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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일 일요일

우크라이나군의 소모에 대해 우려하는 분석

 Global Politics and Strategy 65-2에 우크라이나 전쟁 2022년 여름~가을 전역을 분석한 IISS의 가디(Franz-Stefan Gady)Center for Naval Analyses의 코프만(Michael Kofman)이 공동으로 집필한 글이 실렸습니다.

 

Ukraine’s Strategy of Attrition

 

가디와 코프만은 전쟁 발발 이래 우크라이나는 소모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러시아군에 대해 결정적인 타격은 입히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2022년 우크라이나가 큰 성공을 거둔 하르키우와 헤르손 지구 반격에 대해서도 다소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현 상태로는 장기적인 소모전의 늪에 빠질 수 있다는 부정적인 예측을 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상당히 부담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현재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 방식을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측은 전술 단위에서 전쟁을 수행하는데 주로 소모전 방식으로 접근해 왔다. 기동전에서 작전적 성과를 거두려면 먼저 광범위한 소모가 있어야 한다. 이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대부분의 재래식 전쟁은 소모, 기동, 재편성의 양상을 띄기 때문이다. 미국이 지원한 하이마스와 같은 서방의 첨단 무기와 정보-감시-정찰 자산 지원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군은 지속되는 소모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미국이 지속적으로 정보 지원을 해 준 덕분에 우크라이나군은 하이마스를 사용해 장거리 정밀 타격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이마스가 지원되기 전에는) 우크라이나군은 이런 장거리 타격 능력이 없었다. 하미마스는 러시아군의 포병 전력 우위를 감소시켜서 우크라이나군이 공세 작전을 감행하는데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우크라이나군은 기동전 이론에 입각해 러시아군의 지휘통제망과 보급소와 같은 핵심적인 지원 체계를 타격해 러시아군의 물리적, 심리적 응집력과 사기를 깎아 내리려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동과 정밀 타격 보다는 소모와 대규모 화력 투사를 해야 이를 달성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군 포병은 종종 단독으로 작전을 했으며, 우크라이나군이 병력 밀집도가 높은 준비된 방어선에 공세작전을 전개했을 때의 결과는 복합적이었다. 우크라이나군은 공세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전통적인 화력 투사와 반복적인 지상 공격을 결합했다. 러시아군의 지휘통제 체제와 탄약 보급 체계, 교통선에 대한 장거리 정밀타격은 우크라이나군의 기동전 수행 능력을 크게 향상시키지 못한 걸로 파악된다. 장기간의 소모전을 통해 기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기동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군의 병력과 물자, 탄약 보급을 대폭 확충하지 않는 한 우크라이나군이 단기간에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기는 어렵다. 우크라이나군의 하르키우와 헤르손 공세는 우크라이나군의 강점 뿐만 아니라 한계점도 보여주었다.

Franz-Stefan Gady and Michael Kofman, “Ukraine’s Strategy of Attrition”, Global Politics and Strategy 65-2(2032), p.8

 

하르키우 반격 작전에 대해서는 미국이 제공한 정밀 타격 무기의 효과가 기대만큼 크지 않았으며 러시아군이 초기 패배의 충격에서 상당히 신속하게 회복했다고 평가합니다.

 

우크라이나군은 (하르키우) 공세작전에 최소 6개 여단을 투입했고 여기에는 제92기계화여단과 제3전차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크라이나군은 미국이 지원한 16대의 하이마스로 서방의 정보 지원을 받아 3개월에 걸쳐 정밀 타격을 실시했으며 러시아군 전선 후방의 탄약 집적소, 지휘소, 군수보급 허브, 철도 교차점, 교량 등 400여개의 목표를 타격하면서 공세를 준비했다.

많은 분석가들이 우크라이나군이 하르키우 반격에서 성공을 거둔 핵심 요소가 하이마스라고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다른 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킨 점을 감안하면 하이마스로 하르키우주의 러시아군 보급 체계를 타격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할 만한 근거가 희박하다. 비록 최소한 러시아군의 지휘소 세곳이 하이마스 타격에 당하기는 했으나 언론보도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하르키우 방면에 하이마스가 배치된다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했던 걸로 보인다. 러시아군은 군수보급 허브를 재배치하고 지휘소를 강화하고 기만책을 강화하여 하이마스 포격의 효율성을 지속적으로 감소시킨 걸로 보인다.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의 예비대 운용을 늦추고 방해하거나, 다른 곳으로 예비대를 돌리도록 하거나 보급선을 차단하는 결정적인 종심전투를 수행하지 못한 걸로 판단된다. 러시아군의 주요 문제는 후방 지역이 타격 받는게 아니라 보병 부족, 예비대 부족, 소모된 부대를 순환시킬 능력 부족 등 최전방의 병력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데 있었다. 소모와 우크라이나군의 기만 때문에 러시아군이 하르키우 방면 증원과 헤르손 방어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를 받은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우크라이나군의 포병 소요는 한달에 90,000발 정도였다. 여름 기간 내내 이 정도 규모가 유지되었다. 즉 야전포병의 화력에 대한 의존이 매우 컸음을 보여준다. 겨울 기간 중 러시아군의 포병 사격이 크게 감소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원인은 전투의 강도가 약해지고 방어해야 할 전선이 단축되면서 포병 사격 소요가 감소한데 있을 수도 있다. 하이마스로 인해서 러시아군이 탄약 집적소를 하이마스 사거리 밖으로 이동시키고 보급 체계를 재조직 하도록 강요당한 결과 러시아의 군수지원 효율이 감소하고 포병 사격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하이마스가 실전에 투입된 직후인 여름 전역 기간의 몇 개월 사이에 일어났다. 러시아군이 포병 탄약 사용에 제약을 겪은 더 중요한 요인은 가용한 탄약의 재고와 탄약 생산 능력으로 보인다. 지금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수 있다.

수개월에 걸쳐 격렬한 포병 대결이 지속되는 환경에서 소모의 핵심적인 요소는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를 감당하면서 반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돈바스에서 전개된 여름 전역에서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은 소모되었으며 그 결과 러시아군은 하르키우주에서 병력을 빼서 다른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재배치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우크라이나군은 이지움 방면에 국한된 공세를 개시하기 전 6개월에 걸친 소모로 인한 이점과 넓은 전선에 배치된 러시아군의 구조적 결핍에 따른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크라이나군의 하르키우 작전은 정밀 유도 탄약의 효율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기 어렵다. 오히려 지속적인 소모 등의 요인으로 러시아군이 방어하는 면적에 비해 적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군이 기동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러시아군은 7월부터 8월에 걸쳐 우크라이나군이 하르키우 방면에 집결하는걸 관측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부군집단 예하의 우크라이나에 배치한 가장 강력한 지상군 부대들을 남부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재배치하는 결정을 내렸다. 바흐무트 방면에서 싸우던 부대와 중부군집단 소속의 부대들은 증원군을 차출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하르키우 방면에는 심각하게 소모되어 응집력이 결여된, 효과적으로 방어를 할 수 없는 부대들만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르키우 공세 초기 단계에서는 러시아군의 지휘 통제 체계가 와해되는 징후가 있었다. 러시아군 수백명이 생포되고 수많은 장비가 노획당했다. 하지만 러시아군 지휘부가 총체적으로 마비되고 와해되지는 않았다. 초반에 패배를 당하자 서부군집단 사령관은 중부군집단 사령관을 지냈던 인물로 교체됐다. 새로운 서부군집단 사령관은 러시아군에 대한 확고한 통제를 회복하는 임무를 맡았다. 새로운 사령관은 처음에는 오스킬 강을 따라, 다음에는 크라스나 강을 따라 새로운 임시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러시아군은 여러 차례 지연전을 수행했다. 러시아군이 오스킬 강을 건너 감행한 역습은 실패했다. 하지만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조율된 역습을 감행할 수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하르키우 전선에서 러시아군의 지휘 통제 체계가 전면적으로 붕괴되었다고 볼 수 는 없다.

Gady and Kofman, ibid., pp.10~12.

 

헤르손 공세에 대한 평가는 조금 더 부정적입니다. 일단 우크라이나군이 장기간의 소모전을 전개한 결과 큰 피해를 입은 반면 러시아군 주력을 섬멸하는데 실패했다고 지적합니다. 이 지적은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하르키우 전선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군의 헤르손 공세도 준비단계에서 소모전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하르키우와 달리 헤르손 전선의 소모전은 매우 어렵게 진행됐다. 우크라이나군은 헤르손 전선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러시아군은 드니프로 강 때문에 보급지원에 어려움이 있었다. 드니프로강 우안은 크름 반도에서 시작되는 러시아군의 보급선과 두개의 자동차 도로와 두개의 철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헤르손의 러시아군은 인훌레츠 강 때문에 분단되어 있었다. 즉 공세가 시작되면 헤르손 전선은 더 고립될 수 있었다. 수개월간 하이마스로 타격을 당해 러시아군의 보급로는 카호우카 댐을 지나는 교량 한 개와 선박 운행으로 제한되었다. 우크라이나군은 헤르손 방면에 상당한 숫자의 여단을 집중했으며 야포와 하이마스, 드론과 고정익 항공기로 지원했다. 러시아군은 역습을 가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우크라이나군은 주도권을 쥐고 공세를 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르키우 전선과 달리 헤르손 방면은 러시아군의 병력 밀집도가 높았고 여기에는 남부군 집단 및 동부군 집단, 정예 부대인 공수군 등의 정규군 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소집된 예비역과 새로 동원된 병력이 증원되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군은 여러 겹의 러시아군 방어선에 직면했다. 양측은 야포와 로켓포, 공격용 드론을 이용해 힘겨운 소모전을 전개할 수 밖에 없었다.

우크라이나군은 북부, 중부, 남부 등 3개 축선에서 진격하려 했다. 세 방향에서 진격해 드니프로강 우안에 배치된 러시아군을 교란하고 여러 방면에서 포위하여 궁극적으로는 소모된 러시아군이 강을 건너 퇴각하도록 만들려는 의도였다. 우크라이나군은 하르키우 전선과 유사하게 2022년 봄 이래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국지적인 공격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전선의 상황은 유동적이었고 많은 마을이 여러 차례에 걸쳐 주인이 바뀌었다. 우크라이나군은 공세를 개시하기 전 두 달에 걸쳐 포병, 그리고 보다 중요한 하이마스 체계를 이용해 러시아군의 보급 중심지와 교량, 중요한 기간시설을 타격했다. 8월 말 개시된 최초의 공세는 금방 돈좌되었고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우크라이나군은 지휘관을 교체한 뒤 10월 초 공새를 재개해 드니프로 강을 따라 진출하여 돌출부를 형성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인 이 돌파구가 확대되는걸 막으면서 우크라이나군의 차단 작전과 장거리 정밀 타격에도 불구하고 방어 포격을 지속할 수 있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러시아군 지휘관은 방어 전략으로 전환하고 병력을 보존하려고 했다. 이렇게 되자 우크라이나군은 유리하게 소모전을 전개하면서 러시아군이 어쩔 수 없이 철수하도록 강요했다. 러시아군은 수주간에 걸쳐 질서정연하게 철수했으며 운용 가능한 장비들도 함께 가져갔다. 서방의 분석가들은 장거리 정밀 타격으로 러시아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을 거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장거리 정밀타격으로는 헤르손에 배치된 30,000~40,000명 규모의 러시아군이 철수하는걸 방해할 수 없었으며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붕괴시키지도 못했다. 러시아군은 상대적으로 큰 손실 없이 철수했다.

Gady and Kofman, ibid., pp.12~13.

 

2023년 하계 전역을 앞둔 시점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어느 정도 공격 능력을 회복했을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2022년 추계 전역에서 상당한 작전적 성공을 거두긴 했으나 피해도 무시못할 수준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지난 겨울 기간에 우크라이나는 추가로 전투력을 확보하고 러시아군의 국지적인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크라이나군은 크레민나 외곽에서 점진적으로 성과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202211월부터 20232월에 걸쳐 러시아군에게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다. 우크라이나군은 헤르손 전선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해야 했으며, 기후도 악화되었고 러시아군이 바흐무트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장기적인 전쟁 지속 능력을 파괴하기 위해 기간 시설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원을 돌려야 했다. 중포병과 방공포병 탄약과 같은 물자 부족도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 노력을 저해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은 2023년 내내 지속될 걸로 예상된다. 우크라이나는 탄약을 대량으로 소모하고 있는데 탄약 공급과 생산 능력은 안정적이지 못하다. 우크라이나군은 하루에 2,000발에서 4,000발 가량의 포병 탄약을 소모하고 있는데 이것은 외국의 생산능력과 서방 국가들의 비축량을 웃도는 수준이다. 또한 전차포와 야포의 포신과 같은 각종 무기체계가 많은 사격량으로 인해 소모되면서 갈수록 문제가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이 서방으로부터 원조받은 350문의 야포 중 3분의 1 가량이 운용 불가 상태에 있다. 서방 국가들이 생산량을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중기적으로는 부족한 수량을 이미 압박을 받고 있는 미국의 비축분에서 충당해야 한다.

총동원 덕분에 우크라이나군의 인력은 전반적으로 충분한 편이며 대규모의 예비 전력을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훈련을 잘 받고 숙련된 인력이 사망하고 있으며, 특히 우크라이나군의 최정예 부대는 소묘율이 높아서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군은 지역방위군은 제외하고, 동원편성한 예비 부대를 포함해 대략 40개의 기동여단을 보유했다고 추정된다. 미국에서 추산한 사상자 규모와 지금까지 알려진 우크라이나군의 장비 손실을 고려하면 우크라이나군의 기동 여단 중 상당한 숫자가 소진되어 전쟁 중에 재편성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우크라이나군 사령관 잘루즈니 장군과 또 다른 우크라이나 장군은 지난 9월 이런 글을 썼다. “전략적 상황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심할 바 없이 2023년 전반에 걸쳐 연속적인 반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반격을 쉬지 않고 감행한다면 더 이상적일 것이다.” 잘루즈니 장군은 우크라이나군의 의도와 구상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대규모의 공세작전을 수행하려면 1개 혹은 그 이상의 작전(작전-전략적) 집단이 필요하며 작전집단은 각각 10개에서 20개 사이의 제병협동여단으로 편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소모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측 모두에 현저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어느 한 쪽도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한 대규모의 제병협동 기동전을 감행할 수 없어 보인다. 핵심적인 문제는 우크라이나군이 얼마나 빨리 공세에 필요한 잠재력을 회복해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군에 대한 지속적인 지상 공세를 시작할 수 있느냐이다. 현재 편성된 기동여단들의 전투 효율성을 회복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주는 지표 중 하나는 지난 수개월간 양측의 주요 전술 단위는 대대나 여단이 아니라 중대 규모였다는 점이다. 한 서방 분석가는 러시아측의 자료에 근거해 20226월 기준으로 우크라이나군의 중대전술집단은 20~25대의 궤도식 보병전투차량과 10~12대의 전차, 6~12문의 자주포, 최대 6대의 다연장 로켓포, 250~450명의 병력으로 편제된다고 추정했다. 사상자 추정치와 장비 손실 추정치를 감안했을 때 현재 우크라이나군의 중대전술집단의 규모는 더 작아졌을 걸로 보인다.

Gady and Kofman, ibid., pp.14~15.

 

결론 부분에서는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더 많은 원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우크라이나가 봄 기간 중 여러가지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는 한편으로는 또다른 대공세를 위해 부대를 증편하면서 동시에 러시아군에 대한 압박을 지속하려 한다. 우크라이나의 전쟁수행 전략을 분석해 보면 세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1,000km에 달하는 전선에서 러시아군을 더 많이 소모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전선의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압박을 가해 러시아군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러시아군이 충분히 약화되면 기동전 방식의 공세 작전(제병협동 작전으로 수행하는게 이상적이다.)을 시작하는 것이다.

서방의 원조로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크게 개선됐지만 우크라이나군이 추가로 작전적 수준의 돌파를 달성하거나 전략적 성과를 얻을 수 있을 만큼 화력 우세를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인지는 확실치 않다. 전황 분석이 축적될수록 장기간의 대치상태가 될 거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미국 국방부와 다른 동맹국의 국방부는 제병협동훈련 과정을 더 확대하고 더 다양하고 많은 정밀유도무기를 지원해야 한다. 제병협동작전 능력이 크게 향상된다면 우크라이나군은 보병전투차량과 전차, 자주포와 방공무기체계 등 다양한 무기체계를 효과적으로 통합 운용하여 전장에서 질적 우세를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제병협동 훈련과 정밀 타격능력을 질과 양적으로 더 강화한다 하더라도 우크라이나군이 소모전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Gady and Kofman, ibid., pp.17~18.

 

저는 개인적으로 작년 우크라이나군의 성과를 매우 높게 평가했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매우 암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글 또한 많은 분석 중 하나일 뿐이고 현재 우크라이나군의 실태가 어떤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올해 상반기 중에 공세 작전이 시작될 수 있을지, 그리고 공세작전이 시작된다면 어떻게 진행 될 지 지켜봐야 겠지요.

2012년 3월 17일 토요일

The German Air War in Russia - Richard Muller

오늘은 리처드 멀러Richard MullerThe German Air War in Russia라는 좀 오래된 책 이야길 해 볼까 합니다. 1992년에 나왔으니 딱 20년 전에 나온 책이군요. 뜬금없이 예전의 책 이야길 꺼내는 이유는 제임스 코럼James S. Corum의 리히토펜Wolfram Freiherr von Richthofen 평전, Wolfram von Richthofen: Master of the German Air War를 읽고 나서 몇가지 확인해 볼 것이 생각나서 이 책을 꺼내 들었다가 또 읽은 김에 내용 정리나 해 볼까 해서 입니다.

이 책이 나왔던 1990년대 초반에는 학계 외부에서 독일공군이 처음부터 단순히 육군을 지원하는 ‘전술공군’으로 등장했다고 보는 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1982년에 나온 호르스트 보크Horst BoogDie Deutsche Luftwaffenführung 1935-1945가 이러한 인식을 비판하면서 반향을 일으켰지만 독일어라는 언어의 특성상 독일어권 바깥에서는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Die Deutsche Luftwaffenführung 1935-1945는 연구사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번역되지 못했지만 보크의 논의는 영어권의 군사사 연구자들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리처드 멀러의 연구는 보크의 연구에 영향을 받아서 출간될 당시에는 매우 신선한 시각을 보여주었습니다. 멀러의 문제의식은 독소전쟁 당시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항공전은 단순히 지상군 지원작전에 그치지 않고 전략폭격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는데 기존의 저작들은 독일공군을 단순히 전술공군으로 파악하는 틀 안에 갇혀 있어 동부전선 항공전의 다면적인 측면을 설명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독일공군의 작전을 재해석하고 있으며 특히 오랫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던 1943~44년 시기 전략폭격 작전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약간 사족을 더 붙이자면 1999년에 출간된 제임스 코럼의 대표작, The Luftwaffe -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도 호르스트 보크, 리처드 멀러와 유사한 인식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독소전쟁 시기 독일공군의 개별 작전들을 서술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대신 독일공군의 교리가 소련 전선에서 어떻게 적용되었고 어떠한 한계에 부딛혀 패배로 이어졌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전쟁 이전의 독일공군 교리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독일공군이 처음 부터 전술공군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독일공군 참모총장 베버Walther Wever의 군사사상에 대한 재검토에서 드러납니다. 저자는 베버를 단순히 두에Giulio Douhet의 이론을 따르는 전략폭격의 옹호자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베버가 전략폭격에 관심을 가지고 장거리 폭격기 개발에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베버의 사상은 공군의 다양한 가능성에 주목하여 제공권 장악, 지상군에 대한 직간접지원, 그리고 전략폭격에 이르는 다양한 방면에 걸쳐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독일공군의 융통성 있는 교리가 베버의 군사사상에 대한 해석에 어려움을 주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베버의 사상에서 전략폭격은 독일이 1차대전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소모전을 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적의 핵심적인 전략 목표를 타격함으로써 전략적인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것이 두에의 사상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민간인에 대한 테러 폭격은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베버의 사후에도 전략폭격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었음을 강조하면서 단순히 베버의 죽음으로 독일공군이 전술공군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서술은 무리한 비약임을 지적합니다. 아래에서 또 이야기 하겠지만 저자는 이러한 사상이 1943~44년에 독일공군이 동부전선에서 전략폭격으로 선회하게 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봅니다.
반면 독일공군의 상징과 같은 지상군지원에 대해서는 2차대전이 일어날 때 까지도 독일공군 내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우선순위를 부여받았음을 지적합니다. 저자는 1938년 까지도 지상군에 대한 직접지원을 임무로하는 전문 부대가 편성되지 않았으며 독일공군의 주력이었던 중형폭격기 부대는 오히려 차단과 같은 간접지원에 더 적합했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독일 육군 내에서도 1930년대 중반까지는 공군의 간접지원에 만족하는 견해가 우세했다고 강조합니다. 스페인 내전을 통해 지상군 직접지원에 대한 경험이 상당히 축적되었지만 지상군 직접지원을 전담하는 부대의 증강은 매우 더디게 이루어 졌으며 독소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리히토펜이 지휘하는 제8항공군단외에는 지상군 직접지원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독소전쟁의 첫 단계인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 공군의 작전에 대한 서술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개전 초기에는 독일 공군이 교리를 충실하게 따라 독립된 공군으로서 소련 공군을 목표로 한 제공권 장악과 지상군에 대한 ‘간접 지원’에 집중했다고 지적합니다. 당시까지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제공권을 장악한 직후 육군에 대한 직접 지원 보다는 항공차단과 같은 간접 지원의 비중이 더 컸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 입니다. 남부집단군을 지원한 제4항공군이 계획 입안 단계에서 육군측의 지원요청에 대해 제공권 장악이 제4항공군의 최우선 목표이며 이를 위해 지상군 지원을 위한 급강하폭격기 부대의 차출은 최대한으로 제한하려 했다는 점을 예로 드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스페인 내전과 폴란드, 프랑스 전역을 거치면서 독일공군의 근접항공지원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지만 그것을 전담한 것은 리히토펜의 제8항공군단이었고 이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도 근접항공지원과 같은 직접 지원의 상당수는 제8항공군단이 전담하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성을 부각하기 위하여  공군지휘장교Kommandeur der Luftwaffe, KoLuft의 성격에 대해서 서술합니다. 공군은 육군과의 협력을 위해 육군의 사령부에  공군지휘장교를 배속 시켰지만 역할이 육군과의 연락임무와 정찰비행부대를 통제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며 육군에 대한 지원임무는 전적으로 항공군단 사령부 내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단급 부대들에 파견되었던 항공연락장교Fliegerverbindungsoffizier, FliVO도 마찬가지여서 1941년 전역에서는 단순한 연락업무 이외의 역할에 머물렀습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1941년 말에 실시된 몇 차례의 모스크바 공습이 단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전쟁 이전의 항공전 교리에 기반한 작전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점 입니다. 저자는 전쟁 후 헤르만 괴링과 같은 독일 공군 지휘관들이 모스크바 공습을 단순히 히틀러를 의식한 체면치레의 성격을 가진 공격이라고 증언한 것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독일공군의 능력 부족으로 소수의 폭격기를 동원할 수 밖에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적의 “힘의 원천”을 타격할 것을 강조하는 교리에 기반한 것이라고 보는 것 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독일 공군은 독립된 공군에서 점차 육군에 종속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저자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독일의 전쟁 지도자들이 가진 전략적 사고의 한계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1941년의 바르바로사 작전과 마찬가지로 1942년의 블라우 작전도 단지 수개월의 짧은 작전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얻으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독일 공군도 그러한 방향을 추구했습니다. 저자는 독일 공군이 전략적인 작전 능력을 갈수록 상실하게 된 원인이 단지 히틀러를 위시한 수뇌부와 육군에 있다는 전후 독일 공군 지휘관들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1942년 전역이 그러한 주장에 대한 반례라고 보는 것 입니다. 그리고 독일공군 지휘관들, 특히 남부전선의 제4항공군과 제8항공군단의 지휘관들은 독일공군도 “전략적인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남부에 독일 공군의 전력을 집중하는데 적극적으로 찬성했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1942년 전역에서 독일 공군이 육군의 지원에 집중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독일 공군 지휘관들의 이러한 결정은 또다시 실패로 이어집니다. 독일 공군은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 전투에서는 전력의 집중을 통해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여름 전역에서 리히토펜이 지휘한 제4항공군은 크림반도에 투입한 전력보다 그리 많지 않은 500여대의 항공기로 카프카즈에서 스탈린그라드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담당해야 했던 것 입니다. 공세가 진행되면서 독일 육군은 카프카즈로의 진격에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조금씩 전력을 돌릴 수 밖에 없었는데 독일 공군 또한 마찬가지의 문제를 겪게 됩니다. 1941년 전역에서 1개 항공군이 1개 집단군을 지원한 것과 달리 1942년 전역에서는 1개 항공군단이 1개 집단군을 지원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독일 공군은 전략적인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지역에서 전력의 집중을 달성할 수 없었던 것 입니다.

결국 1942년 전역의 실패로 독일 공군이 다른 출구를 찾게 되었고 그것이 소련의 핵심 공업지역에 대한 폭격 계획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입니다. 독일 육군이 전략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동안은 공군이 이를 지원했으나 육군의 작전이 한계에 다다르자 공군의 독자적인 능력으로 전략적인 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다시 공군의 독립적인 지위를 찾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만슈타인의 반격으로 남부전선이 일시적으로 안정된 이후 독일 공군은 폭격기 부대의 재정비에 들어가면서 폭격기 부대를 육군에 대한 직접지원 임무에 투입하는 것을 최소화 합니다. 6월 초 부터 독일 제4항공군과 제6항공군은 고리키, 야로슬라블, 사라토프 등에 대한 야간 폭격을 시작했고 독일 공군은 이 공격, 특히 고리키에 대한 공격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독일 공군 수뇌부는 동부전선에서 보다 효과적인 전략 폭격을 위한 표적 선정과 함께 이에 필요한 능력을 확충하려 합니다.
1943년 8월 예쇼넥이 자살하자 그의 후임으로 공군 참모총장에 임명된 귄터 코르텐Günther Korten은 두가지의 목표를 추구합니다. 먼저 전선의 요구에 따라 지상군에 대한 지원 능력을 강화하는 한편 또 다른 한편으로 공군의 독립적인 역할로서 전략 폭격을 추구하게 된 것 입니다. 그렇지만 코르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준비는 지나치게 늦었고 충분하지가 못했습니다. 독일 공군 폭격기 부대의 주 전력이 He 111이나 Ju 88은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없었고 He 177은 동부전선에 지나치게 늦게 등장했습니다. 또한 갈수록 심각해 지는 연료 부족은 폭격기 부대의 작전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요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1943년 하반기 부터 독일 육군이 소련군의 반격에 밀려하면서 독일 공군 폭격기 부대가 고리키와 같은 전략 목표들을 타격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비행장들을 계속해서 상실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결국 독일 공군이 전략 폭격으로 선회하기에는 그 능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시기 조차 늦었던 것 입니다.

1943년 이후 독일 공군의 지상군 지원 능력은 크게 향상됩니다. 독일 공군이 추구했던 전략 공군으로서의 역할은 좌절되었으나 지상군에 대한 지원은 육군의 요구에 따라 강화됩니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설명한 것 처럼 제공권 장악, 지상군에 대한 직간접지원, 그리고 전략폭격에 이르는 다양한 방면에 걸친 독일 공군의 융통성 있는 교리가 결국에는 독일 공군이 육군의 보조적인 역할로 전락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전쟁 초기와 달리 독일 공군의 육군 지원 능력은 크게 향상됩니다. 특히 1944년에 공군과 육군의 협조 체제가 개편된 것을 지적합니다. 먼저 항공연락장교, 즉 FliVO는 집단군과 야전군 단위의 연락을 담당하고, 군단급과 중점Schwerpunkt 사단의 연락은 항공통신연락장교Fliegerverbindungsoffizier Luftnachrichten, FliVO-LN가 담당하며, 마지막으로 지상군과 지상공격기 부대의 직접적인 연락은 지상공격 항공관제장교Fliegerleitoffizer(Schlacht)가 지휘하는 지상관제단Fliegerleittruppe이 담당하는 체제가 완성된 것 입니다. 저자는 지상공격기가 차지하는 비중도 커져서 1944년 6월에 이르면 동부전선의 독일 공군에서 지상공격기 부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커졌다고 지적합니다. 바르바롯사 작전 개시 당시 폭격기 부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지상공격기 부대의 규모가 작았던 것 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 입니다. 그러나 전략적인 판세가 뒤집힌 상황에서 지상공격기 부대는 큰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결론에서 독일 공군의 실패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보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외부적 요인인데, 그것은 바로 독일의 전략적인 열세입니다. 독일 공군은 육군과 마찬가지로 제한된 전력으로 소련과의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전쟁이 확대될 수록 그 제한된 능력을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소모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독일 공군의 내부적 요인으로서 융통성있는 교리와 독일 공군이 동부전선에서 처한 상황에 대한 독일 공군 지휘관들의 판단에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독일 공군 지휘관들은 전장의 상황에 따라 동부전선에서 독일 육군이 가지는 핵심적인 지위를 인정했으며 결국 독일 육군이 전장의 주도권을 상실한 이후에야 독립된 공군의 역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2011년 11월 12일 토요일

스탈린그라드 3부작에 대한 데이빗 글랜츠의 인터뷰

『독소전쟁사』를 함께 작업했던 분들과 진행하던 데이빗 글랜츠의 스탈린그라드 3부작이 잠시 보류되었습니다. 1권 일부는 번역된 상태였지만 3부작이 아직 완결된 상태도 아닌데다 분량 자체가 많아서 접촉해본 출판사들이 약간 부담을 느낀게 큰 원인이었습니다. 완전히 취소된 것은 아니고 마지막 3부가 나온 뒤에 다시 협상해볼 여지는 있습니다만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다행인 것은 스탈린그라드 3부작 대신 2차대전에 관한 다른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새 프로젝트는 2013년 쯤 출간될 수 있을 것 입니다. 저는 지금 준비중인 책이 예정대로 2012년에 마무리되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스탈린그라드 프로젝트가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합니다. 제 블로그에 들러주시는 분 들 중에서는 이미 원서를 읽으신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번역본을 기다리시던 분도 많으실 것 같아 더 아쉽습니다. 그래서 아직 원서를 읽어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World War 2, 2010년 5/6월호에 실린 “스탈린그라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투하는 데이빗 M 글랜츠(David M. Glantz Fights for the Truth About Stalingrad)”라는 글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이 짧은 인터뷰는 글랜츠가 3부작 중 앞의 두권의 핵심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스탈린그라드 3부작이 어떤 성격의 저술인지 파악하는데 유용한 길잡이 입니다. 인터뷰 자체도 꽤 재미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투하는 데이빗 M 글랜츠”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퇴역 육군 대령 데이빗 글랜츠는 최근 공개된 소련 문헌들을 집대성하여 연구한, 자료들로 가득찬 책을 출간했다. 글랜츠의 목표는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진실에 근거하여” 오랫동안 이어진 신화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글랜츠가 최근 출간한 서사적인 대작, To the Gates of Stalingrad와  Armageddon in Stalingrad는 역사상 가장 장대했던 전투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쓴 것이다. 예를 들면, 글랜츠와 공저자 조나단 하우스는 붉은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던, 소련의 잔혹한 비밀경찰 NKVD의 문헌들을 처음으로 활용한 연구자들이다. “비밀경찰의 자료들은 사기의 저하라던가, 검열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탈영병의 숫자라던가 하는 것들을 놀랄만큼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랜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과거 이 전투의 인간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추론에 의거해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사료에 근거해 쓰여진 적은 없었지요.”

산토로(Gene Santoro) : 진실에 근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글랜츠 : 제 뜻은, 신화를 걷어내고 실제 사실의 복원을 시작하기 위해서 양측의 기록을 검토한다는 것 입니다. 전쟁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 어느 정도까지 수행되었는지 등에 대해 충분한 결론을 얻지 못한다면 전쟁의 전체적인 맥락하에서 정치적, 경제적, 또는 사회적인 요소들에 대해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작전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모두 군사적인 현실이라는 구조에 속한 것 입니다.

산토로 : 왜 스탈린그라드를 선택하셨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책은 1950년대 초반 이래 수백권에 달합니다. 초기의 많은 저작들은 독일측의 회고록이나 특정한 독일측 인물에 관한 것 이었습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저작들은 근본적으로 앞서 언급한 독일측 자료에다 주로 소련 제62군을 지휘했던 바실리 추이코프의 회고록과 같은 제한된 소련측 자료에 의존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저작들은 상당히 정확하고 훌륭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저작들은 스탈린그라드 전역의 전체적인 측면과 스탈린그라드의 시가전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동일한 결론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들은 많은 부분이 잘못된 것 입니다.

산토로 : 예를 들자면?

글랜츠 : 한가지 일반적인 관점을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당시 소련군이 독일군에 맞서면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은 것과 달리 1942년 블라우 작전 당시 스탈린은 땅을 내주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소련군을 매우 빨리 퇴각하게 했으며 보다 방어에 용이한 선 까지 물러선 뒤에는 반격에 나섰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틀린 것 입니다. 스탈린은 블라우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 부터 물러서지 말고 싸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전쟁 전 기간 동안 스탈린의 전략은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언제나 어디서건 공격하는 것 이었습니다.

산토로 : 붉은군대는 스탈린그라드로 밀려가는 와중에도 공격을 했다는 것 인가요?

글랜츠 : 널리 퍼진 믿음과는 달리 블라우 작전의 초기에는 소련군의 역습, 반격, 심지어는 대규모의 반격에 의해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반격은 7월에 독일군의 북익에 가해졌습니다. 스탈린은 1941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전차군과 그 밖의 새롭게 편제된 부대를 투입했습니다. 이러한 반격에는 소련군이 500에서 1,000여대 정도의 전차를 투입해 대규모의 전차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산토로 : 소련군의 반격은 어떠한 성과를 거두었습니까?

글랜츠 : 최초의 반격은 매우 형편없이 지휘되었고 그랬기 때문에 많은 것을 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독일군에게 소모를 강요한 것을 제외한다면. 7월 말에도 반격이 감행되었습니다. 두개의 새로 편성된 소련 전차군이 돈강 만곡부에 투입되었고 새로 편성된 62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감행했습니다. 대규모의 전차전이 거의 3주간에 걸쳐 전개되었으며 독일군의 계획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산토로 : 왜 그랬습니까?

글랜츠 : 공세에 나선 독일군의 보병 전력이 1941년 보다 약화되어 있었으며 기갑 부대의 진격을 뒤따르는 많은 보병 부대가 루마니아군이나 이탈리아군이었는데 이들은 히틀러를 위해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942년에는 소련군이 포위되어 전투력을 상실하더라도 병력은 포위망을 벗어나 잠적하거나 나중에 붉은군대에 재합류 할 수 있었습니다.

산토로 : 독일의 계획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글랜츠 : 독일 제6군이 진격하면서 양 측방, 특히 돈 강을 따라 이어진 선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6군의 병력 중 진격에 투입할 수 있는 규모는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독일 제6군이 돈강 만곡부를 정리한 뒤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습니다. 이 때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일 것 입니다. 독일군의 계획은 돈 강을 도하한 뒤 기갑군단을 선봉에 세운 양익으로 볼가강까지 진격하여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를 각각 북쪽과 남쪽방향에서 진입하여 전투를 치르지 않고 점령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산토로 : 무엇이 독일군을 저지했습니까?

글랜츠 : 독일군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소련군은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의 반격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고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북익의 독일 기갑군단을 완전히 붙잡아 둘 수 있었고 이 기갑군단이 스탈린그라드 방향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소련군의 반격은 독일군 3개 사단이 40km에 걸쳐 방어에 묶여있도록 한 것 입니다. 이들은 최후의 시가전이 전개된 스탈린그라드 북쪽 외곽의 공업지대로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군 공세의 남익은 계획대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소련군이 취한 대응이 독일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의 계획을 방해했습니다.

산토로 : 파울루스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글랜츠 : 파울루스가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제압하기 위해 투입할 수 있었던 전력은 보병군단 1개에 불과했습니다. 이 군단은 3개 보병사단과 약간의 지원부대로 구성되었고 제6군 전력의 3분의1 정도였습니다.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에 기갑부대를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병부대를 서쪽에서 부터 돌입시켜 블럭 단위, 도로 단위로 진격해야 했습니다. 파울루스는 기갑사단들이 소모될 때 까지 공격에 기갑부대를 선봉에 세우려고 했습니다. 독일 제6군이 시가지 중앙을 장악하고 북쪽으로 공격하려 했을 무렵 독일 기갑전력은 소모되었고 소모전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1942년 10월 쯤되면 독일군의 연대는 대대규모가, 사단은 연대규모가 되었고 제6군은 기껏해야 군단 규모의 전력이었을 겁니다.

산토로 : 소련군의 전략은 무엇이었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그라드가 함락되지 않도록 병력을 시가지로 밀어넣는 것 이었습니다. 이들은 희생양이었습니다. 1만명의 사단이 다음날이면 500명만 남곤 했습니다. 소련군의 많은 사단이 소모되고 남은 수준의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의 저작에서 정예부대로 묘사되는 제13근위소총병사단은 시가전이 일어나기 두 달 전에 괴멸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절반정도의 훈련만 마치고 장비는 편제의 3분의1 만 갖춘채로 투입되었습니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로 유명해진 제284소총병사단은 3개 연대 중 1개 연대만 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무하마드 알리의 로프-어-도프(rope-a-dope : 로프에 기대서 상대방의 공격을 흡수하며 지치기를 기다리는 전법) 전술과 같았습니다. 소련군 총사령부, 스타브카(СТАВКА)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예료멘코와 정치위원 흐루쇼프가 볼가강을 건너 스탈린그라드로 가지 못하게 한 것은 잔인한 일 이었습니다. 총사령부는 예료멘코와 흐루쇼프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되어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산토로 : 독일군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에겐 고기 분쇄기였습니다. 투입하는 사단 마다 소모되었고 이때문에 측면에서 새로운 사단을 차출해야 했습니다. 독일 제6군의 손실규모를 살펴 보면 대부분의 사단이 전투 초기에는 전투가능이라고 평가받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만 지나도 이 사단들은 약체화 되었거나 소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소모율이 기록적인 수준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이 시가지를 황폐화시킨 것은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하는 요인이었을 뿐 입니다. 11월 초가 되면 독일군은 사단들이 소모된 상황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진정한 소모전이었던 겁니다.

산토로 : 독일군은 어떻게 공세를 계속해 나갔습니까?

글랜츠 : 독일군은 B집단군에 소속된 공병대대를 모두 긁어모았습니다. 이들은 11월 11일의 마지막 공세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랬기 대문에 이탈리아군과 루마니아군을 제외하면 돈 강을 따라 이어지는 선을 방어할 병력이 없었습니다. 헝가리군도 이미 최전선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B집단군의 좌익은 동맹군으로 구성된 집단군이었던 셈입니다. 소련군은 정보를 통해 이러한 약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이 지점에 반격을 가했습니다.

산토로 : 스탈린은 어떠한 유형의 지도자였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이 전쟁 첫 해에는 사소한 부분 까지 간섭하다가 스탈린그라드 전역이 전개될 무렵에는 군지휘관들에게 결정을 맡기고 이에 따라 소련군 지휘관들은 큰 범주에서만 스탈린의 지휘를 받으면서 전쟁을 치렀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 입니다. 스탈린은 전쟁 기간 내내 통제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1941년에 스탈린의 완고함과 반격에 대한 고집은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했지만 붉은군대가 한번 패배를 겪으면 와해될 것이라는 히틀러의 중요한 가정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1942년 레닌그라드 전투와 모스크바 전투를 겪고 난 뒤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무자비하게 인력을 소모하더라도 계속 싸우면  숫적으로 열세인 적이 소모될 것이라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작전은 대략 1400만명의 군 사망자(military dead)를 냈습니다. 이러한 댓가를 치르면서 훨씬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전투로 단련된 우수한 독일 국방군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 입니다.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러일전쟁이 슐리펜의 전쟁 구상에 끼친 영향

배군님이 봉천회전에 대한 글을 연재하셔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러시아쪽의 시각에서 러일전쟁을 바라본 서적은 조금 읽었지만 일본의 시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던 차에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1 (B군)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2 (B군)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3(完) (B군)

그리고 봉천회전 마지막 편을 읽다 보니 러일전쟁에 대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의 견해가 나와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러일전쟁의 결과는 슐리펜의 군사적 계획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전략적인 면에서 러일전쟁이 슐리펜의 전쟁 계획에 가져온 영향은 결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1904년과 1905년의 사건들은 슐리펜에게 독일이 처한 딜레마에 대한 전략적 해결방법이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에서 전쟁에 돌입했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러시아군이 동부로 이동하기만 하면 단기간에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실제 결과는 러시아군의 완패(Fiasco)가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양군은 서로 엎치락 뒤치락 했지만 점차 러시아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러시아군은 점차 만주 내륙으로 밀려났으며 뤼순이 함락되고 발틱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섬멸 당하고 국내에서는 혁명에 직면하면서 러시아는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군은 봉천회전 에서만 10만의 병력을 상실했다.

전쟁의 진행과정은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능력과 독일의 전략적 상황을 판단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05년 6월, 슐리펜은 독일 수상에게 러시아군의 한심한 상황을 묘사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오랫동안 러시아군에는 유능한 지휘관이 없으며 러시아 장교단의 대다수는 극도로 부족한 능력만을 가지고 있고 부대는 부족한 훈련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결점은 러시아군의 끈기와 충성심에 의해 어느 정도 상쇄되는 것으로 믿는다고 적었다. 아시아에서의 전쟁은 이러한 믿음이 잘못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소식에 따르면 러시아군 병사들은 장교에 예우를 갖추지도 않았으며 명령에 따르지도 않았다. 더욱이 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의 훈련 수준은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것 보다 더 형편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의 가치는 극히 미미하며 가까운 미래에 러시아군이 효율적인 전투 부대가 될 전망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동아시아의 전쟁은 러시아군이 알려진 정보에 따라 기존에 추정되었던 것 보다 우수하지 못하며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군은 효율적으로 바뀌기는커녕 더 악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러시아군은 모든 결연함(Freudigkeit), 모든 신뢰감(Vertrauen), 모든 복종심을 잃었습니다.
러시아군이 개선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는 무척 의문스럽습니다. 러시아군은 개혁을 실행할 정도의 자각(Selbsterkenntnis)이 없습니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패배의 원인을 군대 자체의 부족함(Unvollkommenheiten)에서 찾지 않고 적의 숫적인 우세나 특정한 지휘관들의 무능함에서 찾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에는 필요한 개혁을 실행하고 사기를 굳건하게 할 만한 능력을 갖춘 인재가 없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의 허약함에 대한 믿음으로 그때 까지 실행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전략적 대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회의 창이 열렸다. 슐리펜은 이제 독일육군의 대부분을 서부전선으로 돌리고 크게 약화되고 문제점 투성이인 러시아군으로부터 동부를 방어하는 데는 소수의 부대만을 남겨도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Robert T. Foley,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p.67~68

이렇게 러일전쟁의 결과는 독일의 양면전쟁 계획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결과는 전술적인 차원에서는 슐리펜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견해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슐리펜은 1905년 11월과 12월에 실시한 대규모 워게임(Kriegsspiel) 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슐리펜은 그 다음(훈련이 끝난 뒤)에 훈련에 참가한 장교들에게 미래 전쟁의 성격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생각을 이야기 했다. 그는 미래에는 작전을 전개할 때 진지전의 수렁에 더 쉽게 빠져들 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만주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 점을 잘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기동 전투를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도록 노력해야 하며 전쟁을 ‘1년 혹은 2년’간의 결정적이지 못한 소모전으로 끌고 가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장기전은 전쟁 당사국 모두의 소모와 경제적 혼란만을 가져오게 될 뿐이다. 그러나 설사 진지전의 상황이 오더라도 긴 방어선의 어느 한 곳에는 공격자가 돌파를 달성할 수 있는 취약점이 존재할 것이다. 독일군은 전체적으로 기동 작전을 통해 적의 측면을 포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슐리펜은 단순한 우회 기동을 실시해서는 안되며 한편으로는 적의 정면을 공격해 방어선에 고착시키는 동시에 강력한 부대로 적의 측면으로 포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210

슐리펜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전통적 군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동을 통한 승리를 추구했으며 전장의 상황이 급변하더라도 반드시 기동전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는 점을 굳게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 하듯 기동전은 작전 단위의 문제점까지는 해결 해 줄 수는 있어도 결코 전략적 차원의 문제에 대한 대안은 아니라는 점 입니다. 슐리펜은 러일전쟁 이전 까지 양면전쟁 상황에서 소모전을 피할 방안을 강구했습니다. 슐리펜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하자 사실상 서부전선만의 전쟁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슐리펜이 기대한 상황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고 독일은 새로운 전쟁에서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소모전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독일은 특히 동부전선을 중심으로 몇 차례의 기동작전을 통해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이러한 승리들이 독일의 전략적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못 했습니다.

2009년 4월 29일 수요일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군사사에 관심 없는 일반인이라도 ‘전격전’이라는 단어는 들어 봤을 정도로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기동전(Bewegungskrieg)’과 ‘섬멸전(Vernichtungskrieg)’ 개념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짧은 시기에 독일의 일부 군사사상가들은 미래에는 ‘기동전’과 ‘섬멸전’을 통한 전쟁의 승리가 어려워 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1차대전을 경험한 독일 군인들은 ‘기동전’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며 1차대전에서 패배한 것은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한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은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이질적 존재였던 소모전략(Ermattungsstrategie)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1980년대에 새로 공개된 독일 사료를 바탕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자료를 통해 흥미로운 논의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보고 있는 것은 소모전략이 등장하는 과정입니다.
독일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 der Ältere)나 유명한 군사사가이자 군사평론가였던 델브뤽(Hans Delbrück)은 보불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몇 차례의 결정적인 전술적 승리를 통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러일전쟁의 결과 델브뤽은 자신의 견해를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수백만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유럽국가들이 전쟁을 할 경우 한 번의 전투로 수십만의 적을 섬멸하더라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점은 너무나도 명백했습니다. 유럽국가들간의 전쟁에 비해 작은 규모였던 러일전쟁에서 조차 러시아와 일본 양 측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델브뤽은 보불전쟁과 러일전쟁 등을 관찰한 결과 미래의 전쟁은 소모전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부에서는 기동전 사상이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 외부의 이질적인 사상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 했습니다.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현대전의 변화된 환경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우수한 전술로서 충분히 단기간의 결정적 섬멸전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슐리펜은 델브뤽과 달리 러일전쟁을 통해 신속한 승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전술적으로 무능하고 전쟁의 패배로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양면전쟁이 발발하더라도 프랑스를 신속히 격파한 다음에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쉽게 붕괴하지 않았고 러시아군의 동원속도는 슐리펜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결국 전쟁 전에 예상했던 신속한 승리는 오지 않았고 독일군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저자는 다음으로 마른 전투의 패배 이후 새로이 총참모장이 된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이 소모전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팔켄하인은 독일군 장교단의 주류와는 달리 ‘기동전’과 ‘섬멸전’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총참모장에 임명될 당시 빌헬름 2세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지만 팔켄하인은 근본적으로 독일군 고위장교단 내에서 비주류였으며 결국은 기동전 지지자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됩니다.
팔켄하인의 전략구상은 서부전선에서의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와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을 맺은 뒤 동부전선의 러시아를 정리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저자는 1915년의 경험을 통해 팔켄하인이 소모전으로 프랑스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주장합니다. 프랑스군이 1915년 9월에 야심차게 실시한 대공세 당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충분한 예비대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공세 초기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주면서 전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동부전선에서는 1915년의 대공세를 통해 러시아군에게 포로 1백만을 포함한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팔켄하인은 이를 통해 1916년에는 서부전선에서 대규모의 소모전을 벌여 프랑스를 전열에서 이탈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저자는 1916년 전역에 대한 설명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몇 가지 더 하고 있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주장은 영국군의 솜 공세는 팔켄하인이 미리 예측하고 자신의 소모전략의 일부로 포함시켰다는 것 입니다. 팔켄하인의 원래 계획은 베르덩 공세를 통해 프랑스군을 소모시키며 동시에 프랑스가 영국에 구원 공격을 요청하도록 하는 것 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군이 구원공격에 나서면 1915년 가을과 마찬가지로 방어를 통해 영국군을 소모시킨 뒤 그동안 확보해 둔 전략예비를 통해 반격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팔켄하인의 구상은 독일군의 전투력은 과대평가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상태에서 이루어 진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가 없었습니다. 베르덩 공세는 예상보다 완강한 프랑스군의 저항으로 독일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영국군의 공세는 팔켄하인의 예측보다 늦게 이루어 진데다 결정적으로 예상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팔켄하인이 반격에 투입하기 위해 확보한 예비대들은 영국군의 솜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소모되었습니다. 결국 원래부터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1916년의 실패를 계기로 반대파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총참모장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전후 독일의 역사서술에서 팔켄하인이 정치적 반대파, 특히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등 ‘섬멸전’ 지지자들에 의해 폄하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총참모장 해임과 함께 전후 독일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지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탄넨베르크’의 영웅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섬멸전’ 옹호자들은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이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살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소모전’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섬멸전’에 입각해 미래의 전쟁을 준비한 독일군은 2차대전에서 또 다시 ‘소모전’에 의해 패배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기동전’과 ‘섬멸전’은 작전단위의 방법론으로 적당한 것이지 ‘전략’ 단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1차대전 이후의 독일 군사사상가들은 현대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작전’의 수단을 ‘전략’에 까지 확대 적용한 결과 철저한 패배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폴리의 연구는 풍부한 자료에 근거해 새롭고 흥미로운 주장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전후한 시기 독일의 군사사상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기동전’과 ‘섬멸전’에만 주목한 나머지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소모전’에 대해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1차대전 당시 팔켄하인의 전략이 단순히 팔켄하인 개인의 돌출적인 산물이 아니라 19세기 말 이후의 군사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팔켄하인의 군사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고찰이 부족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잡담 하나. 독일 군사사상의 발전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싶으신 분은 시티노(Robert M. Citino)의 The German Way of War: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를 추천합니다.
시티노의 저작들에 대해서는 채승병님이 쓰신 ‘전격전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2006년 12월 14일 목요일

독일군 정보부의 삽질과 베르됭의 대재앙

과거의 독일군은 작전과 전술 분야에서는 다른 어떤 나라의 군대보다도 우수하다고 평가받았지만 정보부문에 있어서는 좀 뒤떨어졌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입니다. 사실 1~2차 대전을 통틀어 독일군은 자신들의 잘못된 정보 때문에 피박을 본 사례가 제법 있지요. 아무리 주먹을 잘 써도 앞이 잘 안보이면 별 수 없으니.

베르됭 전투는 이런 점에서 독일의 형편없는 정보력이 초래한 재앙의 대표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당초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하고 소모전을 벌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뭔가 문제가 있는 시각이었습니다. 독일육군총사령부(OHL)의 정보국(Nachrichten-abteilung)은 전쟁 말기 까지도 20명 내외의 정보 장교와 비슷한 수의 보조 인력으로 운영되고 있어 업무부담이 심각했고 전선에서 입수되는 정보들을 효율적으로 분석할 수 없었습니다. 형편없는 정보 능력에다가 상대방에 대한 과소평가까지 곁들여 지니 그야말로 상황은 금상첨화였지요.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전투 초반에는 병력 우세와 기습효과로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프랑스측도 병력을 증원하면서 팔켄하인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출혈을 강요하는 소모전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쌍방의 손실 교환비가 독일 1에 프랑스 1.1 수준이니 이건 별로 남는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독일군이 확보한 예비대라고는 보병사단 10개가 전부였는데 당시 보병사단의 평균 소모율(솜 전투의 영국군 손실을 참고)을 고려한다면 이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독일군의 공세는 사실상 공격 개시 일주일 밖에 안된 2월 28일에 둔화됐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소모전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팔켄하인은 공세 초기의 막대한 손실 때문에 공세 초기부터 불안해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켄하인은 3월 초 주공을 담당한 제 5군에 2차 공세를 명령합니다. 정보기관이 프랑스군의 손실을 과대 평가하고 예비대의 규모를 과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독일군이 프랑스의 손실을 과대 평가한데는 프랑스측의 사단 교대가 독일보다 좀 더 빈번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측은 전선에서 물러나는 프랑스군 사단들을 모두 괴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것으로 판단했고 3월 초 프랑스군의 손실이 독일측의 3배에 달한다고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이 잘못된 정보는 베르됭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3월 30일, 팔켄하인은 제 5군 사령관에게 “아군의 손실이 적보다 적은 한 공세를 지속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물론 제 5군 사령부에서는 일선 부대들의 전투력이 한계점을 넘어서 위험수준이 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 10 예비보병사단장 바르펠트(Max von Bahrfeldt) 소장은 “전투 일주일 만에 사단의 장교와 사병들은 무기력과 탈진상태에 도달했다. (상부의) 수많은 요구는 인간의 체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라고 토로할 정도였습니다. 제 5군 사령관인 빌헬름 황태자는 팔켄하인에게 공격 중지를 요청했지만 팔켄하인은 이를 묵살해 버립니다.

5월에 독일군의 손실은 25만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측은 프랑스군의 손실이 52만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었고 6월 초에는 프랑스군의 손실이 80만에 달한다고 오판했습니다. 그나마 영국군이 솜에서 대공세를 개시 함으로서 독일군은 베르됭에서 공세를 중지하게됩니다. 만약 연합군측이 수동적으로 방어만 하고 있었다면 팔켄하인은 계속해서 베르됭에 병력을 밀어 넣으면서 소모전을 계속했을지도 모를 일 입니다. 잘못된 정보가 계속해서 생산되는 한.

어쨌건 잘못된 정보에 의존해 맹목적으로 공격을 계속한 결과 독일은 336,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프랑스는 365,000명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독일군은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를 붕괴시킨다는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전투를 개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들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멍청한 어르신들을 모신 덕에 병사들만 죽어나간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