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3일 일요일

러시안 소설

데이빗 글랜츠David Glantz의 역작인 스탈린그라드 3부작의 마지막 3부의 출간 소식을 접한 뒤 제2권을 한번 더 훑어봤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나온 글랜츠의 저작 중에서 러시아와 독일 자료의 교차검증이 가장 잘 이루어진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꽤 흥미로운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교차 검증을 통해 소련이 독일군의 전력이나 피해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여러 차례 지적하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실소를 자아낼 정도로 그 정도가 심각합니다. 물론 유동적인 전장 상황에서 적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 이것만 가지고 소련 자료들을 엉터리라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꽤 흥미로운 지적들이니 몇가지 예를 인용해 보지요.(원서의 주석은 일단 생략합니다.)



대부분의 소련과 러시아 문헌은 제62군의 병력 54,000명과 제64군의 병력 36,000명을 합쳐 총 90,000명의 소련군이 독일군 170,000명을 상대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수치에는 제14기갑군단을 포함해 독일군이 시가전에 투입하지 않은 부대를 포함하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공격한 바익스Maximilian Freiherr von Weichs의 충격 집단의 병력은 80,000명으로 전차와 돌격포 100여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중략)

러시아 문헌들은 대부분 독일 제6군이 소련 제62군에 맞서 스탈린그라드 지구에 500대의 전차를 투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9월 13일 기준으로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한 독일군 부대는 제24기갑사단과 제14기갑사단을 합쳐 전차 30~40대, 제29차량화 사단의 전차 20대를 포함해 100대 남짓한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David M. Glantz, Armageddon in Stalingrad : September-November 1942,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9), pp.1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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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추산에 따르면 파울루스의 독일 제6군은 증원병력을 받아 제62군을 공격하는 충격집단의 규모를 병력 90,000명으로 늘리고 여기에 2,300문의 야포와 박격포, 전차와 돌격포 300대, 제4항공군에 소속된 항공기 1,000대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소련군이 추산한 통계는 신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제29차량화보병사단과 제60차량화보병사단, 제16기갑사단을 집계에 포함하고 있는데 이때 이 부대들의 병력 대부분은 스탈린그라드 시가지가 아니라 스탈린그라드 북쪽과 북서쪽의 돈강과 볼가강 사이의 지역,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남쪽의 호수 지역에서 소련군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제14기갑사단은 일일 평균 50대 정도의 전차만 가동 가능한 상태였으며 제24기갑사단은 30대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장 지구에서 소련군을 상대한 독일 제6군의 충격집단에 소속된 기갑전력은 제244돌격포 대대와 제245돌격포대대의 돌격포를 합쳐도 100대가 채 안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련과 러시아 문헌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에 투입된 독일군에  제76보병사단, 제29차량화보병사단, 제60차량화보병사단, 제16기갑사단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들 사단에 배속된 부대 중에서 스탈린그라드 공장지구에 대한 최후의 공격에 투입된 부대는 사실상 없다. 그리고 독일 제6군의 보병사단과 기갑사단에 소속된 보병과 기갑척탄병은 심각하게 소모되어 제6군의 일선 전투 병력은 80,000명 미만으로 소련 제62군의 55,000명과 비슷하거나 이것 보다 더 적은 수준으로 추산된다. 이것을 뒷받침 하는 근거로, 독일 제6군은 10월 17일 기준으로 총 병력을 334,000명으로 보고하고 있는데 이중에서 일선의 전투 병력은 고작 66,549명으로 이중 상당수는 스탈린그라드 북쪽과 남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Glantz, ibid., pp. 355~356


사실 이시기 소련군의 야전부대는 정보 수집과 판단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편이었고 전투가 계속되면서 정보 수집과 판단 능력이 조금씩 향상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추이코프라는 인물의 회고록 입니다. 제2권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보니 제62군 사령관 추이코프의 회고록이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소련군의 공식 기록 보다도 과장이 심하고 몇몇 부분에서는 노골적인 왜곡으로 보이는 부분까지 있습니다. 전쟁 당시 소련군 야전부대의 정보 분석은 실전 상황에서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잘못된 분석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이해해 줄 수가 있는데 추이코프 회고록은 그런 식으로 변호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9월 말에 있었던 노동자 주택단지를 둘러싼 전투에 대한 추이코프의 회고에 대해 글랜츠는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9월 27일 부터 28일까지) 제24기갑사단의 에델샤임 전투단과 빈터펠트 전투단은 진격하면서 포로 280명을 잡고 전차 5대, 대전차포 9문, 대전차소총 32정, 박격포 7문, 화염방사기 2개, 자폭견 4마리를 격파, 사살하거나 노획했으며 전사자 25명과 부상자 164명의 손실을 입었다. 제24기갑사단이 획득한 전리품이 얼마 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지역을 방어하는 소련 제62군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제24기갑사단은 9월 28일의 전투에서 총 28명의 전사자와 94명의 부상자를 냈다. 
(중략)

9월 28일의 전투는 매우 격렬했는데, 제100경보병사단은 전사자 70명, 부상자276명, 행방불명 10명이 발생했으며 제295보병사단은 전사자 10명과 부상자 44명이 발생했다. 


(중략) 

추이코프는 9월 28일의 전투에서 독일군이 “최소한 1,500명의 전사자”와 “30대 이상의 전차를 완전손실”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마예프 쿠르간의 비탈에만 독일군의 시체 500구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추이코프는 제62군의 손실이 심각했음을 인정하고 있는데 포포프의 제23전차군단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626명이나 냈으며, 바튜크의 제284소총병사단은 300명의 인명 손실을 당했다. 고리쉬늬의 제95소총병사단은 “한줌의 병력만 남은” 상태에 불과했다. 

Glantz, ibid., pp. 262~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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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7일 오전 늦게 제389보병사단은 제24기갑사단의 1개 전차중대와 제245돌격포 대대의 돌격포 10대의 지원을 받으며 북쪽으로 공격을 시작해 제37근위소총병사단의 방어선 중앙과 우익을 공격했다. 제389보병사단의 2개연대에 소속된 여러개의 대대급 전투단들이 베르후네우딘스카야 거리에서 부터 슈넬헤프터 블록의 북서쪽의 철도 지선을 따라 공격을 감행했고, 3분의 1 정도의 병력은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의 서쪽을 직접 공격했다. 독일군은 이 공격에 전차 20여대의 지원을 받는 2개 연대 병력만 투입했지만 추이코프는 독일군의 전력을 다음과 같이 과장했다. 

“이 공격은 전면적인 것이었다. 적은 베르후네우딘스카야 거리에서 2개 사단과 500대 이상의 전차를 투입해 공격해왔다. 첫번째 공격은 격퇴했다. 졸루데프가 지휘하는 사단은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독일군은 예비대를 동원해 여러차례에 걸쳐 공격을 계속했다. 적은 치열한 전투 끝에 이날 저녁 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의 한 블럭을 점령했으며 경기장 근처까지 밀고들어왔다. 스타호노브체프와 스쿨프투르늬 공원은 아군이 아직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제62군의 일지는 추이코프의 회고록 보다는 정확한 편으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디젤나야, 바리카디 마을, 107.5고지 일대에 집결한 적은 대규모의 병력(2개 사단과 전차 80~90대)를 동원하여 오전 11시 30분경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 방향으로 총공격을 해왔다.제37근위소총병사단과 제84전차여단은 전차 45~50대의 지원을 받는 적 2개연대와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적은 베르흐네-우딘스크와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 그리고 베르흐네-우딘스크와 지토미르스크 등 다른 축선에서도 공격해왔다. 적은 첫번째 공격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다.” 


(중략) 

붉은 군대 총참모부의 일일작전요약에서는 추이코프가 보고한 10월 7일의 전투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만 독일군의 기갑전력에 대해 추이코프가 주장한 내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62군은 3개 보병사단과 1개 차량화 사단으로 구성된 적을 상대로 격렬한 방어전을 전개했다. 적은 오전 11시 30분경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제37근위소총병사단, 제84전차여단, 그리고 제112소총병사단의 잔여 병력은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와 지토미르스크를 공격하는 적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0월 7일이 끝나갈 무렵 적은 수르코프 거리와 우스튜즈스카야 거리의 끝, 지토미르스크와 스쿨프투르늬 공원 외곽에 도달했다. 이날 4개 대대 규모의 적 병력과 전차 16대를 섬멸했다. 적은 더이상의 진격하지 못했다. 제42소총병여단은 스쿨프투르늬 공원 북쪽의 두개의 건물과 스쿨프투르늬 공원 북부를 잇는 선에 도달했다. 제62군에 소속된 다른 부대의 위치는 동일하다.” 

추이코프가 과장한 독일군의 규모가 어떻던 간에, 예네케가 지휘하는 제389보병사단은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 남쪽의 소련군 방어선을 뒤로 밀어냈다. 하지만 제51군단의 전선을 균일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10월 7일에 전개된 짧지만 격렬한 전투로 제24기갑사단은 장교와 병사 51명이 부상당했고, 제389보병사단은 전사 20명, 부상 45명의 피해를 냈다. 

Glantz, ibid., pp. 338~340


추이코프는 10월 중순의 트랙터 공장 전투의 결과에 관해서도 비슷하게 과장을 하고 있습니다.



추이코프는 독일 제51군단이 3,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냈다고 추산했지만 실제로 독일군이 10월 14일에 입은 손실은 전사자와 부상자, 실종자를 합쳐 538명이었다.  

Glantz, ibid.,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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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은 10월 17일의 전투 결과를 평가했는데 독일군이 우세했던 것이 확실하다. 독일군은 바리카디 공장의 서쪽과 북쪽에서 소련 제62군의 방어선을 돌파했으며, 구르티예프의 제308소총병사단을 섬멸하고 류드니코프의 제138소총병사단이 지리멸렬하여 바리카디 공장으로 패주하게 만들었다. 제51군단의 보고에 따르면 투항자 103명을 포함해 860명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혔으며 막대한 양의 무기와 장비가 노획되었다. 추이코프는 제51군단의 전차 40대를 격파하고 독일군 2,000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독일군의 손실은 576명에 불과했다. 손실 내역은 전사 91명, 부상 469명, 행방불명 16명이었다. 하지만 추이코프가 주장한 독일군의 전차 손실은 실제와 비슷하다. 10월 17일이 끝날 무렵 제24기갑사단은 전투 시작 당시 가동가능했던  전차 33대 중 4대만 남아 있었으며, 제14기갑사단은 33대 중 19대만 남아 있었다. 

Glantz, ibid., pp. 418~419.


인용한 것 이외에도 추이코프가 전과를 과장하고 전황을 왜곡하는 사례가 몇건 더 실려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책을 직접 읽어 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 역사가인 발레리 자물린은 “프로호로브카 :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이라는 글에서 소련군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졸렬한 지휘를 변명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하고 승리하는 경우에는 전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피해를 과장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비판하는데 추이코프도 예외는 아닌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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