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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3일 토요일

[개드립] 병역자원문제 해결 방안


 요 근래에 인구감소로 인한 병역자원문제가 국방 분야의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병역자원이 부족하니 현재와 같은 대규모 육군을 상시 유지하는게 어려워 질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합니다.

 모병제를 실시한다면 군대, 특히 육군의 규모가 줄어들 테니 이것도 고민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인구구조상 폭증하고 있는 노인 인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저는 과거 독일의 예를 본받아 [가칭] '조선돌격대' 창설을 제안하는 바 입니다! 다만 민방위가 존재하는 한국 실정에 맞춰 대상은 만 60세 이상 노인으로 하는 것이죠.

 탑골공원대대, 종묘대대, 용두산대대 등 이름만 들어도 간지나지 않습니까. 가스통 할배들을 통해 조선 노인의 전투력은 충분히 검증된 바 조선돌격대를 창설한다면 김정은도 충분히 두려워하리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노인 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니 병역자원 문제도 당분간 걱정이 없을 것 입니다.

 ps) 조선돌격대의 무장으로는 역시 어르신들 손에 익은 M1 카빈이 좋겠습니다.

2016년 7월 15일 금요일

海東名將傳 卷二 門下侍中 黃敎安(문하시중 황교안)


간만에 개드립 좀 쳐 봅니다.

海東名將傳 卷一 牽龍隊正 車智澈(견룡대정 차지철)


海東名將傳 卷二 門下侍中 黃敎安(문하시중 황교안)


황교안은 본시 서울사람이다. 어려서 부터 총명하여 온갖 기책에 능통하였는데 군역을 면하고도 주변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가능(Yes We can) 6년, 여왕이 황교안이 총명하고 덕이 있다하여 문하시중에 임명하였다.

가능(Yes We can) 7년, 오바마 황제가 교서를 내려 한국에 사드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여왕이 황명을 받들어 성주에 사드를 두도록 하니 성주군수 김항곤이 군민을 이끌고 거병하였다.

성주 군민의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으니 조정의 근심이 깊어갔다. 여왕이 신료들에게 난을 진압할 계책을 물었다. 지상서병부사 황인무가 나서 성주로 향하였으나 성주 군민의 기세에 감히 앞으로 나갈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여왕이 다시 신료들을 모아 계책을 물었다.

"황인무가 평소 용맹한 장수라 하였는데 형세가 이러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문하시중 황교안이 나서 성주로 갈 뜻을 밝혔다. 여왕이 감격하여 황교안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평소 문하시중이 미필이라 믿을 수 없다던 말이 허언임을 알겠노라. 민주국가에서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어찌 이보다 용맹할 수 있으리오?"

황교안이 경군의 정예를 이끌고 성주로 향하니 난을 일으킨 군민의 무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황교안이 경군을 이끌고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능히 당할 수가 없었다. 군민의 무리가 경군을 에워싸니 군졸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관군은 빗발치는 계란을 뚫고 혈로를 뚫었다. 경군이 포위를 뚫고 나가니 또 한 무리의 군민이 에워쌌다.

"너희가 이 길로 올 것을 알고 기다렸노라!"

경군의 군관 하나가 군민의 수레를 부수고 길을 뚫어 황교안이 벗어날 수 있었다. 황교안은 큰길을 따라 수레를 타고 벗어났다.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감탄하였다.

"병가의 고사에 포위망을 뚫는 것은 어렵다 하였다. 또한 병가의 상책은 삼십육계라 하였으나 옛 명장 차지철도 이를 능히 해낼 수 없었다. 지금 황교안이 난민의 무리를 뚫고 한걸음에 서울까지 삼십육계를 하였다니 고금에 통틀어 비할데 없는 명장이라 하겠다."



2007년 3월 25일 일요일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해동고승전 권1 일해거사 전두환

일해거사 전두환은 본시 한국의 국왕이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출가하여 2년 만에 득도하였다.

전두환은 합천 사람으로 후버3년 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가지를 가르치면 몰라도 될 것 까지 깨치니 모두가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아이젠하워 3년에 군관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흉중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그 뜻을 펼칠 도리가 없었다.

케네디 원년 5월 16일 장군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켜 전횡을 일삼던 문하시중 장면을 잡아들이고 사직을 반석에 세웠다. 전두환이 이 소식을 듣고 무과에 합격한 장사들을 모아 박정희를 찾았다.

“소장 비록 무반의 말석에 불과하나 장군께서 이렇게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보고 있겠사옵니까?”

박정희가 감격하여 전두환을 비장으로 삼았다. 케네디 황제가 박정희를 한국 국왕에 봉한 뒤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마침내 닉슨 5년에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카터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삼십육계를 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황제가 문하시중 최규하를 한국 국왕에 봉했으나 최규하는 글만 아는 선비인지라 용맹과 위엄이 없어 백성들이 심히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북쪽의 홍건적들이 준동할 기미를 보이니 민심이 더욱 더 흉흉하였다. 국왕 최규하가 도원수 정승화에게 군율로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라 하였으나 정승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두환이 나라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여기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국왕 최규하를 알현하였다. 최규하는 평소 스스로 국왕 될 재목이 아님을 알고 양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두환을 만나 그의 뜻을 들으니 크게 기뻐하며 양위 할 뜻을 비추었다. 전두환이 황공해 하며 거듭 사양하였으나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니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전두환은 본시 덕이 많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국왕이 된 뒤 옛 일을 잊지 않고 따르던 무리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후하게 내리니 많은 이들이 과연 전두환은 신의를 지킨다며 감탄하였다.
전두환이 국왕에 오르자 북괴의 김일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김일성은 혹여 전두환이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 조공으로 쌀과 시멘트를 바쳤다. 한국의 여러 국왕 중 북괴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은 전두환이 처음이었다. 이로서 전두환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니 레이건 황제도 크게 기뻐하며 전두환에게 “平北傀保國大將軍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레이건 8년,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전두환은 본시 불심이 깊어 항상 출가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내 왕위에서 물러 난 뒤 출가할 마음을 굳혔다. 전두환이 출가할 것을 결심하니 그의 처 이씨가 따르기를 간청하였다. 전두환이 대비 이씨와 함께 출가하여 백담사로 가니 많은 이들이 놀랐다. 전두환이 출가하니 본시 머리 숱이 거의 없어 따로 삭발할 필요가 없었다.

조지 부시 2년 12월, 마침내 전두환이 도를 얻었다. 사람들은 석가모니도 득도하는데 7년이 걸렸는데 전두환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여러 신이(神異)한 일을 행하였다.

노태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김영삼은 야소교도로 불도를 탄압하였다. 마침내 상황 전두환과 노태우도 불교를 숭상한다 하여 잡아들였다. 이때 전두환은 감옥에서 일절 음식을 먹지 않고 참선하였는데 그 기운이 범상치 않으니 옥리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 하였다.

클린턴 5년, 한국에 큰 환란이 닥치니 많은 이들이 이것은 김영삼이 불도를 탄압한 때문이라 하였다. 클린턴 황제가 김대중을 국왕에 봉했다.

김대중은 국왕이 되어 다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상왕으로 복위시켰다.

이때 전두환은 김영삼이 모든 재물을 빼앗아 전 재산이라고는 29만원 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덕망이 높아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흠모하여 찿아왔다. 하루는 대비 이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찿아오는 객은 많은데 지금 있는 돈이라고는 29만원 뿐이라 세뱃돈이 부족하니 이를 어찌 하면 좋겠사옵니까?”

전두환이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객이 오는대로 세뱃돈을 듬뿍 주어 보내도록 하오.”

대비 이씨가 반신 반의하며 손님이 오는 대로 출금하여 세뱃돈을 주었는데 통장에는 여전히 29만원이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니 더욱 더 전두환의 이름이 높아졌다.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해동고승전 권1 일해거사 전두환

일해거사 전두환은 본시 한국의 국왕이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출가하여 2년 만에 득도하였다.

전두환은 합천 사람으로 후버3년 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가지를 가르치면 몰라도 될 것 까지 깨치니 모두가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아이젠하워 3년에 군관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흉중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그 뜻을 펼칠 도리가 없었다.

케네디 원년 5월 16일 장군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켜 전횡을 일삼던 문하시중 장면을 잡아들이고 사직을 반석에 세웠다. 전두환이 이 소식을 듣고 무과에 합격한 장사들을 모아 박정희를 찾았다.

“소장 비록 무반의 말석에 불과하나 장군께서 이렇게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보고 있겠사옵니까?”

박정희가 감격하여 전두환을 비장으로 삼았다. 케네디 황제가 박정희를 한국 국왕에 봉한 뒤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마침내 닉슨 5년에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카터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삼십육계를 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황제가 문하시중 최규하를 한국 국왕에 봉했으나 최규하는 글만 아는 선비인지라 용맹과 위엄이 없어 백성들이 심히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북쪽의 홍건적들이 준동할 기미를 보이니 민심이 더욱 더 흉흉하였다. 국왕 최규하가 도원수 정승화에게 군율로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라 하였으나 정승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두환이 나라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여기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국왕 최규하를 알현하였다. 최규하는 평소 스스로 국왕 될 재목이 아님을 알고 양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두환을 만나 그의 뜻을 들으니 크게 기뻐하며 양위 할 뜻을 비추었다. 전두환이 황공해 하며 거듭 사양하였으나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니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전두환은 본시 덕이 많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국왕이 된 뒤 옛 일을 잊지 않고 따르던 무리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후하게 내리니 많은 이들이 과연 전두환은 신의를 지킨다며 감탄하였다.
전두환이 국왕에 오르자 북괴의 김일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김일성은 혹여 전두환이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 조공으로 쌀과 시멘트를 바쳤다. 한국의 여러 국왕 중 북괴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은 전두환이 처음이었다. 이로서 전두환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니 레이건 황제도 크게 기뻐하며 전두환에게 “平北傀保國大將軍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레이건 8년,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전두환은 본시 불심이 깊어 항상 출가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내 왕위에서 물러 난 뒤 출가할 마음을 굳혔다. 전두환이 출가할 것을 결심하니 그의 처 이씨가 따르기를 간청하였다. 전두환이 대비 이씨와 함께 출가하여 백담사로 가니 많은 이들이 놀랐다. 전두환이 출가하니 본시 머리 숱이 거의 없어 따로 삭발할 필요가 없었다.

조지 부시 2년 12월, 마침내 전두환이 도를 얻었다. 사람들은 석가모니도 득도하는데 7년이 걸렸는데 전두환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여러 신이(神異)한 일을 행하였다.

노태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김영삼은 야소교도로 불도를 탄압하였다. 마침내 상황 전두환과 노태우도 불교를 숭상한다 하여 잡아들였다. 이때 전두환은 감옥에서 일절 음식을 먹지 않고 참선하였는데 그 기운이 범상치 않으니 옥리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 하였다.

클린턴 5년, 한국에 큰 환란이 닥치니 많은 이들이 이것은 김영삼이 불도를 탄압한 때문이라 하였다. 클린턴 황제가 김대중을 국왕에 봉했다.

김대중은 국왕이 되어 다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상왕으로 복위시켰다.

이때 전두환은 김영삼이 모든 재물을 빼앗아 전 재산이라고는 29만원 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덕망이 높아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흠모하여 찿아왔다. 하루는 대비 이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찿아오는 객은 많은데 지금 있는 돈이라고는 29만원 뿐이라 세뱃돈이 부족하니 이를 어찌 하면 좋겠사옵니까?”

전두환이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객이 오는대로 세뱃돈을 듬뿍 주어 보내도록 하오.”

대비 이씨가 반신 반의하며 손님이 오는 대로 출금하여 세뱃돈을 주었는데 통장에는 여전히 29만원이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니 더욱 더 전두환의 이름이 높아졌다.

2006년 12월 7일 목요일

[海東名將傳] 卷一 牽龍隊正 車智澈

美利堅史는 천조의 인물들에 대해 다루는지라 한국의 이름난(?) 장수들을 같이 다루기는 뭐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美利堅史의 외전으로 海東名將傳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

海東名將傳 卷一 牽龍隊正 車智澈(견룡대정 차지철)

차지철은 서울 사람으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2년에 출생했다. 전하기를 차지철의 아비는 매우 호색한이어 여색을 심히 밝혔다 하는데 훗날 사람들이 “역시 개가 범을 낳지는 않는 법이다.”라며 감탄하였다.

아이젠하워 원년, 차지철은 무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차지철은 군관이 되고자 화통도감에 들어가 마침내 군관이 되었다. 아이젠하워 5년, 차지철이 미리견의 화통도감에서 화포 쓰는 법을 배워 돌아왔다. 아이젠하워 6년, 차지철은 산원(散員)이 되어 좌우위(左右衛)로 옮겼다.

존 F. 케네디 원년, 차지철이 사보이 객잔에서 박정희를 처음 만났다. 박정희는 차지철의 사람됨을 좋게 여겨 마음 속에 있는 걱정을 털어 놓았다.

“요사이 붉은 도적의 준동이 심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는데 조정에는 사특한 마음을 품은 간신배가 넘치니 잠을 이룰 수 없소이다”

차지철은 박정희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크게 감격해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었다.

“소장은 장군께 견마의 노를 다하겠사옵니다.”

존 F. 케네디 원년 5월 16일, 평소 박정희의 인품을 사모하던 여러 장수들이 군사를 일으켜 문하시중(門下侍中) 장면을 몰아냈다.

이 때 차지철의 공이 매우 컸는데 그 전말은 이러하다.

장수들이 박정희를 옹립하여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자 상장군(上將軍) 장도영(張都映)은 이를 알고 중랑장 서종철을 보내 좌우위의 군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이때 차지철은 중랑장 박치옥의 휘하에 있었다. 서종철이 군사를 이끌고 박치옥의 영으로 들이닥치자 박치옥은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차지철이 도끼로 병기고를 부수고 군사들을 이끌고 나섰다.

박정희를 따르는 장수들이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난입하자 문하시중 장면은 크게 낭패하여 사찰로 숨어들어 비구니들에게 목숨을 의탁하였다.

박정희와 여러 장수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를 두고 상장군 장도영을 수장으로 옹립했다.

케네디 2년, 차지철은 학문을 닦기 위해 군관을 그만 두었다.

케네디 3년, 여러 장수들이 박정희를 추대하여 국왕으로 삼았다. 처음에 박정희는 왕위에 오르기를 한사코 사양했으나 여러 장수들의 권유와 백성들의 간청에 못이겨 왕위에 올랐다.

천자가 박정희에게 “토북괴 반공대장군 한국국왕(討北傀 反共大將軍 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박정희는 국왕이 되자 차지철을 아껴 그에게 관직을 주었다. 이때 처음 전국구(全國區)라는 제도가 생겨났는데 시정의 잡배들은 전국구가 국왕이 차지철을 총애한 까닭에 생긴 것이라 하였다.

차지철은 관직에 있으면서 서원에서 학업을 닦아 박사가 되었다. 차지철이 학업을 닦을 때 여러 사람들은 차지철이 서원에 나가지 않으니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뒤에 차지철이 박사가 되니 모두가 탄복하였다.

“서원에 제대로 나가지도 않고 박사가 되었으니 공의 지혜가 어느 정도인지 측량할 수 없구려!”

제럴드 포드 원년 8월 15일, 중전 육(陸)씨가 북괴의 자객 문세광의 육혈포에 맞아 승하하였다. 이로 인해 박정희의 상심이 매우 컸다. 견룡대정 박종규(朴種圭)에게 자객을 들인 죄를 물어 파직했다.

박종규가 파직되자 차지철이 새로이 견룡대정이 되었다.

차지철은 견룡군을 이끌게 되자 먼저 국왕의 위엄을 세우는데 노력했다. 차지철이 매주 견룡군을 이끌고 시위를 하며 위엄을 과시하니 이를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이때 차지철의 위세가 당당하니 문하시중 마저도 차지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이때 사특아랍백(沙特阿拉白), 의랍극(依拉克) 등 서토의 여러 추장들이 흑유의 가격을 올려 백성들의 삶이 심히 곤궁했다. 어리석은 백성들 중에 간혹 삶이 어렵다 하여 국왕을 능멸하고 사특한 무리들의 요설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이 심히 많아 뜻 있는 신료들이 이를 심히 불안하게 여겼다.

이때 많은 신료들은 민심을 두려워 했으나 유독 차지철 만은 그러지 아니하였다.

“간포채(柬埔寨)에서는 3백만을 죽였다한다. 백성들이 난동을 부리면 병거로 밀어 버리면 되지 아니하겠는가.”

이 말을 들은 모두가 차지철의 기백에 감탄하였다.

지미 카터 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들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차지철도 같이 죽임을 당하였다. 김재규는 국왕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킬 때 이미 장군의 반열에 오른 무인으로 평소 차지철이 자신을 하대함에 분개하였다.

“내가 장군일 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일개 산원이었다. 저자의 오만함이 이러하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국왕이 차지철을 총애하니 김재규가 마침내 역심을 품고 자객들을 모아들였다.

김재규가 자객들을 이끌고 들이닥쳐 박정희에게 육혈포를 난사하자 차지철은 자리를 피하려 하였다.

“병가의 상책은 삼십육계라 하였으니 지금이 그때로다.”

그러나 자객들이 객잔을 에워싸고 총포를 난사하며 밀려드니 드디어 차지철이 견룡군의 여러 군관들과 함께 최후를 맞았다.

차지철은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견룡대정까지 올랐으며 민주 국가에서 백성을 두려워 하지 않을 정도로 용맹하였다. 차지철은 종종 “간포채에서 3백만을 죽였다 하니 우리도 그쯤 죽이면 되지 아니하겠는가?”라고 했으니 이로 미루어 그의 용맹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김재규가 자객들을 이끌고 국왕을 시해할 때 형세가 외로움을 깨닫고 삼십육계를 하려 했으니 병법에 능한 것이 이 정도였다. 아깝게도 자객들의 흉탄을 피하지 못해 비명횡사했으니 어찌 아니 슬프리오.

2006년 4월 30일 일요일

[美利堅史] - 조지 미드 列傳

장군 미드(George Gordon Meade)는 서반아의 카디즈 태생으로 제임스 메디슨 7년 태어났다고 전한다. 비록 미드는 번방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양친은 천자의 덕이 미치는 미화(美華)의 신민이었다. 미드가 태어나던해 구라파를 병화에 몰아넣은 폭군 나파륜이 폐위되었다.

미드의 부친은 부유한 장사치 였으나 나파륜 전쟁으로 곤궁하게 되었다.

앤드류 잭슨 7년, 미드가 군관이 되어 1년간 군문에 몸을 담았다. 미드는 군관일을 그만 두고 대목(大木)일을 하며 전국을 유랑했다.

존 타일러 2년. 미드는 다시 군관이 되었다.

이후 묵서가(墨西哥) 토벌에도 나갔으나 큰 공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링컨 1년. 남부의 여러 제후들이 제퍼슨 데이비스를 왕으로 추대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에 도적의 무리 수만이 남부의 여섯주를 휩쓰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이때 도적들이 회색 두건을 머리에 썼다 하여 훗날 이를 회건적(灰巾賊) 이라 하였다.

도적의 기세가 등등하매 천자가 사방의 제후에 명을 내려 도적을 토멸하도록 하였다. 이때 미드도 장군의 지위에 올랐다.

회건적의 수괴 데이비스는 로버트 리를 대장군에 임명했는데 그 계략이 하늘에 닫고 계교가 교활하매 매번 싸움에 천병의 위세가 꺾였다. 도적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니 남부 15개 주에 도적의 깃발이 휘날렸다.

링컨 3년 6월 28일. 장군 후커의 인물됨이 용렬하여 미드가 포토맥 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링컨 3년 6월. 괴수(魁首) 로버트 리가 장군 롱스트리트, 이월, A. P. 힐과 군사 7만5천을 거느리고 북진을 시작했다.

북진하던 도적들은 게티스버그 읍 근교에서 거기장군 레이놀드의 군사를 만나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이 시작되고 정오가 되자 리가 거느리는 중군(中軍)이 도착했다. 리는 여러 장수들에게 공격을 명했나 미드의 군사가 용기백배하여 굳건히 버티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군 롱스트리트가 리에게 간하였다.

"대장군. 우리의 형세가 불리한 듯 하니 공격을 멈추소서."

리는 롱스트리트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처음 이틀동안의 싸움에서 천병이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굳건히 지키고 물러나지 아니하니 도적의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괴수 리는 미드의 중군을 쳐서 한번에 싸움을 결정지으려 했다.

리가 롱스트리트 휘하의 중랑장 페티그루, 트림블, 피켓, 앤더슨에게 군사 1만을 주며 명하였다.

"그대들은 핸콕이 거느린 중군을 격파하라."

도적 1만이 함성을 지르고 깃발을 휘날리며 돌격하니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그러나 핸콕의 군사들이 기운을 내어 함성을 지르며 각종 총통을 발사하니 꺼꾸러지는 도적의 무리가 셀수 없이 많았다. 헤이, 깁슨과 여러 장수들이 몸소 육혈포를 쏘며 군졸들을 격려하니 조금도 천병의 기세가 꺾이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도적들의 기세가 꺾이여 앞다투어 도망치니 이로써 북부의 여러 주가 도적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2006년 4월 29일 토요일

[美理堅史] - 平和王 문선명 世家

문선명은 본시 한국 사람으로 우드로 윌슨 8년 태어났다.

문선명은 어려서부터 천주를 섬겨 그 믿음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트루먼 원년 8월, 노서아(露西亞)왕 스탈린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왜국을 토벌했다. 이에 천자가 스탈린의 노고를 위로하며 한국의 절반을 봉읍으로 하사했다.

노서아는 사교가 성행한 나라로 그 왕 스탈린도 본시 홍건적의 무리에 속해있었다. 노서아 군사와 함께 홍건적이 들어왔는데 홍건적의 수령 김일성은 노서아 왕의 위세를 빌어 천주를 섬기는 백성들을 핍박했다.

이때 문선명도 도적들에 잡혀 노역을 하게 됐는데 도적들이 핍박할 때 마다 천주의 은혜를 입어 터럭하나 다치지 아니하였다고 전한다.
도적들이 문선명을 핍박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해를 입히지 못하니 크게 두려워 하며 말하였다.

"이자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로다!"

트루먼 6년, 한국의 홍건적이 난을 일으켰다. 이때 문선명은 천병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트루먼 7년, 문선명이 천주를 영접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다. 문선명은 반공(反共)의 큰이치를 깨달아 도를 닦는 근본으로 삼았다.

아이젠하워 2년, 문선명이 서울에서 통일교회를 만들고 전도하매 소인배들의 핍박을 받았다. 한국에서 천주를 섬긴다 자처하는 자들은 많았으나 하나같이 어리석어 그 도의 심오함을 열에 하나도 깨치지 못하였다.

문선명은 어리석은 자들을 깨쳐 반공의 이치를 깨닫게 하려 힘썼으나 마침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크게 한탄하였다.

"하늘아래 내 뜻이 받아질 곳이 어디인가!"

마침내 한국같은 번방에서는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천자국에 나아가기를 소망하였다.

존슨 3년, 문선명이 식솔을 이끌고 미리견에 도착했다.

이때 미리견은 백성들의 믿음이 박하여 천주를 섬기는 아름다운 기풍이 사라져가고 음란한 풍속이 성행하고 있었다. 마침내 어리석은 백성가운데 사교에 빠져 마르크스, 레닌 등 잡스런 귀신을 섬기는 자도 나타났다.

문선명이 이를 보고 크게 한탄하며 땅에 떨어진 믿음을 일으켜 세우기로 결심했다.

문선명이 힘을 다하여 반공의 이치를 강론하고 미풍양속을 일으킬 것을 권하니 갈수록 그를 따르는 무리가 늘어났다.

닉슨 황제가 문선명의 선행을 듣고 백악궁으로 불러 반공의 이치와 인의예지에 대해 물었는데 선명이 대답함에 막히는 것이 없었다. 황제가 문선명의 고상함에 탄복하였다.

"아. 짐이 어리석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없었는데 이제 선생을 만나 반공의 이치를 깨치니 답답한 가슴이 후련하오!"

이에 문선명이 여러 제후와 대소신료들에게 도를 강론하게 되었다. 많은 제후들이 문선명에게 감복하여 마음으로 우러르게 되었다. 천자가 문선명을 "평화왕(King of the Peace)"에 봉하니 마침내 문선명이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닉슨 이후 여러 천자들이 문선명의 지혜를 마음속으로 흠모하니 레이건, 상황(上皇) 부시 시니어 등이 그러하였다.

2006년 4월 25일 화요일

[美利堅史] - 남가주공 아놀드 슈워제네거 世家 (재탕)

남가주공 아놀드는 오태리의 광대출신으로 부친은 덕국의 병졸 출신인 한미한 집안이었다.

아놀드가 오태리의 병졸로 병거를 몰던때 뭇 군졸 앞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필히 천자국의 제후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리라."

뭇 군졸들이 아놀드를 비웃었다.

"네 어찌 한갖 군졸로 허황된 언사를 내뱉는고?"

아놀드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아! 어찌 홍작이 대붕의 뜻을 알리요?"

아놀드는 천하장사로 오태리와 구라파에서 그 이름이 드높았다.

닉슨 2년, 아놀드가 미리견에서 광대일을 시작했다. 아놀드가 "신약극의 헤라클레스"라는 활동사진에 처음 나오매 미리견인들이 아놀드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여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저자의 말함이 영어같기는 하나 사뭇 다르도다!"

그러나 아놀드가 광대일에 매진하매 마침내 뭇 사람들이 그의 성실함을 인정하였다.
레이건 4년, 아놀드가 "종결자(Terminator)"라는 활동사진에 나와 이름을 떨치매 장안의 학동들도 아놀드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아놀드가 종결자에 나오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꼭두쇠가 꿈을 꾸니 백골형상을 한 쇳덩이가 불길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꿈이로다."
카메론이 이를 활동사진으로 만들려 하매 아놀드에게 글을 보냈다. 아놀드의 지인들이 이르길
"이 활동사진의 대본을 보니 종결자란 인물은 대사가 거의 없네. 자네의 영어가 어눌하나 종결자를 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일세"
이에 아놀드가 종결자에 나와 명성을 얻었다.

레이건 6년, 아놀드가 케네디 황제의 질녀 마리아 슈라이버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처음 아놀드가 마리아와 교제를 시작하매 문중의 반대가 심하였다.

"아놀드는 한갖 오태리 출신의 광대가 아닌가? 천자의 집안에 가당치 않으니 매우 부끄럽도다."

그러나 아놀드의 사람됨이 성실하고 그 뜻이 고상하여 마리아의 어머니 유니스 슈라이버 공주가 감탄하였다.

"비록 그 출신이 미천하나 그 사람됨이 곧고 강직하니 가히 내 사위가 될만 하도다."

아놀드는 광대일에 매진하매 갈수록 그 이름이 높아갔다.

그러나 아놀드는 항상 마음속의 큰 뜻을 버리지 않고 품고 있었다. 실베스터 스탤론은 이태리 출신의 광대로 한때 아놀드와 시정에서 어울리던 자 였는데 항시 아놀드를 시기하여 모략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스탤론이 이렇게 말하였다.

"아놀드는 외방의 광대가 아니던가? 한갖 광대가 감히 제후를 논하니 가당치도 않도다."
조지 W 부시 3년, 아놀드가 남가주 공에 선출되었다. 남가주공의 실정이 계속되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매 드디어 아놀드는 뜻을 밝혔다.

"남가주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으니 어찌 내 일신의 안위만을 도모하리요?"

아놀드가 뜻을 밝히매 마리아 부인이 간하였다.

"소첩 비록 정치와 거리를 두고자 하였으나 공의 뜻이 이러할진데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사옵니까?"

유니스 공주도 감복하였다.

"과연 아놀드다. 그 뜻이 이리도 크니 내 사위로 부끄럽지 않도다."

아놀드가 남가주공이 되겠다고 결심을 굳히매 소인배들의 모략이 끊이질 않았다.

"아놀드는 아직도 영어를 못하는데 남가주공이 가당하겠는가?"

그러나 백성들은 아놀드의 고상한 뜻을 흠모하여 그를 남가주공에 추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