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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8일 토요일

미국 공정사단 병사들의 엘리트의식과 폭력성에 대한 연구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87에 실린 윌리엄스(R. F. M. Williams)의 논문 "Our Problem Children": Masculinity and its Discontents in American Parachute Unites in World War II를 읽었습니다. 이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공정사단 장병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엘리트의식과 남성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정서가 과도한 폭력성으로 나타난 사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정예 부대가 엘리트의식을 가지게 되는건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소속된 부대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는건 높은 사기와 전투 의지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이에 따른 부작용이 무시할 수준이 아니라는 거죠.

 윌리엄스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제101공정사단과 제82공정사단과 같은 '엘리트 부대'에서 나타난 과도한 폭력성에 주목합니다. 이러한 폭력성은 포로 학살, 민간인에 대한 범죄는 물론 아군에 대한 폭력과 같은 군기문란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이 중에서 포로 학살 문제는 이미 많은 문헌에서 언급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적 후방에서 작전하는 경우가 많은 공정부대는 작전 특성상 포로를 관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작전상의 이유로 포로를 학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쟁 초기 독일 공정사단의 전쟁 범죄 중 많은 사례가 이런 이유에서 일어나곤 했습니다.

 이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공정사단 대원들의 엘리트의식이 가져온 군기문란 행위입니다. 예를 들어 낙하산 강하를 하는 공정연대 대원들이 다른 아군 부대들을 멸시하는 정도를 넘어 같은 사단에 속한 글라이더를 타는 공수연대 대원들까지 무시하는 사례입니다. 마켓가든 작전이 실패한 뒤 제82공정사단과 제101공정사단이 재편성을 하기 위해 후방으로 이동했을 때 두 사단의 병사들이 종종 패싸움을 벌이는 사건도 있었는데, 이런 사건 또한 과도한 엘리트의식이 가져온 군기문란 행위입니다.

 필자가 가장 심각하게 비판하는 부분은 민간인에 대한 범죄입니다. 제101공정사단은 적국인 독일은 물론 연합국인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많은 대민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 논문에서 제시한 몇몇 사례는 끔찍합니다. 제101공정사단 대원들이 미성년자를 납치해 성폭행 하거나 저항하는 프랑스 여성의 머리를 돌로 내리쳐 중상을 입힌 사건 등이 대표적입니다. 프랑스에서 있었던 많은 성범죄는 수사 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서유럽에서 미군이 일으킨 성범죄 사건 중 실제로 보고되는 것은 5% 남짓으로 추정되며, 보고된 사건 중에서 실제 수사에 들어가 기소까지 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주 '극단적인' 사건이 아닌 경우 범죄를 저지른 군인이 처벌을 받을 확률은 낮았습니다. 1945년 4월 30일 제101공정사단 506공정연대의 제임스 맥다니엘(James C. McDaniel) 일병은 프란치스카 벨츠(Francisca Welz)라는 여성을 사살하고 시간하는 엽기적인 범죄를 저질러 체포되었는데 공식적인 사건 보고서에는 단순한 살인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맥다니엘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렇게 처벌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이 연구는 제101공정사단과 같은 부대의 대원이 저지른 범죄는 '적당히' 무마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하면서 미군의 태도를 비판합니다. 제101공정사단은 프랑스에 주둔하는 동안 대민 범죄를 너무 많이 저지른데다 지휘부에서도 이를 통제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 민간인들에게 악명을 떨쳤다고 합니다. 반면 제82공정사단은 그나마 사단 지휘부에서 대원들을 통제하려고 노력은 한 편이라고 하는군요.

 윌리엄스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같은 유명한 작품들이 '파시즘으로 부터 세계를 구원한 미국의 시민군'의 서사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전쟁의 어두운 면이 은폐되는 점을 지적합니다. 저자가 지적하는 것 처럼 실제 역사의 복잡한 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두운 측면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022년 6월 3일 금요일

Covert Legions : U.S. Army Intelligence in Germany, 1944-1949

 요즘 간행되는 미국 육군군사사연구소의 저작들을 보면 연구의 중점이 테러와의 전쟁과 냉전으로 옮겨간 것 같습니다. 사실 제2차세계대전은 워낙 많은 연구가 되어 있으니 혁신적인 연구가 나올 여지가 적지요. 미국 육군군사사연구소는 U.S. Army in the Cold War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유럽의 냉전을 중심으로 연구가 나오고 있지만 앞으로 아시아 지역의 냉전도 다루게 되겠지요. 올해 U.S. Army in the Cold War 시리즈로 꽤 흥미로운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Covert Legions : U.S. Army Intelligence in Germany, 1944-1949

이 연구는 미육군의 독일 점령 초기 부터 냉전이 본격화되는 베를린 봉쇄에 이르기까지 미국 육군이 독일에서 수행한 정보 활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제2차세계대전 시기 미육군의 대독 정보활동을 다루는 부분 입니다. 두 번째는 냉전 초기 미육군의 정보활동 조직과 체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미육군의 독일내 정보활동에 대한 분석입니다. 이 세번째 부분은 중요한 부분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미육군의 전쟁범죄 조사활동과 독일의 탈나치화 정책 수행, 그리고 마지막으로 냉전 초기 독일내의 대소련 정보활동 등 입니다. 소련 관련 내용을 다루는 제9장과 제10장은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9장은 미육군의 정보기구와 독일 사민당의 협력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이건 나중에 독일 총리가되는 빌리 브란트와 깊숙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빌리 브란트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오는 간첩 스캔들의 기원이 냉전 초기 대소련 정보활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점을 보여주는게 재미있지요. 빌리 브란트가 미국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밝혀진지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 입니다. 빌리 브란트를 비롯해 독일연방공화국 초기 정치계의 거물들과 미국 정보기관과의 관계를 밝혀낸 점은 이 연구의 장점입니다. 연구의 마무리를 짓는 제10장은 베를린 봉쇄로 냉전이 격화되고 미육군의 정보활동 방향이 전환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국 독일의 체제 변화에서 동맹 독일과의 협력 체계 구축으로 전환되는 과정이지요.

매우 재미있는 연구입니다. 특히 1945-1948년 시기 한국의 상황과 겹쳐 보이는 부분도 많아서 재미있게 읽히네요.

2018년 4월 27일 금요일

한국전쟁기 한국의 건빵 생산

얼마전 트위터에서 한국군의 건빵 썰을 푼 김에 관련된 문헌을 하나 번역해 봅니다. 아래의 내용은 1958년 5월에 Kenneth W. Myers가 작성한 KMAG’s Wartime Experiences: 11 July 1951 to 27 July 1953의 275~289쪽을 번역한 것 입니다. 해당 연구보고서는 총 3개의 폴더로 나뉘어 태평양사령부 군사실 문서군인 RG550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Pacific, Entry 2A1-2AA1의 85번 상자와 86번 상자에 나뉘어 있습니다. 건빵 외에 통조림 생산에 관한 내용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번역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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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

1951년 6월 제8군사령부 군수참모처와 군사고문단은 극동군사령부에 9월 15일 부로 일본에서 한국군의 J형 전투식량과 건빵을 생산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한국내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정책 기조에 맞춰 전투식량과 건빵은 한국의 민간 공장을 활용하거나 부산에 공장을 지어서 생산하는게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8군사령부와 군사고문단은 1951년 9월까지는 한국 내에서 건빵 재료와 전투식량에 들어갈 통조림 및 기타 부식 재료를 조달하는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1)
1951년 7월 극동군사령부는 일본에서 생산한 한국군용 건빵 재고가 10월 20일까지 충분한 분량이며, 전투식량은 10월 31일까지 충분한 분량이라고 보고했다. 또한 한국에서 건빵과 전투식량을 생산할 수 있을때 까지 소비할 건빵 재고를 일본에서 조금 더 생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서의 건빵 생산은 원래 계획한 9월 15일 보다 늦은 10월 1일 부터 시작할 계획이었다.2)

그러나 1951년 9월이 되자 한국 내에서 건빵과 비상전투식량을 생산하는 계획을 좀 더 연기해야 했다. 부산의 건빵 공장은 건축 자재 조달이 늦어져 1951년 12월 말이나 1952년 1월은 되어야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전투 식량의 주 메뉴인 생산 통조림 생산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8군사령관은 한국 국방부장관에게 서신을 보내 건빵 공장 가동과 전투식량 생산 계획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확답을 요구했다. 한국 내에서의 생산이 지연되고 있었지만 제8군사령부는 한국에서 생산을 시작하기 전에 일본에서 한국군용 건빵과 전투식량을 계속 생산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재고량과 일본에 발주한 잔여 물량을 합치면 건빵 5개월 치와 전투식량 2개월 분이 있었다.3)
1951년 10월 초 한국 육군참모총장은 제8군 사령관에게 일본에서 건빵과 전투식량 6개월 치를 추가로 생산해 달라고 요청했다. 제8군 사령부는 한국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부산의 건빵 공장을 최대한 빨리 가동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부산의 건빵 공장을 수리하는데 필요한 자재에 소요되는 예산은 한국민간구호계획(Civilian Relief in Korea, CRIK) 기금에서 유용하도록 제안했다. 일본에서 조달한 건빵 재료가 한국에 도착했지만 부산 건빵 공장의 생산 예정일은 확실치 않았다.4)

제8군사령부, 군사고문단, 한국민간구호계획의 대표단은 1951년 11월 건빵을 생산하기로 계약한 업자와 회의를 했다. 그런데 공장 건물은 커녕 부지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민간구호계획의 대표는 45일 내로 부지를 마련하고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면 건설 자재를 제공하되, 그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을 파기하기로 했다. 11월 말이 됐는데도 계약한 업자는 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다. 군사고문단에 따르면 그 무렵 한국군은 건빵과 전투식량을 생산할 다른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한국측은 설사 임시방편이라 하더라도 일본에서 건빵과 전투식량을 생산하는데 반대했다. 제8군 사령관은 군사고문단장에게 서신을 보내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건빵 부족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5)
1951년 초 군사고문단은 제8군사령부에 한국군의 급식 부족 문제를 제기했다. 전투부대는 최소 기준의 급식을 받고 있었다. 최소기준으로는 병사들의 체력과 사기를 높게 유지할 수 없었다. 후방 부대의 급식은 칼로리, 단백질, 지방이 권장량 이하 수준이었다. 한국군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 원인은 주로 한국 정부의 책임이었다. 한국 정부는 시장 가격의 폭등에 대응해 원화 예산을 증액하지도 않았고 대량 구매를 통해 식량 예비분을 확보하지도 않았다. 제8군사령부 군수참모처는 한국 정부에 생선 공급량을 늘리고, 예산을 증액하고, 늘어난 예산을 육군본부 군수국에 지급해 필요한 식량을 구매하도록 요구했다.6)
한국내에서 건빵을 생산하는 일이 지체되자 군사고문단은 1951년 12월 극동군사령부에 한국군의 1952년 3월 및 4월분 수요를 맞추도록 일본에서 건빵 500만 봉지를 추가로 생산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군사고문단에 따르면 한국 육군본부는 기존에 계약했던 업자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자 모든 계약을 취소하고 부산에 있는 다른 회사와 이 회사의 서울 지사에 건빵 생산을 맡기고자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 해도 한국 육군의 건빵 수요 중 50%를 충족하는데 불과했다. 그리고 서울 공장은 1952년 1월, 부산 공장은 1952년 3월은 되어야 건빵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극동군사령부는 군사고문단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일본에 발주한 건빵은 1951년 12월 말 생산에 들어갔으며 1952년 2월 15일~29일 사이에 500만 봉지를 배송할 예정이었다.7)
군사고문단은 동시에 한국군의 일선 병사들이 일원화된 조달 체계를 통해 김치, 고추장, 된장 등의 부식을 충분히 보급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한 일원화된 조달 체계 하에서 광주에 각종 장류와 신선한 야채를 공급할 지역 기구를 설치하는 방안도 연구했다. 한국 육군이 일원화된 조달 체계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각 부대 지휘관들이 급식 수당에 대한 통제권이 약화되는걸 우려했다는 점이었다.8)

서울의 건빵 공장은 1952년 1월 중순 소규모 생산을 시작했다. 얼마 있지 않아 서울 공장의 건빵 생산량은 하루 20,000~25,000봉지에 달했다. 부산 대신 1952년 5월 1일까지 대구에 두 번째 건빵 공장을 세우는 계획도 수립되었다.9) 극동군사령부는 1952년 1월 초 제8군사령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 보낸 서신에서 한국의 건빵 생산 현황에 대해 평가했다. 이 서신은 한국 국방부가 건빵 공장 건설에 필요한 예산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그 이유는 한국군에 대한 급식을 미국 정부에 무한정 의존하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극동군사령부는 6개월치의 건빵 재료 공급이 확정되었고, 한국 내의 건빵 생산이 본 궤도에 오를 때 까지 임시방편으로 500만 봉지의 건빵을 공급할 계획도 확정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즉시 한국 정부에 건빵의 추가 공급은 없다고 통보하라. 한국 정부가 건빵 생산을 위해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극동군사령부는 건빵의 추가 공급을 거부할 것이다.”라고 했다. 추후의 원조는 건빵 생산 공장을 운영하는데 제한하기로 했다. 이것도 한국측이 완전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한국정부와 한국군, 건빵 공장 운영진에게서 자구책 마련을 위해 납득할 만한 노력을 기울이고, 요청한 원료와 기자재를 원조받으면 건빵을 생산해 공급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증을 받은 뒤에만 제공하기로 했다.10) 제8군사령부는 한국 국방부장관과 군사고문단에 이 사실을 알렸다. 제8군사령부는 4월 30일까지는 한국군의 건빵 수요를 맞출 수 있지만 이때까지 한국 내에서 생산하는 양으로 4월 30일 이후의 수요를 맞출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으며, 1952년 6월에서 7월쯤이 되면 건빵 부족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다.11)

1952년 2월에는 한국군에 대한 건빵 공급이 개선되었다. 서울 공장의 생산량은 하루 평균 25,000봉지에 달했고 3월 초에는 33,000봉지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한국 육군의 하루 건빵 수요는 90,000봉지였으니 이것은 수요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대구의 건빵 공장이 4월 말에서 5월 초 생산을 시작하면 하루 평균 30,000봉지를 생산할 것으로 예측되었다.12)
1952년 2월 제8군은 한국군이 그해 6월까지 미육군의 보급시설에서 건빵 생산에 필요한 재료를 보급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1952년 6월 1일 부터 9월 30일까지의 재료는 한국 육군이 항구에 하역되는 대로 인수하도록 했다. 한국군이 재료를 직접 인수하면 미군 보급고가 한국군 건빵 재료를 보관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고, 향후 들어올 재료들도 마찬가지였다.13) 1952년 3월 초 군사고문단은 제8군사령부에 서울의 건빵 공장의 생산 수율을 일본 공장의 85% 수준에서 81% 수준으로 낮출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군사고문단은 서울 건빵공장을 시찰했을때 굽는 과정에서 재료 낭비가 심하고, 필요 이상으로 건빵의 수분함량을 낮추기 위해 과하게 가열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서울 공장의 초도 계약 물량 1백만 봉지 생산 수율은 일본 공장의 85%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제8군사령부는 서울 공장의 생산 수율을 낮추지 말도록 지시하는 한편, 군사고문단에 다음 사항을 권고했다.

-서울 공장의 오븐 온도를 순간적인 가열과 재료 손실을 막고, 제빵 표준을 맞출 수 있도록 할 것.
-건빵의 수분함량을 줄이고 덜 단단하게 만들고, 가능하다면 일본에서 생산한 제품과 비슷한 품질로 만들도록 할 것.
-생산 설비의 벨트를 교체할 것.
-건빵에 숱검댕이 묻지 않도록 화덕을 밀폐할 것14)

1952년 4월에 이르러서도 한국군용 건빵 생산은 희망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서울 공장의 하루 생산량은 평균 30,000봉지에 머물렀다. 군사고문단은 대구에 건설 중인 건빵 공장은 대규모의 작업이 필요해 8월 1일은 되어야 첫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유엔군사령부는 고위 인사들에게 건빵 생산 문제를 브리핑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51년 10월 부터 1952년 3월까지 미육군은 한국군에 비상식량으로 26,040,000봉지의 건빵을 제공했으며 달러화로 환산하면 1,939,685달러에 해당한다. 동시에 미국은 비슷한 양의 건빵을 생산할 수 있는 재료를 공급했다. 한국 정부는 건빵 공장 설립을 지체했다. 건빵 공장을 세워서 가동하기 전에는 건빵 완제품과 건빵 재료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뒤에야 한국측은 조치를 취했다. 최근의 보고에 따르면 서울 공장의 건빵 생산은 한달에 488,000봉지라고 한다. 이를 위해 한국정부에 아홉달 동안 압력을 넣어야 했다.”15)

1952년 5월과 6월에 서울 건빵 공장은 하루 30,000봉지의 건빵을 생산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하루 건빵 수요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군사고문단은 대구에 새로 짓고 있는 건빵 공장은 8월 15일 쯤 되어야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서울 공장은 1952년 2월 1차분 계약 물량 1,800,000봉지 생산을 완료했다. 6월 부터는 새로 계약한 1,077,000봉지에 대한 생산을 시작해 814,980봉지를 납품했다.16) 대구 건빵 공장은 1952년 7월 초도생산을 시작했다. 당초 예상한 8월 15일 보다 일정을 당긴 것이었다. 대구 공장의 하루 생산 예상치 30,000봉지에 서울 공장의 하루 평균 생산량 30,000봉지를 합치면 일선 부대의 장병들은 하루 평균 1/3봉지의 건빵을 배급받을 수 있었다.17) 한국육군 군수국은 군사고문단의 자문을 받아 공장들에 압박을 가했다. 그 결과 8월 부터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9월에 이르러서는 서울 공장과 대구 공장의 생산량을 합쳐 하루 60,000봉지의 건빵이 생산되기 시작했다.18)

1952년 10월과 11월에는 서울과 대구 공장을 합친 생산량이 목표치에 미달하는 하루 평균 52,000봉지에 머물렀다. 건빵 생산은 줄어드는데 한국군 병력이 늘어나는 한편, 건빵 보급량을 늘리려는 계획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군사고문단은 1952년 10월 영등포의 건빵 공장을 재가동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공장 복구에 필요한 건설 자재를 확보하고 이 공장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게 큰 문제였다.19)
군사고문단은 하루에 병사 1인당 건빵 1/3봉지를 배급하는 수준으로는 겨울철에 일선 장병들에 충분한 급양을 제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훈련병에게는 건빵 배급이 허가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들에게도 건빵을 배급해야 한다고 보았다. 훈련병들은 훈련소에 입소할 당시 충분한 급식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하루 평균 12~15시간의 격렬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훈련병에게는 칼로리와 영영가가 더 높은 급식을 하는게 옳았다. 군사고문단은 훈련병에게 건빵을 보급하면 체력을 증진하고 사기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리라 보았다.20) 1952년 11월 제8군 사령부는 군사고문단과 한국 육군 군수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극동군사령부에 한국에서 건빵 생산을 늘릴 수 있도록 재료를 더 공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건빵 생산을 늘려서 병사 1인당 건빵 배급량을 하루 평균 1/3봉지에서 1/2봉지로 늘린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하루 평균 129,536봉지의 건빵이 필요했다. 이정도 양이면 일선부대의 205,740명에게 하루 평균 1/2봉지, 훈련병 80,000명에게 하루 평균 1/3봉지의 건빵을 배급할 수 있었다.21) 1952년 12월 육군부는 한국군에 대한 건빵 배급량 증대를 허가하고 하루에 130,000봉지를 생산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이 인가량은 전방 부대 장병들이 하루 1/2봉지, 훈련병들은 하루 1/3봉지의 건빵을 배급받을 수 있는 양이었다. 하지만 한국 내의 건빵 생산은 한국 육군 군수국의 요구치를 미달하고 있었다. 1952년 12월 한국내의 건빵 생산량은 하루 평균 45,000봉지였다. 군사고문단은 영등포 공장 재건을 위한 건설자재 확보에 노력해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1953년 1월은 되어야 공장 부지에 있던 피난민들을 이주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22) 영등포 공장의 생산 설비 복구는 만족스럽게 진행됐지만 건설 자재 확보가 문제였다. 1953년 1월 군사고문단의 조달 고문관은 일본을 방문해 극동육군사령부 조달과와 건설자재 확보 문제를 상의했다.23) 1953년 3월, 제8군 사령부는 이 문제를 연구한 뒤 극동육군사령부에 나중에 상환받는 조건으로 제8군 사령부가 보유한 건설자재를 제공하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건빵 공장이 추가로 건설될 때 까지 미국 고문관들이 한국군 취사병들을 훈련시켜 건빵 생산을 감독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24)

1953년 4월, 미국정부는 한국군에 43,000달러에 상당하는 양의 건설자재를 공급해 영등포 건빵 공장을 복구하도록 했다. 공장 소유주와 한국군은 영등포 건빵 공장이 군납만을 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영등포 공장의 건빵 생산은 1953년 5월에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영등포 공장이 생산을 시작하더라도 한국군의 수요를 맞추기는 어려웠다. 당시 한국군의 하루 건빵 수요는 294,233봉지였다. 한국내에 있는 건빵 공장을 최대한 가동해도 최대 생산량은 하루 평균 210,000봉지에 불과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적절한 건빵 보급을 위해 부대 단위에서 임시변통의 조치를 계속 취할 필요가 있었다.25) 모든 한국군 부대는 기본적인 재료를 공급받아 국수, 경단, 건빵 등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조치를 취했다. 건빵을 생산한 부대들은 낡은 드럼통, 진흙, 점토 등을 동원해 오븐을 만들었다. 한국군의 일선 부대들은 건빵과 비슷한 수준의 칼로리를 가진 대체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26)

영등포 공장 복구에 필요한 마지막 건설자재는 1953년 5월 중순 전달되었다. 5월 말까지의 공장 복구 수준으로 봤을때 6월 10일 쯤이면 건빵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27) 1953년 5월 영등포 건빵 공장의 복구 공사는 거의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 군사고문단은 공장 복구가 완수되도록 여러 번에 걸쳐 개입했다. 군사고문단의 개입은 정치적인 문제를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한국육군은 군수국 보급과에 공장소유주와 교섭할 권한을 주고 한국은행에 대출을 주선 했는데, 이것은 모두 군사고문단이 추가로 확인조치를 취해야 했다.28)

1953년 5월 초 제8군사령부, 군사고문단, 한국후방관구사령부(KCOMZ) 대표들은 한국군의 실제 건빵 수요량을 평가하기 위해 회의를 가졌다. 한국군은 병력 602,880명을 기준으로 병사 1인당 하루 평균 건빵 1/2봉지를 보급하기 위해서 일일 건빵 생산량을 130,000봉지에서 294,233봉지로 늘리기를 원했다. 한국군의 요구량은 미국 육군부가 하루 생산량을 130,000봉지로 승인했을때 고려한 변수와 일치하지 않았다. 육군부는 영등포 공장이 복구되어  재가동에 들어가면 건빵 생산량을 늘리는데 기여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한국군 병력이 급속히 증강되면서 최저 보급 기준이 악화되자 한국군은 건빵을 더 많이 소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군의 급식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건빵을 통해 탄수화물을 더 공급할 필요는 없었다. 회의에 참석한 군의관은 영영학 관점에서 하루에 건빵 1/4봉지면 충분하고 1/3봉지는 과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회의 참석자들은 육군부에서 파견한 조사단이 한국군 급식 소요를 영양학적으로 분석한 결과가 나올때 까지는 최종결정을 유보하고, 그대신 1952년 4월 기준 한국군 병력 525,000명에 맞춰 하루 1/3봉지의 건빵을 보급하기로 했다. 525,000명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군의 하루 평균 건빵 수요는 175,000봉지였다. 육군부에서 허가한 양 보다 45,000봉지를 더 생산해야 했다.29) 1953년 7월 말에도 한국군의 일선 부대들은 서울, 대구, 영등포 공장에서 생산하는 건빵으로는 부족한 양을 보충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건빵을 생산해야 했다.



주석

1) Comd Rept(S), HQ EUSAK, Jun 51, Narrative, p.118.
2) Comd Rept(S), HQ EUSAK, Jul 51, Narrative, p.97.
3) Comd Rept(S), HQ EUSAK, Sep 51, Narrative, pp.80~81.
4) Comd Rept(S), HQ EUSAK, Oct 51, Narrative, pp.78~79.
5) Comd Rept(S), HQ EUSAK, Nov 51, Narrative, pp.71~72.
6) Staff Sec Rept(S), QM G4 EUSAK, Dec 51, p.12; Comd Rept(S), HQ EUSAK, DEC 51, Narrative, pp.54~55.
7) Staff Sec Rept(S), QM G4 EUSAK, Dec 51, p.12; Comd Rept(S), HQ EUSAK, Dec 51, Narrative, pp.54~55.
8) Comd Rept(S), HQ KMAG, Jan 52, Narrative Summary, p.24.
9) Ibid.
10) Comd Rept(TS), GHQ UNC/FEC, Jan 52, p.104; Comd Rept(S), HQ EUSAK, Jan 52, Narrative, p.54.
11) Comd Rept(S), HQ EUSAK, Jan 52, Narratvie, p.55.
12) Comd Rept(S), HQ EUSAK, Feb 52, Narratvie, p.60.
13) Ibid.
14) Comd Rept(S), HQ EUSAK, Mar 52, Narratvie, p.54.
15)Comd Rept(S), HQ KMAG, Apr 52, Narratvie Summary, p.16; Briefing for VIP’s, HQ UNC, Apr 52, Sec. 16, p.7.
16) Staff Sec Repts(S), G4 KMAG, May 52, Summary, p.2; Jun 52, Summary, p.1; Comd Repts(S), HQ KMAG, Narrative Summaries, May 52, p.18; Jun 52, p.18.
17) Comd Rept(S), HQ KMAG, Jul 52, Narratvie Summary, p.18.
18) Comd Rept(S), HQ KMAG, Aug 52, Narratvie Summary, pp.15, 17.
19) Staff Sec Rept(S), G4 KMAG, Oct 52, Summary of Activities, p.1.
20) Staff Sec Rept(S), QM G4 EUSAK, Nov 52, p.46.
21) Comd Rept(S), HQ EUSAK, Nov 52, Narrative, pp.132~133.
22) Comd Rept(S), HQ EUSAK, Dec 52, Narrative, p.143; Staff Sec Rept(S), G4 KMAG, Dec 52, Summary of Activities, p.1.
23) Staff Sec Rept(S), G4 KMAG, Jan 53, Summary of Activities, p.1.
24) Comd Rept(S), HQ EUSAK, Mar 53, Narratvie, p.146; Staff Sec Rept(S), QM G4 EUSAK, Mar 53, p.23.
25) Comd Rept(S), HQ EUSAK, Apr 53, Narratvie, p.149; Staff Sec Rept(S), G4 KMAG, Apr 53, Summary of Activities, p.1.
26) Staff Sec Rept(S), QM G4 EUSAK, Mar 53, p.23.
27) Staff Sec Rept(S), G4 KMAG, May 53, Summary of Activities, p.2.
28) Staff Sec Rept(S), G4 KMAG, May 53, Summary of Activities, p.3.


2018년 4월 23일 월요일

1918년 4월 미육군 전차부대 시범 훈련


미육군 기갑-기병 박물관에서 100년전에 실시되었던 조지 패튼의 전차부대 기동 시범을 기록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육군참모대학에서 교육 중인 장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시범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동영상 중간 중간에 참관중인 장교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훈련 시범이다 보니 전차를 후속하는 보병들이 뭔가 좀 성의없는(?) 모습입니다만 1차대전 당시 보전 협동 전술 양상을 잘 보여주는 듯 합니다. 르노 FT 17외에도 영국제 마크V 전차도 잠깐 보이네요. 디지털화 하면서 변환이 잘못된 건지 화면비율이 조금 이상한 걸 빼면 훌륭한 영상입니다.


2018년 3월 22일 목요일

"Armor In Battle" Special Edition for the Armored Force- 75th Anniversary


미 육군 기갑학교가 2016년에 간행한 "Armor In Battle" Special Edition for the Armored Force- 75th Anniversary을 읽어봤습니다. 군대에 계신 분들이 읽어보시고 추천하는 평을 먼저 접한 뒤 읽었는데, 역시 군대에서 교육적인 목적으로 집필한 책이다 보니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이 책의 구성은 크게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갑 병과 창설까지의 약사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 점령기의 기갑부대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파나마 침공
-걸프전쟁
-발칸반도의 평화유지작전
-테러와의 전쟁

군대의 교육용 서적이어서 그런지 최근의 전쟁인 걸프전쟁과 테러와의 전쟁시 기갑부대 운용에 관한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양만 따지면 제2차 세계대전기에 대한 서술 보다 테러와의 전쟁에 관한 부분이 조금 더 많을 정도입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기의 실전 사례도 교육적인 효과는 있겠습니다만 현재와는 기술적 환경과 전장의 환경이 많이 다르니 최근의 교전 경험 보다는 효과가 적겠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대한 부분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여기서는 북아프리카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의 제1기갑사단, 1944년 아라쿠르 전투의 제4기갑사단, 뉴기니아 전역의 제41보병사단, 이오지마 전투의 제4해병사단의 전투 경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기 미군의 기갑작전 하면 자주 언급되는 노르망디와 아르덴느 전역의 사례가 제외된 점이 특기할 만 합니다. 아마 이 두 전역은 지나치게 많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제외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전쟁 부분에서는 서울 탈환작전 당시 시가전에서의 전차 운용 경험,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의 전차 운용 경험을 다룬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발칸반도의 평화유지 작전과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기갑부대 운용은 현대의 군인들에게 매우 유용한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작전의 특성상 대규모 기갑부대 운용 보다는 소규모의 전술적 운용과 시가전 및 대게릴라전 같은 상황이 대부분입니다만.

2018년 3월 2일 금요일

미군과 독일군 장비의 비교 평가에 관한 미 제3기갑사단장의 보고서



‘미군과 독일군 장비의 비교 평가에 관한 미 제2기갑사단장의 보고서’를 번역한 김에 같은 시기에 작성된 제3기갑사단장 모리스 로즈 장군의 보고서도 번역을 해 봅니다. 이 두 문서는 한 세트를 이루는 것이다 보니 번역해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3기갑사단은 유럽전선에서 M26을 실전운용한 부대이기도 하니 이 전차의 초기 운용에 대한 평가도 참고할 만 합니다. 블로그에 올리는 번역문은 Steven L. Ossad and Don R. Marsh, Major General Maurice Rose: World War II’s Greatest Forgotten Commander(Taylor Trade Publishing, 2006)의 부록 378~383쪽에 실린 판본을 옮긴 것 입니다. 장병들의 증언이 소략해서 보고서의 전체 분량이 매우 적습니다.

- ‘팬서 전차’ 같은 표현은 그대로 살립니다.
- 독일군=German, 독일놈=Jerry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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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갑사단사령부
사단장실

미육군 253야전우체국
1945년 3월 21일

아이젠하워 장군께.

장군께서 3월 18일에 보내신 서한을 어제 받았습니다. 장군께서 문의하신 사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드립니다.

a.개인적으로 현재 사용중인 M4와 M4A3 전차는 독일군의 5호전차보다 열세라고 봅니다. 아군의 장비는 장거리 운송을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길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견해는 순수하게 현재 전장에서 맞닥트리고 있는 독일 전차와 아군의 중형전차의 성능만을 비교한 결과입니다. M4 전차와 M4A3 전차는 5호전차 보다 성능이 열세해 지난 12월 부터 1월에 걸쳐 전개된 벨기에의 전투에서 아군은 막대한 수의 전차를 잃었습니다. 제가 이 보고서에서 말씀드리는 것들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아군이 과거의 작전에서 독일군 기갑부대를 상대로 승리한 것이냐는 의문이 생기실 겁니다. 그 이유는 아군의 열등한 기갑장비를 포병, 근접항공지원, 기동력 등으로 상쇄하는 한편, 전차 조종수와 포수 등 전차승무원들이 유리한 위치를 잡을 수 있도록 기동하고 적을 근거리로 끌어들여 사격을 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장비의 열세를 상쇄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군 포수들의 기량이 적 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단 장병들에게 적 전차가 800~1000야드 이내로 들어오기 전에는 사격하지 말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물론 아군의 기동을 은폐하지 못하는 지형에서는 훨씬 먼 거리에서 교전이 시작되므로 이 명령을 항상 이행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개 아군이 많은 피해를 입습니다. 아군의 포병과 전투폭격기는 수많은 적 전차를 파괴했습니다. 이들의 효율적인 작전 수행은 전차부대에 있어 커다란 유형의 지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아군의 75mm, 76mm 전차포 포탄이 600야드 거리에서도 5호전차의 정면장갑에 맞고 튕겨나가는 걸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제한된 기동공간으로 우회기동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어쩔수 없이 적 전차와 정면대결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b. 개인적으로 90mm 포를 탑재한 T26은 팬서 전차와  동등한 조건에서 교전이 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신형 T26의 90mm포도 아직은 포구초속이 낮습니다. 최근 사단을 방문한 반즈Gladeon M. Barnes 장군은 추후 보급될 T26은 더 강력한 주포를 탑재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사단의 T26 실전운용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전차는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1대의 T26이 대전차포에 격파된 반면, T26은 2대의 5호전차를 격파했습니다.

c. 이하의 내용은 사단을 대표하는 전차장들과 기타 보직 장병들의 견해를 정리한 것 입니다. 이들의 의견이 장군께서 알고 싶어하시는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생각합니다.

(1)블랜처드E. W. Blanchard 중령, 군번 0341405, D-18일 이래 전차대대장으로 복무 중.:
“아군의 포병이나 전투폭격기에 격파되지 않은 팬서 전차는 대개 적 승무원들이 유기했거나 자폭시킨 것이다. 우리 전차에 격파된 것은 대개 아주 근접한 상태에서 피격된 것들이다. 개인적으로 아군의 75mm 전차포에 격파된 팬서 전차를 딱 한대 목격했다. 아군의 항공지원과 포격지원을 제외한다면, 우리가 승리하고 있는 이유는 아군의 전차와 전차병이 더 많기 때문이다. T26은 팬서 전차와 대등한 방어력과 화력을 갖췄다. 기동성은 T26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2) 해리 위긴스Harry W. Wiggins 하사, 군번 37130158, 제33전차연대 F중대. 사단의 모든 작전에 참전했음.:
“M4가 팬서를 격파하는 건 몇번 보지 못했다. 팬서 전차를 격파한건 대개 비행기라고 생각한다. 150야드에서 팬서 전차에 철갑탄 4발과 고폭탄 2발을 쐈지만 단 한발도 관통하지 못한 일이 있다. 75mm 포로 정면 장갑을 쐈기 때문이다. 적 전차들이 위장을 하거나 매복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군은 적 전차의 유효 사거리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아군은 최대한 수백야드 이내에서 교전하려고 한다. 아군 전차는 팬서 보다 속도는 빠르지만 약한 지반에 돈좌되는 경우가 잦다. 개인적으로는 75mm 보다 76mm 전차포를 좋아한다. 하지만 76mm 전차포의 위력도 아직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개인적으로 T26의 외형을 좋아하며, 90mm 주포의 위력에 인상을 받았다. 75mm 보다 훨씬 강력하다. 물론 M4 전차만 가지고도 승리할 수는 있지만 그러려면 더 많은 전차와 전차병이 희생돼야 한다.”

(3) 윌리엄 윌슨William G. Wilson 하사, 군번 36321891, 제33전차연대 D중대. 윌슨 하사는 사단의 모든 작전에 참전했으며 현재 T26의 전차장이다.:
“5호전차는 장갑의 두께와 구조, 주포의 성능 때문에 아군의 M4 보다 훨씬 우수하다. 개인적으로는 아군 전차의 속력과 기동성이 팬서 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M4 전차가 800야드 이내에서 팬서 전차의 측면을 쏴서 격파한 것을 목격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려면 전차병의 정신력이 강인해야 하며, 관통이 확실할 때 까지 여러발의 명중탄을 기록해야 한다. 신형 T26은 훨씬 좋다. 차량의 높이도 낮아졌고 기동성도 훌륭하다. 또한 팬서 보다 우수한 주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더 주포의 위력이 강력하면 좋겠다. 이미 수많은 M4 전차가 있으니 이것만 가지고도 승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왕이면 T26을 더 많이 보급해 주는게 좋겠다.”

(4) 로버트 얼리Robert M. Early 하사, 군번 17048266, 제32전차연대 E중대:
“본인은 전차장으로 9개월간의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다. 5개월간 76mm 셔먼을, 3개월간 75mm 셔먼을 지휘했으며 최근 1개월은 90mm 포전차를 지휘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M4를 신뢰하지 않는다. 독일놈들은 M4를 보이는대로 때려부순다. T26전차의 취약한 부위에 돌격전차 처럼 장갑을 더 강화한다면 독일놈들을 압도하는 전차가 될 것이다. 90mm 전차포는 지금까지 아군이 보유했던 무기 중 최고이다. T26 덕분에 독일놈들과 대등한 전투가 가능해졌다. T26은 접지력도 우수하고 기동성도 좋다. 개인적으로는 T26의 정면장갑 경사도를 더 낮추고 두께도 강화하면 좋겠다.”

(5) 앨버트 윌킨슨Albert E. Wilkinson 상병, 군번 39402006, 제32전차연대 F중대:
“9개월간 75mm 셔먼 전차의 포수로 참전했다. 그동안 적의 포격에 한 대의 전차를 잃었다. 셔먼은 독일 전차와 비교할 수 조차 없다. 방어력도 약하고 화력도 약하다. 한번은 500야드 거리에서 4호전차에 명중탄을 날렸는데 튕겨나간 일이 있다. 다행히 적 전차가 포탑을 엉뚱한 방향으로 돌렸다. 독일 전차를 상대로 75mm 전차포는 500~600야드 이상에서 무용지물이다. 기동성은 좋다. 하지만 독일군 전차는 더 날카로운 선회가 가능하고 등판성능도 월등하다. 적 전차는 넓은 궤도를 장착하고 있어 아군 전차가 지나가지 못하는 지형도 통과한다. T26의 등장으로 아군도 화력 측면에서는 적과 대등해졌다. 하지만 방어력은 아직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돌격전차에 90mm 주포를 탑재했으면 한다. 그러면 승무원들도 전차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다. 화력이 우수하면 장갑이 약한 것은 큰 문제가 안된다. 하지만 둘 다 없다면 진땀을 흘리게 된다.”

(6) 존 댄포스John A. Danforth 일병, 군번 36884252, 제32전차연대:
“나는 9개월간 75mm 셔먼 전차의 포수로 참전했다. 그동안 두 대의 전차를 잃었다. 아군의 전차포는 너무 약하다. 셔먼을 설계한 사람들은 독일놈들의 전차가 얼마나 강력한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나는 독일놈들의 대포가 건물 두채를 뚫어버린 뒤 그 뒤에 있던 M4를 완전히 관통해 버리고 그 옆의 건물까지 뚫어버리는걸 직접 봤다. T26에 탑재된 90mm 전차포는 훌륭하다. 하지만 이왕이면 방어력이 더 강하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독일놈들의 바주카포를 막기 위해서 시멘트 같은걸 발라서 장갑을 추가하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7) 제롬 하라클루Jerome O. Haraklu 병장, 군번 36234566, 제32전차연대 F중대:
“9개월간 조종수로 참전했으며 그동안 적의 포격에 전차가 기동불능이 된 게 두 번이다. 아군 전차는 방어력도 약하고 화력도 약하다. 방사형 엔진을 장착한 전차는 포드 엔진을 장착한 전차보다 기동성이 떨어진다. 내가 타던 전차가 2200야드 거리에서 날아온 포탄에 우측면을 관통당한 일이 있다.”

(8) 매슈 케인Matthew W. Kane 중령, 제32전차연대 제1대대장:
“본인은 전차대대장으로 6개월간의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제32전차연대 제1대대는 지난 9개월간 84대의 전차를 잃었다. 전차전에서 고화력의 75mm, 88mm 전차포를 탑재한 적 전차를 상대할 때 아군의 M4는 절망적인 수준으로 방어력과 공격력이 약하다. 아군 전차의 우수한 기동력과 속력도 방어력과 공격력이 약하니 도움이 되지 않았다. 벨기에의 벌지 전투에서 아군의 전차 손실은 적군 보다 많았고, 심지어 아군이 방어를 할 때도 그러했다. 전차병들은 아군 전차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군은 전차의 숫자로 승리를 해야 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많은 인명 피해와 전차 손실을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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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른 장비에 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a.아군의 반궤도 장갑차는 우수한 차량입니다. 병력 수송, 기동전 상황에서의 승차 전투 같이 원래 의도한 목적에 맞춰 운용할 때 효율적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군의 반궤도차량은 특별히 개선할 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b. 개인적으로 기갑사단에 배치된 경전차의 37mm 주포는 아무데도 쓸데가 없다고 봅니다. 75mm 주포를 탑재한 신형 M24 경전차는 사단 수색대대와 전차연대 수색중대에 적합한 우수한 차량입니다. M5 경전차와 바퀴달린 장갑차를 모두 M24로 교체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c. 아군의 트럭과 일반 차량은 지금까지 제가 개인적으로 목격한 독일군의 어떤 차량 보다도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d. 지금까지 언급한 전차포를 제외한 아군의 화포는 매우 우수하며, 지금까지 아군의 야포에 실망한 일이 없습니다.

e. 아군의 바주카포는 관통력이 부족합니다. 독일군의 바주카포 보다 위력이 떨어집니다. 사단 장병들에게 노획한 독일군의 판처파우스트를 사용하도록 지시를 내리고 있습니다. 장병들도 판처파우스트가 미제 바주카포 보다 우수하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f. 피복류에 관한 생각은 이렇습니다. 현재 착용하는 전투복과 동일한 디자인에 안감을 대 방한효과를 높인 것을 기갑부대 전체에 보급해야 합니다. 동일한 디자인에 안감은 없고 가벼운 섬유를 쓴 것은 하복으로 지급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모든 기갑사단의 전투복을 통일할 수 있습니다. 저는 현재 보급된 피복류의 종류가 많아서 놀랐습니다. 지난 일요일에 있었던 사단 훈장 수여식에서 약 300명의 장병에게 훈장을 수여했는데, 이들 모두의 복장이 중구난방이었습니다. 군수참모에게 문의하니 장병들이 착용한 것은 모두 표준 지급품이며 규정에 맞춰 착용하고 있다고 답변 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동복과 하복 모두 동일한 표준화된 디자인의 전투복을 도입하는게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피복과 관련해서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군모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다양한 색의 베레모를 도입했으면 합니다. 기갑병과의 베레모는 녹색으로 해서 기갑부대 장병들 전체에 보급하는게 좋겠습니다. 베레모를 채택하면 그 위에 그냥 헬멧을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헬멧을 벗으면 베레모가 그대로 제복에 맞는 모자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베레모를 채택하면 지금 쓰고 있는 모직 모자를 퇴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갑병과에 맞는 군화도 필요합니다. 높이 8~10인치에 방수기능을 갖춘 군화가 도입되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여러 종류의 군화가 있는데 현재는 공수부대용 군화를 구해서 착용하고 있습니다. 공수부대용 군화가 기갑병과에서 필요로 하는 군화에 가장 근접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갑부대 장병들에게 보급되지 않으며 별도로 구매할 방법도 없습니다. 신형 전투복은 클래스 A 제복의 대체품으로 완벽합니다.

이 보고서가 장군께서 원하시는 정보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존경하는 아이젠하워 장군께.

모리스 로즈, 미육군 소장, 사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