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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9일 화요일

제2차대전 말기 재만 조선인들의 일본군대 체험담

강용권이 조선족들의 증언을 엮어낸 구술자료집 『강제 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 을 읽다보니 제2차대전 말기 일본 관동군에 징집된 사람들의 회고담이 눈에 들어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제2차대전 중반 부터 관동군에서 전투력이 있는 사단들이 태평양이나 일본 본토 등으로 차출되다 보니 1944년 이후 급히 편성된 관동군 사단들은 전투력이 매우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에 입대했던 조선족들의 증언에도 이런 실정이 잘 드러납니다. 

이 책은 비매품이라 구하기가 좀 까다로운 편이지만 간혹 헌책방에 매물이 나오기는 합니다. 흥미로운 증언이 많아서 이 시기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읽어보실 만 합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경험담 몇개를 발췌해 봅니다.


1944년 봄부터 적령 청년들을 신체검사 시킨 후 1, 2, 3기생으로 나누어 지방 훈련을 시켰다. 그중에서 1기생을 위주로 서란현 막석훈련소에 가서 3달씩 정식 훈련을 받게 하였는데 나는 1945년 3월에 막석에 가서 6월에 돌아왔다. 그토록 바라지 않던 '빨간 딱지'가 나에게도 날아왔다. 1945년 8월 6일에 나는 왕청현 대흥구역에서 일본군에 나가는 열차를 탔다. 2천여명의 팔팔한 생명은 일제가 내민 제2차 세계대전의 밑천으로 충당되어 생사를 가늠 못할 운명을 지닌 채 도문, 장춘, 할빈을 거쳐 해랄까지 갔다. 그 속에는 50명 가량의 조선족 처녀들도 있었는데 그들에겐 어떤 불운의 그물이 덮씌우겠는지? 
기차가 치치할을 지나 찰란툰에까지 갔을 때는 벌써 전쟁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동쪽으로 밀려오는 피난민들이 끝이 없었다. 일본 가족들이 있는가 하면 양떼를 몰고 오는 몽고족이나 아이들을 외바퀴 짐 위에 싣고 오는 한족들, 오로지 동쪽으로 동쪽으로 밀려 나왔다. 다만 우리를 태운 열차만이 대가리를 서쪽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찰란툰역에서 떠날 줄 모른다. 폭격에 철길이 파손되어 수리하는 중이란다. 반나절이나 멈춰 섰던 열차가 떠나기 바쁘게 소련 비행기가 따라오며 폭격을 들이댔다. 그럴 때 마다 기차는 멈춰 섰고 차안의 사람들이 모두 내려 철길 옆 풀밭에 숨었다. 이렇게 기차에서 내려 대피하기를 서너 번 하고서야 해랄까지 가게 되었는데 해랄역은 몽땅 내려앉았다. 해랄역과 3, 4리 떨어진 곳에 와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해랄 시가의 곳곳에 지금도 불길이 치솟았고 큰 건물로는 성한 것이 업었다. 폭격은 계속되었고 밤에도 조명탄을 걸어놓고 일본 군사들의 이동을 저지하였다. 
신병들은 각기 부대에 편입되었다. 나는 산포병 118부대에 귀속되었다. 명색은 포병부대인데 산포 한 문도 없었으며 우리에게 발급한 무기란 날창(총검) 하나에 수류탄 두개 뿐이었다. 
우리가 해랄에 도착했을 때는 전 부대가 해랄 시가의 병영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는 때였다. 일본군이 병영을 떠나기 바쁘게 병영과 창고에 불을 질렀다. 자동차도 휘발유를 치고 불을 붙였다. 소련군에게 하나도 넘겨주지 않는다는 훼손 정책의 발로이다. 모든 건물마다 불기둥이 솟았고 군수품 창고에서 탄알이 튀었다. 이는 마치 일제의 수치스런 패망을 예고하는 조잡한 울부짖음 같았다. 
일본군이 마지막 부대가 산에 채 오르기 전에 소련군 탱크 부대가 끝이 보이지 않게 밀려들었다. 그들은 산에 대고 난사하면서 안하무인격으로 들어왔다. 해랄시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계속 전진하였다. 일본군은 해랄 주변 산에 파놓은 산굴과 숱한 군수품을 내버린 채 철퇴를 시작했다. 
산 아래 공로에는 소련군 탱크가 질주하고산 위에서는 일본군이 길도 없는 산림속을 뚫고 힘겹게 철퇴했다. 얼핏 보기에는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는 같은 부대 같지만 실은 2차 대전의 적대국인 소련과 일본의 군대들이다. 소련 탱크 부대는 산 위의 일본군을 보면서도 '너희들은 내 입안의 사탕알이다'하는 격으로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앞으로 전진하기만 했다. 일본군은 기실 반포위 상태에 처했고 밤에 낮을 이어 철퇴하여도 소련 탱크 부대 속도의 몇 분의 일도 안 되었다. 휴식도 없이 일주일이나 연속으로 급행군한 일본군은 대흥안령에 까지 와서 철퇴를 멈추었다. 병졸들은 지칠대로 지쳤다. 
1945년 8월 6일에 입대한 김태진의 경험담, 강용권 엮음, 『강제 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 해와 달, 2000,  92~93쪽.

전쟁말기 일본군에 동원된 부실한 병역 자원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습니다.

1944년부터 징병등기를 하고 지방훈련을 시작하였다. 나는 연령이 초과되어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알아본즉 중국의 민적에 원래의 나이보다 두 살 적게 적혀 있어 그만 1기생으로 그물에 걸렸다. 소학교 선생들은 지방훈련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1944년 9월에 서란현 막석훈련소에 가서 3달간 훈련한 후 1945년 3월에 정식으로 출정의 길에 올랐다. 천교령에서 기차를 타고 목단강, 할빈, 치치할, 백성자, 우란호트를 지나 알산에 도착하여 관동군 318부대에 편입되었다. 우리의 주둔지에서 중소국경이 5km 밖에 안되니 실로 최전선 이었다. 내가 속한 8중대에는 조선 청년이 6명 밖에 없었다. 나와 남청룡은 외따로 떨어진 급수소(給水所)의 일을 보았으므로 독립성이 많았다. 진종일 기계실을 떠날 수는 없지만 하는 일이 없으므로 심심하기만 했다. 배가 고픈 곳이 문제였다. 이곳엔 인가가 없었으므로 강냉이나 감자 같은 것을 구할 수 없기에 산열매나 풀뿌리 같은 것으로 먹이를 보충해야 했다. 
(중략) 
일제는 멸망의 벼랑 위에서 바둥거리며 최후 일전을 본토 보위전에서 벌여보려고 시도하였다. 이리하여 내가 속해 있던 318부대에서 지원병 360명을 보내기로 하였는데 그 속에 나도 들어 있었다. 앓고 있는 청룡이와 갈라지게 되었다.
360명 본토지원병 중에 조선 청년이 24명이었다. 지원병들을 완전 무장하고 기차로 우란호트, 백성, 장춘, 심양을 거쳐 본계에 와서 내렸다. 지원병의 집결지가 본계인 것 같았다. 우리 먼저 도착한 일본군도있었고 우리 후에 속속 모여들기도 하여 병력이 방대한 '일본 본토 지원연대'를 구성하였다. 할빈특구 기관장이 연대장을 맡았다고들 전했다. 
그런데 이 지원연대의 병사들을 보기만 해도 눈이 감길 지경이었다. 알찬 병사들이라고는 318부대에서 파견한 360명이고 그 외는 모두 재향군인들 속에서 긁어모았기 때문에 머리가 시허연 50넘은 영감들, 코물 건사를 잘 못하는 병자들, 심지어 눈먹쟁이와 절름발이도 있었다. 줄지어 걸을 때면 지원병이라 하기 보다 큰 전투를 겪고 난 포로병 같았다. 
1945년 3월 10일에 입대한 황기섭의 경험담, 강용원 엮음, 위의 책 108~1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