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27일 금요일

박정희 전역식에 동원된 부대의 규모

박정희는 1963년의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 군에서 예편합니다. 군부는 대내외적인 압력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민정이양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태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12월에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선거를 국민직선제로 바꿉니다. 이것은 꽤 현명한 선택이었는데 만약 제2공화국과 같이 대통령 간선제를 채택한다면 군부출신이 집권하는 데는 애로사항이 제법 꽃 피었을 것 입니다.

하여튼 군부가 지지하는 유력한 카드인 박정희는 대통령선거에 대비하기 위해서 급히 전역합니다. 박정희의 전역식에 대해서 육군본부가 발간한 『육군발전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63년 8월 30일에는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출하기 위하여 5∙16군사혁명을 통수한 박정희 대장의 역사적인 전역식이 당 군단 관할지역인 강원도 철원 지포리의 TCPC사격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 전역식에는 제3사단 예하의 3개연대와 포병 11 및 833대대 1개 포대, 제 3전차대대 제 1중대 및 2중대(M-47 27대), 4.2중포 1개 포대, 제 6대전차유도탄 소대의 병력과 장비가 동원되었다.
이 식전의 참가인원은 3부요인, 주한 외교사절, 3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사령관, 주한 미 8군사령관 외에 600여명이 참석하였다.

육군본부, 『육군발전사』2권, 1970, 191쪽

그리고 아래는 전역식 동영상입니다.



인용한 글에 언급된 동원 부대나 링크한 동영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상의 대선출정식을 겸한 행사여서 그런지 군부의 과시욕이 느껴집니다. 거의 사단급 병력이 동원된 셈인데 뉴스를 통해 접하는 외국의 4성급 장성들의 전역식 중에서 저 정도 규모의 전역식은 아직 보지를 못 했습니다.

저런 과시성 행사를 위해 동원된 사병들이 불쌍하군요.

참고로, 주한미군 사령관을 역임한 버웰 벨(Burwell B. Bell) 대장의 전역식 동영상을 링크합니다. 박정희의 전역식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군요.

Tennessee: Gen. Bell changes command

2009년 3월 24일 화요일

아니! 기린아님 블로그가;;;;

기린아님 블로그를 가 보니 갑자기 모든 글이 비공개(?) 처리되어 있습니다.

아니. 이게 왠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애독자로서 비통한 심정입니다.

1차5개년 계획과 소련 기계화 부대의 발전

러시아는 특수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서유럽과는 다른 독자적인 군사교리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1920년대에 '작전술'의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도 기동전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온 전통적인 군사학의 바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련은 1920년대부터 '작전술'에 바탕을 둔 기계화 부대가 중심이 된 기동전 교리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아직 새로운 이론을 실험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지 못했습니다. 소련의 1920년대는 혁명과 내전의 피해를 막 복구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공업화의 수준은 서유럽에 비하면 여전히 보잘 것 없었으며 군대는 1차대전 당시와 별 다를바 없는 장비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소련군대는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군대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스탈린이 야심차게 추진한 제1차 5개년 계획을 기점으로 소련 군사이론가들의 '이론'은 드디어 '교리'로 발전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1차5개년 계획시기의 전차 생산과 초기 기계화부대 창설에 대해 짧게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론에서 교리로

1920년대 후반기 기계화부대의 창설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첫번째는 기동전에 대한 이론들이 교리로서 실체화 되기 시작했다는 것 입니다.

러시아 군사이론가들은 1차대전과 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 스베친(Александр А. Свечин)과 투하체프스키(Михаи́л Н. Тухаче́вский)의 논쟁을 시작으로 샤포쉬니코프(Борис М. Шапошников), 트리안다필로프(Владимир К. Триандафиллов) 등의 군사이론가들은 기동전에 대한 이론을 활발하게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논쟁을 주도한 두 사람 중 스베친의 경우 1차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기소모전에 의한 점진적 승리를 제창한 반면 투하체프스키는 장기소모전이 1차대전 당시 독일의 패배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방대한 산업력을 동원하기 이전에 대규모의 강력한 공격으로 신속한 승리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Harrison, 2001, p.129~131] 하지만 많은 소련의 군사 이론가들은 미래의 전쟁은 기동 위주의 전투가 중심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소모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스베친 조차 미래의 전쟁에서는 1914~15년 시기의 동부전선과 마찬가지로 제한적인 기동전을 예측했습니다.[Harrison, 2001, p.135]
이 시기 소련의 군사이론가들은 활발한 논쟁을 통해 '작전술'의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제정러시아 말기부터 전략과 전술의 중간단계로서 작전이라는 개념이 조금씩 논의되고 있었으며 여기에 1차대전과 내전의 경험이 추가되면서 이론적인 정립이 가속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작전술이라는 단어는 1923~24년 붉은군대의 장군참모대학(뒷날의 프룬제 군사대학) 강의에서 스베친이 처음으로 명확한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작전술이라는 단어와 개념은 붉은군대 장교단 사이에 급속히 퍼져나갔습니다. 불과 5년도 되지 않은 1928년에 '작전술'이라는 용어는 공식적인 군사사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Harrison, 2001, p.140~141] 작전술의 개념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트리안다필로프 등의 군사이론가들은 작전술의 개념을 보다 정교하게 가다듬고 구체화 했습니다.

소련군은 작전술 개념의 도입 등 군사사상에 있어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전차의 사용에 대해서는 20년대 후반까지도 보수적이었습니다. 1927년 까지도 전차는 참호전 상황에서 돌파를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었습니다. 1928년에 전차생산을 증대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이것은 서방과의 전쟁에 대한 공포와 서방의 전차 보유대수에 대한 과장된 정보 등의 영향이었다고 합니다.[Habeck, 2003 p.88]
새로운 군사이론에 맞는 전차의 활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투하체프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 등의 군사이론가 들이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1928년에 전차의 대규모 생산을 주장하기는 했으나 이 시점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운용 방안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투하체프스키가 전차의 활용에 대해 구체적인 구상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보로실로프(Климент Е. Ворошилов)와의 논쟁으로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밀려난 이후였습니다. 투하체프스키가 본격적으로 전차에 관심을 가지는 동안 트리안다필로프도 전차의 활용방안을 연구했습니다. 트리안다필로프는 1920년대의 연구를 통해 적의 방어종심을 돌파해 포위하는 것 이외에 돌파구를 봉쇄하기 위해 반격해 올 적의 예비대의 격파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Harrison, 2001, p.150] 전차는 이 두가지 임무를 수행하는데 적합한 무기체계였습니다.

1928년도 붉은군대야전규범(Полевой Устав Краснои Армий), PU-28은 전차의 활용한 돌파와 포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PU-28은 전차의 지원을 받는 두 개의 제대 중 하나는 적 방어선을 돌파해 후방의 적 포병을 격멸하거나 기병의 지원을 받을 경우 적 후방이나 측방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고 두 번째 제대는 보병의 지원을 받아 적 주저항선의 방어 거점을 격파하도록 규정했습니다.[Habeck, 2003 p.95~96]
PU-28의 개정판인 1929년도 야전규범, PU-29는 전차, 보병, 포병 부대의 연합작전에 기반한 현대적 기동전을 구체화 했습니다. PU-29는 투하체프스키, 트리안다필로프 등의 혁신적인 군사이론가들이 서술했는데 특히 트리안다필로프는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해 전차와 차량화부대를 이용, 공세 초기에 적 방어선의 방어종심을 일거에 돌파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PU-29는 PU-28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전차 부대의 역할을 더 이상 보병지원의 단거리 돌파에 묶어 두지 않았습니다. 전차부대는 기병과 함께 기동력을 발휘해 적을 포위하거나 제병 합동작전을 통해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규범은 야전지휘관들이 전차부대를 보병지원전차와 장거리전차로 구분하고 이 중 장거리전차에 적 포병의 격파와 적 후방으로의 돌파임무를 부여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대규모 전차부대의 동원이 가능할 경우에는 포병의 지원이 없거나 최소화된 상태에서도 돌파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한 점에서 전차의 역할을 얼마나 중요하게 규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Erickson, 2001, p.307]
이 시기 소련의 군사이론가들은 전차를 기능 별로 구분했는데 그 주된 원인은 소련의 낮은 기술수준에 있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소련의 기술과 산업생산능력으로는 범용성이 높은 전차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기능별로 특화된 전차를 생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Habeck, 2003 p.129]

2. 외국 전차 기술의 도입

PU-29를 통해 기초적이긴 하지만 독립적인 대규모 전차부대를 위한 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이론에 적합한 새로운 전차가 필요했습니다. 이때까지 소련 전차부대의 중핵을 구성하고 있던 MS-1 전차는 기본적으로 르노 FT-17의 개량형으로 보병지원 전차에 불과했기 때문에 PU-29에서 규정하고 있는 장거리전차의 역할을 수행할 전차가 필요했습니다.

1920년 후반의 시점에서도 소련은 아직 독자적으로 신형 전차를 개발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신형전차 개발에 외국의 전차를 참고해야 했습니다. 국방인민위원장 보로실로프는 1929년 11월에 외국의 장갑차량, 특히 전차를 구매할 위원단을 조직하도록 하고 그 위원단의 단장에는 군사과학지도국의 할렙스키(Иннокентий А. Халепский)를 임명했습니다. 할렙스키의 위원단은 1929년 12월부터 4개월간 영국,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 전차의 구입을 위한 협상을 전개했습니다.
할렙스키 위원단은 1930년 1월 독일을 방문해 비밀리에 전차 개발을 하고 있던 독일 기업들과 접촉했습니다. 할렙스키는 독일측과 신형전차 개발을 위한 기술 협력 등을 논의했습니다.
독일 다음의 방문지인 영국에서는 좋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위원단은 영국에서 빅커스-암스트롱(Vickers-Armstrong Ltd)으로부터 카든-로이드 소형전차(Tankettes) 20대, 6톤 경전차 15대, Mark-II 중형전차 15대를 구입했습니다. [Habeck, 2003 p.130] 영국에서 구입한 전차들은 1930년 말부터 1931년 초 까지 순차적으로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영국을 시찰한 할렙스키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영국이 차량화에 대해서 가장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Hofmann, 1996, p.288]

위원단의 미국 방문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습니다. 할렙스키는 이미 1928년 10월 미국을 처음 방문한 바 있었고 이때 처음으로 미육군이 추진하고 있던 커닝햄(Cunningham) T1을 접했습니다. 할렙스키는 이 두 번째 미국방문에서 커닝햄 T1을 구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소련 정부는 할렙스키 위원단의 미국 방문 이전에도 커닝햄 T1의 수입을 신청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소련은 아직 미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커닝햄사에서는 무기의 해외 수출을 관리하는 전쟁부(War Department)에 이 문제를 알렸습니다. 1930년 3월 미국에 도착한 할렙스키는 원래 계획대로 T1을 구입하려 했으나 전쟁부가 외교문제를 들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또 T1의 성능이 당초 기대를 밑돌아 T1의 구입을 취소했습니다.
커닝햄 T1 대신 칼렙스키의 관심을 끈 것은 유명한 크리스티(John Walter Christie)의 경전차였습니다. 칼렙스키는 미국의 군사잡지에서 크리스티가 개발한 전차 차체에 대한 기사를 읽고 크리스티와 접촉하기로 결정합니다. 칼렙스키가 보기에 크리스티의 M1928은 궤도주행방식과 바퀴주행방식이 가능했기 때문에 소련의 군사이론가들이 고민하던 '작전 기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었습니다. 1930년 4월 29일 크리스티는 소련에 M1928의 개량형인 M1930을 판매한다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할렙스키는 귀국한 뒤 크리스티 전차를 바탕으로 한 고속전차(BT, Быстроходный Танк)의 개발과 대량생산을 서두를 것을 주장했습니다. 폴란드도 크리스티 전차를 구매했기 때문에 고속전차의 양산이 폴란드보다 뒤쳐진다면 소련은 폴란드군에게 '작전 기동성'의 우위를 상실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할렙스키는 1931년 말 까지는 최소한 100대의 고속전차를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미국에서 구입한 크리스티 전차가 1930년 9월에는 소련에 인도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1931년 5월까지는 분석과 시험을 마치고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Hofmann, 1996, p.291] 장차 크리스티 전차와 함께 소련군 기갑부대의 주축이 될 빅커스의 6톤 경전차의 경우는 1931년 8월까지 분석과 시험을 마치고 대량생산에 들어가는 것이 할렙스키의 계획이었습니다.[Stoecker, 1998]

크리스티 M1930을 바탕으로 한 고속전차의 개발은 급속히 진행됐습니다. 할렙스키는 1931년 6월 3일 혁명군사평의회(RVS, Революционными Военный Совет)에 출두해 고속전차 개발 계획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할렙스키는 M1930을 바탕으로 14톤급에 37mm포(초기안은 76mm포)와 2정의 기관총을 장비하고 바퀴 상태로는 시속 70km, 궤도 상태로는 시속 40km의 성능을 가진 전차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여기에 스탈린의 직접적인 관심도 고속전차의 개발을 가속화 했습니다. 1931년 11월 할렙스키가 병에 걸려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스탈린은 직접 할렙스키를 불러 크리스티 전차에 대해 질문했다고 합니다.[Habeck, 2003 p.152] 스탈린의 관심 덕분인지 고속전차 생산을 담당한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11월에 원자재, 운송수단, 노동자에 대한 식량배급 등에 있어 최우선권을 부여 받았습니다.[Stone, 2000, p.189]

3. 1차5개년 계획과 전차 생산

기동전에 필요한 이론과 교리의 정립, 그리고 그에 필요한 전차의 확보가 끝났지만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전차의 대량 생산에 필요한 산업력의 확보였습니다. 소련이 본격적으로 전차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27년 4월 MS-1가 처음이었습니다. 1927~28년 사이에 생산된 MS-1은 25대에 불과했습니다. 붉은군대 혁명군사평의회는 1928년 3월에 1933년까지 MS-1을 1,600대 생산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1928년 당시 소련이 보유한 전차는 모두 합쳐봐야 92대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엄청난 것 이었습니다.[Harrison, 2001, p.173] 그리고 실제로도 이 야심찬 계획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28년에 완성된 군사부문 5개년 생산 계획에서는 전차 생산량을 1929/30년에는 340대로 잡고 이것을 1933년까지 연간 7,000대 수준으로 증대시킨다는 목표를 잡았습니다.[Simonov, 2000, p.42] 5년만에 전차 생산능력을 20배 늘린다는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때마침 붉은군대의 무장계획을 강력하게 밀고 나갈 강인한 추진력을 갖춘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스탈린, 보로실로프와의 의견 불일치 때문에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던 투하체프스키가 1931년 모스크바로 귀환한 것 이었습니다.[Harrison, 2001, p.130~131] 투하체프스키는 모스크바로 귀환해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과 병기국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 최종 결정권자인 스탈린도 전차 생산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공업화가 진행중인 소련에게 현대적 무기체계인 전차의 생산을 단기간에 급증시키는 것이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1930년 시점에서 소련의 공업력으로는 전차의 장갑에 필요한 고급 철판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었다는 점 입니다. 낮은 기술수준은 여러 방면에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모토빌리힌스키 기계공장이 생산한 37mm전차포는 100% 모두 생산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해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Stone, 2000, p.163] 붉은군대의 방대한 전차부대 증강과 전시동원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실한 공업생산능력과 기술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1931년 7월 말 중공업, 특히 제철업의 신속한 확장을 요구했습니다.

고속전차의 생산은 할렙스키가 제시한 37mm포탑의 생산 지연 때문에 당초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할렙스키와 고속전차 생산계획을 검토한 뒤 고속전차의 시제품을 생산할 공장을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 자동차 공장에서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으로 변경하고 1931년 10월 15일까지 3대의 시제품을 생산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에서 시제품이 완성되면 양산을 개시해 1932년 말 까지 고속전차 2,000대와 T-26 1,600대를 생산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리코프 기관차공장은 1931년 11월 1일에야 고속전차 시제품 3대를 완성했으며 1932년 11월까지 당초 계획에 크게 미달한 170대의 고속전차가 붉은군대에 인도되는 것에 그쳤습니다.[Hofmann, 1996, p.298~299]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군대 수뇌부는 전차 생산계획을 더욱 확대했으며 투하체프스키가 제시한 1932년도 생산계획은 T-26 12,000대와 소형전차 16,000대였습니다.[Habeck, 2003 p.149]
위에서 언급했듯 1932년의 전차 생산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신형 고속전차인 BT-5 또한 45mm전차포의 생산 문제로 지연되고 있었고 1932년 12월까지 생산된 신형전차는 603대의 고속전차와 1410대의 T-26에 불과했습니다. 이중 고속전차 89대는 전차포의 부족으로 포탑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포탑이 없거나 기관총만 장비한 BT-2를 1933년까지 모두 37mm포탑으로 교체한 뒤 45mm전차포를 탑재한 BT-5의 생산으로 넘어간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T-26, BT의 양산과 함께 중형전차와 중전차 개발도 추진되었습니다. 영국에서 구입한 빅커스 Mark II를 기초로 한 중형전차 T-28과 중전차 T-35가 혁명군사평의회로부터 생산 승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중형전차와 중전차의 개발도 앞서 진행된 경전차들의 생산과 유사한 문제를 겪었습니다. T-28의 경우 구동계통의 문제와 경전차들과 마찬가지로 포탑 생산 부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전차 T-35또한 구동계통 문제로 시제품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1931~1933년 사이에 영국과 미국에서 기술을 도입한 신형 전차 중 제대로 생산된 것은 T-27소형전차 정도였습니다. 1931년의 전차 생산은 2,000대에 그쳤습니다.
소련의 전체적인 산업력의 부족은 전차생산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속전차 생산을 담당한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BT-5의 초기 생산형에 대해 질 낮은 베어링을 공급받았기 때문에 45mm포탑을 탑재하면 무리가 갔습니다.[Hofmann, 1996, p.304] 1931년의 전차포 생산계획은 대실패로 끝났습니다. 특히 BT-5에 탑재할 신형 45mm 전차포는 1931년에 단 한문도 도입되지 않았습니다.[Stone, 2000, p.169]

1931년의 부실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소련 지도부는 전차생산 증대에 큰 희망을 걸었습니다. 스탈린은 1932년 1월 10일 국방인민위원회 회의에서 고속전차 증산을 위해 일반 민수공장들을 전차생산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강구할 것을 제안하고 전차 생산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따라 1932년도 전차 생산계획은 T-27 5,000대, T-26 3,000대, BT전차 2,000대 등 총 1만대로 결정되었습니다.[Stone, 2000, p. 193] 1932년 전차생산계획에 따라 전차를 생산할 공업기지의 대규모 확장이 계속됐습니다. 5월에는 스탈린그라드에 T-26 1만2천대와 6천대분의 예비부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1932년까지 건설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생산 증대 계획은 차질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산 목표를 맞추기 위해 자동차 공장을 비롯한 민수 공장들을 대거 전차 생산에 돌렸지만 생산에 혼란만 가중되었을 뿐 이었습니다. 생산이 비교적 단순한 T-26 조차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었고 구조가 더 복잡한 BT 전차는 문제가 더 심각했습니다. 주 생산공장인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숙련된 기술자가 부족했고 포탑, 엔진, 구동 계통 등을 생산할 일곱개의 공장들도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체 개발한 엔진을 탑재하려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에 생산 계획을 맞추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급히 리버티 엔진을 수입해야 했고 엔진 문제로 생산은 더 지연되었습니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생산이 성공적이었던 T-27 조차 갑작스러운 생산계획 상향조정으로 문제를 겪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932년도 전차생산계획도 이전 연도의 생산계획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했습니다. 1932년 10월 1일까지 5,150대의 전차를 생산하고 이후 월간 생산량을 1,365대로 끌어올려 1만대 생산을 달성한다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지만 실제 10월 1일까지의 생산량은 1,365대에 월간 생산량은 480대를 달성하는데 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1932년의 전차 생산은 T-27 2,100대, T-26 1,600대, BT전차 600대에 그쳤습니다.[Stone, 2000, p.198~201]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45mm 전차포의 생산 차질로 T-26과 BT 전차 중 800대는 포탑이 없는 상태로 계획된 숫자만 채우기 위해서 완성된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1932년 생산계획이 실패한 결과 1933년도 전차 생산계획은 7,000대로 하향조정 되었습니다. 1933년도 생산계획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세 종류의 신형전차, T-37 수륙양용전차와 T-28 중형전차, T-35 중전차가 포함되었습니다. 기존의 전차 생산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채 보완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술적으로 복잡한 신형전차의 생산이 추진된 것 입니다.

4. 기계화군단의 창설

비록 5개년계획 기간 중 전차 생산 계획은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한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소련의 전차 생산능력이 비약적으로 증대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였습니다. 이제 소련은 대규모 기계화부대를 운용할 수 있는 전술교리, 교리를 기술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전차, 그리고 그 전차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산업기반을 모두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기계화부대가 만들어질 차례였습니다.

신형전차의 도입은 소련 이론가들이 정립한 전차 운용 교리를 현실화 시킬 수 있게 했습니다. T26은 보병지원전차로서, BT 계열 전차들은 고속 전차로서 독립된 기계화부대의 주력 장비가 되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와 할렙스키는 신형전차들의 전술임무를 다음과 같이 할당했습니다. T27소형전차와 T37수륙양용전차는 정찰 임무를, T28 중형전차와 T35중전차는 요새화된 적 방어선의 돌파를, 그리고 전술적 돌파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BT전차와 T26전차가 작전단계의 종심돌파를 수행하는 것 이었습니다.

최초의 기계화여단은 1929년에 편성된 임시기계화연대를 확대 개편해 1930년 5월 창설되었습니다. 이때 창설된 임시 기계화여단은 66대의 전차와 340대의 각종 차량, 3천명의 병력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임시 기계화여단은 1930년 가을에는 정식으로 제 1기계화여단(Мехакнизированная Бригада)이 되었고 예하에 1개 전차연대, 1개 보병대대, 1개 포대와 기타 지원부대를 두었습니다. 장비는 총 60대의 전차와 12대의 장갑차, 350대의 각종 차량이었습니다. 최초의 기계화여단은 초기 훈련 단계에서 많은 문제점을 보였습니다. 가을에 실시된 한 훈련에서 기계화여단은 기병사단을 추격해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는데 기동 도중 연료를 모두 소비해 기병사단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외에 전차연대가 장비한 MS-1 전차의 잦은 고장도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MS-1의 느린 속력으로는 PU-29에 명시된 적 방어종심의 신속한 돌파와 적 포병의 격파가 어려웠습니다.[Habeck, 2003 p.133~134] 새로운 교리에 맞는 새로운 전차가 필요했고 그것은 이제 막 대규모로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 3월, 할렙스키는 붉은군대 총참모부에 전차군단(Танковый Корпус)을 창설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당시 총참모장이던 예고로프(Александр И. Егоров)와 투하체프스키는 할렙스키의 건의안에 찬성했습니다. 이에 따라 기계화군단을 포함한 대규모의 기계화부대 창설이 시작되었습니다. 독립된 기계화군단의 창설 외에도 최고사령부 예비전차여단(TRGK)을 별도로 편성하고, 기병사단 예하에는 기계화연대를, 소총병사단 예하에는 전차대대를 편성하도록 되었습니다.
최초의 기계화군단은 11소총병사단을 개편한 11기계화군단과 45소총병사단을 개편한 45기계화군단이었습니다. 각 기계화군단은 2개 기계화여단과 1개 소총병여단, 기타 직할대로 편성되었습니다. 두 군단의 예하 여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1기계화군단은 31기계화여단(T-26), 32기계화여단(BT전차)과 33소총-기관총여단(Стрелково пулеметная Бригада), 45기계화군단은 133기계화여단(T-26), 134기계화여단(BT전차), 135소총-기관총여단이었습니다.[Дриг, 2005, с.9] 편성 초기 기계화군단의 기갑장비는 전차 500대와 장갑차 200대라는 당시까지 유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Habeck, 2003, p.168] 1934년 1월까지 붉은군대의 기갑전력은 약 7,900대 수준으로 증강됐습니다. 기계화군단의 추가 창설은 보로실로프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그 밖의 기계화부대 창설은 계속되어 1936년까지 6개의 최고사령부 예비전차여단, 15개의 기병사단 예하 기계화연대, 83개의 소총병사단 예하 전차대대 및 전차중대가 창설되었습니다.[Harrison, 2001, p.176~177]

이것은 당초 투하체프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와 같은 군사이론가들이 기대한 목표에는 미달하는 것 이었지만 엄청난 성과였습니다. 할렙스키 위원단이 외국의 전차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순방길에 오른지 5년 만에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기갑전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군사 및 산업적으로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이것은 분명히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문헌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Third Edition), Frank Cass, 2001
Mary R. Habeck, Storm of Steel :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Richard Harrison, The Russian Way of War : Operational Art, 1904-1940,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1
George F. Hofmann, ‘Doctrine, Tank Technology, and Execution : I. A. Khalepskii and the Red Army’s Fulfillment of Deep Offensive Operation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2(June 1996)
Nikolai S. Simonov, ‘The War Scare of 1927 and the birth of the defense-industry complex’, The Soviet Defense-Industry Complex from Stalin to Khrushchev, St.Martins Press, 2000
Sally W. Stoecker, Forging Stalins Army : Marshal Tukhachevsky and the Politics of Military Innovation, Westwiew Press, 1998
David Stone, Hammer and Rifle : The Militarization of the Soviet Union 1926-1933,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Евгений Дриг, Механизированные Корпуса РККА В Бою, Иэдателстьство 2005

소외받는 한국일보

어제 있었던 ‘신문에 대한 공적재원 투입 더 늦출 수 없다’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놓친 것은 꽤 아쉽습니다.

저는 노무현 정부 시기의 언론 정책 중에서 ‘신문발전기금’에 대해서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입니다. 노무현에 비판적인 쪽에서는 한겨레나 오마이뉴스 같이 친여당적 성향을 보이는 매체를 지원하기 위한 꼼수라고 비난했지만 한국일보 같이 노무현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도 ‘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비교적 공정하게 운영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민주당 측이 정파적 이해관계에서 한겨레와 경향에 대한 지원을 주장하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현재로서는 언론사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에 일정 부분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어제 토론회를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문순 의원의 홈페이지에서 자료집을 다운받았습니다. 자료집에 실린 발제문은 신문발전위원회의 신학림 위원이 썼는데 역시나 언론노조 위원장 출신답게 조중동에 대한 비난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한겨레와 경향을 띄워주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발행 부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족벌 신문들의 신뢰도는 신문이나 언론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히 떨어지고 있고, 나머지 신문들은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접근(access)권을 판매 및 배달 과정에서 원천적으로 차단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2008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촛불 집회를 통해 신문과 신문 업계에도 작지만 놀랄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에 대한 신뢰도의 폭발적인 증가가 그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신문 전체의 신뢰도 하락 추세가 멈추거나 상승으로 되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신학림, ‘신문에 대한 공적재원 투입 더 늦출 수 없다’, 2009

이런 식의 편들기는 정말 낮 뜨겁습니다;;;;

신학림은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구독자들은 자신들이 구독하는 신문에 대해 높은 신뢰도를 가지고 있지만 조중동의 구독자들은 자신들이 구독하는 신문에 대해 신뢰도가 낮다는 점을 들어 조중동을 깎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뒤집어 보면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구독층은 맹목적으로 해당 신문을 믿는다는 이야기도 되기 때문에 별로 좋은 이야기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한국일보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습니다. 어쩌다 한국일보 이야기를 한다고 해 봐야 신문시장의 경쟁을 촉발했다는 부정적인 이야기 뿐이더군요. 뭐랄까. 조중동처럼 악의 축이 되어 관심을 받는 것도 아니고 한겨레나 경향처럼 ‘정론지’로 떠받들어 지는 것도 아니고;;;; 아마 최문순이나 신학림과 반대점에 서있는 한나라당 쪽에서도 반대되는 시각을 가지고 있을 뿐 한국일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을 듯 싶습니다;;;; 한국일보가 비교적 보수적 성향이긴 하지만 정파성은 조중동이나 한경에 비해 옅은 편이지요. 사실 그나마 균형을 잘 잡고 있는 신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극단의 양 쪽에 있는 쪽에서는 박쥐 정도로 보는 모양입니다.

한국일보를 즐겨 보는 입장에서 매우 씁슬하군요.

2009년 3월 21일 토요일

AFV클럽의 반가운 신제품

AFV클럽의 슈툼티거가 조만간 출시된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었습니다. 1/48 스케일 AFV가 또 하나 발매된다니 아주 반갑습니다.


그런데 이거 우리나라엔 언제 수입되는 겁니까?

요즘도 시간이 날 때 마다 조금씩 1/48 AFV를 만들고 있는데 조립이 쉽다 보니 만드는 재미가 참 쏠쏠합니다. 이왕이면 트럼페터같이 물량공세를 펴는 회사들이 1/48 AFV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데 좀 어렵겠지요^^;;;;

2009년 3월 16일 월요일

북한의 군사 공업화 - 기무라 미쓰히코, 아베 게이지

식민지시기의 공업화는 식민지근대화론과 맞물리는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식민지 시기의 경제적 유산이 해방 이후 경제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는 논리는 사실 여부를 떠나 약간 불쾌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1970년대 이후 식민지시기의 경제발전과 해방 이후의 경제발전의 상관관계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논쟁이 있었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진행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논쟁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기묘하게도 식민지시기 공업화가 대규모로 이루어 진 오늘날의 북한 지역에 대한 연구나 논쟁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기무라 미쓰히코(木村光彦) 와 아베 게이지(安部桂司)는 식민지시기의 공업화로 인한 유산이 그대로 북한에 남겨져 1953년 이후까지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먼저 식민지시기, 특히 만주사변 이후 북한 지역의 중화학공업화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북한지역의 공업화에 대한 일본 연구자들의 연구는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고 호리 가즈오(堀和生)의 『한국 근대의 공업화 : 일본 자본주의와의 관계』 같이 재미있게 잘 씌여진 책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무라와 아베는 북한지역의 공업화를 설명하면서 거시적인 공업화 경향에 대해 이야기 하는 대신 각 기업체와 공장의 구체적인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업이 언제 어느 지역에 어떤 투자를 해서 무엇을 생산했는가. 저자들은 본문에서 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분량을 1945년 이전 북한 지역의 일본 기업활동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보론으로 남한 지역의 군수공업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좋은 참고가 됩니다. 개별 기업의 활동을 대략적으로 서술해 놓았기 때문에 참고 자료로서 활용도가 높습니다.

1945~50년 시기에 대한 서술은 상대적으로 간략합니다. 저자들은 해방 직후 혼란기에 소련 점령군과 북한인들이 일본 기업을 인수해 산업을 복구하는 과정과 1950~51년 사이에 기초적인 군수공업이 형성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데 저자들은 북한이 주장하는 식민지 유산과의 단절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상당수의 기업들이 혼란기에 파괴를 면하고 그대로 북한의 공업 기반이 되었음을 개별 공장들의 사례를 들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들은 이렇게 북한에 승계된 공업기반이 북한의 전쟁 준비에 동원되는 과정으로 넘어갑니다.

저자들은 일본이 남긴 공업화의 유산이 북한에 승계되는 과정을 증명함으로서 북한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식민지 유산의 단절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식민지의 유산이 1953년 이후의 공업화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식민지 유산이 한국전쟁 이후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합니다. 부록에서 해방이전 일본이 건설한 공장들이 오늘날 북한의 어떤 공장으로 승계되었는가를 정리한 표를 실어 놓았지만 이것 이외에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서술이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식민지 공업이 해방 이후의 북한에 승계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복원해 낸 점은 주목할 만 합니다.

2009년 3월 11일 수요일

뒤늦게 도착한 책 한 권

작년 연말 환율이 잠시 낮아졌을 때 책을 몇 권 질렀었는데 그 중 마지막 한 권이 도착했습니다.


1943~44년 독일군이 동부전선 남부에서 수행한 퇴각전을 다룬 롤프 힌체(Rolf Hinze)의 저작입니다. 살인적인 유로 환율 때문에 독일에서 나온 책을 몇달간 구입하지 못 했는데 마침 적당한 가격에 나와있기에 바로 질렀습니다.;;;;

책 가격도 적당하고 덤으로 괜찮은 책갈피도 하나 넣어 주더군요. 마음에 들었습니다.


롤프 힌체는 2차대전 말기 독일군의 동부전선 방어전에 대한 저작들로 유명합니다. 이 양반이 저술한 동부전선의 작전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Osten 1944
바그라티온 작전 초기 중부집단군의 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루는 시기는 작전의 시작 부터 민스크가 함락되는 때 까지 입니다.

Das Ostfront-Drama 1944 : Rückzugskampfe Heeresgruppe Mitte
위의 책의 후속편 격입니다.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중부집단군의 퇴각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민스크가 함락된 직후 부터 1944년 가을 독일군이 감행한 국지적인 반격작전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East Front Drama 1944: The Withdrawal Battle of Army Group Center라는 제목으로 영어판도 출간되어 있습니다.

Rückzugskämpfe in der Ukraine, 1943-44
이 글에서 이야기 하는 책 입니다. 소련군의 드네프르 돌파 부터 크림 반도 탈환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Mit dem Mut der Verzweiflung: Das Schicksal der Heeresgruppen Nord- und Südukraine, Süd-/Ostmark 1944/1945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Das Ostfront Drama와 함께 44년 소련군의 대규모 하계공세에 붕괴되어 가는 동부전선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루고 있는 시간적인 범위는 넓은데 소련군의 하계공세로 북우크라이나 집단군과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이 붕괴되는 시기 부터 독일군이 1945년 봄 헝가리에서 감행한 반격이 실패하면서 본토로 향해 퇴각하는 시기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Letztes Aufgebot zur Verteidigung des Reichsgebiets: Kämpfe der Heeresgruppe Nordukraine/A/Mitte
서술의 밀도가 다섯 권 중 가장 떨어집니다. To the Bitter End: The Final Battles of Army Groups North Ukraine, A, Centre, Eastern Front, 1944-45라는 제목으로 영어판이 출간되어 있습니다. 1944~45년 겨울의 동부전선 중부, 즉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의 방어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저작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다룬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Das Ostfront Drama 두 권 입니다. 물론 롤프 힌체의 저작 답게 딱딱하고 밋밋한 문장으로 사건의 진행을 서술하고 있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 자체가 매우 극적이기 때문에 재미있습니다. 두 권의 책은 바그라티온 작전이 시작된 이후 초가을 무렵 폴란드에서 전선이 안정되기 까지를 다루고 있지만 서술의 밀도가 대단히 치밀합니다. 특히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는 소련군의 공세 시작부터 민스크가 함락되는 짧은 시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소련군의 대공세를 맞은 독일 중부집단군 예하 부대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어지간한 소설 못지 않은 긴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에 도착한 Rückzugskämpfe in der Ukraine도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기를 다루고 있으니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9년 3월 8일 일요일

할로스캔이 맛이 갔습니다;;;;

자주 들러주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구글 블로거가 트랙백 기능을 제공하지 않아서 할로스캔을 달아놓고 쓰고 있습니다. 한글 지원기능이 개차반이긴 해도 트랙백은 할 수 있으니 나름 만족하고 살았습니다만...

그런데 요즘 할로스캔이 말썽입니다. 오늘도 댓글을 달았는데 제가 달아 놓은 댓글이 먼저 올라온 댓글의 앞에 달리는 겁니다;;;;

물론 달아놓은 댓글이 날아가는 것 같은 심각한 문제는 아닌데 좀 황당하긴 합니다;;;; 사용한지 한참 지나서 할로스캔을 안 쓸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래 저래 난감합니다.

100만대의 비행기

1차대전에서 유례가 없던 대규모 소모전을 경험한 뒤 각국의 군인들은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산업동원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공업력으로 고생을 한 러시아의 후계자, 소련은 그런 경향이 매우 강했습니다.

군사사가 새뮤얼슨(Lennart Samuelson)에 따르면 투하체프스키(Михаил Н. Тухачевский)는 1930년 1월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이었던 보로실로프(Климент Е. Ворошилов)에게 보낸 전시동원계획에 대한 보고서에서 제1차 5개년 계획이 목표치를 달성할 경우 소련의 전시 항공기 생산능력은 연간 122,500대에 달할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투하체프스키의 주장은 항공기 생산능력을 자동차 생산능력의 30%로 잡은 단순한 추정에 근거한 것 이었습니다.1) 이러한 투하체프스키의 주장에 대해 스탈린은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양키들 중에는 투하체프스키 보다 더 거창한 생각을 하는 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뒤 육해군탄약위원회(Army and Navy Munitions Board) 위원장이 된 에버스타트(Ferdinand Eberstadt)였습니다.

에버스타트는 비상 조직에서의 보좌역이라는 제한적인 목적을 가지고 워싱턴으로 온 것이었지만 전시동원의 진행은 곧 그의 코포라티즘적인 성향을 자극했다. 그는 코포라티즘에 대해 포레스탈(James Forrestal)과 토론하곤 했다. 포레스탈은 에버스타트의 견해를 받아들였지만 그 자신은 명확한 코포라티즘적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초기부터 부분적인 전시동원을 통해 미국의 생산력을 재조직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에버스타트는 전시동원체제를 통해 노동력과 자본, 정부조직과 산업계, 납세자와 관료기구들을 국가적 노력에 통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버스타트는 정부의 단호한 결단과 잘 조직된 계획만 있다면 미국은 1년에 50만대에서 100만대의 군용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포레스탈에게 이러한 생산을 통해 ‘적들에게 극도의 경각심을 주고’ 대공황으로 산산조각난 미국의 자신감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Jeffery M. Dorwart, Eberstadt and Forrestal : A National Security Partnership 1909~1949,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1, pp.39~40

아마 스탈린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미친놈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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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ennart Samuelson, Mikhail Tukhachevsky and War-Economic Planning : Reconsiderations on the Pre-war Soviet Military Build-Up,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4(Dec 1996), pp.824~825

2009년 3월 5일 목요일

굳건한 한미공조체제

오바마 "지금이 미국 주식 살때" 발언후 증시 하락 '망신'

굳건한 한미공조체제가 미국 국내정치에서도 작동한다는 점을 확인하고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God Bless America!

2009년 3월 3일 화요일

게르니카 폭격 - 독일 측의 관점

오래된 떡밥이라 많은 분이 아시는 내용입니다.

게르니카(Guernica)에 대한 콘도르군단의 공습은 민간인을 상대로 한 테러 폭격으로 파시즘의 잔악상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독일 자료를 활용한 연구들이 나오기 전 까지는 민간인에 대한 테러 폭격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아래에 인용한 ‘타임라이프 2차대전사’의 기술은 그런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월에 접어들자 내셔널리스트군은 북부로 이동하여 독일군의 위력을 빌린 폭격에 의해 이윽고 이목을 끌게 되는 작전을 개시했다. 콘도르병단은 소이탄과 고성능폭탄을 병용하는 새 전술의 연습지로서 바스크지방을 선정했다. 맨 먼저 폭격을 당한 곳은 빌바오와 그에 버금가는 공업중심지 두랑고였다.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폭격의 표적이 되고 이 내전 전체를 상징하는 도시가 된 것은 그 근처의 게르니카였다.

빌바오의 동쪽 30km에 위치하는 인구 약 7,000명의 게르니카는 가도와 철도의 분기점이었다. 도시에 있든 그 밖의 군사목표는 공화국군이 철퇴할 때 필요한 교량과 두개의 조그만 군수공장 뿐이었다.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두 사람의 수녀가 경보의 종을 울리며 “비행기, 비행기”하고 외쳤다. 상공에 날아온 것은 하인켈 폭격기 한 편대였다. 그 가운데 1대가 몇 개인가의 250킬로 폭탄을 역전 광장에 모여있는 군중 속에 투하했다. “여자와 어린이의 일단이 하늘 높이 흩날렸다. 그들의 몸은 분쇄되고 발, 팔, 머리 따위가 산산조각이 난 채 곳곳에 흩어졌다.” 생존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도시를 습격한 8회를 넘는 비행기의 파상공격이 밤까지 계속되었다. 약 1600명이 살해되고 900명이 부상했다. 독일의 폭격기는 군수공장을 폭격하지 못했다. 그들의 폭격장치는 매우 원시적이었으므로 정확히 목표를 포착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외 제국의 공화국 지지자는 비무장 시민 대량살륙의 소식에 충격을 받고 무차별폭격을 비난했다.

로버트 T. 엘슨(Robert T. Elson), 『라이프 2차 세계대전 : 대전의 서곡』,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1, 172쪽

그러나 폭격을 주도한 콘도르 군단의 보고서 등 독일 사료를 활용한 연구들이 출간 되면서게르니카 폭격은 민간인을 목표로 한 테러폭격이 아니라 통상적인 전술폭격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게르니카에 대한 폭격을 지휘한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이 게르니카를 폭격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르니카를 폭격해 이곳의 도로망과 철도를 마비시킨다면 바스크군이 빌바오로 철수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습니다. 게르니카 일대에 전개한 바스크군의 병력은 23개 대대에 달했고 빌바오로 통하는 주요 도로 하나가 게르니카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만약 게르니카에 주둔한 바스크군이 제때 철수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민군이 신속히 진격한다면 바스크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당시 국민군 측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게르니카에는 바스크군의 제 18 로얄라(Loyala) 대대와 사세타(Saseta)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두 대대가 게르니카에서 저항을 한다면 국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주력 부대가 게르니카를 따라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것이었습니다.

게르니카 일대에 대한 공습은 4월 25일 시작됐습니다. 리히트호펜은 전투기 부대에 빌바오와 게르니카를 잇는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바스크군에 공습을 가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한편 국민군이 게르니카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게르니카의 교통망에 타격을 가해 바스크군의 퇴각을 방해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1937년 4월 26일에 감행된 게르니카 폭격은 전술적으로 기대했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콘도르군단의 폭격기들은 주요 목표 중 하나였던 렌타리아(Rentaria) 다리를 파괴하지 못했으며 도로 및 철도에 대한 폭격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 작전에 투입된 폭격기 중 많은 수를 차지한 Ju-52는 기본적으로 수송기 였고 초보적인 조준기를 장비했기 때문에 폭격의 정확도가 매우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하루 정도 게르니카의 도로망은 마비되었으며 리히트호펜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리히트호펜은 공습이 끝난 뒤 스페인 국민군의 느린 진격속도 때문에 게르니카 공습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바스크군에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고 불쾌해 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독일 공군 지휘관들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폭격이 정치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독일공군 장교들은 빌바오나 바르셀로나에 대한 국민군과 이탈리아 공군의 테러 폭격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특히 국민군의 경우 자국의 국민과 산업기반을 파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문제는 게르니카 폭격의 후폭풍 이었습니다. 바스크 자치정부는 게르니카 폭격으로 1,654명이 사망하고 889명이 부상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민간인에 대한 폭격이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온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국민군이나 이탈리아군에 의한 테러 폭격이 아니라 테러 폭격에 관심 없었던 독일 콘도르군단의 전술 폭격이 테러 폭격의 대명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측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게르니카 폭격으로 영국의 전략폭격 지지자들은 공군의 위력과 민간인에 대한 테러폭격의 효과를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최근의 연구들은 게르니카 공습으로 250명에서 3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희생된 민간인들은 콘도르군단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군사목표’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리히트호펜과 콘도르군단에게 면죄부가 주어질 수는 없습니다. 리히트호펜의 전기를 쓴 코럼(James S. Corum)에 따르면 리히트호펜은 냉정한 군인으로 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발생할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게르니카가 함락된 뒤 게르니카를 방문한 리히트호펜은 폭격의 성과에 만족하면서 특히 250kg 폭탄의 위력이 입증된 것에 주목했다고 합니다. 물론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하지 않았다는 군요.


참고문헌
로버트 T. 엘슨(Robert T. Elson), 『라이프 2차 세계대전 : 대전의 서곡』,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1)
James S. Corum, The Luftwaffe :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7)
James S. Corum, Wolfram von Richthofen : Master of the German Air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타임라프 2차대전사에 대한 잡상

게르니카에 대한 글을 한 편 쓰려고 오랜만에 타임라이프 2차대전사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읽어서 그런지 새로운 느낌이 드는군요. 2차대전과 관련해서 관심있는 책들을 조금씩 사서 읽다 보니 타임라이프 2차대전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이 전집은 창고에 보관해 두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 책을 다시 읽을 일은 없을 듯 해서 적당한 시기에 처분을 할 까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다시 읽어 보니 당분간은 계속 가지고 있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개론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사건의 맥락을 잘 잡아내고 있고 작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과 겉돌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개설서로서 아주 모범적인 글쓰기 방식인 것 같습니다. 내용적으로는 새로울 것이 없더라도 글쓰는 방식을 배우는데 있어서는 여전히 배울 만한 점이 많더군요.

역시 책은 여러 번 읽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관심도 두지 않고 있던 책에서 신선한 자극을 받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