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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4일 목요일

어떤 장군과 소나무


박정희 준장이 포병학교장으로 부임했을 때이다. 나는 포병학교를 시찰했을 때 교장실 입구에 두 그루의 큰 소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근사하고 멋진 나무다라고 혼잣말 비슷하게 말하자 박 교장은 빙슷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본래 이 자리에는 버드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버드나무란 축 늘어져 군인의 기상과도 맞지 않아 뽑아버리고 쭉쭉 뻗은 이 소나무로 바꿔 심었습니다라고 자랑하였다.

좋은 생각이다라는 말을 하고 며칠 후 다시 방문했을 때는 그 싱싱하던 소나무 잎이 빨갛게 마른 채 베어져 입구 한쪽에 쌓여 있지 않은가.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더니 토질이 맞지 않는지 실패했습니다라며 섭섭해 하였다. 맥아더 원수의 회고록에(그의 아버지가 한 말인지 기억이 애매하나) “인은 나무를 자를 줄은 알아도 성장 과정은 모른다는 구절이 언뜻 생각났다. 상무대는 습지여서인지 소나무가 자라기에는 부적격한 토질이었고, 그런데다 나무에 전문가가 아닌 군인들이 그 큰 소나무를 옮겨 심었으니 살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그의 기분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젊은 피교육 장교들이게 버드나무처럼 축 늘어진 모습이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소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유재흥, 『激動歲月: 劉載興 回顧錄』, 을유문화사, 1994, 352~353쪽.

2013년 7월 10일 수요일

백선엽 회고록의 숙군 당시 박정희 구명에 관한 서술

백선엽의 회고록은 여러 차례 출간된 바 있습니다. 백선엽 회고록의 사료적인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군 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 백선엽의 회고는 내용이 풍부한데다 백선엽의 지위 때문에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회고록이 여러 차례 나오다 보니 어떤 부분에서는 서술에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숙군당시 체포된 박정희가 구제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는 2009년 시대정신에서 간행한 『군과 나』와 2012년 책밭에서 간행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에 실린 내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한편 숙군 과정에서 중형이 선고된 군인 중 유일하게 구제된 경우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박정희 소령이었다. 방첩대 수사반은 남로당 군사책 이재복李在福이 육군사관학교에 조직을 침투시켜 일부 중대장을 통해 생도들까지 좌익 활동에 가담시킨 사실을 포착했다. 이 수사에서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체포된 사람이 육사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었고, 당시 육본 작전교육국 과장이던 박 소령이었다.

숙군 1단계 작업이 완결될 즈음인 19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 김안일 소령(준장 예편ㆍ육사)이 나에게 “박 소령이 국장님을 뵙고 꼭 할말이 있다고 간청하고 있으니 면담을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박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 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사실 사관학교 등 군내 좌익 조직 수사는 최초 단서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었다.

나는 면담을 승낙했다. 당시 내 사무실은 국방부와 방첩대 두 곳에 있었다. 내가 박 소령을 만난 곳은 명동 구 증권거래소 건물 3층 정보국장실이었다. 박 소령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초췌해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태도는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였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서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그래서였을까.

“도와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내 입에서 이런 대답이 흘러나왔다.

약 20분간 면담을 마치고 그를 돌려보냈다. 나는 일단 내 입으로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당시 숙군 작업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로버츠 미 군사고문단장도 간여하고 있었다. 나는 정보국 고문관 리드 대위로 하여금 참모총장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와 로버츠 준장에게 박 소령 구명에 관해 양해를 구했다. 동시에 육군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했다. 육본은 참모회의를 거쳐 형집행정지를 내렸고, 박 소령을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백선엽, 『군과 나』(시대정신, 2010), 416~417쪽.

2012년에 나온 회고록에서 서술하는 내용은 약간 미묘하게 다릅니다.

박정희 소장, 그는 내가 군대 생활을 하면서 자주 머리에 떠올렸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 또한 나와는 함께 근무한 적이 없어 개인적인 관계만을 따지면 특히 걸릴게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순간 숙명처럼 내 앞에 다가온 적이 있다. 아주 결정적인 장면이었으나, 나는 그가 나중에 5ㆍ16을 일으키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그를 떠올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만큼 그는 내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군인은 아니었다.

그는 1948년 좌익 남로당의 군사책이라는 혐의를 받아 숙군 작업에 걸려들었다. 단심인 군사재판에서 결국 무거운 혐의를 벗지 못해 사형을 판결 받고 말았다. 나는 당시 숙군작업을 모두 지휘하는 입장이었고, 그는 밧줄에 묶인 사형수로서 지금의 명동에 있던 증권거래소 지하 감방에 갇혀 있었다.

나는 이전에 내가 펴낸 회고록에서 이를 자세히 서술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1949년 1월 어느 날 그는 내 앞에 나타났다. 군 생활을 하면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어 그의 얼굴을 나는 기억했다. 그는 수갑을 찬 상태였다. 그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정보국 방첩과 김안일 과장이 그 만남을 주선했다.

나는 숙군을 지휘하는 정보국장이어서 김안일 과장이 마지막으로 그의 동기생인 박정희의 구명 가능성을 타진해보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퇴근 무렵 내 사무실에 들어선 박정희 당시 소령은 구명을 위해 내 앞에 섰으나, 분위기는 매우 침착해 보였다. 그는 내가 먼저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권유에도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다소 긴 침묵이 흐른 뒤 그는 “한 번 살려 주십시요...” 라면서 말끝을 흐리다가 눈물을 비치고 말았다. 나는 그 모습이 어딘가 아주 애처로워 보였다. 당시 그의 혐의 자체는 무거웠으나 실제 남로당 군사책으로 활동한 흔적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숙군작업의 진행을 위해 솔직하게 남로당 군사 조직을 조사팀에게 제공해 개전의 여지를 보였다.

나는 그런 내력을 감안해 그의 구명 요청을 들은 뒤 “그럽시다. 한 번 그렇게 해 봅시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는 육군 최고 지도부에 그의 감형을 요청했고, 결국 그는 풀려나 목숨을 구했다. 나는 또 군복을 벗게 된 그의 생계를 염려해 정보국 안에 민간인 신분으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후 나는 정보국에 김종필을 비롯한 나중의 5ㆍ16 핵심 멤버를 이룬 육사 8기생 31명을 선발해 정보국에 배치했다. 역사의 우연이라면 큰 우연이다. 나는 꺼져가는 박정희의 생명을 붙잡았고, 결국 육사 8기생까지 선발해 그와 만나게 한 셈이었다.

백선엽,『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책밭, 2012), 124~125쪽.

뭔가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서술입니다. 2012년에 나온 회고록에 실린 내용은 진영에 따라서 아주 재미있게 다룰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군요.

2013년 4월 10일 수요일

김일성은 1971년의 대선을 어떻게 봤는가?

2010년에 나온 윌슨 센터의 North Korea International Documentation Project Working Paper 2호를 읽었습니다. 이글이 막 발표됐을 때 아는 분이 흥미로운 글이니 한번 읽어보란 말을 하셨는데 한참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뒤늦게 읽게 되는군요. 이 논문에서는 1971년 6월 10일에 있었던 김일성과 차우세스쿠의 회담 녹취록을 인용하고 있어서 함께 읽어 봤습니다. 전반적으로 김일성의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이 드러나는 재미있는 내용이더군요. 슬슬 경제 성장의 동력도 떨어져 가고 경제개발 계획도 꼬여가고 있는 상황인데 차우세스쿠 앞에서 엄청난 자신감을 보여줍니다. 사실 김일성은 1980년대 까지도 한국의 경제성장을 역전할 수 있다는 허세를 부리고 있을 정도로 상황 판단력에 문제가 있었으니 그러려니 하겠습니다.


1971년 대선에 대한 김일성의 평가가 재미있어서 조금 인용해 봅니다.


(전략)


박정희는 헌법을 고쳐서 대통령 선거에 세번째로 출마하려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야당들은 선거를 보이콧 했고 박정희는 단독으로 선거를 진행하려 했습니다. 박정희는 헌법을 개정하려 하면서도 언제든지 자신의 입장을 철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그게 아니라는게 드러났습니다. 야당들은 힘을 합쳐서 진보적이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민주전선을 조직했습니다.


학생들도 자체적으로 조직화했고 모든 대중단체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박정희를 제거하고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통일 전선이 구축된 것 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김대중이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습니다. 김대중은 훌륭한 공약을 몇개 내걸었는데 통일에 관한 부분은 우리의 입장과도 비슷합니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다면 이 지역의 모든 분쟁을 해소할 것이며 이북과의 통일을 지지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다음으로는 경찰과 중앙정보부를 개혁하고, 군대를 감축하는 한편 문민정부를 세울 것이며, 외국 자본의 침투를 줄이는 한편 민족자본을 보호 육성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외정책과 관련해서는 미국 및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는 한편 중화인민공화국 및 소련과도 외교관계를 가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김대중은 남조선의 모든 대중단체 및 사회단체에 광범위한 민주적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김대중의 공약에서 빠진 것이 한가지 있다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공약은 남조선의 민중들을 움직였습니다. 심지어 박정희는 지난 선거에서 패배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선거 분위기에서 김대중은 서울시에서 전체 득표의 80%를 차지했습니다. 김대중은 시골에서도 많은 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가 당선 가능성에 위협을 느끼고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는 한편 선거를 조작해 120만표 차로 승리를 했습니다.


대선이 끝난 뒤에는 총선이 열렸습니다. 총선에서도 선거전은 매우 치열했습니다. 박정희는 총선에서도 승리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지만 또다시 부정선거를 자행했습니다. 총선에서 박정희 측은 113석을 확보했고 민주진영은 89석을 확보했습니다.


이 때문에 남조선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더욱 더 강해졌습니다. 거의 2개월에 걸쳐 수많은 학생과 청년들이 치열한 투쟁에 가세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미국이 남조선에 계속 주둔한다면 선거를 통한 승리는 불가능합니다. 이 때문에 통일 문제는 미군 문제와 연동되어 있는 것 입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남조선에서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군대가 사라진다면 남조선 인민들은 주체적으로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권을 세울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부가 들어선다면 북남간의 관계가 가까워 질 것이고 전쟁을 하지 않고도 조국을 통일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우리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미국이 물러가고 일본이 미국을 대신하지 않을 경우에 통일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일본은 남조선에 대한 경제적 투자 같은 방식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사토(佐藤榮作)는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가장 반기는 사람일 것 입니다. 박정희는 식민지 시기 일본군의 간부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토는 박정희를 높게 평가합니다. 사토는 7월 1일에 있을 박정희의 취임식에 참석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사토가 참석한다는 사실이 공표되자 서울 대학교와 다른 고등교육기관은 물론 국회에서도 이를 성토하는 선언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남조선의 정세는 이렇습니다. 동지께서는 최근 최고인민회의에서 남조선의 혁명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문제와 통일에 대한 선언이 채택된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박정희만 몰아낸다면 우리는 통일을 원하는 모든 세력과 통일 문제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정세는 이렇습니다. 남조선의 정세 변화는 민주적인 세력의 투쟁과 남조선 인민의 투쟁에 달려있습니다.


해당 인용문을 모두 읽으면 느끼시겠지만 뭐랄까요. 모든 상황을 자신이 유리한대로 해석하려는 김일성의 사고방식은 참 대단합니다. 이런 인간이 지도자로 수십년을 통치했으니 북한이란 국가가 제대로 될 수 있었겠습니까.

2011년 1월 24일 월요일

『갈등하는 동맹』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대한 서술

2010년 봄에 역사비평사에서 낸 『갈등하는 동맹 - 한미관계 60년』을 읽는 중 입니다. 책이 나왔을 때 한번 읽어보라는 이야길 듣고 사놓긴 했는데 달력이 완전히 넘어가고 나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원래 『역사비평』에 연재된 글들을 정리해서 단행본으로 엮은 것인데 이승만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까지의 한미관계를 간략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진보적인 학계가 한미관계에 대해 가진 시각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되는 저작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가까운 현재를 보는 시각인 것 같습니다. 김대중 정부 시기를 맡은 필자는 박건영과 정욱식이고 노무현 정부 시기를 맡은 필자는 박선원인데 특히 박선원은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안보전략비서관이었습니다. 애시당초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한 인물들을 필자로 선정한 셈이지요.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한미관계의 갈등은 물론 북핵위기의 원인을 모두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 집단에 돌리고 있습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경직성과 전략적 오판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겠습니다만 작년 말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에서 드러난 것 처럼 모든 책임을 부시행정부와 네오콘에게 전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태도 같습니다.

특히 이런 점은 제2차 북핵위기에 대한 정욱식과 박선원의 서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정욱식과 박선원은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이 북한의 우라늄 계획에 대한 정보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압박을 가해 북핵위기를 고조시켰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2010년 말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에서 드러난 것 처럼 북한의 우라늄 계획은 장기간에 걸쳐 치밀하게 진행된 것 입니다. 특히 박선원의 글은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변호하기 위해 쓰여졌기 때문에 더 불편합니다. 실패한 정책에 대한 변명과 책임전가처럼 불편한 것은 없지요.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대한 서술을 제외하면 개설서로 무난하다고 생각됩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분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2009년 11월 19일 목요일

야당의 올바른 자세???

60년대 잡지를 읽다가 재미있는 구절이 있어서 소개해봅니다. 1965년 초 한일회담 타결이 가시화 된 시점의 이야기 입니다.

야당지도자들은 한일회담에 대하여 두가지 전략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첫째는 한일회담은 어차피 타결되어야 하는 것인데 국민의 반일감정에 비추어 타결한 정부는 치명상을 입는다. 그러므로 적당히 반대한다는 명분과 기록만 남겨두고 박(정희)정권으로 하여금 타결하게 하자는 것인데 지금 몇몇 재야정치인은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둘째는 이번의 한일교섭은 한국측에 매우 불리한 것이어서 극한투쟁을 해서라도 반대해야 한다, 그 반대투쟁에 국민의 반일감정이 가세하면 현정권을 아주 무력하게 거세하거나 또는 더 나아가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으로 민정당 주류에서 작년에 그와같은 전략을 따랐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한일교섭이 대단원을 향해 쾌속으로 달리는 이때 야당측이 어떤 전략을 택하고 있는지가 분명치 않다. 현실이 지나치게 앞질러 가고 있으니 둘째의 전략을 택할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첫째의 전략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南載熙*, 「剩餘價値만 남기는 政治」, 靑脈 第7號(1965. 4), 15쪽

* 당시 조선일보 문화부장

오늘날의 야당 또한 민감한 일이 발생한다면 위의 두가지 중 한가지 테크를 타겠지요. 이래서 야당 노릇 하는게 쉽다는 이야기가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09년 11월 16일 월요일

박정희 때리기에 대한 잡생각

잡담을 조금 하고 싶군요.

저는 진보진영의 박정희 때리기가 당분간은 별 성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현재 진보진영이 쏟아넣는 노력만큼 성과를 거두는게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물론 장기적으로는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 있겠지요.) 박정희를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미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내려놓은 상태이며 박정희에 대한 어지간한 공격은 그런 '믿음'에 상처를 주기에는 약합니다. 박정희의 좌익경력이야 이미 그가 처음 대통령으로 나왔을 때 윤보선이 한 번 써먹어 봤지만 별로 재미도 보지 못했으며 만주국 군대에 복무했다는 점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만 박정희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흠'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박정희를 때리는데 힘을 쏟는 것은 그야말로 낭비로 보일 뿐 입니다.

재미있게도 어제 읽은 김헌태의 『분노한 대중의 사회』(후마니타스, 2009)에도 제 생각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해당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국민 모두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함께 노력한 시절에 대한 대중의 향수는 박정희가 거론될 때마다 되살아나는 대중의 기억에서 중심에 있다. 물론 반대로 박정희의 업적에 대한 비판도 무겁다. '친일논란', '군사 쿠데타 과정', '일본 제국주의식 국민 동원 모델에 대한 논란', '대일 굴욕 외교', '정적 제거와 인권 탄압', '산업화 과정에서의 영남 중심 경제개발과 화남에 대한 차별' 등 셀 수 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상에서는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더 우세하다. 이런 결과에 대해 대중들이 그의 부정적 실체를 보지 못해서라고 말할 수 도 있다. 그러나 대중들은 이미 '박정희'에 대해 그들이 알아야 할 만큼의 진실을 알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그런 평가를 내린 것일 수도 있다.

김헌태, 『분노한 대중의 사회 : 대중여론으로 읽는 한국정치』, 후마니타스, 2009, 274쪽

김헌태의 지적은 저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진보쪽에서는 박정희의 지지자들의 무지함을 비웃을 수 있겠지만 박정희 지지자들은 그들 나름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저와 같이 민주당을 찍는 사람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정치적 영향력도 꽤 있습니다.

지금까지 진보쪽에서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중을 향해 '계몽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것은 박정희에 대해 심각하게 재평가하는 움직임을 일으키지는 못 했으며 그저 진보진영에 한정된 찻잔속의 태풍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무지몽매한 박정희 교도'들을 깨우쳐 주겠다는 희생정신(?)은 나름 숭고해 보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성과가 신통치 않다면 방법을 조금 바꿔볼 필요도 있을 것 입니다. 실제 박정희가 냉혹한 독재자라 하더라도 박정희를 지지하는 대중들이 생각하는 박정희는 좀 긍정적인 모습일 수 있을 것 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고친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인데 여기에 대해 지적인 우월감을 들고 가볍게 달려든다는 것은 참 난감한 일이지요.

2009년 11월 10일 화요일

박정희 시대의 재평가

오늘은 오전에 예정된 일이 일찍 끝나서 오후시간이 비게 됐습니다. 비는 시간을 이용하여 한겨레 신문사가 주최한 '박정희 시대의 재평가'라는 학술 토론회에 다녀왔습니다.

주최측의 이름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이 토론회는 '진보진영'이 어떻게 하면 박정희를 극복할 수 있겠느냐가 주된 화두였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를 통틀어 박정희 신화를 잠재우는 것은 완전히 실패했고 오히려 그 신화 덕분에 이명박 같은 3류 짝퉁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재앙까지 겪고 있으니 '진보진영'이 박정희의 유산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있었던 토론회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토론회 자체를 급히 준비한 것인지 발표자들, 특히 정치분야 발표자들이 발표 당일까지도 발표문을 완성하지 못해 발표장에서 별도로 출력해 제공했다는 점 입니다. 특히 1부의 마지막 발표를 맡은 박명림 교수의 경우는 발표문이 부족하게 복사되어 발표문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책자로 배부된 발표문도 오탈자가 더러 있었는데 역시나 토론회를 급히 준비하느라 책자를 교정할 시간도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제분야의 발표는 그런 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정치분야의 발표는 신통치 않은 글이 있었고 전반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주최측(한국경제정책연구회, 한겨레신문사)이나 후원측(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의 성격상 박정희 정권기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이런 점은 사회자들의 발언에서 잘 드러났는데 특히 함세웅 신부의 발언은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흑백논리로 점철되어 박정희를 좋아하지 않는 입장임에도 듣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저는 박정희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박정희=절대악'이라는 공식은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반한나라당의 입장에서 박정희와 그 유산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순히 선악의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박정희를 극복하는데 무슨 도움이 될지 의문입니다. 이런 단순한 논리는 반한나라당 진영을 결속시키는데는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회색지대에 있는 다수의 대중을 끌어들이는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말이지요. 현재와 같은 방식의 박정희에 대한 공격은 장기적으로 지속되면서 영향력을 넓혀갈 경우 꽤 괜찮은 성과를 거두겠지만 단기적으로는 큰 도움이 안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박근혜가 꼽히고 있는 만큼 반한나라당 진영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이런식의 단순한 공격이 단기적으로 효과를 볼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60~70년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지는 만큼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조금씩 바뀔 것이고 그를 둘러싼 신화도 상당부분 불식될 것 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박정희가 남긴 유산, 특히 박근혜에게 계승된 정치적 자산이 단시일내에 쉽게 허물어질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반한나라당 진영은 박정희 때리기를 부차적인 일로 미뤄두고 중간지대를 장악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것이 더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박정희 문제가 4대강 사업과 같이 현실의 시급한 문제들을 덮어버리는 것은 별로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것 같습니다.

물론, 박정희 문제가 아주 먹음직스러운 떡밥이라는점은 분명합니다.

2009년 6월 3일 수요일

퍼레이드용 군대

1949년 8월 19일, 미군사고문단 단장인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은 육군부 계획작전국(Plans and Operations Division)의 볼테(Charles L. Bolte) 소장에게 한국의 상황에 대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에는 광복절 기념식에 대한 로버츠 준장의 짤막한 감상이 실려 있는데 꽤 의미심장합니다.

(광복절도) 다른 “중대한” 날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육군의 열병식은 굉장했습니다. 한국군은 마치 베테랑 군인들 처럼 보였습니다. 장비, 군복, 차량 모두 흠 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만약 한국군이 열병식을 하는 것 만큼만 싸울 수 있다면 우리가 여기 있을 필요도 없을 겁니다.

As is usual on these “critical” days, nothing happened.* The Army parade was a knock-out. They looked like veterans – equipment, uniforms, vehicles all spotless. If they can only fight as well as they parade, we are “in”.

로버츠 준장이 볼테 소장에게(1949. 8. 19), RG 338, KMAG, Box 8, Brig General W. L. Roberts(Personaal Correspondence, Memorandum) 1949

*북한의 도발이 없었다는 내용.

미국인들은 한국군 장교들이 겉치레를 중시하고 위세를 부리는데 신경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고문관들의 불평 중 하루 종일 훈련은 하지 않고 대대 전체를 동원해 사열준비만 하는 경우도 있는걸 보면 한국 장군들은 사열식 페티쉬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 이죠.

박정희가 사단 급 병력을 동원해 사열식을 하는 등 요란한 전역행사를 했던 걸 보면 정말 한국 장군들은 폼 잡는걸 너무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2009년 4월 18일 토요일

책을 읽던 중 떠오른 민족주의에 대한 잡상

어제 낮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50~60년대 경제개발에 대한 책 몇권을 꺼내 놓고 두서없이 읽었습니다. 원고마감이 코앞에 닥쳤는데 이게 무슨 미친짓 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근로의욕이 뚝 떨어졌는지라 어쩔 수 없더군요. 다행히 오후 늦게 근로의욕을 회복하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어제 오후에 읽던 책들은 내용이 내용인지라 50~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될 무렵 한국의 민족주의적 정치세력과 미국의 대한정책이 가지는 시각차이에 대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1950년대의 미국은 아시아에서 높아져 가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사회주의화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이때문에 4.19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미심쩍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민족주의적 성향은 5.16 쿠데타 주도세력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이야 박정희의 독재적 측면이 부각되어 일반적으로는 5.16 쿠데타가 가진 민족주의적 성향을 간과하는 분들이 많은데 60년대에는 그렇지가 않았지요.

결국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이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으로의 선회한데에는 미국의 정책적인 압력이 많이 작용했습니다. 사실 미국의 원조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이 무리하게 내포적 공업화를 추진했다면 북한이 70년대 부터 겪었던 경제적 파탄을 조기에 겪고 남한의 국가 자체가 붕괴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여튼 40~60년대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우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2009년 3월 27일 금요일

박정희 전역식에 동원된 부대의 규모

박정희는 1963년의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 군에서 예편합니다. 군부는 대내외적인 압력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민정이양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태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12월에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선거를 국민직선제로 바꿉니다. 이것은 꽤 현명한 선택이었는데 만약 제2공화국과 같이 대통령 간선제를 채택한다면 군부출신이 집권하는 데는 애로사항이 제법 꽃 피었을 것 입니다.

하여튼 군부가 지지하는 유력한 카드인 박정희는 대통령선거에 대비하기 위해서 급히 전역합니다. 박정희의 전역식에 대해서 육군본부가 발간한 『육군발전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63년 8월 30일에는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출하기 위하여 5∙16군사혁명을 통수한 박정희 대장의 역사적인 전역식이 당 군단 관할지역인 강원도 철원 지포리의 TCPC사격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 전역식에는 제3사단 예하의 3개연대와 포병 11 및 833대대 1개 포대, 제 3전차대대 제 1중대 및 2중대(M-47 27대), 4.2중포 1개 포대, 제 6대전차유도탄 소대의 병력과 장비가 동원되었다.
이 식전의 참가인원은 3부요인, 주한 외교사절, 3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사령관, 주한 미 8군사령관 외에 600여명이 참석하였다.

육군본부, 『육군발전사』2권, 1970, 191쪽

그리고 아래는 전역식 동영상입니다.



인용한 글에 언급된 동원 부대나 링크한 동영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상의 대선출정식을 겸한 행사여서 그런지 군부의 과시욕이 느껴집니다. 거의 사단급 병력이 동원된 셈인데 뉴스를 통해 접하는 외국의 4성급 장성들의 전역식 중에서 저 정도 규모의 전역식은 아직 보지를 못 했습니다.

저런 과시성 행사를 위해 동원된 사병들이 불쌍하군요.

참고로, 주한미군 사령관을 역임한 버웰 벨(Burwell B. Bell) 대장의 전역식 동영상을 링크합니다. 박정희의 전역식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군요.

Tennessee: Gen. Bell changes command

2008년 12월 23일 화요일

유가환급금으로 지른 책 두 권

유가환급금을 받아서 책을 두 권 샀습니다.

한 권은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의 ‘박정희 정부의 선택 : 1960년대 수출지향형 공업화와 냉전체제’이고 다른 한 권은 테사 모리스 스즈키(Tessa Morris-Suzuki)의 ‘북한행 엑소더스 : 그들은 왜 북송선을 타야만 했는가?’ 입니다.

기미야 다다시의 ‘박정희 정부의 선택’은 저자가 1991년에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을 증보하고 문체를 다듬어서 내놓은 저작입니다. 1991년의 논문은 1차5개년 계획의 수립과정만을 다루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단행본은 범위를 더 넓혀서 1차5개년 계획의 진행과정과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무역특수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보론으로 남한의 민주화 운동과 518도 다루고 있는데 본문의 내용과는 약간 동떨어진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단행본은 일단 1991년의 논문보다 문장이 많이 가다듬어 져서 읽기가 편합니다. 1991년의 박사논문은 학술논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외국인이 쓴 한글이라는 점에서 다소 문체가 어색한 면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 단행본의 문체는 읽기 편하고 좋습니다.
일전에 이글루스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시기의 경제성장정책에 대한 논쟁이 있었을 때 제가 이 주제와 관련해 흥미롭게 읽었던 책을 몇 권 추천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좀 심하게 게으르다 보니 그러질 못했죠;;;; 기미야 다다시의 이 단행본은 박정희 정부 초기의 경제정책에 대한 꽤 재미있는 개설서입니다. 일단 박사논문의 주제에서 범위를 더욱 확장해 베트남전 특수까지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해 2차산업 주도의 경제구조로 개편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61년에서 1970년 사이의 기간은 한국의 산업구조가 극적으로 개편된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박정희 시기의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특히 기미야 다다시의 박사논문은 군사정권이 집권 초기 이승만 시기 경제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수출대체 위주의 공업화를 구상하다가 국내외적인 요소로 이 계획이 좌절된 뒤 수출주도의 공업화로 이행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으며 이 단행본도 이 주제의 연장선상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즉 박정희 정권 초기 경제개발에 대한 논쟁을 이해하는데 꽤 유용합니다. 또한 관련 주제에 대한 단행본 중 가장 최근의 저작(2008년 1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이라는 점도 강점입니다. 최근까지의 관련 연구사 정리가 잘 되어 있어 논쟁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테사 모리스 스즈키의 ‘북한행 엑소더스’는 영어판(Exodus to North Korea: Shadows from Japan's Cold War)을 사려고 아마존의 Wish List에 담아두고 있다가 다른 책들에 밀려 사지 못하는 사이에 번역판이 먼저 나와 버렸습니다. 한국어판이 더 싸고 요즘은 환율문제도 있는지라 한국어판으로 질러버렸습니다. 재미있게도 이 책은 저자의 요청에 따라 일본어판(北朝鮮への エクソダス―「歸國事業」の 影をたどる)을 번역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는데 북송과정에서 일본정부와 일본적십자사가 수행한 역할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북한은 일본측에서 재일 조선인의 북송을 추진하고 있던 초기에는 북송에 소극적이었다고 하는군요. 일본이 이승만 정부의 북송반대 운동을 제압하는데 미국의 지원을 받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거스름돈의 운명이란;;;;)

2008년 7월 23일 수요일

남한과 북한의 5개년 계획에 대한 몇 가지 잡상

지난 해에 북한 경제 관련 논문을 조금 읽다가 생각난 것들을 「북한의 50~60년대 경제성장에 대한 잡상」이라는 제목으로 끄적인 적이 있었는데 최근 sonnet님 등 여러 대인들께서 이 썰렁한 잡글을 인용해 주셔서 조회수가 대폭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인용된 것을 보니 박정희와 김일성의 공업화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더군요. 많은 분들의 견해를 접하게 되어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여러 대인들께서 이 어린양의 싱거운 글에 관심을 보여주셨으니 변변찮으나마 예전에 했던 이야기에 몇 가지 사족을 달아 볼까 합니다. 깔끔하게 정리가 안된 어수선한 글이라서 미리 읽으시는 분들께 양해를 구합니다.

먼저 남한과 북한의 5개년 계획의 성격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sonnet님이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이라는 글에서 양자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요상하게도 박정희를 싫어하는 분들은 간판이 똑같다는 이유로 박정희의 5개년 계획이 김일성의 그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죠. 기본적으로 남한의 5개년 계획은 무역에 기반한 성장을 추구한 것인 반면 북한의 5개년 계획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이라는 망상적 목표에 가용 자원을 싹 쓸어넣은 정신병적 도박이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5개년 계획의 성격은 1958년 3월의 당 제1차 대표자 회의에서 채태된 결정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결정서에서는 “제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토대를 확고히 축성함으로써 우리 공업의 식민지적 편파성과 기술적 락후성을 완전히 퇴치하고 민족경제의 자립적 토대를 더욱 공고히”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즉 5개년 계획의 목표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해외 무역을 통한 성장을 추구한 남한의 5개년 계획과 근본적인 성격 부터가 다릅니다. 그리고 이 5개년 계획은 기본적으로 중공업에 의해 이끌어져 나갈 것 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중공업이 없이는 경공업과 농업이 도저히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1957년의 경제 성과를 예로 들어 중공업 우선노선을 반대한 세력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1957년의 경제적 성과는 소련과 동유럽의 막대한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달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이 문제점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북한은 자체적으로 중공업 위주의 발전을 수행할 만한 자본이 아직 축적되어 있지 않았고 여전히 외부의 경제적 원조가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이 문제점은 김연철의 연구가 잘 지적하고 있는데 이미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이 종결된 시점에서 사회주의권의 원조는 감소추세에 있었고 북한은 축적된 자본의 부족과 기술수준의 저열함을 ‘정신력’으로 상쇄한다는 심히 일본제국주의 스러운 방식으로 나갑니다. 대표적인 것이 천리마 운동이지요. 외형적으로 보면 분명히 북한의 1차 5개년 계획은 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왔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분석하면 생산품의 질적 저하가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1950년대 후반기부터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에너지 공급이 감소하자 대외의존적인 북한의 중공업은 치명적 타격을 받습니다.

※ 1950년대 소련과 동유럽의 대북한 원조에 대해서는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지원」에 조금 적은 것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한가지 더 이야기 하자면 1960년대 북한의 공업생산 성장률은 1950년대의 전후 복구기와 비교하면 급격히 저하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의 공업 총생산액은 연평균 39%에 달했지만 1961년에 들어오면 이것은 14%로 낮아지고 1963년에는 8%로, 그리고 1964년에 17%로 증가했다가 다시 감소해 1966년에는 아예 마이너스 성장을 합니다. 북한경제는 벌써 1960년대부터 엉망이었던 것 입니다.

일단 정리하자면 김일성은 소련의 5개년 계획을 모방해 지속적인 중공업화를 추진했지만 이것은 북한 자체의 경제적 역량 미비로 실패하게 됩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중공업화는 근본적으로 국가 자체의 자기완결적 경제체제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데 이것은 제한된 자원을 중공업에 올인하는 도박이기 때문에 위험도가 높은 정책입니다. 스탈린 시절의 소련은 자체적인 경제적 자원 규모가 컸기 때문에 중공업화로 인한 후유증을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었지만 경제 규모가 작은데다 외국의 원조에 의존한 북한은 실패할 경우 그 충격을 흡수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실패하면서 북한 경제는 1960년대 내내 심한 부침을 거듭하며 침체에 빠졌는데 김일성은 끝까지 중공업화를 포기 하지 않기 위해서 1970년대에 서방의 자본을 통한 중공업화를 추진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 아시다시피 대 재앙이었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1970년이 되면 이미 남한은 전체 수출의 50% 이상을 경공업 제품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출 기반을 마련했지만 1970년대 초반 국제 경제체제에 발을 담근 북한은 여전히 1차산업 위주의 수출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일쇼크로 인한 원자재가 하락은 북한에게 결정타로 작용했지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원조라는 관점을 약간 확장해 보면...」이라는 기린아 님의 글에 인용된 도표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저는 처음에 이 도표를 봤을 때 이 도표가 10년 단위의 수출 통계를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진 책을 몇 권 뒤져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도표는 이대근의 『한국무역론』(2003)에 실린 도표와 비슷한데 이대근과 같은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대근의 한국 무역론에 실린 도표는 1961년과 1970년을 기준으로 한 수출상품의 구성 변화를 나타낸 것 입니다. 즉 기린아님의 블로그에 인용된 표의 “1960”은 아직 박정희가 집권하기 전인 1961년의 수출구조를 나타내는 것이고 “1970”은 글자 그대로 1970년의 수출구조를 보여주는 것 입니다.

이대근의 연구에 따르면 1961년도의 수출은 1위가 철광석(13.0%), 2위가 중석(12.6%), 3위가 생사(6.7%), 4위가 무연탄(5.8%), 5위가 오징어(5.5%), 6위가 활선어(4.5%), 7위가 흑연(4.2%), 8위가 합판(3.3%), 9위가 쌀(3.3%), 10위가 돼지털(3.0%)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1차 5개년 계획의 성공과 뒤 이은 2차 5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이런 구조는 급격히 변화합니다. 1970년의 수출 구조를 보면 1위는 섬유류(40.8%), 2위는 합판(11.0%), 3위는 가발(10.8%), 4위는 광산물(5.9%), 5위는 전자제품(3.5%), 6위는 과자류(2.3%), 7위는 신발류(2.1%), 8위는 담배(1.6%), 9위는 철강제품(1.5%), 10위는 금속제품(1.5%)로 변화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1960년대 중반 이후 남한의 수출구조는 1차산업에서 2차산업으로 변화해 있었고 1970년의 수출구조 통계는 그 것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 입니다. 북한이 여전히 1차산업 생산품 위주의 수출을 구상하고 있을 때 남한은 이미 오래 전에 수출구조를 혁신하는데 성공한 것 입니다. 물론 김낙년이 지적한 것 처럼 1960년대 남한의 공업화는 부실한 재무구조를 가진 수출기업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시작부터 제자리에서 부침을 거듭하다가 스스로의 모순에 짓눌려 자빠져 버린 1960년대의 북한의 공업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성공이었습니다.

2008년 4월 1일 화요일

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 : Koreans, Americans, and the Making of a Demcracy - Gregg Brazinsky

서기장 동지께서 이라크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공통점을 비교한 글을 써 주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 아무리 천하의 미국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은 언제나 있는 법 이지요.

미국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이 만든 세계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번의 이라크 전쟁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이 겪은 수 많은 실패 사례 중 하나로 끝날 것 입니다. 결국 상황이 이 지경에 되고 나니 많은 미국인들은 과거에 대해 좀 더 진지한 접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이 시도한 수많은 국가 건설 시도 중에서 성공한 사례는 과연 몇 건이나 있는가? 맙소사! 미국이 성공한 사례는 ‘정말로’ 한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지 않은가! 결국 미국인들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이 그토록 많은 지원을 했건만 왜 이리 성적표는 시원치 않은 것인가?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 표지

브래진스키(Gregg Brazinsky)의 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라는 책은 이 물음에 답을 구하기 위해 미국이 사실상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한국의 사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브래진스키는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수많은 나라들에게 풍요로운 경제와 민주주의를 이식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퍼부었건만 왜 이렇게 쪽박만 줄줄이 차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식하고자 하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도데체 뭐가 문제인 것인가? 브래진스키는 미국은 후진국들에게 바람직한 발전의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결국 그 방향으로 갈 것인가는 각 국가들의 선택이며 미국이 실패하는 이유는 이 점을 간과하고 무조건 미국의 방식을 들이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브래진스키는 한국이 성공을 거둔 원인으로 한국의 내재적인 요인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즉 한국은 미국이 실패한 다른 나라들과 배경부터 달랐다는 것 입니다.

브래진스키는 먼저 한국이 유럽 국가가 아닌 일본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백인이 아니라 같은 아시아인에 의해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미국이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 일본 같은 제국주의자로 본 것이 아니라 ‘해방자’로 보았고 그 때문에 미국이 큰 부담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것 입니다. 베트남과 중동은 백인에 의해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게 보였다는 것이지요. 반면 한국은 미국의 헤게모니가 한국의 전통적 가치를 파괴하지 않을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다음으로는 적절한(?) 독재를 꼽고 있습니다. 즉 이승만은 폭압적이었고 지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컸지만 1948년의 시점에서 땜빵으로 써먹기에는 그럭 저럭 적절한 선택이었고 박정희도 결국 지독한 독재자가 되지만 1960년의 과도기에 미국이 지지했던 온건한 장면 보다 나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브래진스키는 장면 정부가 미국이 기대하는 수준의 경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가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브래진스키는 박정희가 미국식의 완전한 자유시장 노선을 취하지 않고 국가가 통제하는 경제 정책을 펼친 것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한국의 특수성이 부각됩니다. 즉 식민지 시기에 일본식으로 교육받은 엘리트 집단이 존재했던 것을 한국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꼽는 것입니다. 브래진스키는 일본식의 권위주의적 교육을 받은 남한의 군사 엘리트들이 미국이 이식하고자 한 것들을 한국(+일본)식으로 한국 실정에 맞게 소화해서 받아들인 것이 성공의 열쇠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박정희 체제까지는 미국의 지지가 긍정적 영향을 끼쳤지만 박정희 암살 이후의 위기 상황에서 전두환을 지지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미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적 성공을 거둔 상황에서 권위주의적 독재는 효용을 다한 상태였고 전두환을 지지 함으로서 미국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어쨌건 브래진스키는 전두환을 제외한 독재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점은 한국에서 불편하게 받아들여지겠지요.

다음으로 저자는 한국이 경제 성장 이후 민주화에 성공한 요인은 무엇인가에 주목합니다. 후진국이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중산층이 필요하지만 안정적인 중산층이 절대적 요소는 아닙니다. 브래진스키는 이 점에 대해 싱가포르는 안정적인 중산층을 갖췄지만 정치적인 면에서 후진적이라는 점을 지적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을 민주화 시킨 동력은 무엇인가? 브래진스키는 민주화에 있어서도 한국의 내재적인 요소가 결정적이었다고 봅니다. 물론 여기서도 미국의 역할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미국이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의 교육과 사회발전에 투자한 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교육에 대한 원조를 통해 한국의 지식인, 정치인들이 미국이 중요시하는 가치,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미국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한국인들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설사 미국의 교육에 대한 지원이 없었더라도 한국의 청년과 지식인들은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길을 택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브래진스키는 경제발전과 민주화에서 한국의 내재적 요소가 기여한 바를 높게 평가하고 미국이 여기서 제 3세계의 국가건설에 대한 교훈을 얻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자는 미국이 후진국의 국가건설을 지원할 때 미국의 방식을 일방적으로 들이밀 것이 아니라 해당 국가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더 나은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라크의 경우는 이러기에는 너무 늦었으니 다음 국가를 찾아 봐야 될 것 같습니다.

2007년 10월 20일 토요일

세계적 대인배 허경영 총재

모당의 대통령 후보가 부시 대통령과의 면담을 뒷구멍으로 추진하다가 나라망신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아. 정말 통탄치 않을 수 없는 비극입니다. 일국의 대통령 후보가 고작 이정도의 소인배라니 말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 한반도에 세계적 대인배가 한 분 계십니다.

말 안해도 다 아실 그분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2001년 1월 18일부터 28일까지 내가 미국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 당선 축하파티에 초청되어 워싱턴에 가서 부시대통령(사진 참조)과 부통령, 그리고 상하원의원들을 만났었다. 그리고 미국 공화당과 한국 공화당과 자매결연도 맺었었다.


그런데 그때 미국의 고위 공직자 한 사람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략)

“미국이 진정 존경하는 지도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거대한 미국과 맞서서 싸우며 자기 민족을 살리겠다고 몸부림친 민족주의자 반미주의자인 박정희 대통령과 월맹의 호지명, 그리고 허경영 총재 당신 같은 민족주의자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중략)

그는 미국이 변해가고 있음을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여야와 자민련까지도 고어가 대통령이 될 것으로 보고 지지를 했었는데 나는 표범상인 부시가 염소상인 고어를 이기고 대통령이 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부시에게 지지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여야의 국회의원 20여명이 워싱턴의 호텔에 머물렀지만 그들은 결국 부시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허경영,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10판), 도서출판 새나라, 2000, 2002년, 313~314쪽

2007년 9월 16일 일요일

1970년대 남북한의 2차대전사 인식 - 아주 단적인 예 하나

꽤 많은 분들이 김일성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이나 폐쇄적, 권위주의적 체제였다는 점에서는 동급이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는 맞는 말인데 개인적으로는 개방성 측면에서 박정희 정권이 김일성 정권에 비하면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오십 보 백보를 엄격히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지요.

사소한 예 하나.

노르망디 작전

제2차세계대전 시기인 1944년 프랑스의 서북쪽 노르망디에서 진행한 미영제국주의 련합군의 상륙작전.

6월 6일부터 7월 21일까지 진행되었다. 미영제국주의자들은 쏘련과의 국제협약에 의하여 1942년에 구라파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기로 되여있었다. 그러나 미영제국주의자들은 제2전선의 형성을 2년동안 태공함으로써 전쟁을 지연시키며 쏘련의 약화를 기도하였다.

쏘련군대가 능히 단독으로 파쏘독일을 쳐부시고 구라파인민들을 파쑈독일의 기반으로부터 해방시킬수 있게 된 1944년에 이르러 미영제국주의자들은 전후 구라파에서의 제놈들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 작전을 조직하였다. 당시 파쑈독일은 쏘독전선에 기본력량을 투입한 관계로 프랑스 북부 연안지대방어에는 한 개 집단군만이 동원되였고 상륙지대에는 다만 3개 보병사단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쏘독전선에서 쏘련군대의 결정적인 진출과 프랑스에서의 항쟁운동의 강화, 독일무력의 상대적인 약화는 미영제국주의군대로 하여금 이 작전을 비교적 쉽게 수행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것은 구라파에서의 반파쑈전쟁행정에서 그 어떤 본질적인 영향도 주지 못하였다.

력사사전, 1971년판, 상권 433쪽

왜곡으로 가득찬 헛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력사사전 1971년 판에는 독소전쟁 관련 전투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만이 기재되어있습니다. 반면 김일성의 빨치산 전쟁은 전투라고 할 수 없는 보천보전투를 포함해 셀 수 없이 많이 있더군요.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은?

북조선과 비교하면 게임 오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북한이 고작 이 정도의 저급한 역사 인식만 가지고 있던 반면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는 비록 미국을 거쳐 들어온 것일 망정 소련의 역사 인식을 반영한 서적들이 합법적으로 유통이 되고 있었거든요.

1973년에 출간된 발렌타인 2차대전사 시리즈, 즉 승리와 패배의 6권 스탈린그라드와 11권 쿠르스크는 미국인 저자인 제프리 쥬크스가 썼지만 기본적인 서술은 소련의 공식 역사서술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쿠르스크는 거의 전적으로 소련 공간사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지요.

박정희가 독재자인 것은 맞지만 김일성 정권과 비교한다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소한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생각하고 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도 있었지만 북조선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런게 없지 않습니까.

정부가 모든 출판물을 통제하는 국가와 제약은 있을 망정 출판의 자유가 있는 나라를 어떻게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2007년 5월 23일 수요일

남한의 병역 의무에 대한 잡상

잡설입니다.

이승만 담화집을 읽었을 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군사 문제와 관련된 담화나 연설에서 전통적인 역할모델을 찾는 경향이 보였다는 점 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의 사례와 국민 개병제를 연결 짓는 과감한(!) 발상입니다. 마치 대한민국의 도덕 교과서가 민주주의의 원형을 “화백제도”에서 찾듯 국민개병제의 원형을 고구려에서 찾는 것 이지요. 옳고 그름을 떠나 아주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그런데 왜 고구려는 이승만에게 있어 한국적 국민개병제(?)의 역할이 됐을까요? 이점은 꽤 흥미로운 문제인데 아마도 유럽식의 국민개병제, 즉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의 개념이 기본으로 탑재된 유럽식의 국민개병제라는 것이 1950년대의 남한 실정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국민을 국가에 복종해야 하는 통치의 대상정도로 봤던 이승만이니 만큼 근대유럽의 사례를 들기 보다는 고대 왕조국가의 사례가 좀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닐까도 생각됩니다. 아마도 남한의 국민들이 병역에 따르는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은 이승만이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었을 것 입니다. 사실 국민방위군 같은 개념없는 사고를 내던 것이 이승만 정권이니 만큼 유럽식의 의무와 권리가 결합된 개병제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을 것 같기도 하군요.

이승만 뿐만 아니라 박정희 막부에서도 국민을 동원하는 논리는 민주주의 사회의 그것 보다는 왕조시대의 논리에 가까웠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진지하게 고찰한 것이 아니라 근거도 빈약하고 모호하기는 합니다만 이박사나 박장군이 국민의 권리에 대해서 관심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거의 확실한 듯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왕조시대의 전통을 억지로 현대에 끌어다 사용한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사실 이박사나 박장군은 민주국가의 대통령이라기 보다는 전통왕조의 국왕에 가까운 통치자였으니까요.

남한의 병역 의무라는 것이 서구사회의 병역 의무 보다는 왕조시대의 부역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선대의 훌륭한(?) 지도자들에게 그 원인이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한국의 징병제도를 개선하려면 이런 부역 같은 느낌이 나지 않도록 하는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군요.

2007년 3월 25일 일요일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해동고승전 권1 일해거사 전두환

일해거사 전두환은 본시 한국의 국왕이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출가하여 2년 만에 득도하였다.

전두환은 합천 사람으로 후버3년 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가지를 가르치면 몰라도 될 것 까지 깨치니 모두가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아이젠하워 3년에 군관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흉중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그 뜻을 펼칠 도리가 없었다.

케네디 원년 5월 16일 장군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켜 전횡을 일삼던 문하시중 장면을 잡아들이고 사직을 반석에 세웠다. 전두환이 이 소식을 듣고 무과에 합격한 장사들을 모아 박정희를 찾았다.

“소장 비록 무반의 말석에 불과하나 장군께서 이렇게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보고 있겠사옵니까?”

박정희가 감격하여 전두환을 비장으로 삼았다. 케네디 황제가 박정희를 한국 국왕에 봉한 뒤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마침내 닉슨 5년에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카터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삼십육계를 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황제가 문하시중 최규하를 한국 국왕에 봉했으나 최규하는 글만 아는 선비인지라 용맹과 위엄이 없어 백성들이 심히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북쪽의 홍건적들이 준동할 기미를 보이니 민심이 더욱 더 흉흉하였다. 국왕 최규하가 도원수 정승화에게 군율로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라 하였으나 정승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두환이 나라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여기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국왕 최규하를 알현하였다. 최규하는 평소 스스로 국왕 될 재목이 아님을 알고 양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두환을 만나 그의 뜻을 들으니 크게 기뻐하며 양위 할 뜻을 비추었다. 전두환이 황공해 하며 거듭 사양하였으나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니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전두환은 본시 덕이 많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국왕이 된 뒤 옛 일을 잊지 않고 따르던 무리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후하게 내리니 많은 이들이 과연 전두환은 신의를 지킨다며 감탄하였다.
전두환이 국왕에 오르자 북괴의 김일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김일성은 혹여 전두환이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 조공으로 쌀과 시멘트를 바쳤다. 한국의 여러 국왕 중 북괴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은 전두환이 처음이었다. 이로서 전두환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니 레이건 황제도 크게 기뻐하며 전두환에게 “平北傀保國大將軍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레이건 8년,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전두환은 본시 불심이 깊어 항상 출가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내 왕위에서 물러 난 뒤 출가할 마음을 굳혔다. 전두환이 출가할 것을 결심하니 그의 처 이씨가 따르기를 간청하였다. 전두환이 대비 이씨와 함께 출가하여 백담사로 가니 많은 이들이 놀랐다. 전두환이 출가하니 본시 머리 숱이 거의 없어 따로 삭발할 필요가 없었다.

조지 부시 2년 12월, 마침내 전두환이 도를 얻었다. 사람들은 석가모니도 득도하는데 7년이 걸렸는데 전두환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여러 신이(神異)한 일을 행하였다.

노태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김영삼은 야소교도로 불도를 탄압하였다. 마침내 상황 전두환과 노태우도 불교를 숭상한다 하여 잡아들였다. 이때 전두환은 감옥에서 일절 음식을 먹지 않고 참선하였는데 그 기운이 범상치 않으니 옥리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 하였다.

클린턴 5년, 한국에 큰 환란이 닥치니 많은 이들이 이것은 김영삼이 불도를 탄압한 때문이라 하였다. 클린턴 황제가 김대중을 국왕에 봉했다.

김대중은 국왕이 되어 다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상왕으로 복위시켰다.

이때 전두환은 김영삼이 모든 재물을 빼앗아 전 재산이라고는 29만원 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덕망이 높아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흠모하여 찿아왔다. 하루는 대비 이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찿아오는 객은 많은데 지금 있는 돈이라고는 29만원 뿐이라 세뱃돈이 부족하니 이를 어찌 하면 좋겠사옵니까?”

전두환이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객이 오는대로 세뱃돈을 듬뿍 주어 보내도록 하오.”

대비 이씨가 반신 반의하며 손님이 오는 대로 출금하여 세뱃돈을 주었는데 통장에는 여전히 29만원이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니 더욱 더 전두환의 이름이 높아졌다.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해동고승전 권1 일해거사 전두환

일해거사 전두환은 본시 한국의 국왕이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출가하여 2년 만에 득도하였다.

전두환은 합천 사람으로 후버3년 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가지를 가르치면 몰라도 될 것 까지 깨치니 모두가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아이젠하워 3년에 군관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흉중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그 뜻을 펼칠 도리가 없었다.

케네디 원년 5월 16일 장군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켜 전횡을 일삼던 문하시중 장면을 잡아들이고 사직을 반석에 세웠다. 전두환이 이 소식을 듣고 무과에 합격한 장사들을 모아 박정희를 찾았다.

“소장 비록 무반의 말석에 불과하나 장군께서 이렇게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보고 있겠사옵니까?”

박정희가 감격하여 전두환을 비장으로 삼았다. 케네디 황제가 박정희를 한국 국왕에 봉한 뒤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마침내 닉슨 5년에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카터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삼십육계를 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황제가 문하시중 최규하를 한국 국왕에 봉했으나 최규하는 글만 아는 선비인지라 용맹과 위엄이 없어 백성들이 심히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북쪽의 홍건적들이 준동할 기미를 보이니 민심이 더욱 더 흉흉하였다. 국왕 최규하가 도원수 정승화에게 군율로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라 하였으나 정승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두환이 나라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여기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국왕 최규하를 알현하였다. 최규하는 평소 스스로 국왕 될 재목이 아님을 알고 양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두환을 만나 그의 뜻을 들으니 크게 기뻐하며 양위 할 뜻을 비추었다. 전두환이 황공해 하며 거듭 사양하였으나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니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전두환은 본시 덕이 많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국왕이 된 뒤 옛 일을 잊지 않고 따르던 무리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후하게 내리니 많은 이들이 과연 전두환은 신의를 지킨다며 감탄하였다.
전두환이 국왕에 오르자 북괴의 김일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김일성은 혹여 전두환이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 조공으로 쌀과 시멘트를 바쳤다. 한국의 여러 국왕 중 북괴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은 전두환이 처음이었다. 이로서 전두환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니 레이건 황제도 크게 기뻐하며 전두환에게 “平北傀保國大將軍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레이건 8년,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전두환은 본시 불심이 깊어 항상 출가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내 왕위에서 물러 난 뒤 출가할 마음을 굳혔다. 전두환이 출가할 것을 결심하니 그의 처 이씨가 따르기를 간청하였다. 전두환이 대비 이씨와 함께 출가하여 백담사로 가니 많은 이들이 놀랐다. 전두환이 출가하니 본시 머리 숱이 거의 없어 따로 삭발할 필요가 없었다.

조지 부시 2년 12월, 마침내 전두환이 도를 얻었다. 사람들은 석가모니도 득도하는데 7년이 걸렸는데 전두환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여러 신이(神異)한 일을 행하였다.

노태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김영삼은 야소교도로 불도를 탄압하였다. 마침내 상황 전두환과 노태우도 불교를 숭상한다 하여 잡아들였다. 이때 전두환은 감옥에서 일절 음식을 먹지 않고 참선하였는데 그 기운이 범상치 않으니 옥리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 하였다.

클린턴 5년, 한국에 큰 환란이 닥치니 많은 이들이 이것은 김영삼이 불도를 탄압한 때문이라 하였다. 클린턴 황제가 김대중을 국왕에 봉했다.

김대중은 국왕이 되어 다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상왕으로 복위시켰다.

이때 전두환은 김영삼이 모든 재물을 빼앗아 전 재산이라고는 29만원 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덕망이 높아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흠모하여 찿아왔다. 하루는 대비 이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찿아오는 객은 많은데 지금 있는 돈이라고는 29만원 뿐이라 세뱃돈이 부족하니 이를 어찌 하면 좋겠사옵니까?”

전두환이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객이 오는대로 세뱃돈을 듬뿍 주어 보내도록 하오.”

대비 이씨가 반신 반의하며 손님이 오는 대로 출금하여 세뱃돈을 주었는데 통장에는 여전히 29만원이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니 더욱 더 전두환의 이름이 높아졌다.

2007년 1월 26일 금요일

[妄想大百科事典]박정희(朴正熙)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고의 연예인.

그의 광적인 팬인 김재규에게 살해 당해 종종 존 레논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실제 차지하는 위상은 엘비스 프레슬리에 가깝다. 역대의 어떤 연예인도 박정희의 인기를 뛰어 넘지 못했으며 단지 대한민국의 특정한 지역에서만 그 인기가 덜한 편이다.

박정희는 1961년 차지철 등과 함께 그룹으로 데뷔했으나 이후 솔로로 전향해 1963년 세종로 차트 1위를 석권한 이후 1979년 살해 당하기 까지 부동의 1위를 고수했다. 한때 슬럼프에 빠졌으나 1972년 제 3집 “유신헌법” 발표로 기적적으로 부활했으며 유신헌법은 아직도 국가보안법과 1위를 다투는 대한민국 연예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기억되고 있다. 박정희 이후 이른바 군사독재 스타일이 한국 연예계를 강타해 전두환, 노태우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으며 아직도 그 영향력이 남아있다.

박정희의 인기는 아직까지도 식지 않아서 그의 대표곡인 “혁명공약”, “국민교육헌장”은 아직까지도 애창되는 인기곡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최고 히트곡은 이승만의 작품인 “국가보안법”으로 박정희가 리메이크 한 이래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 국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이 곡은 아직도 꾸준히 리메이크 되고 있다는 점에서 종종 My Way에 비견되고 있다. 이후 국가보안법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에 이르기까지 애창됐으며 아직까지도 삼류 연예인들에 의해 거듭 리메이크 되고 있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는 가업을 이어 연예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역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나 한국의 마릴린 맨슨이라 불리는 이명박의 등장으로 현재 그 인기가 수그러 들고 있어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한편, 박근혜는 한국의 마이클 잭슨으로 통하는 허경영으로 부터 구혼을 받은 전례가 있어 한국판 리사 프레슬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도 낳았으나 현재는 별다른 소식이 없다.

박정희의 아들로 한때 아버지의 뒤를 이을 차세대 유망주로 기대를 모은 박지만은 부친의 사후 그의 예술적 재능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절망감에 마약에 빠져드는 등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현재 박지만은 마약으로 얼룩진 과거를 청산했으며 예능인의 꿈을 접고 사업에 매진하고 있어 훈훈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박정희는 지역, 계층을 불구하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나 젊은 층에서는 인기가 덜한 편이다. 현재 한국의 연예계는 박정희의 뒤를 이을 수퍼스타를 기다리고 있으나 제 2의 박정희를 선언한 이인제 등 허접한 삼류들만 나오는 실정이다.

박정희의 라이벌로는 김대중이 꼽히고 있으나 실제 그 인기나 영향력에서 박정희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연예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김대중의 인기가 박정희 보다 못한 이유로는 요절하지 못 했다는 점, 발표하는 작품들이 밋밋하고 자극적이지 않다는 점 등이 꼽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팬 층을 갖춰 꾸준히 사랑 받고 있다.
한때는 김영삼도 박정희의 라이벌로 꼽혔으나 세종로 차트 1위에 오른 뒤 박정희의 아류로 전락해 그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특히 국가보안법 표절은 한국 연예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꼽힌다.

박정희의 인기는 아직까지 높기 때문에 그의 안티가 되는 것은 신상에 해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박정희는 특히 노년층, 장년층에 인기가 높기 때문에 어버이날에 박정희 찬가를 부르는 것은 가족의 화목에 큰 도움이 된다고 전문가들은 적극 권장하고 있다.

2006년 12월 20일 수요일

너무 노골적이다....

Einsatzgruppen의 고학력 깡패들에 대한 글에 대해 sonnet님은 후겐베르크 같은 위험인물의 출현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후겐베르크 이야기도 나온김에 보니 중앙일보가 인터넷판의 대문에 걸어 놓은 사설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지나치게 찝찝하다. 이거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이것 참.

이정도로 속을 드러내도 괜찮을 정도로 사회가 보수화 된 모양이다. 하긴. 박대통령 찬양이 하루 이틀일도 아니고.. 그래도 언론인이라는 자가 이 무슨 지각없는 글질인가. 이미 대한민국에 박정희 오타쿠가 가득찬 마당에 주류언론의 논설위원까지 합류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