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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3일 목요일

세계에 우뚝선 개그강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 직전 북조선의 사회과학잡지(?) 력사과학에 이런 글이 실렸답니다.

아프리카 나라들의 새 사회 건설에 시종일관 깊은 관심을 돌려오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이 나라들의 농업발전을 위하여 끊임없는 방조를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쁠럭 불가담 나라들과 발전도상나라들, 특히 아프리카 나라들이 튼튼한 농업생산토대를 마련하고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고 이 나라들과의 협조를 강화할 것 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프리카 나라들이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튼튼한 농업생산토대를 마련하는데 기여하는 것을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의 중요한 대외경제협조방침의 하나로 제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아프리카나라들의 농업발전을 위한 협조를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강화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나라들이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의 빛발아래 농업발전에서 이룩한 우리 나라의 성과와 경험을 따라 배울 수 있게 하시였다.

(중략 – 위대한 수령님이 어쩌고 저쩌고, 지도자 동지가 이러쿵 저러쿵)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크나큰 배려와 깊은 관심속에 1980년대 중엽까지만 하여도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는 남남협조의 정신에서 아프리카 나라들을 비롯한 22개의 발전도상 나라들에 30여개의 공장을 건설하여주고 20여개 나라들에 관개공사를 하여 주었으며 50여개 나라에 5,000여명의 기술자, 전문가들을 파견하여 새 사회건설을 성의 껏 도와주었다.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현명한 령도밑에 아프리카 나라들의 튼튼한 농업생산 토대를 마련해 주기 위한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의 성심성의로 되는 적극적인 협조는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식량문제를 자체로 해결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남남협조를 확대발전시켜나가는데서 선구자적 모범으로 되고 있다.

림춘성,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현명한 령도밑에 진행된 아프리카 나라들의 농업발전을 위한 협조」,『력사과학』1995년 제1호(153호), 13~16쪽

이 논문이 쓰여진 1995년은 이미 북한의 농업이 파탄에 이르러 쌀 수요량 중 200만톤이 부족한 실정이었고 대규모 수해까지 겹쳐 최악의 상황을 맞았습니다. 결국 같은 해 8월에는 공개적으로 전세계에 식량 원조를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1999년까지 고난의 행군과 함께 수백만의 아사자를 냈다고 하지요.

인민들이 굶어죽어가는 마당에 아프리카에 농업원조를 해 줬다고 거들먹 대고 있으니 이쯤 되면 이 글이 한 편의 블랙코미디로 읽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7년 12월 8일 토요일

대자연을 떡실신 시키는 위대한 마오주석의 한마디

주말에는 블랙코메디를..

참새에 대한 공격을 위해 어린이 전사들이 자연과의 전쟁에 대거 투입되었으며 특히 학교에 재학중인 연령대의 어린이들은 ‘해악’에 대한 공세의 주력군이었다. 마오는 1958년 5월 18일에 열린 제 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2차회의에서 이 전쟁에 참여할 최저 연령대를 설정했다.

“다섯살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인민은 ‘네 가지 해악을 격멸(除四害)’하기 위해 총궐기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이 전쟁이 학교 수업을 땡땡이 치는 즐거운 경험이라고 회고했다. 사천지방의 한 사람은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 참새 박멸 경험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네 가지 해악을 격멸’하는 것은 너무 신났습니다. 학교의 학생 전체가 참새를 죽이기 위해 동원되었지요. 우리는 사다리를 만들어 참새 둥지를 부수고 참새들이 쉬기 위해서 돌아오는 저녁에는 종을 쳐댔습니다. 참새가 유익한 동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죠. 우리는 그때만 해도 참새가 곡식을 축내는 동물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군사작전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에서도 합동 전술이 기본이었다. 참가자들은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고 참새들은 보다 조용한 장소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모든 연령대의 중국인 수백만명이 온 들판에 산개해 동시에 난리 법석을 떨어댔기 때문에 참새들은 안전한 피신처를 찾을 수 없었다. 참새와의 전쟁에서 보인 동시성은 이 전쟁의 결과만큼이나 충격적인 수준이었다. 중경의 남서농업대학에 재직하던 한 농업화학 전문가는 베이베이(北碚)구의 모든 인민들이 야간에 소집되어 언덕에 투입됐던 때를 회고했다.

우리는 불쌍한 참새들이 지쳐 떨어질 때 까지 솥을 두들겼습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이 짓을 계속했습니다. 그 뒤로는 참새가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나는 항일전쟁 당시 서주에서 중경으로 옮겨온 한 유명한 식당을 알고 있습니다. 그 식당의 별미는 소금에 절인 참새 두 마리를 꼬치로 만든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네 가지 해악을 박멸’하는 투쟁 이후로는 더 이상 그 요리를 맛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1959년이 되자 더 많은 해충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눈치채지 못 했지만 우리 대학의 농작물보호연구소에 따르면 곡식에 대한 병충해가 더욱 증가했습니다.”

(중략)

농부들은 뒤늦게야 참새야 말로 병충해 퇴치에 있어 가장 큰 아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60년 4월에는 참새를 대신해서 빈대가 네 가지 해악 중 하나로 지정되었지만 이미 이 무렵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는 참새의 씨가 마르고 말았다. 운남지역의 한 식물학자는 마오가 참새를 박멸하자는 선동을 한 뒤 갑자기 이것을 중단하라고 한 일을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는 참새의 둥지를 부수고 알을 깨 버리고 새끼들을 죽였습니다. 뒤에서야 과학자들은 참새가 벌레도 먹는다는 사실을 발표했고 중국과학원은 참새가 먹는 벌레와 곡식의 비율을 계산한 보고서를 내 놓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새 사냥을 멈췄습니다. 마오 주석은 그냥 ‘이제 그만하면 됐어(算了)'라고 말했답니다. 이 때는 이 한 사람의 말이 모든 것을 규정하던 때였지요.”

Judith Shapiro, Mao’s War Against Nature : Politics and the Environment in Revolutionary China(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p.86~88

과연. '마오주석의 말은 매 구절이 진리이고 한 구절이 우리의 일만 구절을 초월한다'는 린뱌오 동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말 한마디로 한 생물종을 멸종의 위기로 몰고가는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랍니까.

2007년 6월 29일 금요일

붉은군대는 추수전투에도 강하다!

오늘의 이야기는 대인배의 본산지 노서아 천지에 "소잡는 소리와 돼지 멱따는 소리가 진동하던 때"의 이야기랍니다.

1930년, 대기근으로 인해 일선부대에 대한 배급량이 30% 감축되자 혁명군사평의회(RVS, Революционными Военный Совет)는 각 부대들에게 식량을 보충할 보조농장(подсобное Хозяиство, 직역하면 보조생산시설이지만 대부분 농장이므로 보조농장으로 옮겼음)을 만들도록 했다. 이때부터 붉은군대에 있어 “자급자족”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됐다. 그렇지만 부대농장은 1930년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제정러시아 시기에도 육군은 예산 부족 때문에 부대 농장을 운영해야 했다. 산업계도 마찬가지였다. 각 공장들은 공장 농장을 만들어 공장노동자들이 농사를 지었다.
붉은군대는 사병들의 급식과 장교들의 부식을 충당하는데 있어서 부대농장을 군협동조합 (이하 ZVK, Закрытый Военный Кооперативный)과 경쟁하는 체제로 만들려고 했다. 장교들은 식료품을 자신의 급여를 가지고 부대농장에서 구매하도록 하자는 것 이었다. 연대 보급장교는 사병 식당용 식재료를 부대 농장이나 ZVK에서 구매하게 됐는데 이렇게 해서 부대농장은 ZVK와 직접 경쟁하는 관계가 돼 버렸다. 그러나 부대농장의 운영 책임자는 종종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부대농장에서 경작한 농산물을 해당 부대에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시장에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부대들은 혁명군사평의회의 지시가 내려오기도 전에 부대농장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부대농장 설치 명령이 내려오자 농장이 없는 부대들도 재빨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932년에 한 연대는 이미 200마리의 돼지와 60마리의 소, 토끼 100마리와 벌통 40개를 가지고 있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1개 사단 당 소 400마리, 돼지 3,200마리, 토끼 20,000마리, 그리고 1,000헥타르의 농지(귀리, 밀, 또는 과일)를 운영하도록 방침을 정했다.
대부분의 부대 농장은 병사들이 농사를 지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일부 연대는 민간인을 고용해 농사를 짓고 농장에서 재배한 작물이나 우유를 팔아 얻은 수입으로 임금을 지급했다. 한 포병대대에서는 부대가 하계 훈련을 위해 주둔지를 떠나면 장교의 부인들이 농사를 지었다. 또 다른 연대에서는 아예 장교의 부인들이 봄 파종기에 밭을 갈았다. 어떤 경우에는 제대한 병사들이 자신들이 원래 근무하던 연대의 농장에 고용돼 농사를 지었다.
많은 경우 연대 농장은 매우 효율성이 높았으며 ZVK의 수입을 줄이는데 일조했다. 제 87소총병연대의 농장은 1kg의 감자를 5코페이카에 팔았는데 해당 지역의 ZVK의 감자가격은 1kg에 10코페이카였다. 일부 농장들의 성과는 엄청났다. 예를 들어 한 연대는 농장을 처음 만들 때 3,500루블을 투자했는데 그 해 연말에는 20만루블에 해당하는 농작물을 생산했다. 니콜라이 보로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복무한 포병연대는 1932년에 버려진 국영농장 하나를 인수했는데 운영이 매우 잘 돼서 연대 소속 장교와 병사들에게 우유를 시장 가격보다 더 싼 1리터당 30코페이카에 팔 수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 소련은 너무 가난해 병사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대농장 외에도 ZVK가 존재했던 것은 다행이었다. 모든 부대농장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제때에 추수를 하지 못 하거나 아니면 농사에 시간을 많이 들이지 못 해서 농사를 망치기는 일이 많았다.
1932~33년의 대기근 기간에 식량은 군사훈련 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훈련 대신 농사를 짓는데 쓰였는지는 불확실하다. 제87소총병연대의 부연대장은 연대농장의 책임자였는데 이 사람의 경우는 매우 재미있는 사례이다. 이 장교는 부대농장 운영에 열성적이어서 연대 농장에 있는 소 38마리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부대농장과 ZVK 체제는 특히 대기근 동안에 붉은군대는 그 자체를 먹여살리는데 집중해야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군 보급체계나 ZVK 체제 모두 부대가 요구하는 최저한도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대농장은 엄청난 공헌을 했다. 부대농장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많은 부대들은 붉은군대가 확장기에 들어가 훈련이 가장 중요해 진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까지도 훈련보다는 농사에 시간을 더 배분했다. 결국 부대농장은 소련군에 있어 일반적인 부대 활동으로서 제도적으로 자리잡게 됐고 최근까지도 유지되었다.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6, pp.49~51

붉은군대는 추수전투에도 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