, 330.2.4 Records of Other Special Assistants, Entry 185, Van Fleet Report Files, Box 11, Korean War Corps Expansion Program

2009년 10월 18일 일요일

질보다 양?!

'영국'이라는 단어와 '전차'라는 단어는 따로 사용할 때는 뭔가 멋진 느낌을 주지만 함께 사용할 경우에는 희극의 탈을 쓴 비극이 된다지요.

영국 육군은 북서유럽에서 대재앙을 겪는 바람에 장갑차량을 대부분 상실했으며 신형 전차를 개발하는 것 보다는 실용성과 유용성을 갖추었다고 판단되는 전차라면 무엇이든지 생산부터 하는 것에 우선권을 두었다. 영국은 이미 프랑스가 붕괴하기 이전 부터 전차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 질보다 양을 중시하고 있었는데 1940년 여름에는 영국 본토와 다른 지역을 방어하는 문제가 최우선과제였으며 이러한 경향이 1941년 부터 1942년까지 전차 생산을 좌우했다.

이런 압력은 설계도 단계의 전차에 생산 결정을 내리고 시험평가도 부족한 전차를 양산하는 정책을 채택하도록 만들었다. 이 방법은 요구사양의 결정에서 선행양산품(pilot) 생산까지의 시간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시제품을 생산할 필요성을 줄였다. 이러한 정책은 다른 분야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육군은 이 정책을 단지 장갑차량의 생산에만 적용했다. 그 성과는 경우에 따라 달랐다. 실제로 1942년 하원의 보고에서는 '우리는 시제품 생산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곧바로) 생산을 하는 것(we were not avoiding the manufacture of prototypes, we were manufacturing nothing else)'이라는 발언이 있었다.

이렇게 숫자부터 채우자는 정책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불러왔으며 그 중 하나로는 막대한 투자를 퍼부은 A13 코베난터(Covenanter) 전차가 있었다. 이 전차는 무작정 생산을 시작했지만 자체적인 결함과 전반적인 신뢰성 부족 때문에 실전에는 투입도 하지 못 했다. 뿐만아니라 "설계도 단계에서 생산명령이 내려진(off the drawing board)" 또 다른 사례 중 하나인 A22처칠은 시간이 지난 뒤에는 연합군의 장비 중 효율적이고 유용한 것이 되었으나 처음 배치될 당시에는 자질구레한 문제와 결함에 시달렸다.

John Buckley, British Armour in the Normandy Campaign 1944, Frank Cass, 2004, p.162~163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는 다들 잘 아시죠?

2009년 9월 22일 화요일

높은 분들은 잘 몰라요

1944년 여름의 어느 날,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병기과는 가동불능이 된 독일 전차 두 대를 몬티(몽고메리)가 살펴볼 수 있도록 그의 지휘소로 가져왔다. 한 대는 튀니지의 제벨스(Djebels)에서 아군의 셔먼들을 압도한 것과 같은 형식으로 납작한 형태를 한 63톤의 6호전차 E형 티거였다. 그 옆에는 아군의 대전차포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경사진 전면장갑을 가진 50톤급의 5호전차 판터가 있었다. 티거는 무겁고 둥근 포탑에 장포신 88을 탑재하고 있었다. 이 전차의 (포탑 전면은) 장갑의 두께가 7인치에 달했다. 티거는 아프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연합군이 전장에 투입한 모든 전차를 압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티거의 엔진은 겨우 650마력에 불과했으며 이때문에 고장이 잦았다. 사실 티거의 기계적 고장에 따른 손실이 전투에서 연합군이 격파한 것 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가벼운 판터, 또는 5호전차는 그 중량에 비해 엔진 출력이 더 좋은 편이었다. 티거는 공포스러운 88을 탑재했는데 판터는 그 대신 장포신에 높은 포구초속을 가진 75mm포를 탑재하고 있었다. 판터는 이러한 무장과 경사진 차체 때문에 아군의 셔먼에 비해 훨씬 우세했다.

셔먼은 원래 75mm포를 탑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독일전차들의 두터운 전면장갑에는 완전히 무용지물인 무기였다. 셔먼은 독일 전차를 둘러싸고 측면에서 명중탄을 날려야만 격파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 전차병들은 종종 독일전차를 격파하기 위해서 한대나 두대의 전차와 그 승무원들을 잃게 된다고 불평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독일 전차들을 격파할 수는 있었지만 그 대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더 많은 전차를 잃어야 했다. 병기국은 그 뒤 75mm포를 높은 포구초속을 가진 신형 76mm포로 교체하는 것을 앞당겼다. 그러나 이 신형 전차포 조차 적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하고 튕겨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아이젠하워는 신형 76mm포의 성능 부족에 대해 전해듣자 분통을 터뜨렸다.

"자네 말은 우리의 76이 이 판터들을 격파하지 못한다는 뜻인가? 이런, 나는 이 포가 이번 전쟁에서 죽여주는 포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Why, I thought it was going to be the wonder gun of the war"

나(브래들리)는 이렇게 말했다.

"어. 이게 75보다 낫긴 합니다만 신형 탄두는 훨씬 작습니다. 이 탄두는 독일 전차의 (전면)장갑을 뚫지 못하지요."

아이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투덜거렸다.

"왜 나는 항상 이런 문제에 대해서 뒤늦게 알게 되는건가? 병기국에서는 나한테 76은 독일놈들이 가진 것은 모조리 잡을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Ordnance told me this 76 would take care of anything the German had.) 지금은 자네로 부터 76은 저 빌어먹을 것들을 박살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구만."1)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아이젠하워는 일선의 병사들은 이미 잘 알고 있던 사실을 1944년 7월이 넘어서야 알게 됐습니다. 사실 북아프리카에서 티거를 비롯한 독일 전차들에게 호된 신고식을 치른 뒤에도 미군 고위층은 셔먼의 성능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병사들의 실전경험 부족이 문제라고 생각했으며 일부는 1944년이 될 때 까지도 75mm를 탑재한 셔먼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2) 1943년 여름, 몇대의 판터를 노획한 소련이 이 중 한대를 영국에 제공했고 판터에 대한 기술적 분석도 이루어졌지만 미군 정보당국은 판터도 티거와 마찬가지로 독립 부대에서 소규모로 운용될 것으로 예측했다고 합니다. 1943년 말 까지만 하더라도 미군 정보당국은 판터가 기갑사단의 주력 장비가 될 것이라는 예측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 2월이 되어서야 독일군의 기갑사단 편제가 개편되었으며 판터를 장비한 전차대대가 기갑사단 당 1개 대대는 편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등 고위 지휘관들은 이 정보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3) 연합군 고위 지휘관들은 노르망디 상륙 이후에야 판터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습니다만 단시일 내에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4년 겨울, 아르덴느에서 독일군이 대규모 기갑부대를 동원해 반격을 감행하자 그때 까지 셔먼에 기대를 걸고 있던 지휘관들도 생각을 고쳐먹게 됐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선의 병사들이 미국으로 보내는 편지에 전장에서 경험한 독일 전차의 괴력을 언급했기 때문에 미국 국내에서도 전차의 성능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1945년 초 부터 미국 언론들은 군 당국에 전차의 성능문제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4) 뉴욕타임즈의 특파원 핸슨 볼드윈(Hanson Baldwin)은 군 고위층이 전차의 성능격차를 왜곡하고 있다며 의회가 나서서 조사할 것을 촉구하기까지 합니다.5)

좀 놀라운 것은 아이젠하워는 일선 전차병들의 경험을 소개한 언론 기사가 쏟아진 이후에도 여전히 독일군과 미군의 전차 성능격차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아이젠하워는 1945년 3월 18일 2기갑사단장 화이트(I. D. White) 준장과 3기갑사단장 로즈(Maurice Rose) 소장에게 이 문제를 조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두 사단장이 병사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보고서로 정리해서 올린 뒤에야 아이젠하워는 전차의 성능격차를 인정하고 육군부에 이 보고서의 내용을 전달하게 됩니다.6) 뭔가 손을 쓰기에는 늦어도 한참 늦은 시점이었습니다.


1) Omar N. Bradley, A Soldier's Story, Henry Holt and Company, 1951, pp.322-323
2)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S.Army 1917-1945, Cornell University Press, 1998, p.191
3) Steve Zaloga, Armored Thunderbolt :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 Stackpole, 2008, p.97
4) David E. Johnson, ibid., p.194
5) Steve Zaloga, ibid., p.268
6) David E. Johnson, ibid., pp.196-199

※ 이와 관련해서, 채승병님의 'M26 퍼싱 전차의 배치 지연은 누구의 책임인가?'도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2009년 8월 1일 토요일

약간의 추가 설명

지난번의 글, 몇 가지 궁금한 점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우마왕님이 지적하신 기본적인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공감합니다. 아무래도 댓글의 특성상 짤막한 답변을 남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 것은 오해의 소지를 남기는 경우가 많지요. 짧은 답글이라 하더라도 논리적인 완결성은 갖춰야 하는데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오는 것은 좀 곤란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동의가 이루어 졌으니 제가 최초의 질문을 했던 이유에 대해서만 약간의 보충 설명을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으신 분들이 있으면 곤란할 테니 말입니다.

처음에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우마왕님이 기본적인 논지인 전차포 문제에 이외에 몇 가지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는 추론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번 이야기를 오가게 한 ‘우마왕님의 과연 서방 전차포가 소비에트 전차포를 넘어선 적이 있기는 했나?’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서 해당 포스팅의 배경이 된 1960-61년에는 서방에서 자신들이 우위를 가졌다고 착각할 수 있었지만 소비에트는 다음해에 115mm 활강포와 BM-3/6 APFSDS탄을 장착한 T62를 등장시켜 잠시나마 우위를 가졌다는 서방의 착각을 떡실신시킵니다.
(1970년대 이색렬의 IMI가 105mm APFSDS탄 M111의 개발에 성공하면서 독일을 시작으로 서방 각국이 라이센스를 받아 생산에 나섰다는 사실이야말로 당시 서방 각국이 소비에트 전차포에 대한 열세임을 느끼고 있었다는 반증이지요. 그랬기에 당시 서독도 레오1에 만족하지 못하고 MBT/KPz70 계획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지요.)

굵게 표시한 부분들은 우마왕님이 근거로 제시하시는 기술적 문제로는 설명을 하기가 어려운 것 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마왕님께 ‘미국이나 서방이 T-62에 열세를 느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자료’에 대해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실제 통계상으로 소련의 115mm 탑재 전차가 서방의 105mm 탑재 전차를 능가한다는 것과 1960-70년대에 서방측이 소련의 115mm 탑재 전차와 자신들의 105mm 탑재전차를 어떻게 생각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니까요. 우마왕님은 기본적으로 실제 성능을 바탕으로 당시의 서방도 소련의 115mm 전차포에 대해 열세를 느꼈을 것이라는 가정을 이끌어 내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실제로 서방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에 대한 자료가 필요할 것 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제시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사례인) 1974년에 미육군의 Dupuy 장군이 M60과 T-62를 fair match로 평가한 사례를 들어 서방이 과연 소련의 115mm 전차포에 ‘떡실신’을 당할 정도로 열세를 느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습니다. 그런데 우마왕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다음번 글에서도 역시 장비들의 성능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 하셨습니다.(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원문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2-A. 1974년에 Dupuy 장군이 T62에 대해 M60과 fair match라는 평가의 근거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전- 이후 상황을 돌이켜보면 대략 3가지 정도의 고려가 가능한데 우선 가장 큰 변화는 1973년 영국에서 105mm L7 전차포를 위한 새로운 APDS-T 포탄인 L52A3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L28과 관통력에서 큰 차이는 없지만 1500미터를 넘기면 명중을 장담하기 힘들던 L28과 달리 L52A3은 제대로 2km 거리의 목표를 맞출 수 있었던 듯 합니다. 아울러 T62 초기 생산형에선 조준체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탄착 조절이 쉽지 않았다는 점도 감안했을 것으로 봅니다.

(중략)

2-C. 다시 말해 Dupuy 장군이 T62와 M60이 fair match라고 할 수 있었던 이유는 HEAT 교전 능력은 비슷한데 떨어지는 AP 능력도 신형탄으로 어느 정도 개선되었고, T62의 화기관제 능력이 M60 보단 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인용한 Dupuy 장군의 T-62에 대한 평가는 욤 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의 교전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 입니다. Dupuy 장군은 T-62를 상대로 M60을 운용한 이스라엘의 평가를 기초로 두 전차를 fair match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해당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Although the Israelis prefer the Centurion and M-60 tanks to Soviet armor, these differences do not account for the difference in performance on the battlefield. For example, in one action Israeli forces equipped with Soviet tanks, although out numbered at least two to one, reportedly killed 56 Arab tanks without losing one. Israeli tank crews opened fire at ranges out to 4,000 meters and obtained kills at that range. They closed with the enemy and obtained kills at under 200 meters. Their tank crews are generally stabilized and in an extreme case had been together for 14 years. Although there was some scrambling caused by erratic mobilization, the quality of the crews made the main difference. Apparently, the T-62 tank and the M-60 tank are a fair match. Therefore, during the next 10 years battlefield outcome will depend upon the quality of the troops rather than the quality of the tanks.

(중략)

The Israelis rank the M-60 tank above the T-62 in performance but they find three problems with it which they intend to correct in their own tank. The first is that the ammunition storage in the turret of the M-60 causes a much higher percentage of catastrophic losses. More often than not the entire turret was entirely blown off the tank with a turret hit. Secondly, they found the hydraulic fluid to be inflammable causing crew injuries and tank losses by fire. Thirdly, they did not like the mounting or the functioning of the 50 cal machine gun in the cupola.

Dupuy to Abrams(1974. 1. 14), Richard M. Swain(1985), Selected Papers of General William E. Dupuy, pp.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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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ct of the matter is that our weapons and the weapons manufactured by the Soviet Union are in many respects very similar. For example, in the middle of this particular chart, and here again we're talking about the probability of hit over range, you can see that the Russians' T62 tank, their new best tank, and our M60A1 tank have similar characteristics. Their tank is a little bit better in close, because it has a higher muzzle velocity. Our tank is just a little bit better at the extended ranges because we have better fire control and range estimating equipment. Our new tank, the M60A3, will have even better effectiveness at the extended ranges.

Implications of the Middle East War on U.S. Army Tactics, Doctrine and Systems, Richard M. Swain(1985), Selected Papers of General William E. Dupuy, p.82

윗 글에서 나타나듯 Dupuy 장군은 M60과 T-62의 전차 자체의 성능은 실전에서 큰 격차를 보일 정도로 의미 있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전차 자체의 성능에서도 주포의 위력이 아니라 사격통제체계 때문에 M60이 T-62에 대해 원거리 교전능력의 우위를 가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으로 볼 때 우마왕님이 포탄의 성능 개선을 주된 근거로 해서 미국측의 판단을 평가한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추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Dupuy 장군은 우마왕님이 추정하신 요인 중에서 사격통제장치는 언급하고 있지만 주된 논지의 근거인 포탄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마왕님이 중점을 두신 것 처럼 1973년 영국이 개발한 L52A3등 포탄 문제가 평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우마왕님이 사용하신 방법, 즉 현재 알고 있는 무기의 통계적 성능만으로 당시의 의도를 추정하려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위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질문을 드렸던 것 입니다.

두 번째로, 역시 제가 미국을 포함한 서방측이 실제로 어떤 구상을 하고 있었는지 질문을 드린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만일 저 댓글들의 주장대로 레오2 이전의 서방 전차가 전차전에서 우위를 보일 수 있었다면 대 WTO 방어전술은 아마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전차의 전투력에 분명한 우위를 갖지 못했기에 1980년대까지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지상군을 막기 위해 공격 헬리콥터와 전술핵을 조합한 방어대책이 거론되었던 게고 80년대 중후반, 아니 사실상 90년대 초반까지도 서방 각국, 특히 미국이 T72의 존재에 부담을 느끼던 이유가 단순히 프로파간다 때문이었을까는 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요.

그리고 굵게 강조한 부분에 대해 우마왕님은 다시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셨습니다.

우마왕의 의견이 어디까지나 당시 가용하던 전차포탄들의 데이터와 당대에 개발된, 혹은 개발중이던 전차의 ROC등을 비교해서 내린 정황증거에 기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애초의 논제는 서방 전차포는 항상 소비에트보다 우위에 있었는가의 여부, 최소한 당대에 있어선 사실이 아니다."였지 "NATO의 대 WTO 서유럽 침공 방어계획"이 아니었으니 이쯤에서 마무리짓는게 어떨까 싶습니다. 사실 '미국과 서방이 실제로 어떤 판단을 했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현재 시점에서의 획득여부가 꽤나 의문스러우니 말입니다.

우마왕님께서는 저의 질문에 대해서 NATO의 대 WTO 서유럽 침공 방어계획까지 이야기를 확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 하셨지만 첫 번째 인용문에서 강조한 것 처럼 먼저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서방의 방어 전술에 대한 설명’으로 논지를 확대 하신 것은 우마왕님입니다. 우마왕님께서 먼저 추론에 의거해 서방의 방어전술에 대한 언급을 하셨기 때문에 저는 이 경우에도 실제로 미국 등 서방이 어떤 구상을 했는지에 대한 자료가 없다면 이런 추정은 논리적으로 무리일 것이고 논지가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글의 근거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부탁 드린 것 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마왕님 께서도 ‘무기의 성능에 바탕을 둔 추정’ 외에는 근거를 제시할 수 없으며 논의가 확대되는 문제가 있다고 답변 하셨고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먼저 약간의 질문을 드린 이유는 실제 병기들의 성능을 바탕으로 과거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도를 추정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평가인 만큼 ‘과거에 가능했던 정보를 바탕으로 내린 판단’과는 괴리를 보일 위험성이 다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마왕님께서 현재 설명하기 어려운 60-70년대 당시 서방측의 판단까지 논지를 확대하지 않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실제 무기의 성능 문제로 이야기를 한정했다면 논리적으로 훨씬 좋은 설명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미 공통된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가 되었으니 처음에 제가 질문을 드렸던 이유에 대해서도 이만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우마왕님께서 논리적인 문제에 대한 피드백과 함께 흥미로운 정보들을 소개하신 덕분에 매우 유익한 토론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