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그런데 이 화보에는 재미있는 사진이 몇 장 있습니다.
환자와 질병이 동시에 쓰러질 듯 |
이 기사에 실린 사진은 더 무섭습니다.
애 잡을 기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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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보당국은 불라바 미사일이 사보타지의 표적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RIA Novosti가 보도했다.
러시아 정보당국의 소식통은 RIA Novosti에 제조사의 효율적인 품질 관리 부족이나 제작 과정 때문에 미사일이 세부적인 결함을 가지고 완성되었다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제작 과정상의 태만은 사보타지와 동급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이 소식통은 경쟁상대인 러시아의 미사일 개발회사도 사보타지의 책임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고체연료 로켓과 액체연료 로켓 개발사간의 경쟁은 치열하며 “그들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Sabotage behind Bulava failure?(2009. 07. 20)
그리고 숙청은 설계자, 기술자, 그리고 항공산업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확대되었으며 연구기관들도 대량 검거의 대상이 되어 고위 행정인력에서 말단 행정직원까지 희생되었다. 예를 들어, 중앙항공역학연구소(Центра́льный аэрогидродинам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는 제멋대로 자행되는 공안탄압의 여파를 받았다. 소련의 저명한 항공기 설계자인 투폴레프(А. Н. Туполев) 조차 구제받지 못했다. 그는 체포된 뒤 잠시 수감되었다가 비밀 수용소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그의 수용소 설계국은 전쟁 기간 중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약 450명의 항공 기술자와 설계자가 체포되었으며 살아남은 300명은 비밀경찰이 감독하는 설계국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다른 사람들, 실험기 K4를 설계한 칼리닌(К. А. Калинин) 같은 사람들은 운이 없었다. K4가 하리코프 근처에서 시험 비행 중 추락해 네 명의 당원이 사망하자 칼리닌은 체포되어 사보타지 혐의로 총살되었다. 1930년대 초에 설계한 최초의 델타익 항공기와 같이 그가 과거에 했던 훌륭한 연구들도 고참 볼셰비키나 레닌의 혁명 동지들 조차 “파괴자”, “트로츠키주의 반동분자” 또는 “인민의 적”으로 몰리는 정치적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Von Hardesty, Red Phoenix : The Rise of Soviet Air Power, 1941-1945, 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1982, p.54
“When that will happen, we will totally control all humanity,” said the actor playing Mr. Bush, swigging a beer, as a picture of the globe in chains glowed behind him.
나는 중국에서 민족주의가 떠오르고 있음을 몇 가지 점에서 입증할 수 있다. 내가 집필한 지리학 교과서는 전 세계에 팔렸으며 중국어로도 번역되었다. 미국 및 해외에 있는 학생과 일반 독자들에게서 책에 대한 비판적인 코멘트가 꾸준히 들어오는데, 미국 대학에 다니고 있는 중국 학생들도 자기 나라와 출신 지역을 기술한 방식에 대해 의견을 많이 보내오곤 한다. 중국 독자들은 특히 내 책에 실린 지도에 대해 불쾌해 하는 경향이 있다. 이 지도에는 대만이 중국의 한 지방으로 분명히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인도와 카자흐스탄의 일부가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지도 않고, 한 성난 기자가 편지에서 써 보냈듯이, 러시아의 태평양 연안 남동부를 ‘도둑맞은 땅’으로 표기하지도, 분쟁 중인 태평양의 섬들을 중국에 귀속시키지도 않았기 대문이다. 그런 사고방식은 중국 못지않게 대만에서도 강한 것 같다. 나는 티베트(시짱) 지역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세심하게 기술했지만, 대만 쪽에서 격렬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청나라 때 확립된 경계선은 변경할 수 없는 중국 국경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역사적 유산을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름 데 블레이, 유나영 번역, 분노의 지리학 – 공간으로 읽는 21세기 세계사(Why Geography Matters), 천지인, 2007, 204~205쪽
독일은 그때만 하여도 훌륭하드군요. 입으로 핥은것 같아요. 산이니 사람이나 집이나 길이나 모다 기름칠한 것 같이 반지르하고 윤택(潤澤)이 나요. 그러나 노서아에 들어서니 천양지판(天壤之判)이드군요. 빈민이 많고 길이 좁고 똑 원시시대 같습니다.
윤치호, 니콜라이 2세 즉위식에 참석할 무렵의 러시아를 회상하며. 조광 1937년 5월호 38쪽
내가 알기에는 공산주의라는 것은 천하에 몹쓸 것이고, 특히 한국에서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내가 만주나 러시아에서 러시아 사람을 많이 사귀어 보았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원래 대단히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레닌이 일어나서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에는 러시아 사람들이 대단히 잔인해 졌다. 이것은 왜냐하면 결국 공산당이 잔인하고 가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 알바니아에서 공산혁명을 할 때에 하룻밤에 만 명을 죽인 바가 있는데, 결국 공산주의라는 것은 이렇게 잔인한 것이다. 그런데 한민족은 내가 알기에는 상당히 잔인한 민족이다. 그러니 공산주의만 되면 러시아 정도가 아닐 것이고 더욱 더 잔인해 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는 공산주의가 들어오면 안 된다. 또 공산주의에 한번 빠진 사람은 거기서 나올 수 없다.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406~407에서 재인용
1930년, 대기근으로 인해 일선부대에 대한 배급량이 30% 감축되자 혁명군사평의회(RVS, Революционными Военный Совет)는 각 부대들에게 식량을 보충할 보조농장(подсобное Хозяиство, 직역하면 보조생산시설이지만 대부분 농장이므로 보조농장으로 옮겼음)을 만들도록 했다. 이때부터 붉은군대에 있어 “자급자족”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됐다. 그렇지만 부대농장은 1930년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제정러시아 시기에도 육군은 예산 부족 때문에 부대 농장을 운영해야 했다. 산업계도 마찬가지였다. 각 공장들은 공장 농장을 만들어 공장노동자들이 농사를 지었다.
붉은군대는 사병들의 급식과 장교들의 부식을 충당하는데 있어서 부대농장을 군협동조합 (이하 ZVK, Закрытый Военный Кооперативный)과 경쟁하는 체제로 만들려고 했다. 장교들은 식료품을 자신의 급여를 가지고 부대농장에서 구매하도록 하자는 것 이었다. 연대 보급장교는 사병 식당용 식재료를 부대 농장이나 ZVK에서 구매하게 됐는데 이렇게 해서 부대농장은 ZVK와 직접 경쟁하는 관계가 돼 버렸다. 그러나 부대농장의 운영 책임자는 종종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부대농장에서 경작한 농산물을 해당 부대에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시장에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부대들은 혁명군사평의회의 지시가 내려오기도 전에 부대농장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부대농장 설치 명령이 내려오자 농장이 없는 부대들도 재빨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932년에 한 연대는 이미 200마리의 돼지와 60마리의 소, 토끼 100마리와 벌통 40개를 가지고 있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1개 사단 당 소 400마리, 돼지 3,200마리, 토끼 20,000마리, 그리고 1,000헥타르의 농지(귀리, 밀, 또는 과일)를 운영하도록 방침을 정했다.
대부분의 부대 농장은 병사들이 농사를 지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일부 연대는 민간인을 고용해 농사를 짓고 농장에서 재배한 작물이나 우유를 팔아 얻은 수입으로 임금을 지급했다. 한 포병대대에서는 부대가 하계 훈련을 위해 주둔지를 떠나면 장교의 부인들이 농사를 지었다. 또 다른 연대에서는 아예 장교의 부인들이 봄 파종기에 밭을 갈았다. 어떤 경우에는 제대한 병사들이 자신들이 원래 근무하던 연대의 농장에 고용돼 농사를 지었다.
많은 경우 연대 농장은 매우 효율성이 높았으며 ZVK의 수입을 줄이는데 일조했다. 제 87소총병연대의 농장은 1kg의 감자를 5코페이카에 팔았는데 해당 지역의 ZVK의 감자가격은 1kg에 10코페이카였다. 일부 농장들의 성과는 엄청났다. 예를 들어 한 연대는 농장을 처음 만들 때 3,500루블을 투자했는데 그 해 연말에는 20만루블에 해당하는 농작물을 생산했다. 니콜라이 보로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복무한 포병연대는 1932년에 버려진 국영농장 하나를 인수했는데 운영이 매우 잘 돼서 연대 소속 장교와 병사들에게 우유를 시장 가격보다 더 싼 1리터당 30코페이카에 팔 수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 소련은 너무 가난해 병사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대농장 외에도 ZVK가 존재했던 것은 다행이었다. 모든 부대농장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제때에 추수를 하지 못 하거나 아니면 농사에 시간을 많이 들이지 못 해서 농사를 망치기는 일이 많았다.
1932~33년의 대기근 기간에 식량은 군사훈련 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훈련 대신 농사를 짓는데 쓰였는지는 불확실하다. 제87소총병연대의 부연대장은 연대농장의 책임자였는데 이 사람의 경우는 매우 재미있는 사례이다. 이 장교는 부대농장 운영에 열성적이어서 연대 농장에 있는 소 38마리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부대농장과 ZVK 체제는 특히 대기근 동안에 붉은군대는 그 자체를 먹여살리는데 집중해야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군 보급체계나 ZVK 체제 모두 부대가 요구하는 최저한도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대농장은 엄청난 공헌을 했다. 부대농장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많은 부대들은 붉은군대가 확장기에 들어가 훈련이 가장 중요해 진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까지도 훈련보다는 농사에 시간을 더 배분했다. 결국 부대농장은 소련군에 있어 일반적인 부대 활동으로서 제도적으로 자리잡게 됐고 최근까지도 유지되었다.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6, pp.49~51
(전략) 그러나 7월 2일에 시작된 협상은 거의 시작하자 마자 난항에 부딛혔다. 스탈린이 소련의 국가안보에 있어서 외몽골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15년 혹은 20년 내에 일본이 다시 국력을 회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련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므로 외몽골을 소련의 영향력 안에 둬야 한다는 것 이었다. 스탈린은 송자문(宋子文)에게 말을 계속했다.
“만약 우리가 일본과 전쟁을 시작한다면 인민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막 4년에 걸친 전쟁을 끝냈는데 왜 또 전쟁을 시작하냐고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왜 소련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냐고 하겠지요. 그러니 우리 인민들에게 전쟁을 벌이는 이유가 소련의 안보를 더 굳건히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 말고 더 좋은 구실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송자문은 외몽골 문제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외몽골은 중국의 고유한 영토이기 때문에 외몽골을 독립시키는 것은 중국의 자존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 이라는 것 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스탈린이 국민당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자 만약 소련이 만주에서도 국민당의 우위를 보장하고 여기에 덧붙여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도 중단할 경우 외몽골을 소련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7월 9일, 송자문은 이에 따라 스탈린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송자문은 중국이 외몽골을 포기하는 대가로 소련이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경우 국민당 정부는 소련에게 뤼순과 다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또 만주 철도는 중국이 소유권을 가지되 운영은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하자는 제안을 내 놓았다. 스탈린은 이 제안을 받자 즉시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만주 문제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었다. 스탈린은 뤼순은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하며 또 만주 철도 역시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었다. 왜냐하면 “만주 철도를 건설한 것은 러시아 였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빨리 국민당 정부와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뤼순과 만주 철도 문제에 있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7월 11일 회담에서 스탈린은 “내가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에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했으나 결국 양측의 이견을 좁히지는 못했다. 7월 12일 회담에서도 양측은 평행선을 달렸고 결국 스탈린이 먼저 포기했다. 협상은 일시 중단됐으며 스탈린은 중국측과 포츠담 회담 이후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스탈린이 겪게 될 여러 문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Tsuyoshi Hasegawa, Racing the enemy : Stalin, Truman, and surrender of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129
볼스키 소장은 낮은 직급의 장교들에게 비판적이었다. 그는 기계화군단장, 전차사단장, 전차연대장, 그리고 각 제대의 참모장교들이 “기동전”을 수행할 만한 “작전적-전술적 식견”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소련군 기계화부대의) 장교들은 전투에서 주도권을 쥐려고 하지도 않았고 부대가 보유한 기동수단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했으며, 전투에서는 부대의 기동력을 잘 살리지 못했다. 게다가 많은 장교들은 정면공격만 거듭했으며 모든 제대에 걸쳐 정찰이라고는 할 줄 몰랐다. 위로는 군단장부터 아래로는 중대장에 이르기 까지 소련 장교들의 지휘 통제 능력은 한심한 수준이었다. 많은 장교들이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아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부대 전체가 길을 잃는 것이 다반사였다. 볼스키 소장은 기계화군단의 장교들이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 하고 있으며 부대를 어떻게 지휘할 것인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1941년 8월 1일, 전선시찰을 나간 붉은군대 총참모부 볼스키 소장의 이야기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6, p.201
“젊은 장교들은 실전 경험이 부족한데다 자신의 부대를 어떻게 통솔해야 할 지 전혀 모르는 상태다. 사단급 부대들은 전반적으로 훈련이 부족해 통합된 부대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야전 부대들의 경우 연대급의 제병협동 전투나 보전협동 전투를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 운전병들은 야지 주행이나 야간 주행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전차병들도 마찬가지 수준이다. (중략) 전차, 보병수송장갑차, 차량은 거의 대부분 신품이어서 이것을 조종하는 병사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상태이다.
1945년 3월 7일, 독일 제 9군 사령관의 보고서 중에서.
Andreas Kunz, Wehrmacht und Niederlage : Die bewaffnete Macht in der Endphase der nationalalsozialistischen Herrschaft 1944 bis 1945, Oldenbourg, 2005, s.213에서 재인용.
(전 략)
(핵병기의 등장) 이전에는 전략적으로 적에게 직접적인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병종을 동원해 여러 차례의 연속적인 작전을 펼쳐야 했다. 이제는 적국의 전략적 목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있다. 그것들은 바로 장거리 항공기와 원자탄, 또는 열핵병기를 장착할 수 있는 장거리 로켓, 그리고 같은 무기를 장비한 잠수함이다.
N. S. 흐루쇼프 동지께서는 미국의 언론 및 출판기업인 허스트(W. R. Hearst)와 가진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다.
“만약 미국의 호전적인 집단이 전쟁을 도발한다면 전장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 한정되지 않을 것 입니다. 전쟁은 바로 직접 미국 본토에서 치러 질 것 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지구의 어떤 곳이든 타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 인민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될 것 입니다. 우리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미사일을 비롯해 다양한 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전쟁이 벌어지면 이 모든 수단을 총 동원할 것 입니다.”
(후 략)
П. Ротмистров, О современом советском войеном искусстве и его характерных чертах(현대 소련의 전쟁술과 그것의 특징), 1958(영어번역본), Harold S. Orenstein 번역
모스크바에서 민스크에 포위된 부대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확실하게 확인한 것은 6월 29일 아침이었다. 스탈린은 이 소식을 듣자 격노했다. 민스크는 전략적으로는 별로 가치가 없었지만 연방의 슬라브 민족 공화국, 벨로루시아의 수도라는 점 때문에 국제적 대도시로 육성할 도시였다.(스탈린은 그루지야인 이었지만 짜르들이 그러했듯 슬라브 민족을 제국의 중핵으로 삼았다.) 스탈린은 시니컬한 인물이었지만 그 자신이 만들어낸 선전구호들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독재자적인 위험한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은 민스크의 함락 소식에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Kaunas)나 우크라이나의 리보프(L’vov)가 함락당했을 때 처럼 슬퍼하지도 않았고 드네프르 강의 방어준비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스탈린은 그 대신 민스크의 함락이 매우 중대한 전략적 패배라고 간주하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티모센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스크에 도데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스탈린이 질문했다.
“아직 충분한 답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스탈린 동지.”
티모센코는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티모센코가 대답을 주저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직 파블로프가 항복했는지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지는….”
스탈린은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그만뒀다. 그 자리에 동석한 몰로토프, 말렌코프, 미코얀, 베리야는 뭔가 말할 것을 찾느라 고민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스탈린이 말꼬를 텄다.
“나는 이 애매모호한 보고가 마음에 들지 않소. 즉시 참모부에 가서 각 전선군 사령부의 보고를 확인해 봐야 겠소.”
몇 분 뒤 소련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다섯 사람이 총참모부의 황동으로 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경비를 서던 병사는 너무 놀라 말도 못한 채 얼어 붙었다. 다섯 사람은 아무말 없이 경비병을 지나쳐서 티모센코의 집무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방에 들어섰을 때 티모센코는 주코프와 다른 여러명의 장군들과 함께 테이블 위에 상황도를 펴 놓고 토의를 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나타나자 방안에 있던 모든 장군들이 부동자세를 취했다. 티모센코는 하얗게 질렸지만 어쨌건 스탈린에게 다가가 보고했다.
“스탈린동지. 국방인민위원회와 총참모부는 현재 전선의 상황을 분석 중이며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스탈린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테이블로 가서 서부전선군 지구의 상황도를 찾았다. 스탈린은 서부전선군의 상황도를 찾은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동안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침내 스탈린이 장군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좋소. 보고하시오. 우리는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듣고 싶소.”
“스탈린동지. 시간이 부족해 아직 전선의 상황을 충분히 분석하지 못 했습니다. 많은 정보들이 아직 확인 못 한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종합된 것들은 매우 모호합니다. 보고를 드리기엔 정보가 부족합니다.”
스탈린은 격분했다.
“동지는 지금 내게 사실을 말하는 게 무서운 거 아니오! 동지는 벨로루시아를 잃었소. 이제 또 뭘 가지고 날 실망시킬 작정이오? 우크라이나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소? 발트 3국은! 동지는 지금 지휘를 하는거요 아니면 그냥 몇 명 죽었나 숫자만 세고 있는거요?”
주코프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상황 분석을 마치도록 내버려 두시지요.”
베리야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물어봤다.
“우리가 방해가 됩니까?”
“각 전선군의 상황은 매우 심각하고 우리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코프가 맞받아쳤다.
“베리야 동지. 명령을 내릴게 있다면 좀 도와주시지요?”
베리야는 불쾌한 어투로 대답했다.
“당의 지시가 있다면 그렇게 하겠소.”
주코프는 다시 대답했다.
“네. 그렇다면 당의 지시가 내려올 때 까지는 참모부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코프는 그의 “보스”에게 말을 꺼냈다.
“스탈린 동지. 총참모부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임무는 전선군 지휘관들을 돕는 것 입니다. 보고는 그 뒤에 하겠습니다.”
스탈린은 다시 분노를 터트렸다.
“먼저! 동지가 지금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큰 실수라는 걸 아시오! 두 번째로, 전선군 지휘관들을 어떻게 도울 건지는 지금부터 우리가 생각하겠소!”
스탈린은 독설을 쏟아 낸 뒤 다시 조용해 졌다. 장군들에게 발언할 것이 있으면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잠시 뒤, 주코프가 벨로루시아의 야전군 지휘관들과 통신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고 대답하자 스탈린은 또다시 격분했다. 스탈린은 주코프가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고 패배자라고 소리쳤다.
주코프는 눈물을 글썽이며 티모센코의 집무실에서 나갔다. 몰로토프가 주코프를 따라 나갔다. 잠시 뒤 주코프가 다시 티모센코의 집무실로 들어왔을 때 그의 눈가는 새빨갛게 돼 있었다.
스탈린은 그를 따라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동지들, 돌아갑시다. 좋지 않은 상황에 여길 온 것 같소.”
스탈린은 총참모부 건물을 나서면서 침울하게 말했다.
“레닌은 우리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겨줬소. 그런데 우리가 이걸 다 말아먹어 버렸구만.”
Constantine Pleshakov, Stalin’s Folly : The Tragic First Ten Days of World War II on the Eastern Front, (Houghton Mifflin), p.212-214
(전략)
소련 정부는 진압작전을 위해서 투하체프스키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사기저하로 와해 상태에 빠진 제 7군을 대신해 간부후보생에서 선발된 인원이 공격을 지휘하게 됐다. 참모대학을 졸업한 디벤코, 페드코, 우리츠키가 페트로그라드에 배치됐다. 제 10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대표단은 정치 공작을 준비하기 위해 동원했다.
투하체프스키의 공격은 3월 7일 새벽에 시작됐다. 공격 부대는 간단한 위장을 한 채 해안포대의 지원을 받으며 반란군의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크론슈타트에 배치된 야포와 기관총은 빙판을 따라 공격해오는 진압군을 분쇄해 버렸다. 공격부대의 제 2파도 반란군의 야포에 큰 피해를 입자 병사들은 돌격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간부들은 권총으로 병사들을 위협해서 겨우 앞으로 내몰 수 있었다. 바르민의 증언에 따르면 보르쉐프스키는 병사들이 빙판위에 있는 작은 보트의 뒤에 엄폐하고 움직이지 않자 병사 중 두 명을 끌어내 그 자리에서 총살해 버리고 공격을 명령했다. 이렇게 되자 진압군에 소속된 병사들 중 일부는 반란군에 합류해 버렸다.
투하체프스키는 자신의 첫번째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3월 17일, 방법을 바꿔 공격을 재개했다.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 p.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