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남북전쟁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남북전쟁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7년 11월 23일 목요일

NARA의 남부연맹 작성 지도 온라인화


미국 국립문서관리청(NARA)에서 미국 내전 기간 중 남부연맹에서 제작한 지도들을 디지털화 해서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지도가 고화질로 스캔되어 있어서 미국 내전에 관심 가지신 분들에게 아주 유용한 자료가 되겠습니다. 저도 시간 되는 대로 다운로드 받아야 겠군요.




2011년 1월 8일 토요일

The American Way of War!?

알맹이 없는 잡담 하나 더.

바로 앞의 ‘창군초기 한국군의 사격군기 문제’라는 글에서는 한국군의 사격 군기 결에 대한 미국 군사고문단의 비판을 다뤘습니다. 뭐, 사격군기 결여는 사실 지휘관들도 경험이 부족하고 사병들도 훈련이 부족한 군대라면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합니다만 외국인들의 신랄한 비난은 약간 씁슬하긴 하지요.

한편, 20세기 중반에 한국인이 사격군기가 결여되어 있다고 까대던 미국인들도 100년 전에는 유럽 사람들에게서 마찬가지로 까이고 있었습니다. 남북전쟁이 벌이지자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등 유럽의 열강들은 연방과 남부연합 양측에 관전무관들을 파견해 전술과 군사기술을 관찰했습니다. 뭐,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 시기 유럽인들은 미국의 아마추어들이 벌이는 전쟁을 다소 낮춰보고 있었다지요.

영국 육군의 플레처(Henry Charles Fletcher) 중령은 연방군의 전투 방식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고 합니다.

“경험이 부족하고 훈련이 덜 된 부대가 그렇듯이 병사들은 총을 많이 쏘지만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먼 거리에서 너무나 많은 화약을 낭비하고 있고... (적에게)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있다.”1)

이런 견해는 다른 나라의 관전 장교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프로이센 육군의 샤이베르트(Justus Scheibert) 대위도 플레처 중령과 마찬가지로 연방군이 전투시 원거리에서 부터 총을 쏴대며 화약을 낭비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비판했습니다.2)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군사이론가였던 헨더슨(G. F. R. Henderson)은 아예 연방군과 남부연합군 양쪽 모두 탄약을 막대하게 낭비했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지요.3)

물론 탄약을 낭비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일이겠습니다만 남북전쟁 당시의 미군, 즉 연방군은 한 가지 점에서는 100년 뒤의 한국군이나 남베트남군 보다 나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1860년대의 미국도 막대한 공업력을 가진 공업국가였다는 점 입니다.



1) Jay Luvaas,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 : The European Inheritance(University Press of Kansas, 1988), p.16
2) Jay Luvaas, ibid., p.63
3) Robert H. Scales Jr, Firepower in Limited War(Presidio, 1995), p.3

2010년 11월 8일 월요일

남북전쟁 초기 미육군의 급식규정

일이 잘 안돼서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 An Anthology 1권을 끄적거리고 있는데 남북전쟁 당시 미육군의 급식규정에 대한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제가 먹는걸 좋아해서 이 책을 처음 샀을 때 따로 표시해둔 부분인데 다시 봐도 흥미롭습니다.

1861년 미육군의 급식규정은 다음과 같았다는군요.(병사 1인/1일)

1.     20온스의 소금에 절인 쇠고기 또는 보통 쇠고기 또는 12온스의 보통 돼지고기 또는 베이컨
2.     18온스의 밀가루 또는 20온스의 옥수수
3.     1.6온스의 쌀 또는 0.64온스의 콩 또는 1.5온스의 말린 감자
4.     1.6온스의 커피콩 또는 0.24온스의 차
5.     2.4온스의 설탕
6.     0.54온스의 소금
7.     0.32(Gill = 1/4파인트, 0.118리터)의 식초

여기에 대해 같은 책의 본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United States troops were generally well-fed.

.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다른 분들 께서는?^^)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점은 급식규정에 쌀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입니다. 전체 급식에서 차지하는비중을 보면 별로 많은 양은 아닌데 어쨌든 감자와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862년에는 급식량을 1861년 규정보다 조금 더 늘렸다고 합니다. 미육군은 더 잘 먹게 됐다는 이야기.

일이 손에 안 잡혀서 두서없이 주절거려 봤는데 이번주에 할 일을 끝내는 대로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을 더 쓸 생각입니다. 본편 외에 번외편도 하나 준비 중인데 빨리 올려야죠. 사실 처음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을 계획했을 때 보다 소개할 논문과 서적이 조금 더 늘어났습니다. 번외편을 쓸 때 같이 소개하도록 하지요. 제가 게으른데다 연재도 한달에 한 두 편 쓰는 수준이라 진도가 지지부진 합니다. 겨울에 여유가 생기는대로 연재 속도를 좀 높여야 겠습니다. 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남의 글을 소개하는 수준인데 참 느리죠;;;;;

2010년 2월 20일 토요일

북버지니아군의 보급 문제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Edward Hagerman의 The American Civil War and the origins of modern warfare가 있습니다. 책 제목에서 짐작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미국 남북전쟁에서 소모전, 참호전과 같은 근대적 전쟁의 요소가 등장했고 남북 양측의 군대가 모두 새롭게 변화한 전쟁 상황에 맞춰 지휘구조와 전략 전술 등을 재정립해 나갔다는 내용입니다.

시간 날 때 마다 조금씩 읽고 있어서 이제야 게티즈버그 전역을 다룬 부분을 읽고 있습니다. 이부분이 아주 재미있는데 저자는 리가 지휘하는 북버지니아 야전군(Army of Northern Virginia)이 챈슬러빌(Chancellorsville)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북진하는 과정에서 겪은 심각한 보급문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보급품의 부족 뿐 아니라 철도, 마차와 같은 수송수단 자체의 부족이 북버지니아군의 공세의 발목을 잡는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입니다.

저자는 북버지니아군의 보급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보급에 필요한 마필의 부족입니다. 말의 부족이 심각하다 보니 1863년 봄에 대규모 편제 개편을 통해 보급부대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나갔지만 그런 조치를 취하고도 편제를 채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해상봉쇄 때문에 말을 수입할 수 없어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또는 멕시코를 통해 마필을 수입해야 했는데 이곳에서 조달하는 말은 질이 좋지 못했으며 결정적으로 전투에서 소모하는 말이 더 많았다고 하니 말 다했지요;;;; 말의 부족으로 정찰과 보급로 경비를 담당할 기병도 부족했으니 포병이나 기타 지원부대의 상황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지요. 다음으로는 남부연합의 고질적 약점인 철도 문제를 꼽고 있습니다. 1863년 봄이 되면 철도의 연장은 커녕 기존 철도의 유지도 어려운 지경이었다고 하니 말이 충분했다 하더라도 고민이 많았을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작전 지역에서 대규모 야전군의 보급에 필요한 물자를 징발할 대도시가 드물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 향한 진격에서 겪었던 것과 비슷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 보급에 필요한 대도시가 드문 만큼 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징발을 실시해야 하고 이 경우 마필 부족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이런 문제때문에 리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는 철도에서 가까운 곳에서 전투를 수행하려는 경향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극도로 제한적인 보급능력이 작전행동의 자유까지 제약하게 된 셈입니다. 물론 이 배경에는 남부연합의 총체적인 전쟁수행 역량이 그야말로 안습이었다는 문제가 있겠습니다만.

2009년 9월 1일 화요일

흥미로운 가정

오늘은 쉬는 시간에 결론 부분을 남겨두고 거의 2년 가까이 방치해 둔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를 마저 다 읽었습니다.


저자인 Jay Luvaas는 남북전쟁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주요 열강의 군사교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남북전쟁 발발부터 1차대전 발발직전 까지의 시기를 서술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미국에 파견된 각국 무관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고 후반부는 유럽에서는 미국의 내전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남북전쟁은 새로운 군사기술이 대규모로 활용되어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유럽에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군사교리에 있어서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군사교리 면에서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이유는 유럽의 군인들은 연방과 남부연합 모두를 아마추어 군인들로 한수 낮춰보는 경향이 있었고 거의 동시기에 유럽에서도 보불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굳이 '수준낮은' 미국으로 부터 교훈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 입니다. 그나마 미국의 경험이 유럽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북독일연방과 프랑스의 기병 전술정도였다고 합니다.


유럽의 군사사상가들이 남북전쟁을 재평가하게 된 것은 1차대전이라는 전례없는 소모전을 경험한 이후였습니다. 1차대전에서 유럽국가들이 경험한 전략적 문제는 바로 50년전의 전쟁에서 미국인들이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1차대전 이후 유럽, 특히 영국의 군사사상가들이 남북전쟁의 교훈을 재평가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주로 언급되는 것은 풀러와 리델하트의 남북전쟁 연구인데 특히 리델하트가 기동전 이론을 연구하면서 남북전쟁 당시의 대규모 기병운용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Luvaas는 이 부분에서 꽤 재미있는 추론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Luvaas는 짤막하게 리델하트와 독일 장군들간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리델하트의 많은 저작들이 2차대전 이전에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그가 만난 독일 장군들도 번역된 것 중 일부를 읽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비록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북전쟁 당시의 기병전술이 독일 장군들의 기동전 사상에 '미미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흥미로운 떡밥을 던지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이 책은 1959년에 초판이 나왔고 제가 읽은 개정판도 1988년에 나온 것이라 리델하트가 독일의 군사사상에 끼친 영향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근래의 연구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저자가 90년대 이후에 이 책을 썼다면 이런 재미있는 추론을 하지는 못했겠지요. 이제 이런 추론을 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발상 자체는 꽤 참신하다는 느낌입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8년 8월 12일 화요일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 포로의 대우문제

보불전쟁 당시 북독일연방의 프랑스군 포로 대우에 대한 꽤 재미있는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문제의 글은 『On the Road to Total War : The American Civil War and the German Wars of Unification, 1861~1871』에 실린 Mafred Botzenhart의 「French Prisoner of War in Germany, 1870~71」라는 글인데 분량은 좀 짧더군요.

가장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군 포로의 사망률이 상당히 낮다는 것 입니다. 1871년 2월까지 북독일연방내의 포로수용소로 이송 된 285,124명의 프랑스군 포로 중 사망자는 7,230명으로 전체 포로 중 2.3%에 불과한 규모라고 합니다. 같은 책에 실린 Reid Mitchell의 글을 보면 남북전쟁 당시 북군 포로 195,000명과 남군포로 215,000명 중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포로의 숫자는 각각 30,000명과 26,000명으로 나타나는데 이것과 비교해 보면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 포로의 사망률은 매우 낮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포로들의 상태는 매우 비참해서 독일까지 이송된 대부분의 포로들은 낮은 건강상태에 전투로 인한 정신적 충격, 포로가 됐다는 스트레스 등이 겹쳐져 아주 엉망이었다고는 합니다만 그런 것 치고는 사망률이 꽤 낮습니다. 전체 포로의 숫자는 384,000명이고 독일로 이송되지 않은 나머지는 프랑스 현지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전체 포로를 상대로 조사하더라도 전체적인 경향은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텐데 가장 먼저 프랑스군 포로들이 상대적으로 짧은 포로생활을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의 포로들은 몇 년씩 포로생활을 했지만 보불전쟁 당시의 프랑스 포로들은 길어야 몇 달 정도의 수용소 생활을 한 뒤 석방되었지요.

그리고 포로에 대한 대우도 남북전쟁 당시의 미국보다는 북독일연방쪽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의문스럽지만 1870년 7월30일 프로이센 전쟁성이 제정한 규정에 따르면 프랑스군 포로는 해당 계급의 북독일연방 군인에 상응하는 생활 수준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인 Botzenhart는 프랑스군 포로의 탈출 시도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이유를 비록 포로에 대한 처우가 뭐 같긴 하지만 참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같은 글에 인용된 사례를 보면 독일 측은 적십자의 구호품이나 현금 전달에 대해 최대한 협조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일선의 포로수용소장들은 업무가 늘어나는 것에 짜증을 내긴 했지만 어쨌건 국제법은 착실히 준수했다고 합니다. 1870년 겨울에 프랑스 본토와 포로수용소간의 우편 시스템이 자리 잡힌 이후 프랑스에서 오는 우편물의 폭증으로 포로수용소의 우체국들은 상당 기간 동안 업무 폭증으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한 포로수용소에는 하루 평균 600통의 편지가 왔는데 이것은 포로수용소 우체국의 하루 검열능력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프랑스군 장교포로의 처우는 더욱 좋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장교포로들은 호텔이나 지역 유지의 자택에 거주했으며 구호품으로 포도주까지 받아 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급 장교들의 경우는 친구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 포로 수용소를 옮겨달라고 신청하는 경우도 있었고 게다가 이런 신청은 잘 받아들여졌다고 하는군요.

보불전쟁은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극도의 증오심을 불러일으킨 전쟁이었는데 막상 포로들에 대한 처우, 특히 사회 지도층이라 할 만한 고급장교들에 대한 처우가 점잖은 편이었다는 것은 꽤 흥미롭습니다.

2008년 5월 19일 월요일

보병사단 편제의 변화 : 1909~1916

군사사에 있어서 사단 편제는 ‘근대적’ 군사제도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입니다. 사실상 18세기 말에 등장한 사단편제는 21세기인 오늘날 까지도 전 세계 육군의 기본적인 부대편제로 유지되고 있지요.
Division은 단어에서도 대략 느낄 수 있듯 프랑스인들이 만들어 낸 조직이었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유럽의 패권을 노리던 프랑스는 당연히 군사 문제에 있어서 많은 업적을 이뤘으며 사단 편제의 등장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 입니다. 프랑스의 군사사상가들은 18세기 중반부터 당시까지의 전쟁에서 각 국의 군대가 처한 구조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으며 그 결과 4개 연대로 편성된 독립된 작전단위를 구상하게 됩니다. 1788년에는 2개 연대를 여단의 지휘하에 두고 이 여단은 사단의 지휘를 받는 편제가 만들어지고 마침내 1794년에는 혁명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2개 여단으로 구성되며 포병과 기병등의 지원부대를 갖춘 사단 편제가 확립됩니다. 사단편제는 전투에서 지휘관에게 보다 많은 융통성을 부여해 줬으며 연대 이상의 전술 단위가 없던 다른 국가의 군대들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결정적으로 나타난 것이 1805년의 아우스테를리츠 전역과 1806년의 예나 전역이었습니다. 특히 1806년의 프로이센군은 철저히 박살이 나서 뼈를 깎는 개혁에 들어가게 되지요.

이러한 4개연대-2개여단의 사단편제는 1차대전 까지 계속 유지됩니다만 19세기 후반부터 발전한 군사기술과 이에 따른 전장의 변화는 4각 편제를 개편해야 할 필요성을 이끌어냅니다. 가장 큰 원인은 화력의 급속한 증대로 방어가 공격에 비해 조금씩 유리해 지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 이미 미국의 남북전쟁과 유럽의 보불전쟁에서 이런 조짐이 나타났으며 1877년의 러시아-터키 전쟁에서는 이것이 더욱 명백히 나타납니다. 플레브나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참호로 강화된 터키군의 방어선에 여러 차례 대규모 공세를 퍼부었지만 매번 수만의 희생자를 내고 좌절을 겪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유럽의 각국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독일군은 중포의 개발에 더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부분 국가의 보병사단들이 채택하고 있는 3각편제는 어느 국가가 처음 도입했을까요?

정답 : 오스만 투르크


네.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3각편제를 처음 도입한 국가는 터키였습니다. 터키는 1877년 전쟁 이후 방어적인 군사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독일 군사고문단은 방어에서는 4각 편제가 병력 운용면에서 비효율 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보통 3개 연대를 방어선에 배치하고 1개 연대를 사단 예비로 두는 방어구조는 1개 여단이 아주 애매하게 병력을 운용해야 하는 데다가 예비대의 운용 문제도 불편했습니다. 만약 예비대가 A여단의 예하 연대인데 정작 투입해야 할 지역이 B여단의 방어선이라면?
1883년 오스만 투르크의 독일 군사고문단장에 임명된 골츠(Colmar von der Goltz)는 1887년 전쟁에서 방어의 효율이 높았던 결과에 크게 주목했습니다. 그는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거듭된 점에서 현대전에서 방어의 우위가 높아진 것을 거듭 확신했습니다. 중장으로 진급한 골츠는 계속해서 터키군의 훈련과 개혁을 지도하며 이러한 현대전 양상에 맞는 편제와 전술을 연구했습니다. 골츠는 1909년의 터키군 기동훈련에서 1개보병여단과 1개기병여단으로 편성된 보병사단 편제를 시험합니다. 골츠는 1909년 겨울에 실험적인 보병사단 편제를 거듭 실험했고 그 결과 1910년 터키군 총참모부는 보병사단의 편제를 4개연대-2개여단-보병사단에서 3개연대-보병사단으로 개편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터키군의 새로운 보병사단 편제는 사단에 포병연대가 배속되어 기존에 포병 없이 보병연대만 네개가 있던 보병사단에 비해 화력이 증강되고 방어에 더 적합한 구조가 되었습니다. 터키군은 1910년 10월 3각 편제로 새로이 개편된 1, 2 보병사단을 기동훈련에 투입해 새 편제를 시험했습니다. 이 기동훈련은 2개 군단(6개 보병사단, 2개 기병여단)이 동원된 야전군급 기동훈련으로 대규모 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3각편제는 혁신적인 것 이었음에도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 1912년 발발한 발칸 전쟁에서 신편제를 도입한 터키군은 세르비아-그리스-불가리아 연합군에게 참패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프랑스 혁명전쟁 당시 사단편제를 도입한 프랑스군이 신통찮은 성과를 거둔 까닭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사단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차대전에 발발할 당시 주요 열강들은 여전히 4각편제의 보병사단들을 가지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얼마안가서 보병사단 편제는 급격히 3각편제로 바뀌게 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전쟁이 참호전 위주로 나가자 보병사단들은 공격보다 방어에 적합한 형태로 개편되게 되었던 것 입니다. 먼저 독일과 프랑스가 1916년 까지 모든 보병사단들을 3각 편제로 개편합니다. 독일의 경우는 조금 특이하게 보병여단 사령부가 3개 보병연대를 거느리는 식으로 3각 편제가 만들어집니다. 3각편제는 여러 모로 4각편제에 비해 우월했습니다. 먼저 여단사령부가 폐지되거나 1개로 줄어들었고 보병연대도 1개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사단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인력이 감소했습니다. 다음으로 2개여단-2개포병연대 체제(특히 러시아육군)에서 3개연대-1개포병연대 체제로 전환되면서 1개사단에 필요한 포병도 그만큼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3각편제는 방어위주의 전쟁이 가져온 변화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동이 강조된 2차대전 이후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그 기본골격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참고서적
Hermann Cron, 『Imperial German Army 1914-18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 of Battle』, Helion, 1937/2002
Eric D. Brose, 『The Kaiser's Army: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Edward J. Erickson, 『Defeat in Detail : The Ottoman Army in Balkans, 1912-13』, Praeger, 2003
Jonathan M. House, 『Combined Arms Warfare in the Twentieth Century』,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1
Steven T. Ross, 「The Development of the Combat Division in eighteenth-century French Armies」, 『French Historical Studies』, Vol. 4, No. 1, (Spring, 1965)
David Stevenson, 『Armaments and the coming of War : Europe 1900-1914』,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2006년 9월 3일 일요일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 : The European Inheritance by Jay Luvaas

전쟁은 당사자들에게는 고역이지만 제 3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다. 외국의 전쟁은 자국의 교리와 군사 기술에 대해 평가하고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유럽의 열강들은 남북전쟁에 큰 관심을 기울였고 북부연방과 남부연합 양측에 많은 수의 무관단을 파견했다. 이 책은 1988년에 발간된 물건인데 남북전쟁 시기 유럽 각국 무관단의 활동과 유럽 열강들이 남북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저자는 무관단을 파견한 유럽 각국 중 3강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독일, 프랑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독일의 경우 20만에 달하는 인원이 연방군에 복무 했고 이들 중 상당수가 귀국해 고급 장교로 진급 했기 때문에 이들이 미국에서 겪은 경험이 이후 독일군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다.

저자는 책을 두 부분으로 나눠서 1부는 남북전쟁 시기 영국, 독일, 프랑스 무관단, 혹은 자원병들의 활동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2부는 1870년대 이후 남북전쟁의 교훈이 이들 국가의 교리, 장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다루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독일의 사례이다. 독일의 고급 장교단은 남북전쟁을 아마추어들의 전쟁이라고 폄하했고 철도의 운용 외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동시에 독일인들은 남북전쟁에 참전한 외국인으로는 가장 많았기 때문에 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남북전쟁에 직접 참여한 독일 장교들이 이 전쟁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고 이것을 독일의 군사 교리에 어떻게 적용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책의 부록 중에는 남북전쟁을 주제로 한 독일 소설의 주인공이 누구를 모티브로 한 것인가에 대해서 짤막하게 다루고 있는데 꽤 재미있다.

2006년 4월 30일 일요일

[美利堅史] - 조지 미드 列傳

장군 미드(George Gordon Meade)는 서반아의 카디즈 태생으로 제임스 메디슨 7년 태어났다고 전한다. 비록 미드는 번방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양친은 천자의 덕이 미치는 미화(美華)의 신민이었다. 미드가 태어나던해 구라파를 병화에 몰아넣은 폭군 나파륜이 폐위되었다.

미드의 부친은 부유한 장사치 였으나 나파륜 전쟁으로 곤궁하게 되었다.

앤드류 잭슨 7년, 미드가 군관이 되어 1년간 군문에 몸을 담았다. 미드는 군관일을 그만 두고 대목(大木)일을 하며 전국을 유랑했다.

존 타일러 2년. 미드는 다시 군관이 되었다.

이후 묵서가(墨西哥) 토벌에도 나갔으나 큰 공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링컨 1년. 남부의 여러 제후들이 제퍼슨 데이비스를 왕으로 추대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에 도적의 무리 수만이 남부의 여섯주를 휩쓰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이때 도적들이 회색 두건을 머리에 썼다 하여 훗날 이를 회건적(灰巾賊) 이라 하였다.

도적의 기세가 등등하매 천자가 사방의 제후에 명을 내려 도적을 토멸하도록 하였다. 이때 미드도 장군의 지위에 올랐다.

회건적의 수괴 데이비스는 로버트 리를 대장군에 임명했는데 그 계략이 하늘에 닫고 계교가 교활하매 매번 싸움에 천병의 위세가 꺾였다. 도적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니 남부 15개 주에 도적의 깃발이 휘날렸다.

링컨 3년 6월 28일. 장군 후커의 인물됨이 용렬하여 미드가 포토맥 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링컨 3년 6월. 괴수(魁首) 로버트 리가 장군 롱스트리트, 이월, A. P. 힐과 군사 7만5천을 거느리고 북진을 시작했다.

북진하던 도적들은 게티스버그 읍 근교에서 거기장군 레이놀드의 군사를 만나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이 시작되고 정오가 되자 리가 거느리는 중군(中軍)이 도착했다. 리는 여러 장수들에게 공격을 명했나 미드의 군사가 용기백배하여 굳건히 버티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군 롱스트리트가 리에게 간하였다.

"대장군. 우리의 형세가 불리한 듯 하니 공격을 멈추소서."

리는 롱스트리트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처음 이틀동안의 싸움에서 천병이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굳건히 지키고 물러나지 아니하니 도적의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괴수 리는 미드의 중군을 쳐서 한번에 싸움을 결정지으려 했다.

리가 롱스트리트 휘하의 중랑장 페티그루, 트림블, 피켓, 앤더슨에게 군사 1만을 주며 명하였다.

"그대들은 핸콕이 거느린 중군을 격파하라."

도적 1만이 함성을 지르고 깃발을 휘날리며 돌격하니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그러나 핸콕의 군사들이 기운을 내어 함성을 지르며 각종 총통을 발사하니 꺼꾸러지는 도적의 무리가 셀수 없이 많았다. 헤이, 깁슨과 여러 장수들이 몸소 육혈포를 쏘며 군졸들을 격려하니 조금도 천병의 기세가 꺾이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도적들의 기세가 꺾이여 앞다투어 도망치니 이로써 북부의 여러 주가 도적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