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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2일 토요일

스탈린의 10월 혁명 24주년 기념연설

1941년 11월 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향해 대 공세를 시작한 직후 스탈린은 10월 혁명 24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을 한 뒤 꽤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이 연설문은 꽤 유명해서 인터넷에서도 영어로 번역된 내용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지난 포스팅, '스탈린의 7월 3일 라디오 연설'과 마찬가지로 『쏘련의 위대한 조국전쟁에 대하여』(1947)라는 스탈린 연설문집에 실린 ‘조선어’ 번역문을 약간 고쳐서 인용하려 합니다.

붉은육군과 붉은해군 동무들, 지휘관, 정치일꾼, 남녀노동자, 남녀콜호즈원, 지식노동자, 우리 원수의 후방에 독일 강도집단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된 형제자매, 독일 강점집단의 후방을 파괴하는 우리의 영광스러운 남녀 빨치산(원문에는 무려 “의병”으로 되어 있습니다)들이여!
나는 소비에트 정부와 우리 볼셰비키당의 이름으로 위대한 사회주의 시월혁명 제 24주년을 맞아 여려분께 경하와 축수(祝壽)를 드립니다.

동무들! 오늘은 고통스러운 상황아래서 시월혁명 24주년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강도집단의 배신적 침범이 우리에게 강요한 전쟁은 우리나라에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시적이지만 수많은 주를 잃어 버렸으며 원수들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문 앞에 다다랐습니다. 원수들은 첫 타격 이후 우리 군대가 혼비백산하고 우리가 굴복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원수들은 크게 오산했습니다. 우리 육군과 해군은 일시적으로 실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전선에 걸쳐 적군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적군에게 과중한 손실을 끼치었고 우리나라는 거국일치로 우리 육군과 우리 해군과 함께 독일 침략자들을 격멸하기 위해 단일한 전투 진영에 결속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보다 더 위태한 처지에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10월 혁명 1주년을 기념하던 1918년을 기억해 봅시다. 그 당시에 우리 강산의 4분의 3이 외국 군대 간섭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카프카즈, 중앙아시아, 우랄, 시베리아, 극동을 일시 상실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동맹이 없었으며 우리에게는 붉은군대가 없었으며 단지 군대를 갓 만들기 시작했을 뿐이었고 식량이 부족하였고 무기가 부족하였으며 의복이 부족했습니다. 그때 14개국이 우리나라를 침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심하지 아니하였고 절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때 전쟁의 불길 속에서 우리가 붉은군대를 또 우리나라를 거대한 군사기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때에 위대한 레닌의 기개가 우리를 군사 간섭자를 반대하는 진영으로 나서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군사 간섭자들을 때려 부수고 모든 잃어버린 강토를 찾았으며 승리를 이룩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정세가 23년 전 보다 한껏 나아졌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23년 전과 비교하면 몇 배나 공업이나 식량이나 원료로나 할 것 없이 다 풍족합니다. 우리에게는 독일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우리와 함께 단일한 전선을 이루고 있는 동맹국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히틀러의 폭정하에 들어있는 유럽의 모든 인민들의 동정과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조국의 자유독립을 사수하고 있는 훌륭한 육군과 해군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식량에 있어서나 무장에 있어서나 의복에 있어서나 다 심각한 부족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우리나라의 모든 인민이 우리 육군, 우리 해군을 받들면서 그들로 하여금 독일 파쇼 침략자들을 때려부수도록 돕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적 자원은 무궁무진합니다. 위대한 레닌의 기개와 그 승리의 기치가 23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를 조국을 위한 전쟁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원수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몇몇 소인배들이 멋대로 상상하는 것 처럼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악마가 스스로를 묘사하는 것 처럼 그렇게 두렵지 않습니다. 붉은군대가 광대짓을 하는 독일군대를 여러 번 도망치게 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습니까? 독일 선동가들의 과장된 헛소리로 판단하지 말고 독일의 실제 정세로 판단하면 독일 파쇼 침략자들이 재앙에 직면했음을 이해하는건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독일에는 기아와 궁핍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4개월에 걸친 전쟁에서 독일은 군인 4백 50만명을 잃었고 독일은 피를 흘려가며 그 인적 자원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분노의 심정은 비단 독일 침략자의 지배에 처해 있는 유럽 인민들 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는 독일 인민들도 느끼고 있습니다. 독일이 장기간에 걸쳐 이런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몇 달후, 반년이나 설혹 일년 정도가 지나면 히틀러의 독일은 그 범죄의 무게에 눌려 반드시 붕괴될 것 입니다.

붉은육군과 붉은해군 동무들, 지휘관과 정치일꾼, 남녀 빨치산들! 전 세계에서 독일 침략자의 약탈군을 쓸어버릴 역량인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독일 침략자의 지배하에 있는 유럽의 피 예속민족들이 여러분을 그들의 해방자로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위대한 해방적 사명이 여러분의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이 사명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 역할을 다 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수행하는 전쟁은 해방 전쟁이며 정의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의 위대한 조상 – 알렉산더 네프스키, 드미트리 돈스코이, 쿠시마 미닌, 드미트리 포잘스키, 알렉산더 수보로프, 미하일 쿠투초프의 영용스러운 모습이 여러분을 떨쳐 나서게 하기를! 위대한 레닌의 승리의 깃발이 여러분을 이끌기를!

독일 강도 무리를 철저히 격파하기 위하여!

독일 침략자들을 진멸하라!

우리의 영광스러운 조국, 조국의 자유, 조국의 독립만세!

레닌의 깃발아래서 승리를 향해 앞으로!

스탈린,『쏘련의 위대한 조국전쟁에 대하여』, 1947, 43-46쪽

덤으로, 유투브에서 영어자막이 달린 당시 스탈린의 연설 모습과 모스크바 열병식 장면을 빌려왔습니다. 유튜브 만세!


2007년 6월 20일 수요일

싸이의 병역 비리 문제에 대한 잡상

싸이의 병역 비리 연루 문제가 터지니 군대 다녀오신 분들께서 다시 한번 분통을 터뜨리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분통이 터집니다. 싸이가 아니라 국가에게 말입니다.

예. 이것 참 골머리 아픈 문제이죠.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의 의무”로서의 병역은 아주 골머리 아픈 문제입니다. 사실 말이좋아서 의무이지 언제 대한민국 역사상 병역의 의무라는 것이 모든 계층에게 공정히 부과된 적이 있긴 했답니까?
시민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헌법을 가진 국가에서 국민들에게 병역의무라는 걸 부과한다는 건 뭔가 아귀가 맞지 않습니다. 특히 그 의무라는 것이 공정히 부과되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병역의 의무”가 있다면 당연히 그 반대급부인 “권리”라는게 있어야 하는데 대한민국에서는 병역의무에 대한 반대급부로 간주 할 만한 그런 “권리”로 간주할 만한 것이 없거든요. 선거권은 19세기~20세기 초반 유럽 국가들이 병역의무의 반대급부로 내놓은 당근이지만 대한민국은 건국 당시부터 투표의 권리가 있었으니 이건 언급 대상이 아니지요.

결국 대한민국에서 병역의무라는 것은 시민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연 국가는 시민들에게 의무를 이행한 대가로 어떤 혜택을 베풀었습니까?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요. 뭐가 떠오르십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각나는게 있으신 분들은 제게 좀 알려주십시오.
놀랍게도 대한민국에서는 의무에 대한 대가는 없으면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물리적 처벌과 윤리적 비난만 있을 뿐 입니다. 의무를 이행해야만 하는 정당성을 제대로 납득시키지도 못하면서 의무를 강요하는 것이 대한민국입니다. 단순히 당신이 아니면 누가 나라를 지키냐고 묻지 말란 말 입니다. 그렇다면 왜 내가 나라를 지키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안 지켜도 되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있던가 내가 나라를 지키면 뭘 해 줄 건지에 대해 답을 줘야 할 것 아닙니까.
사실 심심하면 연예인 병역 비리를 터트리는 것도 매우 욕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지난 60년간 병역비리는 계속돼 왔고 빠질 인간들은 다 빠졌는데 어떻게 병역 비리로 걸려드는 건 연예인 뿐일까요? 국가에서 마음만 먹고 조사하면 그 이상의 병역 비리도 적발해서 처벌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왜 항상 만만한 연예인만 잡을까요? 그리고 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잔챙이들에 대해 분노만 하고 마는 것 일까요?
그리고 언론이라는 것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터질 때 마다 가쉽거리로만 다루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이가 아깝습니다.

이 따위 것이 민주주의 국가라면 차라리 민주주의를 하지 않는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군국주의 국가인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사례를 한번 볼까요? 1차 대전 당시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국가 총동원이라는 과제에 직면한 독일의 지배층은 단순한 애국심과 국민의 의무만 가지고는 동원을 할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바이에른 전쟁성장관인 크레슈타인(Kreß von Kressenstein)은 국민들은 국가가 더 이상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당연히 거기 대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언명하기 조차 했습니다! 전쟁 중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보수층은 사민주의적 개혁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국민에 대한 동의의 필요성이 점점 커지자 그 결과 독일 보수층은 1917년부터 사민주의적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전쟁 이후의 국가 개혁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했습니다. 1916~17년의 식량부족 사태 이후 독일 보수층들은 “국민”들에게 공짜로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러시아가 혁명으로 무너진 것은 이런 확신을 더 강화하는데 일조합니다. 그 결과 독일 제국의회에서는 전쟁 이후의 사회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물론 가장 보수적인 독일 군부, 특히 프로이센 장교단은 계속해서 이런 개혁 움직임에 제동을 걸긴 했습니다.) 전쟁이 독일의 패배로 끝났기에 이런 개혁은 시행되지 못 했지만 최소한 유럽에서 가장 보수, 반동적이라는 독일에서 이런 논의가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쯤에서 우리 시민들이 국가에게 그 동안 치른 병역 의무의 대가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성인 남성 대부분은 건국 이후 수 십년간 분명히 희생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뭔가 혜택을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는게 현실입니다. 이건 뭔가 이상한 게 아닐까요? 최소한 지금 나라가 돌아가는 꼴로 봐서는 뭐든 하나 달라고 요구하는게 정상인데 너무 조용한 게 이상할 지경입니다. 잔챙이에 불과한 연예인 한 두 명 따위에 분노하지 말고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국가에 뭔가 이야기 해야 하는게 아닐까요?

한줄 요약 : 국가는 병역비리 적발했답시고 연예인 조지는 건 작작하고 뭔가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으란 말이다!

2007년 3월 29일 목요일

주머니안에 있는 거스름돈의 처리

주머니 안에 있는 거스름돈을 정리하는 것은 꽤 골치아픈 일 입니다. 특히나 잔돈이 많을 경우에는.

소련 영내의 소수민족들에 대한 “개념적인 정복”은 특별한 기준이나 계획이 없이 시행됐다.

소련이라는 국가의 건설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정치적)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스탈린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다. (제정 러시아에서 탄압받은) “미개한” 소수 민족들이 자신들의 전통문화와 종교를 되찾는 것은 1927년부터 시작된 1차 5개년 계획의 성과에 실망하고 있던 소련 정부에게 상당히 곤란한 문제였다. 1929년 스탈린이 외친 과거와의 “대단절(Великий перелом)”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개혁을 가속화하는 것이 국가의 목표가 되었다. 소련정권은 소련 인민들의 “인류학적 진보”를 위해서“작고” “약한” 민족들을 보다 발전된 “상위민족(Главные народность)으로 통합하는 작업을 처음에는 서류상으로 시작했고 시행단계에서는 소수민족의 영토와 언어정책을 변경하는 것을 통해 추진했다. 즉 막스적 역사발전단계에서 여전히 봉건체제나 자본주의 단계에 있는 소련인민들을 공산주의 단계로 앞당겨 인도하려는 것 이었다. 이런 민족통합작업은 스탈린의 “대단절”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 최초의 인구조사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소련정권은 자국의 국민과 영토, 그리고 자원에 대한 중대한 정보를 정리할 수 있었다. 이때 조사된 인구통계는 1928년 발행되었으며 여기에는 166개 민족과 4개의 소집단, 그리고 6개의 기타 민족집단의 연령, 성별, 언어, 문자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Francine Hirsch, Empire of Nations : Ethnographic knowledge and the making of the Soviet Union, (Cornell University Press, 2005), p.137

1939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서는 166개의 민족이 62개의 민족과 30개의 소수민족으로 정리됐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잔돈이 많은 것 보다는 지폐로 바꾸는 쪽이 관리하기엔 편하겠지요.

2006년 4월 25일 화요일

두개의 군대, 두개의 혁명(재탕+약간 수정)

정치는 현실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래서 그런지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도 정권을 잡으면 그들이 뒤엎은 세력들 보다 더 정치적이 된다. 하기사. 대한민국의 얼치기 혁명가들은 이상도 없는 주제에 현실 감각도 없지...
이상주의자들이 가장 현실과 타협을 잘 하게 되는 것이 정치고 정치 중에서도 군사문제가 최고인 듯 싶다.
그 사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건 아마도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오늘날 책을 통해서 접하는 절대 왕정시기 일반 사병의 군대 생활은 안락하고 좋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던 것 같다. 기본적인 의식주 자체가 형편 없었고 당시의 보병 전술 상 엄한 군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군대내에서 구타도 공식적으로 장려 되었다고 하니까. 1764년에 베를린을 방문했던 보스웰(James Boswell)이란 영국인은 한 프로이센 보병연대의 훈련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유럽 최고의 군대라는 프로이센 군대의 훈련을 참관한 보스웰의 소감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공원에서 한 프로이센군 연대가 훈련하는 것을 구경했다. 병사들은 매우 겁에 질려있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훈련 중 조금만 실수하더라도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평상시의 생활이 이렇게 가혹하니 전쟁 때는 오죽 했을까. 7년 전쟁 다시 프로이센군의 병력 손실 중에서 약 8만 명이 탈영으로 인한 손실이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프로이센군대의 탈영에 대해 연구한 단행본도 한 권 있는 모양이다.

이러던 와중에 프랑스 혁명이 터졌다. 혁명으로 멋진 신세계로 변한 프랑스에서는 군대까지 멋진 신세계가 돼 버렸다. 평소 군생활이 비참했으니 이참에 한번 갈아보자!! 하는 게 정상이긴 하겠지만 그게 좀 정도가 지나쳤던 것 같다. 혁명 덕택에 대부분 귀족 출신인 장교들의 권위는 땅바닥에 처 박히게 됐다.
혁명으로 귀족들의 권위를 지탱해주던 사회 구조가 통째로 붕괴되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1788년 당시 9,478명이던 장교 중 약 6,000명 정도가 1791년에서 1792년 사이에 군대를 그만 두고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숨어 버렸다고 한다.

그 덕택에 프랑스 군대는 매우~ 매우~ 자율적인 군대가 되어 버렸다. 이제 장교를 병사들의 투표로 선출하고 갈아 치워 버렸으니 군대꼴이 제대로 돌아갈리가 없었다. 빠 드 깔레 연대 1 대대는 고다르(Godart)라는 부사관을 대대장으로 선출했는데 고다르가 훈련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당장 들고 일어나서 고다르를 교수형에 처하려 했다고 한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다행히도 고다르는 목숨을 건져서 나폴레옹이 황제가 됐을 때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자율적으로 험악하게 나가니 차라리 탈영을 하는 병사는 양반축에 들어갔다. 물론 탈영도 너무 많이 하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혁명 직전에 182,000명이었던 정규군은 1792년에는 11만 명으로 격감했다. 많은 병사들은 귀찮게 자율적으로 부대를 운영하는 것 보다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쪽을 더 선호했던 모양이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어쨌든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도 혁명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군대의 규율을 바로 잡아야 했다. 결국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은 체제 유지를 위해서 군사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그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잘 잡힌 규율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시작한 군대 개혁이란 솔직히 말해서 구체제하의 엄격한 규율을 다시 도입하는 것 이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헌병이야 말로 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 했다고 한다. 결국 혁명으로 인한 자유의 열기는 최소한 군대에서는 완전히 사그러 들었다.

사회는 자유로울 수 있어도 군대는 결코 그럴 수가 없는 조직이니.

그리고 대략 130년 뒤에 역사는 비슷하게 반복 됐다.

1917년, 이번에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 군대도 구타라면 유럽에서 손꼽히는 국가였다. 요즘도 러시아 군대의 구타는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하는걸 보면 러시아 군대는 별로 진보한 것 같진 않지만. 군인에 대한 처우도 좋지 않아서 하급 장교들은 기차의 2등 칸을 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예산 절감을 위해서 하급 장교들에게는 3등칸 요금만 지급했다나?

러시아는 표면상으로는 19세기 중반의 농노 해방 등의 개혁을 취해서 18세기 말의 프랑스 같은 체제는 아니었다. 실제로 장교 집단의 계급 구성을 보면 대령급 이하 장교의 40%는 과거의 농노 계급 출신이었다고 한다. 특히 보병 병과는 과거 농노였던 계층 출신의 장교들이 많았다고 한다.(상대적으로 기병 병과는 귀족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근위사단 같은 핵심 보직은 귀족 출신 장교들이 차지했다. 농노 계층 출신 장교들의 교육 수준과 자질이 낮았기 때문에 귀족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봐야 서유럽,특히 독일 장교단과 비교하면 러시아 장교들의 수준은 도토리 키재기 였지만.

러시아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혁명이 터지자 군대의 규율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이미 2월 혁명당시 군대는 충분히 엉망이 된 상태였다. 전쟁에 염증을 느낀 병사들은 제멋대로 탈영해서 귀향해 버리거나 부대에 남아 있더라도 장교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레닌이 10월 혁명을 일으킬 무렵에는 러시아 군대의 상태가 충분히 엉망이었다. 볼셰비키들의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한 정부군은 오히려 사병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해 버리면서 그대로 붕괴되었고 총사령관 두호닌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모길료프역 앞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오오 혁명 만세! 혁명 직후 볼셰비키는 장교 계급을 폐지하고 호칭을 사단지휘관, 연대지휘관 같은 식으로 바꿔 버렸다. 그리고 역시 프랑스 처럼 지휘관을 투표로 선출했다. 대개는 인기 많은 부사관들이 중대장이나 포대장으로 많이 선출 되었다고 한다. 35 보병사단의 경우 혁명 전에는 상병이었던 병사가 투표에 의해 사단 참모장으로 선출 됐다고 한다.

귀족 출신 장교들을 불신했던 자코뱅들처럼 볼셰비키들도 짜르 체제에서 양성된 장교들을 혐오했다. 혁명 직후에 약 8,000명의 장교가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지만 많은 볼셰비키들은 노동자 계급으로 새로운 장교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교들에게는 다행히도 내전이라는 불씨가 볼셰비키들의 발등에 떨어졌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투표로 선출된 지휘관들 상당수는 지휘 능력이 없다는게 드러났고 지나치게 “민주화된” 군대는 제대로 전투를 하지 못 했다.
트로츠키는 내전 초반에 30개 사단을 조직할 계획이었지만 전황이 악화되자 1918년 5월에는 추가로 58개 사단을 더 편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신규 부대 편성은 한시가 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짜르 시절의 장교들은 거의 대부분 지원만 하면 받아 들여졌다. 결국 구 체제의 장교들은 슬금 슬쩍 새로운 체제에 편입될 수 있었다. 내전이 끝난 뒤에 공산당은 다시 장교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30년대에 들어가면서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중단되고 장교의 권위는 상승했다. 그리고 2차 대전을 거친 뒤 등장한 “소련군(소련 군대가 정식으로 “소련군”이라고 불린 것은 2차 대전 이후라고 한다.)”은 장교의 권위가 절대적이 된 강압적인 군대가 돼 버렸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잘 보여주듯이 혁명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전쟁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는 절대 수행할 수 없는 일 이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구 체제의 군사 엘리트들을 불신했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이 만든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구체제 하에서 육성된 군사 엘리트들에 의존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정말 세상은 재미있는 곳이다. 뭐, 이런 몇 개의 사례를 보면 역사라는 건 돌고 도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는 대략 아래와 같다.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Gunther E. Rothenberg, The Art of Warfate in the Age of Napoleon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
Mark von Hagen, Soldiers in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 The Red Army and the Soviet Socialist State, 1917-1930
M. S. Anderson, War and Society in Europe of the old regime 1618-1789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Victor Serge, 러시아 혁명의 진실(한국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