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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21일 금요일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권 1호 특집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의 최신호인 제27권 1호를 훑어보는 중 입니다. 최근 러시아가 추진하고 있는 국방개혁에 대한 특집호로 구성되어 제2차 세계대전사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는게 유감입니다. 3월에 출간되다 보니 최근 전개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문제는 다루지 못했지만 이것은 아마 여름에 나올 제2호에서 다루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27권 1호에는 다음과 같은 일곱편의 논문이 실려 있습니다.


Roger N. McDermott, “The Brain of the Russian Army: Futuristic Visions Tethered by the Past”

Jacob W. Kipp, “‘Smart’ Defense From New Threats: Future War From a Russian Perspective: Back to the Future After the War on Terror”

Daniel Goure, “Moscow’s Visions of Future War: So Many Conflict Scenarios So Little Time, Money and Forces”

Timothy Thomas, “Russia’s Information Warfare Strategy: Can the Nation Cope in Future Conflicts?”

Alexander Golts, “Reform: The End of the First Phase—Will There Be a Second?”

Keir Giles, “A New Phase in Russian Military Transformation”

Dmitry (Dima) Adamsky, “If War Comes Tomorrow: Russian Thinking About ‘Regional Nuclear Deterrence’”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논문을 조금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논문인 로저 맥더못Roger N. McDermott의 “The Brain of the Russian Army: Futuristic Visions Tethered by the Past”는 러시아의 국방개혁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혁의 몇가지 측면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비판적인 경향이 강한 글 입니다.
 필자는 근본적으로 러시아 국방부의 기획 수립 능력 자체에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특히 소련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러시아군의 폐쇄성과 형편없는 통계 조사 능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사례의 하나로 러시아 국방부가 군 연금 대상자 통계조차 똑바로 내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합니다. 2006년에 러시아군이 작성한 통계에서는 2011년까지 연금 지원 대상자가 24,000명 감소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2011년이 되자 연금 지원 대상자는 45,000명이 더 늘어났다고 합니다.1) 필자는 빈약한 통계 조사 능력과 같은 부실한 기반에 의거해 수립하는 계획이 제대로 추진 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통계 자료를 획득할 수 없으니 연구조사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타당한 결론입니다.
 러시아군의 행정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례로 드는 것 중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국방개혁의 목표 중 하나는 장교단을 축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2010년까지도 감축 목표에 전역자로 인한 자연 감소를 반영하지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2) 이쯤 되면 주먹구구식이라고 비난을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필자는 국방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획 능력을 결여한 러시아 국방부가 러시아군 총참모부에 부담을 떠넘기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러한 사례 중 하나로 병력 운용의 문제를 들고 있습니다. 러시아 육군이 사단체제에서 여단체제로 개편되면서 전투 준비태세가 강화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12개월 징집병과 지원병으로 구성된 러시아군의 전투 준비태세는 의심스러운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필자는 러시아 국방부가 기획능력의 난맥상을 감추기 위해서 새로운 여단체제의 효율성을 과대선전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3)
 이같은 문제점은 장교에 대한 인사 정책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필자는 러시아군이 2008년에 장교의 숫자를 35만5명에서 15만명으로 감축하기로 한 결정이 체계적인 기획의 결과물이 아니라 단지 “외국 군대의 장교 비율을 참고해서” 장교의 숫자를 총 병력의 15%로 한다는 목표에 따라 설정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15만명으로의 감축을 시작한 2008년 부터 장교 감축의 목표를 22만명으로 재조정한 2011년 까지 장교를 감축하면서 일어난 주먹구구식의 행정 사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읽다보니 너무 황당한 내용이라서 제가 오독을 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장교 숫자를 감축해야 한다는 이유로 2년 동안 간부후보생을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애교일 정도입니다.4) 그리고 육군을 여단 체제로 개편하면서 이에 걸맞는 장교 교육 체계는 도입되지 않았다는 점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실제로 2009년도에는 러시아군 총참모장이 여단장 보직에 대령을 임용하기 위해 여러명의 대령을 면접한 결과 후보자로 올라온 대령의 대부분이 여단을 지휘할 능력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5) 제가 조지아 전쟁 시기에 썼던 “소련-러시아 장교단의 붕괴와 그 후유증, 1987~”이라는 글에서 이야기 했던 것 처럼 여전히 장교단 붕괴의 여파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다음으로는 러시아군의 여단 편제 개편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데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상군의 여단 대부분이 편제 미달이다.
2. 지원병과 징집병에 혼재되어 있어 전투 준비태세가 부족하다.
3. 대부분의 여단이 여전히 구식장비로 무장하고 있으며 신형장비의 도입이 지지부진하다.
4. 장교단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5. 지휘부의 능력이 부족하며 특히 대대급으로 내려가면 문제가 심각하다.
6. 유능한 부사관이 부족하다.6)

 2011년에 편성된 우주-방공군Воздушно-космическая оборона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을 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제가 정말 모르는 부분이니 생략하겠습니다.(;;;;)


 두번째 논문으로 실린 제이콥 킵Jacob W. Kipp“Smart’ Defense From New Threats: Future War From a Russian Perspective: Back to the Future After the War on Terror”는 소련 붕괴이후 러시아 군부의 미래전에 대한 전망을 소개하는 글입니다. 비록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 이전에 쓰여진 글이기는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를 접하고 보니 이해가 잘 가는 글 입니다. 냉전 이후 러시아를 둘러싼 안보정세의 변화를 러시아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잘 설명해 주는 글 입니다. 이 글은 별도로 소개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언제 번역할 시간이 나면 좋겠군요.


세번째 논문인 다니엘 고어Daniel Goure의  “Moscow’s Visions of Future War: So Many Conflict Scenarios So Little Time, Money and Forces”도 꽤 재미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읽다 보면 러시아라는 나라는 석유를 가진 북한 같다는 인상을 받게됩니다(.....) 이 글에서는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대응, 그 한계에 대해 평가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소련이 붕괴한 이후 경제적, 군사적인 몰락에 따른 트라우마로 러시아 지도층이 안보문제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며 때로는 피해망상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진단합니다. 이때문에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존의 세력권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고 보는 것 입니다.7)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이면 현재 러시아 지도층의 생각은 1차대전 직후의 독일 지도층과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필자는 러시아 지도층은 나토의 동진을 러시아에 대한 최대의 안보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과거 소련의 세력권에 있던 지역들이 러시아와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게다가 미국과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러시아의 국력은 열세하고 경제력과 인구 같은 치명적인 문제들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러시아 내부에서는 미국의 궁극적인 목표가 러시아를 미국 경제에 종속된 자원 수출국으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상당하다고 지적합니다. 푸틴 집권 이후 러시아 지도층이 보여주고 있는 강경한 태도는 러시아가 처한 전략적인 열세를 정치-군사적으로 만회하려는 움직임이라는 것 입니다.8)
 그리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러시아의 핵전력이 중요하게 다루어 집니다. 전략핵무기는 러시아가 서방, 특히 미국과 전략적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9) 이것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습니다. 1980년대 이래로 미국에게 큰 격차로 뒤지고 있는 재래식 정밀유도무기의 열세를 메울 대안이 바로 전술핵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러시아군은 여전히 전술핵 사용을 상정한 훈련을 활발히 실시하고 있다고 합니다.10) 또한 핵무기는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에 대항할 경제적인 수단이기도 합니다. 푸틴이 밝힌 것 처럼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미사일방어체계를 구축하지 않고 미국과의 핵경쟁을 하려면 더 많은 핵투발 수단을 보유하는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11)
 재래식 전쟁에 있어서는 러시아가 “세력권”으로 인식하는 지역에 대한 미국-나토의 제한적인 침공을 저지하는 양상의 분쟁을 예상하는 모양입니다. 동시에 서방과의 재래식 전력 격차를 줄이기 위해 네트워크 중심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테러전과 사이버전에 관한 내용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분야가 아니어서 생략합니다.


 네번째 글인 티모시 토마스Timothy Thomas“Russia’s Information Warfare Strategy: Can the Nation Cope in Future Conflicts?”는 러시아의 정보전, 사이버전 능력에 대해 다루는 부분인데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다섯번째 글은 알렉산더 골츠Alexander Golts의 “Reform: The End of the First Phase—Will There Be a Second?”입니다. 이글은 메르베데프가 집권하던 시기에 진행된 군사개혁을 평가하고 현재 푸틴 정권하에서 진행되는 군사개혁을 전망하는 내용인데 첫번째 글과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는 러시아군의 문제점은 첫번째 글에서 지적했던 내용들과 겹치는게 많습니다.
 먼저  현재 러시아의 징병제에 대한 비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러시아는 지속적인 인구 감소로 징집 가능한 인적자원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만18세의 남성은 2011년에 648,000명이었지만 2015년에는 592,000명으로 줄어들게 된다고 합니다. 인구 구조상 유지하기가 곤란하다는 이야기지요. 게다가 징집 기간이 12개월 밖에 안되는 것도 문제로 꼽고 있습니다. 6개월 단위로 신병들이 교체되는데 이런 상태로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지장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지적입니다. 게다가 러시아 정부와 군부에서는 징집병과 지원병의 비율을 조정하는 문제에 있어 상당한 혼란을 보여왔습니다. 장기적으로 지원병의 비율을 늘릴 계획이라곤 하지만 세르듀코프가 국방부 장관으로 있던 시기에 보여준 난맥상을 볼 때 계속해서 징집병 위주의 군대로 갈 수 도 있다는 지적입니다.12) 그리고 러시아의 경제력에 대한 우려도 있습니다. 필자는 현재 러시아의 경제 수준으로는 쇼이구가 국방부장관에 임명된 뒤 제시한 71만명 수준의 병력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가 현재 GDP의 3~4%를 국방비에 투입할 경우 적정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는 병력을 50~60만명 수준으로 평가합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이 경제력에 비해 과도한 병력 규모를 유지하려 하는 이유는 고위 장교단의 관료주의적 발상에 기인한다고 봅니다.14)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군요. 그리고 지원병에 대한 처우도 썩 좋지 않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425,000명의 지원병을 확보하는 계획도 실패할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 2003~2008년 기간 동안 추진된140,000명의 지원병을 확보한다는 계획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러시아의 지원병 중에서 3년간의 복무기간을 마친 뒤 복무기간 연장에 동의하는 인원은 전체의 3분의 1남짓에 불과하다고 합니다.15) 장교와 부사관의 자질 향상 및 충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민군관계에 대한 지적도 있는데 이건 이야기가 더 길어질 것 같으니 생략하겠습니다.
 

 여섯번째 글인 케어 자일스Keir Giles “A New Phase in Russian Military Transformation”는 맥더못이나 골츠와 달리 러시아의 국방개혁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2008년 부터 2010년까지 상당한 혼란이 있었지만 2011년 부터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갔다고 보고 있으며 현재의 푸틴 정권도 국방개혁에 힘을 실어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러시아의 방위산업과 무기 획득 체계의 개선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다만 러시아군의 병력 구조 문제나 군 간부단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는 점이 조금 의문입니다.


 마지막 글인 드미트리 아담스키Dmitry (Dima) Adamsky“If War Comes Tomorrow: Russian Thinking About ‘Regional Nuclear Deterrence’”는 아직 읽지를 않았습니다.


 꽤 흥미로운 특집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사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글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올 여름에 나오게 될 27권 2호에서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크게 다루지 않을까 싶으니 목을 빼고 기다려 봐야 겠습니다.


1) Roger N. McDermott, “The Brain of the Russian Army: Futuristic Visions Tethered by the Past”,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1(2014), p.16.
2) ibid., p.18.
3) ibid., p.19.
4) ibid., p.25.
5) ibid., p.27.
6) ibid., pp.29~30.
7) Daniel Goure, “Moscow’s Visions of Future War: So Many Conflict Scenarios So Little Time, Money and Force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1(2014), p.69.
8) ibid., pp.71~72.
9) ibid., p.75.
10) ibid., p.81~82.
11) ibid., p.85~86.
12) Alexander Golts, “Reform: The End of the First Phase—Will There Be a Second?”,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1(2014), pp.134~135.
13) ibid., p.135.
14) ibid., p.136.
15) ibid., p137.

2010년 4월 4일 일요일

미육군의 인사적체와 주방위군, 그리고 대공황

미국은 1차대전에 승리한 뒤 육군을 대규모로 감축합니다. 미육군은 1차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후에도 육군 병력을 50만명 정도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정치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이 사실상 전쟁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대규모 육군의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본 것 입니다. 물론 일본이라는 유력한 가상 적국이 있었지만 일본과의 전쟁은 주로 해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평시에도 대규모 육군을 유지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견해가 많았다고 합니다. 1920년 6월 4일에 제정된 국방법(National Defense Act)은 육군 병력 상한선을 장교 17,726명으로 포함한 28만명으로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국방법에서 명시한 병력 상한선은 어디까지나 평화시 유지할 수 있는 육군의 최대 규모를 명시한 것이었을 뿐 육군의 규모는 예산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결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국방법이 제정될 당시 미육군 병력은 약 20만명이었는데 1921년 1월에는 의회가 이것을 175,000명으로 줄이도록 했고 다시 같은해 6월에는 150,000명으로, 그리고 1922년에는 다시 장교 12,000명과 부사관 및 사병 125,000명으로 줄여 버립니다.1) 한편, 정규군을 보조할 주방위군의 병력 상한선은 435,800명 이었는데 이것 또한 실제로는 180,000명 수준에서 유지되었습니다.2)

미 육군은 이렇게 평화시의 병력이 큰 규모로 축소되면서 심각한 인사적체 문제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군대의 규모가 줄어들었으니 자리를 늘리는 것이 어려웠고 이것은 장교는 물론이요, 사병들이 부사관으로 진급하는 것 까지 매우 어려워 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군대라는 것이 피라미드식의 구조를 가진 조직이니 말입니다. 1923년의 통계를 보면 미육군의 소위는 1,184명, 중위는 2,783명 이었는데 대령은 509명이었습니다.3) 하지만 그나마 장교는 나았던 것이 사병들의 경우 진급을 위한 경쟁이 더 치열했습니다(;;;;)  1926년의 통계를 보면 미육군의 부사관 이하 계층의 구성비에서 사병(이등병~일병)이 차지하는 비중이 74.1%였는데 상병에서 하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22.7%, 중사에서 상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3.1%에 불과했습니다. 육군항공대의 경우는 사정이 눈꼽만큼 나아서 사병이 71.5%, 상병에서 하사가 23.0%, 중사에서 상사가 4.6%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4) 소위가 대령으로 진급할 가능성 보다 이등병이 상사로 진급할 가능성이 더 낮았던 셈입니다. 아무래도 직업군인으로 구성되는 군대인 만큼 사병들도 진급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는데 1차대전 직후의 미육군은 그 점에서 문제가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병의 진급문제가 당시에는 꽤 심각했는지 이와 관련해서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5)

한 보병중대의 중대원들이 이등병에서 일등병으로의 진급공고를 읽기 위해 부대 게시판 앞에 모여들었다. 병사 한 명이 불쾌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 이놈의 군대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호건은 일등병이 됐는데 이녀석은 겨우 '6년' 복무했단 말이야. 다른 좋은 데로 옮겨야 겠어."

이당시 미육군에서는 상사까지 올라가는 데 보통 24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육군항공대는 조금 더 사정이 좋아서 16년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게다가 1차대전 직후의 호황으로 일자리가 넘쳐났기 때문에 미육군은 급여 면에서도 민간보다 못했습니다.6) 진급도 잘 안되고 박봉이니 군대가 인기있는 직장일 수가 없었겠지요. 실제로 미육군의 재입대율은 대공황 직전인 1928년 0.47로 신병 두 명이 입대할 때 복무기간을 마친 병사가 제대하지 않고 군대에 남는 것이 한 명도 채 못되었다는 것 입니다.7)

하지만 대공황은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비록 진급이 안 되는 것은 대공황 전이나 그 후나 별 다를바가 없었으나 군대는 불황기에 안정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직장이었습니다. 미육군 장교들은 심각한 진급적체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계속 남는 방향을 택했습니다.8) 사병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대공황 전에는 1도 넘지 못하던 사병의 재입대율이 높아져 1931년에는 1.24, 1932년에는 2.99가 되었고 특히 육군항공대의 경우 1931년에는 1.69, 1932년에는 3.35가 되었습니다.9) 주방위군도 마찬가지여서 대공황이 밀어닥치자 주방위군 자원자가 폭증했다고 합니다.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 주방위군의 훈련 참석율은 평균 90% 이상을 상회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훈련에 참석할 경우 훈련수당이 지급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 의회가 국방비를 삭감한 덕분에 1934년에는 매주 훈련 수당을 지급하던 것을 1년에 36주만 훈련 수당을 지급하는 것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10)

어쨌거나 끔찍한 인사적체와 대공황을 견뎌낸 군인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군이 급속도로 증가하자 그때까지 군대에 남아있던 소수의 장교들은 특별히 무능하지 않은한 군 내에서 한자리씩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 Richard W. Stewart ed., American Military History Vol.II : The United States Army In A Global Era, 1917~2003(Washington, U.S.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2005) , pp.53~59
2) Michael D. Doubler, Civilian in Peace, Soldier in War : The Army National Guard, 1636~2000(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188
3)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11
4) Mark R. Grandstaff, Foundation of the Force : Air Force Enlisted Personnel Policy : 1907~1956(Washington, Air Force History and Museums Program, 1997), p.21
5) Victor Vogel, Soldiers of the Old Army(College Station,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0), p.3
6) Grandstaff, ibid., p.23
7) Grandstaff, ibid., p.31
8) Davis, ibid., p.12
9) Grandstaff, ibid., p.31
10) Doubler, ibid., p.191

2009년 11월 17일 화요일

1990년, 붕괴 직전 소련군의 일화

우울한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생각나는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죠.

1990년 6월 '병사의 어머니들' 이라는 운동단체가 과거 4~5년간 15,000명의 병사가 사망했다고 발표한 이후 부터 병사의 사망에 대한 통계가 다른 출처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 8월, 인민대표회의의 우즈베키스탄 대표 한 명은 "최근" 타쉬켄트 한 지역에서면 190명의 신병이 사망했으며 이미 1989년에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신병 430명이 사망했다는 폭로를 했다.

이 대표의 요청에 따라 국방부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병사들을 노린 살인범죄가 자행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조사했으며 국방부 대변인은 (1990년) 11월에 발표하기를 1989년 (1월 부터 ) 9월까지 사망한 우즈베키스탄 출신 병사는 167명이며 같은 기간 동안 러시아 출신은 123명, 우크라이나 출신은 25명, 카자흐스탄 출신은 15명, 벨라루스 출신은 13명, 그루지야 출신은 7명, 아제르바이잔 출신은 7명, 그리고 이 밖의 다른 공화국 출신 병사 일부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국방부 대변인은 이러한 증거는 우즈베키스탄 출신들만 차별적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사망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다른 민족(공화국)들이 그다지 수긍하지 않았으며 우즈베키스탄에서 처음에 제기한 의심을 더 확신하게 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병사의 사망에 대한 통계자료가 일관성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으나 발표된 통계를 보면 사망자의 숫자는 1990년 이후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야조프 원수는 12월에 있었던 한 비공개 회의에서 1990년 한 해에만 500명의 징집병이 자살했으며 같은 기간 동안 69명의 장교와 32명의 부사관이 살해당했다는 발언을 했다. 이 회의에서 중앙정치국장 니콜라이 쉴랴가 대령은 1990년 (1월부터) 11월까지 2,000명의 병사가 사망했다고 말했다.(이렇게 사망자가 많은 이유는 이 수치에 타지키스탄과 카프카즈의 전투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포함되었기 때문으로 추즉된다.)

Odom, William E. The Collapse of the Soviet Military, Yale University Press, 1998, p.293

붕괴될 무렵의 소련군대나 옐친 시절의 러시아군대 이야기를 읽어보면 한국군의 병영생활이 아무리 열악하다 해도 따라잡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옐친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군대내의 가혹행위를 촬영한 영상이 유포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지요. 이 무렵의 소련군 이야기는 술자리 안주거리로 적당한데 반복해서 이야기 하다보면 살짝 오싹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2007년 4월 29일 일요일

보불전쟁 이전 프랑스군의 기강 해이 문제

계속 해서 불법 날림 번역입니다.

프랑스군은 전반적으로 프로이센군과 달리 정신 무장이 잘 되어 있지 않았고 트로슈(Louis Jules Trochu)장군은 1864년 메츠(Metz)의 포병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프로이센군은 말단 사병들 까지도 애국심과 명예를 알기 때문에 전 유럽에서 가장 사기가 높다.”

트로슈는 프랑스군은 애국심과 명예를 모른다고 한탄했다. (프랑스 장교들은) 사병들을 무식한 촌놈이나 주정뱅이로 간주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처벌을 통해 규율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군의 기강은 극도로 해이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병사들이 극도로 무감각한 지경에 이르게 됐다. 프랑스 사병들은 작업 지시를 받으면 마지못해 움직이며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거요.”라며 투덜거렸다. 1865년에 메츠를 방문한 프로이센의 참관인은 프랑스 사병들은 훈련 시간에 동료들과 잡담을 했으며 종종 너무 심하게 잡담에 몰두해 장교가 명령을 해도 알아 듣지 못할 정도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을 남긴 프로이센 장교는 프랑스군의 신형 소총 교육시간에 있었던 일에 주목했다. 한 부사관이 소총을 보여주고 분해 절차에 대해 설명하는동안 병사들의 잡담은 점점 시끄러워졌고 마침내 한 장교가 참다 못해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라! 여기는 내무반이 아니다!(Silence! Vous n’êtes pas à la foire!)”

파리 근교의 부대를 방문한 다른 프로이센 참관인은 프랑스 군의 훈련은 매우 늦게 시작되고 종종 중단되기 때문에 프랑스 장교들은 부대 근처의 카페에서 시간을 때워야 한다고 기록했다.

프랑스쪽에서 남긴 기록도 비관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프랑스 육군의 감찰관은 1896년 7월 엑스-앙-프로방스(Aix-en-Provence)의 제 99보병연대를 시찰한 뒤 소총, 총기 수입도구의 상태가 매우 불량했으며 병사들은 체육시간에 여기 저기 늘어져 빈둥거리며 군악대원은 군가를 모르고 펜싱 교관은 펜싱을 제대로 못 하며 또 많은 수의 부사관들은 범죄를 저지른 사병들을 잡아 넣느라고 영창이나 군교도소를 들락 거린다고 지적했다. 앙드레라는 상병은 감옥에서 도둑 한명을 탈옥시켜 주둔지에서 그 도둑과 함께 훔친 돈으로 술을 마시다 적발됐다. 감찰관은 제 99보병연대의 시찰을 마친 뒤 장교들이 “건달”들의 기강을 바로 잡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적었다. 감찰관이 제 99보병연대를 시찰하고 기록한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은 사병들의 사격 실력만큼은 수준급이었다는 것이었다. 무정부주의적인 프랑스군 병사들이 유일하게 군대에서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격 뿐이었다. 장기간의 군복무와 믿고 본받을 만한 대상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군 병사들은 제멋대로에 기강이 엉망이었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이런 요소가 없었다. 그러니 1840년대에 프랑스군의 개편을 주도한 뷔고(Thomas Bugeaud) 원수의 말에는 어느 정도 귀담아 들을 만한 점이 있다.

“우리 병사들은 명령 받는 것은 오랫동안 참을 수 있다. 문제는 다른 것은 못 참는 다는 점이다.”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43~44

우리는 이와 유사한 광경을 예비군 훈련장에 가면 볼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