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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6일 일요일

『바르바로싸 : 중앙집단군 1941.1-12』 , 허진 저, 수문출판사, 2022

  『무장친위대 전사록』의 저자 허진이 올해 상반기에 바르바로사 작전을 다룬 책을 한권 출간했습니다. 수문출판사에서 나온 『바르바로싸 : 중앙집단군 1941.1-12』은 본문만 800쪽이 넘어가는 대작입니다. 책의 판형도 크고 편집도 빡빡하게 되어 있어 정보량이 매우 많습니다. 책을 처음 보면 분량 때문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이 책의 장점은 바로 이 방대한 양에 기반한 정보의 량 입니다. 저자는 독일의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작전 단위의 서술을 하면서 소부대의 전투들은 기존에 간행된 2차 문헌들을 인용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각 단계별로 독일 중부집단군 예하 부대들이 수행한 전투들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을 다룬 한국어로 된 문헌은 매우 부족합니다. 오래전에 나왔던 타임라이프 2차세계대전사의 해당 권 등 개설서 수준의 단행본이 몇권 있던 정도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이 책의 방대한 내용은 그 자체로 장점이 됩니다. 

 하지만  『바르바로싸 : 중앙집단군 1941.1-12』도 『무장친위대 전사록』의 한계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책이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저자 허진은 책의 서두에서 바르바로사 작전을 연구한 데이비드 글랜츠(David Glantz), 데이비드 스태헐(David Stahel) 등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스태헐에 대해서는 "러시아 민족주의와 공산당 기관지의 서술에 경도되어 있다"고 까지 비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전작 『무장친위대 전사록』에서도 글랜츠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 바 있는데 이 책에서도 이런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허진은 글랜츠를 필두로 한 소련 시각을 반영하는 연구들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있는데 무의미해 보입니다. 영어권에서 글랜츠가 확보한 학문적 위치는 너무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스톨피(R.H.S. Stolfi)의 고전적인 연구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스톨피가 바르바로사 작전이 독일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있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허진의 시각이 전통적인 1980년대의 시각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 책  『바르바로싸 : 중앙집단군 1941.1-12』이 글랜츠나 스태헐 등의 연구의 대척점이 되는 충분한 해답을 주는가? 제 생각엔 아닙니다. 이 책의 결론을 읽으면 저자 허진도 마땅한 답을 도출하지 못한 걸로 보입니다. 저자는 결론 부분에서 "소련군이 양의 질로의 전화라는 거의 초자연적인 총체적 능력을 발휘한 끝에 벼랑 끝의 조국을 구했다는 사실 하나만은 (중략) 인정치 않을 수 없는 요인임에는 분명하다."(818쪽)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런 설명은 기존의 연구들에서도 하던 이야기 입니다. 저자는 서두에서 기존의 연구들을 자신만만한 어조로 폄하하고 있으나 정작 이 책은 새로운 연구라고 하기에는 분석의 수준이 그리 치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수많은 전술 차원의 전투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런 전투들을 장황하게 일일이 나열하는건 기존 연구를 비판하는 것과 별 관련이 없습니다. 기존 연구들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기존 연구에서 쟁점이 되는 부분을 집어서 그 부분을 비판하는 분석을 하면 되고 이건 작전 차원의 서술로 가능합니다. 굳이 소대-분대 단위의 소규모 전투들을 일일이 나열하면서 초점을 흐트릴 필요가 없습니다. 전반적으로 책 전체의 초점이 모호하며 분석이 치밀하지 못한 점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저자의 문체입니다. 좋게 평가하면 아주 자유로운 서술을 하고 있는데 이런 문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매우 불편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입니다. 

"소련군의 앙증맞은 무승부는 실제적인 군사적 효과 이상으로 격상시키는 (...)" (16쪽)

"1차 대전 때와 같은 참호전도 없으며 겨울이 오기 전에 모스크바를 딸 수 있다는(...)."(486쪽)

"종횡무진, 신출귀몰, 동분서주하는 이 월드클래스 장군은 (...)" (521쪽)

"브라우히취 육군 총사령관은 (....) 사실상 공익요원 정도의 식물인간이었으며 (...)" (660쪽)

"물론 PPSh도 잔고장이 많은 신뢰성이 딸리는 화기였으나 (...)" (676쪽)

 이런 가벼운 문체 뿐만 아니라 비문 문제도 있습니다. 이 책에는 꽤 많은 비문이 있습니다. 이런건 편집 단계에서 잡아내야 하는데 그게 잘 된 거 같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면에서도 문제가 많습니다. 내용이 방대해서 교열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게 원인이 아닐까 짐작이 됩니다. 주석이 있어야 할 곳에 붙어있지 않거나 저자의 개인적 견해를 설명하는 부분에 별 관련없는 주석이 붙어있곤 합니다. 이런 문제는 편집자가 보고 바로잡아줬어야 하는데 그게 잘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자는 앞으로도 독소전쟁에 관련된 단행본을 계속 낼 계획이라고 합니다. 저자의 성향을 봐서는 앞으로 나올 책들도 지금까지 나온 책들과 같은 기조를 유지할 듯 하군요. 

2015년 10월 22일 목요일

Robert Forczyk,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1-1942: Schwerpunkt (Pen and Sword, 2014)


개인적으로 Robert Forczyk의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1-1942: Schwerpunkt는 최근 10년간 간행된 동부전선의 기갑전을 다룬 저작 중에서 한손에 꼽을 정도로 잘 씌여진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2차세계대전사 중에서도 독일 기갑부대의 작전은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분야지만 2000년대에 들어오기 전 까지는 과도하게 독일 편향적인 서술이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의도한 것이건 아니건 간에 독일군의 시각에 편중되어 씌여진 연구들은 그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이 책의 서술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청에 소장된 독일군 노획문서를 1차 사료로 하고, 주로 2차사료가 중심인 러시아-소련 문헌으로 보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자는 독소전 초반의 기갑 작전에 대해 균형잡힌 서술을 하고자 하지만 1차 사료가 독일쪽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주로 독일측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의외의 장점을 보여주는데 독소전 초반의 요란한 승리에 가려진 독일군 기갑부대의 한계점을 생생히 보여준다는 것 입니다.

Robert Forczyk이 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는 독소전쟁 개전 부터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날때 까지입니다. 저자는 전략적인 측면, 작전적인 측면, 전술적인 측면을 균형있게 다루고자 합니다. 그래서 책의 서두에서 독일과 소련 양측의 기갑전 교리, 기갑부대의 편성, 교육 및 훈련 수준, 전차와 지원 장비를 비롯한 무기 체계를 비교평가하고 각각의 장단점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서술한 것 처럼 1차사료가 독일쪽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독일군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 부각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저자는 주요 국면에서 독일군부의 전략적인 시야가 협소한 점을 통렬하게 비판하는데 이 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본론인 기갑작전에 대한 서술에 대해 이야기 해 보죠. 개전 초기에는 소련군이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막대한 인력 및 장비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이 시기 독일군의 문제점에 대해 주목하는 연구는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자는 이 시기 독일군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한계점에 대해 냉철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개전 초기 북부전선에서 만슈타인이 보여준 기갑군단 지휘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무모한 진격으로 군단의 측익과 후방을 위험에 빠트리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물론 독일군에 대한 비판에 머무르지 않고 소련의 선전으로 과장된 콜로바노프의 활약을 지적하는 등 균형 잡힌 서술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르바로사 작전 시기의 작전에 대한 서술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독일군 기갑부대의 소모에 대한 부분입니다. 저자는 독일군이 기갑부대의 장기적인 작전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보급 및 인력 보충 체계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소모전에서 어떻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과론적인 비판이라 하더라도 타이푼 작전을 전후한 시점에서 소모가 심한 기갑사단 일부를 독일 본토로 소환해 재정비를 했어야 한다는 지적은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소련군 기갑부대가 개전 초기의 패전의 경험을 통해 서서히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소련의 전시선전으로 개전 초기 몇몇 소련군 기갑부대의 활약상이 과장된 측면은 인정하면서도 소련군 지휘관들이 경험을 축적하면서 조금씩 독일군에 맞설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갔음을 강조합니다.

1942년 전역에 대한 서술도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1941~42년 겨울 전역이 마무리 된 뒤 독일과 소련측이 다가올 여름의 작전을 위해 기갑부대를 재정비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독일군과 소련군의 편제 개편, 장비의 개선, 인력 충원에 대해 서술하면서 이것이 42년 전역에 끼치는 영향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1942년 전역에 대한 서술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동안 잘 다루어 지지 않았던 1942년 하계 전역 당시 북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 지구에서 전개된 기갑전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독일군이 주공을 가한 남부전선의 이야기 겠지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관한 서술에서는 기갑부대를 시가전에서 소모시킨 파울루스의 미숙한 기갑부대 운용에 대한 비판, 독일 제6군이 소련군에게 포위된 뒤 전개된 독일군의 구출작전에 대한 비판 등이 주목할 만 합니다. 이중에서도 제6기갑사단장 라우스 같은 인물들이 전후 회고에서 구출작전의 경과에 대해 낙관적으로 서술한 점을 비판하는 부분이 훌륭하다고 생각됩니다.

비록 저자의 1차사료 활용이 독일측에 집중되고 있다는 한계점이 있으나 균형잡힌 서술을 하고자 하는 의도는 달성했다고 봅니다. 독일군의 작전-전술 단위의 탁월한 역량은 인정하면서도 전략적 시각의 결여, 특히 전쟁이 소모전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에도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결전을 위해 전력을 낭비한 점을 비판하는 것은 수긍할 만 합니다. 독일측 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덕분에 독일군 지휘관들의 회고록에 실린 내용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소련-러시아 쪽의 1차사료 인용이 부족한 점은 아쉽습니다.

2014년 3월 4일 화요일

Derailing Barbarossa : The 900th Rifle Regiment’s Pre-Combat Operations in the Summer of 1941

작년 말에 제 친구인 데이빗 골도프-리젠코프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6-4호에 “Derailing Barbarossa : The 900th Rifle Regiment’s Pre-Combat Operations in the Summer of 1941”라는 글을 공동으로 기고했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붉은군대의 한 소총병연대 작전을 다룬 글인데 올해 가을까지 두 편이 더 연재될 예정입니다. 데이빗은 미육군 공병출신으로 현재는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며 취미로 2차대전사를 연구중입니다. 데이빗은 주로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붉은군대의 작전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수집중이고 러시아 연구자들과의 교류도 활발합니다.


논문을 발표한걸 축하하는 뜻에서 한글로 번역해도 되겠냐고 부탁하니 고맙게도 흔쾌히 허락해 줘서 블로그에 올릴 수 있었습니다. 사실 좀 일찍 했었어야 하는데 이런일 저런일에 치여살다 보니 번역이 늦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흥미를 가진 분야라서 재미있게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데이빗이 앞으로 연재될 글들도 번역하도록 허락을 해 줬습니다. 앞으로 나머지 글들도 번역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을 저지하기 : 1941년 여름 제900소총병연대의 전투 준비 작전



데이빗 골도프-리젠코프, 콘스탄틴 팀첸코

스몰렌스크 전투는 독일육군 중부집단군과 붉은군대의 서부전선군 사이에 1941년 7월 10일 부터 9월 10일에 걸쳐 전개된 일련의 전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전투는 (오늘날의 벨라루스 영토인) 동부 벨로루시아와 (오늘날 러시아 연방의 일부인) 소련 서부의 스몰렌스크 지구에서 일어났다.

독일 중부집단군의 제2기갑집단과 제3기갑집단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초기 단계인 7월 중순에 강력한 양익 포위기동으로 벨로루시아 서부와 중부의 소련군 방어선을 붕괴시키고 서부전선군의 제16군, 19군, 20군 대부분을 스몰렌스크 지구에서 포위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СТАВКА는 서부전선군 사령부에 새롭게 편성한 야전군(제29, 30, 24, 28군)의 핵심 전력으로 특별히 편성한 “작전집단Оперативная Группа”들을 투입하여 고립된 부대들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작전집단 중 하나가 바실리 아파나스예비치 호멘코Василий Афанасьевич Хоменко소장이 지휘하는 제30군의 호멘코 작전집단이었다. 이 글에서 다룰 제900소총병연대는 코멘코 작전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무렵 독일 중부집단군은 이른바 서부방면군 사령부를 지휘하고 있는 소련 원수 세묜 콘스탄티노비치 티모셴코Семё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Тимошенко가 지휘하는 티모셴코 집단의 명령서를 기반으로 해서 작전 지도에 상대하고 있는 소련군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 글과, 앞으로 연재될 두 편의  글에서는 제900소총병연대에 초점을 맞춰서 이 연대가 1941년 7월 편성될 때 부터 이 연대가 1941년 여름 동안 독일군과 싸워나간 과정을 다룰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룰 연대는 제242소총병사단의 제900소총병연대로 호멘코 장군의 제30군으로 편성한 작전집단에 소속된 부대였다. 1941년 7월부터 9월까지 제30군에 소속된 제900소총병연대와 호멘코 작전집단은 서부전선군 사령관 겸 서부방면군 사령관을 겸한 티모셴코 원수의 관할하에 작전을 전개했다. 한편 서부방면군 사령부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휘하에 있는 전시 소련의 최고 군사지도기구인 최고사령부로 부터 작전에 대한 지침과 명령을 하달받았다.

제900소총병연대의 상급부대이며 이 연대에 여러가지 지원을 제공한 제30군의 호멘코 작전집단은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다.(굵은 글씨로 표시한 부대는 1941년 7월에서 8월 사이에 제900소총병연대에 배속되었거나 직접 지원을 제공한 부대이다.)

호멘코 작전집단
-제242소총병사단
-제250소총병사단
-제251소총병사단
-제542 군단포병연대
-제392 유탄포병연대(최고사령부 예비대)
-제871 대전차포병연대
-제107전차사단(8월에 배속됨)
-제51차량화 부교대대
-제263독립전투공병대대1)

제242소총병사단
-제897소총병연대
-제900소총병연대
-제903소총병연대
-제769경포병연대
-제772유탄포병연대
-제300독립대전차포병대대
-제519독립대공포병대대
-제321정찰대대
-제410전투공병대대
-제662독립통신대대
-제240독립화학중대
-제500수송대대
-제673야전우체국2)

참고 : 러시아어로 포병대대를 Дивизион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영어단어인 Division과 완전히 다른 뜻이다.

제900소총병연대와 그 상급부대인 제242소총병사단의 장교와 사병은 거의 대부분 모스크바 지역의 예비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900소총병연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연대본부3개 소총병대대(1, 2, 3대대) 
45mm 대전차포 포대 
76mm 보병포 포대 
120mm 박격포 포대 
정찰 소대(보병) 
정찰 소대(기병) 
고사포병 중대 
전투공병 중대 
화학 소대 
통신 중대 
의무 중대 
수의 중대 
연대 경비소대 
병기 정비반 
보급 정비반
군악소대3)

참고 : 연대본부에 속하는 지휘부와 지원을 담당하는 참모진은 다음과 같다. : 연대장반Командование, 본부반Штаб, 연대선임참모Началники служб, 당정치참모Партийно-политический аппарат, 보급부Хозяйственная часть
참고 : 포대батаре́я는 미육군에서 사용하는 용례와 동일하게 포병 중대를 뜻하는 것이다.

1941년 여름에는 야전군 단위의 전투서열이 매우 유동적이었다. 예를들어 제30군의 전투일지에 따르면 1941년 8월 15일 증원을 받은 직후의 전투서열은 제250, 242, 251, 162소총병사단과 제107전차사단, 제45기병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무렵 제30군은 제46혼성항공사단, 제392, 542군단포병연대, 제30다연장로켓포대, 제871대전차포병연대, 제263, 291전투공병대대, 그리고 제51부교대대를 증원받았다.4)

하위 단위인 제900소총병연대의 전투서열은 각 소총병대대 별로 3개 중대(제1소총병대대는 1, 2, 3중대, 제2소총병대대는 4, 5, 6중대, 제3소총병대대는 7, 8, 9중대), 1개 기관총중대(맥심 기관총 장비), 1개 82mm박격포 중대, 1개 45mm대전차포 소대, 그리고 통신소대, 의무소대, 보급소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소총대대 단위에서는, 각 소총병중대는 3개 소대, 1개 기관총소대(DS39 기관총 장비), 2인으로 구성된 저격조가 포함된 대대본부반, 의무반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각각의 소총병소대는 4개 소총병분대와 50mm박격포 1문을 장비한 1개 박격포분대로 구성되었다. 마지막으로, 붉은군대의 소총병소대는 분대장을 맡은 부사관 1명과 병사 10명으로 구성되었다.5)

첨부된 10건의 문서는 러시아연방 군사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제900소총병연대의 병사와 사병들의 편지, 연대의 상황보고서 등으로, 제900소총병연대의 편성, 초기 임무, 그리고 독일군과 접촉하기 까지의 이동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세 단계는 1941년 6월 말에서 7월 24일까지이다.

문서1은 제900소총병연대에 소속된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필리모노프라는 초급 간부가 1941년 6월 26일에 쓴 편지이다. 즉, 이 편지는 제900소총병연대의 편성이 계획되기도 전에 씌여진 것이다. 필리모노프의 다른 편지와 다른 병사들이 쓴 편지들은 이들이 제242소총병사단에 배속되어 다른 수천명의 군인들과 함께 벨로루시아를 비롯한 다른 전선의 붉은 군대를 증원하기 위해 전방으로 나가기 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문서2, 3, 4는 제900소총병연대가 편성될 당시 쓰여진 편지인데, 이 문서에서는 연대가 어떤 과정을 거쳐 편성되었는지, 군인들이 연대 예하부대에 어떻게 배속되었는지, 그리고 무기와 개인군장을 비롯한 각종 장비를 어떻게 지급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편지들은 필리모노프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편지들이다. 이 중에서 문서1, 2, 4, 10이 이 글에 인용되어 있는데 이 편지들은 우리에게 필리모노프가 6월 말 소집명령을 받아 1941년 8월 중순에 전사하기 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필리모노프의 ‘전우’가 필리모노프의 죽음을 그의 아내에게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는 문서3으로 포함시켰다.

필리모노프 중위의 편지에 따르면 그는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바르바로사 침공 작전 당일에 소집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이 소집명령은 모스크바의 몰로토프구에 있는 [군사위원회 소속의] 병무사무소에서 발급한 것이다. 필리모노프는 1941년 6월 22~23일 밤에 개인 소지품을 챙긴 뒤 출두했다. 군당국에서는 필리모노프를 북서전선군 방면으로 가는 기차에 태웠는데, 필리모노프가 탄 기차는 라트비아 공화국 국경에 도착할 무렵 방향을 돌려 제900소총병연대가 편성될 르제프로 향했다.(문서1과 2를 참고하라.) 필리모노프는 르제프에 도착하여 제900소총병연대 제2대대 제6중대의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필리모노프는 1941년 8월 12일 독일군의 박격포탄 파편에 치명상을 입을때 까지 제6중대장으로서 싸웠다.

문헌자료들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제242소총병사단과 제900소총병연대는 황급하게 편성됐다. 제900소총병연대와 이 연대가 소속된 제242소총병사단은 물론 제30군과 다른 세개의 야전군이 불과 3주 남짓한 사이에 서부전선군에 배속되어 편성을 마치고 집결지로 이동하여 전투에 투입되었다. 제30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제900소총병연대는 편성을 마친 뒤에 제242소총병사단의 예하 부대로서 새롭게 편성된 호멘코 작전집단의 집결지구에 투입되었다. 제30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제242소총병사단은 이동을 위해 2,500대의 마차를 징발했다고 한다.6)

제242소총병사단이 지정된 방어 구역에 도착한 다음에 그 예하의 연대들은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문서7, 8, 9를 참고하라.) 문서8과 9는 이어지는 문서로서 제900연대의 방어선 구축 속도를 보여주고 있다. 제900소총병연대는 8시간 반 동안 12개의 분대호(100% 완료), 28개의 분대호(60~70%완료), 128m의 교통호, 22개의 공용화기 진지(이를 구축하는데 시멘트와 통나무가 사용되었다.) 142m의 흉벽, 3개의 대피호(100%완성), 10개의 대피호(50%완성), 7.2km의 대전차호를 구축했으며 이 밖에도 24개의 사격진지와 9개의 대피호를 더 구축할 계획이었다. 필리모노프 중위가 쓴 또다른 편지인 문서10에는 제900소총병연대의 전방 이동이 독일군과의 전투가 임박했음을 파악한 상태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첨부한 문서의 번역에 관해 이야기하면, 문장 단위로 그 의미와 어투를 정확하게 살려가며 번역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복잡한 문장은 단문으로 나누어 번역하여 정확성을 높이려 했다. 전체적으로 모든 단어는 직역하는 대신 의미를 살리려 했으며 적적한 구두법과 함께 괄호를 사용했다. 지명과 인명은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시하여 구분했다. 하지만 대조국전쟁 시기 소련의군사문서들은 지명과 인명을 모조리 대문자로 표기하는게 일반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로 인해 중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으며, 지명을 다른 명사들과 구분해서 방향을 파악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그리고 모든 장교와 병사의 이름 뒤에 관행적으로 붙는 ‘동무’라는 단어는 번역을 하면서 생략했다. 마지막으로 복잡한 기술, 편제 용어에는 참고 설명을 붙였으며, 자료의 출처를 밝히기 위해 주석을 달았다.

근거가 되는 사료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이 글에서 사용한 연대급 부대의 문서와 모든 사단 및 야전군급 부대의 문서는 포돌스크Подолск에 위치한 러시아연방 국방부 중앙문서고ЦЕНТРАЛЬНЫЙ АРХИВ МИНИСТЕРСТВА ОБОРОНЫ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편지는 해당 인물의 가족과 모스크바에 있는 제242소총병사단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 이 글에 번역되어 실린 모든 문서들은 처음으로 공개된 것들이다. 도판1은 미국 메릴랜드 칼리지 파크에 위치한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소장하고 있는 독일 문서에 들어있는 것이며, 도판2는 포돌스크의 러시아연방 국방부 중앙문서고에서, 도판3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준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두 사람에게 특별히 감사의 말을 드리고자 한다. 데이빗 글랜츠David Glantz 예비역 대령은 많은 도움과  조언을 해 주었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제임스 버그만James Bergman은 이 글의 문체에 대해 건설적인 조언을 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이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소련군 소총병연대의 편제표 원본의 소장처를 알려주고 사본을 제공해 준 빅토르 쿠리쉬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자 한다.


문서자료


문서1. : 필리모노프 중위가 1941년 6월 25일 가족에게 보낸 편지.

“카톄, 타냐, 베라 잘 있었니?

내 안부를 전해. 우리는 [1941년 6월] 24일 오전 2시에 모스크바를 출발했어. 나는 지금 코브노* 방향으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는 중이야.

1941년 6월 25일 필리모노프*”

참고 :
*코브노는 리투아니아의 수도로 1940년까지는 독립국인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수도였다.
**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필리모노프 중위는 제900소총병연대 제2소총병대대 제6소총병중대의 중대장이었다.


문서2. : 필리모노프 중위가 1941년 6월 28일 가족에게 보낸 편지.

“카톄, 타냐, 베라 잘 있었니? 내 안부를 전해.

카톄, 우리는 지금 잠시 르제프에 머무르고 있어. 내가 전에 목적지*가 어딘지 이야기 했었지? 하지만 그게 변경됐어. 곧 알게 될 것 같아. 리투아니아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다시 돌아가라는 명령이 내려왔어. 자세한 내용은 지금 쓸수가 없어. 시간이 더 있다면 여기에 대해서 더 쓸수 있을텐데. 카톄, 돈 문제는 병무사무소**에 자주 물어보도록 해. 부대에서 봉급을 받는다 해도 정기적으로 받을 수는 없을 테고 우편으로 보낼 기회도 없을 거야. 아직은 내 주소를 알려줄 수 없어.***오늘 처음으로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어. 당신이 소포를 보낼 수 없으니 안타깝네. 엽서도 가지고 있지 않아. 집을 떠날때 깜빡하고 챙겨온 근무이력서****를 보내.

잘있어. 당신을 보고 싶어.

모두 잘있어. 아빠가, 그리고 당신의 남편이.
바샤*****”

참고 :
*원래 목적지는 코브노였다.(문서 1을 참고하라.)
**모병사무소는 군사위원회를 뜻한다.
***이 편지의 2쪽 상단에는 Ж 2-42-39 РВК라는 표시가 되어 있는데 РВК는 “구 군사위원회 Районный Военный Комиссариа́т”의 약자이다.
****근무이력서는 소련에서 직장과 주택을 얻는데 매우 중요한 문서였다. 필리모노프 중위는 이걸 전선에서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  바샤는 바실리라는 이름의 애칭이다.


문서3. 쿠추르코프 이병이 1941년 7월 11일 가족에게 보낸 편지.*

“사랑하는 뉴록과 제냐**에게

여기는 다 괜찮아. 거기는 어떻게 지내? 나의 임시 주소로 편지를 보낼 때 발송주소도 함께 적어서 보내줘. 내 주소는 다음과 같아. 칼리닌주, 르제프시, 사서함 125, 제10부대.뉴록, 당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그리고 다른 일들은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려줘. 그리고 가능하면 V. 쿠즈네초프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뭘 하는지 알려줘.

뉴라와 제냐, 너무 슬퍼하지 말아. 이곳의 상황은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나쁘지 않아. 나는 친구 두명과 같은 분대에 배속됐어. 고렐로프와 또 다른 한명이야. 그리고 알릴루예프는 다른 분대에 있지만 부대는 같아서 거의 매일 인사를 나누고 있지.
지금까지의 일은 이렇단다.

사랑하는 아빠가.

슈라. 1941년 7월 11일.”

참고 :
*이병은 Красноармеец로 소련군에서 가장 낮은 계급이다.
**뉴록은 쿠추르코프의 아내의 애칭이며 제냐는 그의 자식의 이름이다. 그리고 슈라는 러시아 이름 알렉세이의 애칭이다.


문서4. 필리모노프 중위가 1941년 7월 14일 가족에게 보낸 편지.

“1941년 7월 14일.

카톄, 타냐, 베라 잘 있었니? 내 안부를 전해.

카톄. 나는 아직 살아있고 몸도 건강해.

지금 우리는 약간의 준비작업*을 마쳤어. 며칠 내로 시작을 하게 될거야. 아직 전선에 도착하지는 않았어.당신이 [1941년 7월] 10일에 보낸 편지를 받았어. 당신이 모스크바를 떠나서 기뻐. 당신과 아이가 지내기에는 모스크바 보다 그곳**이 더 조용할거야. 재정 증명서***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기는 했는데 당신이 어느 모병사무소에서 그걸 수령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어. 답장을 보낼때 알려줘.만일 봉급을 받게 되면 내일 보내도록 할께. 그리고 다음달 부터는 당신이 머무르고 있는 곳에서 돈을 받을 수 있을거야. 그곳 생활에 대해서 써줘.

자세한 내용을 쓸 시간이 없어. 우리는 [1941년] 6월 23일 오전 5시까지 울야노스카야****에 대기하고 있었어. 오전 5시에는 붉은군대회관*****으로 갔어. 붉은군대회관에는 모스크바 곳곳에서 온 부대가 모여있었어. 그리고 오후 2시에는 [모스크바의] 르제프역에서 기차를 탔어. 나는 코브노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라트비아에 도착했을때 철도가 파괴되어 더 이상 이동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지 못했어.[1941년 6월] 27일에 우리를 태운 기차는 독일 비행기의 폭격을 받았어. 병사 몇명이 부상을 당했어. 공습을 받은 뒤 우리는 르제프로 가서 부대를 편성하기 시작했어. 질루페역******에 있는 동안 폭격을 받았어.”

[편지의 마지막장이 사라져서 여기에서 끊어진다.]

참고
*준비작업은 제900연대에게 내려진 건설 작업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문서 7, 8, 9를 참고하라.)
**필리모노프의 부인은 그녀의 고향인 툴라주의 모이세예블라로 갔다.(필리모노프 가족 소장 문서)
***재정증명서Денежный аттестат는 필리모노프의 부인이 병무사무소에서 돈을 수령하는데 필요한 서류였다.
****울야노스카야는Ульянская는 러시아혁명 이전에는 Николоямская로 불리웠으며 원래의 명칭으로 복구되었다.
*****붉은군대 중앙회관Централый Дом Краснои Армии은 군대와 관련된 공개행사를 개최하는 장소였다.
******편지에 젤루페츠라고 씌여있는 질루페는 러시아-라트비아 국경에 위치한 라트비아의 소도시이다.


문서5. 제900소총병연대가 테렌테보에서 1941년 7월 17일 오전6시에 작성한 상황보고1호.

1. 제900소총병연대는 올레니노 지구에서 행군을 시작해 1941년 7월 17일 오전 6시에 셀리자로보 지구에 도착했다.
제1소총병대대는 보코보 마을에제2소총병대대는 소콜로보 마을에제3소총병대대는 골룹예보 마을에
연대본부와 전투공병중대는 테렌테보 외곽에 주둔하고 있다. 야포 포대와 대전차포 포대, 기병정찰소대, 수송중대, 수의반, 통신중대, 박격포 포대는 르제프에서 이곳으로 오는 중이다.
2. 29명으로 이루어진 경비병력과 여러가지 화물을 실은 10대의 차량은 올레니노 지구에 남아있다.
3. 1941년 7월 17일 오전 6시 부터 연대장은 대대장들과 함께 정찰을 실시했고 각 대대에 임무를 하달했다.

[서명란]

출처 : TsAMO f.1523 o.1 d.3 l. 205.


문서6. 제900소총병연대가 테렌테보에서 1941년 7월 17일 오후4시 30분에 작성한 상황보고2호
.
1. 르제프에서 도착한 부대
   1) 통신중대
   2) 76mm야포 포대
   3) 45mm대전차포 포대
   4) 120mm박격포 포대
   5) 고사포 중대
   6) 기병정찰소대
   7) 도보정찰소대
   8) 화학소대
   9) [제900소총병연대] 제2대대와 제3대대의 나머지 병력
   10) 전투공병중대
   11) 수의반
   12) 수송중대
   13) 포병보급 및 정비대
   14) 약간의 탄약
2. 수송중대는 호먀코보에 주둔중이다.
3. 연대의 나머지 부대는 테렌테보에 주둔 중이다.
4. 연대장은 대대장들과 정찰을 마쳤다.

[서명란]

출처 : TsAMO f.1523 o.1 d.3 l. 207.


문서7. 제900소총병연대가 테렌테보에서 1941년 7월 18일 오후9시에 작성한 상황보고4호

1번
보병분대용 참호 96개를 구축하기 시작했음. 작업은 60% 완료.24개의 토치카*와 벙커**, 사격구역을 지정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서명란]

참고: 
*토치카Долговременная огневая точка, ДОТ는 “강화된 콘크리트 토치카”로도 번역할 수 있다.(TM30-544 소련군사사전, 1945를 참고하라.) 
**벙커Деревоземланая огневая точка, ДЗОТ는 “흙과 통나무 토치카”로도 번역할 수 있다.(TM30-544 소련군사사전, 1945를 참고하라.)
출처 : TsAMO f.1523 o.1 d.3 l. 201.


문서8. 제900소총병연대가 테렌테보에서 1941년 7월 19일 오전11시30분에 작성한 상황보고5호

1. 연대의 작전구역에서 110개의 분대호 구축을 시작했다. 내역은 다음과 같다.
   a. 23개의 분대호는 완료했으나 위장을 하지 않음.
   b. 49개의 분대호는 60%완료.
   c. 38개의 분대호는 25%완료.
2. 위장을 하지 않은 102m*의 교통호.
3. 2.3km**의 대전차호를 75% 완성.
4. 제2선 대전차호 구축을 위한 정찰 완료.
5. 24개의 벙커와 토치카의 위치를 선정.
6. 특수한 사단 임무를 위해 연대작전구역에서 2개 소총병중대와 대전차포소대, 1개 기관총소대를 차출.

[서명란]

참고: 
*미터는 길의 단위이다. 대상의 이나 깊이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원문에는 23km로 되어 있다. 오타로 보인다. 
***대전차포 소대Взвод противо-танкових орудий .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 소총병대대 소속의 대전차포 소대에는 45mm 대전차포 4문이 있었다. 소총병연대는 연대 직할의 대전차포 포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여기에는 12문의 45mm 대전차포가 있었다.7) 
출처 : TsAMO f.1523 o.1 d.3 l. 184.


문서9. 제900소총병연대가 테렌테보에서 1941년 7월 19일 오후8시에 작성한 상황보고6호

1. 위장을 하지 않은 참호 35개를 100% 완료.
2. 위장을 하지 않은 참호 77개를 70% 완료.
3. 230m의 교통호 구축.
4. 142m의 흉벽 구축.
5. 22개의 화기진지 완성.
6. 24개의 화기진지 구축 계획 수립. 건설자재 : 목재, 시멘트, 자갈.
7. 4개의 대피호 100% 완성
8. 10개의 대피호 50% 완성.
9. 9개의 대피호 구축 계획.
10. 9.5km의 대전차호 90% 완성.

[서명란]

출처 : TsAMO f.1523 o.1 d.3 l. 183.


문서10. 필리모노프 중위가 1941년 7월 23일 가족에게 보낸 편지.

야전우체국 673호, 제900소총병연대, 제6중대, 필리모프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카톄, 타냐, 베라 잘 지내고 있어? 내 안부를 전해.
카톄, 나는 아직 살아있고 건강해. 우리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전진하고 있고 아마 몇시간 내에 적과 싸우게 될거야.[1941년 7월] 20일에 칼리닌주의 셀리자로보라는 곳에서 당신에게 돈 1,300루블을 부쳤어. 만약 이걸 받지 못하면 요청을 하도록 해.

이제 안녕.

바샤.


 
1) Boevoi sostav Sovetskoi armii, chast’ 1 (iiun’-dekabr’ 1941) [The combat composition of the Soviet Army, part 1 (June – December 1941)] (Moscow: Voenno-istoricheskii Otdel’, Voenno-nauchnoe Upravlenie Generalnogo Shtaba (Military-Historical Department, Military-Scientific Directorate of the General Staff, 1963).
2) Direktiva G.Sh D-043,perechen’ 5: Strelkovikh, gornostrelkovikh, motostrelkovikh i motorizovannikh diviziy vhodivshiv v sostav deistvu’ushei armii v godi Velikoi Otechestvennoi voiny 1941–1945 (HQ Directive D-043, List #5: Rifle, Mountain, Mechanized and Motorized Divisions That Were Part of Active Army during the Great Patriotic War 1941–1945), 1970.
3) Shtat 04/401 strelkoviy polk (Troops Organization & Equipment Table 04/401 Rifle Regiment),5 April 1941을 참고하라.
4) TsAMO f.208 o.2511 d.211 l.56를 참고하라.
5) Shtat 04/401 strelkoviy polk (Troop Organization & Equipment Table 04/401 Rifle Regiment),5 April 1941을 참고하라.
6) TsAMO f.208 o.2511 d.1045 l.5를 참고하라.
7) Shtat 04/401 strelkoviy polk (Troop Organization & Equipment Table 04/401 Rifle Regiment),5 April 1941을 참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