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특수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서유럽과는 다른 독자적인 군사교리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1920년대에 '작전술'의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도 기동전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온 전통적인 군사학의 바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련은 1920년대부터 '작전술'에 바탕을 둔 기계화 부대가 중심이 된 기동전 교리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아직 새로운 이론을 실험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지 못했습니다. 소련의 1920년대는 혁명과 내전의 피해를 막 복구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공업화의 수준은 서유럽에 비하면 여전히 보잘 것 없었으며 군대는 1차대전 당시와 별 다를바 없는 장비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소련군대는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군대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스탈린이 야심차게 추진한 제1차 5개년 계획을 기점으로 소련 군사이론가들의 '이론'은 드디어 '교리'로 발전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1차5개년 계획시기의 전차 생산과 초기 기계화부대 창설에 대해 짧게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론에서 교리로
1920년대 후반기 기계화부대의 창설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첫번째는 기동전에 대한 이론들이 교리로서 실체화 되기 시작했다는 것 입니다.
러시아 군사이론가들은 1차대전과 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 스베친(Александр А. Свечин)과 투하체프스키(Михаи́л Н. Тухаче́вский)의 논쟁을 시작으로 샤포쉬니코프(Борис М. Шапошников), 트리안다필로프(Владимир К. Триандафиллов) 등의 군사이론가들은 기동전에 대한 이론을 활발하게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논쟁을 주도한 두 사람 중 스베친의 경우 1차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기소모전에 의한 점진적 승리를 제창한 반면 투하체프스키는 장기소모전이 1차대전 당시 독일의 패배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방대한 산업력을 동원하기 이전에 대규모의 강력한 공격으로 신속한 승리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Harrison, 2001, p.129~131] 하지만 많은 소련의 군사 이론가들은 미래의 전쟁은 기동 위주의 전투가 중심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소모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스베친 조차 미래의 전쟁에서는 1914~15년 시기의 동부전선과 마찬가지로 제한적인 기동전을 예측했습니다.[Harrison, 2001, p.135]
이 시기 소련의 군사이론가들은 활발한 논쟁을 통해 '작전술'의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제정러시아 말기부터 전략과 전술의 중간단계로서 작전이라는 개념이 조금씩 논의되고 있었으며 여기에 1차대전과 내전의 경험이 추가되면서 이론적인 정립이 가속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작전술이라는 단어는 1923~24년 붉은군대의 장군참모대학(뒷날의 프룬제 군사대학) 강의에서 스베친이 처음으로 명확한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작전술이라는 단어와 개념은 붉은군대 장교단 사이에 급속히 퍼져나갔습니다. 불과 5년도 되지 않은 1928년에 '작전술'이라는 용어는 공식적인 군사사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Harrison, 2001, p.140~141] 작전술의 개념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트리안다필로프 등의 군사이론가들은 작전술의 개념을 보다 정교하게 가다듬고 구체화 했습니다.
소련군은 작전술 개념의 도입 등 군사사상에 있어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전차의 사용에 대해서는 20년대 후반까지도 보수적이었습니다. 1927년 까지도 전차는 참호전 상황에서 돌파를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었습니다. 1928년에 전차생산을 증대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이것은 서방과의 전쟁에 대한 공포와 서방의 전차 보유대수에 대한 과장된 정보 등의 영향이었다고 합니다.[Habeck, 2003 p.88]
새로운 군사이론에 맞는 전차의 활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투하체프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 등의 군사이론가 들이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1928년에 전차의 대규모 생산을 주장하기는 했으나 이 시점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운용 방안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투하체프스키가 전차의 활용에 대해 구체적인 구상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보로실로프(Климент Е. Ворошилов)와의 논쟁으로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밀려난 이후였습니다. 투하체프스키가 본격적으로 전차에 관심을 가지는 동안 트리안다필로프도 전차의 활용방안을 연구했습니다. 트리안다필로프는 1920년대의 연구를 통해 적의 방어종심을 돌파해 포위하는 것 이외에 돌파구를 봉쇄하기 위해 반격해 올 적의 예비대의 격파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Harrison, 2001, p.150] 전차는 이 두가지 임무를 수행하는데 적합한 무기체계였습니다.
1928년도 붉은군대야전규범(Полевой Устав Краснои Армий), PU-28은 전차의 활용한 돌파와 포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PU-28은 전차의 지원을 받는 두 개의 제대 중 하나는 적 방어선을 돌파해 후방의 적 포병을 격멸하거나 기병의 지원을 받을 경우 적 후방이나 측방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고 두 번째 제대는 보병의 지원을 받아 적 주저항선의 방어 거점을 격파하도록 규정했습니다.[Habeck, 2003 p.95~96]
PU-28의 개정판인 1929년도 야전규범, PU-29는 전차, 보병, 포병 부대의 연합작전에 기반한 현대적 기동전을 구체화 했습니다. PU-29는 투하체프스키, 트리안다필로프 등의 혁신적인 군사이론가들이 서술했는데 특히 트리안다필로프는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해 전차와 차량화부대를 이용, 공세 초기에 적 방어선의 방어종심을 일거에 돌파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PU-29는 PU-28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전차 부대의 역할을 더 이상 보병지원의 단거리 돌파에 묶어 두지 않았습니다. 전차부대는 기병과 함께 기동력을 발휘해 적을 포위하거나 제병 합동작전을 통해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규범은 야전지휘관들이 전차부대를 보병지원전차와 장거리전차로 구분하고 이 중 장거리전차에 적 포병의 격파와 적 후방으로의 돌파임무를 부여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대규모 전차부대의 동원이 가능할 경우에는 포병의 지원이 없거나 최소화된 상태에서도 돌파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한 점에서 전차의 역할을 얼마나 중요하게 규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Erickson, 2001, p.307]
이 시기 소련의 군사이론가들은 전차를 기능 별로 구분했는데 그 주된 원인은 소련의 낮은 기술수준에 있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소련의 기술과 산업생산능력으로는 범용성이 높은 전차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기능별로 특화된 전차를 생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Habeck, 2003 p.129]
2. 외국 전차 기술의 도입
PU-29를 통해 기초적이긴 하지만 독립적인 대규모 전차부대를 위한 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이론에 적합한 새로운 전차가 필요했습니다. 이때까지 소련 전차부대의 중핵을 구성하고 있던 MS-1 전차는 기본적으로 르노 FT-17의 개량형으로 보병지원 전차에 불과했기 때문에 PU-29에서 규정하고 있는 장거리전차의 역할을 수행할 전차가 필요했습니다.
1920년 후반의 시점에서도 소련은 아직 독자적으로 신형 전차를 개발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신형전차 개발에 외국의 전차를 참고해야 했습니다. 국방인민위원장 보로실로프는 1929년 11월에 외국의 장갑차량, 특히 전차를 구매할 위원단을 조직하도록 하고 그 위원단의 단장에는 군사과학지도국의 할렙스키(Иннокентий А. Халепский)를 임명했습니다. 할렙스키의 위원단은 1929년 12월부터 4개월간 영국,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 전차의 구입을 위한 협상을 전개했습니다.
할렙스키 위원단은 1930년 1월 독일을 방문해 비밀리에 전차 개발을 하고 있던 독일 기업들과 접촉했습니다. 할렙스키는 독일측과 신형전차 개발을 위한 기술 협력 등을 논의했습니다.
독일 다음의 방문지인 영국에서는 좋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위원단은 영국에서 빅커스-암스트롱(Vickers-Armstrong Ltd)으로부터 카든-로이드 소형전차(Tankettes) 20대, 6톤 경전차 15대, Mark-II 중형전차 15대를 구입했습니다. [Habeck, 2003 p.130] 영국에서 구입한 전차들은 1930년 말부터 1931년 초 까지 순차적으로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영국을 시찰한 할렙스키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영국이 차량화에 대해서 가장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Hofmann, 1996, p.288]
위원단의 미국 방문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습니다. 할렙스키는 이미 1928년 10월 미국을 처음 방문한 바 있었고 이때 처음으로 미육군이 추진하고 있던 커닝햄(Cunningham) T1을 접했습니다. 할렙스키는 이 두 번째 미국방문에서 커닝햄 T1을 구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소련 정부는 할렙스키 위원단의 미국 방문 이전에도 커닝햄 T1의 수입을 신청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소련은 아직 미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커닝햄사에서는 무기의 해외 수출을 관리하는 전쟁부(War Department)에 이 문제를 알렸습니다. 1930년 3월 미국에 도착한 할렙스키는 원래 계획대로 T1을 구입하려 했으나 전쟁부가 외교문제를 들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또 T1의 성능이 당초 기대를 밑돌아 T1의 구입을 취소했습니다.
커닝햄 T1 대신 칼렙스키의 관심을 끈 것은 유명한 크리스티(John Walter Christie)의 경전차였습니다. 칼렙스키는 미국의 군사잡지에서 크리스티가 개발한 전차 차체에 대한 기사를 읽고 크리스티와 접촉하기로 결정합니다. 칼렙스키가 보기에 크리스티의 M1928은 궤도주행방식과 바퀴주행방식이 가능했기 때문에 소련의 군사이론가들이 고민하던 '작전 기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었습니다. 1930년 4월 29일 크리스티는 소련에 M1928의 개량형인 M1930을 판매한다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할렙스키는 귀국한 뒤 크리스티 전차를 바탕으로 한 고속전차(BT, Быстроходный Танк)의 개발과 대량생산을 서두를 것을 주장했습니다. 폴란드도 크리스티 전차를 구매했기 때문에 고속전차의 양산이 폴란드보다 뒤쳐진다면 소련은 폴란드군에게 '작전 기동성'의 우위를 상실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할렙스키는 1931년 말 까지는 최소한 100대의 고속전차를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미국에서 구입한 크리스티 전차가 1930년 9월에는 소련에 인도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1931년 5월까지는 분석과 시험을 마치고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Hofmann, 1996, p.291] 장차 크리스티 전차와 함께 소련군 기갑부대의 주축이 될 빅커스의 6톤 경전차의 경우는 1931년 8월까지 분석과 시험을 마치고 대량생산에 들어가는 것이 할렙스키의 계획이었습니다.[Stoecker, 1998]
크리스티 M1930을 바탕으로 한 고속전차의 개발은 급속히 진행됐습니다. 할렙스키는 1931년 6월 3일 혁명군사평의회(RVS, Революционными Военный Совет)에 출두해 고속전차 개발 계획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할렙스키는 M1930을 바탕으로 14톤급에 37mm포(초기안은 76mm포)와 2정의 기관총을 장비하고 바퀴 상태로는 시속 70km, 궤도 상태로는 시속 40km의 성능을 가진 전차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여기에 스탈린의 직접적인 관심도 고속전차의 개발을 가속화 했습니다. 1931년 11월 할렙스키가 병에 걸려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스탈린은 직접 할렙스키를 불러 크리스티 전차에 대해 질문했다고 합니다.[Habeck, 2003 p.152] 스탈린의 관심 덕분인지 고속전차 생산을 담당한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11월에 원자재, 운송수단, 노동자에 대한 식량배급 등에 있어 최우선권을 부여 받았습니다.[Stone, 2000, p.189]
3. 1차5개년 계획과 전차 생산
기동전에 필요한 이론과 교리의 정립, 그리고 그에 필요한 전차의 확보가 끝났지만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전차의 대량 생산에 필요한 산업력의 확보였습니다. 소련이 본격적으로 전차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27년 4월 MS-1가 처음이었습니다. 1927~28년 사이에 생산된 MS-1은 25대에 불과했습니다. 붉은군대 혁명군사평의회는 1928년 3월에 1933년까지 MS-1을 1,600대 생산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1928년 당시 소련이 보유한 전차는 모두 합쳐봐야 92대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엄청난 것 이었습니다.[Harrison, 2001, p.173] 그리고 실제로도 이 야심찬 계획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28년에 완성된 군사부문 5개년 생산 계획에서는 전차 생산량을 1929/30년에는 340대로 잡고 이것을 1933년까지 연간 7,000대 수준으로 증대시킨다는 목표를 잡았습니다.[Simonov, 2000, p.42] 5년만에 전차 생산능력을 20배 늘린다는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때마침 붉은군대의 무장계획을 강력하게 밀고 나갈 강인한 추진력을 갖춘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스탈린, 보로실로프와의 의견 불일치 때문에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던 투하체프스키가 1931년 모스크바로 귀환한 것 이었습니다.[Harrison, 2001, p.130~131] 투하체프스키는 모스크바로 귀환해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과 병기국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 최종 결정권자인 스탈린도 전차 생산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공업화가 진행중인 소련에게 현대적 무기체계인 전차의 생산을 단기간에 급증시키는 것이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1930년 시점에서 소련의 공업력으로는 전차의 장갑에 필요한 고급 철판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었다는 점 입니다. 낮은 기술수준은 여러 방면에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모토빌리힌스키 기계공장이 생산한 37mm전차포는 100% 모두 생산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해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Stone, 2000, p.163] 붉은군대의 방대한 전차부대 증강과 전시동원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실한 공업생산능력과 기술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1931년 7월 말 중공업, 특히 제철업의 신속한 확장을 요구했습니다.
고속전차의 생산은 할렙스키가 제시한 37mm포탑의 생산 지연 때문에 당초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할렙스키와 고속전차 생산계획을 검토한 뒤 고속전차의 시제품을 생산할 공장을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 자동차 공장에서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으로 변경하고 1931년 10월 15일까지 3대의 시제품을 생산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에서 시제품이 완성되면 양산을 개시해 1932년 말 까지 고속전차 2,000대와 T-26 1,600대를 생산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리코프 기관차공장은 1931년 11월 1일에야 고속전차 시제품 3대를 완성했으며 1932년 11월까지 당초 계획에 크게 미달한 170대의 고속전차가 붉은군대에 인도되는 것에 그쳤습니다.[Hofmann, 1996, p.298~299]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군대 수뇌부는 전차 생산계획을 더욱 확대했으며 투하체프스키가 제시한 1932년도 생산계획은 T-26 12,000대와 소형전차 16,000대였습니다.[Habeck, 2003 p.149]
위에서 언급했듯 1932년의 전차 생산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신형 고속전차인 BT-5 또한 45mm전차포의 생산 문제로 지연되고 있었고 1932년 12월까지 생산된 신형전차는 603대의 고속전차와 1410대의 T-26에 불과했습니다. 이중 고속전차 89대는 전차포의 부족으로 포탑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포탑이 없거나 기관총만 장비한 BT-2를 1933년까지 모두 37mm포탑으로 교체한 뒤 45mm전차포를 탑재한 BT-5의 생산으로 넘어간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T-26, BT의 양산과 함께 중형전차와 중전차 개발도 추진되었습니다. 영국에서 구입한 빅커스 Mark II를 기초로 한 중형전차 T-28과 중전차 T-35가 혁명군사평의회로부터 생산 승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중형전차와 중전차의 개발도 앞서 진행된 경전차들의 생산과 유사한 문제를 겪었습니다. T-28의 경우 구동계통의 문제와 경전차들과 마찬가지로 포탑 생산 부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전차 T-35또한 구동계통 문제로 시제품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1931~1933년 사이에 영국과 미국에서 기술을 도입한 신형 전차 중 제대로 생산된 것은 T-27소형전차 정도였습니다. 1931년의 전차 생산은 2,000대에 그쳤습니다.
소련의 전체적인 산업력의 부족은 전차생산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속전차 생산을 담당한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BT-5의 초기 생산형에 대해 질 낮은 베어링을 공급받았기 때문에 45mm포탑을 탑재하면 무리가 갔습니다.[Hofmann, 1996, p.304] 1931년의 전차포 생산계획은 대실패로 끝났습니다. 특히 BT-5에 탑재할 신형 45mm 전차포는 1931년에 단 한문도 도입되지 않았습니다.[Stone, 2000, p.169]
1931년의 부실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소련 지도부는 전차생산 증대에 큰 희망을 걸었습니다. 스탈린은 1932년 1월 10일 국방인민위원회 회의에서 고속전차 증산을 위해 일반 민수공장들을 전차생산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강구할 것을 제안하고 전차 생산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따라 1932년도 전차 생산계획은 T-27 5,000대, T-26 3,000대, BT전차 2,000대 등 총 1만대로 결정되었습니다.[Stone, 2000, p. 193] 1932년 전차생산계획에 따라 전차를 생산할 공업기지의 대규모 확장이 계속됐습니다. 5월에는 스탈린그라드에 T-26 1만2천대와 6천대분의 예비부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1932년까지 건설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생산 증대 계획은 차질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산 목표를 맞추기 위해 자동차 공장을 비롯한 민수 공장들을 대거 전차 생산에 돌렸지만 생산에 혼란만 가중되었을 뿐 이었습니다. 생산이 비교적 단순한 T-26 조차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었고 구조가 더 복잡한 BT 전차는 문제가 더 심각했습니다. 주 생산공장인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숙련된 기술자가 부족했고 포탑, 엔진, 구동 계통 등을 생산할 일곱개의 공장들도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체 개발한 엔진을 탑재하려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에 생산 계획을 맞추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급히 리버티 엔진을 수입해야 했고 엔진 문제로 생산은 더 지연되었습니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생산이 성공적이었던 T-27 조차 갑작스러운 생산계획 상향조정으로 문제를 겪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932년도 전차생산계획도 이전 연도의 생산계획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했습니다. 1932년 10월 1일까지 5,150대의 전차를 생산하고 이후 월간 생산량을 1,365대로 끌어올려 1만대 생산을 달성한다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지만 실제 10월 1일까지의 생산량은 1,365대에 월간 생산량은 480대를 달성하는데 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1932년의 전차 생산은 T-27 2,100대, T-26 1,600대, BT전차 600대에 그쳤습니다.[Stone, 2000, p.198~201]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45mm 전차포의 생산 차질로 T-26과 BT 전차 중 800대는 포탑이 없는 상태로 계획된 숫자만 채우기 위해서 완성된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1932년 생산계획이 실패한 결과 1933년도 전차 생산계획은 7,000대로 하향조정 되었습니다. 1933년도 생산계획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세 종류의 신형전차, T-37 수륙양용전차와 T-28 중형전차, T-35 중전차가 포함되었습니다. 기존의 전차 생산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채 보완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술적으로 복잡한 신형전차의 생산이 추진된 것 입니다.
4. 기계화군단의 창설
비록 5개년계획 기간 중 전차 생산 계획은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한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소련의 전차 생산능력이 비약적으로 증대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였습니다. 이제 소련은 대규모 기계화부대를 운용할 수 있는 전술교리, 교리를 기술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전차, 그리고 그 전차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산업기반을 모두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기계화부대가 만들어질 차례였습니다.
신형전차의 도입은 소련 이론가들이 정립한 전차 운용 교리를 현실화 시킬 수 있게 했습니다. T26은 보병지원전차로서, BT 계열 전차들은 고속 전차로서 독립된 기계화부대의 주력 장비가 되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와 할렙스키는 신형전차들의 전술임무를 다음과 같이 할당했습니다. T27소형전차와 T37수륙양용전차는 정찰 임무를, T28 중형전차와 T35중전차는 요새화된 적 방어선의 돌파를, 그리고 전술적 돌파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BT전차와 T26전차가 작전단계의 종심돌파를 수행하는 것 이었습니다.
최초의 기계화여단은 1929년에 편성된 임시기계화연대를 확대 개편해 1930년 5월 창설되었습니다. 이때 창설된 임시 기계화여단은 66대의 전차와 340대의 각종 차량, 3천명의 병력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임시 기계화여단은 1930년 가을에는 정식으로 제 1기계화여단(Мехакнизированная Бригада)이 되었고 예하에 1개 전차연대, 1개 보병대대, 1개 포대와 기타 지원부대를 두었습니다. 장비는 총 60대의 전차와 12대의 장갑차, 350대의 각종 차량이었습니다. 최초의 기계화여단은 초기 훈련 단계에서 많은 문제점을 보였습니다. 가을에 실시된 한 훈련에서 기계화여단은 기병사단을 추격해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는데 기동 도중 연료를 모두 소비해 기병사단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외에 전차연대가 장비한 MS-1 전차의 잦은 고장도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MS-1의 느린 속력으로는 PU-29에 명시된 적 방어종심의 신속한 돌파와 적 포병의 격파가 어려웠습니다.[Habeck, 2003 p.133~134] 새로운 교리에 맞는 새로운 전차가 필요했고 그것은 이제 막 대규모로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 3월, 할렙스키는 붉은군대 총참모부에 전차군단(Танковый Корпус)을 창설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당시 총참모장이던 예고로프(Александр И. Егоров)와 투하체프스키는 할렙스키의 건의안에 찬성했습니다. 이에 따라 기계화군단을 포함한 대규모의 기계화부대 창설이 시작되었습니다. 독립된 기계화군단의 창설 외에도 최고사령부 예비전차여단(TRGK)을 별도로 편성하고, 기병사단 예하에는 기계화연대를, 소총병사단 예하에는 전차대대를 편성하도록 되었습니다.
최초의 기계화군단은 11소총병사단을 개편한 11기계화군단과 45소총병사단을 개편한 45기계화군단이었습니다. 각 기계화군단은 2개 기계화여단과 1개 소총병여단, 기타 직할대로 편성되었습니다. 두 군단의 예하 여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1기계화군단은 31기계화여단(T-26), 32기계화여단(BT전차)과 33소총-기관총여단(Стрелково пулеметная Бригада), 45기계화군단은 133기계화여단(T-26), 134기계화여단(BT전차), 135소총-기관총여단이었습니다.[Дриг, 2005, с.9] 편성 초기 기계화군단의 기갑장비는 전차 500대와 장갑차 200대라는 당시까지 유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Habeck, 2003, p.168] 1934년 1월까지 붉은군대의 기갑전력은 약 7,900대 수준으로 증강됐습니다. 기계화군단의 추가 창설은 보로실로프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그 밖의 기계화부대 창설은 계속되어 1936년까지 6개의 최고사령부 예비전차여단, 15개의 기병사단 예하 기계화연대, 83개의 소총병사단 예하 전차대대 및 전차중대가 창설되었습니다.[Harrison, 2001, p.176~177]
이것은 당초 투하체프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와 같은 군사이론가들이 기대한 목표에는 미달하는 것 이었지만 엄청난 성과였습니다. 할렙스키 위원단이 외국의 전차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순방길에 오른지 5년 만에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기갑전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군사 및 산업적으로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이것은 분명히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문헌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Third Edition), Frank Cass, 2001
Mary R. Habeck, Storm of Steel :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Richard Harrison, The Russian Way of War : Operational Art, 1904-1940,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1
George F. Hofmann, ‘Doctrine, Tank Technology, and Execution : I. A. Khalepskii and the Red Army’s Fulfillment of Deep Offensive Operation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2(June 1996)
Nikolai S. Simonov, ‘The War Scare of 1927 and the birth of the defense-industry complex’, The Soviet Defense-Industry Complex from Stalin to Khrushchev, St.Martins Press, 2000
Sally W. Stoecker, Forging Stalins Army : Marshal Tukhachevsky and the Politics of Military Innovation, Westwiew Press, 1998
David Stone, Hammer and Rifle : The Militarization of the Soviet Union 1926-1933,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Евгений Дриг, Механизированные Корпуса РККА В Бою, Иэдателстьство 2005
2009년 3월 24일 화요일
2009년 3월 8일 일요일
100만대의 비행기
1차대전에서 유례가 없던 대규모 소모전을 경험한 뒤 각국의 군인들은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산업동원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공업력으로 고생을 한 러시아의 후계자, 소련은 그런 경향이 매우 강했습니다.
군사사가 새뮤얼슨(Lennart Samuelson)에 따르면 투하체프스키(Михаил Н. Тухачевский)는 1930년 1월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이었던 보로실로프(Климент Е. Ворошилов)에게 보낸 전시동원계획에 대한 보고서에서 제1차 5개년 계획이 목표치를 달성할 경우 소련의 전시 항공기 생산능력은 연간 122,500대에 달할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투하체프스키의 주장은 항공기 생산능력을 자동차 생산능력의 30%로 잡은 단순한 추정에 근거한 것 이었습니다.1) 이러한 투하체프스키의 주장에 대해 스탈린은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양키들 중에는 투하체프스키 보다 더 거창한 생각을 하는 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뒤 육해군탄약위원회(Army and Navy Munitions Board) 위원장이 된 에버스타트(Ferdinand Eberstadt)였습니다.
아마 스탈린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미친놈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주
1) Lennart Samuelson, Mikhail Tukhachevsky and War-Economic Planning : Reconsiderations on the Pre-war Soviet Military Build-Up,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4(Dec 1996), pp.824~825
군사사가 새뮤얼슨(Lennart Samuelson)에 따르면 투하체프스키(Михаил Н. Тухачевский)는 1930년 1월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이었던 보로실로프(Климент Е. Ворошилов)에게 보낸 전시동원계획에 대한 보고서에서 제1차 5개년 계획이 목표치를 달성할 경우 소련의 전시 항공기 생산능력은 연간 122,500대에 달할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투하체프스키의 주장은 항공기 생산능력을 자동차 생산능력의 30%로 잡은 단순한 추정에 근거한 것 이었습니다.1) 이러한 투하체프스키의 주장에 대해 스탈린은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양키들 중에는 투하체프스키 보다 더 거창한 생각을 하는 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뒤 육해군탄약위원회(Army and Navy Munitions Board) 위원장이 된 에버스타트(Ferdinand Eberstadt)였습니다.
에버스타트는 비상 조직에서의 보좌역이라는 제한적인 목적을 가지고 워싱턴으로 온 것이었지만 전시동원의 진행은 곧 그의 코포라티즘적인 성향을 자극했다. 그는 코포라티즘에 대해 포레스탈(James Forrestal)과 토론하곤 했다. 포레스탈은 에버스타트의 견해를 받아들였지만 그 자신은 명확한 코포라티즘적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초기부터 부분적인 전시동원을 통해 미국의 생산력을 재조직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에버스타트는 전시동원체제를 통해 노동력과 자본, 정부조직과 산업계, 납세자와 관료기구들을 국가적 노력에 통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버스타트는 정부의 단호한 결단과 잘 조직된 계획만 있다면 미국은 1년에 50만대에서 100만대의 군용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포레스탈에게 이러한 생산을 통해 ‘적들에게 극도의 경각심을 주고’ 대공황으로 산산조각난 미국의 자신감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Jeffery M. Dorwart, Eberstadt and Forrestal : A National Security Partnership 1909~1949,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1, pp.39~40
아마 스탈린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미친놈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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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Lennart Samuelson, Mikhail Tukhachevsky and War-Economic Planning : Reconsiderations on the Pre-war Soviet Military Build-Up,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4(Dec 1996), pp.824~825
2008년 12월 18일 목요일
러시아군의 군수물자 부족문제 : 탄약을 중심으로, 1914~1917
1차대전 발발 직전 러시아는 거의 대부분의 군수물자를 국영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산업화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간공업이 육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대부분의 생산 부담은 국영공장이 짊어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런 체제 아래서는 탄약 수요가 급증할 경우 신속히 대처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그대로 현실이 됩니다.
1890년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해외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러시아의 뒤떨어진 공업능력은 소총 조차도 충분히 조달할 수 없었는데 단적인 예로 모신-나강 소총이 처음 채용되었을 때 러시아 정부는 육군의 소요량을 신속히 조달하기 위해서 프랑스와 벨기에에 소총 생산을 발주했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신속히 모신-나강 소총으로 기본화기를 교체했고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예비사단 까지도 신형소총을 지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필요한 소총을 획득한 뒤에는 외국으로 부터의 주문을 중단하고 국영조병창을 통해서만 소총을 생산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충용 소총을 생산하는데 그쳤고 전쟁 발발시 수요량을 충족시킬 능력은 없었습니다. 또 러시아의 TNT 생산은 러시아에 설립된 독일 회사의 톨루엔(toluene)에 크게 의존했는데 독일 기업들은 톨루엔 생산에 필요한 석유제품을 독일에서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독일과 전쟁이 벌어진다면 러시아의 폭약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것은 뻔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자체적인 톨루엔 생산능력 확충보다는 당장 편한 독일 기업으로 부터의 도입에 계속 의존했습니다.
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정부는 급격히 증대된 군수물자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외국 기업에 대한 발주를 늘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 육군(전쟁성)의 경우 1903년에 260만 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는데 이것은 1904년에는 1690만 루블로, 1905년에는 7310만 루블로 늘어납니다. 러시아 해군은 1903년에는 1천만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고 1905년에는 6800만 루블을 수입에 사용합니다. 해외로 부터의 군수물자 수입은 발주에서 도착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전쟁 중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부는 러일전쟁이 종결된 뒤 군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때문에 1차대전 발발 직전 러시아 정부는 미래의 전쟁에서는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충분한 군수물자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쟁상인 수호믈리노프(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хомлинов)는 ‘장차 벌어질 전쟁에서 러시아 포병은 포탄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포병은 많은 양의 장비를 보급받고 있으며 포탄의 보급(체제)도 잘 조직되어 있다’고 호언장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여전히 생산능력이 부족하며 외국의 기술과 중간 생산재에 대한 의존이 높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드러나 버립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모든 참전국의 군지휘부를 경악시킨 것은 전쟁 이전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물자소모였습니다. 전쟁 준비가 가장 충실히 되어 있었다는 평을 받는 독일의 경우 포 1문 당 6개월 소요량으로 1천발의 포탄을 배정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전쟁이 발발한 뒤 6주만에 모조리 소비되어 버리고 일선 부대들은 탄약 부족으로 작전 수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합니다.
러시아군 수뇌부 또한 독일과 비슷하게 유럽전선에서는 단기결전으로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고 포 1문당 1천발의 포탄이 있으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 포병은 전쟁 전 기간 동안 1,276문의 포를 투입해 918,000발의 포탄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포 1문당 평균 700발의 포탄을 소비하는데 불과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1천발도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하는 의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총탄의 경우 1개월에 5백만발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탄약 뿐 아니라 전투장비의 소요량도 낙관적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소총의 경우 독일과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동원병력 450만명분과 연간 보충 70만정 만 생산하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 하지만 전선의 물자 소요량은 엄청났습니다. 당초 520만정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한 소총의 경우 전쟁 기간 중 추가적인 병력 동원으로 550만정이 더 필요했으며, 여기에 전쟁 기간 동안의 손실을 보충하는데 720만정이 더 필요했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이전의 낙관적인 예상은 전쟁이 시작되자 마자 철저히 깨지게 됩니다.
러시아군은 병력동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예상보다 더 빨리 공세에 나설 수 있었지만 군수보급은 병력동원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1914년 8월부터 총참모부는 전쟁상 수호믈리노프에게 예상 보다 탄약 소요가 많을 수 있다고 경고했으나 수호믈리노프의 대답은 이랬다고 합니다.
“아껴 쓰는 방안을 강구할 수 는 없는가?”
사실상 러시아군은 소모전에 대한 대비가 안된 상황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러시아의 국영조병창은 물론 민간 기업들의 생산량을 합치더라도 전선의 요구량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1914년 9월 9일에 수호믈리노프가 러시아의 주요 기업관계자들을 소집해서 총 665만발의 포탄을 주문하고 한달 평균 150만발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러시아 기업들의 생산능력으로는 한달에 최대 50만발을 생산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결국은 러일전쟁 때 처럼 전선의 소요량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도입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일전쟁과는 상황이 달라서 영국이나 프랑스도 자국군의 요구량을 생산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전쟁 초 러시아로부터 1백만발의 포탄을 주문 받았지만 1915년 9월까지 겨우 5천발을 보내는데 그쳤습니다. 아직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미국의 상황은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회사들은 1916년 6월까지 러시아로부터 주문 받은 910만발의 76.2mm 포탄 중 875,000발을 생산해서 보냅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발틱해가 봉쇄되었기 때문에 이것들은 아르항겔스크나 블라디보스톡으로 수송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열악한 철도망 때문에 미국에서 도착한 포탄들은 항구에 하역된 뒤 전선으로 수송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군수물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러시아정부는 러시아의 부족한 소총 및 야포 생산능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 등에 소총과 야포를 대량으로 발주했는데 역시 외국 기업들은 러시아 정부의 발주량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1915년에 미국의 윈체스터에 30만정, 레밍턴에 150만정, 웨스팅하우스에 150만정의 모신-나강 소총의 생산을 발주했으며 각 기업들에게 1915년에는 1개월에 10만정, 1916년 까지 1개월에 20만정을 생산할 수 있도록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아직 군수물자 생산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1917년 3월까지 윈체스터는 주문량의 9%를, 레밍턴과 웨스팅하우스는 12%를 납품하는데 그쳤습니다.
러시아의 자체적인 생산은 물론 수입조차 어려워지자 전선의 탄약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러시아군은 1914년 9월 까지만 해도 한달 평균 150만발의 포탄을 생산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같은 해 10월에는 이것을 다시 250만발로 늘려 잡았고 결국에는 한달에 최소 350만발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본국의 탄약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는 동안 전선의 러시아군은 독일군의 ‘물량공세’ 앞에 피박을 쓰게 됩니다. 1915년 독일군의 춘계 공세 당시 막켄젠(August von Mackensen)의 11군은 1백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는데 독일군의 주공을 얻어맞은 러시아 3군은 그 10분의 1도 안되는 포탄만 보급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에 처한 러시아군은 급속히 붕괴되어 버립니다. 1915년 8~9월에 있었던 북부전선의 독일군 공세에서도 갈비츠(Max von Gallwitz)의 12군은 3백만발 이상의 포탄을 사용했는데 러시아군은 90만발을 보급받는데 그쳤습니다. 갈비츠의 공세로 러시아군은 빌뉴스를 상실하고 밀려납니다. 단순히 야포의 숫자로만 비교하면 독일군이 압도적 우위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포탄의 보급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요새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요새에 충분한 탄약을 비축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야전군은 포탄 부족으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부전선의 기동전 하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요새들에는 많은 포탄이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노보게오르기프스크(Новогеоргиевск)와 코브노(Ковно) 요새가 함락되었을 때 독일군은 이 두 요새에서만 200만발에 가까운 포탄을 노획했습니다.
포탄 뿐만 아니라 소화기의 탄약도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노획무기의 사용이 빈번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6년에 러시아 8군 예하의 2개 군단은 노획한 오스트리아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탄약보급이 잘 되지 않으니 아예 대량으로 노획되는 오스트리아 탄약을 사용하기 위해 부대 단위로 오스트리아 소총을 장비한 것 입니다. 물론 소총 자체의 보급 문제도 있었다고 있긴 했습니다만.
군수물자의 부족이 러시아군 패배의 모든 원인은 아니지만 심각한 문제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급박한 상황에 직면한 러시아정부는 탄약생산 증대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정부의 대대적인 투자에 의해 러시아의 자체적인 탄약 생산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1915년 2월에는 탄약 생산을 감독하기 위해 포병총국(Гравное Артиллерийское Управление) 예하에 폭약류 생산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합니다. 러시아전쟁성은 1914년 9월 러시아 기업들에 1915년 10월까지 포탄의 월간 생산량을 1백만발로 늘리는 조건으로 1천만 루블을 투자합니다. 이 계획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14년 가을 한 달에 45만발의 포탄을 생산했는데 1915년 7월에는 90만발, 같은 해 9월에는 1백만발을 생산하는데 이릅니다. 폭약생산은 1915년 2월에 96톤이었으나 7월에는 820톤으로, 그리고 10월에는 1,366톤으로 급증했고 생산량 증가의 대부분은 러시아 민간기업에 힘입은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 조차 전선의 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 입니다.
러시아의 화약류 생산에 지장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은 황산을 만드는데 필요한 황철석의 조달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전쟁 이전에 스웨덴과 터키를 통해 황철석을 수입하고 있었고 이것은 전체 수요의 3분의 1 규모였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전자는 발틱해의 봉쇄로 수입이 끊기고, 후자는 적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황철석 수입문제로 발틱해 연안에 건설된 러시아의 황산공장들이 독일군의 진격으로 점령되거나 점령을 피해 이전하는 통에 1915년 초에는 황산 조달이 위험할 정도로 격감했다고 합니다. 물론 나머지 2/3을 차지하는 우랄 지역은 독일군의 위협으로 무사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발트해 연안의 생산시설 상실과 전체 수요량의 30%가 일시에 사라진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정부는 우랄 지역의 황철광 생산을 증대시켜 1915년 말에는 황산 생산문제가 해결되고 황산 생산량은 1916년 3월까지 월간 2만톤 이상으로 증가합니다.
한편, 독일군의 화학무기 사용도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서부전선의 영국군 및 프랑스군과 달리 러시아군은 전쟁 기간 중 방독면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독일군이 1915년부터 동부전선에서 본격적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하자 러시아군도 이에 대응해 화학무기 개발과 방독면 생산을 시작합니다. 러시아는 독일군의 화학탄 사용에 맞서 1915년부터 염소가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반 포탄과 마찬가지로 화학탄 생산능력도 부족했습니다. 러시아군이 1915년 전 기간을 통틀어 사용한 화학무기는 200톤 정도였는데 이것은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단 한차례의 공격작전에 사용하는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5년 4월의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이 첫날 사용한 염소가스는 150톤 정도였습니다.
※ 동부전선의 초기 화학전에 대해서는 ‘독일군의 화학무기 시험 : 1914~1915’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러시아의 포탄 생산량은 1916년에는 월간 185만발 까지 증가했습니다. 러시아 측의 주장에 따르면 1차대전 기간 중 러시아군이 사용한 7230만발의 포탄 중 5660만발이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생산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러시아군의 포탄 생산은 주로 76.2mm에서 122mm 구경의 포탄에 집중되었고 203mm 이상의 중포에 필요한 포탄의 생산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문제였다고 합니다. 기묘하게도 포병을 중시하는 러시아군이 1차대전에서는 독일군에게 화력 면에서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1차대전 당시의 뼈저린 경험은 이 전쟁을 경험한 미래의 소련 장군들에게 소모전의 중요성을 각인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의 기동전은 독일군의 기동전과 달리 소모의 개념도 중요한 요소로 들어가 있는데 이것은 1차대전의 동부전선 경험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투하체프스키 같은 군인들은 1차 5개년 계획기간 동안 스탈린 이상으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비록 전쟁에는 패배했지만 제정러시아가 남긴 유산은 소련에게 거의 대부분 계승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자입니다. 1차대전을 통해 러시아의 화학공업은 양적으로 팽창했습니다. 1913년에 33,000명이던 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자는 1917년에는 117,000명으로 증가합니다. 이렇게 늘어난 노동자들은 소련의 산업화 초기 화학공업의 중핵이 되었습니다.
소련인들은 1차대전에서 얻은 교훈을 잘 살린 결과 2차대전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독일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막연히 1차대전의 경험만 가지고 러시아를 과소평가한 독일인들은 그 대가를 혹독히 치루게 되지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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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than Grant, ‘Tsarist Armament Strategies 1870~1914’, The Journal of Soviet Military Studies, 4-1(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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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sk, 1975/1998
1890년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해외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러시아의 뒤떨어진 공업능력은 소총 조차도 충분히 조달할 수 없었는데 단적인 예로 모신-나강 소총이 처음 채용되었을 때 러시아 정부는 육군의 소요량을 신속히 조달하기 위해서 프랑스와 벨기에에 소총 생산을 발주했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신속히 모신-나강 소총으로 기본화기를 교체했고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예비사단 까지도 신형소총을 지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필요한 소총을 획득한 뒤에는 외국으로 부터의 주문을 중단하고 국영조병창을 통해서만 소총을 생산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충용 소총을 생산하는데 그쳤고 전쟁 발발시 수요량을 충족시킬 능력은 없었습니다. 또 러시아의 TNT 생산은 러시아에 설립된 독일 회사의 톨루엔(toluene)에 크게 의존했는데 독일 기업들은 톨루엔 생산에 필요한 석유제품을 독일에서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독일과 전쟁이 벌어진다면 러시아의 폭약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것은 뻔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자체적인 톨루엔 생산능력 확충보다는 당장 편한 독일 기업으로 부터의 도입에 계속 의존했습니다.
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정부는 급격히 증대된 군수물자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외국 기업에 대한 발주를 늘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 육군(전쟁성)의 경우 1903년에 260만 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는데 이것은 1904년에는 1690만 루블로, 1905년에는 7310만 루블로 늘어납니다. 러시아 해군은 1903년에는 1천만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고 1905년에는 6800만 루블을 수입에 사용합니다. 해외로 부터의 군수물자 수입은 발주에서 도착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전쟁 중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부는 러일전쟁이 종결된 뒤 군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때문에 1차대전 발발 직전 러시아 정부는 미래의 전쟁에서는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충분한 군수물자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쟁상인 수호믈리노프(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хомлинов)는 ‘장차 벌어질 전쟁에서 러시아 포병은 포탄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포병은 많은 양의 장비를 보급받고 있으며 포탄의 보급(체제)도 잘 조직되어 있다’고 호언장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여전히 생산능력이 부족하며 외국의 기술과 중간 생산재에 대한 의존이 높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드러나 버립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모든 참전국의 군지휘부를 경악시킨 것은 전쟁 이전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물자소모였습니다. 전쟁 준비가 가장 충실히 되어 있었다는 평을 받는 독일의 경우 포 1문 당 6개월 소요량으로 1천발의 포탄을 배정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전쟁이 발발한 뒤 6주만에 모조리 소비되어 버리고 일선 부대들은 탄약 부족으로 작전 수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합니다.
러시아군 수뇌부 또한 독일과 비슷하게 유럽전선에서는 단기결전으로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고 포 1문당 1천발의 포탄이 있으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 포병은 전쟁 전 기간 동안 1,276문의 포를 투입해 918,000발의 포탄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포 1문당 평균 700발의 포탄을 소비하는데 불과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1천발도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하는 의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총탄의 경우 1개월에 5백만발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탄약 뿐 아니라 전투장비의 소요량도 낙관적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소총의 경우 독일과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동원병력 450만명분과 연간 보충 70만정 만 생산하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 하지만 전선의 물자 소요량은 엄청났습니다. 당초 520만정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한 소총의 경우 전쟁 기간 중 추가적인 병력 동원으로 550만정이 더 필요했으며, 여기에 전쟁 기간 동안의 손실을 보충하는데 720만정이 더 필요했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이전의 낙관적인 예상은 전쟁이 시작되자 마자 철저히 깨지게 됩니다.
러시아군은 병력동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예상보다 더 빨리 공세에 나설 수 있었지만 군수보급은 병력동원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1914년 8월부터 총참모부는 전쟁상 수호믈리노프에게 예상 보다 탄약 소요가 많을 수 있다고 경고했으나 수호믈리노프의 대답은 이랬다고 합니다.
사실상 러시아군은 소모전에 대한 대비가 안된 상황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러시아의 국영조병창은 물론 민간 기업들의 생산량을 합치더라도 전선의 요구량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1914년 9월 9일에 수호믈리노프가 러시아의 주요 기업관계자들을 소집해서 총 665만발의 포탄을 주문하고 한달 평균 150만발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러시아 기업들의 생산능력으로는 한달에 최대 50만발을 생산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결국은 러일전쟁 때 처럼 전선의 소요량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도입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일전쟁과는 상황이 달라서 영국이나 프랑스도 자국군의 요구량을 생산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전쟁 초 러시아로부터 1백만발의 포탄을 주문 받았지만 1915년 9월까지 겨우 5천발을 보내는데 그쳤습니다. 아직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미국의 상황은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회사들은 1916년 6월까지 러시아로부터 주문 받은 910만발의 76.2mm 포탄 중 875,000발을 생산해서 보냅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발틱해가 봉쇄되었기 때문에 이것들은 아르항겔스크나 블라디보스톡으로 수송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열악한 철도망 때문에 미국에서 도착한 포탄들은 항구에 하역된 뒤 전선으로 수송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군수물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러시아정부는 러시아의 부족한 소총 및 야포 생산능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 등에 소총과 야포를 대량으로 발주했는데 역시 외국 기업들은 러시아 정부의 발주량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1915년에 미국의 윈체스터에 30만정, 레밍턴에 150만정, 웨스팅하우스에 150만정의 모신-나강 소총의 생산을 발주했으며 각 기업들에게 1915년에는 1개월에 10만정, 1916년 까지 1개월에 20만정을 생산할 수 있도록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아직 군수물자 생산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1917년 3월까지 윈체스터는 주문량의 9%를, 레밍턴과 웨스팅하우스는 12%를 납품하는데 그쳤습니다.
러시아의 자체적인 생산은 물론 수입조차 어려워지자 전선의 탄약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러시아군은 1914년 9월 까지만 해도 한달 평균 150만발의 포탄을 생산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같은 해 10월에는 이것을 다시 250만발로 늘려 잡았고 결국에는 한달에 최소 350만발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본국의 탄약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는 동안 전선의 러시아군은 독일군의 ‘물량공세’ 앞에 피박을 쓰게 됩니다. 1915년 독일군의 춘계 공세 당시 막켄젠(August von Mackensen)의 11군은 1백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는데 독일군의 주공을 얻어맞은 러시아 3군은 그 10분의 1도 안되는 포탄만 보급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에 처한 러시아군은 급속히 붕괴되어 버립니다. 1915년 8~9월에 있었던 북부전선의 독일군 공세에서도 갈비츠(Max von Gallwitz)의 12군은 3백만발 이상의 포탄을 사용했는데 러시아군은 90만발을 보급받는데 그쳤습니다. 갈비츠의 공세로 러시아군은 빌뉴스를 상실하고 밀려납니다. 단순히 야포의 숫자로만 비교하면 독일군이 압도적 우위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포탄의 보급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요새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요새에 충분한 탄약을 비축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야전군은 포탄 부족으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부전선의 기동전 하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요새들에는 많은 포탄이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노보게오르기프스크(Новогеоргиевск)와 코브노(Ковно) 요새가 함락되었을 때 독일군은 이 두 요새에서만 200만발에 가까운 포탄을 노획했습니다.
포탄 뿐만 아니라 소화기의 탄약도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노획무기의 사용이 빈번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6년에 러시아 8군 예하의 2개 군단은 노획한 오스트리아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탄약보급이 잘 되지 않으니 아예 대량으로 노획되는 오스트리아 탄약을 사용하기 위해 부대 단위로 오스트리아 소총을 장비한 것 입니다. 물론 소총 자체의 보급 문제도 있었다고 있긴 했습니다만.
군수물자의 부족이 러시아군 패배의 모든 원인은 아니지만 심각한 문제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급박한 상황에 직면한 러시아정부는 탄약생산 증대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정부의 대대적인 투자에 의해 러시아의 자체적인 탄약 생산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1915년 2월에는 탄약 생산을 감독하기 위해 포병총국(Гравное Артиллерийское Управление) 예하에 폭약류 생산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합니다. 러시아전쟁성은 1914년 9월 러시아 기업들에 1915년 10월까지 포탄의 월간 생산량을 1백만발로 늘리는 조건으로 1천만 루블을 투자합니다. 이 계획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14년 가을 한 달에 45만발의 포탄을 생산했는데 1915년 7월에는 90만발, 같은 해 9월에는 1백만발을 생산하는데 이릅니다. 폭약생산은 1915년 2월에 96톤이었으나 7월에는 820톤으로, 그리고 10월에는 1,366톤으로 급증했고 생산량 증가의 대부분은 러시아 민간기업에 힘입은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 조차 전선의 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 입니다.
러시아의 화약류 생산에 지장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은 황산을 만드는데 필요한 황철석의 조달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전쟁 이전에 스웨덴과 터키를 통해 황철석을 수입하고 있었고 이것은 전체 수요의 3분의 1 규모였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전자는 발틱해의 봉쇄로 수입이 끊기고, 후자는 적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황철석 수입문제로 발틱해 연안에 건설된 러시아의 황산공장들이 독일군의 진격으로 점령되거나 점령을 피해 이전하는 통에 1915년 초에는 황산 조달이 위험할 정도로 격감했다고 합니다. 물론 나머지 2/3을 차지하는 우랄 지역은 독일군의 위협으로 무사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발트해 연안의 생산시설 상실과 전체 수요량의 30%가 일시에 사라진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정부는 우랄 지역의 황철광 생산을 증대시켜 1915년 말에는 황산 생산문제가 해결되고 황산 생산량은 1916년 3월까지 월간 2만톤 이상으로 증가합니다.
한편, 독일군의 화학무기 사용도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서부전선의 영국군 및 프랑스군과 달리 러시아군은 전쟁 기간 중 방독면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독일군이 1915년부터 동부전선에서 본격적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하자 러시아군도 이에 대응해 화학무기 개발과 방독면 생산을 시작합니다. 러시아는 독일군의 화학탄 사용에 맞서 1915년부터 염소가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반 포탄과 마찬가지로 화학탄 생산능력도 부족했습니다. 러시아군이 1915년 전 기간을 통틀어 사용한 화학무기는 200톤 정도였는데 이것은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단 한차례의 공격작전에 사용하는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5년 4월의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이 첫날 사용한 염소가스는 150톤 정도였습니다.
※ 동부전선의 초기 화학전에 대해서는 ‘독일군의 화학무기 시험 : 1914~1915’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러시아의 포탄 생산량은 1916년에는 월간 185만발 까지 증가했습니다. 러시아 측의 주장에 따르면 1차대전 기간 중 러시아군이 사용한 7230만발의 포탄 중 5660만발이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생산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러시아군의 포탄 생산은 주로 76.2mm에서 122mm 구경의 포탄에 집중되었고 203mm 이상의 중포에 필요한 포탄의 생산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문제였다고 합니다. 기묘하게도 포병을 중시하는 러시아군이 1차대전에서는 독일군에게 화력 면에서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1차대전 당시의 뼈저린 경험은 이 전쟁을 경험한 미래의 소련 장군들에게 소모전의 중요성을 각인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의 기동전은 독일군의 기동전과 달리 소모의 개념도 중요한 요소로 들어가 있는데 이것은 1차대전의 동부전선 경험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투하체프스키 같은 군인들은 1차 5개년 계획기간 동안 스탈린 이상으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비록 전쟁에는 패배했지만 제정러시아가 남긴 유산은 소련에게 거의 대부분 계승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자입니다. 1차대전을 통해 러시아의 화학공업은 양적으로 팽창했습니다. 1913년에 33,000명이던 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자는 1917년에는 117,000명으로 증가합니다. 이렇게 늘어난 노동자들은 소련의 산업화 초기 화학공업의 중핵이 되었습니다.
소련인들은 1차대전에서 얻은 교훈을 잘 살린 결과 2차대전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독일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막연히 1차대전의 경험만 가지고 러시아를 과소평가한 독일인들은 그 대가를 혹독히 치루게 되지요.
참고문헌
Nathan M. Brooks, ‘Munitions, The Military, and Chemistry in Russia’, Frontline and Factory : Comparative Perspectives on the Chemical Industry at War 1914~1924, Springer, 2006
Martin van Creveld, ‘World War I and the Revolution in Logistics’, Great War, Total War : Combat and Mobilization on the Western Front, 1914~1918,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Jonathan Grant, ‘Tsarist Armament Strategies 1870~1914’, The Journal of Soviet Military Studies, 4-1(1991)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sk, 1975/1998
2007년 1월 14일 일요일
붉은군대의 간부 계급체계 : 1919~1941
1. 적백내전기~1935년
붉은군대의 군 계급체계는 적백내전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개편됐습니다.
레닌과 많은 혁명가들은 전문적인 장교집단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인민위원이었던 트로츠키는 붉은군대를 차별 없는 “사회주의”적인 군대로 만드는데 주력했습니다. 역시 차별의 대표적인 상징은 “계급”이 될 수 밖에 없었지요.
그 결과 붉은군대는 기존의 계급제도와 장교(Офицер)라는 명칭을 폐지하는 대신 직위별 호칭과 “지휘관(Командир)”이라는 명칭을 도입했습니다. 직위별 호칭 제도는 부사관과 장교계급의 상징성을 없애는 것이 목표였고 혁명 이후 도입돼 1924년에 그 기틀이 잡혔습니다.
직위별 호칭 제도는 군 간부의 호칭을 계급대신 “중대지휘관”, “연대지휘관”등 직위에 따라 불렀습니다. 물론 제국 시절부터 군대물을 먹은 장교들은 여기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지요.
혁명 이후의 간부 계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분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ения)
소대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중대선임부사관(Старшина роты)
소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중대지휘관(Командир роты)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
연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полка)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
사단지휘관(Начальник дивизии)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армией)
전선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фронтом)
보시면 군단지휘관이 빠져있는데 내전기의 야전군 규모는 1차 대전 당시의 군단 수준을 약간 밑도는 수준이었습니다. 마치 독소전쟁 초반인 1941년 말부터 1942년 말 처럼 야전군 사령부가 직접 사단을 지휘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군단지휘관이라는 계급이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내전이 끝난 뒤 1924년에 정립된 직위별 호칭 제도는 군대의 직위를 1등급부터 14등급까지 구분했는데 다음과 같았습니다.
초급지휘관
1등급 : 분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ения) / 반지휘관(Командир звена)
2등급 : 소대 부(副)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 중대 선임부사관(Старшина роты)
중급지휘관
3등급 : 소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4등급 : 중대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роты) / 독립소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ьного взвода)
5등급 : 중대지휘관(Командир роты)
6등급 : 대대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 / 독립중대지휘관(Командир otdel’noy roty)
고급지휘관
7등급 :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 약칭 Комбат)
8등급 : 연대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а полка) / 독립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ьного батальона)
9등급 : 연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полка, 약칭 Компол)
상급지휘관
10등급 : 사단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дивизии) /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 약칭 Комбриг)
11등급 : 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дивизии, 약칭 Комдив)
12등급 : 군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корпуса, 약칭 Комкор)
13등급 : 야전군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ующего армией) / 군관구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ующего округа) / 전선군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ующего фронтом)
14등급 :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армией, 약칭 Комарм) / 군관구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округом) / 전선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фронтом)
2. 1935년~1941년
소련은 1930년대 중반까지 적백내전기 트로츠키가 확립한 체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군 병력이 증가하고 또 전문적인 장교집단의 필요성이 증대되면서 적백내전 시기에 확립된 제도로는 계속해서 팽창하는 군대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 졌습니다. ‘평등한’ 계급 내에서 직위만 가지고 지휘를 한다는 게 생각 만큼 비효율 적이었고 가뜩이나 생활수준도 열악한 장교들에게 권위 없이 책임만 지워놓고 있으니 잘 돌아가는게 좀 비정상 이었겠지요.
마침내 국방인민위원회는 1935년 9월 22일 직위별 호칭제도를 폐지하고 계급 제도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정치국은 장군 계급에 대해서는 직위별 호칭제도를 계속 유지하도록 했고 특수 병과의 경우 직위별 호칭제도를 계속 유지해 1935년의 계급제도는 뭔가 어정쩡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5년 도입된 붉은 군대의 장교 계급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위(Лейтенант)
중위(Старший лейтенант)
대위(Капитан,)
소령(Майор)
대령(Полковник)
여단지휘관(Комбриг)
사단지휘관(Комдив)
군단지휘관(Комкор)
2급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арм 2-го ранга)
1급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арм 1-го ранга)
소비에트연방원수(Маршал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1935년 개편안에 따른 특수 병과의 계급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위급
: 2급 군기술관(Воентехник 2-го ранга)
2급 기술-보급관(Техник-интендант 2-го ранга)
보조군의관(Военфельдшер)
보조수의관(Военветфельдшер)
하급군법무관(Младший военный юрист)
중위급
: 1급 군기술관(Воентехник 1-го ранга)
1급 기술-보급관(Техник-интендант 1-го ранга)
상급보조군의관(Старший военфельдшер)
상급보조수의관(Старший военветфельдшер)
군법무관(Военный юрист)
대위급
: 3급 공병관(Военинженер 3-го ранга)
3급 보급관(Интендант 3-го ранга)
군의관(Военврач)
수의관(Военветврач)
상급군법무관(Старший военюрист)
소령급
: 2급 공병관(Военинженер 2-го ранга)
2급 보급관(Интендант 2-го ранга)
2급 군의관(Военврач 2-го ранга)
2급 수의관(Военветврач 2-го ранга)
2급 군법무관(Военный юрист 2-го ранга)
대령급
: 1급 공병관(Военинженер 1-го ранга)
1급 보급관(Интендант 1-го ранга)
1급 군의관(Военврач 1-го ранга)
1급 수의관(Военветврач 1-го ранга)
1급 군법무관(военный юрист 1-го ранга)
여단지휘관급
: 여단공병지휘관(Бригинженер)
여단군수관(Бригинтендант)
여단군의관(Бригнврач)
여단수의관(Бригветврач)
여단법무관(Бригвоенюрист)
사단지휘관급
: 사단공병지휘관(Дивинженер)
사단군수관(Дивинтендант)
사단군의관(Дивврач)
사단수의관(Дивветрач)
사단법무관(Диввоенюрист)
군단지휘관급
: 군단공병지휘관(Коринженер)
군단군수관(Коринтендант)
군단군의관(Корврач)
군단수의관(Корветврач)
군단법무관(Корвоенюрист)
2급 야전군지휘관급
: 야전군공병지휘관(Арминженер)
야전군군수참모(Арминтендант)
야전군군의관(Армврач)
야전군수의관(Армветврач)
야전군법무관(Армвоенюрист)
한편, 1935년 이후의 군 정치위원 계급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위급 : 하급군정치원(Младший политрук)
중위급 : 군정치원(Политрук)
대위급 : 상급군정치원(Старший политрук)
소령급 : 대대정치위원(Батальонный комиссар)
대령급 : 연대정치위원(Полковой комиссар)
여단지휘관급 : 여단정치위원(Бригадный комиссар)
사단지휘관급 : 사단정치위원(Дивизионный комиссар)
군단지휘관급 : 군단정치위원(Корпусной комиссар)
2급 야전군지휘관급 : 2급 야전군정치위원(Армейский комиссар 2-го ранга)
1급 야전군지휘관급 : 1급 야전군정치위원(Армейский комиссар 1-го ранга)
새로 개편된 계급체계에는 소비에트연방원수 계급이 신설됐는데 부존늬, 예고로프, 보로실로프, 블뤼헤르, 투하체프스키가 1935년 11월 20일자로 소연방원수로 임명됐습니다.
1937년 8월 20일에는 소위의 바로 아래에 준위(Младший лейтенант), 준기술관(Младший воентехник) 계급이 신설 됐습니다.
계급제도는 다시 1940년 5월 7일 개편됩니다. 이 개편의 특징은 마침내 붉은군대에 “장군”과 “제독”의 호칭이 다시 도입됐다는 것이었습니다. 1940년 새로 도입된 장군 호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여단지휘관 -> 해당 계급 없음
사단지휘관 -> 소장(Генерал-майор)
군단지휘관 -> 중장(Генерал-лейтенант)
2급 야전군지휘관 -> 상장(Генерал-полковник)
1급 야전군지휘관 -> 대장(Генерал армии)
그리고 같은 해 11월 2일에는 중령(Подполковник) 계급과 이에 준하는 상급대대정치위원(Старший батальонный комиссар) 계급이 새로 신설됐으며 부사관 계급의 직위별 호칭이 폐지됐습니다. 이렇게 1940년에 확립된 계급 체계는 전쟁 기간 중 부분적인 변화를 제외하면 큰 변동 없이 유지됐습니다.
1940년 장군(Генерал) 호칭이 도입됨에 따라 직위별 호칭제도는 폐지됐습니다. 그렇지만 20년 가까이 계속된 직위별 호칭제도의 잔재는 1945년 종전 시 까지도 계속 남아 고참 병사들의 경우 장교들을 기존의 직위별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1941년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한 뒤 계급체계의 변화 중 특기할 만한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942년에는 장교 호칭이 통일 되면서 특수병과에 남아있던 직위별 호칭이 폐지됐으며 같은해 10월에는 이중지휘체계가 폐지되면서 정치위원의 계급이 없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장교”라는 호칭이 1943년부터 공식적으로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서 트로츠키가 구상했던 “사회주의적 군대”의 잔재는 완전히 청산되고 소련의 장교단은 전문적인 군인집단으로, 사회의 엘리트 층을 구성하게 됩니다.
붉은군대의 군 계급체계는 적백내전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개편됐습니다.
레닌과 많은 혁명가들은 전문적인 장교집단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인민위원이었던 트로츠키는 붉은군대를 차별 없는 “사회주의”적인 군대로 만드는데 주력했습니다. 역시 차별의 대표적인 상징은 “계급”이 될 수 밖에 없었지요.
그 결과 붉은군대는 기존의 계급제도와 장교(Офицер)라는 명칭을 폐지하는 대신 직위별 호칭과 “지휘관(Командир)”이라는 명칭을 도입했습니다. 직위별 호칭 제도는 부사관과 장교계급의 상징성을 없애는 것이 목표였고 혁명 이후 도입돼 1924년에 그 기틀이 잡혔습니다.
직위별 호칭 제도는 군 간부의 호칭을 계급대신 “중대지휘관”, “연대지휘관”등 직위에 따라 불렀습니다. 물론 제국 시절부터 군대물을 먹은 장교들은 여기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지요.
혁명 이후의 간부 계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분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ения)
소대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중대선임부사관(Старшина роты)
소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중대지휘관(Командир роты)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
연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полка)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
사단지휘관(Начальник дивизии)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армией)
전선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фронтом)
보시면 군단지휘관이 빠져있는데 내전기의 야전군 규모는 1차 대전 당시의 군단 수준을 약간 밑도는 수준이었습니다. 마치 독소전쟁 초반인 1941년 말부터 1942년 말 처럼 야전군 사령부가 직접 사단을 지휘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군단지휘관이라는 계급이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내전이 끝난 뒤 1924년에 정립된 직위별 호칭 제도는 군대의 직위를 1등급부터 14등급까지 구분했는데 다음과 같았습니다.
초급지휘관
1등급 : 분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ения) / 반지휘관(Командир звена)
2등급 : 소대 부(副)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 중대 선임부사관(Старшина роты)
중급지휘관
3등급 : 소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4등급 : 중대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роты) / 독립소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ьного взвода)
5등급 : 중대지휘관(Командир роты)
6등급 : 대대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 / 독립중대지휘관(Командир otdel’noy roty)
고급지휘관
7등급 :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 약칭 Комбат)
8등급 : 연대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а полка) / 독립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ьного батальона)
9등급 : 연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полка, 약칭 Компол)
상급지휘관
10등급 : 사단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дивизии) /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 약칭 Комбриг)
11등급 : 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дивизии, 약칭 Комдив)
12등급 : 군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корпуса, 약칭 Комкор)
13등급 : 야전군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ующего армией) / 군관구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ующего округа) / 전선군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ующего фронтом)
14등급 :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армией, 약칭 Комарм) / 군관구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округом) / 전선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фронтом)
2. 1935년~1941년
소련은 1930년대 중반까지 적백내전기 트로츠키가 확립한 체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군 병력이 증가하고 또 전문적인 장교집단의 필요성이 증대되면서 적백내전 시기에 확립된 제도로는 계속해서 팽창하는 군대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 졌습니다. ‘평등한’ 계급 내에서 직위만 가지고 지휘를 한다는 게 생각 만큼 비효율 적이었고 가뜩이나 생활수준도 열악한 장교들에게 권위 없이 책임만 지워놓고 있으니 잘 돌아가는게 좀 비정상 이었겠지요.
마침내 국방인민위원회는 1935년 9월 22일 직위별 호칭제도를 폐지하고 계급 제도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정치국은 장군 계급에 대해서는 직위별 호칭제도를 계속 유지하도록 했고 특수 병과의 경우 직위별 호칭제도를 계속 유지해 1935년의 계급제도는 뭔가 어정쩡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5년 도입된 붉은 군대의 장교 계급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위(Лейтенант)
중위(Старший лейтенант)
대위(Капитан,)
소령(Майор)
대령(Полковник)
여단지휘관(Комбриг)
사단지휘관(Комдив)
군단지휘관(Комкор)
2급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арм 2-го ранга)
1급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арм 1-го ранга)
소비에트연방원수(Маршал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1935년 개편안에 따른 특수 병과의 계급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위급
: 2급 군기술관(Воентехник 2-го ранга)
2급 기술-보급관(Техник-интендант 2-го ранга)
보조군의관(Военфельдшер)
보조수의관(Военветфельдшер)
하급군법무관(Младший военный юрист)
중위급
: 1급 군기술관(Воентехник 1-го ранга)
1급 기술-보급관(Техник-интендант 1-го ранга)
상급보조군의관(Старший военфельдшер)
상급보조수의관(Старший военветфельдшер)
군법무관(Военный юрист)
대위급
: 3급 공병관(Военинженер 3-го ранга)
3급 보급관(Интендант 3-го ранга)
군의관(Военврач)
수의관(Военветврач)
상급군법무관(Старший военюрист)
소령급
: 2급 공병관(Военинженер 2-го ранга)
2급 보급관(Интендант 2-го ранга)
2급 군의관(Военврач 2-го ранга)
2급 수의관(Военветврач 2-го ранга)
2급 군법무관(Военный юрист 2-го ранга)
대령급
: 1급 공병관(Военинженер 1-го ранга)
1급 보급관(Интендант 1-го ранга)
1급 군의관(Военврач 1-го ранга)
1급 수의관(Военветврач 1-го ранга)
1급 군법무관(военный юрист 1-го ранга)
여단지휘관급
: 여단공병지휘관(Бригинженер)
여단군수관(Бригинтендант)
여단군의관(Бригнврач)
여단수의관(Бригветврач)
여단법무관(Бригвоенюрист)
사단지휘관급
: 사단공병지휘관(Дивинженер)
사단군수관(Дивинтендант)
사단군의관(Дивврач)
사단수의관(Дивветрач)
사단법무관(Диввоенюрист)
군단지휘관급
: 군단공병지휘관(Коринженер)
군단군수관(Коринтендант)
군단군의관(Корврач)
군단수의관(Корветврач)
군단법무관(Корвоенюрист)
2급 야전군지휘관급
: 야전군공병지휘관(Арминженер)
야전군군수참모(Арминтендант)
야전군군의관(Армврач)
야전군수의관(Армветврач)
야전군법무관(Армвоенюрист)
한편, 1935년 이후의 군 정치위원 계급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위급 : 하급군정치원(Младший политрук)
중위급 : 군정치원(Политрук)
대위급 : 상급군정치원(Старший политрук)
소령급 : 대대정치위원(Батальонный комиссар)
대령급 : 연대정치위원(Полковой комиссар)
여단지휘관급 : 여단정치위원(Бригадный комиссар)
사단지휘관급 : 사단정치위원(Дивизионный комиссар)
군단지휘관급 : 군단정치위원(Корпусной комиссар)
2급 야전군지휘관급 : 2급 야전군정치위원(Армейский комиссар 2-го ранга)
1급 야전군지휘관급 : 1급 야전군정치위원(Армейский комиссар 1-го ранга)
새로 개편된 계급체계에는 소비에트연방원수 계급이 신설됐는데 부존늬, 예고로프, 보로실로프, 블뤼헤르, 투하체프스키가 1935년 11월 20일자로 소연방원수로 임명됐습니다.
1937년 8월 20일에는 소위의 바로 아래에 준위(Младший лейтенант), 준기술관(Младший воентехник) 계급이 신설 됐습니다.
계급제도는 다시 1940년 5월 7일 개편됩니다. 이 개편의 특징은 마침내 붉은군대에 “장군”과 “제독”의 호칭이 다시 도입됐다는 것이었습니다. 1940년 새로 도입된 장군 호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여단지휘관 -> 해당 계급 없음
사단지휘관 -> 소장(Генерал-майор)
군단지휘관 -> 중장(Генерал-лейтенант)
2급 야전군지휘관 -> 상장(Генерал-полковник)
1급 야전군지휘관 -> 대장(Генерал армии)
그리고 같은 해 11월 2일에는 중령(Подполковник) 계급과 이에 준하는 상급대대정치위원(Старший батальонный комиссар) 계급이 새로 신설됐으며 부사관 계급의 직위별 호칭이 폐지됐습니다. 이렇게 1940년에 확립된 계급 체계는 전쟁 기간 중 부분적인 변화를 제외하면 큰 변동 없이 유지됐습니다.
1940년 장군(Генерал) 호칭이 도입됨에 따라 직위별 호칭제도는 폐지됐습니다. 그렇지만 20년 가까이 계속된 직위별 호칭제도의 잔재는 1945년 종전 시 까지도 계속 남아 고참 병사들의 경우 장교들을 기존의 직위별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1941년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한 뒤 계급체계의 변화 중 특기할 만한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942년에는 장교 호칭이 통일 되면서 특수병과에 남아있던 직위별 호칭이 폐지됐으며 같은해 10월에는 이중지휘체계가 폐지되면서 정치위원의 계급이 없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장교”라는 호칭이 1943년부터 공식적으로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서 트로츠키가 구상했던 “사회주의적 군대”의 잔재는 완전히 청산되고 소련의 장교단은 전문적인 군인집단으로, 사회의 엘리트 층을 구성하게 됩니다.
2007년 1월 11일 목요일
투하체프스키 - 가끔 지나치게 높게 평가되는 장군
이상하게도 역사에 관심을 가진 분 들 중에서는 특정 인물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차 대전과 관련된 인물 중 한국에서 괴이할 정도로 과대평가 되는 인물을 몇 명 꼽아 보면 롬멜, 주코프 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좀 더 추가하면 투하체프스키 정도가 되겠군요.
투하체프스키는 그의 비극적 최후 때문인지 몰라도 실제 능력 이상으로 과대 평가됐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특히 독소전 초기의 패배는 투하체프스키가 있었다면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독소전 초기의 대 패배는 소련의 구조적인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지 지휘관들이 특출나게 무능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투하체프스키가 필요 이상으로 높게 평가되는 것은 그가 독소전 이전에 죽어서 2차 대전에서 능력을 검증받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읽었던 국내의 투하체프스키에 대한 글 중에는 투하체프스키가 살아 있었다면 독소전쟁 초반에 독전대 같은 무자비한 방법을 쓰지 않고 군대를 지휘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글쎄요?
제가 자주 우려먹는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글은 비록 짧고 단편적인 글 이지만 투하체프스키 역시 내전과 그 이후의 혼란기에는 다른 소련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저런 과격한 방식에 의존했음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저런 전술단위의 문제는 그야말로 하급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자질 문제에 달려 있는 것이지 고급지휘관의 역량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투하체프스키가 독소전 발발 당시 까지 살아 있었더라도 붉은 군대 자체가 구조적인 결함 상태를 못 벗어났다면 그 역시 신통한 활약을 펼치긴 어려웠을 겁니다. 갑작스레 두 세 단계씩 진급한 중간 간부들에 기본적인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임관된 초급 장교들, 그리고 훈련 부족의 사병들로 만들어진 군대를 가지고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잘 훈련된 독일군을 맞아 참패를 모면했다면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과연 1941년에 어떤 고급 지휘관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투하체프스키는 분명히 매우 유능한 군인이긴 하지만 국가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까지 뒤바꿀 정도로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역사 문제를 인식하는데 특정 인물에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투하체프스키는 그의 비극적 최후 때문인지 몰라도 실제 능력 이상으로 과대 평가됐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특히 독소전 초기의 패배는 투하체프스키가 있었다면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독소전 초기의 대 패배는 소련의 구조적인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지 지휘관들이 특출나게 무능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투하체프스키가 필요 이상으로 높게 평가되는 것은 그가 독소전 이전에 죽어서 2차 대전에서 능력을 검증받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읽었던 국내의 투하체프스키에 대한 글 중에는 투하체프스키가 살아 있었다면 독소전쟁 초반에 독전대 같은 무자비한 방법을 쓰지 않고 군대를 지휘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글쎄요?
제가 자주 우려먹는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전략)
소련 정부는 진압작전을 위해서 투하체프스키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사기저하로 와해 상태에 빠진 제 7군을 대신해 간부후보생에서 선발된 인원이 공격을 지휘하게 됐다. 참모대학을 졸업한 디벤코, 페드코, 우리츠키가 페트로그라드에 배치됐다. 제 10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대표단은 정치 공작을 준비하기 위해 동원했다.
투하체프스키의 공격은 3월 7일 새벽에 시작됐다. 공격 부대는 간단한 위장을 한 채 해안포대의 지원을 받으며 반란군의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크론슈타트에 배치된 야포와 기관총은 빙판을 따라 공격해오는 진압군을 분쇄해 버렸다. 공격부대의 제 2파도 반란군의 야포에 큰 피해를 입자 병사들은 돌격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간부들은 권총으로 병사들을 위협해서 겨우 앞으로 내몰 수 있었다. 바르민의 증언에 따르면 보르쉐프스키는 병사들이 빙판위에 있는 작은 보트의 뒤에 엄폐하고 움직이지 않자 병사 중 두 명을 끌어내 그 자리에서 총살해 버리고 공격을 명령했다. 이렇게 되자 진압군에 소속된 병사들 중 일부는 반란군에 합류해 버렸다.
투하체프스키는 자신의 첫번째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3월 17일, 방법을 바꿔 공격을 재개했다.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 p.122
이 글은 비록 짧고 단편적인 글 이지만 투하체프스키 역시 내전과 그 이후의 혼란기에는 다른 소련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저런 과격한 방식에 의존했음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저런 전술단위의 문제는 그야말로 하급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자질 문제에 달려 있는 것이지 고급지휘관의 역량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투하체프스키가 독소전 발발 당시 까지 살아 있었더라도 붉은 군대 자체가 구조적인 결함 상태를 못 벗어났다면 그 역시 신통한 활약을 펼치긴 어려웠을 겁니다. 갑작스레 두 세 단계씩 진급한 중간 간부들에 기본적인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임관된 초급 장교들, 그리고 훈련 부족의 사병들로 만들어진 군대를 가지고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잘 훈련된 독일군을 맞아 참패를 모면했다면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과연 1941년에 어떤 고급 지휘관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투하체프스키는 분명히 매우 유능한 군인이긴 하지만 국가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까지 뒤바꿀 정도로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역사 문제를 인식하는데 특정 인물에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2007년 1월 5일 금요일
R. Reese의 소련 장교 집단 구분
제가 자주 울궈먹는 러시아 군사사 연구자인 Reese는 건국 초기 소련의 장교집단을 크게 세 그룹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보리스 샤포쉬니코프”로 대표되는 “순수한 전문 군인 집단”입니다. 리즈는 이 집단에 바실레프스키와 충격군 이론의 제창자인 트리안다필로프, 스베친 등을 포함 시키고 있습니다. 이 집단의 특징은 주로 짜르 체제에서 영관급 정도의 계급에 고급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정치적 성향을 가지지 않아 군대는 당의 도구라는 관점에 충실하고 당의 의사결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이 중 스베친은 공산당에 가입은 하지만 당 내에서 어떤 요직도 노리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로 대표되는 “준 전문 군인 집단”입니다.
리즈는 이 준 전문 군인 집단은 공산당에 가입한 비중이 높으며 당의 정치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투하체프스키는 당과 국가 정책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 덕에 레닌그라드 군관구로 좌천(?) 당하기도 하고 끝내는 골로 가지요.
이 집단에는 야키르, 초창기 전차 개발에 공헌한 칼렙스키, 아이데만, 우보레비치 등이 포함됩니다. 이들 집단의 특징은 1차 대전 당시 주로 부사관, 위관급 장교로 참전했으며 정치와 신기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 입니다. 혁명 직후 공산당에 가입한 경우가 많으며 투하체프스키와 우보레비치, 야키르는 당 중앙위원까지 올라가지요. 칼렙스키는 나중에 통신위원장으로 정부 요직을 차지합니다.
세 번째 집단은 보로실로프로 대표되는 “비 전문 군인 집단”입니다.
이 집단은 주로 스탈린이라는 든든한 정치적 “빽”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경우이고 대부분 농민출신에 고등 군사교육이 부족했던 편 입니다. 여기에는 독소전 초기 키예프 피박의 주인공인 부존늬 같이 능력이 의문시되는 인사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스탈린이 전문 군인 집단을 매우 불신했기 때문에 보로실로프 집단은 스탈린의 비호 하에 상당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점 하나는 21세기의 미국인 리즈의 분석은 혁명 당시 보로쉴로프의 구분과 비슷하다는 것 입니다. 보로쉴로프는 1920년대 초 붉은 군대의 장교 집단을 1. 노동계급 출신의 "혁명적 지휘관"과 2. 짜르 체제에서 하급 간부였던 혁명적 농민 출신의 지휘관, 3. 짜르 체제의 엘리트 군 간부 출신 지휘관으로 구분했습니다.
약간 억지스럽긴 해도 리즈의 구분과 보로쉴로프의 구분이 얼추 비슷하게 맞아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또 Reese의 연구가 흥미로운 점은 John Erickson이 The Soviet High Command에서 장교집단을 “전문 군인 집단”과 “비 전문 군인 집단”으로 구분한 것에서 좀 더 세분화를 시도했다는 점 입니다. 즉 전문 직업군인 집단을 다시 “순수한” 직업군인 집단과 “정치 지향적” 직업군인 집단으로 구분 함으로서 1937년의 군 숙청에서 왜 투하체프스키 집단이 집중적으로 거덜이 났는가를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샤포쉬니코프와 바실레프스키는 정치 불개입과 당의 명령에 대한 복종에 충실했기 때문에 스탈린과 충돌할 일이 거의 없었고 자신들의 업무 범위 내에서 일정한 자율성을 인정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투하체프스키 집단은 당의 중공업화에 찬성하면서도 군대가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당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고 스탈린 세력의 불쾌감을 자극합니다.
그 후의 결론은 다들 잘 아시지요?
첫 번째는 “보리스 샤포쉬니코프”로 대표되는 “순수한 전문 군인 집단”입니다. 리즈는 이 집단에 바실레프스키와 충격군 이론의 제창자인 트리안다필로프, 스베친 등을 포함 시키고 있습니다. 이 집단의 특징은 주로 짜르 체제에서 영관급 정도의 계급에 고급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정치적 성향을 가지지 않아 군대는 당의 도구라는 관점에 충실하고 당의 의사결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이 중 스베친은 공산당에 가입은 하지만 당 내에서 어떤 요직도 노리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로 대표되는 “준 전문 군인 집단”입니다.
리즈는 이 준 전문 군인 집단은 공산당에 가입한 비중이 높으며 당의 정치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투하체프스키는 당과 국가 정책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 덕에 레닌그라드 군관구로 좌천(?) 당하기도 하고 끝내는 골로 가지요.
이 집단에는 야키르, 초창기 전차 개발에 공헌한 칼렙스키, 아이데만, 우보레비치 등이 포함됩니다. 이들 집단의 특징은 1차 대전 당시 주로 부사관, 위관급 장교로 참전했으며 정치와 신기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 입니다. 혁명 직후 공산당에 가입한 경우가 많으며 투하체프스키와 우보레비치, 야키르는 당 중앙위원까지 올라가지요. 칼렙스키는 나중에 통신위원장으로 정부 요직을 차지합니다.
세 번째 집단은 보로실로프로 대표되는 “비 전문 군인 집단”입니다.
이 집단은 주로 스탈린이라는 든든한 정치적 “빽”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경우이고 대부분 농민출신에 고등 군사교육이 부족했던 편 입니다. 여기에는 독소전 초기 키예프 피박의 주인공인 부존늬 같이 능력이 의문시되는 인사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스탈린이 전문 군인 집단을 매우 불신했기 때문에 보로실로프 집단은 스탈린의 비호 하에 상당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점 하나는 21세기의 미국인 리즈의 분석은 혁명 당시 보로쉴로프의 구분과 비슷하다는 것 입니다. 보로쉴로프는 1920년대 초 붉은 군대의 장교 집단을 1. 노동계급 출신의 "혁명적 지휘관"과 2. 짜르 체제에서 하급 간부였던 혁명적 농민 출신의 지휘관, 3. 짜르 체제의 엘리트 군 간부 출신 지휘관으로 구분했습니다.
약간 억지스럽긴 해도 리즈의 구분과 보로쉴로프의 구분이 얼추 비슷하게 맞아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또 Reese의 연구가 흥미로운 점은 John Erickson이 The Soviet High Command에서 장교집단을 “전문 군인 집단”과 “비 전문 군인 집단”으로 구분한 것에서 좀 더 세분화를 시도했다는 점 입니다. 즉 전문 직업군인 집단을 다시 “순수한” 직업군인 집단과 “정치 지향적” 직업군인 집단으로 구분 함으로서 1937년의 군 숙청에서 왜 투하체프스키 집단이 집중적으로 거덜이 났는가를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샤포쉬니코프와 바실레프스키는 정치 불개입과 당의 명령에 대한 복종에 충실했기 때문에 스탈린과 충돌할 일이 거의 없었고 자신들의 업무 범위 내에서 일정한 자율성을 인정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투하체프스키 집단은 당의 중공업화에 찬성하면서도 군대가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당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고 스탈린 세력의 불쾌감을 자극합니다.
그 후의 결론은 다들 잘 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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