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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일 일요일

[번역글] 독일은 군대를 더 키우고 강화해야 한다


블룸버그의 오피니언란에 재미있는 글이 실렸네요. 엉망진창인 독일의 안보상황에 우려하는 독일인이 외국 매체를 통해 자국의 현실을 질타하는 내용입니다. 위기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계속하고는 있으나 독일연방군이 회복되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군요.





독일은 군대를 더 키우고 강화해야 한다


안드레아스 클루트(Andreas Kluth)


최근 독일 기갑차량 승무원들은 폴크스바겐의 미니버스로 훈련을 하고 있다. 푸마 장갑차 4대 중 3대는 정비 중이기 때문이다. 하염없이 정비 받을 날 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 원인은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관료주의에 있다. 독일군은 배낭, 방탄복, 방탄모, 모자 같은 군장류를 보급받는데 수년이 걸린다. 군대 정원은 20,000명 가까이 미달이다. 청년들이 군대에 가고 싶어하질 않기 때문이다. 장교들은 입대 기준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신병들은 날이 갈수록 뚱뚱해지고, 허약해지고, 멍청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는 독일 연방의회가 임명한 감찰관 한스 페터 바르텔스(Hans-Peter Bartels)가 독일연방군을 조사한 결과이다. 바르텔스는 충격적인 결론을 내렸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현재의 독일연방군은 나토와 서방 동맹국의 통합방위에 충분히 기여할 수 없다.

사실 독일의 동맹국들은, 동쪽의 폴란드부터 서쪽의 미국에 이르기 까지 이 문제점을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고 비판을 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 문제를 지적한 방식은 외교적으로 부적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전임 미국 대통령들도 이 문제를 지적해왔다. 조지 부시 대통령도 독일 정부에게 이 문제를 두고 격렬하게 비판했었다. 이들은 독일이 더 이상 무임승차를 해서는 안되며 국방비 투자를 감축해서도 안되고, 공동의 임무에 있어서 책임을 경감하려고 해서도 안된다고 말해왔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독일 정부는 동맹국들의 비판을 정중하게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침공했을 때 많은 독일 관료들이 독일은 국제적으로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해 말 웨일즈에서 열린 나토 회담에서 메르켈 총리는 다른 동맹국 정상들과 함께 10년 내로 국방비를 최소 GDP2%으로 증액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독일 정부는 이때 한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바르텔스는 베를린의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국방비를 GDP2%로 증액할 생각이 없는듯 하다.”고 지적했다. 사실 독일 정부는 냉전이 끝난 뒤 크게 삭감했던 국방비를 다시 증액하기 시작했다. 밑바닥에서부터 말이다. 액수만 놓고 보면 작년 독일의 국방비는 432억 유로(476억 달러)였다.(사실 불합리한 관료주의 때문에 이걸 다 쓰지도 못했다.) 올해에는 451억 달러가 될 것이다. 또한 추가로 예산을 더 증액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바르텔스는 이정도 규모로는 국방비를 2024년까지 GDP1.5% 수준으로 증액한다는 인색한 목표조차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제2차세계대전 전후의 독일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미국 국내선을 탔을 때 기장이 하는 방송을 들었다. 군인이 탔다고 하자 기내의 모든 승객이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독일은 그 반대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0년뒤인 1955년 서독이 군대를 새로 만들었을 때 군인들이 군복을 입고 외출을 했다가 시비를 걸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독일인들은 세계대전을 두번이나 일으켰다는 죄책감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반전, 반군사적인 정체성을 가지려고 했다.

이러한 과거사에 대한 반응은 이해할 수 있는 것 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반응은 좀 괴상한 자부심으로 변질되었다. 오늘날 독일인은 전쟁을 하지 않고 무역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절대적인 기도문 처럼 되어버렸다. 독일은 사실상 자국의 국방과 국제질서에서 져야 할 정치적 부담을 미국에게 외주를 줘버렸다. 미국 만큼은 아니지만 프랑스와 영국도 독일의 부담을 나눠지고 있다. 그러면서 많은 독일인들, 특히 좌파 정치인들은 기고만장하여 독일의 동맹국들이 전쟁광이라는 훈계나 늘어놓고 있다. 그러면서 독일은 경제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며 국제질서를 악용하고 있다.

독일 정계 지도자들 중 일부는 이런 구조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2010년에 독일 연방 대통령 호르스트 쾰러(Horst Koehler)는 독일이 무역로 보호와 같은 국익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해외파병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시 격렬한 비난이 확산되었고 그야말로 히스테리 적이었다. 쾰러 대통령은 사임할 수 밖에 없었다. 더 강한 군대가 필요하다고 하면 독일 정계에서 매장당한다는 것을 많은 정치인들이 알게 되었다.

이래서는 안된다. 세계는 위험한 곳이다. 나토는 수많은 위협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유럽통합군은 그저 공허한 꿈에 불과하다. 유럽의 가장 큰 위협은 여전히 러시아이다. 스웨덴 국방부의 연구자들은 러시아가 지난 10년간 군사력을 강화했으며 하이브리드 전쟁과 재래식 군사력, 그리고 신형 미사일 배치를 통한 핵무기 위협 등으로 유럽을 무찌르거나 협박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누가 독일 국민들에게 이것을 말할 것인가? 하나는 메르켈의 뒤를 이어 연방 총리가 될 것으로 꼽히는 후보 중 한명인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 국방장관이다. 크람프-카렌바우어 국방장관은 독일군이 주도하는 시리아 파병을 주창하기도 했으며 아프리카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프랑스와 더욱 긴밀히 협력할 것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크람프-카렌바우어 국방장관이 이런 주장을 할 때 마다 대중적 지지도는 폭락했다. 

결국 남는 것은 메르켈 뿐이다. 메르켈은 총리 연임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밝혀서 레임덕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신망이 높으며 믿을 수 있는 인물이다. 메르켈 총리는 14년간 집권하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 같은  수많은 위기를 거쳐왔다. 지금 그녀는 리비아 내전을 비롯한 다른 분쟁들을 중재하려는 중이다. 그리고 미국이 유럽 평화를 보증하는 역할에서 발을 빼려는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이제 메르켈에게 남은 기간은 2년 뿐이다. 메르켈은 남은 재임 기간 동안 독일 국민들이 군대에 대한 생각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역사적인 논쟁을 시작해야 한다.

2017년 2월 27일 월요일

[번역글] Merkel and Whose Army?

폴더를 정리하다가 번역하려고  긁어놨다가 까맣게 잊어먹은 글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트럼프 당선 직후 멘붕해서 독일 찬양가를 부르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독일 연구자의 포린 폴리시 칼럼 “Merkel and Whose Army?”인데 내용이 하드 파워를 중시하는 제 취향에 딱 맞아 번역을 해 봅니다. 자국의 문제를 냉철하다 못해 시니컬하게 비판하는 점이 아주 좋습니다. 제목은 좀 의역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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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그런데 군대는?


한스 쿤드나니Hans Kundnani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독일에서 ‘엄마’라고 불린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선출된 직후 전 세계의 부정적인 반응을 고려하면, 조만간 다른 나라들도 메르켈을 그렇게 부를지 모른다. 트럼프가 미국이 “자유세계의 지도국” 역할을 그만둬야 한다는 뜻을 내비칠 수록 메르켈의 독일을 가장 유력한 대안이라고 보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메르켈 본인도 인정한 것 처럼 그런 생각은 말도 안된다. 메르켈은 지난 11월 20일 총리 4선에 도전하면서 한 연설에서도 이 생각을 밝힌 바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독일의 국력이 항상 유럽이라는 지역에 국한됐다는 점이다. 독일은 전 세계적 규모의 강대국이 아니며, 아시아에 있는 취약한 서방의 동맹국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니 독일은 미국을 대신해 ‘자유 유럽의 지도국’ 정도나 될 수 있을까 싶다.


사실 독일은 ‘자유 유럽의 지도국’ 조차 버겁다. 만약 리더쉽이라는 단어를 순수하게 ‘도덕적 상징성’에 국한한다면 독일은 그 기준을 충족할 지 모른다. 물론 그러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리더쉽에는 냉전 이래로 다른 국가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확고한 군사적 보장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독일은 그럴 능력이 없다. 독일의 군사력은 최소한도의 수준인데다 독일인들은 그나마 가지고 있는 정치적, 문화적 국력 조차 발휘할 의지가 없다.
뉴욕 타임즈의 캐롤 지아코모는 미국 대선 직후 독일이 “나토에서 미국을 대신할 지 모른다”는 예측을 했다. 하지만 어떤 나라가 장갑차에 기관총 대신 검은색으로 칠한 나무막대기를 달고 다니는 나라에게 그 역할을 맡기려 들겠는가. 독일이 2014년 나토 훈련에서 그러지 않았던가.


그냥 단순히 독일과 미국의 국방비만 비교해도 답이 나온다. 2015년 기준으로  IISS의 통계를 보면 미국의 국방예산은 5975억 달러였다. 하지만 독일의 국방예산은 367억 달러로 미국의 12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독일의 국방예산은 프랑스(468억 달러)나 영국(562억 달러) 보다도 적다. 게다가 프랑스와 영국은 미국과 같은 핵무기 보유국이다. 현재 프랑스와 영국의 정치적 상황이 엉망이긴 해도, 군사력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나라가 독일 보다는 ‘자유세계의 지도국’에 더 적합할 것이다.


독일의 국방예산 규모는 독일의 경제력과 비교했을때 더 심각하다. 나토 가맹국들은 GDP의 2퍼센트를 국방예산으로 지출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을 제외하면 오직 그리스, 에스토니아, 폴란드, 영국 등 4개국만이 이 기준을 충족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독일은 고작 1.3퍼센트만 국방예산으로 지출했는데 이것은 나토 가맹국 중에서도 최하위 수준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1.2퍼센트 미만으로 까지 떨어졌다. 겨우 올해에 와서야 메르켈은 GDP의 2퍼센트를 국방비로 지출하겠다고 공표했다. 트럼프가 당선된 직후 독일 총리는 재차 이 목표를 표명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목표를 달성할 것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독일 정부가 실천한 것은 2017년에 국방예산을 8퍼센트 증액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GDP의 고작 1.22퍼센트가 됐다.


국방예산도 그렇고 독일군의 능력도 마찬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냉전당시 독일연방군은 소련의 유럽 침공을 막기 위해 대규모의 병력을, 약 50만의 병력과 레오파르트2 전차 2,5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현재 독일연방군은 176,752명과 레오파르트2 전차 200대로 줄어들었다. 병력면에서 보면 130만에 달하는 미군의 7분의 1 남짓한 규모다. 독일 공군은 109대의 유로파이터 타이푼과 89대의 구식 토네이도를 보유하고 있다. 반면 미국 공군은 수많은 F-35, F-22, F-16, F-15를 보유하고 있다. 해군을 비교하면 그 격차가 더 크다. 미 해군은 12개 항모전투단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 해군의 가장 강력한 군함은 프리킷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달랑 10척이다.


올해에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독일 국방부장관은 향후 15년간 군장비에 1300억 유로(14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부 예산은 신규장비 구매에 편성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예산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장비를 유지보수하는데 사용될 것이다. 일련의 보고서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장비들은 2010년 이래의 국방예산 감축으로 운용할 수 없게된 것들이다. 즉 독일군은 전투력을 증강하는게 아니라 겨우 현존 전력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예를들어 독일 공군의 유로파이터 109대 중 42대, NH90 헬리콥터는 겨우 2대만 운용가능한 상태이다. 그리고 2014년 나토훈련에서 있었던 악명높은 검은 나무막대기 사건의 원인은, 독일연방군 내부 보고서를 인용한 독일 공영방송 ARD 보도에 따르면 중기관총이 부족해서 발생한 일이었다.


독일의 낮은 국방예산 수준과 독일연방군의 부족한 능력은 독일의 전략 문화에 그 원인이 있다. 독일인은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도 이 원인이 독일이 과거 일으킨 군사적 재난에 대한 반동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의 현상은 지난 25년간 진행되었던 일이다. 독일은 1990년 통일 후 첫 10년간 군사력 사용 문제에서 프랑스 및 영국과 협력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경향은 독일이 1999년 코소보 전쟁에 개입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독일의 대외정책에서 “또다시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구호가 “아우슈비츠를 되풀이 하지 말자”로 바뀌는 듯 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르면서 독일의 군사 개입이 실패라는 인식이 확산되자 “또다시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기조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독일은 2011년 리비아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많은 독일인들이 이 결정을 지지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태라는 전략적 충격 조차 독일인들의 군사력 사용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못했다. 지난 여름 독일 외무장관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는 독일도 참여한 나토 군사훈련을 ‘무력 도발’이라고 했다.


독일인들은 자국을 평화세력(Friedensmacht)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 단어는 원래 냉전당시 동독이 자국을 칭하면서 사용했으며 1980년대에 녹색당에서 활동하다가 극우 정당으로 전향한 전직 독일공군 대령 알프레트 메흐터샤이머가 1993년 독일에 적용한 것이다. 독일인들은 미국 처럼 군인을 영예롭게 여기지 않는다. 미국 군인들은 공항에 들어설 때 미국인들로 부터 박수 갈채를 받지만 독일 군인은 그럴 일이 없다. 그래서 독일 연방군은 모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독일 국방부는 모병을 위해 TV 리얼리티 쇼 까지 끌어들였다. 지난 5월 라이엔 국방장관은 2023년까지 독일군을 7,000명 증강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어떻게 이 목표를 달성할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독일인들의 태도도 조금 바뀐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근 독일연방군사사-사회과학 연구소가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설문 대상자의 절반이 국방예산을 증액해야 한다고 답했는데 이것은 2000년 이래 처음 있는 현상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독일 연방군 증강을 지지했다. 하지만 독일인들이 발트 3국이나 폴란드 처럼 러시아를 위협으로 느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여론이 급변한 원인은 난민 문제였다. 난민 문제를 러시아 보다 독일에 더 위협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독일인들은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키는 것 보다 난민이 독일을 휩쓰는 것을 더 우려해 안보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듯 하다. 최근 정부가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독일인의 다수는 안정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훈련 강화를 지지하고 있다. 전투 작전을 중요시 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물론 21세기에는 군사력보다 경제력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병합한 사건이나 아시아에서 전개되는 영토 분쟁과 군비경쟁에 미뤄 볼때 설득력이 없다. 독일 처럼 수출, 즉 해외 시장에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국가에게 있어 경제력은 국력의 근원이면서 약점이다.


독일이 유럽 바깥에서는 군사력이건 경제력이건간에 하드파워를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메르켈은 기껏해야 ‘자유 세계의 도덕적 지도자’ 정도나 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최근 유로 위기에서 메르켈이 보인 행태를 보면 그 조차도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메르켈을 성토할 그리스인, 스페인인, 이탈리아인이 넘쳐난다. 설사 메르켈이 자유세계의 지도자가 된다 해도 전체주의의 부활을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보다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교황에 대해 했다는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그래 교황은 몇개 사단이나 가지고 있소?”

2014년 7월 5일 토요일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핵무기 사용계획에 대한 어떤 제독의 비판

1960년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전쟁계획을 보다보면 미국과 NATO만큼이나 핵무기의 대량 사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게 섬뜩합니다. 예방공격을 위한 계획들을 보면 전술핵은 물론 전략로켓군도 동원되는 점이 눈에 띄는데 그 결과를 어떻게 감당하려 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이 점에서는 미국과 NATO의 계획도 마찬가지 이긴 합니다만.) 이런 정신나간 계획에 대해서는 당대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던 모양입니다. 예전에 언급했었던 서독 국방장관 슈트라우스의 발언에 나타난 것 처럼 핵무기라는 존재는 당대의 전략가들을 꽤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소련해군의 데레뱐코 제독이 당서기장 흐루쇼프에게 보낸 서한은 합리적인 생각을 가진 소련 군인들이 핵무기 사용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단 한가지 사안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핵무기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미래에 살아갈 행성은 어디이며, 이들이 군대를 보내 영토를 정복하려고 계획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핵무기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핵무기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들이 우리 군대를 어떤 혼란에 빠트릴지 알고는 있을까요? [중략]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군대가 전쟁 초기에 추구해야 할 전략적인 목표는 아군, 특히 공수부대와 차량화 부대를 활용한 신속한 돌파와 공격을 통해 서유럽 중부에 있는 침략국가들의 영토를 점령하고 신속하게 대서양까지 진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군이 진격하게 될 전 전선에 걸쳐 방사능으로 토지와 물, 공기가 오염된 장벽을 만들겠다는 자들은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아군이 하루에 최대 100km를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공격 자체가 좌절될 수도 있습니다. 서유럽과 같이 좁은 지역에서 핵무기를 이렇게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면 방사능에 오염된 수백만의 민간인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서풍으로 인해 우리의 군대와 소련의 우랄 지역에 이르는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들까지 수십년 동안 방사능 오염에 시달리게 될 것 입니다. [중략] 핵미사일을 이용해서 승리하겠다는 생각은 집어치워야 합니다. 핵무기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나름대로 전략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현대 전쟁의 다양한 양상과 방법을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콘스탄틴 데레뱐코Константин И Деревянко 제독이 1961년 8월 1일 흐루쇼프에게 보낸 서한 

Matthias Uhl, ‘Soviet and Warsaw Pact Military Strategy from Stalin to Brezhnev : The Transformation from “Strategic Defense” to “Unlimited Nuclear War”, 1945-1968’, Blueprint for Battle : Planning for War in Central Europe, 1948~1968(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12), p.40

2014년 6월 23일 월요일

Russia’s Struggle for Military Reform: A Breakdown in Conversion Capabilities

지난번에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호 1권의 러시아 국방개혁특집을 간략히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27호 1권의 특집에는 전반적으로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한계 때문에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이 많이 실렸습니다. 27호 1권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이 있기 전에 기획되었기 때문에 최근의 사태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할 것인지가 궁금했는데 바로 27호 2권에 최근의 사태를 반영한 글이 한편 실렸습니다. 필자는 조지타운 대학교의 제임스 마샬James A. Marshall이고 제목은 “Russia’s Struggle for Military Reform: A Breakdown in Conversion Capabilities”입니다. 전반적인 내용은 27호 1권의 특집과 논조가 유사합니다.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토대가 허약하기 때문에 러시아군의 국방개혁의 전망은 밝지가 못하다는 것 입니다.

필자가 첫번째로 지적하는 것은 인구와 예산과 같은 전략적 자원 문제입니다. 러시아군은 아직까지도 모병제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징집병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러시아의 인구가 줄어드는 동시에 병역기간이 단축되어 징집병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2002년에는 335,000명의 징집병이 필요했는데 2009년에는 병역기간의 단축 때문에 필요한 징집병의 숫자가 625,0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문제는 같은 기간 동안 러시아의 인구가 1억4520만명에서 1억4200만명으로 격감했다는 것 입니다. 병력자원이 부족해서 징집병의 숫자만 채워넣는 형편인데 한해 징집되는 병력 중에서 실제로 군복무에 적합한 건강상태를 가진 인원은 전체의 40~45%수준이라고 합니다. 체력은 물론 다른 질도 크게 떨어지는데 징집병 중 상당수의 문맹자, 알콜중독자, 범죄자가 있다고 합니다. 징집자원의 낮은 질과 함께 여전이 열악한 군인에 대한 처우도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필자가 적용한 이론적 틀은 쉴즈Shils와 재너위츠Janowitz가 2차대전기 독일군을 연구할 때 사용한 좀 오래된 기준이긴 합니다만 ‘군생활에 대해 느끼는 자부심’, ‘상관과의 관계’와 같은 기준은 현대 러시아군에 적용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공식통계를 인용한다 하더라도 러시아군의 탈영율은 평화시라는 것을 감안했을때 꽤 높은 편이며(공식통계에 따르면 2,265명) 필자는 한발 더 나가 실제 탈영율이 공식통계를 상회할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러시아 사회에서 극우주의적인 경향이 두드러지곤 있다 해도 소련 붕괴이후로 지속된 민족주의의 약화도 군의 사기를 유지하는데 있어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봅니다.
국방예산의 경우 푸틴의 집권이후 급증해서 현재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많은 예산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의 통계를 기준으로 하면 국가총생산의 3.9%를 국방예산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부정부패 때문에 증액된 예산의 상당수가 횡령되고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군검찰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국방예산의 20%가 횡령되고 있고 비공식 통계로는 30% 가까이 횡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또한 국방예산의 40%가 핵전력을 유지하는데 소모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때문에 재래식전력의 현대화에 돌아갈 수 있는 기회비용이 줄어들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다음으로는 러시아의 군수공업이 비효율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연구개발 기반이 붕괴되어 이것을 회복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데다가 러시아의 군수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전체 제조업 종사자의 20%에 달해 정치권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점이 주된 요인이라고 합니다. 러시아 군수기업들이 보유한 설비의 70%는 사용한지 20년이 넘은 것이기 때문에 노후화가 심해서 생산 효율을 떨어트리는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두번째로는 러시아의 안보환경과 이에 대한 대응 능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러시아 내부의 비대칭 위협, 중국의 군사적 부상, 그리고 숙적(!)인 NATO의 존재 등 세가지 요인을 지적합니다. 러시아 내부의 비대칭 위협으로는 체첸 민족주의자들의 테러활동을 꼽고 있습니다. 필자는 다양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러시아의 경제수준으로 유지가 가능한 소규모의 정예 직업군인 위주의 군대로 변화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규모 군대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위협은 러시아 내부의 비대칭 위협 정도일 것이라고 봅니다. 반면 숫적으로 우세한 중국군이나 기술적으로 우세한 NATO에 대한 대응은 핵전력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러시아가 추구하는 군사력 감축과 정예화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점 입니다. 푸틴은 2000년대 초에 국방개혁의 일환으로 부사관의 정예화를 추진했지만 이것은 푸틴이 다시 대통령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세르듀코프가 국방부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추진한 장교단 감축이 완료되지 못한 이유도 러시아군 부사관단의 수준이 여전히 낮기 때문에 서방국가에서는 부사관의 담당하는 임무를 담당하기 위해 장교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러시아 군부가 여전히 전면전에 대비한 대규모의 병력동원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점도 장교단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봅니다. 필자는 세르듀코프 시기에 강하게 추진된 병력감축과 군구조 개편에 대해서도 미심쩍은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군구조 개편에 대응하는 교리상의 혁신이 있었느냐 하는 것 입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크림 반도 병합에 대해서도 러시아군의 개혁이 성공한 증거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견해를 보여줍니다. 먼저 우크라이나군은 조지아군 보다도 전투의지가 약해 싸움 자체를 회피했으며, 크림 반도에 투입된 부대는 러시아군의 최정예인 특수부대와 공수부대였다는 점 때문입니다. 군구조 개편의 대상이었던 지상군의 대부분이 아직 전투를 통해 능력을 검증받지 못했다는 필자의 지적은 타당합니다. 필자는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군의 전투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크림반도 합병 이후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을 주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번째로는 러시아가 국가적인 역량을 국방개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먼저 러시아의 취약한 민군관계를 지적합니다.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세르듀코프의 해임입니다. 그 원인이 푸틴이 장교단 감축과 같은 급격한 국방개혁에 저항하는 군부 보수파의 손을 들어준 것에 있다는 것 입니다. 필자는 군부가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는 원인을 스탈린 사후 문민통제가 약화되면서 군사적 전문성을 가진 군부가 강력해진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고르바초프 집권기에는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욱 강화됐고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아에서는 이것이 더욱 고착화 되었다는 것 입니다. 필자는 헌팅턴의 민군관계 모델로 이것을 설명하는데 러시아군의 문민통제 유형을 주체적 문민통제Subjective Civilian Control가 아니라 전문성을 가진 군부가 강력한 독립성을 가지는 객체적 문민통제Objective Civilian Control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군은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군부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 있으며 군부의 이해관계는 대규모 전면전을 대비해 방대한 군조직을 유지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군장교단은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징집병에 의존하는 현재 체제를 유지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의 징집병들이 군지휘관들의 사적인 사업에 노동력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요. 반면 자원병은 지휘관이 사적으로 착취하기 곤란한 대상입니다. 실제로 최근 러시아군에서는 징집병의 비율이 오히려 높아졌다고 합니다.
또한 러시아가 여전히 NATO의 위협에 대응하는 것에 비중을 두는 점도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NATO에 대응하기 위해 핵전력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붙다 보니 재래식 전력을 개선하는데 투자할 기회비용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입니다. 필자는 러시아의 잘못된 위협 인식이 국방개혁의 걸림돌이라고 비판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러시아의 군사교리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최근 전쟁의 중요한 특성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기는 하지만 보수적인 군부가 여전히 대규모 전면전을 선호하고 있어서 군사교리의 전환이 어렵다는 것 입니다. 필자는 최근(2010년) 러시아의 군사교리가 신속전개능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전시동원을 위한 대규모의 예비군 확보를 명시하면서도 두가지 상충되는 목표에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르듀코프 시기의 군병력 감축과 군구조 개혁에 관련된 내용도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민간 관료들이 원하는 목표와 군부의 요구가 어정쩡하게 반영된 타협물이라는 것 입니다.

러시아군의 개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관찰자들이 바라보는 시각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의 주장을 전부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위험합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러시아군이 실전을 치르게 된다면 어느 쪽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겠지요. 관찰자인 제3자의 관점에서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관망하는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2013년 9월 5일 목요일

나토의 전진방어전략에 대한 체코슬로바키아군의 평가

지난번에 올렸던 “1960년대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방어계획”과 관련해서 포스팅을 하나 합니다. 잠깐 언급했던 1965년에 작성된 체코슬로바키아군 참모부의 정보평가입니다. 1960년대 초반 나토군의 전략 변화에 대해 평가한 내용인데 인용한 책의 해제에 따르면 소련에서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보고서라고 하는군요.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권의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냉전기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는 사료가 많아졌지만 러시아의 자료 공개는 여전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과거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속했던 소련 위성국들의 자료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점은 꽤 아쉬운 점입니다. 아무래도 소련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하위 동맹이었던 국가들의 부분적인 자료를 통해 전체를 재구성 해야 하니 말입니다.


이 보고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나토군의 전략 변화를 공세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즉 독일 영내에서의 방어전 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공세로 이행하기 위한 준비로서 “전진방어”를 채택했다고 보는 것 이지요. 그리고 2차세계대전의 경험을 반영해서 독일군에 대한 평가가 높은 편입니다.


영어 중역인 점을 감안하고 읽어 주십시오. 영어로 번역하면서 편집자가 생략한 부분이 많은게 유감입니다.


[...전략] 나토 사령부는 현재 사회주의 국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의 군사력을 비교하는데 있어 전면적인 핵전쟁은 물론 제한적인 전쟁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에따라 제한전에 대한 이론을 정교하게 가다듬었는데 이 이론은 중부유럽전역의 연합군의 작전 준비태세, 특히 최근 수년간의 준비태세를 반영하고 있다.
[...중략] 제한전쟁은 두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가지는 부여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서 충분한 병력을 신속하게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 문제는 군사력을 운용하면서  제한전쟁이 전면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서방은 유럽에 충분한 재래식 전력을 배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 제한적인 핵무기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중략] 제한전 개념은 특히 미국이 선도하고 있는데 이 개념에서는 군사적인 목적과 정치적인 목적을 점진적으로 달성하는 동시에 전면적인 핵전쟁이 발생할 위험을 최소화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 수뇌부는 전면핵전쟁의 파괴력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나토에서는 국제적인 긴장이 단기간, 혹은 장기간 이어진 이후 전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리한 군사적, 정치적 정세가 조성될 경우 갑작스럽게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본다. 전면 핵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유리한 정세로는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거나 어느 한 진영의 지도국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군사력을 감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경우로는 단계적으로 특정한 제한조건을 넘어서면서 제한전쟁이 전면 핵전쟁으로 발전하는 경우를 꼽을 수 있을 것인데 이 경우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어느 한 참전국이 사용하는 수단에 전혀 다르게 대응하거나, 어떤 징후를 잘못 해석하거나, 사람의 실수나 장비의 오류 때문에 제한전쟁이 전면 핵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 나토군 수뇌부는 기습적인 전면 핵전쟁을 감행하는 계획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중략]  국가안보에 대한 직간접적인 위협에 직면해서 필요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 전쟁 말고는 없을 경우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모호한 개념은 여전히 나토군 수뇌부, 특히 미국이 전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으며 나토가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의 전략개념인 이른바 “유연 대응flexible response”은 제한전, 그리고 유리한 상황이나 어쩔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전면전을 수행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개념은 군사적인 관점과 정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공격적이고, 해로우며 결과적으로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제한전 이론은 이론적인 측면, 특히 전쟁의 정치적, 군사적 목표, 병력과 군사적 수단의 활용, 그리고 목표의 선정이라는 관점에서 봤을때 명확하지 않은 요소로 가득차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나토군 수뇌부는 평화시에도 양 진영의 강력한 군사력이 대치하고 있는 유럽 전역에서 제한전이 적절하게 수행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산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제한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나토군 수뇌부는 나토군이 심각한 손실을 입거나 요충지를 상실하게 될 경우, 혹은 재래식 전쟁으로 의도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경우에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제한전 이론이 특히 중부유럽전역의 정세하에서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많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략…]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과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이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되면서 1963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과 다른 유럽내 나토 가맹국들의 주도로 ‘전진 방어Forward Defense’라는 새로운 개념이 채택되었다. 이 개념에서 다루고 있는 영역은 단지 독일연방공화국의 영토 뿐이다. 본질적으로 전진 방어 개념에는 유럽전역의 환경에 새로운 원칙을 정교하게 가다듬어 적용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개념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영토를 지켜내는 한편 공세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여 단기간 내에 전장을 독일민주공화국과 체코슬로바키아로 옮기기 위해서 독일연방공화국의 동부 국경에서 능동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중략] 나토군의 작전 준비태세에 대한 전략 개념의 영향력. 
연합군의 작전적 준비태세를 보면 전면핵전쟁과 함께 나토군이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를 함께 사용하는 제한전쟁을 감행하는 것을 고려하는 전략 개념을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중략…] 
1960년 경까지 실시되었던 대규모의 훈련들은 동서양진영이 무장 충돌을 하게 된다면 어떠한 경우건 모든 종류의 핵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것에 입각한 “대량보복” 개념에 따라 실시되었으며 병력 동원과 예비 전력의 집결에 필요한 시간을 벌고 반격으로 이행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유연한 방어를 전개하였다. 핵공격을 가하는 수단은 공군이 유일했다.[중략…] 
이 무렵 실시된 훈련들은 모두 방어 작전을 위해 실시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존재하던 개념과 나토 지상군의 임무를 반영한 것이었다. 나토군의 전쟁 시나리오는 전쟁의 위협이 장기간 지속되는 상황을 가정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군부대의 전투 대비태세를 완료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며, 동원에 필요한 일부 조치를 이행할 수 있을 것이고 사전에 준비된 작전 조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핵공격이라는 전략적 수단 중에서 공군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전쟁에서 완벽한 기습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되었다.[중략…]
[...중략] 훈련 시나리오에서 “대량보복” 개념에 입각한 중요한 변화들은 “전진방어” 개념의 채택으로 폐기되었다. 이러한 훈련들은 유럽전역에서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제한적인 전쟁을 수행한다는 나토의 개념을 따른 것이었다. 교전은 방어작전으로서 짧은 기간 동안 수행되었다. 방어작전 단계에서는 재래식무기만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서는 작전-전술단위, 전술단위의 핵무기가 동원되었고 그 시기는 작전이 개시되고 수시간에서 수일이 지난 뒤였다. 나토군은 보통 적군이 선제 핵공격을 실시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했다.
이 시점에서 전쟁의 위협이 증대되는 기간이 훨씬 짧아졌다. 이때문에 전투 준비태세를 갖춰야 할 시간도 훨씬 짧아졌다. 전투 태세를 준비하고 완료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적이 아군의 준비 태세를 감지하는 것과 대응 수단을 마련하는 것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작전적 기습을 가능하게 했다.
“전진방어”를 채택함으로써 군의 작전 편성은 1960년 이전의 군사 훈련에서 적용되었던 것과 비교하여 근본적으로 변화했으며 특히 중부 집단의 경우가 그러하다. [중략...] 적의 일선 제대는 두개의 야전군(미 제7군과 프랑스 제1군)으로 구성되었고 일선제대와는 별도로 1~2개 집단의 제2선 예비 제대가 편성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하는 제1선 제대에 프랑스군 집단(제3기계화사단, 제1기갑사단)이 배치된 것, 또는 독일군 제2군단이 프랑스 제1군의 작전 통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로 필센Plzeň-뉘른베르크Nürnberg와 린츠Linz-뮌헨München 축선의 중부 집단 우익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러한 개념상의 변화는 초기 전투 기간에 작전을 수행하는데도 반영되었다. 지금까지의 군사훈련을 보면 나토 연합군이 초기에는 기동 방어를 실시하고 있지만 갈수록 능동적으로 작전하고 있으며 전체 전투 주기가 (2~3일 정도로 ) 짧아졌다. 또한 후퇴 종심도 (최대 120km 정도로) 현저히 짧아졌다. 비록 반격으로 전환하는 것은 훈련하지 않았지만 이전 보다 더 빨리 반격을 하기 위해서 방어 단계를 강력한 역습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중략] 1962년 이래로 중부유럽전구에서는 제한전 개념에 따라 훈련을 실시했다. 초기에는 1개 집단군 단위의 훈련(그랜드슬램1Grand Slam 1과 그랜드슬램2)에 적용되었으나 1963년 부터는 중부유럽전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훈련(Lion Ver)에, 1964년에는 유럽 전체를 대상으로 한 훈련(Fallex-64)에 적용되었다. 
나토군은 1964년 이전에는 적군이 먼저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에만 핵무기를 사용했다. 1964년 훈련에서는 나토군 방어선의 돌파구를 분쇄하거나 공세를 성공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했다. 이에 대한 적군의 대응, 즉 보복을 위해 핵무기를 무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전면 핵전쟁으로 이어졌다.
[...중략] 1962년의 훈련에서는 전투 작전이 시작된 지 3일차(46시간)에 적을 저지하기 위해 국경에서 50~150km 떨어진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1963년에는 전투 작전이 시작되고 불과 10시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전력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핵무기를 사용했다. 적군의 진격은 30~100km 정도에서 돈좌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나토군의 성과는 무시해도 될 정도였다. 1964년 가을의 기동훈련에서 핵무기는 전쟁이 시작된 지 34시간차에 사용되었으며 이 시점에서 전방의 방어선이 돌파당해 적군은 국경에서 30~80km를 돌파해온 상태였다.
[...중략] 이같은 훈련을 보면 연합군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전투를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전력 격차가 크기 때문이며, 이점은 재래식 전쟁이 시작된 초기에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나토군 수뇌부는 전력격차가 크다는 점 때문에 제한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으로 전면 핵전쟁을 감행할 수 있도록 군의 준비태세를 갖추려 하고 있다. 

[...중략] 요약, 결론.
[...중략] 각 국의 참모진 중에서 이것을 가장 잘 준비하고 있는 것은 독일에 주둔한 미군 참모부다. 독일주둔 미군은 지난 한해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를 했다. 미군은 연합 훈련에 참가하는 것 외에도 자체적으로 대규모의 훈련을 실시했다. 
서독군 참모부는 작전적 준비태세를 갖춘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서독군은 연합훈련을 진행하면서 연합군의 범주 내에서 임무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서독군 참모부의 고급 장교들은 대부분 과거 히틀러 군대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나이가 많기 때문에 얼마 안가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독일군의 작전적 준비태세는 미육군과 거의 맞먹는다. 
프랑스군에서 가장 준비가 잘 된 참모진은 제1군의 참모진이다. 프랑스 본토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의 참모진은 준비태세는 최근에 와서야 강화되었다. 프랑스군은 오랫 동안의 식민지 전쟁으로 생긴 문제점을 없애고 미군과 동등한 수준으로 준비태세를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프랑스군 참모진은 특정한 상황하에서의 전투 행동에 필요한 조직과 운영에 있어서는 많은 경험을 갖추고 있다. 

영문번역 : Marian J. Kratochvil.
“Document No.28 : Warsaw Pact Intelligence on NATO’s Strategy and Combat Readiness, 1965”,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170~173.

2013년 8월 22일 목요일

1960년대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방어계획

Blueprint for Battle : Planning for War in Central Europe, 1948~1968을 읽는 중 입니다. 진도가 더뎌서 이제야 겨우 헬무트 하머리히Helmut Hammerlich가 쓴 제10장 “Fighting for the Heart of Germany”를 읽고 있습니다. 제10장은 1960년대 초반 북독일의 방어를 담당한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전시 방어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방어종심이 짧은 독일의 전략적 고민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더군요.


제10장에서는 1963년 9월에 나온 연합군중부유럽사령부CINCENT, Commander in Chief, Allied Forces Central Europe의 긴급방어계획EDP, Emergence Defense Plan 1-63호 이후의 방어 계획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긴급방어계획 1-63호는 주방어선을 베저Weser-레흐Lech 강을 잇는 선으로 설정해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의 90%를 방어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의 방어계획이 주방어선을 엠스Ems-네카Neckar강으로 설정해서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의 50%를 포기하는 것에 비하면 방어구역을 크게 늘린 것이고 독일이 정치적으로도 용납할 수 있는 범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최대한 전방에서 바르샤바조약군의 주력을 맞아 싸우기 위해서 지연전을 펼쳐야 하기 때문에 작전적 융통성이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토를 최대한 사수해야 하니 선택의 폭은 좁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제1군단, 영국 제1군단, 벨기에 제1군단과 함께 독일 북부의 방어를 담당한 독일연방군 제1군단은 예하에 제3기갑사단, 제1기갑척탄병사단, 제11기갑척탄병사단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제11기갑척탄병사단은 예하의 제33기갑척탄병여단을 나토 북부집단군NORTHAG, NATO’s Northern Army Group 예비대인 제7기갑척탄병사단에 배속하게 되어 있어서 실제 전력은 2개 기갑척탄병여단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이 3개사단의 기갑전력은 전차 600대와 장갑차 700대였습니다. 그런데 독일 제1군단이 1차로 상대하게 될 소련 제3충격군은 4개 전차사단과 1개 차량화소총병사단, 전차 1,600대와 장갑차 1,400대를 보유한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제2파 제대로는 제2근위전차군, 또는 제20근위군 소속의 11개 사단이 투입될 것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전쟁 초반에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를 감당하면서 최대한 좁은 지역에서 적을 저지해야 하는 것 이었습니다. 1965년에 계획을 개정해서 제7기갑척탄병사단을 독일 제1군단 예비대로 지정하기 전 까지는 이렇다 할 예비대가 없었으니 더욱 난감한 계획이었습니다. 기본적인 방어계획은 각 사단이 1개 여단과 사단 기갑수색대대로 지연부대를 편성해 최전방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나머지 2개 여단이 주방어선에서 방어를 준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연부대가 주방어선까지 밀려오면 이것을 후방으로 돌려 사단예비대로 운용하도록 했습니다. 굉장히 협소한 방어구역과 제한된 전력이 결합되어 지휘관이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가 지독하게 적었던 것 입니다.


이런 제약을 상쇄하기 위해 사용된 수단은 잘 알려진 대로 핵병기였습니다. 독일 제1군단 포병의 경우 연합군 유럽최고사령관SACEUR, Supreme Allied Commander Europe의 허가를 받아 10킬로톤까지의 핵포탄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자인 하머리히는 자세한 사격계획이 명시된 사료를 찾지 못해 개략적인 내용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핵 포격과 함께 사용되는 수단은 핵지뢰였습니다. 핵지뢰는 4~5km 간격으로 설치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베저강 서쪽에 설정된 핵지뢰 사용 지대가 120km 가량이었다는 증언을 토대로 독일 제1군단에 할당된 핵지뢰는 30개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여기에 항공지원을 담당한 제2연합전술공군ATAF, Allied Tactical Air Force도 핵폭격을 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전쟁이 터졌다면 전쟁 초반부터 독일은 핵으로 쑥대밭이 될 판이었습니다. 나토측이 전진방어를 채택하면서 핵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은 바르샤바조약기구 측에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주)


사실 독일 본토에서 핵을 사용한다는 것은 독일측으로서도 썩 달가운 방안이 아니었습니다. 박살나는건 독일이니 말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까지 나토 북부집단군 방어구역에서 핵 타격 목표를 선정하는 것은 영국군에 의해 좌우됐고 1966년 이후에야 독일측이 핵무기 사용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독일로서도 뾰족한 대안이 없는 것은 문제였습니다. 당시 독일 제1군단 포병사령관은 작전상 개전 초반부터 핵무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으며 독일군의 전력이 획기적으로 증강되지 않는 이상 재래식 화력전은 어렵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군의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개전 초기에 대량의 핵무기를 사용하는 계획이 계속 수립되었습니다. 1966년 부터 독일공군 참모총장을 맡았던 슈타인호프Johannes Steinhoff는 이런 계획으로는 작전적인 기동이 불가능하다고 비난하고 독일을 파괴하는 전술핵의 대량 사용을 재래식 방어에 포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최대한 많은 영토를 방어하면서도 핵무기 사용은 피해야 한다는 딜레마는 결국 독일이 재래식 전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만듭니다. 사실상 이것이 독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주) “Document No.28 : Warsaw Pact Intelligence on NATO’s Strategy and Combat Readiness, 1965”,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172~173.

2011년 7월 3일 일요일

제국의 유지비용

  20세기 영국의 몰락은 국제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은 제국이라 2차대전 이후에도 식민지들에 대한 영향력을 최대한 보존하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이런 발버둥의 일환으로 영국은 경제가 엉망으로 망가져가던 1960년대 까지도 세계 각지의 해외주둔군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다지요.

  영국 군부는 2차대전이 끝나고 냉전을 맞이한 뒤에도 해외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매우 중요시 했습니다. 특히 중동지역은 유전이 존재했을 뿐 아니라 폭격기의 작전 기지로서도 중요하게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지역은 영국이 ‘전통적’으로 이해관계를 가진 지역이었던 만큼 전략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2차대전으로 사실상 패권국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해 1952년 영국 군부는 국제전략보고서Global Strategy Paper에서 중동지역에 고정적으로 배치할 영국군을 육군 1개 사단에 항공기 160대 정도로 감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1)
  이미 2차대전 이전에도 식민지 유지에 땀을 빼던 대영제국이었지만 2차대전 이후에는 그게 더 어려워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영국은 2차대전을 미국의 원조에 의해 겨우 치러냈고 2차대전 이후에는 더욱 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연구자가 시니컬하게 지적하고 있듯 2차대전 이후의 영국은 자체적인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강대국의 기능을 미국의 원조로 해나가는 형편이었던 것 입니다.2)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국제활동은 미국의 지원에 좌지우지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국이 그리스 내전에서 손을 뗀 것도 유명하지만 수에즈 사태당시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은 이런 현실을 전세계에 명백히 보여준 사례이지요.

  그리고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제가 슬슬 엉망이 되어가자 얼마 되지않는 영국의 해외주둔군 마저 풍전등화의 상태가 됩니다. 영국은 2차대전 직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국’의 역할을 하기 위해 국방력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55 회계연도만 하더라도 영국 GDP의 9.0%에 달하는 비용이 국방비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였다지요. 하지만 이것은 영국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었고 이미 1959/60 회계연도에 6.9%로 6%대로 떨어진 뒤 1969/70 회계연도에는 5.3%로 추락합니다.3)  영국의 경제가 계속해서 악화되면서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군사력은 점차 부담스러운 짐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영국 수상 맥밀런이 1959년 7월 26일 일기에 썼던 것 처럼 영국내에서는 “왜 영국이 큰 무대에 남아있으려 발버둥 쳐야 하는가?(Why should the UK try to stay in the big game)”하는 회의감이 오래전 부터 일고 있었던 것입니다.4)
  영국 재무성의 경우 이미 1960년 부터 중동과 아시아에 배치된 영국군의 철수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재무성의 관료였던 리처드 클라크Sir Richard Clarke는 국방비를 GNP 성장률의 테두리 내에서 억제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극동지역에서 병력을 감축하는 것이 상황을 호전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클라크는 1960년 7월 극동지역에 주둔한 영국군을 감축하자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는 싱가폴에 영국군을 주둔시킨다고 해서 영국의 경제와 무역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미군이 있으니) 또한 인도를 포함한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영국이 얻는 경제적 이익이 연간 6천만에서 6천5백만 파운드 사이인데 비해 아시아 지역에 주둔한 영국군에 소요되는 비용이 연간 6천만 파운드에 달해 전혀 ‘남는 장사’가 아니라는 점도 지적되었습니다. 그리고 1963년에는 중동지역에 주둔한 영국군도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중동지역의 영국 석유기업들이 연간 1억 파운드를 벌어들이는데 이 지역에 주둔한 영국군은 1억2천만에서 1억2500만 파운드를 까먹고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습니다.5)

  물론 영국 정부는 단순히 재무성의 주장에만 휘둘리지 않았고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상황과 군사적인 요인을 함께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정말 돈이 없다는데 있었습니다. 결국 해외주둔군을 줄일 수 밖에 없었는데 서독주둔군의 경우 미국 및 NATO회원국들과 협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결국은 만만한 중동과 아시아 주둔군이 목표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6) 결국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 뒤 1965년에는 아덴Aden을 포함한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철군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이어서 아시아 지역의 영국군 감축이 잇따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영국이 몰락할 무렵에는 미국이라는 훨씬 쓸만한 대체재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영국군이 철군한 뒤에도 미국의 존재는 중동과 아시아지역에서 공산권의 세력확대를 저지하는 역할을 했지요. 다행히 미국은 여전히 강력한 패권국이고 우리는 그 패권국이 제공해주는 안보에 기대어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여전히 패권국으로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나쁘지 않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한국이 미국에 있어서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점 입니다. 냉전이후 한미관계를 다시 돌아보자는 목소리가 자주 나오고있고 그럴때 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생각합니다. 한국은 미국이라는 제국에게 있어 수지타산이 맞는 곳인가?



1) John Baylis·Alan Macmillan, “The British global strategy paper of 1952”,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6: 2, p.218
2) Dan Keohane, Labour Party Defence Policy since 1945(Leicester University Press, 1993), p.20
3) G. C. Peden, Arms, Economics and British Strategy : From Dreadnoughts to Hydrogen Bomb(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308
4) Curtis Keeble, Briatin, the Soviet Union and Russia(MacMillan Press, 2000), p.259
5) G. C. Peden, ibid., p.332
6) G. C. Peden, ibid., p.333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미육군 제7군에 대한 1950년대의 전시 증원계획

넵. 땜빵 포스팅입니다.

1950년대 미육군의 전시동원계획 중 독일 방어를 담당한 제7군에 대한 증원계획을 표로 만들어 봤습니다.


1953년 12월계획
1954년 12월계획
D-Day
350RCT(오스트리아)
351RCT(오스트리아)
350RCT(오스트리아)
D+30
44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82공정사단(미국)
2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82공정사단(미국)
D+31
보병사단×3(미국)
보병사단×(극동)
공정사단×1(미국)
보병연대전투단×1(카리브해)
공정연대전투단×1(미국)
기갑기병연대×2(미국)
D+60
3기갑기병연대(미국)
D+91
보병사단×3(미국)
보병사단×1(태평양)
기갑사단×1(미국)
공정사단×1(미국)
기갑집단×1(미국)
기갑기병연대×1(미국)
D+120
D+150
D+180

1955년 12월계획
1956년 12월계획
D-Day
D+30
1보병사단(미국)
3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1보병사단(미국)
4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D+31
D+60
2기갑기병연대(미국)
25보병사단(태평양)
기갑기병연대×2(미국)
D+91
기갑집단×1(미국)
기갑기병연대×1(미국)
D+120
82공수사단(미국)
82공수사단(미국)
4기갑사단(미국)
D+150
4기갑사단(미국)
25보병사단(태평양)
3보병사단(미국)
D+180
보병사단×5(미국)
기갑사단×1(미국)
주방위군 보병사단×4(미국)
주방위군 기갑사단×1(미국)

1957년 12월계획
1959년 1월계획
D-Day
D+30
1보병사단(미국)
4보병사단(미국)
101공정사단(미국)
4보병사단(미국)
82공정사단(미국)
101공정사단(미국)
3기갑기병연대(미국)
D+31
D+60
2기갑기병연대(미국)
D+90
82공정사단(미국)
D+120
2기갑사단(미국)
1보병사단(미국)
D+150
3보병사단(미국)
2보병사단(미국)
2기갑사단(미국)
주방위군 보병사단×2(미국)
D+180
주방위군 보병사단×5(미국)
주방위군 기갑사단×1(미국)
주방위군 보병사단×3(미국)
주방위군 기갑사단×1(미국)

이 표는 Ingo Trauschweizer, The Cold War U.S. Army : Building Deterrence for Limited War(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pp.245~248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 입니다.

표 에서 재미있는 점은 미군의 증원 속도가 갈수록 늦어진 다는 것 입니다. 1953년 계획만 하더라도 D+30~31일에 대부분의 증원병력이 도착하도록 되어 있는데 1954년 부터는 D+30일에 3개 사단이 증원된 뒤 한참 뒤에 증원병력이 도착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물론 독일을 미 제7군 혼자서 방어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다른 NATO군이 존재하고 있었고 독일의 재무장으로 독일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늘어날 예정이긴 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