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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17일 토요일

동맹국들의 조병창이 될 수 없었던 독일

2차대전 당시 외교라는 요소는 독일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것 보다는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당장 첫 번째 동맹국으로 전쟁에 뛰어든 이탈리아 부터가 시작부터 독일의 지원에 기대는 형국이었으니 말입니다. 이탈리아가 가진 전력 중 독일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을 해군력 조차 독일의 부족한 석유자원을 소모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1941년 2월 독일에게 자국 해군이 최소한 25만톤의 연료를 공급받지 못하면 작전을 지속하기가 어렵다고 통보했습니다. 1940년 기준으로 독일이 주로 루마니아에서 수입하던 석유의 양이 150만톤, 독일이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인조석유가 400만톤 정도였으니 이탈리아 해군만 단독으로 25만톤을 요구한다는 것은 상당한 양이었습니다.1)

부족한 전략 물자를 동맹국과 공유해야 하는 것은 매우 골치아픈 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이탈리아를 필두로 한 독일의 동맹국들이 세계 일류급 병기를 제작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이탈리아 해군은 제외하고) 특히 육군과 공군 장비에 있어서 그런 문제가 두드러 졌지요. 그랬기 때문에 전쟁 초기부터 동맹국들은 독일에 근대적인 장비를 공여해 줄 것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독일의 공업 생산능력은 자국군대의 수요를 충족하는데도 버거운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동맹국들을 근대적인 장비로 무장시키는데 처음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초기의 대표적인 사례라면 이탈리아 공군에 대한 급강하 폭격기 지원을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이탈리아 공군도 급강하 폭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쓸만한 기종을 개발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공군의 기대를 모은 SM.85는 급강하 폭격기로서 실패작이었고 결국 독일의 Ju 87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 독일 정부에 50대의 Ju 87을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했습니다. 이에 대해 국방군총사령부OKW는 독일 공군에 우선적으로 공급되어야 할 기종을 수출하는데 반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괴링이 수출을 승인함으로써 이탈리아 공군은 Ju 87을 장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일측은 먼저 7월에 15대, 8월에 15대, 9월에 나머지 분량을 공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2) 그러나 이탈리아 공군 제 96 독립 급강하폭격기 중대96º Gruppo Autonomo Bobardieri a Tuffo에 인도된 첫 번째 Ju 87은 공장에서 생산된 신품이 아니라 독일 공군이 사용하던 중고품 이었습니다.3) 인도 자체도 당초 약속 보다 느리게 이루어져 이탈리아 공군의 두 번째 급강하폭격기 부대인 97 급강하폭격기 중대는 11월 11일에 편성되었습니다.4) 외교적인 면에서 보면 괴링의 판단은 크게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독일 공군에 주어져야 할 장비가 다른 곳으로 새나가는 것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940년 여름에는 영국본토항공전이 한창이었고 독일공군, 특히 중형폭격기와 급강하폭격기의 손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은 1940년 5월 부터 9월 까지 총 210대의 Ju 87을 잃었는데 이것은 1940년 5월 4일을 기준 으로 한  급강하폭격기 대수의 50%에 달하는 것 이었습니다.5)
독일이 불과 50대의 급강하 폭격기를 지원하는 것 조차 버거워 했던 것에 비해 비슷한 시기 미국은 전시 동원체제에 돌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별 어려움 없이 수백대의 항공기를 생산해서 해외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공군은 1940년 5월 1일 기준으로 커티스 호크75 306대를 포함해 440대의 미국제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불과 한 달 뒤에는 이것이 544대에 달하게 됩니다.6)

전쟁이 확대되어 가면서 이탈리아의 원조 요청은 점차 늘어났습니다.  이탈리아는 1940년 11월 20일 독일 국방군총사령부에 3,000대(!)의 트럭을 알바니아에 주둔한 이탈리아군에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7) 그 무렵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두고 프랑스와 영국제 노획차량 까지 긁어모아 배치하고 있던 독일군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 요구는 말 그대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일군은 당연히 이 엄청난 요청을 거부합니다. 독일측은 트럭을 원조하지 못하는 대신(그리고 그 당시까지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그리스를 고려하여) 이탈리아군의 수송 지원을 위해 Ju 52를 장비한 제1 특수임무 폭격비행단 3대대III./Kampfgeschwader z.b.V.를 파견합니다. 이 대대는 1940년 12월 10일 부터 1941년 2월 5일 까지 이탈리아군 29,000명과 물자 2,700톤을 알바니아로 수송했고 부상병 7,500명과 그 밖의 병력 2,900명을 알바니아에서 이탈리아로 후송했습니다.8) 물론 이러한 지원이 이탈리아군에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탈리아군 자체의 능력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장비가 개선되지 않는 이상 전투력의 향상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것은 이후 북아프리카 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1940년 프랑스의 패배 이후 독일 진영으로 합류한 루마니아는 이탈리아 보다 더 상황이 안좋은 곳이었습니다. 얼마안가 닥치게 될 바르바로사 작전은 기계화 부대가 중심이 된 대규모 지상전 위주였는데 루마니아는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루마니아는 1935년 까지도 1919년에 구입한 르노FT-17을 주력전차로 사용하고 있었고 이것들이 완전히 구식화 되고 제대로 가동도 되지 않게 된 1935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현대적인 전차를 생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루마니아는 기갑전력의 확충을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에 126대의 LT-35 전차와 417대의 CKD AH IV 소형전차Tankette, 프랑스에는 200대의 르노 R-35 전차를 주문했습니다. 이 중에서 루마니아가 주문한 대로 양도된 것은 LT-35 뿐이었고 CKD AH IV소형전차는 35대, 르노 R-35는 40대만이 인도되었을 뿐 입니다.9)
루마니아는 프랑스가 패배한 뒤 독일의 편으로 갈아타면서 독일이 자국의 부실한 기갑전력을 보충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루마니아의 요청에 의해 파견된 루마니아 주재 독일육군사절단Deutsches Heeresmission in Rümanien, 약칭 DHM은 루마니아군에 대한 훈련과 군사원조 요청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루마니아군에 대한 훈련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두고 루마니아에 독일군이 대규모로 증파되면서 훈련에 투입할 인력을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루마니아군의 제5, 6, 13, 18, 20 보병사단에 독일식의 소부대 전술 교육을 위한 훈련소가 설치되었고 별도로 독일육군사절단 본부에 의해 독일식의 전쟁대학Kriegsakademie과 유사한 고급장교 교육과정이 설치되었습니다.10) 하지만 장비 지원은 거의 성과가 없었습니다. 루마니아군은 독일의 3호전차와 같은 현대적인 전차를 원했지만 독일군도 전차가 부족한 실정이어서 결국 프랑스와 폴란드에서 노획한 30여대 정도의 R-35전차가 양도되는데 그칩니다. 이탈리아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한 괴링과 달리 육군참모총장 할더Franz Halder는 루마니아 정부의 독일제 전차 수출 요청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11) 히틀러는 대 프랑스전이 종결된 직후인 1940년 7월 9일 월간 전차생산량을 380대로 높일 것을 지시했지만 독일의 공업력으로는 단시일 내에 이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1940년 9월 28일 명령에서 전차생산량 목표치를 하향 조정하게 됩니다. 이에 따르면 1940년 9월 부터 1941년 4월 까지 전차 1,490대, 즉 월간 213대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12) 이런 상황에서 동맹국에게 까지 최신형 전차를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루마니아 공군도 비슷한 실정이었습니다. 독일은 루마니아에 소수의 Bf109와  He111을 판매하긴 했으나 독일제 항공기의 면허생산은 거부했습니다. 현대적인 항공기를 대량으로 보유하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수입한 항공기들로 공군이 구성되었기 때문에 루마니아 공군은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폴란드, 루마니아제 등 잡다한 항공기를 운용해야 했습니다.13)

1941년에는 독일의 동맹군들이 제한적인 작전에만 참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장비의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루마니아군의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용감히 싸우긴 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고 오데사를 둘러싼 전투에서는 소련군이 자발적으로 철수할 때 까지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오데사 공격을 담당한 루마니아 제4군은 오데사가 함락 될 때 까지 장교 4,161명을 포함해 11만명에 달하는 인명손실을 입었습니다.14) 특히 루마니아의 유일한 기계화부대인 제1기갑사단은 오데사 전투에서 사실상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LT-35를 장비한 1기갑사단의 1전차연대는 오데사의 요새화된 방어선에 대한 공격에서 글자 그대로 소모되었습니다. 손실을 보충해 줄 수 있는 것은 독일 뿐이었는데 독일의 전차 생산능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15)
헝가리가 파병한 부대 중 유일하게 이렇다 할 기갑전력을 갖춘 쾌속군단(1, 2차량화여단과 2기병여단으로 편성)은 루마니아군의 1기갑사단 보다도 전투력이 더 떨어지는 수준이었습니다. 헝가리의 쾌속군단은 이탈리아제 CV35 65대와 스웨덴의 L60 전차를 면허생산한 톨디 전차 95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루마니아가 보유한 LT-35나 R-35와 마찬가지로 동부전선에 투입하기에는 심각하게 부족한 장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쾌속군단은 루마니아군과 달리 독일군을 따라 우크라이나 깊숙히 진격, 1941년 10월 말에는 이쥼Ізюм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을 따라 진격하면서 우마니Умань 전투 등 일련의 격전을 치러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됩니다. 헝가리 쾌속군단은 1941년 11월 재편성을 위해 전선에서 이탈할 때 까지 전차의 90%를 상실했고 차량 1200여대와 병력 26,000명 중 8,000명을 잃었습니다.16)
 이탈리아가 파견한 소규모 원정군,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단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 약자 CSIR” 은 1941~1942년 전역을 그런대로 잘 견뎌냈다고 평가받습니다. 이 군단은 북아프리카 전선에 파견한 기갑사단을 제외한다면 이탈리아군에서 가장 잘 장비된 사단들로 편성되었지만 루마니아나 헝가리군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전력이었습니다. 이 군단에 배속된 3개 사단 중 차량화사단Divisioni autotrasportabile이었던 파수비오Pasubio사단과 토리노Torino사단은 완전한 차량화 사단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문에 군단장 메세Giovanni Messe는 작전 중 종종 두 사단 중 한 사단에 차량을 집중시켜 차량화시키고 나머지 사단은 일반 보병사단으로 운용하기도 했습니다.17) 그리고 쾌속사단Divisione celere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PADA(Principe Amedeo d’Aosta)사단은 2개 기병연대로 편성된 기병사단으로 역시 기계화와는 거리가 먼 부대였습니다. 이탈리아 원정군단은 기동수단으로 5,500대의 차량과 1,550대의 오토바이, 4,600마리의 말/노새를 보유했는데 이러한 장비 내역은 반쪽짜리 기계화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기갑전력은 PADA사단에 배속된 60대의 L3/33(CV33)이 고작이었습니다.18)

독일의 1942년 전역은 이렇게 누적된 문제가 재앙으로 전이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동맹국들은 1942년 전역에 더욱 더 대규모로 참전합니다. 헝가리와 이탈리아는 원정군의 규모를 1개 야전군으로 증강했고 루마니아군은 1941년과 달리 독일군을 따라 남부 러시아 깊숙히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루마니아, 헝가리, 이탈리아 정부는 독일에게 75mm Pak 40과 같은 일선급 대전차포를 요청했습니다. 또한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1941년 전역에서 크게 소모된 기갑전력을 복구하는데도 독일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 역시 1941년 전역의 피해를 채 복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세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맹국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독일은 동부전선의 동맹국들에게 Pak 40 대신 노획한 프랑스제 75mm포를 개조한 Pak 97/38이나 50mm  Pak 38, 37mm Pak 36을 제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가장 강력한 75mm  Pak 97/38은 수량이 충분치 못해 이탈리아 제8군의 경우 1942년 5월 1일 기준으로 54문을 보유하는데 그쳤습니다. 이탈리아군 대전차 전력의 주력은 구식인 47mm 대전차포 297문이었고 이것은 T-34에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여기에 포병연대에서 야포로 사용하는 75mm포(Cannone da 75/32 Modello 37) 201문이 유사시 대전차전을 수행하는 정도였습니다.19) 루마니아군의 사정도 그다지 나을 것은 없어 1942년 전역이 시작될 무렵에는 37mm Pak 36이나 47mm 대전차포가 주력이었습니다.20) 그리고 이탈리아군 보다도 더 늦은 1942년 10월이 되어서야 Pak 97/38이 소량 보급되는데 그쳤습니다.
Pak 97/38은 1942년 11월 소련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을 때 독일의 동맹군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대전차포 였습니다. 루마니아군은 소련군의 동계반격 당시 보병사단 당 6문 정도의 Pak 97/38를 보유하고 있었고 여전히 대부분의 대전차 전력을 37mm나 47mm 대전차포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일은 대전차 지뢰조차 제대로 보급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더 나빴습니다.21)  루마니아군 기병사단의 경우는 상황이 더 나빠서 5기병사단이 75mm 대전차포 4문을 보유하는데 그쳤고, 루마니아군 8기병사단은 단 한문도 보유하고 있지 못했습니다.22) 이탈리아 제8군도 그다지 나을 것은 없어서 사단 당 4문에서 16문 정도의 Pak 97/38을 보유하는데 그치고 있었습니다.23) 그리고 Pak 97/38 조차도 T-34에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태가 속출하자 루마니아군과 이탈리아군은 급격히 붕되었습니다.24) 독일은 동맹국들에게 겨우 겨우 소량의 75mm 대전차포를 지원했지만 충분한 대전차용 탄약을 공급하지 못했고 이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기갑전력에 있어서도 별로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독일은 1942년 초 부터 루마니아군과 헝가리군에 구식화된 35(t) 전차나 38(t) 전차를 소량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3호전차나 4호전차와 같은 일선급 전차의 지원은 매우 소규모로 이루어졌습니다. 헝가리군은 1942년 하계공세가 시작되기 직전인 1942년 5월 까지 불과 22대의 4호전차만을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헝가리는 독일의 지원이 너무 소규모 였기 때문에 독일이 루마니아군에 신형 장비를 우선적으로 지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만까지 가질 정도였습니다.25) 하지만 전차 지원은 헝가리군이 루마니아군 보다 나았습니다. 루마니아군은 보충용으로 LT-35의 독일판인 35(t) 전차를 지원받다가 1942년 9월이 되어서야 겨우 75mm포 탑재 3호전차와 4호전차(50mm 장포신형 3호전차로 기술한 자료도 있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을 때 루마니아군 제1기갑사단의 주력은 87대의 LT-35, 35(t) 전차였고 3호전차(와 4호전차)는 21대에 불과했습니다.26)

공군에 대한 지원도 그다지 나을것이 없었습니다. 독일이 1942년 초 부터 루마니아 공군에 인도한 항공기는 글자그대로 한줌에 불과한 수준으로 Bf 109 E-7 15대(1월~3월), He 111 H-6 10대(1~3월), Do 17M 10대(4~5월), Ju 52/3m 18대, He 114 10대(4월), Fi 156 14대(4월) 정도였습니다.27)
헝가리의 경우는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헝가리 또한 산업기반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1938년 부터 항공산업에 대한 투자를 증대시켰고 1941년 6월 6일에는 독일과 항공기 공동생산을 위한 협약에 조인해 Bf 109, Me 210 그리고 DB 605엔진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헝가리의 항공산업은 독일의 부족한 항공기 생산능력을 보완해 주는 존재였던 것 입니다. 이 협약은 독일이 부품과 기술을 제공하는 대신 헝가리가 생산하는 항공기와 엔진을 일정 비율로 독일공군에 납품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즉 Bf 109는 독일과 헝가리의 비율이 2:1, Me 210은 1:1, DB 605엔진은 2:1였습니다.28) 물론 헝가리의 부족한 산업력으로 현대적인 공군을 단시간 내에 육성하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긴 했습니다만 헝가리의 노동력이 독일의 부족한 산업력을 보완하는데 사용된 셈입니다.

1943년 이후 독일의 군수물자 생산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동맹국에 대한 장비 지원도 다소 증가하게 됩니다. 루마니아는 1943년에 50대의 38(t) 전차외에 4호전차 31대와 돌격포 4대를 인도받았는데 1944년에는 4호전차 100대와  돌격포 114대를 인도받았습니다. 헝가리는 1944년에 4호전차 62대, 돌격포 40대, 헤처 75대, 판터 5대, 티거 3대를 인도받았습니다. 이밖에 다른 동맹국들도 예전 보다는 많은 전차를 지원받았습니다. 핀란드는 1943년 부터 1944년까지 4호전차 15대와 돌격포 59대를 받았고, 불가리아는 1943년에 38(t) 전차 10대와 3호전차 10대, 4호전차 46대, 돌격포 25대를 받았습니다. 슬로바키아는 1943년에 2호전차 16대, 38(t) 전차 37대, 3호전차 7대, 마더II 자주포 18대를 받았습니다.
항공기 지원도 비슷하게 증가해서 독일은1943년 부터 루마니아 공군의 현대화를 위해 Bf 109G, Ju 88, Ju 87, Hs 129등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1942년과 비교하면 1943년 이후의 항공기 지원은 다소 증가했습니다. Bf 109의 경우 1944년 7월에 60대, 8월에 40대가 루마니아 공군에 인도되었고 9월 이후로는 월간 20~25대를 인도할 예정이었습니다.29) 또한 뒤늦게나마 루마니아의 Bf 109 면허생산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 공군의 지속적인 손실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구식화된 He 111이나 Ju 86도 함께 지원되는 등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헝가리의 경우 1942년 부터 1944년까지 Me 210 270(272)대와 Bf 109 471(488)대를 생산했습니다.30) 하지만 루마니아는 비슷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하게 동원하지 못했습니다. 루마니아는 1943년에 Fi 156 3대, 1944년에 Fi 156 7대와 Bf 109 6대를 생산하는데 그쳤습니다.31)

독일의 지원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미국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입니다. 미국은 1942년 이후 동맹국들이 여러개의 기갑사단을 편성해서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장비를 원조했습니다. 독일이 동맹국들에게 수십대의 전차를 인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1942년만 하더라도 미국은 수백대의 전차를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에게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항공기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독일이 불과 수십대의 Ju 87을 인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1940년만 하더라도 미국은 수백대의 항공기를 외국 군대에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차량을 예로 들면 그 차이가 더 잘 드러납니다.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수십만대의 차량을 지원했습니다. 반면 독일은 자국의 차량 수요도 채울 수 없었으며 독일의 동맹국들은 그보다 더 심각한 기동력 부족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미국이 자국의 최신 장비들을 대량으로 공여할 수 있었던 반면 독일은 그럴 수가 없어 노획장비나 구식화된 장비들을 소규모로 제공하는데 그쳤습니다.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의 조병창”이었던 반면 독일은 동맹국들의 자원까지 쥐어짜야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얼마 되지 않는 동맹국들의 산업력조차 적절하게 동원하지 못했습니다.



1) Adam Tooze, The Wages of Destruction : The Making and Breaking of the Nazi Economy, (Viking Penguin, 2007),  p.411
2) Hans Werner Neulen, Am Himmel Europas : Luftstreitkräfte an deutscher Seite 1939~1945, (Universitas Verlag, 1998),  pp.37~38
3) John Weal, Junkers Ju 87 Stukageschwader of North Africa and the Mediterranean, (Osprey Publishing, 1998), p.16
4) Richard L. DiNardo, Germany and the Axis Powers : From Coalition to Collaps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44
5) Williamson Murray, The Luftwaffe 1933~45 : Strategy for Defeat, (Brassey’s, 1996), p.45
6) Karl-Heinz Frieser, Blitzkrieg-Legende : Der Westfeldzug 1940, (Oldenbourg Verlag, 1995), p.55
7) Richard L. DiNardo, ibid., p.77
8) Karl-Heinz Golla, Der Fall Griechenlands 1941, (Mittler&Sohn, 2007), p.65
9) Alexander Statiev, “The Ugly Duckling of the Armed Forces : Romanian Armour 1919~41”,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12, No.2(1999. 6), pp.220~224
10) Richard L. DiNardo, ibid., p.99
11) Alexander Statiev, ibid., p.225
12)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 (Mittler&Sohn, 1988), pp.21~22
13) Richard L. DiNardo, ibid., p.98, 111
14) Peter Gosztony, Hitlers Fremde Heere : Das Schicksal der nichtdeutschen Armeen im Ostfeldzug, (Econ Verlag, 1976), p.152
15) Alexander Statiev, ibid., pp.237~239
16) Peter Gosztony, ibid., pp.154~156, 161
17) Richard L. DiNardo, ibid., p.128
18) Gerhard Schreiber, “Italiens Teilnahme am Krieg gegen die Sowjetunion : Motive, Fakten und Folgen”, Jürgen Förster(hrsg), Stalingrad : EreignisㆍWirkungㆍSymbol, (Piper, 1992), p.259; Thomas Schlemmer,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Oldenbourg Verlag, 2005), pp.14~15
19) Thomas Schlemmer, ibid., p.29; Richard L. DiNardo, ibid., p.141
20) Richard L. DiNardo, ibid., p.141
21) Manfred Kehrig, Stalingrad : Analyse und Dokumentation einer Schlacht, (Deutsche Verlags-Anstalt, 1974), p.66; Richard L. DiNardo, ibid., p.150
22) Manfred Kehrig, ibid., p.667
23) Peter Gosztony, ibid., pp.501~507
24) Richard L. DiNardo, ibid., p.154
25) Richard L. DiNardo, ibid., pp.140~141
26) Manfred Kehrig, ibid., p.668
27) Hans Werner Neulen,  ibid., p.103
28) Miklos Szabo, “The Development of the Hungarian Aircraft Industry, 1938~1944”,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65(2001. 1), p.64
29) Hans Werner Neulen,  ibid., p.108, 114
30) Hans Werner Neulen,  ibid., p.329; 괄호 안의 수치는 Miklos Szabo, ibid., p.76
31)  Hans Werner Neulen,  ibid., p.328

2006년 9월 24일 일요일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재탕 + 약간 수정)

배군님 블로그이탈리아군과 관련된 재미있는 글이 올라와서 나도 한번 부화뇌동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전에 썼던 글을 아주 약간 고쳐서 재탕!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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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와 이탈리아 군부는 1941년 5월 30일에 구체적으로 소련에 대한 파병 규모를 결정했다. Gerhard Schreiber의 Italiens Teilnahme am Krieg gegen die Sowjetunion에 따르면무솔리니가 처음에 계획한 파병 규모는 1개 군단급으로 군단 사령부는 편성 당시 “Corpo d’Armata Autotrasportabile”라는 명칭을 달았고 예하에 제 9 차량화 사단“Pasubio”, 제 52 차량화 사단 ”Torino”와 제 3 쾌속사단(Divisione celere) “Principe Amedeo duca d’Aosta”을 배속 받았은 상태였다. 이중 제 9 차량화 사단과 제 52 차량화 사단은 포병연대와 사단 직할대만 차량화 되었고 보병 연대들은 도보 부대였다.
쾌속사단은 전차가 배속된 기병사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2개 기병대대로 구성된 2개 기병연대, 그리고 2개 대대로 구성된 1개 Bersaglieri 연대가 기간 전력이다. 이와 함깨 전차 1개 대대를 가지고 있었다.

1941년 7월 9일에 이탈리아 원정군은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단(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 - 약자로 CSIR - 로 명명됐다. 여기에 군단 직할로 제 63 “검은 셔츠” 여단과 트럭 대대 9개 등이 배속되었으며 총 병력 62,000명에 차량 5,500대, 말과 노새 4,600마리, 야포 220문과 대전차포 94문, L3/33 경전차 60대등으로 편성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육군에 덤으로 추가된 공군 병력에 대해서는 Hans W. Neulen의 Am Himmel Europas 64쪽에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영어판도 있는데 영어판은 아직 못 읽어 봤다.

항공대 사령관 – Carlo Drago 대령

22 독립 전투 항공단 – Giovanni Borzoni 소령
- 359 전투 항공대
- 362 전투 항공대
- 369 전투 항공대
- 371 전투 항공대
- MC 200 51대, CA 133 3대, SM 81 2대

61 독립 정찰 항공단 – Bruno G. Ghierini 중령
- 34 정찰 항공대
- 119 정찰 항공대
- 128 정찰 항공대
- Ca 311 32대, Sm 81 1대

245 수송 비행대 – Ernesto Caprioglio 대위, SM 81 10대
246 수송 항공대 – Nicola Fattibene 대위, SM 81 10대, 1941년 11월 25일에 러시아로 이동

무솔리니의 사위이고 외무상 이었던 치아노는 독일이 최정예 부대들을 투입한 소련 전선에 겨우 반 차량화된 이탈리아군을 파병해 봐야 “가난한 이웃”정도로 취급 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파병에 부정적 이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러시아 원정군은 7월 10일부터 8월 5일까지 주둔하고 있던 Verona 일대를 출발해 러시아로 향했다. 이탈리아군 중 최초로 전투에 투입된 것은 Pasubio 사단으로 8월 11일에 전투에 투입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원정군은 남부 전선에서 소련군의 동계 공세를 비교적 잘 막아 냈다.

추가 파병에 대한 논의는 1941년 가을에 시작되는데 10월 25일에 러시아 원정군을 15개 사단으로 증강하는 안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2개군단을 추가로 파병하기로 결정이 나고 1942년 4월 2일에는 제 8군 사령부가 러시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와 함께 알피니 군단(Corpo d'Armata Alpino), 제 2 군단이 러시아로 투입됐다. 파병군의 증강과 함께 명칭은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Armata Itaiana in Russia)”으로 변경 됐다. 1941년에 파병된 CSIR은 1942년 7월 9일 자로 제 35 군단으로 개칭되고 이탈리아에서 도착한 제 8 군 사령부 예하로 배속 됐다.

1941년에 파병된 사단들은 이탈리아군에서는 비교적 장비가 충실한 편 이었으나 1942년에 투입된 보병사단들은 사단 포병연대가 75mm 2개 대대와 100mm 1개 대대로 화력이 독일군 보병사단에 비해 한참 떨어졌고 사단의 대전차 전력도 1개 중대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동부전선에서 굴리기에는 확실히 모자란 전력이었다.

G. Schreiber의 글 269쪽에 따르면 이탈리아 제 8 군은 9월 말에 총 병력 229,000명에 차량 16,700대, 말과 노새 25,000마리, 오토바이 4,470대와 트랙터 1,130대, 야포 946문, 대전차포 297문, 대공포 52문, 박격포 1,297문과 L6 경전차 31대, 돌격포 15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P. Gosztony의 Hitlers Fremde Heere 217쪽에는 1942년 가을의 전력이라고 하면서 이탈리아 제 8군이 병력 227,000명에 경기관총 2,850정, 중기관총 1,800정, 박격포 860문, 20mm 대공포 225문, 야포 960문, 47mm 대전차포 380문, 76/47mm 대전차포 52문, L6 경전차 55대, 돌격포 19대, 차량 16,700대, 트랙터 1130대, 오토바이 4,470대, 말과 노새 25,000마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고 있는데 별 차이가 없는 걸로 봐서는 후자가 조금 더 뒤의 전력을 나타내는 게 아닌가 싶다. 두 자료에서 차이가 크게 나는 수치도 있는데 이건 아마 통계를 낼 때 장비 구분을 다르게 해서 그런 것 같다.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 직전의 이탈리아 제 8군의 전력은 Peter Gosztony의 Hitlers Fremde Heere의 권말 부록 B에 비교적 잘 나와 있다. 여기에 따르면 1942년 12월 14일에 이탈리아 제 8군의 전력은 다음과 같았다.
아래의 부대 중 제 2 사단과 제 3 사단은 산악 사단으로 불리는데 알피니 사단과는 구별 된다. 알피니 사단은 전문적인 고산 지대 전투를 훈련 받은 부대로 독일의 “Gebirgsjager”에 해당하며 산악사단은 경보병에 가까운, 굳이 비교하면 독일의 “Jager” 사단 정도에 해당된다. 고지대에서의 작전을 위해 편성되었지만 전문적인 산악 전투 훈련은 받지 않았다.


이탈리아 제 8 군

독일 제 29 군단

제 2 보병 사단 Sforzesc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3개 포대(149mm, 군 직할대, 11월 5일 자로 사단에 배속), 3개 포대(75mm, 군 직할대, 11월 1일 자로 사단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32문, 기타 4문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12월 14일자 기록 없음, 이 사단은 예하 전투부대들을 모두 군 직할대로 빼앗기고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 당시에는 1개 자전거 연대와 사단 포병 일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 52 차량화 보병사단 Torino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3개 포대(149mm, 군 직할대, 9월 21일에 사단에 배속), 2개 포대(149mm, 제 2 군단 직할대, 8월 9일에 사단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32문, 기타 6문

제 35 군단

제 9 차량화 보병 사단 Pasubio
보병 4개 대대 – 전투력 “강”, 1개 대대 “중”, 1개 대대 “보통”
포병 – 9 개 포대(75mm×6, 105mm×3, 전투력 80%), 2개 포대(149mm, 군 직할대 11월 12일에 사단에 배속, 전투력 80%), 2개 포대(149mm, 전투력 76%), 1개 포대(210mm, 군 직할대, 11월 25일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19문, 기타 6문

검은 셔츠 여단 “1월 3일”
보병 4개 대대 – 전투력 “강”
대전차포 – 47mm 11문

이 군단에는 독일 제 298 보병사단이 배속 되어 있었습니다.


제 2 군단

제 3 보병사단 Ravenn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5개 포대(105mm, 18문, 군단 포병, 10월 13일 에 사단 배속)
대전차포 – 47mm 36문, 기타 13문

제 5 보병사단 Cosseri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독일군 제 318 연대 – 3개 대대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3개 포대(75mm 10문, 10월 22일에 군으로부터 배속)
대전차포 – 47mm 40문, 기타 15문

검은 셔츠 여단 “3월 23일”
보병 4개 대대 – 전투력 “강”
47mm 대전차포 16문

이 군단에는 독일 제 385 보병사단이 배속되어 있었다.

알피니 군단

제 4 알피니 사단 Cuneense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8개 포대(75mm×6, 105mm×2), 2개 포대(75mm, 12월 1일자로 군으로부터 배속), 3개 포대(149mm, 11월 11일 자로 군단으로부터 배속)
대전차포 – 47mm 45문, 기타 36문

제 3 알피니 사단 Juli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대전차포 – 47mm 44문, 기타 6문

제 2 알피니 사단 Tridentin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기병 1개 대대 전투력 “강” → 이 기병 대대는 12월 2일에 군 직할대로 있던 기병 여단에서 배속됐다.
포병 – 8개 포대(75mm×6, 105mm×2), 4개 포대(75mm, 기병여단 소속, 12월 1일 자로 사단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40문, 기타 15문

기병여단
-제 3 기병연대 Savoia,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 기록 없음
-제 5 기병연대 Novara,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 기록 없음

Rossi 집단
-오토바이 대대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제 67 기갑 대대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로 부터 차출, L6/40경전차 40대)
-제 13 (자주)대전차 포 집단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L40 da 47/32 돌격포 11대)

제 156 보병사단 Vincenza – 기록 없음, 이 사단은 예하에 포병 연대가 없는 것으로 나온다.

독일 제 27 기갑사단과 385 보병사단이 12월 16일에, 독일 제 387 보병사단이 12월 20일에 추가로 증원됐다.

여기서 “기타”로 표기한 이탈리아군 대전차포는 대부분 PaK 97/38 으로 보통 독일쪽 문헌에서 이탈리아군의 “s.Pak” 이라고 표기한 것들은 대부분 이놈이라고 한다.

David Glantz의 From the Don to the Dnepr의 부록에 딸린 이탈리아 제 8 군의 전투 서열은 이것과는 조금 다른데 기갑 대대가 Sforzesca 사단에 배속되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위의 자료는 독일측의 1차 문헌을 참고로 한 것이어서 아마도 Glantz 의 저서에 있는 전투서열이 잘못 된 것으로 생각된다. Glantz의 저서에는 이탈리아 제 2 군단에 야포 132문, 35 군단에 156문, 29 군단에 170문, 알피니 군단에 216문의 야포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소련군의 공계 공세 시점에 이탈리아 원정군 항공대의 전력은 대략 다음과 같이 편성 되어 있었다.(H. Neulen 61쪽)

21 독립 전투 항공단
- 356 전투 항공대
- 382 전투 항공대
- 361 전투 항공대
- 386 전투 항공대
- MC.200 32대, MC.202 11대

71 독립 정찰 항공단
- 38 정찰 항공대
- 116 정찰 항공대
- BR 20 17대, Ca 311 14대

246 수송 항공대 – SM.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