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잘 아시는 이야기 겠지만 1930년대 미국 육군항공대의 주류는 폭격기의 발전이 전투기를 앞지르고 있어서 미래전에서 폭격기가 전투기를 압도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에. 이런 견해를 뭐라고 부르는게 좋을지 몰라서 그냥 "폭격기 우월론"**이라고 부르겠습니다.
1차대전 직후만 하더라도 미육군 항공대는 폭격기에 전투기의 호위를 강조했습니다. 1922년에 소령으로 제1추격항공단(1st Pursuit Group) 단장이었던 스파츠(Carl Spaatz)는 폭격기 호위를 위해 중무장에 폭격기와 같은 항속거리를 가지는 전투기 개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역시 육군항공대 장교였던 셔먼(William Sherman)도 1926년에 출간한 저서에서 폭격기에 대한 호위기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미육군항공대가 직면한 문제는 폭격기의 항속거리는 길어지는데 호위 전투기는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925년에서 1926년에 걸쳐 증가연료탱크를 사용하는 방식이 시험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증가연료탱크를 장착할 경우 공기저항을 높여 전투기의 성능을 저하시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당장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전투기가 증가연료탱크를 장착한 상태에서 폭격기의 순항속도를 따라갈 수 있겠느냐는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1) 항속거리가 같더라도 폭격기와 속도를 맞춰 날 수 없다면 호위기는 무용 지물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육군항공대에 "전략폭격" 이론이 도입되기 시작하고 폭격기가 기술적으로 진보하자 점차 전투기의 역할에 대한 회의감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1930년대 초반에 들어오면서 미육군항공대에 전략폭격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31년에 발행된 육군항공대 전술학교(Air Corps Tactical School)의 교재는 "적 부대를 상대로 한 작전은 제외하고" 육군항공대의 임무 대부분을 전략적 목표에 맞춰야 하며 동시에 "정치적 목표" 즉 적국의 민간인에 대한 폭격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2)
게다가 폭격기의 급속한 발전은 이런 경향을 더 가속화 했습니다. 전투기가 폭격기에 대해 열세를 보이는 경향은 신형폭격기의 등장 이전 부터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1931년에 실시한 워게임에서 제1추격항공단은 가상적의 폭격기를 단 한대도 요격하지 못하는 패배를 당합니다.3) 그리고 기술적으로 발전한 신형 폭격기가 등장하면서 폭격기 우월론은 더 힘을 받게 됩니다. 1931년 육군항공대가 개량형 중폭격기(advanced type heavy bomber) 사업을 발주했을 때 응모한 마틴(Martin)사의 폭격기는 시속 330km/h를 돌파해 당시 육군항공대의 주력 폭격기였던 B-3A의 속도(160km/h)를 두 배나 능가했습니다. 폭탄탑재 능력도 거의 2톤에 육박해(4380파운드) 1톤 남짓에 불과한 B-3A를 압도하고 있었습니다.4) 그야말로 엄청난 기술적 진보였습니다. 마틴사의 폭격기는 B-10으로 정식채택되었습니다. B-10의 성능은 전투기가 폭격기를 효과적으로 요격할 수 없다는 견해를 더 강화했습니다. 1934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실시된 모의교전에는 B-10의 개량형인 B-12와 당시 육군항공대의 주력 전투기였던 P-26이 대결했는데 결과는 B-12의 승리였습니다. 이 모의교전 결과 육군항공대 내에서는 "최전선의 비행장에서 작전하는 추격기나 전투기는 우발적인 경우가 아니면 현대적인 폭격기를 요격할 기회가 별로 없을 것"이라는 평가까지 나왔습니다. 1930년대 후반에 등장한 P-35나 P-36도 B-17에 대해 열세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지요.5) 폭격기 옹호론자들은 빠른 속도에 중무장을 갖춘 폭격기는 전투기가 요격하기 어려운 상대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인 전략폭격 지지자이고 1930년대 초 육군항공대 전술학교의 폭격기 교관이었던 조지(Harold L. George) 중위는 1932-33년 사이에 한 강의에서 폭격기 한 대당 6정의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편대 대형으로 상호 엄호가 가능하기 때문에 폭격기는 "공격해 오는 적 전투기에게 까다로운 상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6)
사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미육군 항공대가 보유한 전투기들이 고속폭격기를 요격하기에는 성능이 부족했기 때문에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1년과 1934년의 훈련에 사용된 P-26은 기관총 2정이라는 빈약한 무장에 느린속도를 가진 기종이었기 때문에 중무장한 폭격기를 상대하기는 버거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상 적국이 개발하는 전투기도 미국의 전투기들 처럼 별 볼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플라잉 타이거즈의 두목이 되어 이름을 떨친 셴놀트는 초창기의 폭격기 우월론에 강한 회의감을 드러냈습니다. 셴놀트는 여러 차례의 훈련에서 전투기가 폭격기를 요격하는데 실패했지만 이것은 전투기를 집중운용해 화력을 극대화 하고 전투기간의 유기적인 협동전술로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7) 그리고 폭격기를 조기에 포착해서 요격하는 데 대해서는 전자기술의 발전을 이용한 조기경보체계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무전기나 유선전화를 가진 대공감시원을 활용하는 방안을 꼽았습니다.8)
구식화된 전투기로도 충분히 신형 폭격기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던 만큼 적이 신형전투기를 가지게 된다면 폭격기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을법 한데 이상하게도 1930년대의 폭격기 우월론자들은 이런 가능성을 과소평가했습니다. 그 이유가 참 궁금하지요. 당시 미육군 내부의 의사결정과정이 어떠했는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셴놀트가 옳았고 폭격기 만능론은 허상이라는 것이 드러났지만 분명히 1930년대 미육군항공대 내에서는 폭격기를 과대평가할 이유가 충분했을 테니 말입니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 사이 미육군 항공대 내의 관련 문건을 직접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거나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미육군항공대가 폭격기와 전투기 중 어느 한 쪽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대공황의 여파로 예산 부족에 시달린 미육군은 폭격기와 전투기 개발을 동시에 추진하기 보다는 폭격기 개발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자하는 방향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의 논리는 꽤 단순했습니다. 첫 번째로는 B-10이나 B-17과 같이 전투기의 호위가 필요없는 장거리 폭격기가 존재하고 있으니 전투기는 필요 없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런 장거리 폭격기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적이 미국 본토를 직접 타격하기 이전에 타격해서 제압할 수 있으므로 요격기의 필요성도 감소한다는 것 이었습니다;;;;9) 강력한 공격력을 가지게 되었으나 방어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논리이죠;;;;
1930년대의 미육군항공대가 모든 면에서 폭격기 중심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전투기 부대 지휘관으로 1920년대 초반에 전투기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스파츠가 1920년대 후반 이후로는 계속해서 폭격기 부대를 지휘하게 된 것 일겁니다.
**일단 "전투기 무용론"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폭격기 지지자들 중에서도 전투기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
1) Tami D. Biddle, Rhetoric and Reality in Air Warfare : The Evolution of British and American Ideas about Strategic Bombing, 1914~1945(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2), p.166
2) Conrad C. Crane, Bombs, Cities, and Civilians :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World War II(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3), p.21
3) Daniel Ford, Flying Tigers : Claire Chennault and the American Volunteer Group(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1991), p.15
4)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S.Army 1917-1945(Cornell University Press, 1998), p.154
5) Biddle, ibid., p.168
6) Johnson, ibid., p.155
7) Ford, ibid., p.16
8) Biddle, ibid., p.169
9)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28
2010년 6월 5일 토요일
2008년 6월 5일 목요일
2차대전 중 미-영 공군 지휘관들의 갈등 문제
서로 잘났다는 사람들을 모아 놓으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군요.
아이젠하워가 주최하는 작전회의에 몽고메리와 리-맬러리의 더블 콤보가 들어가면 볼만했을 듯 싶습니다.
비록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의 경우 육군, 해군에서 있었던 것 만큼 지휘관들간의 갈등이 심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군이나 해군보다 더 나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영국과 미국의 많은 고위 장교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과 전쟁 이후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고위 지휘관들 중에서 연합원정공군(AEAF, Allied Expeditionary Air Force) 사령관 리-맬러리(Trafford Leigh-Mallory) 대장(Air Chief Marshal)은 같은 영국인인 테더(Arthur Tedder)를 싫어했으며 또 자신의 하급자이며 제 2전술항공군(Second British Tactical Air Force) 사령관인 커닝햄(Arthur Coningham)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커닝햄 역시 자신의 상급자인 리-맬러리를 혐오했기 때문에 테더의 역할 중 하나는 커닝햄과 리-맬러리 사이를 중재하는 것 이었다.
1943년 12월 미 전략공군(U. S. Strategic Air Force) 사령관에 임명된 스파츠(Carl Spaatz) 중장역시 리-맬러리와 사이가 나빴으며 그는 전술공군 출신이 자신의 전략 공군부대를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이점은 당시 영국공군 폭격기사령부(Bomber Command) 사령관이었던 해리스(Arthur Harris) 대장도 마찬가지였는데 해리스는 폭격기부대를 마치 자신의 “영지”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인관계가 원활했던 제 8공군 사령관 둘리틀(James Doolittle) 중장도 제 8공군 예하의 전투기부대를 폭격기 호위 대신 전술작전에 투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극도로 반대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강인하고 굳은 의지를 가진 장군들이 의견 일치를 보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협력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또한 공군과 육군 지휘관들간의 관계도 원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치력이 뛰어난 아이젠하워 조차도 리-맬러리의 성질은 견뎌내질 못 했으며 두 사람이 만나면 아이젠하워는 감정을 자제하지 못 했다. 아이젠하워의 참모장이었던 비델 스미스(Walter Bedell Smith) 중장에 따르면 연합군 지휘관 중에서 몽고메리를 제외하면 아이젠하워의 인내심을 바닥낼 정도로 성격이 더러운 인물은 리-맬러리가 유일했다고 한다.
미국 제 1군사령관 브래들리(Omar Bradley) 장군은 제 9공군 사령관 브레러튼(Lewis Brereton) 소장이나 제 9전술항공군 사령관 퀘사다(Elwood Quesada) 소장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괴팍한 제 21집단군 사령관 몽고메리 원수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임무를 잘 수행했던 커닝햄이 (자신에게)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 실제로, 몽고메리는 프랑스에 상륙한 이후 자신의 사령부 건물을 커닝햄과 같은 곳이 두지 않으려 했다. 이 때문에 브룩(Alan Brook) 원수가 몽고메리를 설득하는 것을 돕기 위해 노르망디로 갈 것을 자청할 정도였다. 결국 몽고메리와 커닝햄이 서로 이웃한 건물에 사령부를 설치한 것은 1944년 9월이 되어서 였지만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혐오감을 해소하지 못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지휘관들간의 관계는 연합군 공군의 조직력이 평균 이상의 우수한 성과를 보인 원인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D-데이가 있기 수 개월 전에 영국측은 미군이 자신들의 전략 폭격기 부대를 영국군의 통제하에 넣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됐으며 영국군 내부에서도 해리스는 폭격기 사령부를 전술 공군적 사고방식을 가진 리-맬러리의 휘하에 넣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다. 결국 공식적인 명령계통에 반하는 이상한 절충이 이뤄졌다. 리-맬러리는 명목상 원정공군 사령관이었지만 전략 폭격기 부대와 예하 전투기 부대는 (실제로는 해리스와 스파츠가 지휘했지만) 형식상 공군참모총장(Chief of the Air Staff)인 포탈(Charles Portal) 대장의 지휘를 받았다. 1944년 4월 14일(비공식적으로는 이보다 빨랐다)에 오버로드 작전에 투입되는 모든 공군부대는 전구사령관인 아이젠하워의 지휘를 받게 됐다. 그러나 전략공군 부대의 운용은 아이젠하워의 공군 대리인 테더가 담당했으며 실질적인 작전 지휘는 스파츠와 해리스의 담당이었다.; 그리고 전술공군만이 사령관인 리-맬러리의 통제를 받았다. 이런 절충안은 지휘관들간의 분란을 막는데는 어느 정도 기여했지만 명령 계통이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물론 긍정적인 요소도 존재했다. 고위 지휘관들의 아래 단계에서, 즉 영국과 미국의 전술 지휘관들의 관계는 대개 좋았다. 83 Group 사령관인 브로더스트(Harry Broadhurst) 소장(Air Vice Marshall)은 미국측의 퀘사다와 사이가 좋았으며 퀘사다는 커닝햄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고위 지휘관들 – 테더, 커닝햄, 브레러튼, 스파츠, 해리스 – 은 항공 작전을 조율하기 위해 거의 매일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는 보통 오전 11시에 열렸으며 참석자들은 그 전날 있었던 상황에 대해 토의하고 다음날 작전의 지침을 만들었다. 참석자들은 오버로드 작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서로간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관들간의 관계와 항공 전역의 지휘 체계는 연합군이 성공한 원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Alan Wilt, "The Air Campaign", D-Day 1944,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4), pp.135~139
아이젠하워가 주최하는 작전회의에 몽고메리와 리-맬러리의 더블 콤보가 들어가면 볼만했을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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