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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7일 토요일

The German Air War in Russia - Richard Muller

오늘은 리처드 멀러Richard MullerThe German Air War in Russia라는 좀 오래된 책 이야길 해 볼까 합니다. 1992년에 나왔으니 딱 20년 전에 나온 책이군요. 뜬금없이 예전의 책 이야길 꺼내는 이유는 제임스 코럼James S. Corum의 리히토펜Wolfram Freiherr von Richthofen 평전, Wolfram von Richthofen: Master of the German Air War를 읽고 나서 몇가지 확인해 볼 것이 생각나서 이 책을 꺼내 들었다가 또 읽은 김에 내용 정리나 해 볼까 해서 입니다.

이 책이 나왔던 1990년대 초반에는 학계 외부에서 독일공군이 처음부터 단순히 육군을 지원하는 ‘전술공군’으로 등장했다고 보는 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1982년에 나온 호르스트 보크Horst BoogDie Deutsche Luftwaffenführung 1935-1945가 이러한 인식을 비판하면서 반향을 일으켰지만 독일어라는 언어의 특성상 독일어권 바깥에서는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Die Deutsche Luftwaffenführung 1935-1945는 연구사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번역되지 못했지만 보크의 논의는 영어권의 군사사 연구자들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리처드 멀러의 연구는 보크의 연구에 영향을 받아서 출간될 당시에는 매우 신선한 시각을 보여주었습니다. 멀러의 문제의식은 독소전쟁 당시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항공전은 단순히 지상군 지원작전에 그치지 않고 전략폭격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는데 기존의 저작들은 독일공군을 단순히 전술공군으로 파악하는 틀 안에 갇혀 있어 동부전선 항공전의 다면적인 측면을 설명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독일공군의 작전을 재해석하고 있으며 특히 오랫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던 1943~44년 시기 전략폭격 작전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약간 사족을 더 붙이자면 1999년에 출간된 제임스 코럼의 대표작, The Luftwaffe -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도 호르스트 보크, 리처드 멀러와 유사한 인식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독소전쟁 시기 독일공군의 개별 작전들을 서술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대신 독일공군의 교리가 소련 전선에서 어떻게 적용되었고 어떠한 한계에 부딛혀 패배로 이어졌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전쟁 이전의 독일공군 교리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독일공군이 처음 부터 전술공군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독일공군 참모총장 베버Walther Wever의 군사사상에 대한 재검토에서 드러납니다. 저자는 베버를 단순히 두에Giulio Douhet의 이론을 따르는 전략폭격의 옹호자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베버가 전략폭격에 관심을 가지고 장거리 폭격기 개발에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베버의 사상은 공군의 다양한 가능성에 주목하여 제공권 장악, 지상군에 대한 직간접지원, 그리고 전략폭격에 이르는 다양한 방면에 걸쳐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독일공군의 융통성 있는 교리가 베버의 군사사상에 대한 해석에 어려움을 주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베버의 사상에서 전략폭격은 독일이 1차대전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소모전을 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적의 핵심적인 전략 목표를 타격함으로써 전략적인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것이 두에의 사상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민간인에 대한 테러 폭격은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베버의 사후에도 전략폭격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었음을 강조하면서 단순히 베버의 죽음으로 독일공군이 전술공군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서술은 무리한 비약임을 지적합니다. 아래에서 또 이야기 하겠지만 저자는 이러한 사상이 1943~44년에 독일공군이 동부전선에서 전략폭격으로 선회하게 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봅니다.
반면 독일공군의 상징과 같은 지상군지원에 대해서는 2차대전이 일어날 때 까지도 독일공군 내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우선순위를 부여받았음을 지적합니다. 저자는 1938년 까지도 지상군에 대한 직접지원을 임무로하는 전문 부대가 편성되지 않았으며 독일공군의 주력이었던 중형폭격기 부대는 오히려 차단과 같은 간접지원에 더 적합했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독일 육군 내에서도 1930년대 중반까지는 공군의 간접지원에 만족하는 견해가 우세했다고 강조합니다. 스페인 내전을 통해 지상군 직접지원에 대한 경험이 상당히 축적되었지만 지상군 직접지원을 전담하는 부대의 증강은 매우 더디게 이루어 졌으며 독소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리히토펜이 지휘하는 제8항공군단외에는 지상군 직접지원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독소전쟁의 첫 단계인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 공군의 작전에 대한 서술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개전 초기에는 독일 공군이 교리를 충실하게 따라 독립된 공군으로서 소련 공군을 목표로 한 제공권 장악과 지상군에 대한 ‘간접 지원’에 집중했다고 지적합니다. 당시까지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제공권을 장악한 직후 육군에 대한 직접 지원 보다는 항공차단과 같은 간접 지원의 비중이 더 컸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 입니다. 남부집단군을 지원한 제4항공군이 계획 입안 단계에서 육군측의 지원요청에 대해 제공권 장악이 제4항공군의 최우선 목표이며 이를 위해 지상군 지원을 위한 급강하폭격기 부대의 차출은 최대한으로 제한하려 했다는 점을 예로 드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스페인 내전과 폴란드, 프랑스 전역을 거치면서 독일공군의 근접항공지원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지만 그것을 전담한 것은 리히토펜의 제8항공군단이었고 이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도 근접항공지원과 같은 직접 지원의 상당수는 제8항공군단이 전담하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성을 부각하기 위하여  공군지휘장교Kommandeur der Luftwaffe, KoLuft의 성격에 대해서 서술합니다. 공군은 육군과의 협력을 위해 육군의 사령부에  공군지휘장교를 배속 시켰지만 역할이 육군과의 연락임무와 정찰비행부대를 통제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며 육군에 대한 지원임무는 전적으로 항공군단 사령부 내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단급 부대들에 파견되었던 항공연락장교Fliegerverbindungsoffizier, FliVO도 마찬가지여서 1941년 전역에서는 단순한 연락업무 이외의 역할에 머물렀습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1941년 말에 실시된 몇 차례의 모스크바 공습이 단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전쟁 이전의 항공전 교리에 기반한 작전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점 입니다. 저자는 전쟁 후 헤르만 괴링과 같은 독일 공군 지휘관들이 모스크바 공습을 단순히 히틀러를 의식한 체면치레의 성격을 가진 공격이라고 증언한 것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독일공군의 능력 부족으로 소수의 폭격기를 동원할 수 밖에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적의 “힘의 원천”을 타격할 것을 강조하는 교리에 기반한 것이라고 보는 것 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독일 공군은 독립된 공군에서 점차 육군에 종속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저자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독일의 전쟁 지도자들이 가진 전략적 사고의 한계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1941년의 바르바로사 작전과 마찬가지로 1942년의 블라우 작전도 단지 수개월의 짧은 작전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얻으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독일 공군도 그러한 방향을 추구했습니다. 저자는 독일 공군이 전략적인 작전 능력을 갈수록 상실하게 된 원인이 단지 히틀러를 위시한 수뇌부와 육군에 있다는 전후 독일 공군 지휘관들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1942년 전역이 그러한 주장에 대한 반례라고 보는 것 입니다. 그리고 독일공군 지휘관들, 특히 남부전선의 제4항공군과 제8항공군단의 지휘관들은 독일공군도 “전략적인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남부에 독일 공군의 전력을 집중하는데 적극적으로 찬성했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1942년 전역에서 독일 공군이 육군의 지원에 집중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독일 공군 지휘관들의 이러한 결정은 또다시 실패로 이어집니다. 독일 공군은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 전투에서는 전력의 집중을 통해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여름 전역에서 리히토펜이 지휘한 제4항공군은 크림반도에 투입한 전력보다 그리 많지 않은 500여대의 항공기로 카프카즈에서 스탈린그라드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담당해야 했던 것 입니다. 공세가 진행되면서 독일 육군은 카프카즈로의 진격에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조금씩 전력을 돌릴 수 밖에 없었는데 독일 공군 또한 마찬가지의 문제를 겪게 됩니다. 1941년 전역에서 1개 항공군이 1개 집단군을 지원한 것과 달리 1942년 전역에서는 1개 항공군단이 1개 집단군을 지원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독일 공군은 전략적인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지역에서 전력의 집중을 달성할 수 없었던 것 입니다.

결국 1942년 전역의 실패로 독일 공군이 다른 출구를 찾게 되었고 그것이 소련의 핵심 공업지역에 대한 폭격 계획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입니다. 독일 육군이 전략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동안은 공군이 이를 지원했으나 육군의 작전이 한계에 다다르자 공군의 독자적인 능력으로 전략적인 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다시 공군의 독립적인 지위를 찾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만슈타인의 반격으로 남부전선이 일시적으로 안정된 이후 독일 공군은 폭격기 부대의 재정비에 들어가면서 폭격기 부대를 육군에 대한 직접지원 임무에 투입하는 것을 최소화 합니다. 6월 초 부터 독일 제4항공군과 제6항공군은 고리키, 야로슬라블, 사라토프 등에 대한 야간 폭격을 시작했고 독일 공군은 이 공격, 특히 고리키에 대한 공격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독일 공군 수뇌부는 동부전선에서 보다 효과적인 전략 폭격을 위한 표적 선정과 함께 이에 필요한 능력을 확충하려 합니다.
1943년 8월 예쇼넥이 자살하자 그의 후임으로 공군 참모총장에 임명된 귄터 코르텐Günther Korten은 두가지의 목표를 추구합니다. 먼저 전선의 요구에 따라 지상군에 대한 지원 능력을 강화하는 한편 또 다른 한편으로 공군의 독립적인 역할로서 전략 폭격을 추구하게 된 것 입니다. 그렇지만 코르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준비는 지나치게 늦었고 충분하지가 못했습니다. 독일 공군 폭격기 부대의 주 전력이 He 111이나 Ju 88은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없었고 He 177은 동부전선에 지나치게 늦게 등장했습니다. 또한 갈수록 심각해 지는 연료 부족은 폭격기 부대의 작전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요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1943년 하반기 부터 독일 육군이 소련군의 반격에 밀려하면서 독일 공군 폭격기 부대가 고리키와 같은 전략 목표들을 타격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비행장들을 계속해서 상실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결국 독일 공군이 전략 폭격으로 선회하기에는 그 능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시기 조차 늦었던 것 입니다.

1943년 이후 독일 공군의 지상군 지원 능력은 크게 향상됩니다. 독일 공군이 추구했던 전략 공군으로서의 역할은 좌절되었으나 지상군에 대한 지원은 육군의 요구에 따라 강화됩니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설명한 것 처럼 제공권 장악, 지상군에 대한 직간접지원, 그리고 전략폭격에 이르는 다양한 방면에 걸친 독일 공군의 융통성 있는 교리가 결국에는 독일 공군이 육군의 보조적인 역할로 전락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전쟁 초기와 달리 독일 공군의 육군 지원 능력은 크게 향상됩니다. 특히 1944년에 공군과 육군의 협조 체제가 개편된 것을 지적합니다. 먼저 항공연락장교, 즉 FliVO는 집단군과 야전군 단위의 연락을 담당하고, 군단급과 중점Schwerpunkt 사단의 연락은 항공통신연락장교Fliegerverbindungsoffizier Luftnachrichten, FliVO-LN가 담당하며, 마지막으로 지상군과 지상공격기 부대의 직접적인 연락은 지상공격 항공관제장교Fliegerleitoffizer(Schlacht)가 지휘하는 지상관제단Fliegerleittruppe이 담당하는 체제가 완성된 것 입니다. 저자는 지상공격기가 차지하는 비중도 커져서 1944년 6월에 이르면 동부전선의 독일 공군에서 지상공격기 부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커졌다고 지적합니다. 바르바롯사 작전 개시 당시 폭격기 부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지상공격기 부대의 규모가 작았던 것 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 입니다. 그러나 전략적인 판세가 뒤집힌 상황에서 지상공격기 부대는 큰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결론에서 독일 공군의 실패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보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외부적 요인인데, 그것은 바로 독일의 전략적인 열세입니다. 독일 공군은 육군과 마찬가지로 제한된 전력으로 소련과의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전쟁이 확대될 수록 그 제한된 능력을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소모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독일 공군의 내부적 요인으로서 융통성있는 교리와 독일 공군이 동부전선에서 처한 상황에 대한 독일 공군 지휘관들의 판단에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독일 공군 지휘관들은 전장의 상황에 따라 동부전선에서 독일 육군이 가지는 핵심적인 지위를 인정했으며 결국 독일 육군이 전장의 주도권을 상실한 이후에야 독립된 공군의 역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2011년 9월 17일 토요일

동맹국들의 조병창이 될 수 없었던 독일

2차대전 당시 외교라는 요소는 독일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것 보다는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당장 첫 번째 동맹국으로 전쟁에 뛰어든 이탈리아 부터가 시작부터 독일의 지원에 기대는 형국이었으니 말입니다. 이탈리아가 가진 전력 중 독일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을 해군력 조차 독일의 부족한 석유자원을 소모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1941년 2월 독일에게 자국 해군이 최소한 25만톤의 연료를 공급받지 못하면 작전을 지속하기가 어렵다고 통보했습니다. 1940년 기준으로 독일이 주로 루마니아에서 수입하던 석유의 양이 150만톤, 독일이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인조석유가 400만톤 정도였으니 이탈리아 해군만 단독으로 25만톤을 요구한다는 것은 상당한 양이었습니다.1)

부족한 전략 물자를 동맹국과 공유해야 하는 것은 매우 골치아픈 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이탈리아를 필두로 한 독일의 동맹국들이 세계 일류급 병기를 제작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이탈리아 해군은 제외하고) 특히 육군과 공군 장비에 있어서 그런 문제가 두드러 졌지요. 그랬기 때문에 전쟁 초기부터 동맹국들은 독일에 근대적인 장비를 공여해 줄 것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독일의 공업 생산능력은 자국군대의 수요를 충족하는데도 버거운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동맹국들을 근대적인 장비로 무장시키는데 처음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초기의 대표적인 사례라면 이탈리아 공군에 대한 급강하 폭격기 지원을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이탈리아 공군도 급강하 폭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쓸만한 기종을 개발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공군의 기대를 모은 SM.85는 급강하 폭격기로서 실패작이었고 결국 독일의 Ju 87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 독일 정부에 50대의 Ju 87을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했습니다. 이에 대해 국방군총사령부OKW는 독일 공군에 우선적으로 공급되어야 할 기종을 수출하는데 반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괴링이 수출을 승인함으로써 이탈리아 공군은 Ju 87을 장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일측은 먼저 7월에 15대, 8월에 15대, 9월에 나머지 분량을 공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2) 그러나 이탈리아 공군 제 96 독립 급강하폭격기 중대96º Gruppo Autonomo Bobardieri a Tuffo에 인도된 첫 번째 Ju 87은 공장에서 생산된 신품이 아니라 독일 공군이 사용하던 중고품 이었습니다.3) 인도 자체도 당초 약속 보다 느리게 이루어져 이탈리아 공군의 두 번째 급강하폭격기 부대인 97 급강하폭격기 중대는 11월 11일에 편성되었습니다.4) 외교적인 면에서 보면 괴링의 판단은 크게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독일 공군에 주어져야 할 장비가 다른 곳으로 새나가는 것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940년 여름에는 영국본토항공전이 한창이었고 독일공군, 특히 중형폭격기와 급강하폭격기의 손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은 1940년 5월 부터 9월 까지 총 210대의 Ju 87을 잃었는데 이것은 1940년 5월 4일을 기준 으로 한  급강하폭격기 대수의 50%에 달하는 것 이었습니다.5)
독일이 불과 50대의 급강하 폭격기를 지원하는 것 조차 버거워 했던 것에 비해 비슷한 시기 미국은 전시 동원체제에 돌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별 어려움 없이 수백대의 항공기를 생산해서 해외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공군은 1940년 5월 1일 기준으로 커티스 호크75 306대를 포함해 440대의 미국제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불과 한 달 뒤에는 이것이 544대에 달하게 됩니다.6)

전쟁이 확대되어 가면서 이탈리아의 원조 요청은 점차 늘어났습니다.  이탈리아는 1940년 11월 20일 독일 국방군총사령부에 3,000대(!)의 트럭을 알바니아에 주둔한 이탈리아군에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7) 그 무렵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두고 프랑스와 영국제 노획차량 까지 긁어모아 배치하고 있던 독일군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 요구는 말 그대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일군은 당연히 이 엄청난 요청을 거부합니다. 독일측은 트럭을 원조하지 못하는 대신(그리고 그 당시까지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그리스를 고려하여) 이탈리아군의 수송 지원을 위해 Ju 52를 장비한 제1 특수임무 폭격비행단 3대대III./Kampfgeschwader z.b.V.를 파견합니다. 이 대대는 1940년 12월 10일 부터 1941년 2월 5일 까지 이탈리아군 29,000명과 물자 2,700톤을 알바니아로 수송했고 부상병 7,500명과 그 밖의 병력 2,900명을 알바니아에서 이탈리아로 후송했습니다.8) 물론 이러한 지원이 이탈리아군에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탈리아군 자체의 능력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장비가 개선되지 않는 이상 전투력의 향상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것은 이후 북아프리카 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1940년 프랑스의 패배 이후 독일 진영으로 합류한 루마니아는 이탈리아 보다 더 상황이 안좋은 곳이었습니다. 얼마안가 닥치게 될 바르바로사 작전은 기계화 부대가 중심이 된 대규모 지상전 위주였는데 루마니아는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루마니아는 1935년 까지도 1919년에 구입한 르노FT-17을 주력전차로 사용하고 있었고 이것들이 완전히 구식화 되고 제대로 가동도 되지 않게 된 1935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현대적인 전차를 생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루마니아는 기갑전력의 확충을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에 126대의 LT-35 전차와 417대의 CKD AH IV 소형전차Tankette, 프랑스에는 200대의 르노 R-35 전차를 주문했습니다. 이 중에서 루마니아가 주문한 대로 양도된 것은 LT-35 뿐이었고 CKD AH IV소형전차는 35대, 르노 R-35는 40대만이 인도되었을 뿐 입니다.9)
루마니아는 프랑스가 패배한 뒤 독일의 편으로 갈아타면서 독일이 자국의 부실한 기갑전력을 보충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루마니아의 요청에 의해 파견된 루마니아 주재 독일육군사절단Deutsches Heeresmission in Rümanien, 약칭 DHM은 루마니아군에 대한 훈련과 군사원조 요청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루마니아군에 대한 훈련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두고 루마니아에 독일군이 대규모로 증파되면서 훈련에 투입할 인력을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루마니아군의 제5, 6, 13, 18, 20 보병사단에 독일식의 소부대 전술 교육을 위한 훈련소가 설치되었고 별도로 독일육군사절단 본부에 의해 독일식의 전쟁대학Kriegsakademie과 유사한 고급장교 교육과정이 설치되었습니다.10) 하지만 장비 지원은 거의 성과가 없었습니다. 루마니아군은 독일의 3호전차와 같은 현대적인 전차를 원했지만 독일군도 전차가 부족한 실정이어서 결국 프랑스와 폴란드에서 노획한 30여대 정도의 R-35전차가 양도되는데 그칩니다. 이탈리아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한 괴링과 달리 육군참모총장 할더Franz Halder는 루마니아 정부의 독일제 전차 수출 요청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11) 히틀러는 대 프랑스전이 종결된 직후인 1940년 7월 9일 월간 전차생산량을 380대로 높일 것을 지시했지만 독일의 공업력으로는 단시일 내에 이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1940년 9월 28일 명령에서 전차생산량 목표치를 하향 조정하게 됩니다. 이에 따르면 1940년 9월 부터 1941년 4월 까지 전차 1,490대, 즉 월간 213대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12) 이런 상황에서 동맹국에게 까지 최신형 전차를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루마니아 공군도 비슷한 실정이었습니다. 독일은 루마니아에 소수의 Bf109와  He111을 판매하긴 했으나 독일제 항공기의 면허생산은 거부했습니다. 현대적인 항공기를 대량으로 보유하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수입한 항공기들로 공군이 구성되었기 때문에 루마니아 공군은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폴란드, 루마니아제 등 잡다한 항공기를 운용해야 했습니다.13)

1941년에는 독일의 동맹군들이 제한적인 작전에만 참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장비의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루마니아군의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용감히 싸우긴 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고 오데사를 둘러싼 전투에서는 소련군이 자발적으로 철수할 때 까지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오데사 공격을 담당한 루마니아 제4군은 오데사가 함락 될 때 까지 장교 4,161명을 포함해 11만명에 달하는 인명손실을 입었습니다.14) 특히 루마니아의 유일한 기계화부대인 제1기갑사단은 오데사 전투에서 사실상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LT-35를 장비한 1기갑사단의 1전차연대는 오데사의 요새화된 방어선에 대한 공격에서 글자 그대로 소모되었습니다. 손실을 보충해 줄 수 있는 것은 독일 뿐이었는데 독일의 전차 생산능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15)
헝가리가 파병한 부대 중 유일하게 이렇다 할 기갑전력을 갖춘 쾌속군단(1, 2차량화여단과 2기병여단으로 편성)은 루마니아군의 1기갑사단 보다도 전투력이 더 떨어지는 수준이었습니다. 헝가리의 쾌속군단은 이탈리아제 CV35 65대와 스웨덴의 L60 전차를 면허생산한 톨디 전차 95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루마니아가 보유한 LT-35나 R-35와 마찬가지로 동부전선에 투입하기에는 심각하게 부족한 장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쾌속군단은 루마니아군과 달리 독일군을 따라 우크라이나 깊숙히 진격, 1941년 10월 말에는 이쥼Ізюм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을 따라 진격하면서 우마니Умань 전투 등 일련의 격전을 치러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됩니다. 헝가리 쾌속군단은 1941년 11월 재편성을 위해 전선에서 이탈할 때 까지 전차의 90%를 상실했고 차량 1200여대와 병력 26,000명 중 8,000명을 잃었습니다.16)
 이탈리아가 파견한 소규모 원정군,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단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 약자 CSIR” 은 1941~1942년 전역을 그런대로 잘 견뎌냈다고 평가받습니다. 이 군단은 북아프리카 전선에 파견한 기갑사단을 제외한다면 이탈리아군에서 가장 잘 장비된 사단들로 편성되었지만 루마니아나 헝가리군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전력이었습니다. 이 군단에 배속된 3개 사단 중 차량화사단Divisioni autotrasportabile이었던 파수비오Pasubio사단과 토리노Torino사단은 완전한 차량화 사단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문에 군단장 메세Giovanni Messe는 작전 중 종종 두 사단 중 한 사단에 차량을 집중시켜 차량화시키고 나머지 사단은 일반 보병사단으로 운용하기도 했습니다.17) 그리고 쾌속사단Divisione celere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PADA(Principe Amedeo d’Aosta)사단은 2개 기병연대로 편성된 기병사단으로 역시 기계화와는 거리가 먼 부대였습니다. 이탈리아 원정군단은 기동수단으로 5,500대의 차량과 1,550대의 오토바이, 4,600마리의 말/노새를 보유했는데 이러한 장비 내역은 반쪽짜리 기계화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기갑전력은 PADA사단에 배속된 60대의 L3/33(CV33)이 고작이었습니다.18)

독일의 1942년 전역은 이렇게 누적된 문제가 재앙으로 전이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동맹국들은 1942년 전역에 더욱 더 대규모로 참전합니다. 헝가리와 이탈리아는 원정군의 규모를 1개 야전군으로 증강했고 루마니아군은 1941년과 달리 독일군을 따라 남부 러시아 깊숙히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루마니아, 헝가리, 이탈리아 정부는 독일에게 75mm Pak 40과 같은 일선급 대전차포를 요청했습니다. 또한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1941년 전역에서 크게 소모된 기갑전력을 복구하는데도 독일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 역시 1941년 전역의 피해를 채 복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세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맹국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독일은 동부전선의 동맹국들에게 Pak 40 대신 노획한 프랑스제 75mm포를 개조한 Pak 97/38이나 50mm  Pak 38, 37mm Pak 36을 제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가장 강력한 75mm  Pak 97/38은 수량이 충분치 못해 이탈리아 제8군의 경우 1942년 5월 1일 기준으로 54문을 보유하는데 그쳤습니다. 이탈리아군 대전차 전력의 주력은 구식인 47mm 대전차포 297문이었고 이것은 T-34에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여기에 포병연대에서 야포로 사용하는 75mm포(Cannone da 75/32 Modello 37) 201문이 유사시 대전차전을 수행하는 정도였습니다.19) 루마니아군의 사정도 그다지 나을 것은 없어 1942년 전역이 시작될 무렵에는 37mm Pak 36이나 47mm 대전차포가 주력이었습니다.20) 그리고 이탈리아군 보다도 더 늦은 1942년 10월이 되어서야 Pak 97/38이 소량 보급되는데 그쳤습니다.
Pak 97/38은 1942년 11월 소련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을 때 독일의 동맹군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대전차포 였습니다. 루마니아군은 소련군의 동계반격 당시 보병사단 당 6문 정도의 Pak 97/38를 보유하고 있었고 여전히 대부분의 대전차 전력을 37mm나 47mm 대전차포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일은 대전차 지뢰조차 제대로 보급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더 나빴습니다.21)  루마니아군 기병사단의 경우는 상황이 더 나빠서 5기병사단이 75mm 대전차포 4문을 보유하는데 그쳤고, 루마니아군 8기병사단은 단 한문도 보유하고 있지 못했습니다.22) 이탈리아 제8군도 그다지 나을 것은 없어서 사단 당 4문에서 16문 정도의 Pak 97/38을 보유하는데 그치고 있었습니다.23) 그리고 Pak 97/38 조차도 T-34에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태가 속출하자 루마니아군과 이탈리아군은 급격히 붕되었습니다.24) 독일은 동맹국들에게 겨우 겨우 소량의 75mm 대전차포를 지원했지만 충분한 대전차용 탄약을 공급하지 못했고 이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기갑전력에 있어서도 별로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독일은 1942년 초 부터 루마니아군과 헝가리군에 구식화된 35(t) 전차나 38(t) 전차를 소량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3호전차나 4호전차와 같은 일선급 전차의 지원은 매우 소규모로 이루어졌습니다. 헝가리군은 1942년 하계공세가 시작되기 직전인 1942년 5월 까지 불과 22대의 4호전차만을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헝가리는 독일의 지원이 너무 소규모 였기 때문에 독일이 루마니아군에 신형 장비를 우선적으로 지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만까지 가질 정도였습니다.25) 하지만 전차 지원은 헝가리군이 루마니아군 보다 나았습니다. 루마니아군은 보충용으로 LT-35의 독일판인 35(t) 전차를 지원받다가 1942년 9월이 되어서야 겨우 75mm포 탑재 3호전차와 4호전차(50mm 장포신형 3호전차로 기술한 자료도 있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을 때 루마니아군 제1기갑사단의 주력은 87대의 LT-35, 35(t) 전차였고 3호전차(와 4호전차)는 21대에 불과했습니다.26)

공군에 대한 지원도 그다지 나을것이 없었습니다. 독일이 1942년 초 부터 루마니아 공군에 인도한 항공기는 글자그대로 한줌에 불과한 수준으로 Bf 109 E-7 15대(1월~3월), He 111 H-6 10대(1~3월), Do 17M 10대(4~5월), Ju 52/3m 18대, He 114 10대(4월), Fi 156 14대(4월) 정도였습니다.27)
헝가리의 경우는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헝가리 또한 산업기반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1938년 부터 항공산업에 대한 투자를 증대시켰고 1941년 6월 6일에는 독일과 항공기 공동생산을 위한 협약에 조인해 Bf 109, Me 210 그리고 DB 605엔진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헝가리의 항공산업은 독일의 부족한 항공기 생산능력을 보완해 주는 존재였던 것 입니다. 이 협약은 독일이 부품과 기술을 제공하는 대신 헝가리가 생산하는 항공기와 엔진을 일정 비율로 독일공군에 납품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즉 Bf 109는 독일과 헝가리의 비율이 2:1, Me 210은 1:1, DB 605엔진은 2:1였습니다.28) 물론 헝가리의 부족한 산업력으로 현대적인 공군을 단시간 내에 육성하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긴 했습니다만 헝가리의 노동력이 독일의 부족한 산업력을 보완하는데 사용된 셈입니다.

1943년 이후 독일의 군수물자 생산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동맹국에 대한 장비 지원도 다소 증가하게 됩니다. 루마니아는 1943년에 50대의 38(t) 전차외에 4호전차 31대와 돌격포 4대를 인도받았는데 1944년에는 4호전차 100대와  돌격포 114대를 인도받았습니다. 헝가리는 1944년에 4호전차 62대, 돌격포 40대, 헤처 75대, 판터 5대, 티거 3대를 인도받았습니다. 이밖에 다른 동맹국들도 예전 보다는 많은 전차를 지원받았습니다. 핀란드는 1943년 부터 1944년까지 4호전차 15대와 돌격포 59대를 받았고, 불가리아는 1943년에 38(t) 전차 10대와 3호전차 10대, 4호전차 46대, 돌격포 25대를 받았습니다. 슬로바키아는 1943년에 2호전차 16대, 38(t) 전차 37대, 3호전차 7대, 마더II 자주포 18대를 받았습니다.
항공기 지원도 비슷하게 증가해서 독일은1943년 부터 루마니아 공군의 현대화를 위해 Bf 109G, Ju 88, Ju 87, Hs 129등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1942년과 비교하면 1943년 이후의 항공기 지원은 다소 증가했습니다. Bf 109의 경우 1944년 7월에 60대, 8월에 40대가 루마니아 공군에 인도되었고 9월 이후로는 월간 20~25대를 인도할 예정이었습니다.29) 또한 뒤늦게나마 루마니아의 Bf 109 면허생산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 공군의 지속적인 손실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구식화된 He 111이나 Ju 86도 함께 지원되는 등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헝가리의 경우 1942년 부터 1944년까지 Me 210 270(272)대와 Bf 109 471(488)대를 생산했습니다.30) 하지만 루마니아는 비슷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하게 동원하지 못했습니다. 루마니아는 1943년에 Fi 156 3대, 1944년에 Fi 156 7대와 Bf 109 6대를 생산하는데 그쳤습니다.31)

독일의 지원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미국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입니다. 미국은 1942년 이후 동맹국들이 여러개의 기갑사단을 편성해서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장비를 원조했습니다. 독일이 동맹국들에게 수십대의 전차를 인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1942년만 하더라도 미국은 수백대의 전차를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에게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항공기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독일이 불과 수십대의 Ju 87을 인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1940년만 하더라도 미국은 수백대의 항공기를 외국 군대에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차량을 예로 들면 그 차이가 더 잘 드러납니다.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수십만대의 차량을 지원했습니다. 반면 독일은 자국의 차량 수요도 채울 수 없었으며 독일의 동맹국들은 그보다 더 심각한 기동력 부족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미국이 자국의 최신 장비들을 대량으로 공여할 수 있었던 반면 독일은 그럴 수가 없어 노획장비나 구식화된 장비들을 소규모로 제공하는데 그쳤습니다.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의 조병창”이었던 반면 독일은 동맹국들의 자원까지 쥐어짜야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얼마 되지 않는 동맹국들의 산업력조차 적절하게 동원하지 못했습니다.



1) Adam Tooze, The Wages of Destruction : The Making and Breaking of the Nazi Economy, (Viking Penguin, 2007),  p.411
2) Hans Werner Neulen, Am Himmel Europas : Luftstreitkräfte an deutscher Seite 1939~1945, (Universitas Verlag, 1998),  pp.37~38
3) John Weal, Junkers Ju 87 Stukageschwader of North Africa and the Mediterranean, (Osprey Publishing, 1998), p.16
4) Richard L. DiNardo, Germany and the Axis Powers : From Coalition to Collaps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44
5) Williamson Murray, The Luftwaffe 1933~45 : Strategy for Defeat, (Brassey’s, 1996), p.45
6) Karl-Heinz Frieser, Blitzkrieg-Legende : Der Westfeldzug 1940, (Oldenbourg Verlag, 1995), p.55
7) Richard L. DiNardo, ibid., p.77
8) Karl-Heinz Golla, Der Fall Griechenlands 1941, (Mittler&Sohn, 2007), p.65
9) Alexander Statiev, “The Ugly Duckling of the Armed Forces : Romanian Armour 1919~41”,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12, No.2(1999. 6), pp.220~224
10) Richard L. DiNardo, ibid., p.99
11) Alexander Statiev, ibid., p.225
12)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 (Mittler&Sohn, 1988), pp.21~22
13) Richard L. DiNardo, ibid., p.98, 111
14) Peter Gosztony, Hitlers Fremde Heere : Das Schicksal der nichtdeutschen Armeen im Ostfeldzug, (Econ Verlag, 1976), p.152
15) Alexander Statiev, ibid., pp.237~239
16) Peter Gosztony, ibid., pp.154~156, 161
17) Richard L. DiNardo, ibid., p.128
18) Gerhard Schreiber, “Italiens Teilnahme am Krieg gegen die Sowjetunion : Motive, Fakten und Folgen”, Jürgen Förster(hrsg), Stalingrad : EreignisㆍWirkungㆍSymbol, (Piper, 1992), p.259; Thomas Schlemmer,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Oldenbourg Verlag, 2005), pp.14~15
19) Thomas Schlemmer, ibid., p.29; Richard L. DiNardo, ibid., p.141
20) Richard L. DiNardo, ibid., p.141
21) Manfred Kehrig, Stalingrad : Analyse und Dokumentation einer Schlacht, (Deutsche Verlags-Anstalt, 1974), p.66; Richard L. DiNardo, ibid., p.150
22) Manfred Kehrig, ibid., p.667
23) Peter Gosztony, ibid., pp.501~507
24) Richard L. DiNardo, ibid., p.154
25) Richard L. DiNardo, ibid., pp.140~141
26) Manfred Kehrig, ibid., p.668
27) Hans Werner Neulen,  ibid., p.103
28) Miklos Szabo, “The Development of the Hungarian Aircraft Industry, 1938~1944”,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65(2001. 1), p.64
29) Hans Werner Neulen,  ibid., p.108, 114
30) Hans Werner Neulen,  ibid., p.329; 괄호 안의 수치는 Miklos Szabo, ibid., p.76
31)  Hans Werner Neulen,  ibid., p.328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중국측이 본 상하이 지구 항공전(1937년 8월 14일~17일)

10일 전에 쓴 "1930년대 미 육군 항공대의 폭격기 우월론에 대한 궁금증"이란 글에 배군님이 "전투기 무용론"이란 답글을 써 주셨습니다. 배군님의 글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1936년 8월 14일에서 8월 17일에 걸쳐 벌어진 일본군과 중국군의 항공전인데 여기에 대해서 조금 써 보려 했으나 제가 요 며칠동안 약간 정신이 없다 보니 제때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조금 늦긴 했습니다만 이 공중전에 대한 중국측 시각에 대해 간단하게 써 보겠습니다.

먼저 중일전쟁 초기의 공중전이니 만큼 중일전쟁 직전 중화민국 공군의 편성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중일전쟁 직전 중화민국 공군은 급속히 증강되었습니다. 1936년 까지 중화민국 공군은 총 14개 비행중대(飛行中隊)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36년 8월에 광동공군의 9개 비행중대가 중앙군 예하로 들어와 다음과 같이 개편되었습니다.1)


광동공군 제1비행중대 → 중앙군 제16비행중대
광동공군 제2비행중대 → 중앙군 제17비행중대
광동공군 제3비행중대 → 중앙군 제18비행중대
광동공군 제4비행중대 → 중앙군 제19비행중대
광동공군 제5비행중대 → 중앙군 제20비행중대
광동공군 제6비행중대 → 중앙군 제28비행중대
광동공군 제7비행중대 → 중앙군 제29비행중대
광동공군 제8비행중대 → 중앙군 제30비행중대
광동공군 제9비행중대 → 중앙군 제31비행중대

그리고 10월에는 중앙군 예하에 7개 비행중대가 새로 편성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37년 7월에 중화민국 공군은 총 10개 비행대대(飛行大隊)와 6개 독립 비행중대로 편성되었고 구체적인 편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2)

항공위원회
 │
 └공군전적총지휘부(空軍前敵總指揮部)
   │
   └공군굉작기사령(空軍轟炸機司令)*
   │   └제1비행대대
   │     └제1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2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2비행대대
   │     └제9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11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14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8비행대대
   │     └제10비행중대(사보이아 S.72)
   │     └제19비행중대(He111A-0)
   │     └제30비행중대(마틴 138WC)
   │    
   └공군구축기사령(空軍驅逐機司令)**
   │  └제3비행대대
   │     └제7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8비행중대(브레다 Ba.27, 피아트 CR.32)
   │     └제17비행중대(P-26A)
   │  └제4비행대대
   │     └제21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2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3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Fw44)
   │  └ 제5비행대대
   │     └제24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5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8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 Fw44)
   │  └독립제29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공군정찰기사령(空軍偵察機司令)
   │  └제6비행대대
   │     └제3비행중대(더글라스 O-2MC)
   │     └제4비행중대(더글라스 O-2MC)
   │     └제5비행중대(더글라스 O-2MC)
   │     └제15비행중대(피아트 CR.32)
   │   └제7비행대대
   │      └제6비행중대(Vought V-92C)
   │      └제12비행중대(Vought V-92C)
   │      └제16비행중대(Vought V-92C)
   │   └독립제31비행중대(정찰기)
   │
   └제9비행대대(공격기)
   │  └제26비행중대(커티스 A-12 슈라이크)
   │  └제27비행중대(커티스 A-12 슈라이크)
   │
   └항주견교항교잠편대대(杭州筧橋航校暫編大隊)
   │   └제32비행중대
   │   └제34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
   │   └제35비행중대(Vought V-92C)
   │
   └제13독립비행중대
   └제18독립비행중대
   └제20독립비행중대
   └제33독립비행중대

*굉작기(轟炸機) 폭격기죠
**다들 잘 아시겠지만 구축기(驅逐機)는 전투기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상하이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합니다. 중국 항공위원회는 8월 14일 오전 2시, 공군작전명령 제2호를 발령해 상해에 상륙하고 있는 일본군을 폭격하도록 했습니다. 이 작전에는 폭격기 부대인 제2비행대대와 전투기 부대인 제4, 제5비행대대, 그리고 공군전적총지휘부(空軍前敵總指揮部) 직할대인 항주견교항교잠편대대(杭州筧橋航校暫編大隊, 이하 잠편대대)가 투입됐습니다.

8월 14일 부터 8월 17일까지 전개된 항공전의 추이는 唐学锋저, 中国空军抗战史, 90~100쪽의 내용에 따라 서술하겠습니다.

8월 14일 오전 7시, 잠편대대 제35비행중대 소속의 보우트 V-92C 5대로 편성된 중국공군의 제1차 공격대가 젠차오(筧橋)비행장을 출격했습니다. 제1차 공격대는 손실 없이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습니다. 제2차 공격대는 제2비행대대 소속의 노스롭 감마 2E 21대로 편성되었으며 오전 8시 40분 제2비행대대 부대대장 쑨통강(孫桐崗)의 지휘하에 250kg 폭탄 14발과 50kg 폭탄 70발을 탑재하고 광더(廣德)비행장에서 출격했습니다. 2차 공격대는 두 제대로 나뉘어 첫 번째 제대는 휘산(山) 부두를 폭격하고 두 번째 제대는 우송(吳淞) 하구에 상륙하는 일본군 함선을 공격했습니다. 2차 공격대 또한 손실 없이 귀환했습니다. 3차 공격대는 제5비행대대의 호크III 8대로 편성되었으며 5대대장 딩지쉬(丁紀徐)가 직접 지휘하는 가운데 250kg 폭탄 1발씩을 탑재하고 오전 9시 20분 출격해 상해 인근의 일본 해군 함정을 공격했습니다.
중국공군은 오후부터 폭격을 재개했습니다. 제4차 공격대는 제5대대 제24중대의 호크III 3대로 편성되었으며 3차 공격대와 마찬가지로 각각 250kg 폭탄 1발을 탑재하고 오후 2시20분 출격했습니다. 4차 공격대는 일본군의 본격적인 반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4차 공격대가 목표 상공에 도달했을 때 일본군 전투기가 기습해와 부중대장이 격추되어 전사하는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제5차공격대는 제2대대의 폭격기로 편성되어 오후 2시 40분 출격했으며 상해의 일본해군 육전대사령부를 폭격했습니다. 제6차 공격대는 제35중대장의 지휘하에 오후 2시 40분에 출격해 궁다(公大) 방직공장을 폭격했습니다. 제7차 공격대는 제25중대의 호크III 3대로 편성되었으며 25중대장의 지휘하에 오후 2시 45분 출격해 일본군 사령부 등을 폭격했습니다. 오후 3시 40분에는 제2대대의 폭격기로 구성된 제8차 공격대가 출격했으며 오후 3시 50분에는 잠편대대 소속 제34중대의 호크 II와 호크III로 편성된 제9차 공격대가 출격해 50kg 폭탄 2발과 18kg 폭탄 11발을 투하하고 귀환했습니다.
한편, 이날 제공전투는 제4비행대대 소속의 전투기들이 담당했습니다. 오후 2시 50분, 제4비행대대는 공격해 오는 일본군 폭격기들을 습격해 21, 22, 23중대가 각각 1대씩, 총3대를 격추시켰습니다.

중국공군은 8월 15일에도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이날 중국공군은 모두 8차에 걸쳐 공격을 감행했는데 각 공격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습니다.

1차 공격대 : 제6대대 5중대, 3대
2차 공격대 : 제6대대 5중대, 5대
3차 공격대 : 제6대대, 대대장 단독출격
4차 공격대 : 제5대대, 14대
5차 공격대 : 제2대대 11중대, 17대
6차 공격대 : 제5대대, 6대
7차 공격대 : 제7대대 16중대, 6대
8차 공격대 : 제4대대, 8대

한편, 8월 15일 전투는 배군님의 글에 잘 서술되어 있듯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중국쪽 기록은 이날 전투에서 러이친(樂以琴)이 4대, 탄원(潭文)이 3대를 격추하는 등 총 30대의 일본 항공기를 격추시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중국측의 주장은 실제보다 다소 과장되었지만 어쨌든 이 전투는 일본측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이 사실입니다. 8월 16일에도 대규모 공중전이 계속되었는데 중국측은 이날에는 11대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17일에는 제 2, 4, 5, 7대대의 호크 17대와 노스롭 감마 2E 12대, 보우트 V-92C 15대 등 총 44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6차 걸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날 전투에서는 소규모 공중전이 있었으며 일본군 항공기 1대를 격추시켰다고 합니다.

중국공군은 8월 내내 상하이와 우송 일대에 출격하여 지상군의 작전을 지원했습니다만 이 글을 쓴 이유가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은 8월 14일~17일의 항공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이었으니 8월 하순의 작전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이 전투가 흥미로운 점은 그 당시 미국에서 퇴물로 취급하던 호크II, III와 같은 기종으로도 공격해 오는 적의 폭격기를 요격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는 점을 입증했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구식 항공기들이 동원된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이 전투의 교훈을 살려 전투기들을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만.

이상하게도 미국은 전간기의 여러 전쟁에서 교훈을 얻는데 신통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1) 刘凤翰, 国民党軍事制度史 上(北京, 中国大百科全书出版社, 2009), p.469
2) 曹剑浪, 国民党军简史 下(北京, 解放军出版社, 2004), pp.1557~1558

잡담하나, 이 글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참고한 唐学锋의 中国空军抗战史는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 각주가 제대로 달려 있지 않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