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린폴리시에 재미있는 기고문이 하나 올라왔군요. 군사 정보 출처로서 중국 인터넷의 공개정보가 가지는 가치에 대해 논하는 글 입니다.
다른 나라의 인터넷 사이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들도 상당수는 익히 알려져있거나, 또는 진위가 의심스러운 것들이지만 중국 인민해방군이 워낙 정보공개에 폐쇄적인 집단이고 가끔은 선전을 위해 인터넷에 정보를 흘리기도 하므로 정보가 부족한 외국의 관찰자 입장에서는 중국의 인터넷망의 밀덕(軍迷)들을 주시할 필요성은 있다는 내용입니다. 만약 소련 시절에 인터넷이 있었다면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014년 5월 29일 목요일
2011년 7월 28일 목요일
모범답안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미국의 안보 관련 기관들은 왜 한반도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는지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미육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50년 7월 21일, 미육군은 한국전에 대한 육군 참모총장 콜린스(J. Lawton Collins) 대장의 의회 특별 보고에 대한 문건을 작성합니다. 이 중 정보 실패에 대한 해명은 육군부 정보국장 어윈(S. LeRoy Irwin) 소장이 직접 작성했습니다. 이 문건은 총 3쪽으로 되어있는데 꽤 재미있습니다.
제목그대로 모범답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문건을 작성한 인물이 육군 정보국장인 어윈 소장인 만큼 자기 부서의 책임을 최대한 회피하려는 것이 잘 드러나있지요.
여기서 모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1. 정보 실패의 근본적인 책임을 국무부와 CIA에 돌리는 점.
2. 육군은 책임을 질 위치가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
3. 예산 문제를 강조하는 점.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
물론 정보 실패의 책임이 국무부와 CIA에 있다는 주장은 문제가 많습니다. 극동군사령부는 물론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체적으로 대북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지요. 문제라면 북한의 전력과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 못했다는 점인데;;;;
이 문건은 좀 궁색하긴 하지만 조직을 방어하는데 있어서는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실제 콜린스 장군의 의회 특별보고에 대한 기록을 찾아서 비교해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군요.
한반도 사태에 대한 우리 정보기관의 성과에 대해 많은 말이 오가고 있습니다. 본인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태는 우리가 수집한 정보에 비추어 볼 때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는 점을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정보기관들은 우방국들의 국경에 소련과 그 위성국의 군대가 언제든지 공세에 나설 수 있을 만큼의 병력과 물자를 배치했음을 보고해 왔습니다. 이중 일부 지역에서는 공격 행동이 임박했다는 충분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지만 현실화 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소련이 어떤 국경에 이미 배차한 전력으로 공격 행위를 취하려 했다면 어떠한 사전 경고도 없이 공격이 가능했을 것 입니다.
한반도의 경우에는 언제든지 남한에 대해 공세를 취할 수 있는 강력한 북한군이 38선 인근에 배치되었다는 점이 모든 정보기관들을 통해 보고되었습니다. 실제로 북한군은 남한에 대해 여러차례에 걸쳐 심한 경우에는 대대급 전력으로 제한적인 공세를 감행해 왔으나 매번 교전을 계속하지 않고 철수했습니다. 이와 같은 공격(전면공격)에 대한 경보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기습이 완벽하게 가능했던 것 입니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모든 활동을 통제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한미국대사 무초의 관할이었다는 점을 반드시 유념하셔야 합니다. 무초 대사의 군사 참모진은 한 개의 부서, 육군 무관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으로 알려진 한 집단의 육군 장교들로 구성된 사절단은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한 국제연합의 활동이 진행되는 동안 대한민국의 국내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서 남한군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주한미군사고문단은 이러한 각종 훈련 임무외에 정보 업무를 직접적으로 담당하지 않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북한의 활동과 그 의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기회나 수단이 없었습니다. 중앙정보국(CIA)이 모든 비밀 정보활동을 담당한 이래 군사고문단은 모든 형태의 첩보활동에서 배제되었으며 사실상 군사고문단원이 정보활동에 투입될 경우 고문단의 외교적 지위를 위태롭게 함으로써 정책에 위배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극동군사령관은 군수지원과 주한미국대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미국 거류민들을 철수시키는 임무 외에는 한반도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없었으나 그가 관할하는 구역의 안보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허가는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가 극동군사령관의 지휘하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가 한반도의 상황을 주시할 수 있는 자체적인 수단을 확보할 기회는 상대적으로 제한되었습니다.
5월 24일에 육군 정보참모부로 부터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이 방첩 활동을 강화했기 때문에 정보의 양과 질이 심각하게 감소했으며, 많은 국가들이 자체적으로 정보 인력을 감축한 것과 미국의 경제 위축의 여파로 각 지역의 정보 인력이 감소한 점을 보고 받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도 적절할 것 입니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국외 정보 수집하는 것과 국내에서 정보를 분석하는 것이 심각하게 약화되었습니다. 사실 정보참모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국방 정보 기구들이 러시아의 공격을 미리 파악할 수 있다는 보장을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우며 우리의 정보력이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는 점을 고려할 때 현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본인은 이러한 보고를 받은 뒤 미국과 동맹국의 군대가 충분한 대비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경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몇몇 문제점은 바로잡을 수 있었으며 그 밖의 것들은 본인의 책임 범위내에 넣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의 공격에 대한 경보를 때맞춰 받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정보 수집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모든 정보기관들은 세계 정세로 인해 그들의 앞에 놓여진 막대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부분 동원 체제에 돌입해야 한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정보기관들이 항상 적 지휘관들의 마음을 읽어내서 적군이 이미 전개되어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적의 지휘관들이 언제쯤 공격을 결심할지 알아내길 바라는 것은 무리라는 점을 여러분께 설명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결정은 매우 빨리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들은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Tab D, Special Presentation to Congress”(1950. 7. 21), pp.1~3, RG 319, 319.12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 of Staff, G-2, Intelligence, 1918~78, Top Secret Correspondence, 1941~62, Entry 47, Top Secret Decimal File, 1942~52 Italy 1950 to 350.066 1950, Box 12
제목그대로 모범답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문건을 작성한 인물이 육군 정보국장인 어윈 소장인 만큼 자기 부서의 책임을 최대한 회피하려는 것이 잘 드러나있지요.
여기서 모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1. 정보 실패의 근본적인 책임을 국무부와 CIA에 돌리는 점.
2. 육군은 책임을 질 위치가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
3. 예산 문제를 강조하는 점.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
물론 정보 실패의 책임이 국무부와 CIA에 있다는 주장은 문제가 많습니다. 극동군사령부는 물론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체적으로 대북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지요. 문제라면 북한의 전력과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 못했다는 점인데;;;;
이 문건은 좀 궁색하긴 하지만 조직을 방어하는데 있어서는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실제 콜린스 장군의 의회 특별보고에 대한 기록을 찾아서 비교해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군요.
2008년 10월 19일 일요일
당대의 정보문서는 얼마나 정확한가?
이글루에서 재미있는 글을 하나 봤습니다. 미국측의 정보문서를 토대로 북한 인민군 10만이 국공내전에 참전했다는 주장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 글의 토대가 된 미국측 정보는 전혀 신빙성이 없습니다.
당대의 단편적인 정보문서들은 정확한 것도 많지만 가치가 없는 쓰레기 정보도 역시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1급기밀문서인 NSC 8에는 1948년 4월 당시 북한 인민군이 125,000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인민군은 불과 2개 보병사단과 1개 보병여단에 불과했지요;;;
당대의 정보문서를 읽을 때는 다른 자료들과의 교차검증이 필요한데 미국측 정보문서를 제외하면 북한 인민군 10만이 국공내전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근거는 없습니다. 당장 국공내전 전 기간 중 인민해방군에 참여한 조선계는 모두 합쳐봐야 63,000명 수준입니다.;;;; 그리고 10만이나 되는 인민군이 참전했다면 당연히 국공내전에 대한 중국쪽 자료에서도 관련 내용이 나와야 하는데 조선족 참전이 아닌, 북한 국적의 인민군이 대규모로 참전했다는 중국측 기록은 없습니다. 10만명이 참전했다면 당연히 부대단위로 참전했을 텐데 당장 동북지역에 투입된 인민해방군 전투서열을 분석하더라도 북한에서 유입된 인민군 부대를 찾아볼 수 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대의 부정확한 정보문서만 가지고 어떻게 북한군이 국공내전에 대규모로 개입한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낼 수 있겠습니까?
당대의 단편적인 정보문서들은 정확한 것도 많지만 가치가 없는 쓰레기 정보도 역시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1급기밀문서인 NSC 8에는 1948년 4월 당시 북한 인민군이 125,000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인민군은 불과 2개 보병사단과 1개 보병여단에 불과했지요;;;
당대의 정보문서를 읽을 때는 다른 자료들과의 교차검증이 필요한데 미국측 정보문서를 제외하면 북한 인민군 10만이 국공내전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근거는 없습니다. 당장 국공내전 전 기간 중 인민해방군에 참여한 조선계는 모두 합쳐봐야 63,000명 수준입니다.;;;; 그리고 10만이나 되는 인민군이 참전했다면 당연히 국공내전에 대한 중국쪽 자료에서도 관련 내용이 나와야 하는데 조선족 참전이 아닌, 북한 국적의 인민군이 대규모로 참전했다는 중국측 기록은 없습니다. 10만명이 참전했다면 당연히 부대단위로 참전했을 텐데 당장 동북지역에 투입된 인민해방군 전투서열을 분석하더라도 북한에서 유입된 인민군 부대를 찾아볼 수 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대의 부정확한 정보문서만 가지고 어떻게 북한군이 국공내전에 대규모로 개입한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낼 수 있겠습니까?
2006년 12월 14일 목요일
독일군 정보부의 삽질과 베르됭의 대재앙
과거의 독일군은 작전과 전술 분야에서는 다른 어떤 나라의 군대보다도 우수하다고 평가받았지만 정보부문에 있어서는 좀 뒤떨어졌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입니다. 사실 1~2차 대전을 통틀어 독일군은 자신들의 잘못된 정보 때문에 피박을 본 사례가 제법 있지요. 아무리 주먹을 잘 써도 앞이 잘 안보이면 별 수 없으니.
베르됭 전투는 이런 점에서 독일의 형편없는 정보력이 초래한 재앙의 대표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당초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하고 소모전을 벌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뭔가 문제가 있는 시각이었습니다. 독일육군총사령부(OHL)의 정보국(Nachrichten-abteilung)은 전쟁 말기 까지도 20명 내외의 정보 장교와 비슷한 수의 보조 인력으로 운영되고 있어 업무부담이 심각했고 전선에서 입수되는 정보들을 효율적으로 분석할 수 없었습니다. 형편없는 정보 능력에다가 상대방에 대한 과소평가까지 곁들여 지니 그야말로 상황은 금상첨화였지요.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전투 초반에는 병력 우세와 기습효과로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프랑스측도 병력을 증원하면서 팔켄하인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출혈을 강요하는 소모전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쌍방의 손실 교환비가 독일 1에 프랑스 1.1 수준이니 이건 별로 남는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독일군이 확보한 예비대라고는 보병사단 10개가 전부였는데 당시 보병사단의 평균 소모율(솜 전투의 영국군 손실을 참고)을 고려한다면 이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독일군의 공세는 사실상 공격 개시 일주일 밖에 안된 2월 28일에 둔화됐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소모전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팔켄하인은 공세 초기의 막대한 손실 때문에 공세 초기부터 불안해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켄하인은 3월 초 주공을 담당한 제 5군에 2차 공세를 명령합니다. 정보기관이 프랑스군의 손실을 과대 평가하고 예비대의 규모를 과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독일군이 프랑스의 손실을 과대 평가한데는 프랑스측의 사단 교대가 독일보다 좀 더 빈번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측은 전선에서 물러나는 프랑스군 사단들을 모두 괴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것으로 판단했고 3월 초 프랑스군의 손실이 독일측의 3배에 달한다고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이 잘못된 정보는 베르됭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3월 30일, 팔켄하인은 제 5군 사령관에게 “아군의 손실이 적보다 적은 한 공세를 지속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물론 제 5군 사령부에서는 일선 부대들의 전투력이 한계점을 넘어서 위험수준이 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 10 예비보병사단장 바르펠트(Max von Bahrfeldt) 소장은 “전투 일주일 만에 사단의 장교와 사병들은 무기력과 탈진상태에 도달했다. (상부의) 수많은 요구는 인간의 체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라고 토로할 정도였습니다. 제 5군 사령관인 빌헬름 황태자는 팔켄하인에게 공격 중지를 요청했지만 팔켄하인은 이를 묵살해 버립니다.
5월에 독일군의 손실은 25만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측은 프랑스군의 손실이 52만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었고 6월 초에는 프랑스군의 손실이 80만에 달한다고 오판했습니다. 그나마 영국군이 솜에서 대공세를 개시 함으로서 독일군은 베르됭에서 공세를 중지하게됩니다. 만약 연합군측이 수동적으로 방어만 하고 있었다면 팔켄하인은 계속해서 베르됭에 병력을 밀어 넣으면서 소모전을 계속했을지도 모를 일 입니다. 잘못된 정보가 계속해서 생산되는 한.
어쨌건 잘못된 정보에 의존해 맹목적으로 공격을 계속한 결과 독일은 336,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프랑스는 365,000명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독일군은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를 붕괴시킨다는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전투를 개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들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멍청한 어르신들을 모신 덕에 병사들만 죽어나간 것이지요.
베르됭 전투는 이런 점에서 독일의 형편없는 정보력이 초래한 재앙의 대표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당초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하고 소모전을 벌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뭔가 문제가 있는 시각이었습니다. 독일육군총사령부(OHL)의 정보국(Nachrichten-abteilung)은 전쟁 말기 까지도 20명 내외의 정보 장교와 비슷한 수의 보조 인력으로 운영되고 있어 업무부담이 심각했고 전선에서 입수되는 정보들을 효율적으로 분석할 수 없었습니다. 형편없는 정보 능력에다가 상대방에 대한 과소평가까지 곁들여 지니 그야말로 상황은 금상첨화였지요.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전투 초반에는 병력 우세와 기습효과로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프랑스측도 병력을 증원하면서 팔켄하인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출혈을 강요하는 소모전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쌍방의 손실 교환비가 독일 1에 프랑스 1.1 수준이니 이건 별로 남는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독일군이 확보한 예비대라고는 보병사단 10개가 전부였는데 당시 보병사단의 평균 소모율(솜 전투의 영국군 손실을 참고)을 고려한다면 이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독일군의 공세는 사실상 공격 개시 일주일 밖에 안된 2월 28일에 둔화됐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소모전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팔켄하인은 공세 초기의 막대한 손실 때문에 공세 초기부터 불안해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켄하인은 3월 초 주공을 담당한 제 5군에 2차 공세를 명령합니다. 정보기관이 프랑스군의 손실을 과대 평가하고 예비대의 규모를 과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독일군이 프랑스의 손실을 과대 평가한데는 프랑스측의 사단 교대가 독일보다 좀 더 빈번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측은 전선에서 물러나는 프랑스군 사단들을 모두 괴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것으로 판단했고 3월 초 프랑스군의 손실이 독일측의 3배에 달한다고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이 잘못된 정보는 베르됭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3월 30일, 팔켄하인은 제 5군 사령관에게 “아군의 손실이 적보다 적은 한 공세를 지속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물론 제 5군 사령부에서는 일선 부대들의 전투력이 한계점을 넘어서 위험수준이 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 10 예비보병사단장 바르펠트(Max von Bahrfeldt) 소장은 “전투 일주일 만에 사단의 장교와 사병들은 무기력과 탈진상태에 도달했다. (상부의) 수많은 요구는 인간의 체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라고 토로할 정도였습니다. 제 5군 사령관인 빌헬름 황태자는 팔켄하인에게 공격 중지를 요청했지만 팔켄하인은 이를 묵살해 버립니다.
5월에 독일군의 손실은 25만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측은 프랑스군의 손실이 52만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었고 6월 초에는 프랑스군의 손실이 80만에 달한다고 오판했습니다. 그나마 영국군이 솜에서 대공세를 개시 함으로서 독일군은 베르됭에서 공세를 중지하게됩니다. 만약 연합군측이 수동적으로 방어만 하고 있었다면 팔켄하인은 계속해서 베르됭에 병력을 밀어 넣으면서 소모전을 계속했을지도 모를 일 입니다. 잘못된 정보가 계속해서 생산되는 한.
어쨌건 잘못된 정보에 의존해 맹목적으로 공격을 계속한 결과 독일은 336,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프랑스는 365,000명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독일군은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를 붕괴시킨다는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전투를 개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들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멍청한 어르신들을 모신 덕에 병사들만 죽어나간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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