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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일 수요일

한국전쟁에 참전한 무장친위대원의 이야기: Waffenbrüder- Ein Niederländer in Russland und Korea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군사사에 관심 가진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있는 주제고 그중에서도 무장친위대는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무장친위대의 역사, 장비, 군장을 다룬 연구서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원들의 회고록도 여러권이 발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소개할 John J. R. Folmer의 Waffenbrüder- Ein Niederländer in Russland und Korea도 무장친위대원으로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인물의 회고담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John J. R. Folmer는 1923년 5월 4일 오늘날의 인도네시아인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태어나 1939년 대학입학자격시험을 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옵니다. 하필이면 그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이듬해에 네덜란드는 독일군에 점령됩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무장친위대에 자원하기로 결심합니다. 폴머르는 훈련을 수료한 뒤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의 베스트란트(Westland) 연대 2대대 7중대 1소대 1분대 기관총 사수로 독소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독소전쟁의 회고담은 다른 무장친위대원들의 회고담과 비슷합니다. 그는 동부전선에서 전개되는 일련의 격전에 참전해 전공을 세우고 부상을 당하기도 합니다. 폴머르는 1944년 7월 그간의 공훈을 인정받아 바트 퇼츠의 친위대사관학교에 입교하게 됩니다.

전쟁 말기의 경험담은 꽤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무장친위대 소위로 임관하면서 전쟁말기에 급조된 부대인 제38사단(니벨룽엔 사단) 제95연대 3대대 대대장 부관으로 다시 전선에 나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장친위대에 관한 책은 많지만 제38사단은 전쟁 말에 급조된 부대라서 관련된 문헌이 상대적으로 소략합니다. 이 회고담에 묘사된 제95연대 3대대장은 꽤 상식적인 인물입니다. 3대대장은 미군이 추격해 오는 상황에서 중간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도시에 머무를 때 마다 소년병들을 제대시키고 후퇴합니다. 한 부대가 자발적이고 조직적으로 와해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꽤 재미있습니다. 대대장의 부관인 폴머르는 머무르는 도시의 시장과 협의해 소년병들에게 나눠줄 사복을 모으고 '제대시키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합니다. 미군에 포로가 된 폴머르는 임시 수용소에서 탈출해 귀향합니다.

여기까지라면 다른 무장친위대원의 회고담과 비슷한 개성없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 입니다. 수많은 무용담과 고통스러운 패배의 기억으로 끝나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이 책은 마지막 1장으로 인해 맥락이 바뀌게 됩니다. 폴머르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네덜란드군에 자원입대해 한국에 파견되기 때문입니다. 1951년 3월 네덜란드군 2진으로 C중대가 한국에 도착합니다. 그는 네덜란드군에 자원입대해 C중대의 기관총 사수로 참전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전쟁이 됩니다. 폴머르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한국전쟁은 자유세계가 공산주의의 광기에 맞서 싸운 전쟁이었다. 10년전에는 독일만이 홀로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다 패배했다. 하지만 이제는 전 세계가, 자유세계 전체가 공산주의에 맞서 일어났다."

폴머르는 한국전선에서 1년간 싸운 뒤 1952년 9월 18일 '명예롭게' 군 생활을 마칩니다. 그의 세계관에서 독소전쟁은 공산침략에 맞서싸운 10년 전쟁의 일부였고 한국전쟁은 이를 승리로 마무리한 경험이 됩니다. 다른 무장친위대원의 경험담과 달리 이 책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승리'의 기록으로 마무리 됩니다. 꽤 특이한 시각의 회고담이고 한국전쟁 때문에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 이 책에는 다른 네덜란드 무장친위대원들의 이야기도 있지만 이 책을 쓸 당시(1996년) 살아있었던 가족들의 보호를 위해 모두 가명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2016년 3월 11일 금요일

[번역글] 군사적 공유경제: 독일-네덜란드 통합군

날림 번역 한 편 나갑니다.

며칠전 포린 어페어즈 인터넷 판에 재미있는 글이 한편 올라왔는데 오늘 이걸 보고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꽤 재미있는 글이어서 읽자 마자 번역을 했습니다.


군사적 공유경제: 독일-네덜란드 통합군


엘리자베스 브로Elisabeth Braw 

네덜란드 제43기계화보병여단의 장병들은 새로운 직속상관의 지휘에 적응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다른 나라 군대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바로 독일군이다. 이번달 중으로 네덜란드 제43기계화보병여단은 독일군 제1기갑사단의 예하 부대로 상설 편제될 예정이다. 독일군과 네덜란드군은 병력 뿐만 아니라 전차, 군함, 기타 장비들을 공유할 것이다. 두 나라는 급진적인 개념을 도입하고자 한다. 바로 ‘군사력의 공유’ 이다. 

이 이야기는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덜란드는 국방예산 감축으로 전차 운용을 완전히 포기했다.(소수의 전차가 비축물자로 보관되어 있기는 하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재단(SIPRI)의 추산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국방예산은 1990년 GDP의 2.5퍼센트에서 2014년 1.2퍼센트로 급락했다. 전차를 비롯한 주요 군사장비는 어느 나라의 군대이건 간에 핵심적인 요소이지만, 네덜란드의 국방예산으로는 전차를 새로 도입하기는 커녕 가지고 있는 것 조차 유지할 수 없었다. 네덜란드 제43기계화보병여단의 여단장 안토니 뢰베링Anthony Leuvering 대령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 국방부장관은 ‘네덜란드 군은 전차 운용능력이 필요한데 이제 더 이상 전차를 보유하고 있지 않소. 그러니 독일에 부탁을 합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유럽의 군사통합을 옹호해왔던 독일 정부는 이를 지원했고, 독일연방군은 네덜란드 국경으로 부터 40마일 떨어진 지점에 주둔하면서 독일 서부 국경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제1기갑사단의 전차를 네덜란드군도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독일 제1기갑사단은 이라크군 교육을 비롯해 수많은 대외 임무를 수행한 독일군의 정예 부대였다.  

2015년 12월, 새로운 통합사단은 독일과 폴란드 국경의 삼림지대인 오버라우시츠Oberlausitz에서 실험적인 훈련을 실시했다. 이 작전은 두 나라의 군인들이 서로에게 익숙해 지도록하고, 네덜란드 군인들은 전차 운용에 숙달될 수 있도록 복합적인 전투 훈련을 실시하는 것 이었다. 이 훈련에서 양국 군인들은 대부분 독일 연방군 소유의 장비를 운용하면서 주로 독일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올해 2월 독일의 국방장관 우르슐라 폰 데어 라이옌과 네덜란드 국방장관 Jeanine Hennis-Plasschaert는 공식적으로 통합사단 창설에 합의했다. 3월 17일 통합 기갑사단이 편성되면 독일 병사들과 네덜란드 병사들이 네덜란드군 대대장의 지휘를 받게 되며, 네덜란드군 대대장은 독일군 사단장의 지휘를 받게 될 것이다. 통합 기갑사단 사단장으로는 현 제1기갑사단장 요한 랑엔에거Johann Langenegger 소장이 유임될 예정이다.  

현재 계획은 통합 기갑사단이 임무 수행능력을 갖출 예정인 2019년 까지 이 사단이 새로운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기갑사단에 더하여, 2월 부터는 양국 해군이 네덜란드 해군의 5,000톤급 수송능력을 갖춘 보급함을 공동 운용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해상 작전에 풍부한 경험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맞춰서 독일의 항만과 수로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엘리트 잠수사들이 포함된 독일 해군 지상병력 800명이 네덜란드 해병대에 통합될 예정이다. 

두 나라의 군대는 언어 통합도 계획하고 있다. 독일군 대대와 여기에 소속된 네덜란드군 중대에서는 독일어가 공용어로 사용될 예정이다. 여단급과 사단급에서는 장교와 병사 모두 영어를 사용할 예정이다. 하지만 뢰베링 대령도 인정하듯, 두 나라의 문화와 정체성을 융합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뢰베링 대령은 독일인들은 형식에 구애받는 경향이 강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은 그런 경향이 덜하다고 덧붙였다. 네덜란드와 독일 국경 근처의 흐로닝언Groningen 대학에서 통합 부대의 문화적 통합 계획과 그 성공 여부를 연구할 연구팀이 꾸려질 것이다.

 
협력 안보 

물론 군사적 협력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예를들어 독일과 프랑스는 1989년 이래로 양국에 주둔지를 두고 있는 4,800명 규모의 통합여단을 운용 중이다. 독불통합여단의 일부는 현재 말리에 파병되어 말리군의 훈련과 지원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과 네덜란드는 1995년 부터 독일-네덜란드 연합군단을 위한 통합사령부를 운용하고 있었다. 이 통합사령부는 나토의 후원하에 13개 회원국이 공동으로 작전하는 완벽히 통합된 신속 대응부대였다. 하지만 이런 과거의 통합 부대들은 실전 부대라기 보다는 유럽의 통합과 유럽 국가들간의 분쟁 방지라는 정치적 상징을 위해 조직된 것 이었다.  

최근 수년간 유럽 각지에서 통합된 전투 조직의 편성이 이루어졌다. 유럽 연합 가맹국들은 신속대응군으로 활용하기 위해 회원국의 군대들로 여러개의 전투단을 편성했다. 그리고 작년에 독일과 폴란드는 자국의 1개 대대, 약 500명의 병력을 상대국 군대의 지휘하에 넣는 것에 합의했다. 이와 유사하게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및 리투아니아와 통합 여단을 편성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 지난 1월 스테판 폴토락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은 폴란드 통신사 PAP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정부는 이 통합여단이 우크라이나군의 전투력을 향상시킬 동력이 되리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통합여단은 폴란드 루블린에 본부를 두고 2016년 공식 편성될 예정이다. 통합여단은 우크라이나군을 지원하는 것 외에도 유엔의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할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편제의 부대들은 유럽연합과 나토의 신규 가맹국들이 기존의 서유럽 국가들과 통합될 수 있도록 촉진하는 한편, 자원을 공유함으로서 참여국들의 국방 예산 절감에도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두 나라가 양국 군대를 완전히 합쳐서 사단을 통합 편성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마치 마트료시카 같은 제1기갑사단의 편제는 독특하다. 독일-네덜란드 통합기갑사단은 독립된 국제 연합군이 아니라 독일 연방군 소속이다.  뢰베링 대령은 독일 연방군의 이메일 주소까지 가지고 있다. 게다가 독일 연방의회의 동의 없이는 네덜란드 정부가 제43기계화여단을 운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이 편제의 통합성은 완벽하다. 

뮌헨의 독일연방군대학 국제정치학 교수인 카를로 마살라Carlo Masala는  기자에게 이와 같은 실험은 “유럽의 군사적 통합을 진전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국가들은 군대를 독자적으로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독일과 네덜란드의 군사적 공생관계는 그 자체로 성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동일한 경제, 정치적 연합에 속한, 우호 관계에 있는 국가들이 군사적 자원을 공유하려는 것은 합리적이다. 폰 데어 라이옌 장관은 네덜란드-독일의 군사 통합에 적극적이며, 이에 대해 “유럽 방위 연합”의 모범 사례라고 평하면서 더욱 확대하고자 한다. 

군사 연합을 만드는 것은 유럽인들의 오랜 꿈이었다. 1948년 브뤼셀 조약은 프랑스, 영국, 베네룩스 3국이 통합적인 유럽 방위 체제를 만들려는 시도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4년 뒤에는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이 범유럽 방위군을 조직한다는 조약을 체결했으나 프랑스 의회의 거부로 실패했다. 정치인들은 노력을 계속했다. 유럽연합을 출범시킨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개정안인 2009년의 리스본 조약에서는 잠정적으로 방위 협력을 명시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은 진행되지 않았다. 최근의 4년 동안 유럽 각국의 국방장관들은 유럽 연합 회원국 별로 차별화된 임무를 담당하여 자원을 공유하고 국방비를 절감하는 방안을 협의해 왔으나 실패했다. 

예산과 병력을 가진 유럽 차원의 통합군은 존재하지 않지만, 개별 국가들은 독일과 네덜란드 처럼 군사 협력을 추진하여 예산을 절감하면서도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 뢰베링 대령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성공하게 된다면 다른 나라들도 뒤를 따르겠지요.” 뢰베링 대령과 그의 동료들은 그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들이 독일-네덜란드 통합기갑사단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 같은 유럽의 강국들이 통합 사단을 편성한다면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두개의 군대가 합쳐지게 되는 셈이므로 그야말로 강력한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두 나라는 상대국의 하위 파트너가 될 생각이 없으므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잔데이Zandee가 지적하는 것 처럼, 프랑스제 장비들은 독일 연방군의 독일제 무기와 통합해 운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네덜란드는 독일제 장비 뿐 아니라 스웨덴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생산한 장비도 갖추고 있다. 마살라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군사 관계는 독일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네덜란드는 보조적인 역할을 맡았기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네덜란드 측에서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이것이 합리적이죠.” 

독일과 네덜란드의 군사적 공유경제는 국력 차이가 큰 다른 나라들에서 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살라는 현재로서는 계획이 없으나 프랑스와 벨기에가 유사한 통합 부대를 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국력이 강한 국가가 첨단 장비만 가지고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약소국을 끌어들일 수는 없다. 잔데이는 “엄청난 신뢰가 없다면 군부가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독일에 비하면 약한 나라이지만, 독일측은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한 나라가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하위 파트너는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겠죠”라고 지적했다. 독일은 자국을 방위하는데 네덜란드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네덜란드는 항만 및 수로 방어와 같은 중요한 분야에서 특장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네덜란드 제43기계화보병여단 이야기를 해 보자. 이 여단의 간부와 병사들은 요즘 독일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독일어와 네덜란드어는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이것이 큰 부담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 두 나라의 군인들은 훨씬 어려운 임무에 도전하고 있다. 상대방의 짬밥에 익숙해 지는 것이다.

2013년 8월 22일 목요일

1960년대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방어계획

Blueprint for Battle : Planning for War in Central Europe, 1948~1968을 읽는 중 입니다. 진도가 더뎌서 이제야 겨우 헬무트 하머리히Helmut Hammerlich가 쓴 제10장 “Fighting for the Heart of Germany”를 읽고 있습니다. 제10장은 1960년대 초반 북독일의 방어를 담당한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전시 방어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방어종심이 짧은 독일의 전략적 고민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더군요.


제10장에서는 1963년 9월에 나온 연합군중부유럽사령부CINCENT, Commander in Chief, Allied Forces Central Europe의 긴급방어계획EDP, Emergence Defense Plan 1-63호 이후의 방어 계획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긴급방어계획 1-63호는 주방어선을 베저Weser-레흐Lech 강을 잇는 선으로 설정해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의 90%를 방어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의 방어계획이 주방어선을 엠스Ems-네카Neckar강으로 설정해서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의 50%를 포기하는 것에 비하면 방어구역을 크게 늘린 것이고 독일이 정치적으로도 용납할 수 있는 범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최대한 전방에서 바르샤바조약군의 주력을 맞아 싸우기 위해서 지연전을 펼쳐야 하기 때문에 작전적 융통성이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토를 최대한 사수해야 하니 선택의 폭은 좁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제1군단, 영국 제1군단, 벨기에 제1군단과 함께 독일 북부의 방어를 담당한 독일연방군 제1군단은 예하에 제3기갑사단, 제1기갑척탄병사단, 제11기갑척탄병사단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제11기갑척탄병사단은 예하의 제33기갑척탄병여단을 나토 북부집단군NORTHAG, NATO’s Northern Army Group 예비대인 제7기갑척탄병사단에 배속하게 되어 있어서 실제 전력은 2개 기갑척탄병여단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이 3개사단의 기갑전력은 전차 600대와 장갑차 700대였습니다. 그런데 독일 제1군단이 1차로 상대하게 될 소련 제3충격군은 4개 전차사단과 1개 차량화소총병사단, 전차 1,600대와 장갑차 1,400대를 보유한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제2파 제대로는 제2근위전차군, 또는 제20근위군 소속의 11개 사단이 투입될 것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전쟁 초반에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를 감당하면서 최대한 좁은 지역에서 적을 저지해야 하는 것 이었습니다. 1965년에 계획을 개정해서 제7기갑척탄병사단을 독일 제1군단 예비대로 지정하기 전 까지는 이렇다 할 예비대가 없었으니 더욱 난감한 계획이었습니다. 기본적인 방어계획은 각 사단이 1개 여단과 사단 기갑수색대대로 지연부대를 편성해 최전방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나머지 2개 여단이 주방어선에서 방어를 준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연부대가 주방어선까지 밀려오면 이것을 후방으로 돌려 사단예비대로 운용하도록 했습니다. 굉장히 협소한 방어구역과 제한된 전력이 결합되어 지휘관이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가 지독하게 적었던 것 입니다.


이런 제약을 상쇄하기 위해 사용된 수단은 잘 알려진 대로 핵병기였습니다. 독일 제1군단 포병의 경우 연합군 유럽최고사령관SACEUR, Supreme Allied Commander Europe의 허가를 받아 10킬로톤까지의 핵포탄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자인 하머리히는 자세한 사격계획이 명시된 사료를 찾지 못해 개략적인 내용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핵 포격과 함께 사용되는 수단은 핵지뢰였습니다. 핵지뢰는 4~5km 간격으로 설치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베저강 서쪽에 설정된 핵지뢰 사용 지대가 120km 가량이었다는 증언을 토대로 독일 제1군단에 할당된 핵지뢰는 30개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여기에 항공지원을 담당한 제2연합전술공군ATAF, Allied Tactical Air Force도 핵폭격을 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전쟁이 터졌다면 전쟁 초반부터 독일은 핵으로 쑥대밭이 될 판이었습니다. 나토측이 전진방어를 채택하면서 핵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은 바르샤바조약기구 측에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주)


사실 독일 본토에서 핵을 사용한다는 것은 독일측으로서도 썩 달가운 방안이 아니었습니다. 박살나는건 독일이니 말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까지 나토 북부집단군 방어구역에서 핵 타격 목표를 선정하는 것은 영국군에 의해 좌우됐고 1966년 이후에야 독일측이 핵무기 사용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독일로서도 뾰족한 대안이 없는 것은 문제였습니다. 당시 독일 제1군단 포병사령관은 작전상 개전 초반부터 핵무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으며 독일군의 전력이 획기적으로 증강되지 않는 이상 재래식 화력전은 어렵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군의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개전 초기에 대량의 핵무기를 사용하는 계획이 계속 수립되었습니다. 1966년 부터 독일공군 참모총장을 맡았던 슈타인호프Johannes Steinhoff는 이런 계획으로는 작전적인 기동이 불가능하다고 비난하고 독일을 파괴하는 전술핵의 대량 사용을 재래식 방어에 포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최대한 많은 영토를 방어하면서도 핵무기 사용은 피해야 한다는 딜레마는 결국 독일이 재래식 전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만듭니다. 사실상 이것이 독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주) “Document No.28 : Warsaw Pact Intelligence on NATO’s Strategy and Combat Readiness, 1965”,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172~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