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에서 윤민혁님이 der grosse Schlag 작전이 계획대로 실행될 경우 심각한 공역통제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지적해 주셨습니다. 제가 기술적인 부분에 좀 많은 지식이 있다면 여기에 대해서 좀 재미있는 글을 하나 써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전투기 부대의 통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아돌프 갈란트가 전쟁 후에 지적한 전투기부대의 지휘통제 문제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독일본토 방공전 당시 전투기부대의 전술통제는 전투기사단(Jagddivision)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전투기사단은 대전 초기의 전투기지휘부(Jagdfliegerführer)를 개칭한 것으로 1943년 무렵에는 각 전투기 사단 별로 5~10개 전투비행대대(Gruppe)를 예하에 두고 있었습니다.
각 전투기사단은 6,000~7,000명 정도의 인력으로 구성되며 사령부에는 전투기 통제와 관련된 인력이 150명 정도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전투기통제장교(J.L.O, Jagerleitoffizier) 들이 포함됩니다. 전투기통제장교는 비행대대, 경우에 따라서 비행단에 대한 통제를 담당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단장이 선임통제장교를 겸합니다. 선임통제장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데 선임통제장교는 상황을 종합해 적 폭격기 부대의 예상 목표와 진로를 판단하고 그에 맞춰 사단 지휘하에 있는 모든 전투기 부대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즉 방공전투에서 전투기사단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셈 입니다.
그런데 전쟁 중에는 이 전투기 사단의 지휘 통제능력에 문제가 조금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돌프 갈란트는 전쟁이 끝난 뒤에 독일 본토 방공전에서의 전투기 지휘통제 문제, 특히 전투기 사단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고 하네요.(D. Caldwell & R. Muller, The Luftwaffe over Germany : Defense of the Reich, p.148)
1. 전투기사단의 지휘 방식은 명백히 지역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각 사단은 사단 예하 부대가 다른 사단의 전투 지경선으로 넘어가더라도 계속 통제했지만 무전과 레이더 관제 범위를 벗어나면 지휘를 (인접 사단으로) 넘겼다. 하지만 이것은 원만하지 않았다.
2. 전투기사단 사단장들은 1차대전의 베테랑들이었고 그들의 참모장은 공군 장군참모 출신이었다. 이들은 유능하긴 했으나 전투기 조종사가 아니었다.
3. 전투기사단에는 부사단장이 없었다. 부사단장 보직을 만들어 거기에 전투기 조종사 출신을 임명해야 했지만 문제는 적당한 인물이 드물었다.
4. 전투기들은 전투기통제장교의 통제를 받았으며 각 통제장교는 1개의 비행대대를 통제했다. 전투기통제장교들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거나 매우 우수한 통신 장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보드 게임을 하듯 통제했지 (공중전의) 입체적 환경을 이해하지 못해 그들이 통제하는 부대에 전술적 이점을 주지 못했다.
5. 무전감청은 공군 통신감인 마르티니(Wolfgang Martini) 장군의 담당이고 공군 총사령부 단위에서나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전투기사단의 전투기통제장교들은 무전감청을 이용해서 (영국공군처럼) 속임수를 쓰는게 불가능했다.
6. 전투기군단, 전투기사단, 제국항공군, 괴링, 전투기부대총감(갈란트)는 모두 한 전화회선을 이용하고 있었으며 전투기부대총감을 제외하면 모두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괴링은 종종 멍청한 명령을 내렸다.
7. 1944년 초부터 적 호위전투기 때문에 폭격기 집단과 접촉을 유지하며 정보를 보내는 항공기(Fühlungshalter)를 더 이상 임무에 투입할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전투기통제장교들은 기상, 구름상태, 적의 고도, 호위기 여부 등을 전혀 알 수 없었다.
8. 각 편대장들에게 행동의 자유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이 외에도 갈란트는 괴링에 의해서 전투기사단장의 교체가 빈번히 일어난 점도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단장 교체가 잦으니 예하 전투기 부대들에 대한 통제가 어려웠다는 것이죠. 하기사, 괴링은 툭하면 조종사들에게 동부전선에 소총수로 보내겠다는 망발이나 날리던 종자이니 사단장교체가 빈번한 것도 이해가 가긴 합니다. 어쩌면 괴링은 정말 영국공군이 심은 스파이가 아니었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