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이야기 하겠습니다. 벤 휘틀리(Ben Wheatley)의 The Panzers of Prokhorovka : The Myth of Hitler's Greatest Armoured Defeat는 제가 2023년에 읽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서적 중 가장 흥미롭고 유익한 책입니다. 1990년대에 칼 하인츠 프리저의 선구적인 연구가 발표된 이후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됐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 서술도 상당 부분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쿠르스크 전투와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해서는 충분히 많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틀리의 이 연구는 새로운 사료를 활용해 몇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밝혀냈습니다.
이 책을 구성하는 내용들은 많은 부분이 기존에 발표한 연구들을 보완한 것 입니다. 예를들어 프로호롭카 일대의 항공사진을 분석한 연구는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라는 제목으로 2019년 JOURNAL OF INTELLIGENCE HISTORY 18-2에 실렸습니다.
이 연구에서 가장 훌륭한 점은 새로운 사료 발굴입니다. 쿠르스크 전투, 그중에서도 프로호롭카 전투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게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휘틀리는 꼼꼼한 사료 분석을 통해 이런 선입견이 틀렸다는걸 입증했습니다. 휘틀리의 업적 중 특히 중요한 건 그동안 사료의 공백 이었던 1943년 7월 20일 부터 1943년 8월 1일 까지 독일측의 기갑차량 통계를 입증한 겁니다. 러시아에서는 프로호롭카 전투의 실상이 드러난 뒤 이 시기의 사료가 공백상태라는 점을 들어 독일측이 실제 손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물론 이건 러시아쪽에서 불리한 사실이 드러날 때 마다 내놓는 상투적인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휘틀리의 연구로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러시아측의 주장은 또 설득력을 잃었습니다. 저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료'를 분석했을 때 1943년 7월 11일 부터 7월 20일까지 무장친위대 제2기갑군단의 기갑차량 손실은 '최대 16대'이며 치타델레 작전 전 기간을 포함한 손실은 '41대'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독일측 1차 사료의 성격을 분석한 1장이 매우 중요하니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독일군 각 사단의 차량 '차대번호' 까지 확인하는 철저한 분석으로 연구의 신뢰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개별 차량의 차대번호까지 확인하고 있으니 이에 대해 러시아쪽이 반론을 제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러시아쪽에서는 휘틀리의 연구에 대해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죠.
통계 분석 뿐만 아니라 항공사진을 활용한 전투 분석도 매우 훌륭합니다. 저자는 프로호롭카 전투의 전술적 양상을 분석한 제4장에서 항공사진을 구술자료 및 문헌자료와 교차 검증해 전투를 미시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휘틀리는 소련군이 큰 피해를 입은 핵심적인 요인은 독일군의 진격에 당황한 소련군이 충분한 정찰 및 정보수집 없이 역습을 감행한 데 있다고 봅니다. 이때문에 소련 제5근위전차군은 소련군이 구축한 대전차호의 존재도 파악하지 못하고 돌격하다가 공황상태에 빠져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겁니다.
물론 휘틀리는 소련군이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승리'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소련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전투가 끝난 뒤에도 숫적으로는 여전히 독일군을 압도하고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소련군이 많은 수의 대전차포와 야포로 방어를 하고 있어 독일군의 진격이 매우 어려웠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이 연구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하리코프(하르키우) 함락 이후 시작된 독일군의 전략적인 후퇴와 이에 따른 기갑전력의 소모 문제입니다. 휘틀리는 1943년 8월 까지는 독일군이 전투에서 손상을 입은 전차를 회수해 작전가능 상태로 되돌리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기갑전력의 손실이 크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하리코프를 상실한 뒤 계속해서 철수를 하게 되면서 손상을 입은 전차를 회수해 수리하는게 어려워졌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독일 본토로 후송한 전차를 수리해서 복귀시키는 것 또한 독일 국내의 인프라 부족(대형 크레인 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이 점은 이 책의 제6장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휘틀리는 무장친위대 제2기갑군단의 기갑차량들은 쿠르스크 전투가 끝난 뒤에도 많은 수가 남아있지만 9월 부터 12월에 걸쳐 거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합니다. 제6장은 1943년 하반기의 작전에서 독일군의 기갑전력이 소모를 통해 붕괴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석의 밀도가 높고 1차 사료의 활용도 매우 탁월한 우수한 저작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꼭 읽어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