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부터 1914년 사이의 기간은 유럽의 역사에서 유례없이 인구적, 경제적 팽창이 이뤄진 시기였다. 불과 44년만에 유럽의 인구는 2억9300만명에서 4억9000만명으로 70%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동안 산업, 무역, 그리고 교통수단은 눈부시게 발전해 유럽을 전체적으로 변화시켰다. 1870년에 유럽의 3대 공업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의 석탄 및 갈탄 생산량은 1억6000만톤이었는데 이것이 1913년에는 6억1200만톤으로 증가했다. 이와 비슷하게 1870년 세 국가의 선철 생산량은 750만톤이었는데 1913년에는 2900만톤으로 거의 300%의 증가를 이뤄냈다. 이런 산업생산의 증가는 두말할 필요 없이 직업, 주거환경, 그리고 문화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비록 산업혁명이 18세기 말에 일어났지만 석탄, 선철, 강철로 대표되는 산업화의 영향이 처음으로 나타난 전쟁은 1870년의 보불전쟁이었다.
공장의 굴뚝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유럽 각국의 군사력도 크게 증가했다. 사실 19세기 후반 유럽 각국의 군대규모의 증가는 같은 기간 인구 증가보다 더 큰 것이었다. 사회적 발전과 행정 효율의 증가, 그리고 국민개병제의 도입은 방대한 규모의 육군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를 뒷받침하는 사회-경제 체제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두번째로 거대한 육군을 가졌던 프랑스는 1870년 당시 전체 인구 3700만명 중 군사훈련을 받은 국민은 50만명으로 그 비율이 1대 74였다. 그러나 1914년에는 전체 인구가 불과 10%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훈련을 받은 국민은 400만에 달했다.
마찬가지로 독일제국 역시 1870년부터 1914년까지의 인구증가율이 프랑스 보다 높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1870년에 전체 인구 대비 군사훈련을 받은 국민의 비중이 44대 1에서 1914년에는 15대 1로 증가했다. 유럽 전체를 놓고 볼 때 1914년 전쟁 발발 직전 가용한 병력 자원은 거의 2000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비유럽 국가 중 가장 중요한 미국의 경우 육군 규모는 보잘 것 없었지만 전시 동원능력은 유럽의 어떤 국가보다 막강했다.
전쟁 수행이 보다 복잡해 지면서 군대에 필요한 보급도 마찬가지로 복잡해 졌으며 병사 일인당 필요한 보급량은 병력 증가 보다 더 급속히 늘어났다.
예를 들어 1870년 당시 독일 육군의 군단 사령부 수송대의 마차 대수는 30대 였으나 1914년에는 두 배로 늘어났다. 1870년 전쟁에서 북독일 연방이 보유한 대포는 1,585문 이었으나 1914년 독일 제국이 보유한 대포는 거의 8,000문에 달했다. 게다가 1914년 당시의 무기는 발사속도가 더 빨라졌으며 1890년대에 등장한 기관총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유압식 제퇴기와 포미장전 방식을 채택한 1914년의 대포는 1866년 당시의 대포에 비해 발사속도가 3-4배 늘어났으며 병사 세명이 조작하는 분당 발사속도 600발의 빅커스 기관총은 1866년 당시 1개 보병대대의 탄약 소모량의 절반을 소모했다. 육군 규모의 증가와 무기 성능의 개선으로 전쟁이 벌어질 당시 각 국 육군이 하루의 전투에 보급해야 하는 물자의 양은 대략 (1870년 전쟁의) 12배 이상 늘어났다.
이렇게 필요한 보급품의 양이 엄청나게 증가했기 때문에 1차대전이 일어날 당시 각 국의 정치인과 군인들이 단기전을 예상한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정치인들과 군인들은 만약 장기전으로 들어간다면 경제적으로 국가가 붕괴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Ivan Bloch같은 사람들은 장기전으로 간다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건 간에 유럽인들은 이런 변화가 미치는 영향을 직접 느낄 수 있게 됐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1870-71년 전쟁에서 프로이센군 포병의 탄약 소모량은 포 1문이 5개월 간 평균 199발 이었다. 1914년 당시 유럽 각국 중 가장 전쟁 준비가 잘된 독일은 포 1문 당 탄약 1,000발을 비축한 상태에서 전쟁에 들어갔으며 이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000발로 6개월을 버틴다는 예상과는 달리 불과 1개월 반 만에 비축량은 모두 바닥이 나 버렸다.
다른 나라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모든 교전국들이 1914년 말과 1915년 초 까지 이른바 “포탄 위기”를 겪었다. 일부 국가, 특히 러시아는 이때의 타격에서 회복되지 못했으며 다른 국가들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항상 포탄 부족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독일은 발터 라테나우(Walter Rathenau)가, 그리고 영국은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가 새로운 전쟁 상황에 직면해 행정 체계를 쇄신하고 산업 동원에 박차를 가했다.
1916년이 되자 주요 교전국들은 전쟁 초기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마침내 본격적인 총력전 체제로 들어갔다.
약간의 통계를 인용하면 영국의 경우 연간 대포 생산량이 91문에서 4,314문으로 증가했고 탱크 생산은 전무하던 것이 150대로, 항공기는 200대에서 6,100대로, 그리고 기관총은 300정에서 33,500정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다시 1918년에는 대포 8,039문, 전차 1,359대, 항공기 32,000대, 기관총 120,900정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일일 기준으로 전투 사단의 보급품 소요량은 1914년에 55톤에서 1916년에는 거의 세배로 증가했다. 근본적으로 병사들과 견인용 동물에게 필요한 보급량은 변화가 없었다. 즉 대부분의 보급 소요의 증가는 각종 장비의 증가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으며 장비에 필요한 보급은 사단 보급량의 60-75%를 차지했다. 가장 중요한 보급품은 탄약이었으며 차량의 증가로 휘발유 및 윤활유의 소모도 크게 증가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교체용 장비(특히 야전 정비가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와 예비부품 이었다. 여기에 막대한 양의 지뢰, 철조망, 콘크리트, 철판, 널판지 등 참호전에 필요한 물건들의 소요도 엄청났다. 보급품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고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모두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건이었다. 마침내 군대가 야전에서 주변의 거주지에서 보급을 조달할 수 있는 시대가 끝난 것 이었다.
이렇게 역사상 유례가 없던 거대한 보급 혁명으로 보급의 중요성이 병사들의 식료품과 말 먹이에서 기계 장비로 옮겨 가면서 모든 국가들이 총력전 체제로 전환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돼야 했다. 총력전 체제로 전환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보급 소요량이 크게 증가한 데 비해 보급품을 전방으로 추진하는 기술적인 발전은 1870년 이래 매우 더딘 수준이었다는 점에 있다.
19세기 후반 이래 철도의 효율이 증가하고 또 철도망이 더 조밀해 진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유럽의 철도 연장은 101,000km에서 322,000km로 늘어났다. 그러나 철도 수송 체계의 비융통성과 취약성은 1914-18년의 전쟁 기간 동안 여지없이 드러나 버렸다. 이전 전쟁에서도 마찬가지 였지만 철도는 보급품을 싣고 내리기 위해 여러 부대 시설이 필요했으며 철도역 같은 시설들은 적의 기습으로부터 보호 받기 위해 전선으로부터 수십 km 떨어져 있어야 했다. 1870년 전쟁과 마찬가지로 1914년에도 철도역과 전방을 이어주는 수단은 말이 끄는 마차였다. 이런 방식으로는 계속해서 증가하는 전방의 보급소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 결과 유럽 각국의 군대는 과거와 비교해서 보급 종단점에서 멀리 진격할 수 가 없게 됐다. 구스타프 아돌푸스나 말버러, 나폴레옹, 몰트케(특히 앞의 세 사람은) 같은 지휘관들은 적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가더라도 충분히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차대전이 발발하고 몇 주 뒤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의 철도 시설이 파괴되자 슐리펜 계획은 처음부터 차질을 빚게 됐다. 설사 독일군이 마른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더라도 보급 문제 때문에 더 이상의 진격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뒤에 기관총과 참호의 활용, 또 유선전화를 이용한 지휘 통제 체계의 문제점 때문에 결국에는 작전적 방어가 작전적 공세보다 더 위력을 발휘하게 됐다. 이런 방어 우위 경향으로 모든 교전국들은 한층 더 동원체제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보급의 특이한 문제, 즉 전방의 소요량과 이를 추진할 기술적 능력의 불균형이 총력전 체제를 가져오게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대규모의 보급 소요가 총력전을 불러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공격하는 쪽이건 방어하는 쪽이건 보급 소요는 엄청났고 특히 1916년 이후로는 급격히 증가했다. 영국군은 솜 공세당시 공격 준비사격을 위해 1,200,000발의 포탄을 준비했는데 이것은 무게로 따지면 거의 23,000톤에 달했는데 이것은 나폴레옹이 보로디노 전투에서 사용한 포탄 양의 100배를 넘는 것 이었다. 만약 첫 번째의 대공세가 돈좌될 경우 그 다음의 공격 준비사격은 더 강력해 졌다.
예를 들어 1917년 6월 Messiness 전투에서는 350만발의 포탄이 발사됐으며 50만 톤의 폭약이 사용됐다. 2개월 뒤의 이프르 전투에서는 4,300,000발의 포탄이 발사됐으며 무게로는 107,000톤에 달했다. 이 무렵 미국의 공장들은 월간 5,000~6,000톤의 무연화약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남북전쟁 전 기간 중 남부군이 사용한 흑색화약과 비슷한 규모였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물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교전국들은 산업을 총 동원했고 더 많은 것을 전쟁에 쏟아 넣었다. 영국의 경우 1914년 국가총생산의 15%였던 전쟁예산이 1918년에는 85%까지 치솟았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서부전선을 살펴보면 이런 20세기 초 보급의 특이한 문제점들은 모든 작전을 과거의 공성전과 비슷한 유형으로 만들어 버렸다.
각각의 공세를 위해서 막대한 양의 물자가 생산되어 후방에 대규모로 축적된 뒤 전방의 특정한 지점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공격 개시일이 되고 명령이 떨어지면 엄청난 포탄의 폭풍이 전선을 휩쓸었다. 항상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대규모 포격은 적의 방어선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고 특히 1918년 독일의 춘계 공세와 하계 공세 기간이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공세가 성공하면 다음 공격을 위해서 수많은 병력과 막대한 무기, 통신망, 보급품이 전방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이런 진격은 결국에는 철도 종단점에서 더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장지역은 후퇴하는 적에 의해 초토화 되고 또 수많은 포탄구멍으로 엉망이 돼 있었기 때문에 가장 기초적인 수송수단, 즉 말이 끄는 수레나 사람 말고는 사용할 수가 없었고 이런 식의 보급추진은 진격하는 전방 부대를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솜 전투 처럼 유선 전화에 의존하는 지휘 통신 체계가 붕괴될 경우 초기의 공격이 성공을 거두더라도 후속 부대가 제때 투입되지 못 해 진격이 중지되었다. 보급 문제가 작전과 전략적 문제를 압도하게 되자 양 측의 지휘관들은 결국에는 비슷한 방식을 더 크게 반복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2007년 3월 11일 일요일
1차 대전과 군수체계의 혁명 - Martin van Creveld
이 글은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한 Great War, Total War에 실린 Martin van Creveld의 “World War I and the Revolution in Logistics”에서 64-69쪽을 발췌한 것 입니다. 사실 이 글에서 말하는 내용은 같은 저자의 유명한 저서 “Supplying War”의 4장과 거의 동일한데 후자의 분량이 더 많아서 우리말로 옮기는데 시간이 걸리는 고로 양이 더 적은 이 글을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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