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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15일 월요일

장기전을 위한 우크라이나의 병력 동원

 

 지난 6월 8일 New Eastern Europe이라는 시사지에 올라온 David Kirichenko의 칼럼 "Mobilizing Ukraine for a long war - New Eastern Europe"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러시아의 전면적인 침공으로 부터 5년째가 된 현재 우크라이나가 병력을 동원하는데 있어 겪는 어려움과 이를 극복하려는 우크라이나 정부와 군의 노력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칼럼이 나가고 며칠 뒤 우크라이나 국방부가 병역제도 개편안을 발표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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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전을 위한 우크라이나의 병력 동원


데이비드 키리첸코


 소국인 우크라이나는 기나긴 전선을 방어하면서 드론과 다른 전장의 혁신을 통해 러시아의 숫적 우위를 다소나마 상쇄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로 상쇄할 수 있는건 여기까지다. 계속해서 전선을 유지하고 소모된 부대를 순환배치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려면 장기전에 필요한 충분한 인력을 동원해야 한다.

 병력 동원 문제는 우크라이나만 겪는게 아니다.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이었던 발레리 잘루즈니 장군은 2023년 11월의 한 인터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은 총동원을 시행하면 국내 정치적인 위기를 초래할 거라고 우려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대규모의 병력을 충분히 훈련하고 무장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러시아가 인구의 우위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잘루즈니 장군은 러시아가 소모전을 치르면서 감당할 수 있는 인력의 한계를 잘못 평가했다고 인정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나의 실수입니다. 러시아는 최소한 150,000명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다른 나라가 이정도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면 전쟁을 그만 뒀겠지요."

 우크라이나도 병력 동원 문제를 겪고 있지만 양상은 조금 다르다. 러시아는 다른 나라라면 정치적으로 휘청일 정도의 인력 손실도 감당할 수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대중의 신뢰, 군대의 전투력, 사회적 통합성을 지키면서 병력동원을 계속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장기전이 가져온 마찰

 2022년 이래로 병력 동원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 초기에는 수많은 우크라이나인이 고향과 가족을 지키고 잘못된 전쟁을 일으킨 침략자에 복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2025년이 되자 이런 기대를 할 수 없게 됐다. 이 문제는 여러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싱크탱크 우크라이나안보협력센터의 센터장 세르히 쿠잔(Сергій Кузан)은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전문성을 가진 조직을 찾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부하들을 지켜줄 수 있는 유능한 지휘관, 자신들의 전문적인 기술과 관심사에 맞는 보직, 가족들에게 확실한 사회적 보장을 해 주기를 원한다. 허드슨 연구소의 선임연구원 루크 코피(Luke Coffey)는 우크라이나의 병력 모집 문제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 중 하나는 복무조건이 불확실한 점이라고 꼽았다. 이 문제에는 급여 뿐만 아니라 최전선에서 복무하는 기간, 병력 순환을 하는 방식, 입대후 받을 훈련 수준, 복무 기간, 그리고 동원 해제가 되거나 복무 기간이 끝난 뒤 받게될 처우 등이 포함된다.

 이는 장기전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문제다. 2022년에는 우크라이나의 국가 존망이 걸려있었기 때문에 자발적인 희생이 많았다. 지금은 단지 조국을 위해 복무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문제는 우크라이나라는 국가가 공정하고 목표가 있으며 지속가능한 체제를 마련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만약 병사들을 한정되어 있는 전략적 자원으로서 세심하게 운용하는게 아니라 단지 전선의 절박한 요구를 빠르게 처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룬다면 사회적 계약이 무너지게 된다. 우크라이나군 제128독립산악강습여단 항공정찰 부대장인 바실 시숄라(Василь Шишола)는 이런 문제점을 파악하고 지금은 러시아군의 진격 보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관료주의에 대한 공포가 더 크다고 경고한다. "징집 대상이 될 사람들은 매일 매일 진격해오는 러시아군 보다 서류철과 펜을 손에 쥔 모병관을 더 두려워한다. 러시아군이 진격해오는데도 신경쓰는 사람이 없는것 같다. 솔직히 나는 이런 상황이 두렵다."

 비숄라의 생각이 좀 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갈등의 요인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전쟁의 승패가 가져올 결과를 이해하지 못한다는게 아니다. 문제는 몇년간 감정적, 물질적 댓가를 치르면서 군복무에 관한 사회적 계약을 유지하는게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짜정보의 무기화

 러시아의 정보공작도 우크라이나의 병력 동원 문제를 복잡하게 한다. 쿠잔은 러시아 정부와 연계된 가짜정보 공작이 우크라이나의 병력 동원에 영향을 끼치는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러시아의 가짜정보 공작은 지역 모병소를 불신하게 하고,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정부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키고 패배주의적인 감정을 퍼트리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소셜미디어는 군간부들이 공공장소에서 남자들을 강제로 잡아들이는 동영상으로 넘쳐난다. 이런 바이럴 영상은 온라인으로 빠르게 퍼져나가 병력 동원이 독단적이고 폭력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강제 징집 영상이 전부 가짜는 아니다. 하지만 봇과 조작으로 만들어진 정보 환경에서는 진짜 정보라 해도 실제 맥락을 벗어나 실제 무기로 이용될 수 있다. 쿠잔은 지난 11월 첫째주에만 온라인에서 병력동원, 징병사무소, 병역이 164,000회 언급됐으며 대부분은 부정적인 내용이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부정적인 피드백이 반복된다. 고립된 상태에서 (부정적인 정보에) 과도하게 노출되거나 부당하다는 인식을 받으면 분노하게 되고, 이러한 분노는 온라인에서 증폭되며, 병력동원에 대한 폭넓은 지지가 약화된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새로운 디지털 도구 등을 이용해 가짜정보 공작에 대응하려 한다. 우크라이나 국회의원 올렉산드라 우스티노바(Олександра Устінова)는 "우크라이나는 인력 문제에 직면했는데 러시아의 선전때문에 더 악화되었다. 러시아는 전쟁에 나가면 첫 전투에서 죽게 될거라는 공포를 퍼트리고 있다."고 말했다. 우스티노바 의원은 인적 자원 파악을 효율화하고 행정 소요를 줄이는 Reserve Plus나 Army Plus와 같은 디지털 솔루션을 언급했다. 쿠잔도 이와 비슷하게 징병사무소와 여론 지도층, 우크라이나군이 보다 빠르고 건설적인 소통을 한다면 가짜정보를 어느정도 막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정보 공세에 모두 대응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지 못할거라고 인정했다.


 최전선의 인력 소요는 현실이다

 이렇게 징병을 하면서 병목현상이 일어난 결과는 지도에 나타난다. 쿠잔은 러시아군이 가장 공격적으로 진격하는 구역은 우크라이나군의 병력이 적은 곳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군 진지가 소수의 병력이 지키는 고립된 거점들로 이루어져있고 각 거점들은 상당히 떨어져 있다고 한다.

 FPV드론 때문에 살상지대가 참호선의 훨씬 후방으로 확대되어 병력 교대, 후송, 재보급이 너무나 위험해져서 병사들이 최전방에 몇달간 갇혀있어야 한다.

 제47기계화여단에서 장교로 있었던 미콜라 멜닉(Микола Мельник)은 "가장 큰 문제는 보병이 충분하지 않다는 겁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군은 공세를 취하지 않더라도 방어진지를 강화하고, 담당 구역을 지키며 전선에 뚫린 구멍을 막기위해 보병이 필요하다. 미국 전쟁연구소(Institute for the Study of War)의 혁신 및 오픈소스 기술부 부장 조지 배로스(George Barros)는 "결국 영역을 점령하고 통제하려면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보병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보병 진지가 전선을 따라 드문드문 흩어져있다보니 러시아군의 침투조는 전선의 한참 후방까지도 침투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소규모의 러시아군 부대가 러시아 깃발을 꼽는 선전영상을 찍는, 사실상의 자살 임무를 위해 우크라이나군 진지에서 후방으로 20km 떨어진 지점까지 침투한 사례도 있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장 키릴로 부다노프(Кирило Буданов)도 이와 관련해서 X에 글을 썼다. "보병들이 이 전쟁의 가장 큰 부담을 지고 있다. 공중전에서 승리할 수도 있고 기술력에서 압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상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전부 무의미한 일이다."

 통계를 보면 보병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수있다. 지난 1월 미하일로 페도로프(Михайло Федоров)  우크라이나 국방부장관은 우크라이나군에는 군무이탈 상태의 병력이 200,000여명에 달하고 약 2,000,000명의 시민이 병역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군사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병목현상이라 할 수 있다. 서류상으로 더 많은 병력을 확보하는 문제를 넘어 전체 방어선이 광범위한 전선을 담당하며 휴식도 취하지 못하는 보병들에게 맡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충분한 작전적 종심을 확보해 소진된 전방 병력이 휴식을 취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의 군사분석가 오레스트 조(Орест Зог)는 군대가 소모전을 견뎌내려면 병력 동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손실을 감당하면서 훈련된 보충병을 육성할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문제를 바로잡는게 우크라이나의 정책 우선순위이다. 우크라이나 웹사이트 밀리타르니(Мілітарний)의 보도에 따르면 총참모부 교리훈련국의 예브헨 메제비킨(Євген Межевікін)는 외국 군대의 교관들은 최근 전투의 실상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 우크라이나 국내의 교육 훈련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국회 국방위원회 의장 로만 코스텐코(Роман Костенко)는 우크라이나 프라우다와의 인터뷰에서 전체 탈영의 80%가 아직 훈련소에 있는 상태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시간은 군대에 가장 부족한 사치품이다. 외교정책연구소(Foreign Policy Research Institute)의 선임연구원 롭 리(Rob Lee)는 최전선의 여단은 신병을 받은 뒤 고작 2주 정도의 적응훈련밖에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점은 우크라이나 당국이 훈련의 양 뿐만아니라 적합성과 타이밍에 더욱 신경쓰는 이유를 알려준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대응

 우크라이나는 여러가지 수단으로 이 문제에 대응하려 한다. 지난 5월 1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군구조개혁을 발표했다. 이 개혁조치는 6월 1일부로 발효될 예정인데 여기에는 군인의 봉급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새로운 봉급 체계는 전투 보직, 전방 복무 기간과 능력에 맞춰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비전투보직의 병사는 30,000흐리우냐(583유로)의 최저임금을 받는 반면 실제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는 이보다 "몇배는 많은" 최저임금을 받게 된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부대가 최전선에 배치되는 기간도 제한하려 한다. 지난 4월 총사령관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장군은 드론이 전투와 군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설명하면서 최전방 근무 기간을 최대 2개월로 제한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조치는 병력동원에서 일어나는 문제 중 하나에 대응하는걸 도울 수 있을듯 하다. 하지만 봉급인상만 가지고 우크라이나의 심각한 병력동원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군 제109향토방위여단의 병사 안드리 루먄체프는 봉급인상을 "훨씬 더 일찍 했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제와서 봉급인상만으로는 동원해제와 동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더 많은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현재 세 가지 방식으로 병력충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첫 번째는 전통적인 병력동원이다. 두 번째는 여단들이 독자적으로 모병하는 방식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부대간 병력 이동이다. 쿠잔은 병사들이 복무할 부대, 본인의 전문 기술이나 관심사에 맞는 보직을 고를 수 있게 하면 동기부여는 물론 역량 향상에도 도움이 되므로 자원자를 모집하는게 각별히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우크라이나 정부는 기존의 병력 동원 범주 밖으로 모병 대상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2025년부터 18세에서 24세 사이의 시민을 대상으로 더 많은 봉급과 혜택, 복무할 부대와 보직을 선택할 수 있게 해 주는 지원병 계약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모병 캠페인은 변화하는 전장 환경과 젊은 국민들이 군복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드론 조종사와 같은 기술중심적인 보직을 모집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현재 많은 여단들이 동기부여가 되어 있고 역량이 탁월한 지원병을 확보하려고 적극적으로 모병을 하고 있다. 쿠잔은 이렇게 내부 경쟁이 벌어져서 지휘관들이 부대원들을 더 잘 대우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지휘관이 우수하고 보직 배치를 명확하고 전문적으로 하는 부대들이 동기가 부여된 자원병들을 더 많이 모을 수 있다.

 또 우크라이나 정부는 군복무를 보다 지속가능하게 할 수 있도록 새로운 계약 조건을 도입했다. 쿠잔은 새로운 계약 조건에는 동원을 연기하거나 복무를 마친 뒤 전선에 다시 배치되는 기간을 연기할 수 있는 선택권을 넣을 수도 있으며, 이 프로그램은 모병으로 충원하는 병력을 더 늘리고 전문적인 기술 병과의 지원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개혁 조치가 도입되는 단계에 있으나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직 많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새로운 군복무 조건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런 정보 격차가 병력동원에 있어 또 하나의 문제라고 했다.


 국가 역량의 시험대로서 병력동원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가 병력을 동원하면서 겪고 있는 위기는 제도에 대한 시험이다. 유럽주둔 미육군 사령관이었던 벤 하지스(Ben Hodges) 장군은 가장 우선적으로 더 나은 모병, 훈련, 장비 제공, 지속가능성 등으로 군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인 가족들은 그들의 아들과 딸이 적합한 훈련과 장비를 받고 좋은 지휘를 받는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스 장군은 우크라이나군은 작전에 대한 사후분석, 군사지식 공유, 여단들에 일관적으로 적용되는 제도적 교육 등을 통해 진정한 학습을 하는 조직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세번째로는 군대의 고위 지휘관들이 부대간의 역차를 줄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스 장군은 "일부 여단은 매우 뛰어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여단들은 낙후된 소련식 군사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격차를 줄이는게 고위 지휘관들의 책임입니다."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군 장교 이반 할렌코(Іван Галенко)는 군사교육도 우크라이나의 병력 동원 문제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일부 기관들의 개혁이 지지부진하고 러시아군이 전면적으로 침공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소련시절의 관리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고 본다.

 공개자료분석가인 앤드류 퍼페투아(Andrew Perpetua)는 큰 우려를 나타냈다. "내 생각에 우크라이나는 지도부와 군부대간의 불신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불신은 군에서 물러난 지휘관들이 하위 부대에 대한 간섭과 솔직하게 전투 경험을 피드백하는 것을 범죄시하는 지휘 문화를 비판한 사건을 상기시킨다. 

 우크라이나는 드론, 야전축성, 전술 상황에 대한 적응을 통해 러시아의 숫적 우위를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들을 가지고 사람을 대체할 수는 없다. 기나긴 소모전 속에서 인적자원을 최대한 잘 훈련시키고, 적절하게 배치하며, 지속가능하게 관리하는 쪽이 우위를 가진다.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병력 동원의 문제를 바로잡는 것은 신무기 만큼이나 중요하다.

2025년 7월 7일 월요일

제2차 세계대전시 미육군 보병병과 인력 수급과 사회적 불평등에 관한 연구

 독립 연구자인 존 리드(John S. Reed)가 2024년에 발표한 논문 The Infantry's "Problem of Quality": Classification and Assignment to MOS 745, Rifleman, 1942-1945를 읽었습니다. 이 논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육군의 병과별 인력수급 구조 때문에 보병 병과에는 사회적으로 교육과 소득 수준이 낮은 인력이 많이 배치되었고 이때문에 보병의 전투력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지적되었고, 전쟁 직후 전훈 분석 과정에서도 제기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주장은 아닙니다. 그 유명한 마르틴 판 크레벨트(Martin van Creveld)의 연구 Fighting Power에서도 이 문제를 제기했지요.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나온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군을 다루는 유명 저작들이 이 당시 미군을 이상적인 시민군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이런 저작들은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죠. 이 연구의 저자 존 리드는 리 케넷(Lee Kennett), 존 맥마너스(John C. McManus), 피터 킨즈배터(Peter S. Kindsvatter), 릭 애킨슨(Rick Atkinson) 같은 작가들에 비판적입니다.

 필자는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직후 부터 1944년 초 까지는 미육군 지상군(Army Ground Force), 그 중에서도 보병에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인력이 배치되어 전투효율성을 떨어트리는 요인이 되었지만 1944년 이후 점진적으로 우수한 인력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문제가 개선되었다고 봅니다. 전쟁 초기~중기에 이렇게 인적자원이 불균등하게 배분된 원인은 미육군의 항공군(Army Air Force)과 근무지원군(Army Service Force)에 우수한 인적자원이 우선적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연합군이 유럽 본토 침공을 준비하면서 제공권 장악을 위해 항공군을 크게 강화했고 1944년 초 까지는 질이 높은 인적자원이 항공군에 배치되었습니다. 항공군은 기술집약적인 특성상 질이 낮은 인력을 쓰기가 곤란하죠. 마찬가지로 전투지원 병과로 구성된 육군 근무지원군도 질이 높은 인적자원을 필요로 했습니다. 행정과 보급 같은 임무를 수행하려면 일정한 교육수준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근무지원군 병과는 특성상 민간 사회의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병과가 많습니다. 미육군공병단은 1,000명당 725명 꼴로 민간 사회의 직업에 대응하는 보직에 배치되었고 미육군수송단은 1,000명당 788명, 미육군통신당은 1,000명당 579명이었습니다. 반면 보병 병과는 순수하게 전투를 수행했기 때문에 민간 사회의 직업에 대응하는 보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 기술을 가지고 있는 우수한 인적자원은 항공군과 근무지원군에 먼저 가고 남은 인력이 지상군, 그 중에서도 보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건 통계로 입증이 됩니다. 전쟁 기간 중 미육군이 병과분류를 위해 시행한 육군일반분류평가(AGCT, Army General Classification Test)는 5개 등급으로 나누었습니다. 1943년에 미육군 항공군에 보충된 병력의 41.7%는 AGCT 1등급과 2등급이었습니다. 반면 보병 병과는 1등급과 2등급의 비중이 30.2%였습니다. 반면 미육군 항공군에는 4등급과 5등급이 27%였으나 보병 병과는 37.2%였습니다.

 이때문에 1943년 부터 1944년 초 까지 미군 보병의 전투효율성은 낮은 편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육군 지상군 사령관 맥네어(Lesley J. McNair) 장군은 AGCT 점수가 높은 인력을 지상군에 보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1944년 초 까지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미육군은 보병 보충병의 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병보충훈련소(IRTC, Infantry Replacement Training Centers)의 훈련 과정을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1944년 여름 부터 유럽과 태평양 전선의 반격이 본격화되면서 사상자가 급격히 증가했고 이중 대다수가 육군 보병이었습니다. 1944년 말이 되면 방공포병과 대전차포병 등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병과를 보병으로 전환하는 것도 한계에 달합니다. 필자는 그결과 1945년 초 부터는 AGCT 점수가 높은 인력도 보병에 배치되는 비율이 높아지게 됐다고 주장합니다. 즉, 미육군의 사회적 불평등이 이상한 방식(?)으로 해소됐다는 결론입니다.

 비교적 재미있긴 하지만 많은 내용이 기존의 연구에서 다루었던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시민군'의 신화를 팔아먹는 대중서에 대한 비판으로서 나쁘지 않습니다.

2019년 11월 19일 화요일

제2차대전 말기 재만 조선인들의 일본군대 체험담

강용권이 조선족들의 증언을 엮어낸 구술자료집 『강제 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 을 읽다보니 제2차대전 말기 일본 관동군에 징집된 사람들의 회고담이 눈에 들어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제2차대전 중반 부터 관동군에서 전투력이 있는 사단들이 태평양이나 일본 본토 등으로 차출되다 보니 1944년 이후 급히 편성된 관동군 사단들은 전투력이 매우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에 입대했던 조선족들의 증언에도 이런 실정이 잘 드러납니다. 

이 책은 비매품이라 구하기가 좀 까다로운 편이지만 간혹 헌책방에 매물이 나오기는 합니다. 흥미로운 증언이 많아서 이 시기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읽어보실 만 합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경험담 몇개를 발췌해 봅니다.


1944년 봄부터 적령 청년들을 신체검사 시킨 후 1, 2, 3기생으로 나누어 지방 훈련을 시켰다. 그중에서 1기생을 위주로 서란현 막석훈련소에 가서 3달씩 정식 훈련을 받게 하였는데 나는 1945년 3월에 막석에 가서 6월에 돌아왔다. 그토록 바라지 않던 '빨간 딱지'가 나에게도 날아왔다. 1945년 8월 6일에 나는 왕청현 대흥구역에서 일본군에 나가는 열차를 탔다. 2천여명의 팔팔한 생명은 일제가 내민 제2차 세계대전의 밑천으로 충당되어 생사를 가늠 못할 운명을 지닌 채 도문, 장춘, 할빈을 거쳐 해랄까지 갔다. 그 속에는 50명 가량의 조선족 처녀들도 있었는데 그들에겐 어떤 불운의 그물이 덮씌우겠는지? 
기차가 치치할을 지나 찰란툰에까지 갔을 때는 벌써 전쟁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동쪽으로 밀려오는 피난민들이 끝이 없었다. 일본 가족들이 있는가 하면 양떼를 몰고 오는 몽고족이나 아이들을 외바퀴 짐 위에 싣고 오는 한족들, 오로지 동쪽으로 동쪽으로 밀려 나왔다. 다만 우리를 태운 열차만이 대가리를 서쪽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찰란툰역에서 떠날 줄 모른다. 폭격에 철길이 파손되어 수리하는 중이란다. 반나절이나 멈춰 섰던 열차가 떠나기 바쁘게 소련 비행기가 따라오며 폭격을 들이댔다. 그럴 때 마다 기차는 멈춰 섰고 차안의 사람들이 모두 내려 철길 옆 풀밭에 숨었다. 이렇게 기차에서 내려 대피하기를 서너 번 하고서야 해랄까지 가게 되었는데 해랄역은 몽땅 내려앉았다. 해랄역과 3, 4리 떨어진 곳에 와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해랄 시가의 곳곳에 지금도 불길이 치솟았고 큰 건물로는 성한 것이 업었다. 폭격은 계속되었고 밤에도 조명탄을 걸어놓고 일본 군사들의 이동을 저지하였다. 
신병들은 각기 부대에 편입되었다. 나는 산포병 118부대에 귀속되었다. 명색은 포병부대인데 산포 한 문도 없었으며 우리에게 발급한 무기란 날창(총검) 하나에 수류탄 두개 뿐이었다. 
우리가 해랄에 도착했을 때는 전 부대가 해랄 시가의 병영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는 때였다. 일본군이 병영을 떠나기 바쁘게 병영과 창고에 불을 질렀다. 자동차도 휘발유를 치고 불을 붙였다. 소련군에게 하나도 넘겨주지 않는다는 훼손 정책의 발로이다. 모든 건물마다 불기둥이 솟았고 군수품 창고에서 탄알이 튀었다. 이는 마치 일제의 수치스런 패망을 예고하는 조잡한 울부짖음 같았다. 
일본군이 마지막 부대가 산에 채 오르기 전에 소련군 탱크 부대가 끝이 보이지 않게 밀려들었다. 그들은 산에 대고 난사하면서 안하무인격으로 들어왔다. 해랄시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계속 전진하였다. 일본군은 해랄 주변 산에 파놓은 산굴과 숱한 군수품을 내버린 채 철퇴를 시작했다. 
산 아래 공로에는 소련군 탱크가 질주하고산 위에서는 일본군이 길도 없는 산림속을 뚫고 힘겹게 철퇴했다. 얼핏 보기에는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는 같은 부대 같지만 실은 2차 대전의 적대국인 소련과 일본의 군대들이다. 소련 탱크 부대는 산 위의 일본군을 보면서도 '너희들은 내 입안의 사탕알이다'하는 격으로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앞으로 전진하기만 했다. 일본군은 기실 반포위 상태에 처했고 밤에 낮을 이어 철퇴하여도 소련 탱크 부대 속도의 몇 분의 일도 안 되었다. 휴식도 없이 일주일이나 연속으로 급행군한 일본군은 대흥안령에 까지 와서 철퇴를 멈추었다. 병졸들은 지칠대로 지쳤다. 
1945년 8월 6일에 입대한 김태진의 경험담, 강용권 엮음, 『강제 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 해와 달, 2000,  92~93쪽.

전쟁말기 일본군에 동원된 부실한 병역 자원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습니다.

1944년부터 징병등기를 하고 지방훈련을 시작하였다. 나는 연령이 초과되어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알아본즉 중국의 민적에 원래의 나이보다 두 살 적게 적혀 있어 그만 1기생으로 그물에 걸렸다. 소학교 선생들은 지방훈련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1944년 9월에 서란현 막석훈련소에 가서 3달간 훈련한 후 1945년 3월에 정식으로 출정의 길에 올랐다. 천교령에서 기차를 타고 목단강, 할빈, 치치할, 백성자, 우란호트를 지나 알산에 도착하여 관동군 318부대에 편입되었다. 우리의 주둔지에서 중소국경이 5km 밖에 안되니 실로 최전선 이었다. 내가 속한 8중대에는 조선 청년이 6명 밖에 없었다. 나와 남청룡은 외따로 떨어진 급수소(給水所)의 일을 보았으므로 독립성이 많았다. 진종일 기계실을 떠날 수는 없지만 하는 일이 없으므로 심심하기만 했다. 배가 고픈 곳이 문제였다. 이곳엔 인가가 없었으므로 강냉이나 감자 같은 것을 구할 수 없기에 산열매나 풀뿌리 같은 것으로 먹이를 보충해야 했다. 
(중략) 
일제는 멸망의 벼랑 위에서 바둥거리며 최후 일전을 본토 보위전에서 벌여보려고 시도하였다. 이리하여 내가 속해 있던 318부대에서 지원병 360명을 보내기로 하였는데 그 속에 나도 들어 있었다. 앓고 있는 청룡이와 갈라지게 되었다.
360명 본토지원병 중에 조선 청년이 24명이었다. 지원병들을 완전 무장하고 기차로 우란호트, 백성, 장춘, 심양을 거쳐 본계에 와서 내렸다. 지원병의 집결지가 본계인 것 같았다. 우리 먼저 도착한 일본군도있었고 우리 후에 속속 모여들기도 하여 병력이 방대한 '일본 본토 지원연대'를 구성하였다. 할빈특구 기관장이 연대장을 맡았다고들 전했다. 
그런데 이 지원연대의 병사들을 보기만 해도 눈이 감길 지경이었다. 알찬 병사들이라고는 318부대에서 파견한 360명이고 그 외는 모두 재향군인들 속에서 긁어모았기 때문에 머리가 시허연 50넘은 영감들, 코물 건사를 잘 못하는 병자들, 심지어 눈먹쟁이와 절름발이도 있었다. 줄지어 걸을 때면 지원병이라 하기 보다 큰 전투를 겪고 난 포로병 같았다. 
1945년 3월 10일에 입대한 황기섭의 경험담, 강용원 엮음, 위의 책 108~1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