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o님의 글에서 트랙백합니다.
유능해서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반대로 무능해서 적을 괴롭히는 경우는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역시 우주의 법칙은 오묘한지라 무능함으로서 적을 괴롭힌 특출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나폴레옹 3세였습니다.
사실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가 던진 떡밥을 덥석 집어 물고 전쟁에 뛰어들 때 까지만 해도 쓸모있는 바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의 골치거리가 되고 맙니다.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출전을 결심한 이유로는 역시 국내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었다는 점이 꼽히고 있습니다. 갈수록 대중들의 지지가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승리를 통해 이것을 만회하려 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전쟁에 승리할 경우 자신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면 승리를 거둔 야전 사령관들에게 영광과 명예가 집중될 것도 우려했다고 설명되지요.
마침내 나폴레옹 3세는 7월 28일 기차편으로 프랑스의 주력군인 라인 야전군(Armée du Rhin) 사령부가 있던 메츠를 향해 출발합니다. 그러나 라인 야전군은 전쟁 초반에 포위되어 버리고 결국 나폴레옹 3세는 샬롱 야전군(Armée de Chalons)에 합류해 스당 방면으로 진출합니다. 이 후의 이야기야 뭐 다들 잘 아시는 스당 전투지요.
나폴레옹 3세가 군을 이끌고 나타났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비스마르크와 몰트케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한다면 비스마르크와 몰트케가 구상한 신속한 전쟁 종결은 물 건너 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재인 비스마르크는 무능한데다 인기도 없는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하면 그대로 프랑스 제정은 붕괴되고 공화정이 들어서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몰트케 또한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샬롱 야전군을 포위하기 위해 기동 중이던 8월 25일에 바이에른의 레오폴드 공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가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한다면 이건 우리에게 크나큰 골치거리가 될 게요.”
그래서 비스마르크와 몰트케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직전까지 빨리 나폴레옹 3세가 군대를 버리고 파리로 도망치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맥없이 생포되고 말았습니다. 어쨌건 이 인기 없는 황제는 약간의 센스는 있었는지 항복 직후 비스마르크와 회견하는 자리에서 약간의 독일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후의 역사는 다들 아시다시피 전쟁의 장기화였습니다. 어쨌거나 전쟁에 이기긴 했는데 비스마르크가 구상했던 신속하고 깔끔한 승리는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독일군은 프랑스 곳곳에서 약탈과 학살을 저질렀고 이건 결국 독일과 프랑스간에 갈등을 깊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2007년 12월 6일 목요일
2007년 9월 15일 토요일
프로이센의 징병제에 대한 미국의 시각
1차대전 이후로 프로이센 하면 보수 반동과 군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는데 한때는 프로이센의 군대 조차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생각되던 곳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의 나라 미리견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의 나라 미리견이었습니다.
(전 략)
비록 그랜트 행정부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그랜트 대통령 자신과 유럽 각국의 미국 외교관들은 프로이센의 북독일연방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으며 “시민”으로 이뤄진 그 군대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랜트 대통령은 주미 프랑스 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북독일 연방은 내전당시 북부 연방을 지지했으며 또 연방의 공채를 구매해 주었다”고 이야기 한 바 있었다. 8월 말에 접어들어 전세가 프로이센에 유리하게 기울자 주불 대사에게 “사실 나는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단독으로 상대하는 것은 좀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프로이센의 군사제도는 너무 완벽하네”라고 털어놓았다.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일반 언론들과 정치, 문화계의 지도급 인사들도 독일은 『전제군주정이며 제국주의적인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와는 달리 (비록 프로이센도 군주정이기는 했으나) 지방 분권적이며 자유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으며 (지방 분권과는 다소 일치하지 않긴 하지만) 또 독일의 민족 통일을 향한 열망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저명한 역사가이며 또 비스마르크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베를린 주재 미국대사 밴크로프트(George Bancroft)는 독일의 승리를 찬양하면서 “무기를 든 인민들이 전제왕정의 타락한 무리들을 쳐부쉈다”고 적었다. 밴크로프트는 뒤에 국무장관 피쉬(Hamilton Fish)에게 “우리 나라가 유럽 대륙에서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국가를 하나 꼽으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독일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하겠습니다. 독일의 국가 제도와 우리의 그것은 거의 같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독일을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1871년 1월 베르사이유에서 선포된 독일 제국이 앞으로 미국이 그랬던 것 처럼 강력한 공화적 연방국가를 지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랜트 대통령은 1871년 2월 상원 연설에서 미국과 독일 민족국가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비록 일부 미국인들은 단순히 나폴레옹 3세 체제에 대한 혐오감에서 프로이센을 지지했지만 많은 수의 미국인들은 비록 매우 깊지는 않더라도 독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이 강했기 때문에 독일을 지지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독일을 “지적이며 근면한 인민들의”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독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 국가이며 국민들은 교육을 중요시하며 문학, 음악, 철학 그리고 과학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한 국가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프로이센의 군사적 전통에 대해서도 개별 인물들의 장점을 위주로 보고 있었다.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대왕은 작은 나라인 프로이센을 압도적으로 많은 적들로부터 지켜냈으며 폰 스토이벤(Friedrich Wilhelm von Steuben) 남작은 미국의 독립을 지원했고 또 뷜로우(Friedrich von Bülow)는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을 도와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는 식이었다.
또 미국언론들은 북독일 연방과 개별 가맹국들이 남북전쟁 당시 북부 연방을 지지했으며 독일의 자본가들이 개별적으로 연방 정부를 지지했음을 상기시켰다. 또 현재의 프로이센 지도자들은 미국이 남북전쟁에서 연방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싸웠듯 독일 민족으로 이뤄진 연방국가를 만들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는 이 매체가 종종 그랬듯 과장적인 어조로 “미국인들은 빌헬름 국왕과 비스마르크 수상이 그동안 분열되었던 위대한 민족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하려는 신의 섭리를 수행하는 도구라고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물론 프로이센의 보수적인 융커 지주층에 대한 비판적 여론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머지 않아 독일에서도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진보가 이뤄지면 자연히 정치적 자유화도 이뤄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로드 아일랜드의 한 유력 일간지는 “독일은 프랑스에 비해 훨씬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 독일의 인민들은 자유를 지향하는 성향이다”라고 주장했다.
독일에 대한 지지 여론의 배후에는 독일인들이 19세기에 미국에 이주한 이민자 중 가장 큰 민족집단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실제로 1870년 당시 외국에서 이주해온 1세대 미국시민 중 30%가 독일계였다. 1860년대에 독일계 미국인들 대다수는 공화당을 지지했는데 이것은 이들 중 상당수가 노예제를 반대했으며 또 강력한 연방 지지자였다는 것을 뜻했다. 1870년에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많은 외국어 언론이었던 독일어 신문들은 앞다투어 프랑스의 패배를 환영하고 독일 연방의 승리와 새로 탄생한 독일 제국을 찬양했다. 자유주의적 성향의 독일계 미국인들은 프로이센의 군사제도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독일에서 군생활을 했으며 1848년 혁명이 실패한 뒤 미국으로 이민 온 하인첸(Kark Heinzen)은 프랑스의 패배와 독일 제국의 수립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식 군사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848년 혁명당시 바덴(Baden)의 혁명 지도자 중 하나였으며 프로이센의 개입으로 혁명이 실패한 뒤 미국으로 망명한 헤커(Friedrich Hecker)는 대다수가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1871년에 세인트 루이스에서 있었던 독일의 승전 축하 행사에서 주 연설자로 나선 그는 독일이 거둔 군사적 승리를 찬양하고 의무교육제도와 국민개병제야 말로 독일 군대가 진정한 평등적 집단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는 왕정에 충성하는 정규군에 의존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군대내의 사회적 분열을 우려했기 때문에 징집병의 비중을 줄이는 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1870년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빈농과 도시 빈민, 그리고 북아프리카 식민지 출신(주아브나 투르코)의 장기복무 직업군인에 의존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비해 훨씬 사거리가 긴 우수한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프로이센의 우수한 훈련과 애국심, 그리고 프로이센군의 지휘관들에 의해 압도되었다.(그리고 포병의 경우 프로이센이 우세했다) 전쟁이 벌어진지 겨우 한달도 채 안된 1870년 9월 1일의 스당 전투에서는 나폴레옹 3세는 그의 군대 10만과 함께 항복했다. 그리고 3일뒤 파리의 민중은 봉기를 일으켜 제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후 략)
John Whiteclay Chambers II, 『American View of Conscription』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i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8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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