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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2일 월요일

미서전쟁과 미국의 전시동원

미서전쟁은 짧은 기간 동안 전개되었고 규모도 유럽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리 큰 전쟁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몇 년 뒤 벌어진 러일전쟁이 1차대전을 예고하는 듯한  산업화된 근대전쟁의 양상을 뚜렷이 보여준 것과 대비가 됩니다. 대규모 함대결전, 그리고 기동전과 근대적 요새에 대한 포위전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전쟁 양상이 나타난 러일전쟁에 비하면 미서전쟁은 소박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서전쟁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입장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몇가지 보여줍니다. 이미 산업적으로 대국으로 성장해 있던 미국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전쟁 준비는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이 상태로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두개의 대양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엄청난 과업이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전쟁 준비는 이런 준비부족을 극복하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국력이 받쳐 주기 때문에 부실한 전쟁 준비가 어떻게든 극복이 되는 것이긴 합니다만.

이 글에서는 기본적인 병력, 수송, 장비 및 보급 문제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행정과 인사문제까지 들어가면 정리하는 것도 좀 더 어렵고 글이 더 길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전시동원이라고 하면 일단 첫번째로 병력 동원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사람이 있어야 싸우죠. 미국이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미육군은 겨우 28,000명 밖에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과 스페인의 관계는 이미 1897년 초 부터 악화되고 있었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매킨리William McKinley가 본격적으로 전시동원을 고려하기로 한 것은 선전포고가 이루어지기 한달 전에 불과했습니다.1) 전쟁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습니다. 다행인 점이라면 상대가 스페인이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육군이 3만명도 되지 않는 상황인데다 선전포고가 전쟁 준비도 갖추기 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미국은 각 주의 “주방위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기 미국의 “주방위군”은 오늘날과 같은  “주방위군”으로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병력동원은 엉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미국은 물론이고 현재의 역사가들도 미서전쟁 당시 미국의 민병대 동원은 실패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매킨리 대통령은 초기에 원정을 위해 125,000명의 동원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동원규모가 수정되어 연방정부는 182,687명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하고 각 주지사들에게 민병대의 동원할 것을 통보했습니다.2) 대규모의 대외원정이 연방군이 아닌 주의 민병대를 주축으로 실행해야 했던 것 입니다.
주 방위군은 사실상 미군의 주력을 담당할 수 밖에 없었는데 정규 육군이 3만명도 채 안되었던 반면 각 주의 민병대는 1897년 기준으로 총 114,000명이었습니다. 실질적인 전투력은 둘째 치고라도 일단 숫자는 어느 정도 채우고 있었던 셈입니다. 여기에는 기병 4,800명과 포병 5,900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편제는 제각각이어서 사단급 편제를 갖춘 주는 5개 밖에 되지 않았고 그외에 25개의 여단이 있었습니다.3) 나머지 주방위군 부대들은 연대 이상의 편제가 없었으니 일단 사단 부터 만든 뒤 훈련을 시켜야 쓸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 입니다.
각 주의 병력동원은 상당히 엉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일단 이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주방위군 체제가 잡혀 있지 않았고 여전히 각 주 민병대의 자율성이 강했습니다. 이 때의 경험으로 미서전쟁 이후 주방위군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는 했습니다만 이 시점에서는 아직 미래의 일이지요.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지요. 미네소타 주에서는 존스 팜Jones Palm이라는 사람이 친구들과 사설 군사조직을 만든 뒤 주지사와 연방정부 민병대국에 정식 주방위군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가 거부를 당하고 그냥 기존의 주방위군 연대에 입대했습니다. 반면 캔자스 주에서는 주지사 존 리디John Leedy가 기존의 주방위군을 불신하여 새로 지원병을 모집하여 연방정부로 부터 할당받은 4개 연대를 편성했습니다.4) 평시 주방위군의 훈련과 감독을 성실히 했던 주들은 부대편성과 병력 동원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매사추세츠,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위스콘신 등이 그런 모범적인 사례였습니다. 반면 플로리다, 미주리, 루이지애나, 텍사스와 같은 주들은 상대적으로 주방위군 편성과 동원에서 혼란을 겪었습니다. 평시 훈련과 관리를 소홀히한 주들은 주방위군 대원들의 상당수가 연방군의 체력 검정도 통과 못하는 굴욕을 겪을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5)
게다가 아직 주방위군을 전시에 해외파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법적, 행정적인 철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방위군 대원 중 일부는 소집에 응하지 않았지만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병력 동원은 그럭저럭 이루어 졌으며 약 20만명의 주방위군이 미서전쟁 기간 중 동원되었습니다.
실제로 주방위군은 전쟁 기간 중 미군의 중추를 이루었습니다. 비록 유럽의 기준과 비교하면 서투르고 부족한 면이 많았지만 스페인과의 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자발적인 참여 열기는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각 사회단체는 물론이고 갑부들 중에서는 자비를 부담하여 1개 연대를 무장시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오하이오주의 한 공무원은 오하이오에서만 10만명의 자원병은 모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을 정도라니 굉장하지요.6) 스페인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원의원 헐A. T. Hull이 입안한 이른바 “헐 법안Hull-Bill”은 정규군 만을 원정에 투입하고 주방위군은 국내 방위에만 투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는데 의회는 물론 각 주의 주지사와 주방위군 단체들의 반발로 폐기되고 주방위군은 대외 원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7)

미국이 전쟁경험의 부족 때문에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그 외에도 여러 부문에서 나타납니다. 국내 자원의 동원에서 그런 점이 잘 드러나는데 막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은 다소 부족한 점이 엿보입니다.
철도이동에 관한 규정들은 선전포고가 있고 거의 2주가 지난 5월 8일이 되어서아 육군 군수국장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전까지 군부대의 철도를 이용한 이동은 아무런 규정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 지고 있었습니다. 육군 군수국은 민간철도회사와의 계약을 통해 철도를 활용했는데 철도부대를 운용하던 독일과는 달리 대규모 군병력의 철도 이동 경험이 없었던 미군은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군수국이 필요한 시기에 민간 철도회사의 차량을 투입하지 못해 부대이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미숙한 운용은 침공군의 주요 집결지였던 플로리다 탬파Tampa에는 1천여대의 열차편이 몰려 극심한 정체를 이루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탬파행 열차가 직선거리로 대략 700km 떨어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컬럼비아에 묶여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8) 그야말로 대륙적인 규모의 교통정체였습니다.

컬럼비아에서 탬파까지는 직선거리만 해도 어마어마하지요;;;;대륙 규모의 교통정체란;;;

철도와 달리 해상교통은 훨씬 준비가 잘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군수국은 3월 24일 전쟁을 대비해 선박 확보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4월 1일부터 8월 31일 까지 대서양 방면의 작전을 위해서 44척의 선박을 임대했고 추가로 14척을 구입했으며 태평양 방면의 작전에는 17척을 임대하고 2척을 구입했습니다. 이와 별도로 병원선으로 사용하기 위해 존 잉글리스John Englis라는 기선이 구입되어 개조된 뒤 릴리프Relief로 개칭되었습니다.9)
그 다음으로 중요한, 특히 작전 단위의 이동에서 중요한 이동수단은 말과 노새와 같은 축력이었습니다. 당시 편제상 미육군의 기병중대는 말 126마리, 보병중대는 12마리, 경포병 포대는 126마리의 말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10) 그렇기 때문에 수송용 동물의 조달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미국의 방대한 생산력 덕분에 마필의 조달은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은 미서전쟁 기간 중 기병용 말 10,000마리, 포병용 말 2,500마리, 견인용 노새 17,000마리, 등짐용 노새 2,600마리를 조달했습니다. 반면 견인용 수레는 약간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노새 6마리가 끄는 미육군의 표준형 수레는 민간시장에서 생산하지 않는 것이라 결국 육군의 기준에는 미달하는 민수용인 4마리가 끄는 수레를 3,600대 구입해야 했다고 합니다.11) 미육군의 표준형 노새 6마리 수레는 4천파운드의 수송량을 가졌는데 민수용인 노새 4마리 수레는 3천파운드 이하로 적재하도록 권장되었다고 합니다.12)

장비와 물자의 조달은 매킨리 대통령이 병력동원을 결심한 3월 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미육군은 위에서 언급한 헐 법안에 따라 주방위군은 본토 방위에 투입하고 원정군은 정규군을 중심으로 한 7만5천명에서 많아봐야 10만명 정도면 충분하다는 계획하에 물자 조달을 시작했기 때문에 헐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또한 전쟁의 규모가 커져 수십만명의 주방위군을 무장시켜 원정군에 합류시켜야 하는 상황이 되자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없었습니다.13) 당장 쿠바 침공 부터 미육군이 당초 예상한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방위군 및 지원병을 동원해야 했으며 이것은 장비와 물자조달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게 됩니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켄터키 주방위군 소속의 한 연대는 집결지로 지정된 치카마우가에 도착했을때 위스키는 잔뜩 챙겨왔지만 소총은 단 한정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1개사단의 절반에 해당되는 2개연대가 무장이라곤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당장 연방군이 가진 물자를 모조리 털어서 지원병들을 장비시켜야 했고 이것은 정부가 계약한 업체들이 쉽게 공급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14) 군수국Quartermaster Department과 병기국Ordnance Department은 4월 20일이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군수물자를 발주하였습니다. 병기국은 4월 30일까지 5만3천정의 크랙-요르겐슨Krag-Jörgensen소총과 1만5천정의 카빈을 구할 수 있었는데 20만에 육박하는 주방위군이 소집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이게 턱없이 모자란 수준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15) 이런 상황에서 급하게 장비를 조달하다 보니 문제가 속출했습니다. 병기국이 윈체스터사에 1만정의 소총을 먼저 주문했다가 이것들이 육군이 요구한 성능기준에 미달해 20만달러를 허공에 날린 일도 있었습니다.16)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근로자를 6백명에서 10시간 2교대 1,800명으로 늘렸고 소총 생산은 3월 중순 하루 120정에서 8월 중순에는 하루 363정으로 늘어납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총은 부족했기 때문에 주방위군과 지원병으로 구성된 부대는 초기에 흑색화약을 사용하는 구식 스프링필드 소총을 장비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쟁 발발 당시 26만정 가까운 재고가 있었다고 하는군요.18)
다 른 모든 병과와 마찬가지로 포병도 준비가 매우 부실했습니다. 1896년 당시 미육군은 야전포병의 표준장비인 3.2인치 야포를 150문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898년 전쟁이 발발하자 14개의 정규군 포병 포대는 포대당 6문의 편제를 갖출 수 있었으나 지원병으로 새로 편성된 포대는 포대당 4문의 편제를 갖춰야 했습니다.19)
또한 무연화약의 생산도 문제였습니다. 이것 또한 평시 상비군의 규모가 적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민간기업들은 민수용으로 주로 흑색화약을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닥치고서 군대의 발주에 의해 황급히 시설을 전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시동원이 시작될 당시 민간 기업중 무연화약 생산능력을 갖춘 곳은 세곳 뿐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무연화약의 배분은 해군의 함포와 육군의 크랙-요르겐슨 소총 탄환에 최우선적으로 할당되었고 해안포와 야전포병에는 임시변통으로 흑색화약이 보급되었습니다. 야전포병에 대한 무연화약 구입은 5월이 되어서야 시작되었고 전쟁 내내 무연화약 보급은 부족했습니다.20)
그 밖의 군장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족한 재고량을 민간기업의 생산능력으로 보충하려 했으나 위에서 언급한 무연화약과 마찬가지로 민간기업들은 생산해 본 경험이 없는 군수물자를 생산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실제 생산된 것들도 조악한 품질이 많았던 모양입니다.21) 탄입대 같은 것은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꽤 단순한 물건인데 이런 것 조차도 당시 미육군의 품질 기준을 통과하는데 꽤 어려움을 겪었던 모양이더군요.

미서전쟁 기간 중 미국의 전시동원을 보면 아무리 방대한 산업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바로 군수물자 생산능력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은 방대한 동원력을 보여주었지만 거기에는 미서전쟁과 1차대전을 거치면서 축적된 경험과 전간기 동원을 위한 많은 연구가 바탕에 깔려있었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30년이 지난뒤 갑자기 전쟁에 뛰어든 미서전쟁기의 미국은 그와는 동떨어진 존재였습니다. 군대를 어떻게 유지하고 조직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도 부족했고 민간부문의 경제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는 능력도 부족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몇가지 극단적인 사례처럼 경험부족으로 인한 심각한 비효율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저런 시행착오를 극복하면서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고 이런 경험이 조금씩 쌓여가면서 마침내 2차대전 시기에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방대한 전시동원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1) Jerry Cooper, The Rise of the National Guard : The Evolution of the American Militia, 1865-1920,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7), p.97
2) Michael D. Doubler, Civilian in Peace, Soldier in War : The Army National Guard, 1636-2000,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129
3) Graham A. Cosmas, An Army for Empire : The United States Army in the Spanish-American War,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8), pp.6~7
4) Jerry Cooper, Ibid., pp.99~100
5) Jerry Cooper, Ibid., pp.102~103
6) Graham A. Cosmas, Ibid., p.86
7) Jerry Cooper, Ibid., pp.97~98; Graham A. Cosmas, Ibid.,  pp.82~89
8) “The Dodge Commission Assesses the Work of the Quartermaster Department in the War with Spain”,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36
9) “The Dodge Commission Assesses the Work of the Quartermaster Department in the War with Spain”,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p.337~338
10) “Official Allowances for Supplies, Equipment, and Transprot, 1898”,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46
11) Graham A. Cosmas, Ibid.,  p.151
12) “Official Allowances for Supplies, Equipment, and Transprot, 1898”,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46
13) Graham A. Cosmas, Ibid.,  pp.82~84
14) Graham A. Cosmas, Ibid.,  p.124
15) Graham A. Cosmas, Ibid.,  p.148
16) Graham A. Cosmas, Ibid.,  p.137
17) Graham A. Cosmas, Ibid.,  p.149
18) Graham A. Cosmas, Ibid.,  p.154
19) Janice E. McKenny, The Organizational History of Field Artillery, 1775~2003, (CMH, US Army, 2007), pp.85~88;  Graham A. Cosmas, Ibid.,  p.152
20) Graham A. Cosmas, Ibid.,  pp.152~153
21) Graham A. Cosmas, Ibid.,  pp.156~157

2011년 9월 9일 금요일

America's Coming Retrenchment

개인적으로 재미있어서 번역을 해볼까 하는 글이 몇 편 있었는데 어영부영 하다가 시간이 확 지나갔군요. 오늘 소개할 글은 한달전인 8월9 일 Foreign Affairs 인터넷 판에 실린 마이클 만델바움Michael Mandelbaum 교수의 “America's Coming Retrenchment : How Budget Cuts Will Limit the United States’ Global Role”이란 글 입니다. 이미 한달이나 지난 글이긴 한데 저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신 분 중에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아 늦게나마 번역해서 올립니다.

다가오는 미국의 긴축 : 예산 삭감이 미국의 국제적인 역할을 어떻게 제약할 것인가
-마이클 만델바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8월 2일에 서명한, 연방예산 적자를 줄이는 동시에 미국의 부채 한도를 상향한 법안을 이끌어낸 치열한 협상은 적자를 통제하려는 전투의 전초전에 불과하다. 이 전투는 시간을 질질 끌게 될 것이며, 어렵고, 그리고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이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될 것 중 하나는 이미 수년전 부터 줄어들기 시작한 대외 정책 및 안보정책과 관련된 예산들이다. 이것은 미국의 힘을 세계 전역에 투사하는데 새로운 제약을 부과하게 될 것이다.  

일 년만에 얼마만큼이나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바로 지난해의 포린 어페어즈 5/6월호에 나는 책 세 권에 대한 서평을 실었는데 이 세 권의 책들은 공통적으로 미국이 그 한계를 넘어 지나치게 멀리 나갔다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 세 명의 저자들은 미국의 이익과 다른 국가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미국이 보다 신중한 대외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내가 그 서평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측한 것 처럼 미국의 재정 상태는 그러한 제안을 어쩔 수 없이 이행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 책들의 저자들이 가진 공통적인 생각처럼) 더 좋든 혹은 (내 자신의 견해 처럼) 더 나쁘건 간에.

8월 2일의 법안은 향후 10년간 1조 달러의 예산 삭감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 중 3500억 달러가 국방 예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법안은 그 다음 10년간 1조5천억 달러의 삭감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 의회 특별 위원회가 이러한 삭감 목표치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한다면 자동적으로 일괄적인 예산 감축이 강요될 것이며 이렇게 된다면 국방부의 예산은 6천억 달러 수준으로 낮아질 것이다.

설사 자동적인 예산 감축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국방 예산과 그 밖에 미국의 다른 대외 정책과 관련된 예산들은 다음 10여년간 감소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재정을 굳건한 기반위에 올려놓기 위해 필요한 적자 감축의 규모는 엄청나기 때문에 민주당 측에서 사회의 안보와 의료보험은 손대길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도 감축하게 될 것이며 공화당 측에서 증세를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증세가 이루어 지게 될 것이다. 만약 미국인들이 정부에 더 많은 돈을 내면서도 받는 것은 더 적어진다면 지난 수십년간 그랬던 것 처럼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지지하는데 관대함을 보이지는 못할 것이다.

국방예산이 감축되는 데에는 이유가 두 가지 더 있다. 첫 번째는 냉전 기간과 9/11 테러 이후 미국이 느꼈던 외부의 위협에 대한 인식이 감소했다는 점이다. 국방 지출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지지는 그들이 위협을 얼마나 느끼느냐에 좌우된다. 최소한 얼마동안은 세계가 특별히 위협을 받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연방 예산을 둘러싼 정치가 국방부에 유리하지 않다는 점이다. 국방부는 공화당과 민주당 어느 쪽에도 의지할 수 없으며 연방 예산에서 자신들의 몫을 지켜낼 수도 없는 상태이다. 민주당 내에서 외교와 안보 정책에 높은 우선순위를 둔 세력은 없다. 공화당 측에는 국가 안보정책에 있어 대규모 군사력과 강경한 대외정책에 헌신하는 매파에 속하는 인물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공화당 내에는 두개의 다른 집단이 있다. 사회 보수주의자Social conservatives들은 외교안보문제에 있어 무관심하며 작은 정부와 낮은 세금을 지지한다. 이제 티 파티 운동의 입장을 표명하는 공화당에서 가장 영향령 있는 집단은 그들의 주요 목적을 위하여 국방 예산을 희생시킬 의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앞으로는 국제적으로 과거에 해왔던 것 보다는 훨씬 적은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어떤 부분이 중단 될 것이며 또 중단 해야 할 것인가? 내가 2010년에 낸 책, The Frugal Superpower에서 논했던 것 처럼 21세기의 외교 정책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며, 또한 미국이 가장 쉽게 그만 둘 수 있는 일은 냉전 이후의 첫 20년 동안 소말리아, 아이티, 보스니아,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라크에서 해왔던 것과 같은 군사 개입이다. 이러한 작전들은 각자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모두 다 원치 않는, 장기적이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국가 건설이라는 심각한 과업을 미국에게 안겨 주었다. 이것들은 정부 체제가 붕괴한 곳에 그것을 재건해 주거나 그러한 것이 아예 존재 하지 않는 곳에 정부 체제를 세워주는 일이었다. 국가 건설이라는 정책은 세 가지의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이러한 정책이 자신을 방어하는 데는 기꺼이 대가를 치르려 하지만 다른 이들을 통치하거나 다른 이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도록 도와주는데는 관심이 없는 미국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미국은 물론 다른 어떤 나라들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유능하고, 또한  민주적인 기구를 신속하고 경제적으로 건설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은 잘 봐줘야 보잘 것 없는 성과를 거뒀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냉전 이후 미국이 성공을 거둔 국가 건설이 미국의 안위나 안보에는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미군이 철군하고 난 뒤 아프가니스탄이 미군이 오기 이전 보다 훨씬 더 평화롭고 번영하게 된다면 이것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에게 엄청난 이익이 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 하더라도 미국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국가 건설이란 대외 정책을 보다 경제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미국의 대외정책 목록에서 제1순위로 퇴출되어야 할 대상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추진되고 있던 군사개입과 국가 건설이라는 문제를 이어받았고 이것들을 단계적으로 축소해 나갔다. 비록 미국이 2011년 3월에는 리비아에서 비슷한 군사개입을 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고 나토의 역할을 강조한 작전 수행 방식은 미국이 개입에 따른 비용을 최소화 하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국가 건설에 개입하는 것을 그만둔다 해도 미국에게는 국제적으로 주된 역할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중요한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게 그 국가가 그들의 사회에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를, 비록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상당한 규모로 제공하고 있다. 즉 미국은 실질적인 세계 정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The United States functions, that is, as the world’s de facto government.

미국은 세계의 기축 통화, 달러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개방된 시장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해군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무역로를 지키고 있다. 바로 대서양과 태평양이다.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 경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페르시아만의 석유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동아시아와 유럽에 주둔한 미국의 군사력은 비록 공식적인 적대관계에 있지는 않지만 서로간에 신뢰하지 못하는 이 지역의 국가들에게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심각한 위협을 미국이 나서서 직접 해결해 줄 것임을 보증하고 있다.

미국의 국방예산은 대부분 이렇게 이익이 되는 임무를 지원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국가가 국방 예산을 적게 쓴다면 국가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코앞에 닥친 경제적 제약의 시기에 세계 정부로서의 미국의 역할에 어떤 위협이 닥칠지는 그와 관련된 예산이 얼마나 많이 감축될 것인가에 달려있다. 즉 그것은 미국의 정치 체제가 특히 복지 비용을 통제하거나 세금을 인상하는 것과 같은 방식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여 어느 정도 재정 적자를 감축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전 세계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 정부의 불가피한 예산 감축이 미국을 넘어서 반향을 일으킬 것은 확실하다.

저는 이 글이 평소 제가 생각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필자는 미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국력을 아껴야 할 시점이 다가왔고 역량을 집중해야 할 지역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으로는 유럽과 동아시아를 꼽고 있지요. 또한 미국의 군사력은 이익이 되는 임무beneficial missions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난번에 블로그에 썼던 「제국의 유지비용」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한계를 느끼게 되면 결국 이런 과정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익이 되는 범주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꽤 골치아픈 상황에 처하게 되겠지요.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미국의 대외 정책 입안가들이 이 글에 나타난 기조를 따르게 된다면 최소한 동아시아에서는 안보적으로 평온한 시기가 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그건 제가 바라는 바이기도 합니다.

2011년 2월 7일 월요일

형님 노릇

1965년 7월 22일, 백악관에서는 베트남전에 대한 개입 확대를 둘러싼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미 베트남은 계륵 같은 꼴이 되어 있었고 정치인들의 골머리를 썩게 하고 있었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이 회의에서 합리적인 군사적 대안을 찾고자 했는데 군에서는 강경한 대응을 제안합니다.

이 회의록에는 강대국의 딜레마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존슨 : 맥나마라 장관에게 이러한(베트남에 대한) 문제들과 이에 대한 방책을 상의하기 위해 여러분을 소집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각 군 참모총장들에게서 가능한 방안에 대해 들어본 뒤  군사적인 관점에서 방안을 추천해 줬으면 합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베트남을 포기하는 것인데 손실은 가장 적을 겁니다. 두 번째는 현재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서서히 패배하는 겁니다. 세 번째는 100,000명을 추가 파병하는 것인데 이 정도로는 병력이 부족할 수도 있고 내년에 추가 파병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 방안의 문제점은 사태가 더 격화되고 사상자가 늘어나며 승리할 수 없는 장기전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 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야기 한 뒤 우리가 어떤 방안을 취해야 할 지 말 해 보십시오.

맥도날드(David. L. McDonald) 해군참모총장 : 해병대를 파병하면 상황이 호전될 것 입니다. 저는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개입해야 한다는 맥나마라 장관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만약 우리가 현재 방식대로 계속한다면 적에게 느리지만 확실한 승리를 안겨줄 뿐 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한다면 상황을 역전시키고 우리가 앞으로 뭘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게 해 줄 겁니다. 저는 우리가 진작부터 이렇게 하길 바랬습니다.

존슨 : 하지만 제독도 100,000명으로 충분할 것 인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데 제독은 왜 우리가 (개입을) 멈춰서는 안되고 이 방안을 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까?

맥도날드 : 조만간 적을 협상 무대로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존슨 : 하지만 우리가 100,000명을 증파하더라도 적이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지는 않을 텐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맥도날드 : 폭격을 강화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되겠지요...

존슨 : 우리가 이 방안을 취해야 합니까?

맥도날드 : 예. 각하. 제가 대안을 고려해 보면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철군하거나 병력을 증파해야 합니다.

존슨 : 그게 전부입니까?

맥도날드 : 예, 저는 우리 동맹국들이 미국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존슨 : 현재 우리를 실질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동맹국은 많지 않습니다.

맥도날드 : 태국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만약 우리가 베트남에서 빠져나온다면 전 세계가 미국의 공약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겐 달리 선택할 길이 없습니다.

Larry Berman, Planning a Tragedy : The Americanization of the War in Vietnam(W.W.Norton, 1982), pp.112~113
맥도날드 제독의 말 처럼 강대국이 되면 설사 계륵이라 하더라도 그냥 뱉고 나올수가 없게 됩니다. 언제나 형님 노릇은 고달프지요.

2009년 6월 19일 금요일

만만한게 제주도...

서산돼지님이 '닉슨 前부통령의 '1박 2일' : 푸대접과 오뉴월 서리 복수'라는 글을 쓰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글에서 특히 흥미있었던 부분은 박정희가 미국측에 제주도를 미군 기지로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부분입니다. 재미있게도 이승만도 미국측에 제주도를 해군기지로 제공할 것을 제안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육군부 차관 드레이퍼(William H. Draper. Jr)는 주한미군철수와 남한 단독선거 문제로 1948년 3월 서울을 방문합니다. 이때 드레이퍼는 향후 수립될 단독정부의 수반으로 유력했던 이승만을 만나 회견을 가집니다. 이 두 사람의 회견은 1948년 3월 28일 조선호텔에서 있었는데 이때 이승만은 꽤 재미있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회견에는 훗날 군사사가로 유명해지는 듀푸이(Trevor N. Dupuy) 중령이 육군부차관 보좌관으로 동석하고 있었습니다. 듀푸이 중령이 남긴 비망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이박사는 미국정부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두는 것을 고려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정부가 수립되면 한국인들은 미국정부가 제주도에 영구 기지를 설치하는 것을 매우 반길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드레이퍼 차관보는 이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Dr. Rhee said that he had heard it suggested that the United States might wish to have a Naval Base on Cheju Island. He Said that he felt confident that when a Korean Government is established, that the Koreans would be very willing to have the United States establish a permanent base there. (Mr. Draper made no comment).

Conference between Under Secretary Draper and Mr. Syngman Rhee, on 28 March 1948(1948. 4. 10), RG 319 Army Staff Plans & Operations Division Decimal File 1946-48 091.Korea Box 20 (Folder #3-1)

물론 미국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둘 생각은 커녕 하루라도 빨리 주한미군을 모조리 철수시킬 계획 뿐이었습니다. 이승만은 노련한 정치가 답게 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고 싶다는 뜻을 돌려서 밝힌 것이죠. 물론 인용문에 나와 있듯 드레이퍼는 이승만의 떡밥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만만하게 제주도라는 느낌입니다. 말 그대로 수난의 섬이로군요.

2009년 2월 8일 일요일

미국 합동참모 본부의 대소 작전계획 : 1945~1950

지난해 11월에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작전 연구안 Gunpowder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안은 합동참모본부의 작전 계획의 하위 개념으로 연구된 것이었기 때문에 상위 계획인 미 합참의 전쟁계획안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히 1945년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미 합참이 수립한 여러 개의 전쟁계획에 대한 글을 쓰려 했었는데 깜빡하고 넘어간 것이 벌써 석 달 째로군요.

이 글에서는 Steven T. Ross의 American War Plans 1945~1950의 내용을 골격으로 하고 여기에 다른 서적의 내용을 일부 참고해서 냉전 초기 미 합참의 전쟁 계획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1. 소련의 위협에 대한 미 합참의 평가

미 합참은 1944년부터 전후 세계에서 소련이 미국과 대등한 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차대전이 종결된 지 2개월 남짓 지난 1945년 10월 9일에는 합참 예하의 합동전략조사위원회(Joint Strategic Survey Committee)에서 소련과 협상을 통해 유럽과 태평양 지역의 안정을 이루는 것이 어려워 졌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합참은 이 보고서를 받아 들인 뒤 10월 16일에는 소련군의 전력에 대한 정보평가를 검토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소련군은 동원해제 이후에도 병력 441만1천명, 113개 사단 및 410개 항공연대를 유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이 예측에 따르면 동원해제 이후의 미 육군은 소련의 위협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합참은 만약 소련이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에 전쟁을 시작한다면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을 석권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물론 1945년 10월 시점에서는 아직 냉전이 격화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 합참은 소련이 전쟁을 먼저 도발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1945년 11월 16일에는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전력에 대한 평가 보고서가 제출됐는데 이 보고서는 프랑스의 전력은 극도로 빈약하고 영국은 본토 방어에 급급하거나 기껏 해야 수에즈 운하 일대를 방어할 능력밖에 없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미 합참은 계속해서 소련의 전략적 의도와 능력에 대한 분석을 계속했습니다. 1946년 1월 31일에 합참 예하 합동정보위원회(Joint Intelligence Committee)가 제기한 소련의 전략적 목표에 대한 문제제기는 소련의 전쟁 도발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합동정보위원회는 소련은 경제 복구를 위해서 향후 5년간은 전쟁을 피하겠지만 만약 스탈린이 다른 국가들의 저항 의지를 과소평가한다면 무력도발을 감행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흥미롭게도 합동정보위원회에서는 1946년 7월 9일에 전후 안정을 위해서 소련과 세력권을 분할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합참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만.
전후 처리 문제로 소련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미 합참은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 더욱 더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 11월 6일의 합참 정보평가에서는 향후 10년 내에 소련과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상정했으며 소련이 1956년까지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전략공군과 150발의 원자폭탄을 보유할 수 있다고 예측했습니다. 특히 이 평가에서는 소련이 재래식 전력의 우위 때문에 미국이 핵 전력의 우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유럽과 아시아 본토를 상실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미국은 2차대전 종결 이후 급속히 군사력을 감축하고 있었고 특히 육군이 집중적으로 감축되었기 때문에 대륙의 지상전에서 소련을 저지할 가능성은 낮았습니다.


2. Pincher 계획과 그 보완계획 – 최초의 대소 작전계획

1946년 3월 2일, 합참 예하의 합동전쟁기획위원회(Joint War Plans Committee)는 소련과의 전쟁을 상정한 핀처(Pincher) 계획안을 제출합니다. 이 계획안은 소련이 전면전을 도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시작한 도발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상황을 가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한 전략적 차원의 첫 번째 작전계획이기도 했습니다.

이 계획안은 소련이 그리스와 터키, 이란 방면으로 이익을 획득하려 압력을 가하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터키를 장악한다면 이것은 영국의 중동에 대한 통제력에 큰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에 소련의 터키 침공은 영국과의 충돌을 가져와 이것이 3차대전으로 확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전쟁 발발시 총 113개 사단과 동맹군 84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으며 이 중 40개 사단을 터키 및 중동 방면의 침공에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은 총 2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으며 수에즈 운하 지구를 방어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소련이 영국의 참전과 동시에 서유럽에서 전면적인 공세로 나서는 것 이었습니다. 이 계획안은 미군과 영국, 프랑스군의 전력으로는 기껏해야 라인강 선에서 지연전을 펴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또 오스트리아 방면의 연합군은 이탈리아로 철수해 포 강을 끼고 방어선을 형성할 계획이었지만 만약 소련군이 총력을 기울인다면 이탈리아는 함락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핀처 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초기부터 지상전에 휩쓸려 소모되는 것을 피하고 미국이 가진 해군과 공군의 우세를 살리는 방안을 추천했습니다. 서유럽은 포기하되 영국, 이집트, 인도, 이탈리아(방어가 가능하다면), 중국을 거점으로 소련에 대한 봉쇄와 전략 폭격으로 대응하자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에서는 서유럽을 탈환하는 것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소련군에 점령된 서유럽을 탈환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면 숫적으로 열세인 미 육군이 소모전에 말려들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레닌그라드나 무르만스크, 리가 등 소련의 해안지역에 상륙하는 것 또한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핀처 계획의 초기안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병력 감축으로 제한된 미군의 능력을 고려한 계획이기는 하지만 이 계획에는 소련에 어떻게 승리할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핀처 계획에 대한 추가 연구는 계속 되었는데 추가 연구에서는 극동에서 소련군이 공세로 나올 경우 만주와 한반도는 소련에게 넘겨주고 미 지상군은 일본으로 철수하는 방안이 채택되었습니다. 핀처 계획에서 승인된 이 방안은 이후 미국의 전쟁계획에서 계속 유지됩니다.

핀처 계획이 상정한 소련군의 전력은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미 합참은 소련이 동원을 시작하면 동원 시작 60일 이후 서유럽 전선에 총 270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와 별도로 42개 사단을 중동 방면에, 49개 사단을 극동 방면으로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반면 소련의 공군과 해군 항공대는 막대한 숫자에도 불구하고 전략 공군이 취약하기 때문에 지상군 만큼 큰 위협이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그리고 핀처 계획에서 중요하게 평가된 것이 터키였습니다. 터키는 48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것은 미군을 제외한다면 연합군 중 최대의 전력이었습니다. 비록 소련군에 비해 장비가 구식이긴 하지만 훈련도가 높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또 터키를 통해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즈를 폭격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핀처 계획을 기반으로 1946년 12월 20일에는 이탈리아 방어 계획인 닭발톱(Cockspur) 계획, 1947년 8월 4일에는 이베리아 반도 방어 계획인 북소리(Drumbeat) 계획, 1947년 8월 29일에는 극동 방어 계획인 월출(Moonrise) 계획 등이 작성되었습니다.

한편, 핀처 계획은 어디까지나 전쟁 초기 단계의 대응만을 상정한 계획이었기 때문에 소련과의 전쟁에 대한 전체적인 계획은 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 합참은 핀처 계획을 보완할 계획 작성을 시작합니다.

1947년 2월 13일 합동전략기획위원회가 제출한 전쟁계획 JCS 1725/1은 핀처 계획의 연장선 상에서 수립된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전쟁 초기 소련이 유럽 본토를 석권하는 것은 저지할 수 없기 때문에 북미의 주요 공업지대를 방어하고 영국과 수에즈 운하지대, 인도 북부 등의 핵심 지역을 사수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공격은 전략 폭격 중심으로 이루어 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소련의 석유 생산시설 중 80%가 영국이나 이집트에서 발진하는 미국 폭격기의 작전 범위내에 있기 때문에 충분히 효과적이라고 평가되었습니다. 또한 터키를 방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터키를 잃게 되면 지중해 동부가 소련 공군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이집트를 통한 보급을 대서양을 통해 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터키가 소련군에 함락 될 경우 그 다음의 방어선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형성하도록 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전쟁 발발 1년 차에는 전략 방어를 취하고 전쟁 발발 2년 부터는 전략폭격을 중심으로 소련의 전쟁 수행역량을 감소 시킨 뒤 전쟁 발발 3년 째에 흑해와 카프카즈를 통해 소련 남부로 진격해 소련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을 상정했습니다. 미군의 병력 동원은 전쟁 1년 차에 육군 45개 사단과 공군 70개 항공단 및 56개 독립항공대대, 항공모함 9척, 전쟁 2년 차에는 육군 80개 사단과 공군 139개 항공단 및 113개 독립항공대대, 전쟁 3년 차에는 육군 90개 사단과 공군 264개 항공단 및 141개 독립항공대대, 해군은 항공모함 21척으로 계획되었습니다. 육군의 규모는 2차대전 당시 동원한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점이 특징입니다.

다음으로 7월 말에 작성된 동원계획 JWPC 486/7에서는 소련에 대한 전략 폭격 중 핵공격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전략 핵폭격을 통해 소련의 항공기 생산능력의 86%, 항공기 엔진 생산능력의 99%, 각종 화기 생산능력의 56%, 전차 및 장갑차량 생산능력의 99%, 석유 생산능력의 52%를 파괴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부수적으로 민간인을 대량으로 살상해 소련의 사기를 꺾고 최선의 경우 이를 통해 소련의 항복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합니다.

핀처 계획을 보완하는 여러 계획들은 공통적으로 전쟁 초기의 전략 방어와 전략 폭격을 통한 대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영국, 그린랜드, 아이슬랜드, 알래스카, 중동, 파키스탄, 오키나와, 일본의 기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공군이 강력히 지지하는 B-36 폭격기는 미국의 전략 폭격 및 핵 타격능력을 크게 높여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러 계획에서 논의된 전후 처리 문제인데 소련이 항복하면 동유럽의 국경은 1939년의 국경으로 되돌린다는 합의가 잠정적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혹시 히총통이 노린 것은 이것?!?!)


3. Broiler, Frolin 계획 – 비상대응계획

브로일러(Broiler) 계획은 핀처 계획과 1947년에 작성된 여러 동원 계획을 반영해 작성되었습니다. 브로일러 계획은 소련이 1948년에 전쟁을 시작할 경우를 상정한 계획으로 일종의 비상대응계획이었습니다. 합참의 합동전략기획위원회는 1947년 8월 29일에 그 당시까지 연구된 각종 계획을 반영해 1948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의 대응 계획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계획의 초기안은 같은 해 11월 8일 합참 브리핑에서 처음 발표됩니다.
브로일러 계획에서는 전략 핵폭격을 위해 충분한 원자폭탄을 확보할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재래식 전력이 부족하고 원자폭탄의 숫자도 부족하기 때문에 서유럽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 터키와 지중해 해안 일대, 이집트를 방어하는 것 조차 어려울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특히 소련군이 우세한 전술 공군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에 공군 기지를 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브로일러 계획에서는 미국의 군사적 상황이 극도로 불리하다고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핵 폭격은 사실상 거의 유일한 반격 수단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합동전략기획위원회는 다시 1949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상정한 브로일러 계획의 개정안을 작성했고 이것은 1948년 2월 11일에 채택되었습니다.

물론 브로일러 계획의 개정안도 우울한 전망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브로일러 개정안은 1949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소련은 순식간에 서유럽과 아시아 본토를 장악하고 미국이 전략 핵폭격을 할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영국과 이집트에 대한 공격에 나설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소련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총 173개 사단과 동맹군의 68개 사단 및 25개 독립여단의 지원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또한 공군은 13,0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고 전쟁 개시 150일 이내에 2만대로 증강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미국은 1949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육군 9개 사단과 9개 독립연대, 해병대 1개 사단을 동원하는데 그칠 것이기 때문에 유럽 본토에서 소련을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브로일러 개정안은 소련군이 공격을 시작하면 개전 70일 만에 프랑스까지 점령되고 만약 소련군이 스페인까지 침공할 경우 소련군은 개전 180일에 지브롤터까지 함락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중동방면의 공격에서는 최악의 경우 개전 90일에 터키가 항복하고 175일 차에는 수에즈 운하까지 점령될 것으로 상정했습니다. 또한 서유럽이 함락되면 개전 12개월 뒤에는 서유럽에 전개한 소련공군이 하루 평균 전술폭격 1,550회를 실시하고 또한 V-2 개량형으로 영국을 타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경우 한반도는 모두 포기하고 중국은 연안 일대의 방어 가능한 지역으로 후퇴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중국 본토도 포기하되 일본은 반드시 사수하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한편, 반격은 거의 유일하게 전략 핵폭격에 의해 실시될 계획이었습니다. 이 경우 가장 유력한 기지는 이집트와 인도 북부였습니다. 브로일러 개정안의 핵폭격 계획은 위에서 언급한 JWPC 486/7과 거의 동일한 것 이었습니다. 이 밖에 중동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쿠웨이트와 바레인에 대한 상륙작전이 계획되어 있었고 이 작전이 성공할 경우 바그다드와 모술까지 반격한 뒤 2단계 작전으로 이란에서 소련을 축출할 예정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 중동에 대한 반격작전에는 미군 12개 사단과 영국군 8개 사단이 배정되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핵폭격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계속한다면 흑해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상륙작전을 펼 계획이었는데 이것은 기존 계획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이었습니다.

1948년 3월 17일에는 브로일러 계획을 간략화한 프롤릭(Frolic) 계획이 입안되었는데 브로일러 계획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재래식 전력의 취약상을 강조하고 전략 핵폭격을 중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브로일러와 프롤릭 계획은 핀처 계획 및 그 보완 계획들 보다 더 비관적인 전망을 담은 계획이었습니다. 특히 터키와 이집트, 지중해 재해권의 상실까지 염두에 둔 점이 그렇습니다. 또한 영국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도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등 군축에 따른 미국 군부의 위기의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4. Bushwacker 계획

1948년 1월 3일, 합참의 전쟁 계획들을 검토한 군수위원회(Munitions Board)에서는 핀처 계획에 기반한 작전 계획들이 현재 미국의 전쟁 수행 능력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안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합참에 미국의 전쟁 수행능력에 맞는 새로운 전쟁 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에 따라 1948년 3월 8일, 기존의 계획을 대체할 새로운 작전 계획, 부시워커(Bushwacker) 계획이 입안됩니다. 부시워커 계획은 전쟁이 1952년 경에 시작된다는 가정하에 수립되었습니다.
먼저 소련이 1952년에 전면전을 시작할 경우 투입할 수 있는 전력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루어 졌습니다. 부시워커 계획안에서는 소련이 1952년에 전쟁을 시작할 경우 전쟁 발발과 동시에 110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으며 동원 개시 180일 만에 500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련 지상군은 3만대의 전차와 77,500문의 견인포, 7,500문의 로켓포, 13,000대의 자주포 등 압도적인 전력을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공군의 경우도 1952년에는 대부분 제트기로 이루어지는 2만대의 항공기를 보유할 것이며 특히 B-29에 필적하는 중폭격기 1,600대도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해군은 200척의 신형 고속 잠수함과 130척의 재래식 잠수함을 가지고 미군의 교통선을 위협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부시워커 계획에서는 소련이 1952년까지 원자폭탄을 보유할 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기존의 계획들과 마찬가지로 부시워커 계획은 소련이 미국의 의도를 과소평가하고 제한적 도발을 시작하면 이것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물론 서유럽은 소련 육군에 의해 단기간에 석권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알래스카와 일본에 대한 전략적 폭격을 실시하고 그린랜드와 아이슬랜드에 대한 대규모 공수부대 투입도 가정하고 있는 등 소련이 보다 과감한 공격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시워커 계획 또한 다른 계획들과 유사하게 전쟁이 3단계로 진행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단계는 16일간 지속되며 소련의 전략적 공세와 미국의 전면적인 방어로 진행됩니다. 2단계는 미국이 소련의 공세를 둔화시키면서 제한적인 공세작전을 감행하고 3단계에서는 미국이 전면적인 반격에 돌입한다는 것 입니다. 특히 부시워커 계획은 미군의 증강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계획에 따르면 1단계와 2단계는 신속히 진행되기 때문에 전시 동원의 효과가 없어 미국이 당장 보유하고 있는 전력만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이 계획에서는 미 육군을 14개 사단과 1개 독립연대로 증강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공군은 기존의 계획들과 마찬가지로 폭격을 통해 소련군의 공세 능력을 감소시키는 한편 민간인에 대한 폭격을 통해 소련인들의 전쟁 의지를 꺾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특히 1952년 까지는 충분한 수의 B-36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공군으로 소련의 20개 주요도시들에 충분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련이 초기의 핵공격에도 저항을 계속한다면 다음 단계로 터키, 스칸디나비아 반도, 영국, 북아프리카 등에 기지를 확보하고 전략 폭격을 지속하고 추가적으로 소련 본토에 대한 지상공격을 준비하도록 되었습니다.

또한 핀처 계획에 기반한 비상 작전계획인 브로일러, 프롤릭 계획과 같이 부시워커 계획을 기반으로 한 비상 작전계획도 수립되었습니다. 브로일러와 프롤릭 계획에 이어 수립된 새로운 비상작전 계획은 크랭크축(Crankshaft) 계획으로 명명되었습니다.
크랭크축 계획 또한 이전의 비상 작전계획들과 마찬가지로 당장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국과 영국군은 유럽과 아시아 본토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유럽, 중동, 중국, 한반도는 포기하고 해당 지역의 방어는 각국의 지상군에 맡기되 미국은 공군 및 해군 지원만을 하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개전 60일차에 소련군이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고 이탈리아는 개전 75일에, 시칠리아는 개전 105일에, 그리스는 개전 60일에서 90일 사이에 점령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또한 터키는 최대 개전 150일까지, 수에즈 운하지대는 개전 175일 무렵 소련군에 장악되고 이란과 아라크는 개전 60일차에, 그리고 중국과 남한은 개전 150일차에 점령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크랭크축 계획은 공군의 위력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고 있는데 브로일러, 프롤릭 처럼 전략폭격을 통해 소련의 항복을 받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래전은 전략폭격이 통하지 않을 경우 수행될 예정이었습니다.
1단계의 반격은 페르시아만 일대의 유전 지구에 감행될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개전 초기에는 소련군의 공격에 이곳을 상실할 것이기 때문에 석유 생산시설을 모두 파괴하고 철수할 것이었지만 소련이 전략 폭격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한다면 장기전으로 가기 때문에 페르시아만의 유전을 반드시 확보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1단계 반격에는 미군 18개 사단과 영국군 9개 사단을 먼저 바레인에 상륙시킨 뒤 쿠웨이트-바스라를 장악하고 다음 단계로는 이라크와 이란에서 소련군을 격퇴하는 것이 반격의 개요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확보한 뒤 이곳을 그리스와 터키 탈환의 발판으로 삼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를 장악하면 다음 단계로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 침공도 가능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합참은 전면적인 전략 핵폭격과 뒤이어 그리스와 터키 까지 탈환한 상태에서도 소련이 항복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기존의 계획들은 터키를 발판으로 우크라이나에 상륙, 지상전을 수행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었는데 소련 본토에서 지상전을 수행한다면 대규모의 육군이 필요했습니다. 과연 2차대전과 비슷한 90개 사단 수준으로 소련에서 지상전을 수행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입안가들이 부정적이었습니다.


5. Halfmoon 계획 – 서유럽의 적극적인 방어

한편, 미 합참은 1948년 4월 워싱턴에서 영국, 캐나다군 관계자와 함께 기존에 작성된 대소 작전계획을 토의합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영국, 캐나다는 새로운 작전계획인 반달(Halfmoon)을 승인합니다.
반달계획은 전쟁 첫 해에 시행될 단기간의 비상 계획으로 기본적으로는 브로일러 계획과 유사한 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소련이 1949년에 국지 도발을 감행해 전면전으로 발전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획 또한 전쟁 종결 뒤에는 소련의 국경을 1939년 국경으로 되돌리는 방안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반달 계획은 기본적으로 이전의 계획들과 동일한 골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단 한가지만은 기존 계획들과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전 계획에서는 서유럽이 소련에게 단기간내에 석권되는 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지만 반달 계획에서는 서유럽에서 소련군을 최대한 저지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연합군은 라인강 선에서 소련군을 최대한 저지하면서 점령지역의 저항 활동을 촉진하고 만약 라인강이 돌파된다면 영국군은 본토 방어를 위해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미군은 프랑스에 남아 지연전을 계속할 계획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미군 주력은 스페인이 중립으로 남는다면 프랑스의 연안 지역으로 퇴각하고 스페인이 참전할 경우 피레네 산맥을 경유해 스페인으로 퇴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주둔 연합군은 가능하면 독일 주둔군과 함께 라인강선으로 퇴각하고 소련군의 신속한 진격으로 라인강 방면으로의 퇴각이 봉쇄되면 이탈리아로 후퇴하도록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 오스트리아 주둔군은 스위스를 경유해 후퇴하는 방안도 고려되었습니다. 서유럽과 달리 그리스는 방어를 포기하고 철수하도록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미국은 전면전 발발시 서유럽에서 대규모 지상전을 수행할 계획을 수립한 것 입니다.
다른 지역은 기존의 계획과 유사했습니다. 수에즈 운하 지대는 지중해와 중동일대의 방어 거점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과 한국을 포기하고 일본을 거점으로 전략 방어를 실시할 것이었습니다. 경우에 따라 중국 국민당 정부에 군사원조를 실시하기는 하겠지만 아시아 본토를 포기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반달계획은 전쟁 첫해에 적용될 비상계획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전략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미국이 처음으로 서유럽의 적극적인 방어를 계획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계획들과 차별화 되는 계획입니다. 이후 수립된 전쟁 계획들은 유럽 대륙에서 보다 적극적인 지상작전을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1949년 1월 28일 완성된 트로잔(Trojan) 계획은 기본적으로 반달계획을 바탕으로 한 전쟁 첫해의 전략 계획이었는데 전략 핵폭격에 대한 내용이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트로잔 계획에서는 전쟁 첫 해에 소련의 주요도시 70곳에 총 133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해 소련의 전쟁 수행능력에 타격을 입힌다는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트로잔 계획은 언급된 대규모 공군작전에 대규모의 군수지원이 필요하고 작전 기지가 될 수에즈 운하 지구의 비행장들의 수준이 낮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고 지적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트루먼 행정부의 광범위한 군축 때문에 트로잔 계획의 실행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반대가 빗발쳤습니다. 트로잔 계획을 검토한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Hoyt S. Vandenberg) 장군과 해군참모총장 덴펠드(Louis E. Denfeld) 제독은 현재의 병력으로는 트로잔 계획을 수행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6. Offtackle 계획 – 유럽에서의 적극적인 작전

각 군 수뇌부들은 반달 계획 및 트로잔 계획에 필요한 병력이 부족하다는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사실 트루먼 행정부의 군비 축소는 군대의 입장에서 보면 지나치게 과도했습니다. 특히 육군의 감축은 심각해서 트로잔 계획에 명시된 개전 초기의 능동적 방어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해군 또한 예산 확보에서 공군에 밀려 극도로 불만이 많았고 그나마 감축을 덜 당했다는 공군 조차 원래 계획했던 70개 비행단을 확보할 수 없어 불만이었습니다. 결국 축소된 군사력에 맞춘 새로운 계획의 수립이 요구되었습니다.

특히 소련군의 전력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지상전력의 취약성을 더 두드러지게 했습니다. 1948년 8월 1일 합참의 정보 평가에 따르면 소련 육군은 총 104개 소총사단, 35개 기계화사단, 10개 전차 사단, 15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고 여기에 위성국의 90개 사단이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미육군은 겨우 10개의 현역 사단 밖에 없었고 이 중 당장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것은 1개 사단이었습니다. 나머지 9개 사단은 편제에 미달하는 병력과 장비만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한편,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한 것은 더욱 더 큰 불안감을 가져왔습니다.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 장군은 원자탄을 추가적으로 생산하는 것 보다 본토 방공을 위한 전력을 확충하는 것이 더 시급해 졌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합참의 정보평가는 소련이 1953년 중순까지 135발의 원자폭탄을 보유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미국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전략적 우위가 사라진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게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으니 그것은 1948년 3월 17일에 브뤼셀 조약(Treaty of Brussels)을 통해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3국이 공동 방위 체제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서유럽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서유럽에 보다 적극적인 안보공약을 제공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에게 유사시 라인강선의 적극적인 방어를 요구했고 미국도 1948년부터 이에 대해 긍정적이 되었습니다. 장기적으로 군사원조를 통해 서유럽 국가들의 군사력을 강화한다면 이것은 미국의 안보에도 이익이 된다는 관점이었습니다. 물론 소련이 단기간에 전쟁을 개시한다면 이것은 재앙으로 돌변할 수 도 있었지만 어쨌든 미국에게는 충분히 해 볼 만한 시도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전쟁 계획의 수립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반달계획은 처음으로 서유럽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를 명시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기존의 작전계획들을 조금 변경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1949년 4월 26일 합동참모본부는 예하 합동전략기획위원회에 새로운 비상 전쟁 계획의 수립을 지시합니다. 이 계획은 기본적으로 서유럽에서의 전략적 공세와 동아시아에서의 전략적 방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주전장이 될 서유럽에서는 영국-라인강 선을 잇는 방어선을 고수하고 라인강이 돌파되더라도 서유럽 본토에 교두보를 유지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불가피하게 서유럽 전체가 석권된다면 최대한 빨리 서유럽에 대한 상륙과 탈환을 계획하도록 했습니다. 즉 새로운 작전 계획은 기존에 취하고 있던 서유럽 포기를 완전히 폐기한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계획인 오프태클(Offtackle) 계획은 1949년 12월 합참에 의해 승인됐습니다. 이 계획은 사실 여전히 부족한 병력으로 더 큰 목표를 추구한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 안보목표인 서유럽의 방어를 위해서는 전력이 증강될 때 까지의 단기간의 문제점은 감수한다는 것이 합참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프태클 작전은 처음으로 3차대전 이후의 정치적 질서 재편을 언급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기존의 계획들도 전쟁 후 소련의 영토를 축소한다는 계획 정도는 언급하고 있었으나 정부의 명확한 대소 정책의 뒷받침은 없었습니다. 오프태클 계획은 전쟁이 종결되면 동유럽에서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고 공산당 조직을 완전히 와해시킬 것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련의 공산 정부를 붕괴시킬 수 없을 경우에는 전쟁 수행능력 만이라도 와해시킬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대소 작전계획에 이스라엘을 포함시켰는데 오프태클 계획에서는 소련이 중동으로 침공해 이스라엘을 위협한다면 이스라엘도 동맹에 포함시킨다는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오프태클 계획은 소련이 서유럽과 중동, 아시아에서 동시에 공세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제 1단계에서 라인강선을 방어하는 것은 한동안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전의 계획들과는 다르게 라인강선이 돌파되더라도 꾸준히 지연전을 펼치고 서유럽에 최소한의 교두보를 확보해 반격의 발판을 삼는 다는 점을 명시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마지막 교두보에서 밀려나더라도 서유럽에 대한 탈환작전을 최대한 이른 시기에 실행하도록 했습니다. 또 유럽을 상실할 경우 영국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개전 2개월 이내에 영국에 총 144개 대공포연대와 전투기 1,152대를 배치할 계획이었습니다. 유사시에는 미국 항모기동부대 또한 영국 방공전에 투입하는 방안이 고려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지중해 서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북아프리카에 지상군과 공군을 신속히 증강하고 서유럽이 함락될 경우 북아프리카를 유럽 탈환의 발판으로 삼을 것이었습니다. 또한 소련이 스페인을 침공할 가능성은 적다고 판단되었으나 만약 소련이 스페인을 침공한다면 피레네 산맥에서 1차 방어를 하고 이곳이 돌파되면 지브롤터로 점진적으로 후퇴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전쟁 1단계에 서유럽에서 전략방어를 실시하는 동안 미공군은 가능한 모든 전력을 동원해 전략 핵폭격을 실시하도록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 개시 3개월 이내에 영국 주둔 전략폭격기 부대를 7개 항공단으로 증강해 소련의 서부 공업지대에 타격을 가할 것이었습니다.
전쟁 개시 3개월 이후 부터는 제 2단계로 전환해 전략 폭격을 계속하는 동시에 병력 동원을 가속화해 유럽 탈환을 준비할 예정이었습니다. 동시에 서유럽 상륙작전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칠리아와 코르시카, 사르데냐, 또는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방안도 고려되었습니다.
전쟁개시 12개월 에서 24개월 사이에는 제 3단계로 전환해 서유럽 탈환작전을 시작하도록 되었습니다. 서유럽에 대한 상륙작전에는 미군 41개 사단과 항공모함 전투단 10개, 그리고 43개 항공단이 투입될 계획이었습니다. 이 상륙작전은 셀부르에서 덴마크 서해안에 이르는 지역 중 그때 상황에 적합하다고 예상되는 지역에 감행될 것이었으며 서유럽에 상륙한 주력은 이탈리아에서 북상하는 부대와 대규모의 포위망을 만들어 서유럽의 소련군을 섬멸할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시 동쪽으로 진격해 소련이 항복할 때 까지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이 이 계획의 결론이었습니다.

오프태클 계획은 군사적인 면 보다 서유럽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많이 작용된 계획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 군부에서는 오프태클 작전의 수행을 위해 전력 증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7. Dropshot 계획 – 유럽에서의 대규모 지상전

한편, 합참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1956년 7월 발생할 경우를 상정한 비상 계획안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연구안은 다시 전쟁 발발시기를 1957년 1월로 늦추었고 당시 미군의 군비 축소를 고려해 최소한의 병력과 물자가 소요되는 방향으로 연구되었습니다. 이 연구안은 1949년 1월 31일 제출되어 드롭샷(Dropshot)이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드롭샷 계획은 소련이 개전 당일 135개 사단과 20개 포병사단을 동원하고 개전 한달 이내에 248개 사단, 그리고 개전 1년 내에 500개 사단으로 증강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에 대해 연합군이 라인강-알프스-피아브 선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병력은 76개 사단으로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라인강 방어선이 돌파될 경우 프랑스 북부에 교두보를 유지하는 방안도 고려되었는데 이 경우 코탕탱 반도에 10개 사단, 브르타뉴에 20개 사단을 배치해 방어하도록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2차대전 당시의 경험에서 드러났듯 북부 프랑스에는 대규모 육군을 지원할 만한 항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교두보를 장기간 유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드롭샷 계획에서는 그 대안으로 이탈리아 남부에 34개 사단을 투입해 교두보를 확보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말타, 크레타, 키프러스 등을 확보하는 방안이 있었는데 이러한 작은 섬은 유럽 탈환의 기지가 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드롭샷 계획은 기존의 계획과 달리 중동을 장기간 방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터키의 경우 전토를 방어하는 것은 어렵지만 연합군의 지상군과 공군 지원이 있을 경우 터키 남부를 장기간 방어하는 것은 가능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이란과 쿠웨이트의 유전지대도 가능한 사수하되 소련군에게 점령될 경우 최대한 빨리 탈환작전을 펼치도록 예정됐습니다. 극동지역은 기존의 계획들과 동일하게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를 중심으로 전략 방어를 하되 홋카이도는 유사시 소련군에게 점령되는 것을 감수할 것이었습니다.

이후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 장군과 육군참모총장 브래들리 장군이 드롭샷 계획의 보강을 지시해 드롭샷 계획의 개정안이 1949년 12월 19일 합참에 제출되었습니다.
개정안에서는 작전에 필요한 병력 규모를 보다 구체적으로 산정했습니다. 먼저 반격의 주력이 될 공군의 경우 개전 당일 미공군은 3,529대, 영국 등 연합군은 5,058대를 투입할 수 있어야 하고 개전 6개월 차에는 미공군이 4,270대, 연합군은 5,399대로 증강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개전 30개월 차에 미공군은 11,152대까지 증강될 것이었습니다. 해군은 13척의 정규항모, 4척의 경항모, 9척의 호위항모를 동원하고 육군은 개전 첫 단계에 15개 사단, 그리고 개전 30개월 까지 74개 사단과 2개 독립연대로 증강될 예정이었습니다. 또한 아시아를 포함한 전 전선의 연합군은 같은 기간 동안 총 213개 사단으로 증강될 것이었습니다.
소련에 대한 전략 핵공격에는 미군 19개 비행단, 영국군 7개 비행단 등 총 26개 비행단, 폭격기 780대가 배정되었습니다. 최 우선 공격목표는 소련의 핵공격 수단으로 여기에는 핵폭탄 제조 시설, 폭격기 기지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것을 파괴하는데 100발의 원자탄이 배정됐습니다. 다음 목표는 석유 생산시설, 발전소, 철강을 포함한 금속 생산공장이었는데 이 목표를 공격하는데 최초의 30일간 180발의 원자탄을 배정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타격을 한 이후에도 복구를 저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핵폭격 및 통상 폭격을 실시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련 위성국의 공업 시설을 타격하는데 원자탄 73발이 배정됐습니다.

지상에서는 전쟁 1단계에 총 76개 사단(이중 미군은 2개 사단)을 동원해 라인강-알프스-피아브 선을 방어하고 2단계에서는 서유럽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미군을 55개 사단으로 증강할 것이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2단계에서 연합군에 항복한다면 그대로 동유럽과 소련으로 진격해 무장해제 및 점령에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이 2단계에서도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동유럽에 대한 대규모 지상전을 감행하는 대안이 준비되었습니다.
동유럽에 대한 공세는 다시 세가지 안으로 뉘었습니다. 첫 번째는 North안으로 이 안은 108개 보병, 38개 기갑, 5개 공수사단과 90개 항공단을 동원해 쾰른을 거쳐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것 이었습니다. 주력은 베를린을 해방한 뒤 계속 동진해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로 진입한 조공은 크라쿠프에서 주력과 합류할 것이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폴란드 남부에서 남동쪽으로 진격해 발칸반도를 소련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작전이 실시될 예정이었습니다.
두번째 안은 Pincer안으로 이 안은 117개 보병, 30개 기갑, 9개 공수사단과 110개 항공단을 동원해 독일과 발칸반도에서 동시에 공격을 실시하는 것 이었습니다. 먼저 터키 남부의 연합군이 공세로 전환해 그리스에 상륙한 뒤 교두보를 확대해 루마니아로 진출하고 이후 폴란드 남부로 공세를 확대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유럽의 연합군도 반격을 개시해 78개 사단이 베를린을 거쳐 폴란드로 진격, 대규모 포위망을 완성할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안은 South안으로 이 계획은 총 182개 사단과 124개 항공단을 동원하는 등 세가지 안 중 가장 규모가 큰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 주력은 터키에서 발칸반도로 진출, 베를린과 폴란드로 진격할 예정 것 이었습니다. 여기서 서유럽의 연합군은 소련군을 묶어두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었습니다.

결국 드롭샷 계획은 합참에서 승인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오프태클과 함께 미국의 서유럽 방어 계획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은 NATO의 강화와 함께 서유럽에 대한 적극적 방어를 일관되게 유지해 나갑니다.

2008년 11월 8일 토요일

Gunpowder - 1948년 3차대전이 발발했다면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이 새로운 가상적이 되자 미군 수뇌부는 매우 심각한 전략적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2차대전이 종결된 뒤 병력 감축이 급속히 이루어진 결과 재래식 전력으로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소련을 상대하기가 버겁게 된 것 이었습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핵무기에서의 열세를 재래식 전력으로 만회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재래식 전력의 강화에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1947년에 들어오면 재래식 전력에서 육군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략적 상황에서 미합동참모본부(JCS)는 1948년 5월 소련과의 전쟁을 상정한 반달(Halfmoon) 계획을 작성합니다. 반달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 발발시 아시아 전선에서는 지상군으로 방어가 어려운 중국과 한국의 미군 병력을 철수하고 그 대신 일본은 사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국민당 정부를 군사적으로 지원할 것이었습니다. 반달계획에 이어서 1949년 1월 28일에는 다시 트로잔(Trojan) 계획이 수립되는데 이 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 발발시 전쟁 첫 해는 재래식 전력을 축적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은 공군 주도의 핵폭격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은 소련이 1949년 8월 핵실험에 성공하기 전 까지는 전쟁 초기에는 핵 전력을 중심으로 소련을 상대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래전 측면에서는 주 전장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이고 아시아는 부차적 전장으로 전략적 방어를 수행할 계획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의 전략적 방어는 대규모 지상군이 필요한 중국과 한국은 포기하고 해군과 공군으로 방어가 용이한 일본을 방어하는 다소 소극적인 측면이 보입니다.

합참의 전략에 따라 아시아에서 전략방어를 수행할 극동군 사령부는 건파우더(Gunpowder) 라는 개념계획을 작성합니다. 이것은 정식 작전계획은 아니고 개념 연구로서 반달계획이 수립되고 4개월이 지난 1948년 9월 8일에 수립되었습니다. 극동군사령부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 개념계획 몇 가지를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초 RG 554의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문서를 보던 중 1948년 12월에 작성된 건파우더 계획의 수정안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읽어 보니 흥미로운 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합참의 거시적 전략의 틀 안에서 수립된 계획이다 보니 중국과 한국에서의 철수, 핵무기 사용 등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이 일부 있더군요.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들을 조금 발췌해 봅니다.

먼저 전쟁초기 미군과 그 동맹국의 능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b) 아군 :
(1) 미군은 한국에 대한 침공을 격퇴할 수 없을 것이다.
(2) 태평양함대는 Y일로부터 15일이 지난 뒤에야 제한적인 작전이 가능할 것 이다.
(3) 극동공군(FEAF)은 Y일로부터 3일에서 9일이 지나기 이전에는 대한해협에서 소규모의해상 활동을 보호하는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며 (이 기간 동안) 제공권을 장악하지는 못 할 것이다.
(4) 일본정부와 일본국민은 일본 본토 방위를 전력으로 지원할 것이다.
(5) 국민당정부는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겠으나 만주와 화북, 산동반도의 주요 철도노선과 항구를 적이 이용하는 것을 저지하지는 못 할 것이다.
(6) 블라디보스톡, 부산,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은 각각 한 발의 핵폭탄으로 핵 폭격을 실시하면 이후 90일간 주요 항구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b) Own Forces:
(1) That US forces will be unable to repel the invasion of Korea
(2) That Pacific Fleet units will be available for limited operations on or before Y plus 15 days.
(3) That FEAF will be unable to maintain air superiority over the Korea-Tsushima Straits area except for limited ability to protect ship movements from Y plus 3 through Y plus 9 days.
(4)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and people will wholeheartedly support the defense of Japan.
(5) That the National Government of China will declare war and will be unable to prevent hostile use of the principal rail lines and ports of Manchuria, North China and the Shantung Peninsula.
(6) That one atomic bomb at each port can effectively deny Vladivostok, Pusan, and Port Arthur-Dairen as major embarkation points for 90 days after detonation.

December 31, 1948, 「Memorandum for General Almond, Status of Gunpowder」, RG 554,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 of Staff, G-2, Intelligence, Subject File, 1945-52, Entry 2, Box 5

이 연구안 에서는 한국은 방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으며 국민당 정부의 능력에 대해서도 낮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연구 단계의 계획이지만 부산에 대한 핵폭격이 고려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때 3차대전이 났다면 부산에도 평화공원이 하나 생겼겠군요;;;;

작전에서는 일본 본토의 방어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관련 내용들만 발췌해 보겠습니다.

4. 작전
a. 생략(작전지역)
b. 작전은 일본 본토와 류쿠에 대한 전략적 방어를 기본으로 한다.
c. 총괄 기동계획에 따라 한국과 화북에의 병력 철수를 신속히 하고 극동군 병력을 규슈 북부와 혼슈에 집결시키고 홋카이도는 가능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방어하되 극동군사령부의 특정한 명령이 있을 경우 포기한다.
d. 간토(関東) 평야는 일본의 핵심적인 지역이기 때문에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수해야 한다.
e. 극동군 사령부의 지도하에 일본정부는 다음의 지역에 전반적인 방어시설을 건설할 것이다. : 가고시마(鹿児島), 고베(神戶)-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 도쿄-요코하마(橫濱), 센다이(仙台)
f. 중국에 주둔한 미군은 해로를 통한 철수를 고려하여 칭타오(靑島)를 가능한 장기간 방어해야 한다.
g. 중국에 파견된 군사고문단은 가능한 오랫동안 활동을 지속해야 한다.
h. 제5공군은 초기에는 방공 임무에 주력하며 서부 내해 지역(동해)에서 아군 측 선박 항행에 대한 적의 공습을 저지하고 24군단의 철수를 보호하며 홋카이도-쓰가루(津輕) 해협 지구에서도 동일한 임무를 수행한다.
i. 오키나와에 전개한 중(中)폭격비행단들은 가능할 경우 간토 평야 지대로 이동해 극동에서의 전략 폭격 임무에 참가한다.
j. 해군은 위에서 언급한 해상 철수 임무를 수행하며 극동 지역에서의 기뢰 부설, 극동 해역의 제해권 확보를 수행한다.

4. Operations
a. –
b. Operations are based upon a strategic defense of Japan and the Ryukyus.
c. The general scheme of maneuver visualizes a precipitate evacuation of Korea and North China, a concentration of CINCFE forces in north Kyushu and Hinshu, and the defense of Hokkaido to the maximum effort practicable, to be abandoned only upon specific order of CINCFE.
d. The Kanto plain in considered the vital area of Japan, to be defended at all costs.
e. All-round field defenses will be construct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under general CINCFE direction in the following areas : Kagoshima, Kobe-Osaka, Nagoya, Tokyo-Yokohama, and Sendai.
f. US forces in china will hold Tsingtao as long as practicable consistent with Water withdrawal.
g. The Military Advisory Group in China will continue their functions as long as practicable.
h. The 5th Air Force is initially employed in air defense, in preventing hostile air attacks on friendly ship movement in the western inland seas area, in protecting the withdrawal of XXIV Corps, and similar mission in the Hokkaido-Tsugaru Straits area.
i. Medium bomb groups are concentrated on Okinawa, are displaced to the Kanto Plain area as feasible, and will participate in the Far East Strategic Air Offensive.
j. Naval forces will conduct evacuation as indicated above, will participate in the Far East minig campaign, and secure control of seas in Far East waters.

「Memorandum for General Almond, Status of Gunpowder」, 위의 문서

위에 언급된 내용들은 한 줄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일본을 공격방어한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은 무조건 철수고 중국에서도 필요한 인원을 제외하면 철수. 그리고 일본은 결사 방어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소련에 대한 공격은 공군에 의해 주도되며 해군에 의한 해상봉쇄가 함께 수행될 계획입니다.

그리고 주한미군으로 있었던 24군단에는 다음과 같은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고려되고 있습니다.

(a) 24군단
(1) 지연전 수행.
(2) 인천과 부산의 항만 시설 파괴.
(3) 한국에서 민간인 철수.
(4) 한국에 잔류 시킬 정보조직의 구성.

(a) XXIV Corps
(1) Delaying Action
(2) Destruction of port facilities of Inchon and Pusan
(3) Evacuation of civilians from Korea.
(4) An intelligence establishment to remain in Korea.

「Memorandum for General Almond, Status of Gunpowder」, 위의 문서

역시 한 줄 요약이 가능합니다.


한국에서 발을 뺀다(;;;;)


네. 만약 이 개념계획이 정식 작전계획으로 승격되었다면 주한미군은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겁니다.(;;;;;) 물론 소련과의 재래식 전력 격차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군사적 선택이긴 합니다만. 당시 한국인들이 미군 내부에서 저런 이야기가 오간다는 걸 알았다면 매우 실망했을 것 입니다.

결국 위기상황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선택하게 되는데 1948년 무렵미국에게 있어 일본은 전자에 속했고 한국은 후자에 속했습니다. sonnet님이 예전에 태풍이 몰아치면 차라리 태풍의 눈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게 낫다는 이야길 하셨었는데 이 경우가 딱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2008년 5월 31일 토요일

미 해군의 굴욕

천하의 미 해군도 이런 굴욕을 겪은 때가 있었다지요.

미해군의 전반적인 상황은 1880년대가 될 때 까지도 나아지지 않았다.

1879년 칠레는 페루와 볼리비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고 해상에서 잇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은 페루에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페루의 패전이 확실해졌기 때문에 칠레 정부에 휴전을 요청하기 위해서 발파라이소(Valparaiso)에 해군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미 해군 태평양전대가 수 척의 구식 목조전함만을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칠레 해군은 영국에서 건조한 12인치 장갑과 후미장전식 포를 갖춘 두 척의 전함을 포함해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군함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칠레는 미국의 개입이 뜬금없고 주제 넘는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뒤에 한 (미국)하원의원에 따르면 “(사절단을 이끈) 제독에게 미국이 쓸데없이 참견한다면 미국 함대를 바닷속에 처 넣겠다”고 말했다 한다. 한 함장은 이 말에 크게 분노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칠레가 옆 동네와의 싱거운 싸움에서 승리한 것 가지고 미국의 강력한 힘에 맞설 수 있을것이라 기고만장해 하다니!”
물론 이 함장이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미국과 칠레가 전쟁에 돌입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보잘 것 없는 미국 함대는 끝장이 났을 것이고 그럴 경우 지상전의 결과는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이었다.

Stephen Howarth, 『To shining Sea : A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Navy 1775~1998』,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999, p.223

과연, 시정잡배의 가랑이 밑을 기었다는 한신의 고사를 떠오르게 하는 훈훈한 옛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2007년 11월 25일 일요일

키티호크의 홍콩 입항 거부가 달라이 라마 때문?

워싱턴포스트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있더군요.

China's Naval Rebuff Could Be Reply to Dalai Lama's Medal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웃기는 일 입니다. 중국에게 티벳 문제가 민감한 줄은 알겠는데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굴 필요까지야..

지름신 앞에 장사없다 - 레이건 행정부 시기 국방예산 증액에 따른 문제점

에. 오늘도 날림 번역으로 때우게 됐습니다.;;;;

요상하게도 대한민국의 우국충정에 넘치는 많은 분들께서는 신무기만 잔뜩 들여오면 군사력이 알아서 강해지고 나라가 강해진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은 승하하신 미리견 황제 레이건 폐하께서도 가지고 계시던 것인데 잘 아시다시피 미군은 레이건 폐하의 이런 관심에 힘입어 1980년대에 신무기를 잔뜩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게 좋기만 했을까요?

합참은 국방예산의 증액에 대해 복합적인 반응을 보였다. 와인버거는 군대가 요구하는 만큼의 예산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콜린 파월은 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이것은 마치 2월의 크리스마스와 같았고 네트를 치우고 테니스를 치는 것 같았다. 합참은 즉시 필요한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요구한 내역은 국방예산을 대략 9% 정도 증가시켰다."
역사상 처음으로 합참은 국회나 행정부의 반대를 받지 않고 예산을 늘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군은 베트남전 직후의 반군정서 때문에 교체하거나 개량할 수 없어서 노후화된 장비를 대규모로 교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군은 마구잡이로 '질러대기' 시작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첫 2년 동안 군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런 축복에도 불구하고 군의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예를 들어 존스 장군은 이런 대규모 증강이 일시적인 것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비록 적은 금액이라도 장기적이고 꾸준한 예산 증액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존스 장군은 와인버거에 의해 예산이 통제 불능으로 폭증하는 것에 반대해 '실질적인' 국방예산 증가를 주장했다.
신형 장비, 그리고 특히 값비싼 장비를 대규모로 사들인 레이건 행정부 초기의 군사력 증강은 사실 명확한 개념이 없는 상태로 진행되었으며 미국의 전체적인 군사력 구조나 전쟁 준비상태에 끼칠 영향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려도 없었다.

결국 존스 장군의 우려는 얼마가지 않아 현실로 구체화 되었다. 1983년 회계연도에 국방예산은 물가상승률 보다 25% 이상 증가했다. 그리고 불과 5년만에 국방부의 예산은 두배로 폭증했다. 그러나 예산의 대부분이 신무기를 구매하는데 소비되었기 때문에 군대는 갈수록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84년에는 "레이건 행정부가 6320억 달러를 군사력 증강에 쏟아부었지만 전투에 즉각 투입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육군 부대는 1980년의 25% 수준으로 감소했다." 이런 문제는 육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유럽전구 부사령관인 로슨(Richard L. Lawson) 장군은 1985년 의회에서 “대대급 야전기동과 비행훈련시간, 군함의 기동훈련은 불충분한 수준으로 감소했습니다. (중략) 일부 탄약, 특히 공대공미사일과 해군의 탄약, 특수 탄약의 재고량은 규정량 이하로 감소했으며 이 때문에 전쟁 수행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1985년에 이르자 국방부가 안게된 예산 문제가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게 되었다. 존스 장군과 합참의 여러 관계자들이 경고했던 것들이 현실화 된 것이었다. 합참과 군부의 요구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넌(Sam Nunn) 상원의원은 와인버거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우리는 국방부가 예산 문제를 현실적으로 대응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의회가 기존에 승인한 신무기 도입계획에 소요될 1500억에서 2000억 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충원하기에는 자금이 부족하며 신무기를 도입하기에는 예산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의회와 대립하는 와인버거의 행태는 국방력 강화에 대해 국회와 대중들이 공감대를 가지고 있던 레이건 행정부 초기에는 그럭 저럭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국회의원들은 타협을 거부하는 와인버거에 대해 역겨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레이건이나 와인버거가 아니라 의회가 나서서 국방부의 예산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1984년에 접어들면서 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의 재정은 군사력 유지와 이미발주되었지만 아직 지불은 되지 않는 신무기 도입을 동시에 추진할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공화당 소속의 상원의원들 마저도 우려를 나타낼 지경이었다. 공화당측은 '레이건 행정부의 첫 1년에 국방부가 얻어낸 연간 9%의 국방예산 증가율보다 훨씬 낮은 3~4% 수준의 예산 증액을 이끌어 내는 것도' 엄청난 행운이 따라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와인버거는 국방예산을 늘리는데 있어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가 7년간 장관직을 수행하고 퇴임했을 때 그는 '1982년 회계연도에 1807억 달러였던 국방예산을 1987년 회계연도에는 2740억 달러로'늘렸다. 와인버거는 아슬아슬한 시기에 퇴임을 한 덕분에 그가 마구잡이로 "질러댄" 결과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있었다.

예산 문제를 손보는 것은 1987년에 새로 국방부장관이 된 프랭크 칼루치(Frank Carlucci)의 임무가 되었다. 칼루치는 의회가 국방예산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낸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은 와인버거와 같은 대립적인 태도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와인버거와 달리 신무기의 생산과 도입 시기를 늦추면서 예산을 절감하려 했고 국방예산 증가율을 낮추려 했다. 실제로, 칼루치가 1988년 2월 상원에 출두했을 때 그는 국방예산 증가율을 2%로 낮췄다고 의원들에게 설명했다. 와인버거가 3320억 달러의 예산을 요구한데 반해 칼루치는 2990억 달러를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상원은 3000억 달러의 예산을 승인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군비증강 노력이 끝나갈 무렵, 국방부는 대통령이 약간 도움이 된 정도라고 생각했다. 합참은 MX 미사일, B-1 폭격기, 트라이던트 미사일, 그리고 새 항공모함을 도입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했다. 1985년 10월 1일, 베시(John W. Vessey Jr.) 장군을 대신해서 합참의장에 취임한 크로우(William Crowe Jr.) 제독은 레이건 행정부 초기에 무분별하게 집행된 예산으로 인한 문제를 고스란히 떠안았으며 비록 행정부 초기 예산의 일부가 적절하게 사용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군은 예산 사용에 있어 현명해야 했다고 비판했다.

"레이건 행정부 초기 후하게 책정된 국방예산은 국방부 내에서 활발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때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던’ 시기였다. 국방부가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예산이 떨어졌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과연 우리가 5년 뒤에는 이 정도의 예산을 받을 수 없을지언정 예산이 있을 때 일단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되더라도 써야 하는가? 그리고는 결정이 이뤄졌다. - 그래. 지르자! 예산이 들어오는 동안은 수중에 있는 모든 돈을 써 버리자! 그래서 국방부는 예산을 써 버렸고 예산이 모두 현명하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국방부는 5년이 지난 뒤 더 이상은 많은 예산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돈이 있을 때 쓰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그 당시의 판단에 대해 비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체계적인 군생활을 거친 군인들은 예산이 증액되던 초기에 이미 레이건 행정부가 군대를 심각한 문제에 처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한 해병대 장군은 다음과 같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해병항공대 사령관 핏맨(Charles H. Pitman) 중장은 '만약 누군가 내일’ 해병대가 앞으로 3~5년간 극복해야 할 것에 대해 묻는다면 '일단 나를 혼자 내버려 두면 내부개혁을 한 뒤 좀더 나은 계획을 제안하겠다'고 말했다. '만약 그러지 못하겠다면,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싸울 것이다. 만약 해병대가 현재의 3-5년 예산안에 따라 움직여야 할 경우 사업 입찰에 참여한 회사들은 그들의 직원들을 내 눈 앞에서 꺼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목표를 세우고 결정을 내린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군예산의 문제는 레이건이 집권했을 때 보다 레이건이 퇴임했을 때 더 악화되었다. 국방부의 한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1970년대와 같은 구제불능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미 시작된 것 이죠. 육군은 레이건이 집권했을 때 보다 더 축소되었고 해군은 군함들을 퇴역시켜야 했으며 공군은 비행단 규모를 감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빴던 것은 군대의 전투수행태세가 악화된 것 이었다. 사실상 이제는 국방예산이 현재 보유한 장비들을 운용하는 데도 벅찰 지경이 되었다. 국방예산에 관한한 레이건이 남긴 유산은 복합적인 성격을 가졌다.

Dale R. Herspring,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 : Civil-Military Relations fron FDR to George W. Bush,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p.275~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