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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1일 금요일

역사서술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관점을 보여주는 언론기사 하나

오늘 흥미로운 언론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중국 법원이 설사 '학문적 목적'이 있다 하더라도 '역사적 영웅'들을 모독하는 행위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입니다. '국가적 신화'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 자체를 뿌리뽑으려는 아주 졸렬한 태도인데,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군요.




특히 이 기사에서 다음 부분이 의미심장합니다.


청신원(程新文) 최고인민법원 민사1부 재판장은 "학술연구, 상업적 판촉 등을 명분으로, 인터넷 매체들을 주수단으로 삼아 영웅적 인물을 비방, 모욕하거나 그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명예를 훼손하고 타인의 정신적 가치를 약화하는 데서 나아가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해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각 법원이 판결을 통해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의 정신을 명백히 밝혀 사회의 영웅 숭상, 수호, 학습, 관심을 이끌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의 집권을 합리화하는 신화 중 다수가 심각한 수준의 역사왜곡에 기반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발언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직된 분위기가 외국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학자들이나, 중국 학자들이 외국에 발표하는 저술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 걱정이 됩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리샤오빙(李小兵)의 China's Battle for Korea: The 1951 Spring Offensive를 읽고 인민해방군 출신의 연구자도 해외에서는 자국 군대의 한계를 비판하는 등 꽤 자유롭게 발언을 한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는데, 이런 연구자들이 중국 본토의 이런 퇴행적 기류에 휩쓸리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사족 하나- 위에서 언급한 리샤오빙의 China's Battle for Korea: The 1951 Spring Offensive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1951년 5차 공세 패배 당시 인민해방군 내의 심각한 군기이완(장교 살해, 집단 탈영 등), 미군이나 영국군과의 교전에서 발생한 심각한 손실을 지적하는 점 등 솔직한 서술이 인상적입니다.



2012년 1월 22일 일요일

어떤 "민주화"

1945년 8월, 중소우호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던 중 있었던 일화랍니다. 협정문에 대한 논의가 오가던 중 이런 일이 있었다는군요.

중국 공산당 문제에 대해서 중요한 의견 교환이 있었다. 우호동맹조약 초안의 1조에서 소련은 국민당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정부로서 지지할 것을 서약하고 있었는데 스탈린은 여기에 한 구절을 더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국민당 정부가 “중국의 국가적 통합과 민주화”를 이행하는 것을 소련 정부가 확인한 이후에 (1조를 이행한다) 는 것이었다. 이것은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조장하기 위한 스탈린의 노력이었다. 중국 대표단은 이 조건을 삭제할 것을 주장했다.

스탈린은 이렇게 되물었다. “여러분은 중국을 민주화 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겁니까?”

쑹[쯔원, 宋子文]은 그러한 통고는 중국의 내정에 대한 간섭이 될 수 있다고 답했다. 스탈린은 이렇게 해명했다. “만약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을 계속해서 탄압한다면 우리가 중국 정부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간섭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국민당이 계속 공산당과 싸운다면 우리가 여러분을 진심으로 지지하기가 어려워 질 것 입니다.” 결국 스탈린은 포기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양보를 했습니다. 중국의 공산당원들은 우리를 저주하겠지요.” 스탈린은 이 문제에 있어 크게 양보했지만 양측은 합의를 도출하는 데는 실패했다.

Tsuyoshi Hasegawa, Racing the Enemy : 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p.224~225

사실 제가 쑹쯔원이라 해도 저런 식의 민주화는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ㅋㅋㅋ


2010년 11월 21일 일요일

진명행(무명)은 어떤식으로 사기를 치는가?

제 블로그에 자주 들러주시는 분들은 2년 전에 진명행이라는 블로거가 국공내전에 10만명의 북한군이 참전했다는 주장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논쟁이 심해져서 결국 난장판이 됐는데 나중에는 진명행이 글을 다시 쓰겠다고 하고는 그동안 썼던 글들을 다 지워버렸지요. 하여튼 진명행이 글을 다시 쓴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2년 동안 감감 무소식이다가 새로 옮긴 블로그에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올렸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없고 예전에 했던 이야기들 뿐이라 김이 새긴 합니다만 2년전에 지적하지 못한 오류들이나 지적해 보지요.

먼저 진명행이 북한군의 국공내전 참전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들고 나온 『중국 내전에 관한 제문헌』(조선인민군 총정치국, 1950)을 살펴보지요. 진명행-무명이 저보고 글을 잘라서 왜곡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중상모략을 해대니 진명행의 원 글을 통짜로 올리겠습니다.


누르시면 커집니다

 진명행은 『중국 내전에 관한 제문헌』에 등장하는 우리당이라는 용어가 조선노동당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럴까요?

그럴리가 있나요. 이건 전형적인 진명행-무명의 사기치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왜나하면 『중국 내전에 관한 제문헌』은 북한측이 중국공산당의 문헌을 번역한 자료집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내전에 관한 제문헌』에는 세 편의 번역글이 실려있습니다.

1. 자위 전쟁으로써 장개석의 진공을 전승할데 관한 중공중앙의 지시
2. 적을 각개 섬멸할데 관한 지시 :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1946 8 16
3. 중공중앙 1948 7, 8, 9 삼개월간의 경험에 관한 총결

글 세편 모두 성주체가 중국 공산당이죠. 한마디로 진명행-무명은 중국공산당을 지칭하는 우리당을 조선노동당이라고 사기를 치고 있는 겁니다.;;;;; 예시를 조금 들어볼까요.


상식적으로 중공중앙이 작성한 문건에 나와있는 '우리당'을 조선노동당으로 읽는게 말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진명행-무명은 작성주체는 살짝 잘라먹고 저걸 조선노동당이라고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죠.

궁금하신 분들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원문을 제공하고 있으니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매우 짧은 팜플렛이니 금방 읽으실 수 있습니다. 사실 가장 충격적인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진명행의 추종자들은 눈꼽만큼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쯤되면 사이비 교주가 따로없죠;;;;

사실 외국어자료를 왜곡하는 것이야 외국어를 모르는 분들도 있으니 통할 수 있겠지만 한글로 된 자료까지 잘라서 왜곡하다니 진명행의 사기치는 방식은 참 조잡하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그냥 '중국내전에 관한 제문헌'만 치면 나옵니다

2009년 8월 5일 수요일

스탈린의 생일선물

1949년 겨울, 우리의 마오 주석은 스탈린의 70회 생일을 앞두고 선배 예우를 위해 작은 성의표시를 하기로 합니다.

산둥분국 :
스탈린 동지께서 올해 12월 21일에 70회 대수(大壽)를 맞이하시오. 당중앙은 산둥산(産) 배추, 무, 골파, 배를 선물로 보내기로 결정했소. 이 전보를 받고나서 3일 이내(즉 12월 4일 이전)에 각각 5천근, 전체 2만근을 구입하면 중앙에서 수송할 비행기를 지난(濟南)으로 보낼 것이오. 비행기는 12월 4일 지난에 도착할 것이오. 시간에 주의하시오. 동지들은 위에서 말한 각 물품(배추, 무, 골파, 배)을 살 때 가장 좋은 것을 고르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오.

(당)중앙, 12월 1일 오후 5시

「中央关于为斯大林送寿礼给山东分局的电报」, 『建国以来毛泽东文稿 第一冊』, 中央文獻出版社, 1987, p.172

어딘가 황제가 오랑캐에게 물품을 하사하는 느낌이 납니다.
어딘가 오랑캐가 황제에게 조공하는 느낌이 납니다.

2007년 3월 8일 목요일

대인배의 꿈을 키웁시다

아래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일화이지요.

(전략) 그러나 7월 2일에 시작된 협상은 거의 시작하자 마자 난항에 부딛혔다. 스탈린이 소련의 국가안보에 있어서 외몽골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15년 혹은 20년 내에 일본이 다시 국력을 회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련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므로 외몽골을 소련의 영향력 안에 둬야 한다는 것 이었다. 스탈린은 송자문(宋子文)에게 말을 계속했다.

“만약 우리가 일본과 전쟁을 시작한다면 인민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막 4년에 걸친 전쟁을 끝냈는데 왜 또 전쟁을 시작하냐고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왜 소련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냐고 하겠지요. 그러니 우리 인민들에게 전쟁을 벌이는 이유가 소련의 안보를 더 굳건히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 말고 더 좋은 구실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송자문은 외몽골 문제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외몽골은 중국의 고유한 영토이기 때문에 외몽골을 독립시키는 것은 중국의 자존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 이라는 것 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스탈린이 국민당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자 만약 소련이 만주에서도 국민당의 우위를 보장하고 여기에 덧붙여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도 중단할 경우 외몽골을 소련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7월 9일, 송자문은 이에 따라 스탈린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송자문은 중국이 외몽골을 포기하는 대가로 소련이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경우 국민당 정부는 소련에게 뤼순과 다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또 만주 철도는 중국이 소유권을 가지되 운영은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하자는 제안을 내 놓았다. 스탈린은 이 제안을 받자 즉시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만주 문제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었다. 스탈린은 뤼순은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하며 또 만주 철도 역시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었다. 왜냐하면 “만주 철도를 건설한 것은 러시아 였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빨리 국민당 정부와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뤼순과 만주 철도 문제에 있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7월 11일 회담에서 스탈린은 “내가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에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했으나 결국 양측의 이견을 좁히지는 못했다. 7월 12일 회담에서도 양측은 평행선을 달렸고 결국 스탈린이 먼저 포기했다. 협상은 일시 중단됐으며 스탈린은 중국측과 포츠담 회담 이후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스탈린이 겪게 될 여러 문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Tsuyoshi Hasegawa, Racing the enemy : Stalin, Truman, and surrender of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129

한때는 우리의 마오 주석도 대인배들의 거스름 돈 이었다고 합니다. 자. 우리도 대인배의 꿈을 키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