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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6일 월요일

소련 전차부대가 소련-핀란드 전쟁에서 얻은 전훈

지난번 스탈린 동지의 현대전 강의라는 포스팅에서 1940년 4월 14일 부터 17일 사이에 모스크바에 열린 핀란드전 전훈을 평가하고 분석하기 위한 주요 지휘관 회의에 대해 언급했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다양한 주제가 논의되었는데,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기갑부대의 운용에 관한 재검토라고 생각됩니다. 전차의 운용 문제는 여러 차례 간헐적으로 논의됐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4월 14일과 17일에 있었던 회의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는 전차의 분산운용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 논의되었습니다.

번역을 하다보니 녹취록이 불완전하게 작성됐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내용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더러 있죠.


먼저 1940년 4월 14일 저녁 회의에서 있었던 관련 발언을 인용해 봅니다.



시니친Синичкин(북서전선군 전차-장갑차 병과 정치위원): 여러분. 이 회의에서 몇가지 문제를 제기하는게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서부 우크라이나 사태(폴란드 병합)과 핀란드와의 전쟁에서 있었던 전차 및 장갑차 부대의 운용에 관한 것 입니다. 
먼저 전차와 보병간의 협동이 잘 이루어지지 못했던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전차 부대에 복무했습니다만 대규모 훈련에서 보전협동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제 생각에 보전협동을 제대로 수행하고자 한다면 전차여단을 소총병군단에 배속시키고 각 군단장에게 보전협동을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한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소총병사단에 배속된 T-26이나 T-38을 장비한 전차대대는 효용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단에 배속된 전차대대는 정비 부대가 없거나 보전협동을 총괄할 주체가 없어 전투력이 형편없었습니다. 제대로 통제할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전차를 분산 운용하는 것은 쓸모가 없습니다. 소총병사단 예하의 전차대대는 폐지해야 합니다. 

다음 문제는 전차 및 장갑차 부대의 지휘 체계입니다. 군관구와 전선군, 야전군 단위에서 전차부대를 올바르게 운용하지 못했습니다.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Автобронетанкового управления РККА은 감독 및 검열 업무를 담당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차부대가 충분한 준비태세를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구조하에서는 부대에 대한 명령권과 명령을 감독할 권한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느낌입니다. 붉은군대와 전선군, 야전군, 군관구의 전차부대 행정 구조는 공군의 예를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하면 전차부대에 대한 지휘를 강화하고 훈련을 총괄하여 통제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휘와 훈련을 담당하는 부서는 전차 부대의 현황에 관해 해당 군사위원회와 지휘관에 보고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사 문제에 대해서 몇마디 더 하겠습니다. 여러 작전에서 전차 부대가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계실겁니다. 하지만 전차부대의 간부는 제대로 선별되지 못했습니다. 예를들어 레닌그라드 군관구에서는 예하 전차부대들의 인사 교체를 대위 한명에게 맡겼습니다. 이 대위가 어떻게 혼자서 간부들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전차부대 간부들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이들에 대해 검토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지휘관을 선정하는데 혼란이 초래됐습니다. 제 생각에는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장이 전차부대의 인사권을 가지는 것이 대안이라고 봅니다. 이게 훨씬 효율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다음 문제는 전차에 관한 것 입니다. 여러분. 아군의 전차는 대구경 포탄은 커녕 일반적인 37mm 포탄 조차 막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적의 대전차 화력을 감안해, 대구경의 주포와 더 두꺼운 장갑을 갖춘 전차를 도입해야 할 때 입니다. 

스탈린: T-26 전차의 45mm 주포*의 성능이 부족하다는 겁니까? 

시니친: 충분합니다. 하지만 KV전차는 45mm 주포*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스탈린: 75mm 급 주포*라면 충분하겠습니까? 

시니친: 예. 그 정도라면 충분합니다. 신형전차들을 최대한 빨리 배치해야 합니다. 

1940년 4월 14일 저녁 회의, Alexander O. Chubaryan and Harold Shukman(ed.), Stalin and the Soviet-Finnish War 1939~40, (Routledge, 2013), pp.24-25에서 재인용.



* - 원 영어번역문에는 '장갑(Armor)'으로 되어있는데 문맥상 전차의 무장을 뜻하는 것이라고 판단해서 '주포'로 옮겼습니다.

1940년 4월 17일에 있었던 마지막회의에서는 당시 붉은군대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의 국장이었던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Па́влов가 핀란드전 시기 기갑부대의 전훈에 대한 총괄 평가를 했습니다. 여기서 전차부대의 분산운용을 강력히 비판하고 집중운용을 위해 편제를 개편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쿨릭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ули́к(1급 야전군지휘관, 포병 총감, 회의 진행자): 파블로프 동지의 발언이 있겠습니다.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Па́влов(2급 야전군지휘관, 붉은군대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장): 이번 전쟁에는 우리가 보유한 모든 종류의 전차를 투입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해야 겠습니까? 기존에 우리가 사용하던 전차들은 국내에서 개발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이것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이렇다 할 대전차무기가 없어 기관총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식민지전쟁에 쓰려고 개발한 것들을 개량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여러분은 아군 전차의 운용 경험과 그 실상에 대해 잘 아실 것 입니다. 저는 제7군 소속 전차부대 전체와 제13군 소속 전차부대 일부의 작전을 검토했습니다. 제34전차여단과 다수의 전차를 보유했던 한 전차대대가 전멸한 일을 구체적으로 조사하기 위해서 관련된 자료들을 검토했습니다. 여기서 도출한 결론은 다른 부대의 사례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핀란드와의 전쟁 중 전차부대 지휘관들은 무지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로 인해 나쁜 결과가 초래되었음을 솔직히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작년 12월 제138소총병사단이 실시한 보전협동작전과 최근 전선에 투입됐던 제100소총병사단의 보전협동작전을 비교하면 낮과 밤 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12월에 제138소총병사단을 지휘한 사단장은 허세가 심한 겁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단의 각 병과간 협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제100소총병사단의 사단장은 매우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전차 부대와 밀접하게 협력하여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동지여러분, 저는 이 사례를 통해 우리 군대가 지나치게 허장성세를 부리지만 전투는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 입니다. 이제 핀란드의 전장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핀란드 전역은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운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먼저 밝히겠습니다. 하지만 키비니에미Kiviniemi에서 전차군단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면 전차군단을 투입해서 핀란드군의 후방으로 진출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확실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겁니다. 전차군단을 돌려보내라고 명령한 것은 야전군 지휘관 메레츠코프
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였습니다. 

쿨릭: 그 결정은 잘 못된 것이었소. 

파블로프: 전차군단을 돌려보내라고 한 결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 또한 그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문에 아군은 확실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돌파를 활용할 수 있는 독립적인 행동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서 연대지휘관 바라노프가 지휘하는 전차여단을 투입한 바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주 명확한 구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라노프의 전차여단은 1개 소총병대대를 배속받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보병을 배속받은 전차여단을 독립적인 임무에 투입하는 구상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전차여단들(35, 40전차여단 등)은 대대단위로 분산되어 소총병사단에 배속됐습니다. 이들은 공군이 ‘지원 요청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운용됐습니다. 물론 대대단위로 분산된 전차들도 잘 싸웠고 때로는 탁월한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습니다. 
우리 붉은군대는 여러가지 악재를 안고 있었습니다. 사단단위로 전차를 분산 운용한다면 다른 전쟁에서도 재앙을 면치 못할 겁니다. 제가 딱 잘라 말하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우리가 전차와 타 병과의 협동 작전에 대해 가르쳐 온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전차부대는 아무런 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7,000여대의 전차를 소총병사단에 배속시켜 분산운용했기 때문에 전차부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소총병사단에 배속된 전차대대는 T-37과 T-36전차를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 차종은 매우 약하고 무력했습니다. T-37전차의 기동력으로는 진창을 돌파할 수 없었습니다. 이 전차를 배속받은 소총병사단들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지금 말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오류를 지적해 주십시오. 전차부대를 연대본부나 사단본부를 호위하는데 사용하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사실입니다. 

파블로프: 핀란드전에 투입된 전차는 7,000여대에 달합니다. 전차여단에 편성되어 여단 단위로 작전한 전차대대들은 여단본부가 지속적으로 통제했기 때문에 올바르게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으며, 훨씬 유용했습니다. 여단 참모장교들 뿐만 아니라 여단 정치장교들도 예하 전차대대들의 지휘통제에 참여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렐류센코Дми́трий Дани́лович Лелюше́нко 동지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공격할때 정치장교들은 보병진지로 가서 보병들이 전차를 엄호하는 것을 직접 감독했습니다. 그래서 보전협동이 매우 원활히 이루어졌습니다. 전차여단이 파견한 전차와 보병의 협동작전을 항상 감독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려는게 뭐겠습니까. 당장 소총병사단에 배속된 전차들을 전차여단을 증강하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현재 키예프 군관구의 4개 전차여단은 각각 전차 14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핀란드와의 전쟁 때문에 키예프 군관구의 전차여단들이 축소된 것 입니다. 만약 전시동원에 들어간다면 키예프 군관구의 전차여단들은 준비를 갖추지 못할 것입니다. 레닌그라드 군관구에서는 원래 키예프 군관구 소속이던 전차들을 원대복귀 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관행을 중단해야 합니다. 제가 지휘관으로 있는 한 전차부대들의 편제를 파괴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전차가 필요하다면 부대 전체를 배속 변경하면 됩니다. 

또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인력 보충 문제입니다. 전차부대는 많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새로 병력을 보충 받을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T-26 전차로 구성된 전차여단장은 T-26이 BT전차보다 우수하다고 할 것이고, BT전차로 구성된 전차여단장은 반대로 이야기 할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애국심입니다.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에 애정을 가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설사 T-26과 BT전차가 중기관총을 막을 능력은 없다해도 말입니다. 적 대전차포 진지가 무력화되기 전에 공격을 시작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옳은 말 입니다. 하지만 전차병은 단일한 보충체계를 통해 보충되어야 합니다. 
당과 정부는 전차 생산에 반영할 사항들을 지적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앞으로는 45mm 대전차포는 물론 3인치급의 포탄도 방어할 수 있는 전차를 생산해야 합니다. 그러한 방어력을 갖춘 신형 전차가 지금 생산 중입니다. 현재 우리는 부상을 입은 전차병들이 어디에 수용되어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귀향 조치를 받아 가족과 재회할 때에나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본인은 전차여단을 다음과 같이 편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각 전차여단은 더 많은 전차병과 지휘관들을 훈련할 수 있는 훈련대대를 가져야 합니다. 치료를 받고 원대복귀한 지휘관들은 먼저 훈련대대에 배치된 뒤 새로운 보직을 받아야 합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전차 조종수는 어떻게 합니까? 

파블로프: 보충대대가 전차여단의 모든 보충인력을 담당합니다. 저는 전차여단의 보직을 거치지 않은 장교는 군관구사령부에 발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차여단에 배속될 장교들은 먼저 보충대대에 가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제정 시절에 하던 방식이지만 우리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충부대에서 교육훈련을 담당할 기갑 장교들이 필요합니다. 여단에 배속된 장교들을 교육훈련에 차출하는 것은 안됩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인력이 있습니다. 이들은 같은 부대의 부상병들을 돌보았으며 부상병들도 그들을 돌보는 게 누구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대를 이탈하는 인원도 많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제 수륙양용 T-37 경전차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전차는 특수한 차종이므로 예비대에 넣어야 합니다. 군단 직할의 강력한 대대로 편성해 필요한 경우 군단장의 승인하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입니다. 신형전차 문제에 있어서, 저는 여러 동지들이 국방인민위원장이나 스탈린 동지께 전문을 마구 보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은 우리에게 군 조직 문제를 올바른 방법으로 다룰 기회를 주었습니다. 많은 동지들이 신형 전차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기존의 전차가 형편없다는 불평을 쏟아냅니다. 그리고는 ‘T-34와 KV 전차를 보내주십시오. 이 전차들은 다른 지역에는 적합하지 않고 우리 담당 지역에 적합합니다’라고 합니다. 사실이 이렇습니다. 저는 이런 요청에 대해 일일이 답을 하지 않겠습니다. 총참모부가 신형 전차를 어떤 군관구에 대량으로 배치하겠다고 결정하면, 다른 군관구에서는 자신의 차례가 올 때 까지 기다리면 될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군사훈련 및 T-34와 KV전차를 T-26, T-37, BT전차 등과 함께 운용하는 방식을 가르칠 것 입니다. 구식전차들은 메뚜기떼 처럼 T-34와 KV전차의 뒤를 따라 어떠한 임무라도 수행해야 하며, 또한 적의 대전차 방어선을 돌파해야 합니다. 

포병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 저는 포병을 높게 평가합니다. 하지만 종종 전차는 무시하곤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보병은 전차의 지원 없이는 머릿이 한마리 죽이지 못합니다. 보병은 전차 없이 공격할 수 없습니다. 

스탈린: 전차는 이동식 포병이오. 

파블로프: 전차는 직사를 하지만 포병은 간접사격을 합니다. 이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스탈린: 전차는 장갑을 두른 포병이오. 

파블로프: 저와 보로노프가 지휘관으로 있는 이상 우리 두 사람의 협력은 막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포병과 기갑 병과를 갈라놓아 협력을 방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게 첫 번째 요점입니다. 두 번째로, 보로노프 동지께서 좋은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보병과 포병의 협력 문제입니다. 만약 어떤 기갑 병과 장교가 보병 병과 장교보다 보병전술과 작전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면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이런 장교는 전차부대에 필요 없습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파블로프 동지가 옳습니다. 

파블로프: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갑 병과는 전차 부대의 교범 보다 보병 교범을 더 신경써서 연구해야 합니다. 전차 부대는 보병 부대에 맞춰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차를 이런 식으로 운용해서는 안됩니다. ‘7km 앞으로 진격해 숲에 있는 적을 소탕하라’ 또는 ‘우리가 식사하거나 세면을 하고 있는데 전차 부대가 경비를 서지 않는다면 너희 중대를 포격해 버리겠다.’  

스탈린: 그건 근거없는 풍문이오. 

파블로프: 아닙니다. 

스탈린: 동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거 아니요? 

파블로프: 아닙니다. 전차 부대가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부적절한 운용 때문입니다. 제86소총병사단에는 용맹한 지휘관이 한 명 있었습니다. 이 사단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울거나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각 연대에 말 20마리를 배속시켜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부대에 배속된 차량이 야지에서 제대로 기동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요구는 전적으로 옳았습니다.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서 루마니아로 진격할 경우를 염두에 두고 남부 지역의 군사-지리 현황을 연구했습니다. 루마니아 지역의 기후와 토양은 말이 끄는 수레라 할 지라도 두달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것 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현재 야지에서 기동할 수 있는 차량을 개발 중입니다. 하지만 이 차량은 겨우 100m를 달리고 고장나 버렸습니다. 이 차량은 GAZ-65입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궤도차량이 필요하다는 것이군요. 

파블로프: 그렇습니다. 자동차 부대의 경우 기동이 힘든 진흙탕 길 때문에 트럭을 운용하는데 부담이 클 것 입니다. 트럭을 정상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최선의 방법은 연대에 배속된 트럭들을 모두 모아서 사단의 중앙 통제를 받는 특수 연대, 혹은 특수 대대로 운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예비부품을 확보하고 정비하는데 용이할 것입니다. 그렌달Владимир Давыдович Грендаль 동지는 예비부품 공급과 정비가 문제라고 지적했는데 이것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기동부대들을 위해 민간 차량들을 대규모로 징발했는데 이것들은 결국 다시 민간에 돌려줘야 합니다. 예비부품 수급은 아주 어려웠습니다. 공장은 전선의 부대에 예비 부품을 제대로 공급해주지 못했습니다. 공장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군이 보유한 차량 중 많은 수가 예비부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정비 시설도 부족한 상태입니다. 

스탈린: 차량 정비를 이야기 하는거요? 

파블로프: 예비부품을 확보해야 차량을 운용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무자비하고 이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가용한 수단은 모두 동원해야 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겠습니다. 각 군관구에는 군수보급과 전차-장갑차부대를 담당하는 부서를 별도로 설치해야 합니다. 스탈린 동지께서는 동원 및 훈련을 통제하고 예상되는 전역에 대해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 전차-장갑차부대 총국의 조직을 분리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스탈린: 그 문제는 해당 총국의 관할이오. 그 조치를 취하는 것이 틀릴 수도 있고 옳을 수도 있소. 

파블로프: 스탈린 동지. 저는 전차-장갑차병과 총국을 분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군사훈련만을 담당할 조직이 필요합니다.  

1940년 4월 17일 저녁 회의, Ibid., pp.259~263에서 재인용.

2009년 3월 24일 화요일

1차5개년 계획과 소련 기계화 부대의 발전

러시아는 특수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서유럽과는 다른 독자적인 군사교리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1920년대에 '작전술'의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도 기동전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온 전통적인 군사학의 바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련은 1920년대부터 '작전술'에 바탕을 둔 기계화 부대가 중심이 된 기동전 교리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아직 새로운 이론을 실험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지 못했습니다. 소련의 1920년대는 혁명과 내전의 피해를 막 복구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공업화의 수준은 서유럽에 비하면 여전히 보잘 것 없었으며 군대는 1차대전 당시와 별 다를바 없는 장비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소련군대는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군대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스탈린이 야심차게 추진한 제1차 5개년 계획을 기점으로 소련 군사이론가들의 '이론'은 드디어 '교리'로 발전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1차5개년 계획시기의 전차 생산과 초기 기계화부대 창설에 대해 짧게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론에서 교리로

1920년대 후반기 기계화부대의 창설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첫번째는 기동전에 대한 이론들이 교리로서 실체화 되기 시작했다는 것 입니다.

러시아 군사이론가들은 1차대전과 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 스베친(Александр А. Свечин)과 투하체프스키(Михаи́л Н. Тухаче́вский)의 논쟁을 시작으로 샤포쉬니코프(Борис М. Шапошников), 트리안다필로프(Владимир К. Триандафиллов) 등의 군사이론가들은 기동전에 대한 이론을 활발하게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논쟁을 주도한 두 사람 중 스베친의 경우 1차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기소모전에 의한 점진적 승리를 제창한 반면 투하체프스키는 장기소모전이 1차대전 당시 독일의 패배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방대한 산업력을 동원하기 이전에 대규모의 강력한 공격으로 신속한 승리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Harrison, 2001, p.129~131] 하지만 많은 소련의 군사 이론가들은 미래의 전쟁은 기동 위주의 전투가 중심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소모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스베친 조차 미래의 전쟁에서는 1914~15년 시기의 동부전선과 마찬가지로 제한적인 기동전을 예측했습니다.[Harrison, 2001, p.135]
이 시기 소련의 군사이론가들은 활발한 논쟁을 통해 '작전술'의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제정러시아 말기부터 전략과 전술의 중간단계로서 작전이라는 개념이 조금씩 논의되고 있었으며 여기에 1차대전과 내전의 경험이 추가되면서 이론적인 정립이 가속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작전술이라는 단어는 1923~24년 붉은군대의 장군참모대학(뒷날의 프룬제 군사대학) 강의에서 스베친이 처음으로 명확한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작전술이라는 단어와 개념은 붉은군대 장교단 사이에 급속히 퍼져나갔습니다. 불과 5년도 되지 않은 1928년에 '작전술'이라는 용어는 공식적인 군사사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Harrison, 2001, p.140~141] 작전술의 개념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트리안다필로프 등의 군사이론가들은 작전술의 개념을 보다 정교하게 가다듬고 구체화 했습니다.

소련군은 작전술 개념의 도입 등 군사사상에 있어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전차의 사용에 대해서는 20년대 후반까지도 보수적이었습니다. 1927년 까지도 전차는 참호전 상황에서 돌파를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었습니다. 1928년에 전차생산을 증대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이것은 서방과의 전쟁에 대한 공포와 서방의 전차 보유대수에 대한 과장된 정보 등의 영향이었다고 합니다.[Habeck, 2003 p.88]
새로운 군사이론에 맞는 전차의 활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투하체프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 등의 군사이론가 들이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1928년에 전차의 대규모 생산을 주장하기는 했으나 이 시점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운용 방안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투하체프스키가 전차의 활용에 대해 구체적인 구상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보로실로프(Климент Е. Ворошилов)와의 논쟁으로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밀려난 이후였습니다. 투하체프스키가 본격적으로 전차에 관심을 가지는 동안 트리안다필로프도 전차의 활용방안을 연구했습니다. 트리안다필로프는 1920년대의 연구를 통해 적의 방어종심을 돌파해 포위하는 것 이외에 돌파구를 봉쇄하기 위해 반격해 올 적의 예비대의 격파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Harrison, 2001, p.150] 전차는 이 두가지 임무를 수행하는데 적합한 무기체계였습니다.

1928년도 붉은군대야전규범(Полевой Устав Краснои Армий), PU-28은 전차의 활용한 돌파와 포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PU-28은 전차의 지원을 받는 두 개의 제대 중 하나는 적 방어선을 돌파해 후방의 적 포병을 격멸하거나 기병의 지원을 받을 경우 적 후방이나 측방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고 두 번째 제대는 보병의 지원을 받아 적 주저항선의 방어 거점을 격파하도록 규정했습니다.[Habeck, 2003 p.95~96]
PU-28의 개정판인 1929년도 야전규범, PU-29는 전차, 보병, 포병 부대의 연합작전에 기반한 현대적 기동전을 구체화 했습니다. PU-29는 투하체프스키, 트리안다필로프 등의 혁신적인 군사이론가들이 서술했는데 특히 트리안다필로프는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해 전차와 차량화부대를 이용, 공세 초기에 적 방어선의 방어종심을 일거에 돌파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PU-29는 PU-28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전차 부대의 역할을 더 이상 보병지원의 단거리 돌파에 묶어 두지 않았습니다. 전차부대는 기병과 함께 기동력을 발휘해 적을 포위하거나 제병 합동작전을 통해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규범은 야전지휘관들이 전차부대를 보병지원전차와 장거리전차로 구분하고 이 중 장거리전차에 적 포병의 격파와 적 후방으로의 돌파임무를 부여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대규모 전차부대의 동원이 가능할 경우에는 포병의 지원이 없거나 최소화된 상태에서도 돌파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한 점에서 전차의 역할을 얼마나 중요하게 규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Erickson, 2001, p.307]
이 시기 소련의 군사이론가들은 전차를 기능 별로 구분했는데 그 주된 원인은 소련의 낮은 기술수준에 있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소련의 기술과 산업생산능력으로는 범용성이 높은 전차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기능별로 특화된 전차를 생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Habeck, 2003 p.129]

2. 외국 전차 기술의 도입

PU-29를 통해 기초적이긴 하지만 독립적인 대규모 전차부대를 위한 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이론에 적합한 새로운 전차가 필요했습니다. 이때까지 소련 전차부대의 중핵을 구성하고 있던 MS-1 전차는 기본적으로 르노 FT-17의 개량형으로 보병지원 전차에 불과했기 때문에 PU-29에서 규정하고 있는 장거리전차의 역할을 수행할 전차가 필요했습니다.

1920년 후반의 시점에서도 소련은 아직 독자적으로 신형 전차를 개발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신형전차 개발에 외국의 전차를 참고해야 했습니다. 국방인민위원장 보로실로프는 1929년 11월에 외국의 장갑차량, 특히 전차를 구매할 위원단을 조직하도록 하고 그 위원단의 단장에는 군사과학지도국의 할렙스키(Иннокентий А. Халепский)를 임명했습니다. 할렙스키의 위원단은 1929년 12월부터 4개월간 영국,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 전차의 구입을 위한 협상을 전개했습니다.
할렙스키 위원단은 1930년 1월 독일을 방문해 비밀리에 전차 개발을 하고 있던 독일 기업들과 접촉했습니다. 할렙스키는 독일측과 신형전차 개발을 위한 기술 협력 등을 논의했습니다.
독일 다음의 방문지인 영국에서는 좋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위원단은 영국에서 빅커스-암스트롱(Vickers-Armstrong Ltd)으로부터 카든-로이드 소형전차(Tankettes) 20대, 6톤 경전차 15대, Mark-II 중형전차 15대를 구입했습니다. [Habeck, 2003 p.130] 영국에서 구입한 전차들은 1930년 말부터 1931년 초 까지 순차적으로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영국을 시찰한 할렙스키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영국이 차량화에 대해서 가장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Hofmann, 1996, p.288]

위원단의 미국 방문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습니다. 할렙스키는 이미 1928년 10월 미국을 처음 방문한 바 있었고 이때 처음으로 미육군이 추진하고 있던 커닝햄(Cunningham) T1을 접했습니다. 할렙스키는 이 두 번째 미국방문에서 커닝햄 T1을 구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소련 정부는 할렙스키 위원단의 미국 방문 이전에도 커닝햄 T1의 수입을 신청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소련은 아직 미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커닝햄사에서는 무기의 해외 수출을 관리하는 전쟁부(War Department)에 이 문제를 알렸습니다. 1930년 3월 미국에 도착한 할렙스키는 원래 계획대로 T1을 구입하려 했으나 전쟁부가 외교문제를 들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또 T1의 성능이 당초 기대를 밑돌아 T1의 구입을 취소했습니다.
커닝햄 T1 대신 칼렙스키의 관심을 끈 것은 유명한 크리스티(John Walter Christie)의 경전차였습니다. 칼렙스키는 미국의 군사잡지에서 크리스티가 개발한 전차 차체에 대한 기사를 읽고 크리스티와 접촉하기로 결정합니다. 칼렙스키가 보기에 크리스티의 M1928은 궤도주행방식과 바퀴주행방식이 가능했기 때문에 소련의 군사이론가들이 고민하던 '작전 기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었습니다. 1930년 4월 29일 크리스티는 소련에 M1928의 개량형인 M1930을 판매한다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할렙스키는 귀국한 뒤 크리스티 전차를 바탕으로 한 고속전차(BT, Быстроходный Танк)의 개발과 대량생산을 서두를 것을 주장했습니다. 폴란드도 크리스티 전차를 구매했기 때문에 고속전차의 양산이 폴란드보다 뒤쳐진다면 소련은 폴란드군에게 '작전 기동성'의 우위를 상실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할렙스키는 1931년 말 까지는 최소한 100대의 고속전차를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미국에서 구입한 크리스티 전차가 1930년 9월에는 소련에 인도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1931년 5월까지는 분석과 시험을 마치고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Hofmann, 1996, p.291] 장차 크리스티 전차와 함께 소련군 기갑부대의 주축이 될 빅커스의 6톤 경전차의 경우는 1931년 8월까지 분석과 시험을 마치고 대량생산에 들어가는 것이 할렙스키의 계획이었습니다.[Stoecker, 1998]

크리스티 M1930을 바탕으로 한 고속전차의 개발은 급속히 진행됐습니다. 할렙스키는 1931년 6월 3일 혁명군사평의회(RVS, Революционными Военный Совет)에 출두해 고속전차 개발 계획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할렙스키는 M1930을 바탕으로 14톤급에 37mm포(초기안은 76mm포)와 2정의 기관총을 장비하고 바퀴 상태로는 시속 70km, 궤도 상태로는 시속 40km의 성능을 가진 전차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여기에 스탈린의 직접적인 관심도 고속전차의 개발을 가속화 했습니다. 1931년 11월 할렙스키가 병에 걸려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스탈린은 직접 할렙스키를 불러 크리스티 전차에 대해 질문했다고 합니다.[Habeck, 2003 p.152] 스탈린의 관심 덕분인지 고속전차 생산을 담당한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11월에 원자재, 운송수단, 노동자에 대한 식량배급 등에 있어 최우선권을 부여 받았습니다.[Stone, 2000, p.189]

3. 1차5개년 계획과 전차 생산

기동전에 필요한 이론과 교리의 정립, 그리고 그에 필요한 전차의 확보가 끝났지만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전차의 대량 생산에 필요한 산업력의 확보였습니다. 소련이 본격적으로 전차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27년 4월 MS-1가 처음이었습니다. 1927~28년 사이에 생산된 MS-1은 25대에 불과했습니다. 붉은군대 혁명군사평의회는 1928년 3월에 1933년까지 MS-1을 1,600대 생산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1928년 당시 소련이 보유한 전차는 모두 합쳐봐야 92대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엄청난 것 이었습니다.[Harrison, 2001, p.173] 그리고 실제로도 이 야심찬 계획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28년에 완성된 군사부문 5개년 생산 계획에서는 전차 생산량을 1929/30년에는 340대로 잡고 이것을 1933년까지 연간 7,000대 수준으로 증대시킨다는 목표를 잡았습니다.[Simonov, 2000, p.42] 5년만에 전차 생산능력을 20배 늘린다는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때마침 붉은군대의 무장계획을 강력하게 밀고 나갈 강인한 추진력을 갖춘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스탈린, 보로실로프와의 의견 불일치 때문에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던 투하체프스키가 1931년 모스크바로 귀환한 것 이었습니다.[Harrison, 2001, p.130~131] 투하체프스키는 모스크바로 귀환해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과 병기국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 최종 결정권자인 스탈린도 전차 생산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공업화가 진행중인 소련에게 현대적 무기체계인 전차의 생산을 단기간에 급증시키는 것이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1930년 시점에서 소련의 공업력으로는 전차의 장갑에 필요한 고급 철판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었다는 점 입니다. 낮은 기술수준은 여러 방면에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모토빌리힌스키 기계공장이 생산한 37mm전차포는 100% 모두 생산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해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Stone, 2000, p.163] 붉은군대의 방대한 전차부대 증강과 전시동원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실한 공업생산능력과 기술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1931년 7월 말 중공업, 특히 제철업의 신속한 확장을 요구했습니다.

고속전차의 생산은 할렙스키가 제시한 37mm포탑의 생산 지연 때문에 당초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할렙스키와 고속전차 생산계획을 검토한 뒤 고속전차의 시제품을 생산할 공장을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 자동차 공장에서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으로 변경하고 1931년 10월 15일까지 3대의 시제품을 생산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에서 시제품이 완성되면 양산을 개시해 1932년 말 까지 고속전차 2,000대와 T-26 1,600대를 생산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리코프 기관차공장은 1931년 11월 1일에야 고속전차 시제품 3대를 완성했으며 1932년 11월까지 당초 계획에 크게 미달한 170대의 고속전차가 붉은군대에 인도되는 것에 그쳤습니다.[Hofmann, 1996, p.298~299]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군대 수뇌부는 전차 생산계획을 더욱 확대했으며 투하체프스키가 제시한 1932년도 생산계획은 T-26 12,000대와 소형전차 16,000대였습니다.[Habeck, 2003 p.149]
위에서 언급했듯 1932년의 전차 생산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신형 고속전차인 BT-5 또한 45mm전차포의 생산 문제로 지연되고 있었고 1932년 12월까지 생산된 신형전차는 603대의 고속전차와 1410대의 T-26에 불과했습니다. 이중 고속전차 89대는 전차포의 부족으로 포탑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포탑이 없거나 기관총만 장비한 BT-2를 1933년까지 모두 37mm포탑으로 교체한 뒤 45mm전차포를 탑재한 BT-5의 생산으로 넘어간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T-26, BT의 양산과 함께 중형전차와 중전차 개발도 추진되었습니다. 영국에서 구입한 빅커스 Mark II를 기초로 한 중형전차 T-28과 중전차 T-35가 혁명군사평의회로부터 생산 승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중형전차와 중전차의 개발도 앞서 진행된 경전차들의 생산과 유사한 문제를 겪었습니다. T-28의 경우 구동계통의 문제와 경전차들과 마찬가지로 포탑 생산 부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전차 T-35또한 구동계통 문제로 시제품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1931~1933년 사이에 영국과 미국에서 기술을 도입한 신형 전차 중 제대로 생산된 것은 T-27소형전차 정도였습니다. 1931년의 전차 생산은 2,000대에 그쳤습니다.
소련의 전체적인 산업력의 부족은 전차생산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속전차 생산을 담당한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BT-5의 초기 생산형에 대해 질 낮은 베어링을 공급받았기 때문에 45mm포탑을 탑재하면 무리가 갔습니다.[Hofmann, 1996, p.304] 1931년의 전차포 생산계획은 대실패로 끝났습니다. 특히 BT-5에 탑재할 신형 45mm 전차포는 1931년에 단 한문도 도입되지 않았습니다.[Stone, 2000, p.169]

1931년의 부실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소련 지도부는 전차생산 증대에 큰 희망을 걸었습니다. 스탈린은 1932년 1월 10일 국방인민위원회 회의에서 고속전차 증산을 위해 일반 민수공장들을 전차생산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강구할 것을 제안하고 전차 생산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따라 1932년도 전차 생산계획은 T-27 5,000대, T-26 3,000대, BT전차 2,000대 등 총 1만대로 결정되었습니다.[Stone, 2000, p. 193] 1932년 전차생산계획에 따라 전차를 생산할 공업기지의 대규모 확장이 계속됐습니다. 5월에는 스탈린그라드에 T-26 1만2천대와 6천대분의 예비부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1932년까지 건설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생산 증대 계획은 차질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산 목표를 맞추기 위해 자동차 공장을 비롯한 민수 공장들을 대거 전차 생산에 돌렸지만 생산에 혼란만 가중되었을 뿐 이었습니다. 생산이 비교적 단순한 T-26 조차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었고 구조가 더 복잡한 BT 전차는 문제가 더 심각했습니다. 주 생산공장인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숙련된 기술자가 부족했고 포탑, 엔진, 구동 계통 등을 생산할 일곱개의 공장들도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체 개발한 엔진을 탑재하려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에 생산 계획을 맞추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급히 리버티 엔진을 수입해야 했고 엔진 문제로 생산은 더 지연되었습니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생산이 성공적이었던 T-27 조차 갑작스러운 생산계획 상향조정으로 문제를 겪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932년도 전차생산계획도 이전 연도의 생산계획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했습니다. 1932년 10월 1일까지 5,150대의 전차를 생산하고 이후 월간 생산량을 1,365대로 끌어올려 1만대 생산을 달성한다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지만 실제 10월 1일까지의 생산량은 1,365대에 월간 생산량은 480대를 달성하는데 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1932년의 전차 생산은 T-27 2,100대, T-26 1,600대, BT전차 600대에 그쳤습니다.[Stone, 2000, p.198~201]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45mm 전차포의 생산 차질로 T-26과 BT 전차 중 800대는 포탑이 없는 상태로 계획된 숫자만 채우기 위해서 완성된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1932년 생산계획이 실패한 결과 1933년도 전차 생산계획은 7,000대로 하향조정 되었습니다. 1933년도 생산계획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세 종류의 신형전차, T-37 수륙양용전차와 T-28 중형전차, T-35 중전차가 포함되었습니다. 기존의 전차 생산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채 보완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술적으로 복잡한 신형전차의 생산이 추진된 것 입니다.

4. 기계화군단의 창설

비록 5개년계획 기간 중 전차 생산 계획은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한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소련의 전차 생산능력이 비약적으로 증대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였습니다. 이제 소련은 대규모 기계화부대를 운용할 수 있는 전술교리, 교리를 기술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전차, 그리고 그 전차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산업기반을 모두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기계화부대가 만들어질 차례였습니다.

신형전차의 도입은 소련 이론가들이 정립한 전차 운용 교리를 현실화 시킬 수 있게 했습니다. T26은 보병지원전차로서, BT 계열 전차들은 고속 전차로서 독립된 기계화부대의 주력 장비가 되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와 할렙스키는 신형전차들의 전술임무를 다음과 같이 할당했습니다. T27소형전차와 T37수륙양용전차는 정찰 임무를, T28 중형전차와 T35중전차는 요새화된 적 방어선의 돌파를, 그리고 전술적 돌파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BT전차와 T26전차가 작전단계의 종심돌파를 수행하는 것 이었습니다.

최초의 기계화여단은 1929년에 편성된 임시기계화연대를 확대 개편해 1930년 5월 창설되었습니다. 이때 창설된 임시 기계화여단은 66대의 전차와 340대의 각종 차량, 3천명의 병력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임시 기계화여단은 1930년 가을에는 정식으로 제 1기계화여단(Мехакнизированная Бригада)이 되었고 예하에 1개 전차연대, 1개 보병대대, 1개 포대와 기타 지원부대를 두었습니다. 장비는 총 60대의 전차와 12대의 장갑차, 350대의 각종 차량이었습니다. 최초의 기계화여단은 초기 훈련 단계에서 많은 문제점을 보였습니다. 가을에 실시된 한 훈련에서 기계화여단은 기병사단을 추격해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는데 기동 도중 연료를 모두 소비해 기병사단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외에 전차연대가 장비한 MS-1 전차의 잦은 고장도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MS-1의 느린 속력으로는 PU-29에 명시된 적 방어종심의 신속한 돌파와 적 포병의 격파가 어려웠습니다.[Habeck, 2003 p.133~134] 새로운 교리에 맞는 새로운 전차가 필요했고 그것은 이제 막 대규모로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 3월, 할렙스키는 붉은군대 총참모부에 전차군단(Танковый Корпус)을 창설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당시 총참모장이던 예고로프(Александр И. Егоров)와 투하체프스키는 할렙스키의 건의안에 찬성했습니다. 이에 따라 기계화군단을 포함한 대규모의 기계화부대 창설이 시작되었습니다. 독립된 기계화군단의 창설 외에도 최고사령부 예비전차여단(TRGK)을 별도로 편성하고, 기병사단 예하에는 기계화연대를, 소총병사단 예하에는 전차대대를 편성하도록 되었습니다.
최초의 기계화군단은 11소총병사단을 개편한 11기계화군단과 45소총병사단을 개편한 45기계화군단이었습니다. 각 기계화군단은 2개 기계화여단과 1개 소총병여단, 기타 직할대로 편성되었습니다. 두 군단의 예하 여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1기계화군단은 31기계화여단(T-26), 32기계화여단(BT전차)과 33소총-기관총여단(Стрелково пулеметная Бригада), 45기계화군단은 133기계화여단(T-26), 134기계화여단(BT전차), 135소총-기관총여단이었습니다.[Дриг, 2005, с.9] 편성 초기 기계화군단의 기갑장비는 전차 500대와 장갑차 200대라는 당시까지 유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Habeck, 2003, p.168] 1934년 1월까지 붉은군대의 기갑전력은 약 7,900대 수준으로 증강됐습니다. 기계화군단의 추가 창설은 보로실로프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그 밖의 기계화부대 창설은 계속되어 1936년까지 6개의 최고사령부 예비전차여단, 15개의 기병사단 예하 기계화연대, 83개의 소총병사단 예하 전차대대 및 전차중대가 창설되었습니다.[Harrison, 2001, p.176~177]

이것은 당초 투하체프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와 같은 군사이론가들이 기대한 목표에는 미달하는 것 이었지만 엄청난 성과였습니다. 할렙스키 위원단이 외국의 전차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순방길에 오른지 5년 만에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기갑전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군사 및 산업적으로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이것은 분명히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문헌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Third Edition), Frank Cass, 2001
Mary R. Habeck, Storm of Steel :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Richard Harrison, The Russian Way of War : Operational Art, 1904-1940,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1
George F. Hofmann, ‘Doctrine, Tank Technology, and Execution : I. A. Khalepskii and the Red Army’s Fulfillment of Deep Offensive Operation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2(June 1996)
Nikolai S. Simonov, ‘The War Scare of 1927 and the birth of the defense-industry complex’, The Soviet Defense-Industry Complex from Stalin to Khrushchev, St.Martins Press, 2000
Sally W. Stoecker, Forging Stalins Army : Marshal Tukhachevsky and the Politics of Military Innovation, Westwiew Press, 1998
David Stone, Hammer and Rifle : The Militarization of the Soviet Union 1926-1933,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Евгений Дриг, Механизированные Корпуса РККА В Бою, Иэдателстьство 2005

2007년 11월 16일 금요일

1939년 폴란드 침공과 소련의 동원 문제

오늘의 이야기는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에 이은 속편입니다. 이번의 주인공은 천하의 대인배 스탈린 동지의 지도를 받는 붉은군대입니다.
사실 전편의 독일군은 총통의 갑작스러운 명령으로 만슈타인이 불과 몇 시간 만에 뚝딱 만든 계획으로 움직이다 보니 엉망이 되었는데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의 소련군은 오래전부터 계획이 세워지고 준비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엉망이었다는 점에서 더 안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과거 소련의 공식적인 문헌들은 1939년 폴란드 침공에 대해 대략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술하고 있었다는군요.

소련군대에 폴란드 국경을 넘어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의 근로인민들을 폴란드 의 압제와 파시스트의 노예화로부터 해방하고 보호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마자 벨로루시 전선군과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모든 병사와 지휘관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영광된 인민해방의 임무를 달성하겠노라고 맹세했다. 전선군 군사평의회의 명령서는 소련 병사들은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로 «정복자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형제들을 지주와 자본가들의 모든 압제와 착취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진격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 소련 병사들은 특히 인민들을 위협자들로부터 보호하고 민족에 상관없이 인민들의 재산을 보호하며 폴란드군과 폴란드 정부 관료들이라도 소련군에게 저항하지 않을 경우 정중하게 다루도록 명령받았다. 또한 공세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도시와 마을에 대한 포격 및 폭격은 금지되었으며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헝가리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했다.
소련군대는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군작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소련군은 해방 전역을 수행하기 때문에 엄격한 군기와 조직력을 유지해야 했으며 또한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이 작전은 단지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서부의 근로인민들을 해방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독일 파시스트들의 노예화와 빈곤화, 그리고 완전한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수백년 동안 그들의 원래 조국과 민족으로 다시 통합되기를 갈망해온 인민들의 염원을 민주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Excerpts on Soviet 1938-40 operations from The History of Wa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a 1977 textbook of the Military Academy of the General Staff of the USSR Armed Force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6 No.1, March 1997, pp.110-111

그런데 실제로 이 임무는 그다지 영광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특히 그 준비 과정은 영광과는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까지의 거리 만큼이나 멀었던 것 같습니다.

영광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이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시작됩니다.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스탈린은 폴란드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즉시 침공준비를 시작합니다. 9월 3일에는 키예프 특별군관구, 벨로루시 특별군관구, 하리코프 군관구, 오룔 군관고, 칼리닌 군관구, 레닌그라드 군관구, 모스크바 군관구에 다음과 같은 지시가 하달됩니다. 1) 전역까지 1년 남은 병사들은 1개월간 복무 연장 2) 각급 부대 지휘관 및 정치장교들의 휴가 취소 3) 모든 부대는 전투 태세를 갖추고 무기, 장비 및 물자를 점검할 것. 그리고 9월 6일에는 22호 동원계획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 군관구의 예비역들은 전역 12년차 까지 소집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보로실로프는 동원 부대들에게 집결지들을 지정하고 이에 따라 폴란드와 인접한 벨로루시 특별군관구와 키예프 특별군관구는 소속 부대들에 대한 재배치를 시작했습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이무렵 독일군대는 폴란드군의 저항을 차근 차근 분쇄하면서 바르샤바로 쇄도하고 있었지요.

마침내 9월 11일에는 벨로루시 특별군관구가 벨로루시 전선군으로, 우크라이나 특별군관구가 우크라이나 전선군으로 개칭되어 침공준비에 박차가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전에 동원된 붉은군대의 전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 : М. П. 코발레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3군 : В. И. 쿠즈네초프 군단지휘관
- 제 11군 : Н. П. 메드베데프 사단지휘관
- 제 10군 : И. Г. 자하르킨 군단지휘관
- 제 4군 : В. И. 추이코프 사단지휘관
- 볼딘 기병-기계화집단(Конно-механизированная Группа) : В. И. 볼딘 군단지휘관. 제 3, 6기병군단, 제 15전차군단
- 제 23 독립소총병군단
- 제 22 항공연대

우크라이나 전선군 : С. К. 티모셴코 1급 야전군지휘관
- 제 5군 : И. Г. 소베트니코프 사단지휘관 : 제 8, 27소총병군단, 제 14, 36전차여단
- 제 6군 : Ф. И. 골리코프 군단지휘관 : 제 13, 17, 49, 36소총병군단, 제 2기병군단, 제 24, 10, 38전차여단
- 제 12군 : И. В. 튤레네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6, 37소총병군단, 제 23, 26전차여단
- 제 13군 : 제 35소총병군단
- 기병-기계화집단 : 제 4, 5기병군단, 제 25전차군단
- 제 15 독립소총병군단
- 제 13 항공여단

이렇게 출동할 부대가 정해지고 집결지도 지정되었으니 해당 부대들이 기동을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미 소련은 1938년부터 22호 동원계획에 따른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위에서 언급했지요.

그런데 황당하게도 1년 동안 준비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준비가 첫 단계부터 엉망으로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동원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동원이 느리게 이뤄져서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이 작전을 위해 신규 편성하는 야전군들은 9월 17일이 돼서야 “대충” 동원을 완료할 수 있었고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는 계획과는 달리 이미 편성이 완료된 부대들만 진격을 해야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동원이 완료된 것은 9월 27일의 일이었는데 이 때는 상황이 거의 종료됐을 무렵이죠;;;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핵심 기동전력인 제 25전차군단은 동원 3일차 까지 편제의 30%도 채우지 못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병력 뿐 아니라 장비 동원도 문제였습니다. 사람이야 억지로 머릿수를 채울수는 있을텐데 없는 물건은 땅에서 솟는게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 제 36전차여단의 경우 완전편제시 트랙터 127대가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동원된 것은 42대에 불과했으며 ZIS-6 트럭은 187대가 필요했는데 실제로는 15대에 불과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 25전차군단은 편제상 각종 차량 1,142대가 있어야 했는데 9월 11일 까지 451대를 확보하는 데 그쳤습니다. 제 13소총병군단은 편제상 2,500대의 트럭이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9월 7일까지 확보한 것은 1200대에 그쳤고 게다가 이 중에서 20%는 예비부품이나 타이어가 없어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이 사단은 1,400통의 연료를 확보하고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160통만 가지고 있었으니 차량이 있어도 모두 굴리기는 어려웠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 6전차여단은 장갑차가 단 1대도 없었습니다.
차량 같은 것은 대형 장비니 그렇다 치더라도 동원된 예비군에 지급할 개인 장비까지 부족했습니다. 제 27소총군단은 철모 16,379개가 모자랐으며 제 15소총군단은 군화 2,000족이 없었고 제 36소총군단은 허리띠 2,000개가 부족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동원된 부대들을 폴란드 국경까지 이동시킬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 입니다.
철도 수송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소련의 철도는 이탈리아의 철도와 비슷하게 돌아갔던 모양입니다. 예를 들어 제 96소총병사단의 선발대인 41소총병연대는 두 시간 늦게 열차에 탑승했는데 제 44소총병사단의 경우 포병연대와 직할대는 침공이 개시될 때 까지 기차를 타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차 시간이 늦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집결지에서 기차역으로 이동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전차부대의 경우는 심각했다고 합니다. 침공에 투입된 부대들 중에는 T-26을 장비한부대가 많았는데 T-26은 기계적 신뢰성이 낮아 기차역으로 행군하는 동안 자주 도로에 주저앉아 버렸다지요. 간신히 기차역에 도착한 몇몇 부대는 전차들의 엔진 및 동력계통의 수명이 행군도중(!!!!) 초과되어 기차를 탈 수 없었다는 어이없는 사태도 발생했습니다. 머리가 세개 달린 T-28을 장비한 제 10전차여단은 12일에 기차에 탑승해 이동해야 했으나 실제로는 제때 화차가 준비되지 못 해서 16일에야 장비 적재를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대가 국경에 전개를 완료한 것은 19일 이었고 결국 폴란드 침공이 시작됐을 때는 일부 부대는 아직 화차에서 내리지도 못 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철도는 물론이고 도로 이동도 엉망이었습니다. 이런 대규모 부대의 기동을 위해서는 사전에 도로를 잘 배분해 놔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하지 못 해 한 도로에 여러 부대가 뒤섞이는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했습니다.

한편, 소련군대가 사전에 준비된 동원조차 완료하지 못해 쩔쩔매는 동안 독일군은 폴란드를휩쓸고는 독소불가침조약에서 합의된 소련 영역까지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소련은 동원이 완료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장 준비된 병력만 가지고 침공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은 부대들도 상당수는 편성이 완료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360독립통신대대의 경우 침공 당시 편제의 60%에 불과했고 제 362독립무전대대는 편제의 82%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1939년 9월 17일 오전 5시 40분, 폴란드 침공은 동원이 대충 완료된 상황에서 시작됐고 선발대가 국경을 넘는 동안 원래 침공에 같이 투입될 나머지 부대들은 계속 편성 중 이었습니다.
제 60소총병사단은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편제의 67%까지만 동원이 된 상태였습니다. 특히 특수병과의 동원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제 81소총병사단의 경우 기술병과는 45%, 행정 및 보급병과는 69%, 의무병과는 47%, 수의병과는 79%만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단을 수송할 자동차 대대의 정비중대는 편제의 20%만 채운 상태였습니다. 제 99소총병사단은 침공 직전인 16일 까지도 포병연대가 편성되지 않아 보병만 달랑 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한편, 먼저 나간 침공부대들은 폴란드군의 저항이 신통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및 장비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특히 비전투 부대는 편제율이 낮았는데 이것은 작전 수행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제빵부대들의 편제미달이 심각해 사단당 하루 12톤의 빵만 배급되고 있었습니다.(실제 배급 소요량은 17톤) 대부분의 침공 부대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며 진격했고 폴란드군의 식료품을 탈취하지 못한 부대들은 작전이 종료될 때 까지 배를 곯았다고 전해집니다.

폴란드 침공에서 드러난 소련군의 문제라면 크게 두 개를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첫째, 사전에 계획과 준비가 꾸준히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동원은 엉망이었다는 점. 둘째, 자국 영토 내에서 이동하는 것 조차 엉망이었다는 점. 이런 문제점은 핀란드 전에서도 거듭되었고 결국 1941년의 대재앙의 기원이 되고 말지요.

2007년 9월 24일 월요일

스페인 내전당시 공화파 기갑부대의 작전

소련은 스페인 내전에 약 3,000명의 지원병과 항공기 648~806대, 전차 331~362대, 장갑차 60~120대, 야포 1,044~1,186문, 기관총 15,113~20,486정, 소총 414,645~497,813정, 폭탄 110,000발, 수류탄 500,000발, 포탄 3,400,000발, 소화기 탄약 862,000,000발 등을 지원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전이 진행되던 기간 중 상당 부분은 프랑스와의 국경이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화파에 대한 지원에서 소련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기갑장비에 있어서는 소련의 지원이 더욱 절대적이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어중간한 국력의 국가들은 1920년대에 도입한 프랑스제 르노 FT-17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는데 이 점은 스페인도 마찬가지여서 독일의 1호전차, 이탈리아의 CV-33, 그리고 소련의 T-26이 대량으로 지원되기 전 까지는 양군 모두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소련항공기들이 전쟁 초반을 제외하면 독일측에 별다른 인상을 끼치지 못한 것과 달리 전차는 독일이 지원한 1호전차가 시원찮은 물건이었던 덕분에 전쟁 말기까지도 상당한 활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에 대한 군수물자 지원은 НКВД내의 X과(X는 스페인을 의미)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련의 지원은 1936년 가을과 1937년 초에 집중되었습니다. 1937년 하반기 부터는 공화파가 가진 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더 이상의 지원은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자본주의자 같은 반응을 보였다지요.

소련이 지원한 기갑장비와 인력이 스페인으로 처음 보내진 것은 1936년 9월로 여기에는 50대의 T-26과 전차병 51명, 장갑차 30대, 그리고 탄약 및 유류가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10월 12월에 카르타헤나에 도착, 곧 바로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이어서 10월 말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T-26 111대와 전차병 330명을 파견하자고 건의, 승인을 받습니다. 그리고 스페인 주재 소련무관 고레프(Владимир Горев)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은 전차병 양성을 위해 아르헤나(Archena)에 기갑학교를 창설합니다. 이 학교의 교장은 크리보세인(Семён кривошеин) 여단지휘관이 임명되었습니다. 원래 소련 전차병들은 훈련 임무에만 투입될 계획이었지만 마드리드가 압박 받는 상황 때문에 전차병을 양성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습니다. 결국 고레프는 소련 전차병들이 직접 전차를 운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요.(여기에 약간의 스페인 전차병이 합류합니다.)

T-26의 성능은 의심할 나위 없이 1호전차나 CV-33에 비해 월등했지만 보전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다는 점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전차병은 러시아인인데 보병은 스페인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 통할리가 없었겠지요. 소련이 스페인에 파견한 인력 중 통역병이 204명이나 됐지만 이들이 모든 부대와 전차 한대마다 일일이 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런 문제점은 월등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소련제 전차들이 큰 피해를 입는 원인이 되지요.
T-26이 처음 투입된 1936년 10월 27~29일의 세세냐(Sesena) 전투는 이런 문제점을 확실히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는 소련인 노박(А. Новак)이 지휘하는 BA-3 장갑차 6대와 T-26 7대로 편성된 기갑집단과 스페인인으로 구성된 1개 전차소대, 그리고 아르만(Паул Арман)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이 지휘하는 1개 중대 등 3개의 전차부대가 투입되었습니다. 전투 초기에 아르만은 전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공격에 긍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아르만이 지휘하는 15대의 T-26중 세대가 대전차지뢰로 기동불능이 되었고 또 한대의 전차는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세세냐 외곽의 한 마을로 진입해 화염병을 맞고 격파됐습니다.(이게 스페인 내전에서 최초로 화염병에 의해 전차가 격파된 사례라고 합니다.) 아르만의 중대는 마을을 돌파한 뒤 프랑코군의 야포 1개 포대를 유린했습니다. 이때 3대의 CV-33이 반격해 왔지만 1대가 T-26에 의해 격파되고 한대는 T-26에 들이 받혀 전복(!!!)돼 버립니다. 아르만은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격을 계속했지만 두 대가 더 화염병에 의해 격파되고 세대는 야포에 의해 파괴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는 마드리드가 압박받던 상황에서 공화파의 사기를 높이는 데는 성공적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불합격이었습니다. 특히 보전협동이 되지 않으니 전차들이 적 보병을 몰아내고 특정 지점을 점령하더라도 적이 반격을 해 올 경우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프랑코군은 1938년까지 30개 대전차포 중대(중대당 대전차포 6문)를 편성했는데 이것은 1937~1938년 전역에서 공화파의 전차부대를 저지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이와 함께 지상전에 전용된 88mm 대공포도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세세냐 전투 이후 공화파는 전차와 장갑차를 집결시켜 T-26 48대와 BA-3 장갑차 9대로 대대규모의 기갑전력(아랑훼즈Aranjuez 집단)을 만들기는 했지만 실제 운용은 중대 단위로 보병에 분산 배치되는 방식이 계속됐습니다. 당연히 기갑부대의 집중운용에 따른 파괴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랑훼즈 집단은 11월부터 12월에 걸쳐 마드리드를 둘러싼 공방전에 투입됐습니다. 공화파는 전쟁 이전에 편성된 제 1전차연대(FT-17 장비) 대부분을 예하에 두고 있었고 제 1전차연대는 아랑훼즈 집단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전술적 미숙함과 기계 자체의 신뢰성 미달로 전차의 손실은 매우 컸습니다. 1936년에 지원된 전차 중 52대가 1937년 2월까지 상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937년 9월에 이르면 전차 손실은 170대에 달했습니다.(이때 까지 지원된 전차는 T-26 256대) 흔히 생각하는 것 과는 달리 소련전차들의 기계적 신뢰성은 형편없었는데 T-26의 경우 150시간 마다 정비를 받아야 했으며 600시간 뒤에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습니다.(소련전차의 기계적 신뢰성은 T-34 초기 생산분 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질 연료에다 끊임없는 격전으로 전차부대를 후방으로 돌려 정비할 시간이 없었으니 손실은 지속적으로 높아만 갔습니다. 여기다가 보충도 간헐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전차의 집중운용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아르만의 전차중대는 800시간이 넘도록 정비를 받지 못해 살아남은 전차들도 상당수가 고장으로 운용 불능이 됐습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차병 제 2진을 파견합니다. 제 2진은 전차병 및 정비병 200명으로 벨로루시 군관구의 제 4 독립전차여단에서 차출한 병력이었고 지휘관은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 Павлов) 여단지휘관이었습니다. 소련정부는 기존에 파견된 병력을 파블로프의 부대에 합류시켜 기갑여단으로 개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갑여단의 편성은 난항을 겪었습니다. 먼저 전차의 손실을 막기 위해 경험이 부족한 스페인 전차병은 포탑에 배치하고 숙련도가 높은 소련 전차병이 조종수를 맡는 식으로 여단이 편성되었는데 러시아 전차병들이 모두 조종수는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전차의 손실률이 높아 여단은 편제(96대) 미달이었습니다.

새로 편성된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초부터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이 여단은 크리보세인이 지휘하는 1대대와 페트로프(М. П. Петров) 대대지휘관이 지휘하는 2대대로 편성되었는데 신규편성인 2대대의 전투력이 1대대 보다는 양호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전투에 투입될 당시 47대의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11일 마드리드 서쪽에서 제 12인터내셔널 여단과 제 14인터내셔널 여단이 개시한 반격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은 스페인 사람 보다는 말이 잘 통했는지 보전협동이 원활히 이뤄져 이 반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3일간 계속된 이 전투에서는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는데 바로 독일의 37mm 대전차포 Pak 36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격파된 전차 모두가 이 37mm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7mm 대전차포는 독일이 지원한 지상장비 중 가장 효과적인 물건이었습니다.
이어서 전개된 1월 말의 Jarama강 공세는 보전협동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전차포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잘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 투입된 제 1기갑여단의 전차 60대 중 거의 40%가 격파되었고 이 중 상당수는 대전차포에 의한 것 이었습니다.

1937년 3월의 과달라야라(Guadalajara) 전투는 겨울의 전투에 비하면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주로 상대한 이탈리아군은 T-26을 장비한 부대와 수차례 교전을 벌인 뒤 전투를 회피하게 됐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주요 장비가 CV-33이었으니 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3월 18일의 반격에서 이탈리아군은 T-26을 앞세운 공화파군에게 격파당해 패주합니다. 그러나 제 1기갑여단의 손실도 커서 3월 말에는 가동 가능한 T-26이 9대로 줄어듭니다.

그러나 1937년 3월부터 5월에 걸쳐 150대의 T-26이 보충되면서 제 1기갑여단은 129대의 T-26, 43대의 BA-3 장갑차와 30대의 예비전차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1937년 7월부터 시작된 마드리드 구원 공세에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규모 공세에서도 37mm대전차포의 집중운용은 공화파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공세 첫날인 7월 6일 전투에서는 1문의 대전차포가 12대의 T-26을 격파하기도 했다지요. 피해는 급증해서 7월 11일이 되자 여단의 가동 전차대수는 38대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공세에서 주공을 맡은 5군단과 18군단은 막심한 손실을 입은 끝에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결국 7월 18일부터 프랑코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마드리드 구원공세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프랑코군이 대전차포를 대량으로 운용하면서 보전협동은 더욱 어려워 졌습니다. 전차병들은 대전차포가 조준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최고 속도로 움직였는데 보병들은 이것을 도저히 따라잡을 능력이 없었던 것이죠.

1937년 여름에 소련은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차부대를 지원합니다. 바로 BT-5 전차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로 이 연대는 소련이 특별히 고리키 전차학교에서 교육시킨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과 붉은군대 제 5기계화군단 소속의 전차병으로 편성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스페인인 전차병들이 충원되어 이 부대는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인 전차병의 경우 조종훈련은 충분히 받은 편이지만 소대나 중대단위의 훈련은 전혀 받지 못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BT-5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는 1937년 8월부터 진행되고 있던 사라고사 공방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임무는 제 35보병사단의 공격을 지원, 사라고사를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터내셔널 전차연대가 공격 개시 하루 전날인 10월 12일 밤에야 집결지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작전 명령도 도착 직후에야 전달받았다는 점 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연대참모들은 작전지역에 대한 지형 정찰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개시해야 했습니다. BT-5가 고속전차라는 점 때문에 제 35보병사단장은 전차에 보병을 태워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전투 기동간에 전차에 올라탄 보병 중 상당수가 전차에서 굴러떨어져 다른 전차에 깔려 죽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지형도 전차에 불리하기 짝이 없는 관개시설이 된 경작지였습니다. 결국 첫 번째 공격에서는 탄약을 모두 소모할 정도로 교전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라고사에 대한 공격 이후 공화파의 기갑부대는 별다른 보충을 받지 못 한채 지속적으로 감소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1937년까지도 상당수를 차지하던 소련인 전차병들은 전사하거나 본국으로 귀환해 스페인인들이 전차부대의 중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1937년 10월에 공화국 전차부대를 총괄하는 페랄레스(Sanchez Perales) 대령은 그때까지 살아남은 전차부대를 2개 기갑사단으로 개편했습니다. 이 “기갑사단”은 지원부대가 부족해 거의 전차로만 편성된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1938년에 T-26 25대를 보낸 것을 끝으로 전차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에 새로 편성된 기갑사단은 주로 자동차를 개조한 장갑차를 장비하게 됐습니다. 공화파의 기갑전력은 1938년 5월에 전차 176대와 장갑차 285대였는데 이것이 같은 해 12월에는 전차 126대와 장갑차 291대가 됩니다. 장갑차만이 겨우 보충이 가능했던 것 입니다.

공화파군의 기갑사단이 처음으로 전투에 투입된 것은 1937년 12월 15일로 이때 투입된 기갑사단은 T-26을 장비한 2개 전차대대와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잔존병력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이 사단은 작전 개시 당시 104대의 전차를 보유했는데 대부분의 전차가 기계 수명을 훨씬 초과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63대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현지 부대에서 어떻게든 수리를 해서 쓰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1938년 2월 22일까지 전선에서 활동했는데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련은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전차병 351명을 지원했고 이중 53명이 전사했습니다. 소련은 이 전쟁에서 T-26과 BT-5의 성능이 현대적 대전차 병기를 견디기 어렵다고 보고 신형전차를 개발하는데 더 박차를 가했지만 대규모 전차부대의 운용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스페인 내전이 진행되는 기간 중에 대숙청이 함께 진행된 것도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소련의 전차지휘관들은 예상치 못한 실전 결과 때문에 위축되어 교훈을 도출하기 보다는 실패를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발전하던 대규모 기계화부대의 편성과 교리개발이 일시적으로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실전 경험을 반영해 기계화 부대를 개혁해야 할 기계화부대지도국(Авто-бронетанковое управление)이 숙청으로 풍비박산 난 것은 가장 큰 타격이었습니다.

참고자료

Michael Alpert, "The Clash of Spanish Armies: Contrasting Ways of War in Spain, 1936~1939'", War In History, Vol.6. No.3(1999)
Mary Habeck, Storm of Steel: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G. F. Krivosheev, Soviet Casuali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 Hill Books, 1993, 1997)
Stanley G. Payne, The Spanish Civil War, The Soviet Union, And Communism, (Yale University Press, 2004)
Steven J. Zaloga, "Soviet Tank Operation in the Spanish Civil War",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12. No.3(September 1999)

2006년 12월 30일 토요일

[번역글] The Ugly Dukling of Armed Forces : Romanian Armour 1919~1941(삼탕!)


재탕을 거친 삼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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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999년 2호에 실린 Alexander Statiev의 The Ugly Dukling of Armed Forces : Romanian Armour 1919~1941을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미운 오리새끼 - 루마니아 기갑 부대의 발전 1919-1941  

루마니아 육군 총사령부는 연합군이 1차 대전에서 거둔 성과를 분석한 뒤 기갑 부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루마니아는 1919년에 72대의 르노 FT-17 전차를 수입해서 1개 기갑대대와 기갑학교를 창설했다. 2년 뒤에 기갑대대는 약간의 전투 지원 부대를 배속받아 기갑 연대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힘찬 출발은 곧 정체 상황을 맞게 되었다. 1935년에도 루마니아군의 기갑전력은 여전히 72대의 르노 전차였고 이제는 형편없는 구식으로 전락한데다 대부분 고장으로 가동 불능 상태였다. 전차에 대한 교리 역시 전차 만큼이나 발전하지 못했다.
양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루마니아의 국방 정책은 매우 보수적 이었다. 그렇지만 루마니아의 전략적, 경제적 측면을 분석해 보면 단지 보수적인 정책만이 루마니아의 기갑 전력을 낙후 시킨 요소는 아니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 루마니아 내각은 국방비를 최소화 하려고 노력했다. 기갑전력은 이러한 정책에 큰 영향을 받았다. 루마니아 대 본영은 국방예산 문제로 압박을 받아서 새로운 기갑 장비를 도입 할 수가 없었다. 기갑 사단 한 개를 편성하는데는 보병사단 15개에 해당하는 예산이 들어갔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기갑전력은 매우 사치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루마니아 군 수뇌부는 무리하게 신기술 개발에 투자하느니 제한된 예산을 차라리 보병과 포병화기의 표준화와 근대화에 쏟아 넣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인식이 루마니아군 전체에 일반적 이었다.
또한 루마니아의 낙후된 공업 또한 기갑 전력의 현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 이었다. 1937년에 루마니아의 군사 이론가인 라두 다비데스쿠(Radu Davidescu)는 기갑전력을 증강시키는데 수입에 의존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1. 수입은 비용이 많이 든다 2. 기술발전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외국에서 최신 전차의 시제품을 도입하더라도 그것이 인도될 무렵에는 구식화 될 것이다 3. 기갑 장비는 지속적으로 부품 지원이 필요하며 지속적인 장비 교체가 필요하고 4. 전쟁이 시작되면 수입하는 것이 어려워 질 것이라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다비데스쿠는 문제 제기만 했을 뿐 해결책은 내 놓지 못 했다. 루마니아는 전차 공업을 일으킬 시설과 이에 수반한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루마니아 육군은 기계화에 있어서 전차 보다는 차량 획득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2차 대전 발발 이전에 루마니아의 자동차 산업은 일일 트럭 생산량 6~10대에 불과한 공장 한곳 뿐이었으며 이것 조차 수입 부품에 의존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전차 생산이란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다. 전쟁이전에 루마니아가 이룬 가장 큰 발전은 프랑스로부터 면허를 얻어 126대의 무한궤도식 수송 차량을 생산하고 부분적으로 국산화에 성공한 것 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쟁기간동안 루마니아는 큰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차용 엔진은커녕 전차용 장갑판조차 제대로 생산하지 못 했다. 사실 루마니아 군 수뇌부 역시 첨단 무기의 필요성은 절감했지만 오직 수입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다. 1934년에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기갑전력이 낙후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의 산업 발전은 이를 따라가지 못 하는 점에 위기를 느꼈으며 루마니아의 기갑전력은 “낙후와 되고 (현대전에) 불 충분하며 (주변국에) 압도당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기갑전력의 근대화는 소총이나 야포에 비해 훨씬 복잡한 것 이었다. 그 때문에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수입에 의존해서라도 전차를 수입하느냐 아니면 자국의 수준으로 감당 가능한 재래식 전력에 의존하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됐는데 당연히도 후자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루마니아군의 뒤떨어진 군사 사상 역시 기갑전력의 현대화를 가로 막았다. 전차는 공격용 무기였지만 전쟁 이전의 루마니아군 교리는 거의 방어적 이었다. 참모본부의 전쟁 계획중 공세를 가정하고 세워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교리는 “적을 준비된 종심깊은 방어선에서 고착시켜 전력을 고갈 시킨 뒤 단계적인 반격으로 격퇴하는”것 이었다. 이 때문에 전차의 역할은 부차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기갑부대 인력들은 다른 병과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교관과 프랑스 교리에 의해 교육 받았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 기갑 장교들은 그들의 프랑스인 교관들 처럼 전차를 전략적 공세에 필요한 무기가 아니라 전술적인 제한적 반격에 필요한 무기라고 인식했다. 루마니아군의 교범은 “보병 운영의 성공이 작전의 성공을 보장하며” “전차의 기본적인 임무는 보병의 지원이다”라고 못 박았다. 또한 전차의 공격 종심은 포병의 지원 사격이 가능한 범위에 한정되었다. 즉 수 km에 불과했다. 전차는 “이동 포대로서 …. 적의 거점 파괴”를 통해 보병을 지원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는데 이것은 독일이나 소련의 교리와는 정 반대의 것 이었다. 
루마니아의 교범은 대규모 기갑부대 운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루마니아군의 전차 교범은 단지 보병 지원을 위한 중대, 대대규모의 운용만을 명시하고 있을 뿐 이었다. 독립된 기갑 부대 또한 없었다. 기갑 연대는 창설 초기에 보병 기술감 예하 소속이었으며 나중에 포병감 예하 부대로 배속 변경 되었다. 그리고 연대 예하의 기갑 중대들은 전국 각지에 분산되어 있었다. 기갑 중대들은 전술적으로 보병 부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루마니아 기갑 장교들은 영국의 전차 운용 교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나 독일이나 소련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 했다. 1930년대의 급속한 기갑 교리 발전은 루마니아군 내부에서 소수의 기갑 장교가 전차의 대규모 운용을 주장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1930년에 라두 디눌레스쿠(Radu Dinulescu)소령은 미래의 전쟁은 근접 항공 지원 및 수많은 경전차와 중전차의 지원을 받는 완전 궤도화 된 운송차량에 탑승한 보병과 포병으로 이뤄진 군대간의 전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은 체계화된 교리로 발전하지 못 했다. 기갑 교리는 육군의 전반적인 교리에 따랐으며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한 루마니아 기갑부대는 나머지 지상 병과의 교리에 전술을 맞춰야 했다. 
사실상 루마니아의 환경에서 다른 기갑교리란 불가능 한 것 이었다. 다른 열강들의 진보된 기갑 교리는 그 국가들이 강력한 군사력과 큰 경제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 이었다. 기갑 사단은 종심 깊은 돌파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 이었다. 이 개념은 공격자가 방어군의 후퇴 속도 이상으로 돌파와 추격의 템포를 유지해서 적을 섬멸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런 작전은 오직 대규모의 기갑부대를 여러 개 동원해야만 가능한 것 이었으며 여기서 발생하는 전차의 대량 손실은 신규 생산과 수리를 통해 보충할 수 있어야 했다. 또한 다른 병과 역시 신속히 돌파를 선도하는 기갑부대를 따라 잡을 수 있도록 차량화 되어야 했으며 여기에 대한 보급 지원을 계속 할 수 있어야 했다. 루마니아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어느 하나 이러한 전제를 충족 시킬 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전차를 보병 지원에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루마니아 군 장교들은 보수주의자보다는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었다. 루마니아 육군의 기갑 교리는 매우 뒤떨어진 것 이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루마니아의 전략적, 군사적 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사적 창의력의 부족은 그나마 있는 교리 체계 내에서 조차 많은 전술적 결함을 가져왔다. 루마니아의 기갑 교리는 매우 융통성이 없었으며 사실 루마니아 군 내에서는 실전을 치루리라는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전차 운용은 대부분 기동에 양호한 지형에서의 제한적인 정면 공격에 초점이 맞춰졌다. 루마니아군 내의 기갑 이론가들은 조우전이나 시가전, 삼림지대나 기동이 곤란한 지형, 또는 후퇴전이나 방어전에서 전차를 어떻게 운용할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다. 이론상으로는 다른 병과와의 긴밀한 협동이 강조되었지만 실제 기동훈련은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루마니아군의 교범에는 전차와 항공기의 합동 작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1935년부터 국방 예산이 증가하기 시작하자 총사령부는 기갑 병과에 대한 정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첫 단계로 총사령부는 구식화 된 전차부터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루마니아군의 교리에 맞는 외국제 전차의 시제품들이 검토되었다. 1930년대에는 아직 세계 각국이 경전차를 중시하고 있었으며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경전차만을 고려대상에 넣었다. 루마니아군은 126대의 체코제 LT-35와 200대의 프랑스제 르노 R-35를 주문했다. 루마니아군내의 기갑 전문가들은 스코다의 모델이 당시 획득 가능한 경전차들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했으며 스코다 측은 LT-35가 보병 지원용으로 만들어 졌다고 광고했다. (이 물건의 설계로 미뤄 볼 때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 주장이었지만.) 반면 프랑스제의 R-35는 당시 기준으로 훌륭한 방어력을 가졌으며 보병 지원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전차였다. 그런데 루마니아의 도로 사정은 매우 형편 없어서 심지어 이런 경전차들 조차 제대로 다닐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재정 부족으로 도로 개선 사업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총사령부는 체코의 CKD로부터 417대의 AH IV tankette을 수입했는데 이 물건은 너무나 무장이 빈약하고 방어력이 약해서 보병 지원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tankette은 루마니아의 빈약한 도로망에서도 충분히 운용 가능했으며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했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이것이 자국 군대의 교리에 맞건 안맞건 상관없이 전체 기갑 전력의 56%를 tankette으로 채우기로 결정했다. 루마니아군에게는 다행히도 CKD는 계약한 대수를 다 채우지 못했고 단지 35대의 tankette만 인도되었다. 그리고 스코다에서 발주한 LT-35 경전차는 모두 무사히 인도되었다. 결국 tankette들은 기병 여단들에 정찰용으로 분산 배치 되었는데 사실 이게 더 적합한 임무였다. 그리고 프랑스 역시 계약을 이행하지 못해서 1940년까지 40대의 R-35만이 인도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루마니아 기갑부대의 재편을 가속화 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독일군이 폴란드에서 거둔 성공에 큰 인상을 받고 루마니아군이 보유한 모든 전차를 단일 부대에 집중시키기로 했다. 독일이 폴란드를 쓰러뜨린 지 3주 뒤인 1939년 10월 24일에 차량-기계화 여단이 편성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즉흥적인 반응은 결코 루마니아군 수뇌부가 전차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바꿨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루마니아 군내의 장기간의 발전 정체는 군 내부에 일관된 전차전 교리를 연구할 전문가를 양성하지 못하게 했다. 차량-기계화 여단은 2개 기갑대대와 2개 차량화 보병연대로 편성되었는데 각 기갑대대는 따로따로 차량화 보병연대에 부속되었다. 여전히 전차의 역할은 보병지원에 머물렀다. 이 여단의 간부들은 나중에 부대의 편제와 뒤떨어진 운용 사상이 차량-기계화 여단의 전술적 운용 범위를 축소 시켰다고 인정했다. 
1940년 10월에 독일 군사 사절단(Deutsche Heeresmission, 이하 DHM)이 루마니아에 파견되었다. 독일 사절단은 1941년 2월부터 1941년 5월까지 루마니아군의 훈련을 맡았는데 다른 병과 보다 기갑병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루마니아군의 전략은 여전히 방어적이었지만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기동전 교리가 도입되었다. 이로서 기갑부대 운용 방식도 제한적인 보병 지원에서 독립적인 전술적 종심 타격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추축국에 가담 함으로서 루마니아군은 비록 제한적 이기는 하지만 독일제 전차를 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Ion Antonescu) 원수는 독일 군사사절단에게 훈련을 마치는 대로 독일제 군사 장비를 판매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실현 되었는데 독일 제 13 기갑사단과 제 16 기갑사단이 루마니아에 도착했을 때 전차 일부를 루마니아군에 매각했다. 이로서 루마니아군은 종심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갖춘 두개의 독립 기갑 부대를 창설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동을 강조하는 풍토 속에서 훈련된 부대 – 독일군이나 독일식 교리로 훈련되고 차량화 된 루마니아 보병 사단 – 를 루마니아군 지휘하에 넣게 된다면 최소한 루마니아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에 상당 하는 기계화 부대를 가질 수 있을 것 이었다. 
기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교리가 바뀌자 차량-기계화 여단의 입지가 자동적으로 강화되었다. 독일 기갑사단들의 연전 연승은 루마니아군 내의 전차 옹호론자들이 군 개혁을 부르짖게 했다. 여단의 일지는 여단 참모들이 “독일군의 기동전 교리에 맞출 수 있도록 부대 편제를 고치려 노력하고 있다.”고 적었다. 여단은 곧 체코와 프랑스로부터 추가로 전차를 공급받고 독일이 폴란드에서 노획한 R-35까지 인도 받아서 1941년 1월에 사단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다시 2월에는 제 1 기갑사단으로 개칭되었다. 이제 전차 부대는 보병으로부터 독립해서 독립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서류상으로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126대의 LT-35를 보유한 1개 연대와 75대의 R-35를 보유한 1개 연대, 그리고 2개 차량화 보병 연대, 1개 포병연대, 그리고 대전차, 중대와 대공포 중대, 공병 중대와 통신 중대, 기갑 수색대로 편성된 혼성 지원 대대로 편성되었다. 이 사단만이 루마니아군 내에서 완전히 차량화 된 부대였다. 
그러나 많은 내부적 요인이 이 사단이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 할 수 없게 했다. 일부 요인은 장비에 있었지만 나머지 요인은 장기간의 발전 정체의 영향이었다. 장비의 문제는 만성적인 수량 부족과 장비의 수준에 있었다. 루마니아가 장비들을 주문할 당시에는 모두 최신 장비들 이었지만 급속한 기술 발전으로 1941년 무렵에는 모두 구식화 되어 있었다. 전차들은 구경도 작고 포구 초속도 느린 대포를 달았으며 LT-35는 너무나 방어력이 형편없었고 R-35는 너무 느려 보병 지원에도 써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루마니아군은 전차의 수준 면에서 절망적으로 형편 없지는 않았다. 비록 루마니아군의 전차가 독일의 3호나 4호 전차만은 못 했지만 1940년 말 까지도 독일군 전차의 60%는 1호와 2호, 그리고 체코제 모델이었다. 그리고 1941년 6월 개전 당시 소련군이 보유한 전차 13대중 1대 만이 신형 전차로 나머지는 루마니아군의 전차와 비슷하거나 더 못한 물건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루마니군의 기갑전력의 규모와 손실을 대체할 능력의 부족이었다. 1941년 6월 독일군은 총 22,600대의 전차를 가진 소련에 대해 3,600대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었다. 안토네스쿠는 독일측에 전차 제공을 원했지만 이것은 불가능했다. 독일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Franz Halder) 상급 대장은 “독일군의 장비를 루마니아에는 양도할 수 없습니다. 생산되는 장비들은 우리 군대를 장비하기도 벅찹니다. 물론 우리가 노획한 적 장비들을 양도할 수는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독일군 수뇌부의 태도는 전쟁 말기까지도 변함 없었다. 독일은 동맹국을 돕기 위해서 체코나 프랑스의 공장에서 생산한 장비를 지원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원래 의도한 수준에 도달 할 수 없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서류상의 편제인 2개 기갑연대와 2개 차량화 보병연대 대신에 각 2개 대대로 편성된 1개 차량화 보병연대와 역시 각 2개 대대로 편성되고 모두 LT-35로 장비된 1개 기갑연대만으로 편성되었다. R-35는 너무느려서 제 2 기갑연대는 제 4 야전군 직할대로 변경되었다. 또한 제 1 기갑사단은 지원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아래에 나온 것 처럼 사단의 이론상의 편성과 실제의 차이는 굉장히 컸다.

라두 다비데스쿠가 구상한 기계화 사단 
사단 사령부
기갑여단
-차량화연대 : 기관총 대대×1, 경전차 대대×1
-기갑연대 : 경전차 대대× 1, 중형 전차 대대×2
차량화여단
-차량화 연대 : 오토바이 보병 대대×1, 차량화 대대×1
-차량화 보병 연대 : 차량화 대대×3
포병연대 : 포병대대×3
사단 직할대
-공병대대
-통신 중대
-대전차포 대
-사단 항공대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의 편성(서류상) 
사단 사령부
제 1 기갑연대 : LT-35 대대×2
제 2 기갑연대 : R-35 대대×2
차량화 보병연대×2 : 각 2개 보병대대
포병 연대 : 포병대대×3
사단 직할대
-수색대
-대전차 포 중대
-대공포 중대
-통신 중대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의 편성(실제 편성, 개전당시)
사단 사령부
제 1 기갑연대 : LT-35 대대×2
차량화 보병연대 : 각 2개 보병대대
포병 연대 : 포병대대×3
사단 직할대
-수색대
-대전차 포 중대
-공병 대대
-통신 중대

독소전 발발 당시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가동전차 109대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사단이라는 것은 이름 뿐이고 실제 전력은 기갑여단이나 기갑연대 전투단 수준이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이 사단은 명예로운 “사단” 칭호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으로 종심 작전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사단은 단지 전차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전술적인 능력도 부족했다. 구데리안 상급대장이 지적했듯이 전차의 종심 타격은 오직 타 병과의 지원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 이었다. 루마니아군에는 제대로 된 차량화 보병 부대가 없었다. 차량 부족으로 인해서 루마니아군은 소수의 부대를 차량화 시켜서 나머지 사단들을 마차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 보다는 차량을 분산시켜서 모든 사단들을 일부나마 차량화 시키는 쪽을 선호했다. 
결국 트럭은 사단 수송대와 중포를 견인하는데 쓰였으며 보병들은 여전히 자신의 두 다리에 의존해야 했다. 한줌 밖에 안되는 루마니아의 기갑 부대는 보병 부대들의 행군 속도에 묶여 버렸다. 비슷한 딜레마를 겪고 있던 소련군은 이 문제를 전차 부대와 기병부대를 혼성 편성하는 것으로 부분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1945년 까지도 소련군이 기병-기계화 집단을 운용한 것을 보면 소련군 수뇌부는 이러한 해결 방식에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루마니아군은 동부전선에 기병여단 6개를 투입했다. 이중 3개 여단은 각각 1개 차량화 보병연대를 배속받고 있었다. 비록 루마니아군의 전쟁 이전 교리에서 기병과 기계화 부대간의 합동 작전이 강조되긴 했지만 루마니아군 수뇌부는 이것을 기병부대에 소수의 전차대를 배속시키는 것으로 이해했고 대규모의 기병-기계화 집단을 편성할 생각은 하지 못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기병-기계화 집단은 루마니아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규모 종심 작전 전력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대규모 공세, 특히 기갑부대 운용은 루마니아 군의 보급 능력 때문에 큰 제약을 받았다. 루마니아군의 보급은 철도와 징발한 민간차량,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차에 의존했다. 독일군은 바바로사 작전 직전까지도 루마니아군 총 참모부에 루마니아군의 역할이 전략적 공세가 아닌 방어적인 범주에서 제한된 규모의 공세를 수행하는 것 이라고 알리고 있었다. 이 잘못된 정보는 루마니아군의 개편을 추진하는데 장애로 작용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루마니아측에 독일의 작전 계획을 알리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루마니아는 방어 작전을 수행한다는 전제 하에 국내의 교통망을 정비하고 있었다. 기동전을 수행하려면 보급 수단의 질적 향상뿐 아니라 전반적이 체제 자체를 뜯어 고쳐야 했다. 공세 작전에는 차량화 수송대가 군수의 중추역할을 해야 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차량화 된 야전군에 총 11,000대의 차량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최소한의 수량마저 채울 수 없었다. 이 시기 독일군의 보병사단은 평균 447대의 트럭을 보유했지만 루마니아 제 4 군 소속의 보병사단들은 평균 30대에 불과했다. 
개다가 트럭의 종류가 다양해서 트럭 자체의 보급만도 골치 아픈 문제였다. 결국 보급은 여전히 징발한 민간 마차와 군용 마차에 의존해야 했다. 농부들이 징발에 저항해서 좋은 말은 숨겼기 때문에 군대는 가장 약해 빠진 말만 얻을 수 있었다. 독일측의 사절단이 관찰한 결과 루마니아군의 보급 마차는 한 대당 겨우 탄약 상자 두개만 싣고 있었다.(더 실으면 말이 마차를 끌 수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마차 수송대는 규모만 클뿐 비 효율적이었다. 루마니아군이 참전할 당시 그 군대는 이동 정비소가 없었으며 운송수단들은 순식간에 고장으로 퍼졌다. 게다가 루마니아군 지휘관들은 기동전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 안되는 보급 능력을 기동전에는 별 쓸모 없는 철조망 같은 것을 수송하는데 사용했다. 심지어 가구를 나르는데 트럭을 사용하기도 했다. 독일측은 수송이야 말로 루마니아군의 가장 큰 고충이라고 판단했다. 루마니아 제 3 야전군 사령부는 수송능력의 한계는 국경에서 50km까지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문제는 당연히 기갑부대의 작전 반경 제한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부대의 형편없는 훈련상태는 심각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장비와 예산부족이 원인이었다.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전차를 기동훈련에 내보내는 것을 꺼려했는데 훈련을 하다가 고장이 나 버리면 실전에 투입할 수 없고 교체할 차량도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장비와 예산 부족 때문에 훈련은 이론적인 면에 치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의 독일군이 장비하나 없이 훈련만 잘 했다는 점으로 볼 때 루마니아군은 장비 문제가 아니라 열의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과 달리 루마니아에서는 기갑병과에 속한다는 것이 특별히 명예로운 것은 아니었으므로 기갑 장교들의 자질도 우수하지 못 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이나 루마니아 군 자체가 인정하듯이 독일인 교관들이 교육을 담당하기 전 까지 루마니아군 기갑 장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에 별 관심도 없었으며 스스로 기량을 연마하려는 열의도 부족한 상태였다. 
독일인 교관들은 독일에서 성공한 방식대로 루마니아군을 아래에서부터 뜯어고쳤다. 먼저 병사 개개인부터 교육을 시켜서 점차 단위 부대를 높여가며 훈련을 시켜 나중에 완전한 사단급 기동훈련을 하려 했다. 그러나 루마니아군 병사들의 기초적인 훈련 부족은 이 계획을 좌절 시켰다. 1941년 여름까지 기갑과 차량화 보병은 소대 단위 훈련을 마쳤으며 포병은 포대 단위 훈련을 마쳤으나 사단 참모들이 지적했듯이 공병과 수색대는 훈련일 수가 18일에 불과했고 통신대는 무전기가 부족해 훈련을 하지 못했다. 결국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실전에 투입될 때 까지도 사단차원의 제병협동 훈련을 해 보지 못 했다. 
루마니아 총 사령부는 간부들의 질적 수준은 물론 숫적인 문제도 책임 지고 있었다. 기계화 부대의 장비는 복잡해서 운용 인력의 교육과 훈련이 중요했다. 전차 부대는 육군내에서 가장 현역의 비율이 높았다. – 전쟁이전에 각 기갑 연대 병력의 25.5%가 장교와 부사관 이었다. 같은 시기에 포병 연대의 경우는 13.8%만이 간부였다. 그러나 총 사령부는 전투손실을 보충할 보충 병력의 양성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특히 루마니아가 농업국 이어서 기술 교육을 받은 인력이 크게 부족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전쟁이 터지고 첫 전투를 치르고 나서야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기갑 부대의 인력은 특수한 훈련이 필요하고 양성에 1년 정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손실을 보충할 인력이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독일의 군사 고문들은 루마니아 기갑사단의 취약성을 고려해서 사단의 임무를 돌파 작전 보다는 “일반적인 차량화 보병사단으로서 쉬운 임무에 투입할 것”을 강조했다. 사단 사령부는 특히 전문적인 훈련이 부족했으며 사령부의 간부들은 보통 보병이나 포병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제 1 기갑사단은 훈련도 부족했으며 장비와 인력 모두가 부족한 상태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독일 군사 고문단은 최소한 사단 병사들에게 “엘리트”의식을 심는데 성공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루마니아 장교단에 발전된 기갑 교리를 성공적으로 전수할 수 있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남부전선에 투입된 유일한 독일의 동맹국의 기계화 부대였다. 초기에 이 사단은 독일 제 11 군에 배속되었다. 오뎃사 포위전이 있기 전 까지 사단은 별 다른 심각한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퇴각하는 소련군의 후위 부대와의 교전만을 벌였다. 게다가 운도 좋아서 소련군의 대규모 기갑 전력과 충돌하는 일도 없었다. 루마니아군에 관해 연구하는 서방측 작가들의 흔한 실수 중 하나는 루마니아군이 작전을 수행한 오뎃사 군관구(Одесский Военний Округ)에 소련군의 대규모 기갑 집단이 존재했다고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오뎃사 군관구-개전 직후에 남부 전선군(Южный Фронт)으로 개칭됨-에 있던 3개 기계화 군단 중 두개 군단은 남서 전선군(Юго-западый Фрони)으로 이동했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제 2 기계화 군단은 주로 독일군 사단들과 교전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소련 제 2 기계화 군단의 일부 전력만이 루마니아군을 상대로 투입되었으며 그 숫자도 기껏 탱크 10대 안팎의 소규모 집단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루마니아 기갑사단은 기껏해야 비슷한 수준의 소련군 기갑 부대를 상대했으며 질적으로도 별 차이가 없는 상대였다. 소련 제 2 기계화 군단은 겨우 60여대의 신형 전차만 보유했으며 나머지 전차들은 BT-5,7, T-26등의 구식 전차였다. 
첫 2주간의 작전에서 제 2 제대로 운용되던 사단은 키쉬네프(Kishnev) 서쪽에서 독일-루마니아 연합군을 저지하고 있던 소련 제 95 소총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한 뒤 드네스뜨르(Днестр) 강으로 향하는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퇴각하는 소련군의 후위를 방어하던 소련 기병 부대를 뚫고 언덕이 많은 지역을 돌파해서 키쉬네프를 북쪽-소련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공격하여 점령했다. 루마니아 군사사가들은 이것을 1941년에 사단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단 사령부는 이성공을 신속하고 과감한 기동에 의한 것 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루마니아 기갑 사단의 장교들은 루마니아군에서 흔치 않게 과감한 결단력과 주도력을 보였다. 물론 독일-루마니아 연합군이 소련군 보다 숫적으로 세배 우세했다는 점도 승리에 상당 부분 작용은 했을 것이다. 사단은 키쉬네프 시가지 공격에 보병 지원없이 1개 기갑대대만을 투입할 수 있었는데 다행히 소련군 주력은 시 서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시가전에서 루마니아 기갑사단은 1개 기병 중대와 1개 포병대대, 그리고 루마니아 저항군 게릴라들의 지원만 받고 싸웠다. 그리고 사단은 소련 95 소총사단을 격퇴하기는 했으나 독일 제 54 군단이 명령한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는 실패했다. 그러나 베사라비아의 주도인 키쉬네프의 수복은 루마니아측에게는 자랑스러운 일 이었다. 게다가 루마니아 전차 부대는 독일 제 72 보병사단 보다 10시간 먼저 시내에 진입한 것이다. 
사단의 최초의 실전 투입은 이 사단이 장비 보족과 기동전에 대한 경험 부족, 그리고 심각한 기초 훈련 부족이라는 문제를 겪고 있음을 보여줬다. 안토네스쿠는 개전 직전에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우리의 공군과 기갑사단은 소련군이 운신할 공간을 없애 버릴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다. 그러나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 기갑사단이 소련군 후위 부대의 소규모 저항으로 진격이 지체되는 것은 물론 야지 기동에서 조차 어려움을 겪는 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7월 6일, 9일, 15일에 각각 사단은 퇴각하는 소련군의 후방으로 돌파해서 이들이 모길례프, 소로차, 티기나 등 드네스뜨르 강의 도하지점에 도달하는 것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바았다. 그러나 이 임무는 실패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소련군을 쁘루뜨 강과 드네스뜨르강 사이에서 포착 섬멸하는데 실패했으며 소련군은 후퇴에 성공한 사단들을 오뎃사에 투입하거나 아마도 끄림 반도에 까지 투입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지적했다. 
사단 사령부는 비가 오고 난 뒤 악화된 도로 사정이 기동을 제약했다고 보고했다. 평균적인 독일 기갑사단에서는 차량의 20%가 반 궤도 차량이었다. 소련군 역시 농업용 트랙터를 징발함 으로서 어느 정도 야지 기동능력을 향상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완전히 바퀴달린 차량에만 의존했으며 이들은 진창으로 변한 비포장 도로에서는 움직이지 못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비가 오는 날에는 말과 도보로 움직이는 보병사단들이 제 1 기갑사단 보다 더 기동력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사단은 수색대의 오토바이들이 베사라비아의 열악한 도로 사정에 가동불능이 되어버려서 위험한 삼림 지대에 정찰도 없이 전차를 투입해야만 했다. 루마니아 기갑사단이 독일 제 198 보병사단이나 루마니아 제 35 보병사단 처럼 소련 전차의 매복 공격에 당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좋은 운 때문이었다. 사단의 차량들의 기동성 부족으로 전체 사단은 종종 먼 거리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며 제병 협동 작전을 펼치기가 어려웠다. 또한 루마니아 총 사령부는 독일측의 잇다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후방의 교통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 했으며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의 수송로를 따로 분리하지 않아 생긴 교통 체증(독일군의 차량화 보급 부대와 루마니아군의 마차들이 도로에 뒤섞이는 결과를 초래했다)으로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의 보급 문제는 심각한 곤란을 겪었다. 
독일과는 달리 루마니아측은 자신들이 겪는 문제를 자연 문제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베사라비아는 얼마 전 까지 루마니아 영토였기 때문이었다. 사단이 잘아는 지형에서 조차 기동에 실패한 원인은 전쟁 이전에 장거리 기동훈련을 한번도 제대로 실시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군은 이런 결점을 기동전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실패했다. 
루마니아군은 이전에 자신들을 가르친 프랑스인들 처럼 통신 문제를 경시했으며 이는 루마니아군 교범에도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역동적인 전장 환경에서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할 것이라고 판단되었는데 통신에 대한 준비 부족은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R-35 전차는 무전기가 아예 없었으며 LT-35 전차의 무전기는 교신 거리가 짧아서 신뢰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전차장들은 교전중인 위험한 상황에서 조차 수신호를 위해서 해치를 열고 나와야 했다. 개전 직전에야 사단은 7대의 장거리 무전기를 획득했지만 이조차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이것으로는 기껏해야 1개 대대에 한대가 돌아갈 수준이었다. 7월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무전기 다섯대는 고장으로 사용 불능이 되었으며 나머지 두 대의 교신 거리는 불과 30km에 그쳤다. 독일 병기국은 각 기갑사단은 군 사령부와의 교신을 위해 교신거리 250km 수준의 무전기가 있어야 하며 사단 예하 부대는 교신거리 50km의 무전기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루마니아는 전자 산업이 전무했기 때문에 이 조잡한 무전기 조차 제대로 교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전을 겪고 나서 사단 본부는 무전기 교신 부호가 복잡해서 기동전하에서 제대로 사용하기가 골치 아프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사단 본부는 교신 수단의 부족으로 작전에 큰 지장이 초래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다행히도 이 점에서는 소련군 역시 루마니아군과 별 차이가 없었다. 남부 전선군 사령관인 이반 뜔레네쁘(Ибан В. Тюленев) 대장은 1941년 7월에 통신 수단의 부족으로 야전군과 예하 군단들은 소속 사단들의 위치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사실상 소련군의 상급 제대들은 예하 부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으며 사단장들은 “자발적으로”움직였다. 
루마니아 군이 전쟁 발발 이전에 겪고 있었던 가장 큰 어려움은 수리-정비 부대의 조직에 실패했다는 점 이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창설이후 주둔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는 훈련을 나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단은 기동력을 가진 정비대를 갖추지 못했다. 루마니아 동부(그리고 나중에는 베사라비아로 이동한)에 있는 정비소는 기초적인 수리밖에 하지 못 했다. 반면 독일군 기갑 연대가 예하에 거느린 야전 정비 중대는 야외 기동시에도 엔진 교체를 할 수 있었다. 사단 사령부는 상급 사령부인 독일측에 전차의 예비 부품 보급을 끊임없이 요청했으나 독일측은 “단 하나의 부품도 공급해 주지 못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첫 3주간 별다른 큰 격전을 치루지도 않았는데 사단은 가지고 있는 전차의 절반 이상을 기계 고장으로 상실했다. 키쉬네프를 점령한 뒤에 사단은 장비들의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10일간 후방으로 재 정비를 위해 이동했다. 이것은 모두 사단이 자체적인 수리는커녕 장비 정비 능력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기초적인 훈련 부족으로 수많은 작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전차들은 전투 중에 환기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전차병들이 전차 안에서 전차포와 기관총 사격으로 생긴 화약 가스에 중독되었다. 이런 문제는 전쟁전에 훈련만 충분했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들이었다. 심지어 르노 FT-17같은 구식 전차 조차 이런 훈련을 하는데 충분했다. 
키쉬네프를 점령한뒤 사단 정비소가 이곳으로 이동해 왔으며 제 1 기갑사단은 독일 제 11군에서 루마니아 제 4군 예하로 배속 변경되었다. 우선 사단은 병력과 장비 상태에 알맞은 임무를 맞게 되었다. 사단은 루마니아 제 5 군단에 배속되어 소련군의 후위 부대를 격파하고 하루 평균 30km 정도씩 동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8월 10일, 사단에 남쪽으로 진격 방향을 바꿔 오뎃사를 점령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루마니아 기갑사단이 기습을 통해 오뎃사를 점령한다는 것은 능력 밖의 임무였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키쉬네프 탈환때의 경험이 다시 반복 되리라 믿었을 것이다.
사실 오뎃사의 동쪽 방어선은 가장 소련군의 방어가 약한 곳 이었다. 소련군은 루마니아군의 주공이 시의 서쪽과 남쪽에 집중되리라 판단했으며 2개 소총사단이 각각 정면 20~25km를 담당했다. 반면 동쪽 방어선에는 잡다한 부대를 긁어 모아 편성한 12,548명의 병력을 가진 혼성 부대가 정면 55km의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것은 전쟁 전 소련군의 교범이 명시한 km당 방어 병력의 4분의 1 수준이 불과한 것 이었다. 그러나 키쉬네프와 달리 오뎃사의 소련군 해안 군 사령부(Командовал дивизией-Приморской)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뎃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키쉬네프는 요새화된 도시가 아니었으나 해안 군 사령부는 오뎃사외곽에 3중의 요새화된 방어망을 구축해 놓고있었다. 설사 기갑사단이 성공적으로 방어선을 돌파해 들어가더라도 오뎃사로 향하는 최 단거리 루트에는 바다와 소금 호수 사이에 부드러운 모래로 이루어진 지협이 있었다. 이곳은 아주 이상적인 방어 지대로 만약 루마니아군이 진입하면 소련군은 호수의 댐을 폭파시켜서 바로 저지대를 침수시킬 수 있었다.
기갑사단의 첫 공격은 먼저 도착한 전차들과 1개 차량화 보병연대만 가지고 감행되었다. 사단 포병과 사단 직할 지원부대들은 후방에 뒤쳐저 아직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8월 11일의 공격에서 기갑사단은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딛혀 방어선을 돌파하기는커녕 반격에 되 밀려 나왔다. 
다음날 전차들이 야포를 견인해 전선까지 이동시켰고 루마니아 제 5 군단은 제 15 보병사단과 제 1 기병여단을 증원했다. 그러나 루마니아 5 군단은 병력을 집중하지 않고 제 1 기병여단을 소련군 방어선 최 외곽으로 투입해 버렸다. 그리고 제 15 보병사단장은 보병들에게 전차 지원을 시키자는 기갑사단장의 제안을 묵살하고 보병 단독의 공격을 주장했다. 그 결과 기갑사단과 제 15 보병사단은 따로 따로 공격에 나섰고 그 결과 소련군의 단 2개 소총연대에 차례로 격퇴당했다. 게다가 이중 1개 연대는 개전 초기 실전 경험을 겪은 부대였으나 나머지 1개 연대는 루마니아측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흑해 함대에서 긁어 모아 편성한 해군 수병들로 편성된 부대였다. 비록 해군 보병들이 왕성한 사기와 전투의욕을 가졌지만 보병 훈련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 두개 소총연대는 3일 동안 루마니아 15 보병사단과 제 1 기갑사단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루마니아 기갑사단은 전선에서 이탈해 다른 지구로 이동했다.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기갑사단을 오뎃사 방어선의 북서쪽 지구에 정면 공격하는데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북서쪽 방어지구는 동쪽 지구 보다 전차 운용에 훨씬 적합한 지형으로 평탄한데다가 전차가 이동시 은폐가 가능한 야트막한 언덕들이 산재해 있었다. 소련 해안 군의 병력은 겨우 제 1 방어선만 커버할 수준이었기 때문에 제 1 방어선의 돌파만 성공하면 전차 부대는 충분히 성공을 거둘수 있었다. 비록 소련군의 대전차포는 루마니아군의 경전차들에게 살인적인 위력을 발휘했지만 오뎃사의 대전차 방어는 형편없었다. 8월 17일 당시 북서쪽 방어지구에는 방어 정면 1km당 6.4문의 야포가 배치되어 있는 수준이었으며 이중 2문 정도가 대전차 포 였다. 소련군은 전쟁 이전의 교범에서 대전차 방어에는 최소한 1km당 문의 대전차포가 대전차 장애물과 함께 투입되어야 하며 적의 공격에 취약한 지형에서는 1km당 25문의 대전차 포가 필요하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단은 상급 지휘관들의 경솔한 행동으로 전력이 약화되었다. 기갑사단이 독일 제 11군에 배속되었을 때 사단 지휘관들은 사단의 통합성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일군에 의해 훈련된 인력은 독일 제 11군과 루마니아 제 3 야전군에만 배치되어 있었다. 제 4 야전군에 사단이 배속됐을 때 사단 지휘관들은 상습 지휘관들이 여전히 옛 교리에 얽매여 있음알 알게 되었다. 독일식의 기동전 이론을 습득한 기갑사단 간부들과 여전히 전차를 보병 지원에 사용해야 된다고 믿는 상급 지휘관들 사이의 갈등의 폭은 더 깊어졌다. 전쟁 이전에 루마니아 군의 교리에서 전차의 역할은 미미했기 때문에 루마니아군 고급 지휘관들은 전차가 어떻게 보병을 지원해야 하는가에 대해 모호한 인식만 가지고 있었다. 총사령부는 나중에 “초기의 전차 운용에서 전차 부대는 전차의 성격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인정했다. 이렇게 해서 루마니아군은 전차를 야간에 포도 밭이나 수풀에 매복한 적 보병을 몰아내는데 투입되었다. 사실 이것은 보병이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임무였다.
8월 12일부터 14일까지 사단이 귀중한 전차들을 방어전에서 소모해 버리는 동안 나머지 수많은 보병들은 후방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급 지휘관들은 기갑사단이 보유한 장비를 모조리 다른 부대로 넘겨 버렸다. 8월 13일에 1개 기갑 중대는 사단 포병 주력과 함께 제 1 기병여단과 제 15 보병사단에 지원용으로 배속되었다. 그리고 이 중대는 “부적절한 운용으로” 순식간에 전멸당했다. 나머지 기갑연대 병력도 계속해서 분리되어 나갔다. 1개 기갑대대는 제 11 보병사단에 배속되었고 다른 대대의 1개 중대는 제 7 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아마 가장 끔찍한 착오는 보전 합동 훈련을 체득한 사단 차량화 보병연대를 다른 지구에 보병 부대로 돌려 버린 것 일 것이다. 
게다가 소련군은 항공 정찰로 루마니아 기갑사단의 분산 배치 현황을 파악했고 해안 군 사령부는 생포한 루마니아 포로를 심문해서 전차 부대의 투입 시기와 장소를 알아 냈다. 소련군은 시내에 배치된 대공포까지 동원해서 루마니아군의 주공방향에 집결시켰다. 또한 보병들에게 대전차 공격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고 대량의“몰로토프 칵테일”을 지급했다. 또한 루마니아군이 전차 공격에 보병을 수반할 것을 대비해서 제 95 소총사단 사령부는 40m당 1 정의 밀도로 기관총을 배치시켰다.이렇게 해서 소련군은 그들이 흔히 사용한 전형적인 화력 집중을 달성했다. 
8월 18일,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사실상 섬멸되었다. 루마니아군의 경전차들은 전과 확대와 추격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요새화된 적 방어선의 정면 돌파에는 부적절 했다. 실제로 루마니아 제 4 군 사령부는 보병이 적 방어선을 돌파하고 공병이 적 지뢰원과 대전차 방어를 분쇄한 이후에야 전차를 전과 확대를 위해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자 소련군의 기관총 화망에 보병의 진격은 돈좌되었고 보병사단에 배속된 기갑 대대의 운명은 보병 사단장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한 사단장이 보고했듯이 “적 자동화기와 박격포 사격이 맹렬하여 본 관은 전차들에게 공격을 선도할 것을 명령했”다. 태어나서 처음 전차를 구경한 루마니아 보병들은 전차를 따라 잡는데 실패했고 전차들은 소련군의 맹렬한 대전차 포 방어에 걸려들었다. 참호선을 돌파한 전차들은 그 후방에 준비된 대전차 장애물에 걸려 대부분 격파되었다. 
사단 사령부의 일지는 “32대의 전차가 소모되었다”는 씁쓸한 기록을 남겼으며 전차 전술에 무지한 보병 지휘관들에 책임이 있다고 적었다. 총 참모부는 전차 전술에 대한 이해는 윗 계급으로 갈수록 형편없어 진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사단의 마지막 공격시 지휘관들이 내린 결정을 보면 고급지휘관들은 기갑 전문가와은 거리가 멀다는 이 평가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제 4군 사령부는 8월 18일 공격에 R-35를 장비한 제 2 기갑연대로 기갑사단의 전력을 강화하지 않고 다른 공격지구에 투입해서 헛되이 소모만 시켰다. 이제 전투가 기동전에서 진지전을 바뀌고 있는 시점이어서 방어력이 약한 LT-35보다는 장갑이 강력한 R-35가 소련군 거점에 대한 공격에 더 필요했다. 독일 고문단은 루마니아군 지휘관들이 계속해서 별다는 정찰 없이 전차대를 투입해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대전차 함정 조차 발견하지 못한채 걸려들어 소련군 대전차포에 격파당하는 것을 발견했다. 오뎃사 포위전이 끝난다음에야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요새화된 방어선에 대한 공격은 강력한 포병과 급강하 폭격기의 지원을 받는 중전차가 적합하며 아군이 가진 경전차는 방어선이 보병에 의해 돌파당한뒤 성과를 확대하는데에만 쓸모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소련 해안 군은 전투 초기에는 전차가 한대도 없었으나 나중에 17대의 경전차와 12대의 Tankette가 보급되었다. 다시 15대의 경전차가 보급되었고 농업용 트랙터를 개조한 Tankette 50대가 보급되었다. 비록 트랙터를 개조해 만든 조잡한 차량들이 별로 성능이 좋진 않았지만 이렇게 해서 오뎃사의 소련군은 포위한 루마니아군과 비슷한 기갑전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별 볼일없는 전력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이 10월 2일에 전차를 투입해서 행한 반격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루마니아군은 소련군 포로를 심문해서 소련 전차대의 공격 방향과 시간을 알아냈지만 여기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방어진지는 붕괴되었고 소련군은 불과 7대의 차량만 잃고 종심 8km~10km를 돌파했다. 
이렇게 루마니아군과 소련군이 각기 다른 성과를 거둔 이유는 지휘관들의 자질과 훈련 수준의 차이였다. 비록 공격에 투입된 차량중 35대만이 실제 전차였고 나머지는 농업용 트랙터를 개조한 조악한 물건이었지만 소련 지휘관들은 상세한 작전을 짜서 보병과 포병(카츄사 로켓을 포함하여), 그리고 항공기의 지원하에 공격을 감행했다. 반면 루마니아군은 대략적인 계획만 짜고 항공지원만 받는 상황에서 전차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소련군 대전차포의 성능은 우수했지만 루마니아군에겐 대전차 포탄이 없었다. 그리고 소련 해안 군은 보병들에게 대전차 전술을 철저히 가르쳤지만 루마니아 보병들은 대부분 태어나서 처음 탱크를 구경한 경우가 많았다. 독일 고문단은 “루마니아 보병들은 전차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오뎃사에 대한 마지막 공격에 대한 기록에서 루마니아군 전차가 참호선을 돌파해도 고립된 소련군 거점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고 적었다. 반면 루마니아군 보병들은 전차가 나타나기만 해도 공황상태에 빠져들어 전선 붕괴를 가져왔다. 
8월 18일의 재앙적인 공격이 있기 전날 안토네스쿠는 히틀러에게 독일군의 공세 지원을 위해 제 1 기갑사단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오뎃사에 대한 공격이 끝나고 남은 가동 전차는 23대에 불과했다. 2개 기갑연대의 잔여 병력은 계속해서 전투에 투입되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으며 거듭하는 정면공격으로 전차만 잃어갔다. 루마니아는 독일측의 지원 없이 전차를 보충할 능력이 없었다. 라두 다비데스쿠가 몇 년전에 예상했듯이 국가가 자체적으로 기계화 전력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면 기계화 부대는 소모되어 사라져 버리는 것 이었다.

결 론
사단이 완전히 섬멸된 뒤 루마니아 육군 참모총장은 효율적인 기계화 전력을 육성하지 못한 결과 “우리는 먼저 국경선으로 그 값을 치뤘고 이제는 그 열 배가 넘는 피로 값을 치루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계화 부대의 발전을 저해한 육군의 보수적 장군 중 한명이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루마니아의 기갑부대 발전은 네 가지 주요한 요소에 의해 저해되었다. 첫째는 루마니아의 전쟁 이전 재정 정책이고 둘째는 낙후된 공업, 셋째는 육군의 뒤떨어진 교리, 넷째는 군 전반의 훈련 부족이었다.루마니아는 재정 부족으로 독립된 전차 생산 공업을 육성하지 못 했으며 얼마 안되는 재원을 자국의 뒤떨어진 교리에 적합한 값싼 무기를 획득하는데 투입했다. 물론 이런 방식은 외국으로 부터의 기술 독립과 좀더 쉽게 유지와 현대화가 가능했다. 육군의 교리는 애당초 전차를 부차적으로 인식했으며 이것은 전반적인 개념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장비의 부족과 기갑 병과에 대한 인식 부족은 장기간의 발전 지체를 불러왔으며 결과적으로 기갑병과 간부들의 자질 저하를 가져왔다. 장교들은 전술 발전에 별다른 열의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일정 수준의 훈련을 유지하는 것 조차 어려웠다.
외교 정책의 전환과 독일과의 동맹으로 인한 전략 변화는 루마니아 군 내에서 기갑 병과의 위치를 변화시킬 기회로 다가왔다. 비록 독일인 교관들의 훈련은 독일인들이 기대한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 했으나 루마나아 기갑 장교들은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기동전의 원리와 독립된 전차부대가 제병 협동작전으로 이룰수 있는 가능성을 이해했다. 그러나 새로운 교리는 그에 걸맞는 새로운 장비와 충분한 훈련을 필요로 했으며 이렇게 해야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4개월간의 훈련만 마친 채 사단은 실전에 투입되었다. 사단은 얼마안되는 전투 기간동안 장비의 수량과 성능 부족, 전쟁이전의 정체 기간으로 인한 훈련의 부족등으로 많은 문제에 직면했다. 
이런 약점은 사단이 기습이나 짧은 거리의 추격전에 투입되었을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독일 제 11군 사령부는 루마니아 기갑사단의 문제점을 잘 인식했으며 이에 맞는 임무에만 투입했다. 그러나 기갑사단이 루마니아군 상급 사령부의 지휘하에 들어갔을 때 이들은 기갑전에 무지한 상급 지휘관들의 작전 지휘를 받게 되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루마니아 기갑병들의 용기에는 찬사를 보냈지만 “상급 부대가 사단에 부여하는 임무는 사단의 능력 밖이었기 때문에 사단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지적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 역시 유사한 결론을 내렸다. 기갑부대는 “소규모의 국지적 교전에서도 별 성과를 못 거두고 소모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