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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0일 토요일

어떤 여가 활동

갓 소위로 진급한 보직 대기 장교들은 주데텐란트의 슈트라우빙(Straubung)에서 압도적인 물량과 병력을 가진 미군을 상대하게 됐다. 우리쪽은 저항해 봐야 희망도 없었고 미군이 우리 부대를 그냥 지나쳐 갔기에 싸울 필요도 없었다. 우리에겐 무기도 별로 없었다. 며칠 뒤 우리는 미군에게 항복했다. 미군은 우리를 그라펜뵈어(Grafenwöhr)에 있는 훈련장으로 이송했다. 그리고 포로들을 병과에 따라 분류했다. 미군 경비병들은 우리를 공정하게 대해줬지만 심문은 힘들었다. 식량은 부족하고 포로는 많아서 항상 굶주림에 시달렸다. 병사들은 잡지에 있는 벌거벗은 여자들의 컬러 사진을 돌려 보는게 낙이었다. 나는 이런 걸 처음 봤다. 나는 농부의 아들이고 추수철이 다가와서 금방 석방됐다. 1945년 6월 나는 석방되어 쾰른 근처에 있는 부모님의 농장으로 돌아갔다.


제505중전차대대 소속이었던 야콥 회게스(Jacob Höges)의 회고

Dale Richard Ritter, Charging Knights on the Eastern Front: The Combat History of schwere Panzer-abteilung 505 (Winnipeg: J. J. Fedorowicz, 2019), p.304.

2020년 8월 17일 월요일

체코 정부 소유의 무장친위대 사료

 냉전의 종식은 제2차세계대전 연구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었습니다. 냉전 시기에는 공개되지 않았던 많은 사료들이 공개되면서 특히 독소전쟁 연구가 급격히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요. 러시아 정부가 독일 정부에 반환한 사료와 동독 정부가 소장하고 있던 사료가 통일 독일정부의 소유가 된 일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외에도 동유럽의 공산 국가들이 붕괴하면서 새롭게 서방에 공개된 자료도 많습니다. 체코 정부가 소장하고 있던 무장친위대 사료도 그 중 하나입니다. 프라하의 군사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무장친위대 사료들이 1990년대에 공개되면서 무장친위대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들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2012년 출간된 Norbert Számvéber의  Waffen-SS Armour in Normandy가 대표적입니다. 


 프라하 군사문서보관소가 무장친위대 사료를 소장하게 된 계기는 꽤 재미있습니다. 친위대 본부는 1944년 초 부터 베를린 북쪽의 오라니엔부르크(Oranienburg)에 보관하고 있던 서류들을 연합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프라하 동쪽의 자스무키(Zásmuky)로 옮겼습니다. 독일이 패망하자 이 문서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소유하게 됩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 된 뒤 무장친위대 문서들은 비공개로 제한적인 접근만이 가능했습니다. 동독 정부가 1950년대 부터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의 교류하에 무장친위대 자료 중 일부를 반환받았습니다. 동독정부는 1957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로 부터 약 10톤 가량의 문서를 반환받았는데 이것은 친위대원의 신상문서, 무장친위대의 군법회의 기록 등이었다고 합니다. 동독정부는 반환받지 못한 문서에 대해서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협조하에 마이크로필름을 촬영하고 해제를 작성했지만 동독이 붕괴될 때 까지도 이 작업을 마무리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야 프라하에서 보관하고 있던 무장친위대 사료들이 본격적으로 공개되게 됩니다. 통일된 독일 정부는 체코 정부가 소장하고 있는 독일 사료들에 대한 조사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991년 부터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와 체코 군사문서보관소 사이에 공식 교류가 시작됐습니다. 1993년에는 이때까지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52호에 Zuzana Pivcová가 쓴 프라하 군사문서보관소가 소장한 무장친위대 사료에 대한 짤막한 해제 "Das Militärhistorische Archiv in Prag und seine deutschen Bestände"가 발표되었습니다.


프라하 군사문서보관소가 소장한 무장친위대 사료군의 특징은 연대급 부대들의 문서가 주종을 이룬다는 점 입니다. 무장친위대의 야전군~사단급 문서들은 미국이 노획하여 1970년대까지 원본을 미국이 소장하고 있다가 서독 정부에 반환했습니다. 미국은 노획한 무장친위대 문서들을 다른 독일 문서와 마찬가지로 RG242 문서군에 넣어 관리했습니다. 프라하 군사문서보관소는 연대급 부대들의 사료를 소장했는데 이러한 문서들은 보다 미시적인 전술 단위의 연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물론 프라하 군사문서보관소에도 군단급의 상급부대 사료들이 있습니다만 미국이 가지고 있다가 독일 반환한 것에 비하면 소량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Norbert Számvéber의  Waffen-SS Armour in Normandy가 무장친위대 제12전차연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2000년대 이후 간행되고 있는 무장친위대에 관한 서적 중 많은 수가 프라하 군사문서보관소의 사료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체코 정부가 소장한 사료들은 현재 독일 정부가 소장한 무장친위대 사료들의 빠진 부분을 보완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2020년 7월 31일 금요일

To Defeat the Few: The Luftwaffe’s Campaign to Destroy RAF Fighter Command, August-September 1940

Osprey 출판사에서 낸 Douglas C. Dildy Paul F. Crickmore To Defeat the Few: The Luftwaffe’s Campaign to Destroy RAF Fighter Command, August-September 1940를 읽었습니다. 영국본토방공전을 독일 공군을 중심으로 분석한 저작입니다. 필자들은 히틀러와 독일공군 수뇌부의 전략적 목표와 작전 단위의 결단을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작전 단위 이상의 전개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전술 차원의 공중전 교환비나 격추 전과 검증은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고급 지휘관들의 결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경우에 한해서 독일공군과 영국공군이 자군의 전과와 손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언급합니다.

 

이 책은 총 14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1장부터 3장을 영국본토방공전의 전사인 서부전역 항공전과 됭케르크 항공전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4장부터 6장까지는 서부전역 이후 독일 수뇌부의 전쟁지도 방침, 독일공군과 영국공군의 조직과 편성, 교리, 전술을 비교분석 하는 내용입니다. 7장부터 13장까지는 영국본토방공전을 단계별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습니다. 7장은 영국해협의 해운 봉쇄를 위한 해협항공전(Kanalkampf), 8장은 제뢰베 작전의 입안, 9장부터 12장까지는 812일부터 917일까지의 영국본토방공전을 단계별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13장은 9월 공세에서 패배한 독일 공군이 10월까지 진행한 공세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14장은 결론입니다.

 

저자들은 독일공군의 입장에서 서술을 하기 위해 영국본토방공전의 각 단계를 독일측의 기준에 맞춰 분류하고 있습니다. 각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우전단계, 프랑스전역 종결 직후부터 194087일까지: 영국해협 해운 봉쇄를 위한 해협항공전이 진행된 시기.

11단계, 88~823: 바다사자작전 준비 차원에서 영국 남부의 비행장과 해군 기지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이 진행된 시기.

12단계, 824~96: 영국 남부의 제공권 장악을 위해 영국공군 제11비행단(No.11 Group)의 기지에 공격을 집중한 시기.

21단계 , 97~919: 런던과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공격을 집중한 시기

22단계, 920~1113: 런던을 중심으로 전투폭격기(Jabo)의 주간 공격과 폭격기부대의 야간 폭격을 병행한 시기.

23단계, 1114~1941521: 영국 본토에 대한 대규모 폭격의 최종 단계. 영국에서 통칭 야간 전격전(Night Blitz)로 칭하는 시기.

 

작전사를 다루는 연구들이 모두 그렇듯 이 책의 핵심 주제는 독일 공군이 왜 영국본토방공전에서 패했는가?”입니다.

 

저자들은 독일 공군의 전술적 우위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문제는 작전~전략단위의 능력입니다. 결국 영국본토방공전이라는 전략 단위의 항공전에서 독일공군이 패배한 원인은 작전~전략 단위의 역량 부족에서 찾아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이 책에서는 먼저 독일공군본부의 조직적 문제를 지적합니다. 독일공군은 신생 병종이었고 이 때문에 공군본부를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을 만큼의 고급장교를 육성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독일공군의 고급장교들은 대부분 육군 출신으로 항공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인물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구조적 문제는 1940년 시점에서 독일공군본부에는 공군이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전략단위의 작전을 기획할 조직이 없었다는 점 입니다. 저자들은 19406월 시점에서 독일공군본부의 참모조직은 독일육군본부나 독일해군본부의 전문적인 참모조직과 달리 공군사령관 헤르만 괴링의 개인 참모조직에 불과한 수준이었다고 비판합니다.

오토 호프만 폰 발다우(Otto Hoffmann von Waldau) 소장이 이끄는 독일공군본부의 작전참모국은 작전과, 훈련과, 정보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공군본부의 작전참모국은 부대의 이동과 작전 목표 선정 및 우선순위 부여, 목표 목록 및 정보 하달 등의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실제 작전 수립은 항공군(Luftflotten) 사령부와 항공군단 사령부 단위에서 담당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작전-전술 단위에 불과했으며, 이때까지 지상군의 작전과 연계된 작전만을 수행해 왔습니다. 공군본부의 작전참모국이 각 항공군사령부에 작전 목표 목록을 하달하면 항공군사령부는 지원하는 육군의 집단군 사령부와 협의해 목록 중에서 목표를 선정하고 실제 작전을 입안하는 방식이었습니다. 19406월 시점에서 독일공군본부는 단독으로 영국공군을 제압하는 전략 단위의 항공 작전을 수립해야 했습니다. 독일공군본부가 여지껏 단 한번도 수행해 보지 못한 과제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정보 문제를 지적합니다. 사실 정보 수집 및 분석능력 부족은 독일 공군은 물론 육군본부의 참모조직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영국본토방공전 기간 중 독일공군본부 작전참모국의 정보과장은 요세프 슈미트(Josef Schmid) 중령이었습니다. 정보과의 정보 수집능력은 상당히 빈약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전쟁 이전에는 각국 주재 공군무관부와 국방군 방첩국(Abwehr)의 정보수집에 의존했습니다. 그리고 친위대 보안국(SD, Sicherheitsdienst)의 해외자료 수집에도 크게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친위대 보안국은 군사정보 수집을 주목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안국을 통한 군사정보 획득은 불규칙했습니다. 이런 빈약한 정보수집능력 조차 전쟁이 발발하면서 무너지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인적자산을 통한 정보수집은 마비되었고 항공정찰 및 감청이 주된 정보수집 수단이 됩니다. 정보과장 슈미트 중령의 분석 능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지만 수집되는 첩보가 감소하니 분석력을 발휘할 여지도 줄어든 셈 입니다. 그리고 슈미트의 분석력 또한 점차 감퇴해 결국에는 객관적인 분석력을 상실하고 상관들이 원하는 정보를 가공해서 바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합니다.

 

저자들은 슈미트가 8월의 공세 결과를 잘못 평가한 점을 예시로 듭니다. 1940819일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공군 수뇌부 회의에서 슈미트가 보고한 정보분석은 완전히 잘못된 분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슈미트는 1940 71일부터 영국공군이 561대의 전투기를 전투 손실로 잃었으며 추가로 196대의 전투기가 전투외의 원인으로 파괴되었다고 추산했습니다. 반면 같은 기간 보충된 전투기(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270~300대라고 과소평가했습니다. 그는 영국공군이 본토 남부지역에 투입할 수 있는 주간전투기가 330대 가량일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슈미트는 이후에도 괴링에게 계속해서 부정확하고 과장된 내용을 전달했습니다. 그는 824일부터 92일까지 제2항공군의 전투기부대가 공중전에서 영국공군의 전투기 572대를 격추했다고 보고했고 괴링은 이것을 토대로 영국 공군의 잔여 전력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비행장을 폭격하는 것 보다 공중전으로 끌어내는게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8월 내내 영국공군의 전투기 부대는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슈미트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독일공군의 전투기부대가 압도적인교환비로 공중전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91일 기준으로 영국공군의 전투기 전력은 총 600대이고 이중 420대가 영국 동남부에 배치되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괴링과 제2항공군 사령관 케셀링(Albert Kesselring)은 비행장을 계속 폭격하면 영국 전투기부대가 후방의 기지로 철수해 Bf109의 작전반경 안으로 끌어낼 수 없다고 생각해서 런던 폭격을 미끼로 영국공군의 남은 전투기를 끌어내 섬멸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독일공군의 고급 지휘관 중에서 제3항공군 사령관 후고 슈페를레(Hugo Sperrle)는 슈미트의 정보평가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국공군의 가용 전투기 전력이 1,000대 이내일 것이라고 슈미트 보다는 정확한 평가를 했습니다. 또한 독일공군 전투기부대의 전과 보고가 매우 과장되어 있다고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슈페를레는 영국공군의 전투기 전력이 상당한 규모이기 때문에 제뢰베 작전을 수행하려면 영국 남부의 비행장을 계속 타격해서 영국 공군의 전투기 부대를 북쪽의 기지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괴링은 슈미트의 정보평가를 신뢰해서 런던을 타격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괴링은 915일 런던 상공의 공중전에서 참패한 뒤에도 여전히 영국 전투기부대를 단기간 내에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일 공군은 927일의 런던 공습에서 참패하고서야 영국 전투기부대를 단기간에 제압하는게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독일공군은 이미 8월의 전투에서 영국 전투기부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고전을 하고 있었음에도 자신들이 공중전에서 압승하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평가를 맹신했습니다. 독일 공군 전투기 부대가 영국본토방공전 기간 중 1.77:1로 우세한 교환비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괴링이나 케셀링이 생각한 압도적 승리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영국공군 전투기 부대는 지속적으로 증강되고 있었고 전투가 소모전으로 접어들자 독일공군 전투기 부대 보다 훨씬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저자들은 괴링이 잘못된 정보분석을 맹신해 비행장에 대한 타격을 중단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라고 평가합니다.

 

각 단계의 작전에 대한 저자들의 평가도 꽤 재미있습니다. 됭케르크 항공전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저자들은 됭케르크 항공전 당시 영국공군 전투기부대의 역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비판적입니다. 숫적 열세 때문에 독일 공군이 됭케르크에서 철수하는 연합군 선단을 공격할 때 충분한 공중 엄호를 제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다이나모 작전 당시 독일 공군의 피해는 폭격기 51대와 전투기 36대인 반면 철수작전을 엄호한 제11비행단은 작전에 투입한 전투기 106대를 잃었고 이중84대를 독일 전투기와 폭격기의 방어사격에 상실한 것으로 집계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독일공군이 다이나모 작전을 저지하는데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공격을 됭케르크에 집중하지 못한데 있다고 봅니다. 독일공군은 다이나모 작전이 진행된 9일 중 겨우 3일만 됭케르크에 공격을 집중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겁니다. 저자들은 영국공군이 수송함대를 엄호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다이나모 작전 기간 중 됭케르크 공격에 집중했다면 독일공군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영국 해협 봉쇄를 위한 항공작전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양호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영국의 해운을 단기간에 마비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수준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독일공군은 이 기간에 급강하 폭격기와 중형폭격기의 폭격만으로 34척의 민간선박과 13척의 군함을 격침시켰으나 이것은 영국의 해운력과 해군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이 책은 꽤 장점이 많습니다. 독일공군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영국공군의 조직과 전술에 대한 설명도 풍부합니다. 오스프리 출판사의 저작 답게 독일공군과 영국공군의 전술을 그림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사진을 비롯한 도판도 풍부하고요.

저자들은 현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국본토방공전을 현대 나토의 군사용어와 개념에 맞춰서 설명합니다. 예를들어 영국공군의 위성 비행장(satellite airfields)와 독일공군의 야전비행장(Feldflugplätze)을 나토의 개념인 전방작전기지(Forward Operating Location)로 분류하고 다우딩 시스템을 현대의 통합방공체계(Integrated Air Defence System)으로 분류하는 식 입니다.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잘 정리해서 재미있게 잘 쓴 책입니다. 다만 이미 영국본토방공전에 대한 훌륭한 책이 많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유명한 오스프리 출판사의 책이라는 점 때문에 완전히 묻히지는 않겠지만요. 



2020년 7월 25일 토요일

찰스 딕의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에 인용된 통계 문제


1990년대 이후 새로운 사료가 꾸준히 공개되고 기존에 공개된 사료에 대한 분석이 심화되면서 제2차세계대전 시기 러시아 전선에 대한 연구는 크게 발전했습니다. 냉전시대에 독일이나 소련 어느 한쪽에 편향된 연구가 이루어졌던 것과 비교했을 때 큰 발전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료 활용에 있어 문제를 보이는 저작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2차문헌을 비판 없이 인용하는 경우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요. 1944년 러시아전선 하계전역을 분석한 찰스 딕(Charles J. Dick)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딕은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력비가 병력에 있어서 2.5:1, 박격포와 다련장포를 포병전력은 2.9:1, 기갑전력은 4.3:1, 항공전력은 6.3:1로 소련군이 우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 이 통계는 소련의 제2차대전 공간사에서 제시한 것 입니다. 소련측의 주장은 꽤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딕이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의 바그라티온 작전 부분을 쓰면서 인용한 자료 중에는 게르트 니폴트의 Mittlere Ostfront Juni’44의 영어번역본인 Battle for White Russia가 있습니다. 니폴트는 이 연구에서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하고 있습니다.2) 니폴트가 소련 공간사의 잘못된 통계를 인용한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연구가 나왔을 당시인 1985년에는 중부집단군의 전체 전력을 집계할 만큼 사료 분석이 되어 있지 않아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니폴트가 이 연구에서 제시하고 있는 독일군의 전력 통계는 당시 사료의 한계 때문에 불완전 합니다. 4군과 제9군의 전력 통계를 제시하고 있는데 제4군은 병력 및 장비 통계를 제시하고 있지만 제9군은 병력 통계만 제시하고 있습니다.3)

물론 소련 공간사의 통계는 틀린 것 입니다. 역시 딕이 인용하고 있는 소련군 총참모부의 작전연구 영어번역본인 Belorussia 1944: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는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의 총 병력이 1,036,760, 야포 7,760, 대공포 2,320, 전차 800, 돌격포 530, 항공기 1,000~1,300대라고 추산하고 있습니다.4) 소련 자료에 실려있는 양군의 전력비는 바로 이 통계를 기반으로 한 것 입니다. 소련군 4개 전선군의 총병력 250만에 독일 중부집단군 1백만명으로 2.5:1의 병력비가 나온다는 계산입니다. 그러나 1944년 6월 1일 기준으로 독일 중부집단군 총병력이 578,225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 병력이 1백만명을 넘었다는 소련측의 추산은 크게 잘못되었음 알 수 있습니다.5) 소련측 통계는 양군의 기갑전력 비율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과장하고 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의 기갑전력에 대해서는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중부집단군 소속 사단급 부대들의 기갑 및 대전차전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독일측 사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보다 정확한 전력비는 칼-하인츠 프리저의 연구에 실려 있습니다. 프리저가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력비는 병력에서 3.7:1, 기갑전력 8.2:1, 포병전력 9.4:1, 항공전력 10.5:1로 소련군이 우세를 보이고 있습니다.6)

딕이 훨씬 정확한 프리저의 통계를 인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확한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해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한 이유는 의문입니다. 그는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군의 손실 통계는 프리저의 연구에서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 이런 식으로 양군의 전력비를 부정확하게 평가하면 제대로 된 작전 연구를 할 수 없습니다.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하는 서술은 자연히 소련군의 전투 효율성을 과장하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2018년에 썼던 러시아 연구자의 '최신 연구' 얼마나 신뢰할 있는가?: 이고르 네볼신의 사례”에서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만, 최근에 나오는 연구 중에서도 냉전 시기 소련에서 제기한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 사례가 간혹 발견됩니다. 군사사, 특히 작전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교차검증과 문헌 비판이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1)     Charles J. Dick,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 Decisive and Indecisive Military Operation, Vol. 2 (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16) p.99.
2)     Gerd Niepold, Mittlere Ostfront Juni’ 44, (Hamburg: Mittler und Sohn, 1985), p.55. 니폴트의 연구에서 소련 자료를 인용해 정리한 전력비는 병력 2.5:1, 포병 2.9:1, 기갑 4.3:1, 항공기 4.5:1 소련군이 우세했다고 되어 있음.
3)     Niepold., Ibid., pp.35~36.
4)     David M. Glantz and Harold S. Orenstein, Belorussia 1944: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 (London: Frank Cass, 2001), p.6.
5)    Walter S. Dunn, Jr., Soviet Blitzkrieg: The Battle for White Russia, 1944 (Boulder: Lynne Riuenner Publishers, 2000), p.61.
6)     Karl-Heinz Frieser,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Sommer 1944“,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 8L: Die Ostfront 1943/44, Der Krieg im Osten und an den Nebenfronten (München: Deutsche Verlags-Anstalt, 2011), p.534. 전투병력 1,254,399:336,573, 전차 2,715:118, 자주포 1,355:277, 야포 24,383:2,589, 항공기 6,334:602. 프리저는 독일 제3기갑군, 제9군, 제4군의 전투병력과 같은 구역에 투입된 소련군 전투병력을 기준으로 양측 전력비를 계산하였음.
7)     Dick, Ibid., p.117.

2020년 5월 22일 금요일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독소전쟁과 냉전, 그리고 역사의 기억』

으휴. 간만에 블로그에 뭘 하나 쓰는군요.

'산처럼' 출판사에서 로널드 스멜서(Ronald Smelser)와 에드워드 데이비스 2세(Edward J. Davies)의 공저 The Myth of the Eastern Front: the Nazi-Soviet war in American popular culture의 한국어판『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독소전쟁과 냉전, 그리고 역사의 기억』이 출간되었습니다. 류한수 교수님이 한국어판 역자이시군요. 예전에 РККА님이 블로그에 이 책을 번역해서 올리셨기에 이 책의 한국어판이 나오면 РККА님의 번역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습니다.

이 책은 냉전기에 만들어진 '무결한 독일국방군'의 신화가 오늘날 미국의 밀리터리 오타쿠들에게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독일국방군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한 이 책의 절반 이상(1~5장)은 기존에 생산된 연구의 정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새로운 내용이나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이야기 없습니다. 


이 책의 후반부(6~8장)에서 미국인들의 왜곡된 2차대전 인식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면서 상당히 재미가 있어집니다. 특히 냉전기에 형성된 2차대전 인식을 확대재생산하는 북미권의 군사서적 출판사들과 아마추어 군사연구자에를 비판하는 부분이 좋습니다. 미국인들이 냉전기에만들어진 독일인들의 변명을 재생산하고 이것이 인터넷이라는 수단과 결합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페도로위츠(J. J. Fedorowicz) 출판사 같이 독일군 관련 서적을 주력으로 하는 출판사들이 미국인의 역사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실제로 페도로위츠, 쉬퍼(Schiffer) 출판사와 같은 군사서적 전문 출판사들이 간행하는 서적들은 균형이 잡힌 연구서라기 보다는 독일측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서술하는 수준에 그치는 책들입니다. 페도로위츠 출판사는 악명높은 오토 바이딩어가 집필한 무장친위대 제2기갑사단사 같은 것들을 영어로 번역해서 간행하고 있죠. 


2차대전을 다루는 영어권 인터넷 사이트들에 대한 비판도 아주 좋습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아흐퉁 판처와 같은 웹사이트들에 실린 내용은 2000년대 초반 저와 같은 한국의 밀리터리 오타쿠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7장은 인터넷이라는 영향력 있는 수단이 독일국방군 무오설을 확대재생산하면서 밀리터리 오타쿠들이 편협한 역사관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과정을 잘 설명합니다. 밀리터리 오타쿠들은 독일인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뒤바뀐 왜곡된 역사관을 가지게 됩니다. 밀리터리 오타쿠들의 '군사사 연구'는 정치적인 맥락이 깔끔하게 제거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서 독일의 전쟁범죄를 암묵적으로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 책은 소위 '독빠'들을 비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밀리터리 오타쿠 전반에 적용되는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을 낭만화 하고 탈정치화하는 위험한 경향은 굳이 독빠가 아니라 밀리터리 오타쿠 다수에 내재해 있으니까요. 책의 내용도 재미있고 번역이 아주 좋습니다. 저자들은 미국의 밀리터리 오타쿠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Guru라고 칭하는데 류한수 교수는 이걸 '본좌'로 옮겼습니다. 아주 탁월한 번역어 선정입니다. 하지만 진짜 좋은 번역은 독일군 애호가들을 칭하는 romancer를 '낭만무협인'으로 옮긴 부분입니다. 너무나 탁월한 초월번역이라 감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1~5장의 내용은 기존에 간행된 연구들과 차별점이 없다고 쓰기는 했는데 사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한국어 문헌이 그리 많지 않아서 한국어판은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쟁을 낭만화 하는 밀리터리 오타쿠라면 자기 반성을 위해서라도 한번 읽어보면 좋지 않을까요.


부대명인 JG52를 JU52로 표기 한 것 같은 사소한 오탈자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수정될 수 있게 이 책이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2020년 3월 16일 월요일

니클라스 세테를링의 Normandy 1944 개정판

스웨덴의 군사사가 니클라스 세테를링(Niklas Zetterling)의 Normandy 1944: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m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의 개정판을 읽었습니다. 큰 틀은 2000년도에 페도로비츠 출판사에서 냈던 초판과 같습니다. 전면개정판이라고 해서 상당히 기대를 했는데 기대치에는 못 미치는 편 입니다. 하지만 좋은 저작이고 노르망디 전역을 공부하는데 필수적인 자료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테를링은 2019년에 낸 이 개정판에서 독일군의 전투 효율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근래의 연구들을 반박하려 합니다. 특히 독일군이 생산한 1차사료의 신뢰성을 비판하는 연구들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세테를링이 가장 크게 비판하는 연구는 독일 연구자 뤼디거 오버만스(Rüdiger Overmans)가 추산한 제2차세계대전기 독일군의 인명피해입니다. 세테를링은 오버만스가 독일군의 사상자 보고 체계에 대한 자료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일군의 인명손실을 크게 과장했다고 비판합니다. 오버만스의 연구에서는 특히 1944~1945년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독일군의 인명손실이 기존의 통설 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세테를링은 이게 자료를 잘못 이해한데서 온 오류라고 봅니다. 그는 독일군의 사상자 보고 체계는 전반적으로 정확한 편이고 독일군의 인명손실은 공식기록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저자는 독일군의 전투 효율성이 연합군 보다 높지 않다고 주장하는 미국측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봅니다. 특히 그가 주로 비판하는 대상은 피터 맨수어(Peter Mansoor)입니다. 세테를링은 미군이 생산한 자료만 일방적으로 인용하는 맨수어와 같은 연구자의 글은 신뢰할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저도 이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맨수어는 The GI Offensive in Europe에서 미군의 전투효율성이 전쟁 말기로 갈수록 크게 향상되어 독일군을 능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세테를링이 지적한 것 처럼 맨수어는 독일측 사료를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교차검증이라고는 전혀 되어 있지않은 겁니다. 미국에서 나오는 저작 중에는 이런 문제점을 가진 것이 꽤 많습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스티븐 앰브로스의 D-Day 같은 저작이 대표적이죠.

피터 맨수어가 자신의 주 논지를 뒷받침 하기 위해 인용한 존 슬로언 브라운(John Sloan Brown)의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존 슬로언 브라운은 통계기반 작전연구로 유명한 듀푸이의 연구를 비판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 시피 듀푸이는 통계기반 연구를 통해 독일군이 미군과 영국군에 비해 높은 전투효율성을 발휘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때문에 미국에서 듀푸이의 연구를 비판하는 연구자들이 존재하지요. 세테를링은 독자적으로 듀푸이의 연구 방법론을 검증하고 이것이 신뢰성이 높음을 입증한 바 있습니다.그는 듀푸이의 연구 방법론을 신뢰하는 입장이고 브라운의 듀푸이 비판은 오독과 자료에 대한 이해 부족에 기인했다고 낮게 평가합니다.

오머 바르토브(Omer Bartov)의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바르토브는 동부전선의 전투가 서부전선 보다 더 격렬했으며 이때문에 인명피해도 더 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세테를링은 인명손실의 총계가 아니라 사단 단위 평균 손실로 평가하면 동부전선과 노르망디 전역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노르망디 전역에서 발생한 사단당 인명손실이 동부전선을 상회하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구판에 비해 수정된 부분이 많지는 않지만 노르망디에 투입된 독일군 부대의 전투력과 손실을 파악하는데 필수적인 저작입니다. 그리고 독일 자료를 독해하는 방식에 대해서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강력히 추천합니다.

2020년 1월 18일 토요일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4호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4호에 실려있는 글들을 대략 훑어보았습니다. 이번호에는 개인적으로는 다행히도 2 세계대전과 관련된 논문이 2 실려있습니다.

번째 글은 레스터 그라우(Lester Grau) “River Flotillas in Support of Offensive Ground Operations: The Soviet Dnieper River Flotilla Experience”입니다. 글은 2차세계대전 당시 소련 해군이 강과 호수에서 운용한 분함대의 작전이 소련 지상군의 작전을 어떻게 지원했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분석 대상으로 삼은 분함대는 드네프르강 분함대 입니다. 글은 드네프르강 분함대가 지상군에 대한 화력지원, 도하작전 지원, 군수지원, 해군육전대 작전 등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그라티온 작전 시기에 대한 분석이 좋습니다. 하천이 많고 도로망이 빈약한 벨로루시 지역에서 소련 지상군의 신속한 기동전이 가능했던 원인 하나로 드네프르강 분함대의 역할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번째 글은 미하일 수프룬(Mikhail N. Suprun) “Lend-Lease and the Northern Convoys in the Allied Strategy During the Second World War”입니다. 연합국이 수행한 렌드리스 북극해 방면으로 수행된 부분을 다루는 짤막한 입니다. 저자는 미영 연합의 유럽 우선 전략에있어서 북극해 방면의 렌드리스 수송선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번째는 노르웨이에 주둔한 독일 해군을 끌어내는 미끼로서의 역할입니다. 이러한 역할은 영국이 1943년까지 채택한간접행동(indirect action)’ 전략의 일부로서 두드러졌다고 봅니다. 간접행동 전략은 해상봉쇄 전략폭격, 제한적인 특수부대 공격 등으로 연합국 인명희생을 최소화 하면서 독일에 타격을 입히는 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북극해 방면의 수송선단은 간접행동 전략의 일부로서 기능을 수행했다는 입니다. 또한 반히틀러 동맹을 공고하게 하는 정치적인 역할도 수행했다고 평가합니다. 수프룬은 렌드리스가 전쟁 수행에 기여한 역할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주장합니다. 단순히 물자의 총량이나 달러 환산 가치 등으로 단순하게 접근하는 방식에 비판적입니다

밖에도 연합국의 러시아 내전 개입 100주년을 맞아 특집 논문들이 다수 실려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흥미로운 특집이네요.

그리고 1877-78년의 러시아-오스만 투르크 전쟁 당시 발칸 전역을 다룬 Alexander Staiev 논문도 주목할 합니다. 러시아군이 겨울철의 불리한 산악 지형에서 어떻게 기동을 하여 오스만 투르크군의 허를 찔렀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이 오스만 투르크군에 비해 우수한 전술적 기량을 보여주었고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작전을 전개했다고 높게 평가합니다.

Taras Kuzio “Old Wine in a New Bottle: Russia’s Modernization of Traditional Soviet Information Warfare and Active Policies Against Ukraine and Ukrainians” 최근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러시아의 정보전 수행을 다루고 있습니다. 소련 시절 형성된 정보전 수행 방식을 현재의 러시아군이 최신 기술을 도입하여 활용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같습니다. 러시아 군부가 미디어를 활용해 대여론전을 전개하는 양상이 흥미롭습니다.


2019년 12월 29일 일요일

태평양전쟁: 펠렐리우-오키나와 전투 참전기 (유진 슬레지 지음, 이경식 옮김)

얼마전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간행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부 구매했습니다. 몇년전 HBO에서 제작한 미니시리즈 퍼시픽을 아주 감명깊게 봐서 유진 슬레지라는 인물에 대해 호기심도 있던 차에 그의 회고록이 한국어로 나왔다니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책은 미해병대의 말단 보병의 시각으로 펠렐리우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 말단 사병의 시각에서 본 회고록은 제법 많고 국내에도 이미『잊혀진 병사』를 비롯해 몇권이 번역되어 소개됐습니다.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그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저자 약력에도 잘 나와있듯 그는 전쟁 초 교육 수준이 높다는 이유에서 장교 후보생으로 선발되기도 했고 전후에는 대학 교수를 지냈습니다. 또한 전장에서도 기록을 꾸준히 남기고 비교적 일찍 회고록 저술에 필요한 준비 작업을 했던 덕분에 내용이 매우 풍부하고 구체적입니다. 유명한 기 사예르의 『잊혀진 병사』는 저자가 거의 대부분 오래된 기억에 의존해 집필을 했기 때문에 부정확한 내용이 많아 나중에 진실성 여부까지 논란이 될 정도였습니다. 반면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은 내용이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마치 소설을 읽는 느낌마저 줍니다. 또한 그의 지적 수준이 높기 때문에 사건의 흐름도 시간순으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많은 회고록들이 혼란스러운 서술을 보여주는 점을 생각하면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은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전쟁 중에 남긴 기록과 그의 명료한 지적 능력은 그가 전투에서 겪은 여러 사실들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말단 보병의 일상을 디테일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태평양 전쟁의 지상전을 미시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여러 인물들을 직설적으로 평가하면서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펠렐리우 전투 당시 전리품을 얻기 위해 잔혹행위를 저지르는 동료 해병대원들의 행동에 경악하면서도 어느 순간 자기 자신도 전리품을 얻기 위해 일본군 시체에서 금이빨을 뽑으려 들었던 순간을 회고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을 이야기 합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고참 병사가 어느 순간 PTSD에 시달리며 무너져내리는 모습에 대한 묘사도 주목할 만 합니다. 저자는 큰 틀에서 국가에 헌신한 동료 해병대원들의 명예를 기리고자 하지만 단순한 무용담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전쟁의 추악한 면, 특히 동료 해병대원들에 의한 행위들을 이야기 하는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영어판을 아직 읽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의 번역에 대해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문장이 좋고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몇몇 용어가 어색하게 번역된 느낌이 드는데 영어판을 확인해 보기 전에는 확언을 하기 어렵습니다. 책의 내용도 훌륭하고 번역도 잘 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Taking Nazi Technology - Douglas M. O'reagan 저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과학기술력은 전후 수십년에 걸쳐 신비화 되면서 대중문화의 단골소재가 되었습니다. 최근까지도 B급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나치의 비밀병기라는 클리셰는 지겹기까지 할 정도죠. 그렇다면 그 실체는 어떠했을까요? 더글러스 오레이건(Douglas M. O'reagan)의 Taking Nazi Technology: Allied Exploitation of German Science after the Second World War(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19)는 제2차세계대전 말기와 직후에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독일의 과학기술력을 활용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이것이 냉전에 끼친 영향을 다루는 연구서입니다. 

이 책에서는 가장 먼저 미국의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 미국에서는 전반적으로 독일 과학기술력을 자국 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합동참모본부 예하에 있는 합동정보위원회(JIC, Joint Intelligence Committee), 주독일미군정 그리고 미국상부부 등이 독일의 과학기술, 산업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조사활동을 벌였습니다. V2 미사일과 제트기로 대표되는 항공 기술은  독일이 우위에 있어 미국이 습득해야 할 기술로 평가되었습니다. 미국 군부는 항공분야의 기술자와 설비를 철저하게 쓸어갔습니다. 예를들어 미국 육군항공대는 독일 항공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던 풍동시험시설이 미국 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이를 통째로 반출했습니다. 군부 뿐만 아니라 보잉과 같은 미국 회사들도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을 포섭하는데 열을 올렸습니다. 이외에도 마그네틱 테이프 같이 전후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산업기술도 독일에서 만들어져 미국으로 흘러들어간 대표적인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과학기술과 산업계에 대한 조사결과 독일의 과학기술 수준은 전쟁 이전에 미국 정부와 산업계가 기대했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항공 기술과 같은 일부 분야를 제외한 분야는 미국이 우월하거나, 독일의 기술 발전이 미국에 불필요한 방향으로 이루어져 쓸모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후자의 경우 석탄에 기반한 독일의 중화학 공업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독일은 석탄을 활용한 기술에서 높은 수준에 이르렀지만 미국의 화학공업은 석유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기술은 유용하지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석탄을 활용한 인조 고무 생산은 독일 화학 공업의 대표적인 성과입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전후 이를 조사한 뒤 독일의 인조 고무 생산 기술은 미국 보다 뒤떨어진다고 평가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독일이 우위에 있다고 평가받은 항공우주기술에서 조차 대량생산에 필요한 금속가공 등의 몇몇 공정은 미국이 우위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미국에 비해 산업력과 기술 수준이 뒤떨어졌던 영국과 프랑스는 사정이 조금 달랐습니다. 이미 전쟁 이전 부터 산업 경쟁력 저하로 고심하던 영국은 독일의 기술을 활용해 산업 경쟁력을 되찾고자 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독일의 군사기술 중에서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과학계와 산업계의 평시 이익에 활용할 수 있는"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1945년 10월에 보도된 한 언론기사는 독일에서 획득한 과학기술 정보의 가치가 1억 파운드에 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영국에서도 독일의 과학 기술 수준이 전쟁 이전에 기대하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으나, 미국에 비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프랑스 또한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이 자국에게 가치가 없는 독일의 기술이라도 전후 잠재적인 경쟁국이 습득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지적합니다. 영국은 미국과 비교적 밀접한 동맹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나 소련에 비하면 제약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소련은 영국과 달랐습니다. 프랑스는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을 최대한 포섭하려 했으나 미국과 영국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전후 배상 차원에서 독일의 산업시설을 철저히 약탈하고자 했으나 역시 실패했습니다. 프랑스가 포섭할 수 있었던 독일 과학기술자는 숫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주로 미국에 포섭된 주류 과학기술자들과 지적 네트워크가 단절되었습니다. 이때문에 프랑스 정부와 군에서는 지적 네트워크에서 고립된 독일 기술진과 연구시설들을 프랑스로 이전하는 것이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그 대안으로 독일의 연구소등에 프랑스 유학생을 파견해 기술을 습득하는 동시에 감시역을 맏기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시행하지는 못했습니다. 미국과 달리 국력의 한계가 있었던 프랑스는 '승전국' 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과학기술을 활용하는데 있어 미국이나 소련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없었습니다. 저자 오레이건은 프랑스가 독일의 과학기술을 약탈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독일과 협력하는 노선을 취할 수 밖에 없다고 평가합니다.

소련은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막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을 포섭하여 기술과 노하우를 흡수하는 동시에 이들이 독일로 돌아갔을 때 다시 군사분야의 연구를 지속하지 못하도록 지적으로 도태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소련은  독일의 과학기술과 산업을 약탈하는데 있어 프랑스와 동일한 정책을 폈으나 훨씬 효율적이고 큰 규모로 수행했습니다. 저자는 소련 정부가 독일 과학기술자들의 지식과 노하우를 흡수하는 동시에 이들이 더 이상의 연구를 진행할 수 없도록 방해함으로서 뒤쳐지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저자는 독일 과학기술자들의 지식이 소련의 기술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했음은 인정하지만 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경계합니다.

다음으로는 전후 연합국이 독일의 과학기술의 부흥에 끼친 역할입니다. 미국 등의 서방 연합국은 패전국인 독일이 더 이상 침략정책을 취하지 않는 평화국가로서 국제사회에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것은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문에 제2차대전 직후에는 제1차세계대전 직후와 달리 독일 과학계를 세계에서 고립시키는 정책은 취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등의 서방 연합국은 독일 과학계를 서방 세계와 연결시키고자 했습니다. 연합국이 독일의 과학 및 산업 기술을 평가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과학자와 공학자들은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패전국인 독일 과학자들은 승전국의 대학 및 연구소와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화학 산업계는 미국과의 교류를 통해 뒤쳐져 있었던 석유 기반 화학 분야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소련을 자국이 주도하는 국제적인 과학 네트워크에서 축출합니다. 미국은 경제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의 강국으로 군림하게 되면서 과학기술과 산업 질서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했습니다. 

이 연구는 대중적으로 과대 평가된 제2차세계대전기 독일 과학 기술의 한계를 지적할 뿐만 아니라, 독일의 과학기술을 평가하고 활용하기 위해 연합국이 조직한 기구가 국제적인 과학기술 교류를 촉진하는 동시에 미국의 기술 통제 수단이 되는 측면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 유용한 연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2019년 11월 22일 금요일

커피 칸타타

롬멜은 1944년 1월 16일 또다시 일선 시찰에 나섰다. 가장 먼저 방문한 부대는 노르망디의 제711보병사단이었다. 사단장 요제프 라이헤르트(Josef Reichert)는 해변 및 연안 지대에 장애물을 설치하는데 있어 롬멜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고 이미 사단 구역에 방어 시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단 포병은 적군이 해변에 상륙한 이후 포격을 가하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롬멜은 대신 적이 상륙하기 전에 타격할 수 있도록 포병 배치를 변경하라고 명령했다.

다음 이틀은 페캉(Fecamp), 볼벡(Bolbec), 생 발레리(St. Valery), 디에프(Dieppe) 일대에 배치된 제17공군야전사단을 시찰했다. 이 사단 지역에서는 방어 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징후가 보였다. 방어 전투를 내륙에서 전개한다는 가정에 따라 일부 벙커를 폐쇄하고 방치해 놓았다. 어떤 지역에서는 지휘관이 벙커를 아예 폭파해 버리고 주저항선을 내륙 안쪽으로 수마일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놓았다.

디에프의 장교 식당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롬멜은 특별 대우를 받았다. 진짜 커피 한 잔이 나온 것 이었다.(독일에서는 진짜 커피를 대신해 대용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대용 커피는 대개 귀리로 만들었다.) 하지만 롬멜은 방어 계획을 열정적으로 설명하느라 커피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루게(Friedrich Ruge)* 제독은 마이제(Wilhelm Meise)** 장군이 차갑게 식어가는 롬멜의 커피를 힐끗 힐끗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루게 제독은 롬멜이 보지 않을때 롬멜의 커피 중 절반을 마이제의 커피잔에 따라 주었다. 롬멜은 설명을 마친 뒤 커피를 마시려다가 커피 절반이 사라진 것을 보고 놀랐다.

Mitcham, Samuel W., Desert Fox: The Storied Military Career of Erwin Rommel (Regnery History. Kindle Edition., 2019), Kindle Locations 3661-3672.

*B집단군 해군 참모
**B집단군 공병참모장

2019년 11월 19일 화요일

제2차대전 말기 재만 조선인들의 일본군대 체험담

강용권이 조선족들의 증언을 엮어낸 구술자료집 『강제 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 을 읽다보니 제2차대전 말기 일본 관동군에 징집된 사람들의 회고담이 눈에 들어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제2차대전 중반 부터 관동군에서 전투력이 있는 사단들이 태평양이나 일본 본토 등으로 차출되다 보니 1944년 이후 급히 편성된 관동군 사단들은 전투력이 매우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에 입대했던 조선족들의 증언에도 이런 실정이 잘 드러납니다. 

이 책은 비매품이라 구하기가 좀 까다로운 편이지만 간혹 헌책방에 매물이 나오기는 합니다. 흥미로운 증언이 많아서 이 시기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읽어보실 만 합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경험담 몇개를 발췌해 봅니다.


1944년 봄부터 적령 청년들을 신체검사 시킨 후 1, 2, 3기생으로 나누어 지방 훈련을 시켰다. 그중에서 1기생을 위주로 서란현 막석훈련소에 가서 3달씩 정식 훈련을 받게 하였는데 나는 1945년 3월에 막석에 가서 6월에 돌아왔다. 그토록 바라지 않던 '빨간 딱지'가 나에게도 날아왔다. 1945년 8월 6일에 나는 왕청현 대흥구역에서 일본군에 나가는 열차를 탔다. 2천여명의 팔팔한 생명은 일제가 내민 제2차 세계대전의 밑천으로 충당되어 생사를 가늠 못할 운명을 지닌 채 도문, 장춘, 할빈을 거쳐 해랄까지 갔다. 그 속에는 50명 가량의 조선족 처녀들도 있었는데 그들에겐 어떤 불운의 그물이 덮씌우겠는지? 
기차가 치치할을 지나 찰란툰에까지 갔을 때는 벌써 전쟁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동쪽으로 밀려오는 피난민들이 끝이 없었다. 일본 가족들이 있는가 하면 양떼를 몰고 오는 몽고족이나 아이들을 외바퀴 짐 위에 싣고 오는 한족들, 오로지 동쪽으로 동쪽으로 밀려 나왔다. 다만 우리를 태운 열차만이 대가리를 서쪽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찰란툰역에서 떠날 줄 모른다. 폭격에 철길이 파손되어 수리하는 중이란다. 반나절이나 멈춰 섰던 열차가 떠나기 바쁘게 소련 비행기가 따라오며 폭격을 들이댔다. 그럴 때 마다 기차는 멈춰 섰고 차안의 사람들이 모두 내려 철길 옆 풀밭에 숨었다. 이렇게 기차에서 내려 대피하기를 서너 번 하고서야 해랄까지 가게 되었는데 해랄역은 몽땅 내려앉았다. 해랄역과 3, 4리 떨어진 곳에 와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해랄 시가의 곳곳에 지금도 불길이 치솟았고 큰 건물로는 성한 것이 업었다. 폭격은 계속되었고 밤에도 조명탄을 걸어놓고 일본 군사들의 이동을 저지하였다. 
신병들은 각기 부대에 편입되었다. 나는 산포병 118부대에 귀속되었다. 명색은 포병부대인데 산포 한 문도 없었으며 우리에게 발급한 무기란 날창(총검) 하나에 수류탄 두개 뿐이었다. 
우리가 해랄에 도착했을 때는 전 부대가 해랄 시가의 병영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는 때였다. 일본군이 병영을 떠나기 바쁘게 병영과 창고에 불을 질렀다. 자동차도 휘발유를 치고 불을 붙였다. 소련군에게 하나도 넘겨주지 않는다는 훼손 정책의 발로이다. 모든 건물마다 불기둥이 솟았고 군수품 창고에서 탄알이 튀었다. 이는 마치 일제의 수치스런 패망을 예고하는 조잡한 울부짖음 같았다. 
일본군이 마지막 부대가 산에 채 오르기 전에 소련군 탱크 부대가 끝이 보이지 않게 밀려들었다. 그들은 산에 대고 난사하면서 안하무인격으로 들어왔다. 해랄시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계속 전진하였다. 일본군은 해랄 주변 산에 파놓은 산굴과 숱한 군수품을 내버린 채 철퇴를 시작했다. 
산 아래 공로에는 소련군 탱크가 질주하고산 위에서는 일본군이 길도 없는 산림속을 뚫고 힘겹게 철퇴했다. 얼핏 보기에는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는 같은 부대 같지만 실은 2차 대전의 적대국인 소련과 일본의 군대들이다. 소련 탱크 부대는 산 위의 일본군을 보면서도 '너희들은 내 입안의 사탕알이다'하는 격으로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앞으로 전진하기만 했다. 일본군은 기실 반포위 상태에 처했고 밤에 낮을 이어 철퇴하여도 소련 탱크 부대 속도의 몇 분의 일도 안 되었다. 휴식도 없이 일주일이나 연속으로 급행군한 일본군은 대흥안령에 까지 와서 철퇴를 멈추었다. 병졸들은 지칠대로 지쳤다. 
1945년 8월 6일에 입대한 김태진의 경험담, 강용권 엮음, 『강제 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 해와 달, 2000,  92~93쪽.

전쟁말기 일본군에 동원된 부실한 병역 자원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습니다.

1944년부터 징병등기를 하고 지방훈련을 시작하였다. 나는 연령이 초과되어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알아본즉 중국의 민적에 원래의 나이보다 두 살 적게 적혀 있어 그만 1기생으로 그물에 걸렸다. 소학교 선생들은 지방훈련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1944년 9월에 서란현 막석훈련소에 가서 3달간 훈련한 후 1945년 3월에 정식으로 출정의 길에 올랐다. 천교령에서 기차를 타고 목단강, 할빈, 치치할, 백성자, 우란호트를 지나 알산에 도착하여 관동군 318부대에 편입되었다. 우리의 주둔지에서 중소국경이 5km 밖에 안되니 실로 최전선 이었다. 내가 속한 8중대에는 조선 청년이 6명 밖에 없었다. 나와 남청룡은 외따로 떨어진 급수소(給水所)의 일을 보았으므로 독립성이 많았다. 진종일 기계실을 떠날 수는 없지만 하는 일이 없으므로 심심하기만 했다. 배가 고픈 곳이 문제였다. 이곳엔 인가가 없었으므로 강냉이나 감자 같은 것을 구할 수 없기에 산열매나 풀뿌리 같은 것으로 먹이를 보충해야 했다. 
(중략) 
일제는 멸망의 벼랑 위에서 바둥거리며 최후 일전을 본토 보위전에서 벌여보려고 시도하였다. 이리하여 내가 속해 있던 318부대에서 지원병 360명을 보내기로 하였는데 그 속에 나도 들어 있었다. 앓고 있는 청룡이와 갈라지게 되었다.
360명 본토지원병 중에 조선 청년이 24명이었다. 지원병들을 완전 무장하고 기차로 우란호트, 백성, 장춘, 심양을 거쳐 본계에 와서 내렸다. 지원병의 집결지가 본계인 것 같았다. 우리 먼저 도착한 일본군도있었고 우리 후에 속속 모여들기도 하여 병력이 방대한 '일본 본토 지원연대'를 구성하였다. 할빈특구 기관장이 연대장을 맡았다고들 전했다. 
그런데 이 지원연대의 병사들을 보기만 해도 눈이 감길 지경이었다. 알찬 병사들이라고는 318부대에서 파견한 360명이고 그 외는 모두 재향군인들 속에서 긁어모았기 때문에 머리가 시허연 50넘은 영감들, 코물 건사를 잘 못하는 병자들, 심지어 눈먹쟁이와 절름발이도 있었다. 줄지어 걸을 때면 지원병이라 하기 보다 큰 전투를 겪고 난 포로병 같았다. 
1945년 3월 10일에 입대한 황기섭의 경험담, 강용원 엮음, 위의 책 108~109쪽.

2019년 11월 9일 토요일

넷플릭스의 자체제작 다큐멘터리 "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

넷플릭스가 자체 제작한 다큐멘터리 "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을 조금 봤습니다. 최근에 복원된 컬러 영상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이 일단 눈에 띕니다. 시즌 1로 공개된 10편의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전격전
2. 영국 본토 항공전
3. 진주만
4. 미드웨이 해전
5. 스탈린그라드 포위전
6. 디데이
7. 벌지 전투
8. 드레스덴 폭격
9. 부헨발트 수용소 해방
10. 히로시마

미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답게 미국을 중심으로 10대 사건을 선정한게 눈에 띕니다. 독소전쟁을 다루는 부분은 5화 스탈린그라드 포위전 하나 뿐이더군요. 아직 시즌1만 공개되었으니 시즌2가 나온다면 독소전쟁을 다루는 내용이 더 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전문가 섭외는 잘 된 편 입니다. 스탈린그라드 포위전 편에서는 저명한 군사사가 데이비드 글랜츠 선생이 나옵니다. 이 외에도 미국의 저명한 독일군사사가 조프리 와로(Geoffrey Wawro), 한국에는 『나치의 병사들』로 잘 알려진 독일 역사가 죈케 나이첼(Sönke Neitzel) 같이 인지도 있는 전문가들을 다수 섭외했습니다.

내용 자체는 좋은 편이지만 평이합니다. 대중성을 고려한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제2차 대전당시 촬영된 영상들을 컬러로 복원해서 보여주는 점이 장점입니다.

2019년 10월 29일 화요일

독일육군 제505중전차대대사가 출간된다고 합니다!

제505중전차대대는 포탑에 그려넣은 돌격하는 기사 마크로 유명한 부대죠. 쿠르스크 전투와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큰 활약을 한 부대이기도 합니다. 부대의 활약에 비해 이 부대를 직접적으로 다룬 문헌이 그리 많지가 않았습니다. 이 부대가 제2차대전 말기 동부전선에서 완전히 괴멸되었고 생존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 영향을 끼쳤을 것 입니다. 미군과 영국군에 항복한 중전차대대의 경우 부대사가 비교적 일찍 간행되었죠. 매우 형편없는 전과를 거둔 제508중전차대대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이 부대를 연구한 부대사가 간행된다고 하네요. 판처렉스에서 제공하는 샘플 사진을 보니 상당히 기대감이 커지는군요. 약간 우려되는 점은 저자가 독립연구자로 보인다는 점 입니다. 물론 독립연구자라도 Leaping Horseman Book의 제이슨 마크 처럼 훌륭한 연구를 내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간혹 극우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죠. 살짝 우려가 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기대가 됩니다. 2020년 1월 출간된다고 하니 잊지 말고 사야겠습니다.

https://www.panzerwrecks.com/product/charging-knights-on-the-eastern-front-the-combat-history-of-schwere-panzer-abteilung-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