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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7일 월요일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의 1950년 6월 26일 전문

출국준비로 어수선해서 블로그질이 좀 뜸하군요;;;; 가끔씩 들러주시는 분들께 민망하니 한국전쟁과 관련된 날림번역글 하나 올려 봅니다.

이 전문은 1950년 6월 26일 평양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가 소련군 총참모부 정보부국장 자하로프Матве́й Васи́льевич Заха́ров에게 보낸 것으로 1994년 BBC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문서입니다. 한국에서 번역출간된 라주바예프 보고서와 중복되는 내용이 많긴하지만 개전 초기 북한군의 문제를 잘 요약해서 보여주는 글 같습니다. 라주바예프 보고서는 한참 뒤에 작성되어 정리가 잘 되어있긴 합니다만 슈티코프가 작성한 이 문서는 개전 직후에 작성되어 당시의 분위기를 좀 더 잘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개전 초반의 유리한 상황에서도 북한군 수뇌부의 지휘능력 부족을 질타하는 부분이 주목할 만 합니다.





1급기밀 
자하로프 동지 앞. 
직접 전달할 것.


조선인민군의 군사작전 준비와 실행 과정에 대해 보고합니다. 
조선인민군은 총참모부의 계획에 따라 6월 12일 부터 38도 접경지대에 병력집결을 시작해 6월 23일에 집결을 완료했습니다. 부대 재배치는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으며 사고는 없었습니다. 
적의 정보부서가 군부대의 재배치를 감지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계획을 그대로 실행했으며 작전 실행 시기는 비밀로 했습니다. 
사단급 작전계획과 지형정찰은 소련 고문관의 참여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작전에 필요한 모든 준비과정은 6월 24일까지 완료되었습니다. 6월 24일 각 사단장은 작전 일시와 시간에 대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각 부대에서는 남조선 군대가 38선을 침공하여 군사적 공격을 도발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조선인민군에 반격을 명령했다는 민족보위성의 명령서가 낭독되었습니다. 
조선인민군의 장교와 사병들은 반격명령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각 부대는 6월 24일 24시 공격개시선으로 이동했습니다. 군사작전은 조선 시간으로 오전 4시 40분 개시되었습니다. 포병의 공격 준비사격은 20~40분의 직접 포격과 10분간의 탄막포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보병은 왕성한 사기를 가지고 공격에 나섰습니다. 공격 시작 후 첫 세시간 동안 공격부대는 3~5km를 진격했습니다. 
조선인민군의 공격은 적에게 완전한 기습이었습니다. 
적은 옹진, 개성과 서울 축선에서만 강력한 저항을 했습니다. 적은 공격 첫날 12시가 지나서야 보다 조직적인 저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첫날 전투에서 점령한 도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옹진, 개성, 신읍리(新邑里, Sinyuri, しん ゆうり) .(1943년 총참모부가 간행한 1:1,000,000 지도) 
인민군은 춘천방면에서 12km를 진격했습니다. 
동해안에서는 8km를 진격했습니다. 
공격 첫날 조선인민군 해군은 동해안에서 두 개의 상륙작전을 실시했습니다. 첫번째 상륙집단은 강릉(Korio, こうりょう) 지구에 상륙했으며 해군육전대 2개대대와 1천여명의 빨치산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상륙집단은 울진에 상륙했으며 600여명의 빨치산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상륙작전은 5시 25분에 시작되었으며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빨치산 부대가 울진과 그 주변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상륙과정에서 인민군의 함선과 남조선군의 함선 간에 교전이 있었습니다. 교전 결과 남조선군의 트롤함 한척이 격침되었고 다른 한척이 파손되었습니다. 북조선 함대는 피해가 없었습니다. 
6월 26일 인민군은 공격을 계속하여 전투를 치르면서 남조선 영내 깊숙히 전진해 들어갔습니다. 
6월 26일에는 옹진반도와 개성반도가 완전히 소탕되었으며 (인민군) 6사단은 (강화)만을 강행 도하하여 김포 비행장 방면의 인구밀집지대를 점령했습니다.  
서울 방면에서는 (인민군) 제1사단과 제4사단이 문산과 동두천을 점령했으며 제2사단은 (강원도의) 중심인 춘천(Siunsen, しゅんせん)을 점령했습니다. 
동해안에서도 진격이 계속됐습니다. 주문리(注文里, Tubuiri, ちゅうぶんり, 주문진)를 점령했습니다. 
6월 26일에는 고성 방면으로 진격하는 제12사단, 신읍리를 지나 의정부(Geisif, ぎせいふ) 방면으로 진격하는 제3사단 및 기계화여단과 하루종일 연락이 두절되었읍니다. 
북(조선군)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민군의 작전 수행에 있어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를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군사작전이 시작되면서 각 부대가 전방으로 진격하는 동시에 상급부대에서 하급부대에 이르기까지 지휘부 간의 교신이 두절됐습니다. 인민군 총참모부는 개전 첫날 부터 전투를 지휘하지 못 했으며 단 하나의 사단과도 제대로 된 통신을 유지하지 못 했습니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상급 제대의 참모부와 교신을 하려 하지 않았으며, 야전 부대와 그 상급 부대의 지휘에서는 참모진을 허가를 받지도 않고 교체했으며, 총참모부는 동해안에서 작전하고 있는 여단 및 제12사단과 교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2. 조선인민군의 참모진은 전투 경험이 없었습니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동반하지 않은 경우에는 전투 지휘가 졸렬했으며 포병 및 전차의 운용도 형편없었고 통신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3. 그러나 우리의 군사고문관들은 조선인민군 부대 내에서 매우 헌신적으로 활동했으며 이들이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었습니다. 
4. 군사작전이 개시될 무렵 북조선 인민들의 정치적인 분위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대한 신뢰와 조선인민군이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전반적으로 열성적이었습니다. 
6월 26일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이름으로 조선 인민들에게 연설을 했으며 이 연설에서 조국의 정세에 대하여 설명했으며, 적을 섬멸하고 조선을 통일하는 과업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5. 조선인민군 지휘부는 부대간의 통신을 정상화하고 전투 지휘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조치가 마무리되고 인민군 사령부는 철원(Tepuges, てつげん) 지구로 이동했습니다. 민족보위상(최용건), 인민군 총참모장(강건), 그리고 군사고문단장과 여러명의 장교들이 사령부로 갈 것 입니다. 
남(조선군)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이틀간의 군사작전으로 다음과 같은 점이 드러났습니다. 
1. 적군은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싸우면서 남조선 내륙 깊숙히 퇴각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남조선군의 포로를 많이 잡지 못했습니다. 
2. 남조선 괴뢰정부는 후방에 있던 부대를 투입하고 있으며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3. 첫날 조선인민군의 공세로 남조선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남조선 당국과 주한미국대사는 라디오 방송에서 담화를 발표하여 남조선 인민들이 침착하게 있을 것을 당부했습니다. 남조선군의 사령부는 남조선 군대가 승리하고 있다는 거짓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슈티코프 
No. 358/sh 
1950년 6월 26일

2011년 9월 8일 목요일

재활용 (2)

한국전쟁 직전까지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가 매우 제한적이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전차라던가 105mm M2 같은 사단 포병급 이상의 화포는 전혀 지원되지 않았지요. 하지만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중장비의 지원은 크게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105mm M2나 107mm 중박격포가 원조되긴 했지만 사단의 편제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라서 한국전쟁의 나머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한국군의 보병사단은 사단 외부에서 배속되는 부대를 제외하면 사단 당 1개 대대의 포병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한동안 한국군의 전투력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장비의 지원은 전쟁 이후에도 최대한 자제했습니다. 미국이 계속해서 한국군 보병사단을 경장비 사단 수준으로 묶어둔 덕분에 한국전쟁 내내 한국군 보병사단을은 부족한 화력으로 싸워야 했지요.

이 점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측의 불만요인이었습니다. 이승만이 다양한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군사원조의 증대를 요청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실제로 국민방위군 창설 초기에는 미국이 국민방위군에 대한 장비 제공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 캐나다를 상대로 소총구매를 추진한 일 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어쨌든 미국이 중장비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자 이승만은 좀 색다른 방안을 강구했던 것 같습니다. 이승만은 1951년 2월 10일 임병직(林炳稷) 외무부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습니다.

(전략)

(미국의 고철 수집과 관련해서)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본인의 관심을 끌고 있소. 장관은 북한 공산도당이 전차와 중포를 가지고 쳐들어 왔을 때 우리 국민이 끔찍한 피해를 입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오. 우리 국민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도 전차와 중포를 가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소. (버려진) 전차와 기관총이 매우 많이 있소. 이중 대부분은 파손된 상태지만 우리 기술자들에 따르면 이것들은 80% 정도 수리가 가능하다고 하오. 제8군은 버려진 전차와 장비들을 긁어모아 분해한 뒤 고철로 만들려 하고 있소. 미국측의 당국자들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그것들을 인수하는 대신 고철을 공급하겠다고 요청하시오. 그리고 만약 미국측이 그것들을 판매하려 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사겠다고 하시오. 이렇게 한다면 대한민국의 방위를 준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오. 미국측이 버려진 장비들을 매일 같이 파괴하고 있으니 빨리 미국의 동의를 받도록 하시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의 사령부나 무초 대사에게 우리가 버려진 장비들을 가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시오. 맥아더 장군과 무초 대사에게 이것은 우리 정부의 요청이라고 하시오.

「이승만 대통령이 임병직 장관에게」(1951. 2. 10), Oliver Paper 1951-2(국사편찬위원회 등록번호 HA0000004648)

하지만 버려진 전차와 중화기를 한국이 인수하는 것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사실 미국이 원조를 하는 것이나 버려진 전차를 회수해서 쓰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인력과 기술, 물자의 지원이 필요한 일이니 쉽게 승인해 주기는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승만과 한국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원조 요청을 하고 독자적인 장비 획득을 추진한 것이 미국의 일정한 반응을 이끌어 내기는 했으니 비판적으로만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 과정이 깔끔하진 않지만 어쨌든 조금 더 많은 원조를 뜯어내는 데는 도움이 되긴 했으니 말입니다.


2011년 7월 28일 목요일

모범답안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미국의 안보 관련 기관들은 왜 한반도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는지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미육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50년 7월 21일, 미육군은 한국전에 대한 육군 참모총장 콜린스(J. Lawton Collins) 대장의 의회 특별 보고에 대한 문건을 작성합니다. 이 중 정보 실패에 대한 해명은 육군부 정보국장 어윈(S. LeRoy Irwin) 소장이 직접 작성했습니다. 이 문건은 총 3쪽으로 되어있는데 꽤 재미있습니다.

한반도 사태에 대한 우리 정보기관의 성과에 대해 많은 말이 오가고 있습니다. 본인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태는 우리가 수집한 정보에 비추어 볼 때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는 점을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정보기관들은 우방국들의 국경에 소련과 그 위성국의 군대가 언제든지 공세에 나설 수 있을 만큼의 병력과 물자를 배치했음을 보고해 왔습니다. 이중 일부 지역에서는 공격 행동이 임박했다는 충분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지만 현실화 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소련이 어떤 국경에 이미 배차한 전력으로 공격 행위를 취하려 했다면 어떠한 사전 경고도 없이 공격이 가능했을 것 입니다.

한반도의 경우에는 언제든지 남한에 대해 공세를 취할 수 있는 강력한 북한군이 38선 인근에 배치되었다는 점이 모든 정보기관들을 통해 보고되었습니다. 실제로 북한군은 남한에 대해 여러차례에 걸쳐 심한 경우에는 대대급 전력으로 제한적인 공세를 감행해 왔으나 매번 교전을 계속하지 않고 철수했습니다. 이와 같은 공격(전면공격)에 대한 경보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기습이 완벽하게 가능했던 것 입니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모든 활동을 통제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한미국대사 무초의 관할이었다는 점을 반드시 유념하셔야 합니다. 무초 대사의 군사 참모진은 한 개의 부서, 육군 무관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으로 알려진 한 집단의 육군 장교들로 구성된 사절단은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한 국제연합의 활동이 진행되는 동안 대한민국의 국내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서 남한군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주한미군사고문단은 이러한 각종 훈련 임무외에 정보 업무를 직접적으로 담당하지 않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북한의 활동과 그 의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기회나 수단이 없었습니다. 중앙정보국(CIA)이 모든 비밀 정보활동을 담당한 이래 군사고문단은 모든 형태의 첩보활동에서 배제되었으며 사실상 군사고문단원이 정보활동에 투입될 경우 고문단의 외교적 지위를 위태롭게 함으로써 정책에 위배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극동군사령관은 군수지원과 주한미국대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미국 거류민들을 철수시키는 임무 외에는 한반도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없었으나 그가 관할하는 구역의 안보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허가는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가 극동군사령관의 지휘하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가 한반도의 상황을 주시할 수 있는 자체적인 수단을 확보할 기회는 상대적으로 제한되었습니다.

5월 24일에 육군 정보참모부로 부터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이 방첩 활동을 강화했기 때문에 정보의 양과 질이 심각하게 감소했으며, 많은 국가들이 자체적으로 정보 인력을 감축한 것과 미국의 경제 위축의  여파로 각 지역의 정보 인력이 감소한 점을 보고 받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도 적절할 것 입니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국외 정보 수집하는 것과 국내에서 정보를 분석하는 것이  심각하게 약화되었습니다. 사실 정보참모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국방 정보 기구들이 러시아의 공격을 미리 파악할 수 있다는 보장을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우며 우리의 정보력이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는 점을 고려할 때 현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본인은 이러한 보고를 받은 뒤 미국과 동맹국의 군대가 충분한 대비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경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몇몇 문제점은 바로잡을 수 있었으며 그 밖의 것들은 본인의 책임 범위내에 넣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의 공격에 대한 경보를 때맞춰 받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정보 수집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모든 정보기관들은 세계 정세로 인해 그들의 앞에 놓여진 막대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부분 동원 체제에 돌입해야 한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정보기관들이 항상 적 지휘관들의 마음을 읽어내서 적군이 이미 전개되어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적의 지휘관들이 언제쯤 공격을 결심할지 알아내길 바라는 것은 무리라는 점을 여러분께 설명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결정은 매우 빨리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들은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Tab D, Special Presentation to Congress”(1950. 7. 21), pp.1~3, RG 319, 319.12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 of Staff, G-2, Intelligence, 1918~78, Top Secret Correspondence, 1941~62, Entry 47, Top Secret Decimal File, 1942~52 Italy 1950 to 350.066 1950, Box 12

제목그대로 모범답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문건을 작성한 인물이 육군 정보국장인 어윈 소장인 만큼 자기 부서의 책임을 최대한 회피하려는 것이 잘 드러나있지요.

여기서 모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1. 정보 실패의 근본적인 책임을 국무부와 CIA에 돌리는 점.
2. 육군은 책임을 질 위치가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
3. 예산 문제를 강조하는 점.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

물론 정보 실패의 책임이 국무부와 CIA에 있다는 주장은 문제가 많습니다. 극동군사령부는 물론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체적으로 대북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지요. 문제라면 북한의 전력과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 못했다는 점인데;;;;

이 문건은 좀 궁색하긴 하지만 조직을 방어하는데 있어서는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실제 콜린스 장군의 의회 특별보고에 대한 기록을 찾아서 비교해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군요.

2011년 5월 28일 토요일

이승만의 협상술에 대한 논평 하나

이승만은 매우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특히 외교적인 협상에서 잘 나타나는데 항상 성공하진 못했어도 복잡한 화술로 상대방을 혼란시키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한미국대사였던 무초가 트루먼 기념도서관에서 실시한 구술채록에서 이승만과 미육군부장관 로얄과의 회담에 대해 회고한 내용은 이점에서 꽤 재미있습니다.

헤스(Jerry N. Hess) : 국무부의 관료로서,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로의) 권력이행기에 취했어야 하는 조치들에 대해 이견을 보인 미군 지휘관들이나 국방부 관료들과 특별한 문제는 없으셨습니까?

무초 : 예.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괜찮은 사례라면 1948년 말에 있었던 육군부 장관과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의 방한을 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두 사람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안내했고 그 두 사람은 한국의 국방 문제에 대한 요구에 중점을 두면서 미국이 한국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승만 대통령에게 설명했습니다.

두 사람은 워싱턴으로 돌아가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제안에 동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보낸 보고서도 우리가 이대통령의 군사적 요구에 대해 제안한 내용들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모두 “좋소, 좋소, 좋소”라고 한 것 처럼 보이도록 하는데 영향을 끼쳤는데 사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을 철수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는 제안에 대해서 결코 “좋소” 라고 한 적도 없었고 결코 “싫소”라고 한 적도 없었습니다.

Muccio : Well, there were a few. A good example was the visit in late ‘48 of the Secretary of the Army, accompanied by General (Albert C.) Wedemeyer. I escorted the two to President Rhee and they presented to President Rhee U. S. thingking about the Korean situation with stress on Korean needs in defense matters.

When they reported in Washington, they proceeded on the assumption that Rhee had agreed to this U.S. proposal. My report was to the effect that Rhee had said, “Yes, yes, yes,” to all of the things that we offered Rhee for his military needs, but that he had never said, “Yes,” and he never said, “no,” to the suggestion that the time had come for the withdrawal of the U.S. military forces.

“Oral History Interview with Ambassador John J. Muccio”(1971. 2. 10~2.18) by Jerry N. Hess, Harry S. Truman Library, pp.9~10

이승만의 담화문이나 언론과의 회견을 보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모호하고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이승만이 매우 머리가 좋고 정치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지요. 무초는 이 인터뷰 도중 이승만이 매우 지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사실 이것은 이승만을 상대한 인물들이라면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이었습니다.(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의 경우는 이승만의 교활함에 치를 떨 정도였지요.)

이승만 시절 대한민국이 암울했다는 점과 이승만 정부가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는 점 때문에 가끔 이승만을 매우 무능한 인물로 보는 분들도 계신데 사실 저는 이승만이 특정 방면으로 지독하게 머리가 좋은게 문제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11년 5월 10일 화요일

현리전투와 리지웨이의 한국군 평가

중국군의 1951년 춘계공세는 UN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군은 이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것은 한국군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UN군사령관 리지웨이는 1951년 5월 21일 육군부에 보낸 전문에서 미군 및 한국군 부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1. 본인은 모든 미군 군단, 미군 사단, 그리고 한국군 제1사단을 방문하였고 이 모든 부대들이 사기가 높으며 전투를 훌륭히 수행했음을 특기하고자 한다. 나는 특히 적의 주공에서도 주요한 공격을 받은 러프너(Clark Louis Ruffner) 소장의 미육군 제2보병사단을 특기하고 싶다. 나는 제2보병사단이 보수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자신들의 피해의 20배가 넘는 손실을 적에게 입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들에게 밴 플리트 장군의 미육군 제8군과 이를 지원하는 공군 및 해군의 탁월한 능력, 용맹성, 그리고 투지를 고취할 것이다.

1. Having visited all US Corps, all US Divisions, and the 1st ROK Division, I wish to cite all these units to you for superior spirit and conduct in battle. I particularly cite the US Army’s 2nd Infantry Division, Major General C L Ruffner, commanding, which has received the principal blow of the hostile main effort. It has inflicted losses, which conservatively estimated, exceed, I belive, 20 times its own. It would be an inspiration to our people to know of the professional competence, the gallantry, and the fighting spirit of General Van Fleet’s Eighth US Army and its supporting Air Force and Naval Forces.

2. 한국군 제2사단과 제6사단은 적의 가벼운 공격, 그리고 때로는 강력한 공격에 맞서 매우 훌륭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아직 자세한 사항이 파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제3, 5, 7, 9사단은 형편없었고 막대한 양의 장비를 상실한 것이 명백하다. 한국군 제1군단은 적과의 교전이 제한적이긴 했으나 잘 싸웠다. 이런 유감스러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2. ROK 2nd and 6th Divisions have performed very creditable against moderate and in some cases strong enemy attacks. Although full details still lacking, it is clear that ROK 3rd, 5th, 7th and 9th Divisions have performed discreditably with loss of large amounts of equipment. ROK I Corps has done well though it has had little contact. We are continuing our efforts to correct this lamentable situation.

3. 이승만 대통령은 5월 18일 언론 회견에서 미국이 잘 훈련되어 있는 한국군에게 장비를 제공한다면 미군을 철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본인은 무초 대사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런 말도 안되고 유해한 발언은 그만 둘 것을 권유하려 한다. 본인은 이 문제를 국무부를 통해 제기하고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강한 압박을 가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3. President Rhee was reported to have stated to Press on 18 May that, if US would equip his already well trained Soldiers, American Troops could be withdrawn. I continue to seek through Ambassador Muccio to induce President Rhee to cease making such flagrant and damaging statements. I suggest consideration be given to presenting the matter through channels to Department of State with object of having strong pressure brought to bear to correct this situation.

4. 이 전문의 첫 번째 문단은 언론에 공개할 것을 요청함.

리지웨이

4. Recommend that 1st part of this message be released to Press.

Ridgway

CX62985(1951. 5. 21),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of Korea Army.

2번 항목은 현리 전투가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쳤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미군에 비해 화력이 부족하고 병력으로도 열세라는 문제를 고려해야 하긴 합니다만 1951년 초의 한국군이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한국군이 중국군에게 약하다는 점이 수 차례의 전투로 드러나긴 했습니다만 현리전투는 그 중에서도 최악의 패전이었습니다.

리지웨이가 3번에서 지적한 것 처럼 현리전투는 그동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한국군의 증강을 추진하고 있던 이승만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습니다. 한꺼번에 군단급 제대가 와해되고 장비를 대량을 상실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낯이 두꺼워도 무작정 군사원조를 하라고 요구할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이승만은 1950년 말 부터 국민방위군으로 대표되는 대규모 병력동원과 이를 위한 무기조달에 주력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무기조달의 경우는 미국이 원조를 해 주지 않을 경우 캐나다를 통해 소총을 조달하는 방안까지 고려되었을 정도로 이승만은 병력 증강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리전투는 이승만의 병력 증강 시도에 치명타였습니다.

유명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현리 전투의 결과 한국군에 미군 지휘관을 배치하는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될 정도로 한국군 장교단의 지휘능력은 불신의 대상이 됩니다. 그랬다면 한국군이 태평양전쟁 이전의 필리핀군과 비슷해 졌겠지요.

2011년 4월 17일 일요일

이승만 국부론에 대한 잡상

Big Train님의 이글루에 들렀더니 이승만 국부론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올라와 있어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Big Train님의 글에 달린 댓글과 트랙백으로 엮인 글들도 흥미롭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승만을 매우 싫어합니다. 이승만을 비판할 이유야 넘쳐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전쟁 초기 무책임하게 서울을 버리고 피신했다는 점 입니다. 물론 전황이 불리했기 때문에 서울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피난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국회는 사전 통보조차 받지 못해 많은 국회의원들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김규식과 같은 재야의 거물들은 또 어떻습니까? 이승만이 피난하면서 버려둔 수많은 문서들은 북한에 노획되어 북한의 선전도구가 되었지요. 이승만의 피난은 체계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닌 공황상태에서의 도주에 불과했습니다. 긴급시에 국가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대통령이 공황상태에 빠져 도망쳤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이승만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습니다.

더더욱 우울한 것은 이승만이 25일 오후 부터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1970년대 후반에 공개된 미국 대사관의 전문은 이승만이 25일 밤에 미국 대사를 불러 피난할 생각을 털어놓았다는 것을 밝혀냈지요. 그런데 이 자료가 공개되어 널리 알려진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일부 우익은 내용의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프란체스카 비망록을 들먹이며 이승만이 27일까지도 서울을 사수하려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글,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의 서울탈출” 에 서도 언급했지만 프란체스카 비망록의 6월 25일~28일 기록은 작성된 시기조차 확실하지 않고 이승만에 대한 비난을 막고하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강한 글 입니다. 결정적으로 주한 미국대사 무초가 25일 밤~26일 새벽에 이승만을 면담하고 국무부에 보낸 전문이 남아있기 때문에 프란체스카 비망록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요즘도 프란체스카 비망록의 내용을 따르는 글들이 ctrl+c+v되어 인터넷 곳곳에 퍼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6월 25일~27일 경무대에서 일어난 일들은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입니다. 전선에서 수많은 군인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먼저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정말로 가장 먼저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승만이 정부기관과 국회의 피난을 책임졌다면 그가 서울을 버리고 피난한 것을 비난하지 못할 것 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전쟁 당일 부터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정말로 가장 먼저 도망쳤습니다. 더욱 더 비참한 것은 정작 외국인인 주한미국대사 무초가 최후까지 남아 대통령이 도망치고 나서 공황상태가 된 한국군 수뇌부를 도우려 했다는 것 입니다.

무초 대사는 1950년 6월 27일 오전 6시에 다음과 같은 짤막한 전문을 보냈습니다.

966. 서울 북쪽의 북한군은 지난 밤 사이 조금 더 진격해왔습니다. 가장 신뢰할 만한 상황 평가에 따르면 서울 근방의 적군 병력과 전차 숫자가 과대평가되긴 했어도 숫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사관은 현재 고립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대통령과 대부분의 각료들은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피신했습니다.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한국군 참모부는 아직 서울을 사수할 것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저는 소수의 지원자와 함께 최후의 순간까지(until bitter end) 서울에 남을 것이며 드럼라이트 참사관 및 소수의 대사관 직원을  자동차 편으로 대통령을 따르게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한국을) 포기했다는 비난을 막기 위해서 주한미군사고문단의 핵심 요원은 사태의 추이에 따라 차량을 이용해 남쪽으로 보내고 그밖의 군사고문단 요원들은 항공기편으로 피신시켜야 합니다.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1950. 6. 27),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U.S.GPO, 1976), p.173

이승만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정부의 수뇌인 이승만이 생포되면 대한민국이 붕괴될 수 있으므로 이승만의 피난을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옹호는 이승만이 정부와 의회, 그 밖의 국가 기관들을 체계적으로 피난시키려고 노력했을 때에나 가능할 것 입니다. 결정적으로, 주한미국대사인 무초는 한국군 수뇌부와 함께 글자그대로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서울에 남았습니다. 한국에 대한 무초의 책임은 이승만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벼웠지만 무초는 위험을 무릅쓰고 외교관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외국인보다도 대한민국에 대한 책임감이 없던 자를 국부로 추앙하려는 정신나간 움직임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데서 오는 것이지 억지로 만든 국부 따위를 받들어 모신다고 생기는게 아닙니다.

2010년 6월 27일 일요일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의 서울탈출

6월 27일은 이승만이 서울에서 탈출한 날 입니다. 수도가 함락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함께 죽을 필요는 없겠지만 이승만은 정부와 의회, 그리고 군대를 내팽겨치고 혼자 도망쳤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승만에게는 정치적인 약점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이 비밀리에 수도 서울을 탈출한 데 대한 변호는 1983년에 중앙일보를 통해 공개된, 그의 아내였던 프란체스카 도너 리가 기록한 비망록에 나타납니다. 프란체스카의 비망록에서는 이승만은 수도를 사수하려 했으나 신성모 등의 간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이 글에서는 얼마전 단행본으로 나온 판본을 인용하겠습니다.)

숨 막힐 듯한 긴장과 긴박감 속에 하루가 지났다. 대통령이나 나나 자정을 넘겨 막 잠자리에 눈을 붙였을 때 비서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맡의 시계는 27일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어 서울시장 이기붕씨와 조병옥씨가 들어왔다.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 겠습니다."

신 장관이 간곡히 남하를 권유했다.

"안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신 장관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니 안장 있었다. 나는 대통령을 뒤따라 들어가 침착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지금 같은 형편에서는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거라고 염려들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게 된답니다. 일단 수원까지만 내려갔다가 곧 올라오는 게 좋겠습니다."

내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대통령은 "뭐야! 누가 마미한테 그런 소릴 하던가? 캡틴 신이야, 아니면 치프 조야, 장이야. 아니면 만송(晩松, 이기붕씨의 아호)이야. 나는 안 떠나." 하고 고함을 질렀다.

대통령은 나에게는 신 장관을 캡틴 신(그는 한 때 선장을 했다), 조병옥 박사나 장택상 씨는 경찰국장을 지냈다고 해서 치프(chief) 조라고 불렀다. 나는 재차 "모두 같은 의견입니다. 저는 대통령 뜻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때 경찰간부(이름은 기억이 없다) 한 사람이 들어와 적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이닥쳤다고 메모를 전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적의 탱크는 그보다 훨씬 먼 곳에 있었고, 그것은 대통령의 남하를 독촉하려는 꾀였었다.

나도 "수원은 서울에서 별로 멀지 않아요" 라고 넌지시 거들었다. 신 장관은 때를 놓치지 않고 "각하가 수원까지만 내려가 주시면 작전하기가 훨씬 쉽겠습니다"라며 머리를 숙였다.

새벽 3시 30분. 남행 열차를 타기로 결정됐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조혜자 옮김, 『6ㆍ25와 이승만 :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기파랑, 2010), 24~26쪽

프란체스카의 주장에 따르면 이승만은 27일 까지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신성모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의 간곡한 설득 끝에 서울에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중앙일보에 프란체스카의 비망록이 공개되기 이전에 미국에서 기밀해제된 주한미국대사 무초의 전문에 따르면 이야기는 크게 달라집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25일 밤 10시에 제게 전화를 걸어 자신과 면담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대사관에 있던 신성모 국무총리서리가 저와 동행했습니다. 제가 대통령관저에 도착했을 때 이범석 전국무총리는 이미 도착해 있었습니다. 다음의 내용은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큰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룩거리면서 중간에 끊어져 뜻이 통하지 않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의정부의 상황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에 따르면 수많은 전차가 서울을 향해 쇄도하고 있으며 한국군의 능력으로는 저항할 수 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국무총리서리에게 한국어나 영어로 말을 걸었으며 가끔씩 이범석에게도 한국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내각에서 오늘 밤 정부를 대전으로 옮길것을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대통령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안전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정부를 반드시 보전해야 하며 만약 대통령 자신이 공산당에게 잡힐 경우 대한민국의 체제에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이대통령은 뜬금없이 국무총리서리에게 군사지식을 가진 "유능한 사람을 여러명" 모아서 현재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고 필요한 조치를 결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대통령은 만약 신성모가 만족할수 있을 정도로 군사적인 상황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저없이 그 사람을 위해 국방부장관직을 사임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대통령은 한국측은 미국이 큰 원조를 해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우리는 1천만 달러 정도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갑부인 박흥식(화신 그룹의 소유주인)이 무기 구매를 위해 백만달러를 제공하겠다고 한 것을 알고 있지만 내 생각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국무총리서리는 거듭해서 이대통령이 지시하면 상선단에서 얻은 경험에 따라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네 각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각하"를 연발했습니다. 하지만 신성모도 이대통령의 결정과 명령에 대해 매우 불쾌해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신성모는 결국에는 실례하겠다고 한 뒤 의정부 지구의 전투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화로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대통령에게 무기와 병력이 있다는 점과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바주카포와 대전차포, 그리고 대전차지뢰를 사용해 싸워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정부가 서울을 지키도록 설득하려 노력했습니다. 신성모는 57mm 대전차포가 북한군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했다고 말했고 저는 대전차지뢰의 사용을 강조했습니다.(신성모의 주장은 다소 의심스럽습니다. 한국의 도로와 교량은 중전차(extremely heavy tanks)가 다닐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만약 정부가 서울을 포기한다면 전투에 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한국의 상황이 계속 악화된다면 이것을 다시 호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대통령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그는 거듭해서 자신은 개인적인 안위에는 관심이 없으며 정부가 사로잡히는 위험을 감수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대통령의 생각을 바꿀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자 자리를 뜨기로 했고 이대통령에게는 대전으로 피신하라고 한 뒤 저는 서울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미국인 여성과 어린이들은 다음날 밝는대로 일찍 철수시킬 것이며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서울 상공에 공중 엄호가 있을 것 이라고 했습니다. 이대통령은 여성과 어린이들은 피신해야 한다는데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 사절단의 남성들은 잔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회의를 끝내고 나오려 하자 이범석은 어설픈 영어로 그가 생각하기에 북한의 원래 전략은 서울 방면으로 기만 공격을 건 뒤 동해안에 게릴라 부대를 상륙시키는 것이었으나 서울 방면으로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이 지구에 전력을 더 투입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범석은 한국군이 서울 방면으로의 공격에 대항해 완강하게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회의실을 떠나자 이범석은 대통령과 나눌 말이 더 있다고 하면서 남았습니다.

대통령관저를 나서자 신성모는 저에게 다가와 이대통령은 그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정부를 옮기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1950. 6. 26),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U.S.GPO, 1976), pp.141~143

바로 한국전쟁 당시의 기록인 무초의 주장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미 전쟁 당일 서울을 포기하고 피신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다른 측근들의 권유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특히 프란체스카의 회고에서 이승만에게 피신을 권유했다고 하는 신성모는 오히려 이승만으로 부터 어떠한 통고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가장 재미있는 점은 이승만이 자신의 안위를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거듭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한 번 이야기 해도 될 것을 왜 계속해서 이야기 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읽는 분들이 판단하실 문제지요.

무초는 1971년의 인터뷰에서도 이승만이 이미 25일 저녁에 피난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증언을 한 바 있습니다. 세부적인 사항은 이 문서와 약간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은 골격은 대동소이합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두개의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바로 사건 당시의 기록인 반면 다른 하나는 사건으로 부터 시간이 지난뒤에 씌여진 기록입니다. 게다가 이승만을 변호하는 입장에서 씌여진 기록이지요. 어떤 것이 더 믿을만 한지는 읽은 분들이 판단하시면 되겠습니다.

2009년 2월 24일 화요일

한국군의 소총에 대한 잡담

슈타인호프님이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한 시기 국군과 경찰의 총기 문제에 대해서 재미있는 글을 한 편 써 주셨는데 사족을 조금 달아보려 합니다.

잘 알려져 있다 시피 1948년 초 NSC8이 작성될 당시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는 한국군에 대한 군사원조를 5만명 수준으로 제한했습니다. 즉 소화기는 5만명 분을 원조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1948년 말부터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병력을 증강하면서 애초 미국이 상정한 병력 상한선을 돌파해 버리자 미국은 이승만 정부와 병력규모를 놓고 협상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 결과 1949년 2월 미육군부 장관 로얄(Kenneth Claiborne Royall)웨드마이어(Albert Coady Wedemeyer) 중장을 대동하고 이승만과 회견합니다. 이 회견이 있은 뒤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규모를 육군 6만5천명으로 상향조정합니다. 이 내용은 1949년 3월 16일의 NSC8/1에 반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NSC8/1에 반영된 군사원조가 당장 이행될 수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여기서 추가된 1만5천명분의 소화기는 1950년도 회계연도 군사원조가 결정된 이후에야 이행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한미군이 철수한 시점에서 한국군은 5만명 분의 미제 소화기만을 장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국정부가 독자적으로 육군을 7만5천명 수준으로 증강을 해 버렸기 때문에 일선 부대의 소화기 부족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참고로 1949년 6월경 국군 제7연대와 제10연대의 장비현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표에 잘 나타나듯 두 연대는 미제 소화기의 부족으로 편제를 초과하는 일본제 99식 소총을 갖추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화기가 편제에서 크게 미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보병연대는 미제 소총이 300여정 부족하며 제 10연대는 미국제 소총이 인가량에서 1200정 가량 미달하고 있습니다. 두 연대 모두 부족분을 일본제 소총으로 보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연대의 경우 소총이 없는 병력이 200명이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공용화기도 편제에서 미달하고 있으며 특히 기관총과 바주카포의 부족이 두드러지지요. 이 두 연대는 비교적 초기에 창설된 연대이지만 신규 창설 부대를 위해 장비를 차출해야 했기 때문에 1949년 6월 시점에서는 공용화기는 물론 기본적인 소총 마저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국군병력은 1949년 8월 시점에는 10만명에 육박해 버리지요.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49년 6월 이후 이승만과 미국 대사관, 군사고문단간의 협상은 나머지 5만명분의 미제 소총과 덤으로 중장비를 원조받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미국 정부는 NSC8/1과 수정안 8/2에 의거해 1만5천명분의 장비만 더 줄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렇지만 NATO의 창설과 같은해 통과된 상호방위원조법안(Mutual Defense Assistance Act) 때문에 미국의 지원능력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한국은 상호방위원조법안에 명시된 원조 우선순위 13위(15개 국 중에서)였기 때문에 충분한 원조 예산이 배정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에 배당된 원조액을 맞추기 위해서 1만5천정의 M-1 소총 대신 퇴출된 장비인 M-1903 스프링필드 소총을 대신 원조한다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1950년 5월 26일 미육군 군수국은 상태가 양호한 3만정의 M-1903 재고를 확보했으며 NSC8/2에 의거해 이 중 2만정을 수리해서 한국에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수리비용을 포함해 책정된 비용은 1정당 20달러로 총 30만 달러였습니다. 한국으로 보낼 2만정의 M-1903 소총이 정비창으로 보내진 것은 1950년 6월 19일 이었는데 2만정 모두를 사용 가능 상태로 수리하는데 90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뒤에 수령님이 땅크를 몰고 쳐들어 왔기 때문에 한국군이 스프링필드 소총을 만져볼 기회는 없어졌습니다.

2008년 8월 19일 화요일

이박사의 허풍실력

이승만은 매우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정치인 인데다 꽤 괴상한 감각을 가진 도박꾼이었습니다. 보통 선수들끼리 한판 벌인다면 상대방이 뻔히 알고 있는 문제를 건드려서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짓은 하지 않을 텐데 이박사는 그런 상식을 과감히 무너뜨리는 면이 있었습니다. 다음의 일화는 그런 점을 잘 보여줍니다.


이박사 : 반대로, 우리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남한의 국민들 뿐 만 아니라 북한의 동포들의 생명도 책임지고 있소. 최근 25만에서 30만 사이의 잘 무장된 공산군이 공격 준비를 마쳤다는 정보를 입수했소. 공산군은 해주에서 서울을 포격할 수 있는 4문의 아주 큰 대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오.

로버츠 준장 : (해주에서 서울까지는) 44마일이나 됩니다! 저는 그런 대포가 있다는 이야길 처음 듣습니다.

President : On the other hand, from the Korean point of view, we are responsible for the lives of the Korean people in the south as well as in the North. We are informed that some red army from 250,000 to 300,000 well equipped, are ready to attack. They have four big gun that when they are fire them from Haiju the shells will land in Seoul.

Gen Roberts : That is 44 miles! I have not heard of this.

「Conference at Capitol, August 12, 1949」, 『RG 338, Provisional Military Advisory Group, 1949~53 Box 12』

이승만은 1950년 이전 군사원조를 요청할 때는 제정신과 광기를 오락가락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 경우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물론 북한에 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보고 받는 로버츠가 이승만의 저런 허풍에 속아넘어갈 리는 당연히 없었습니다. 게다가 70km나 날아가는 장거리포(!)가 있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황당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승만의 이런 황당한 허풍은 종종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물론 이승만을 혐오하게 되는 역효과도 동반하긴 했습니다만.

가끔 이박사의 이런 황당한 측면을 패러디 해서 한국판 뮨하우젠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