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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15일 수요일

M60에 대한 슈트라우스의 평

계속 땜빵 포스팅입니다;;;;

지난 번에 sonnet님이 슈트라우스 독일 국방장관이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M47 전차를 살펴보는 의미심장한(?) 사진을 한 장 올리셨었죠. 슈트라우스의 표정을 보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는데 마침 아래에서 언급한 Trauschweizer의 책을 읽다 보니 슈트라우스 국방장관이 신형 M60 전차에 대해 평을 한 것이 실려 있어서 인용해 봅니다.

독일과 미국은 신형 주력 전차의 필요성에 대해 의견이 일치했다. M60이 제7군에 배치되자 슈트라우스는 이 전차의 결점에 대해 지적했다. 슈트라우스는 소련의 T-10은 M60의 시야에 들어오기 300야드 앞에서 M60을 먼저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측은 슈트라우스가 M60 보다 우수하다고 믿는 전차의 시제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독일의 신형 전차는 35톤(M60 보다 거의 10톤 가벼운)의 무게에 800마력 엔진, 200마일의 작전반경, 그리고 높이는 2.4미터(M60은 3.2미터)로 낮았으며 시속 45마일 이상의 고속에 높은 기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대전차화기의 발전으로 중장갑은 약점을 상쇄하는데 별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속도와 항속거리, 그리고 낮은 높이가 좋은 전차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미 육군 지휘관들은 M60이 소련 전차보다 열등하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M60의 105mm 전차포는 운동에너지탄을 사용해 T-54를 2,900미터에서 격파가 가능했지만 소련 전차가 M60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2,700미터 이내로 접근해야 했다.

Ingo Trauschweizer, The Cold War U.S. Army : Building Deterrence for Limited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p.165

슈트라우스가 지적한 M60의 단점은 M47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미국 전차의 특징이었습니다. 게다가 M47은 화력도 M60 보다 떨어지니 슈트라우스가 좋게 봤을 것 같지는 않군요.

정말 그 사진에 찍힌 슈트라우스는 착잡한 심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2009년 4월 25일 토요일

기술의 진보

예전에 읽었던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을 처음 구상하게 된 것은 대략 7~8년전(1986~87년) 이 책의 공동 저자 중 한 명과 매릴랜드 베데스다(Bethesda) 소재 육군 개념분석국(Concepts Analysis Agency) 국장이었던 밴다이버 3세(Edward B. Vandiver III)와 나눈 대화가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그때까지 육군에서 기획(planning) 및 예산편성(budgeting)을 위해 사용되던 컴퓨터 전투 모델 중에서 실증된(validated) 것이 없다는 점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모델은 실제 세계의 경험을 안정적으로 모사할 수 있어야 ‘실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증되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모델을 활용한 계획이나 예측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에드 밴다이버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모델에 입력할 현대 제병협동전투에 대한 역사적인 세부적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 입니다.”

그는 오늘날 사용할 모델이 묘사할 미래의 전쟁에는 대량의 전차가 투입될 것이기 때문에 (데이터를 확보할 대상으로는) 많은 수의 전차가 투입된 전투를 선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만약 중동에서 벌어진 1973년 10월 전쟁의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이스라엘, 이집트, 시리아의 데이터를 입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도 동의했다.

“그렇다면 벌지전투는 어때요?”

공동저자 중 한 명이 물었다. 밴다이버는 그것이 좋은 구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밴다이버는 그날의 대화에 대해 잊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의 사무실로 돌아가 제안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짧게 말하자면, 몇 달 뒤 이 제안서는 밴다이버에게 보내졌고 승인되었으며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우리 회사는 나중에 공식적으로 “아르덴느 전역 시뮬레이션 데이터 베이스(The Ardennes Campaign Simulation Date Base)” 약자로 ACSDB로 알려진 작업에 들어갔다. 2년 뒤 ACSDB는 공식적으로 밴다이버의 개념분석국에 납품되었다.

ACSDB는 약 39메가바이트의 데이터가 포함된 엄청난(massive) 컴퓨터 프로그램이었다.

여기에는 1944년 12월 16일에서 1945년 1월 16일의 32일에 걸친 기간 동안 약 100개의 부대에 대한 매일 매일의 세부적인 정보가 담겨 있었다. 포함된 부대는 1개의 독일군 집단군, 4개의 독일군 야전군, 8개의 독일군 군단, 35개의 독일군 사단, 3개의 독일군 여단과 그외의 소규모 부대, 2개의 연합군 집단군, 2개의 미국 야전군, 6개의 미군 군단, 42개의 미군 사단, 미군의 소규모 부대, 1개의 영국군 군단, 2개의 영국군 사단, 2개의 영국군 여단, 독일공군 부대, 영국공군부대, 미국 육군항공대 부대가 포함되었다.

Trevor N. Dupuy, David L. Bongard and Richard C. Anderson. Jr, Hitler’s last gamble : The battle of the bulge, December 1944-January 1945, Harper Perennial, 1994/1995, pp.xv-xvi

사실 웃길 것도 없는 내용인데 이상하게 웃기더군요;;;; 80년대 중반의 39메가바이트라면 확실히 엄청난 용량인데 이걸 21세기에 읽자니;;;;

전자제품과 관련된 기술의 발전은 정말 눈에 확 띄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기술의 발전 정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기술이라서 실제로 와 닫는 정도가 높은지도 모르겠습니다.

2009년 4월 9일 목요일

승리의 셔먼! 승리의 셔먼!

재미있는 이야기가 몇 가지 있어서 글로 쓰려는데 잘 안 써지는군 요;;;; 땜빵 포스팅 하나를 올립니다.

Steven Zaloga의 Armored Thunderbolt 부록에는 2차대전 중 서유럽 전역에서 미군이 상실한 셔먼 전차의 대수와 손실율이 실려있씁니다. 꽤 재미있어서 표를 만들어 올려봅니다.



역시 압권인 것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증가하는 전체 대수입니다. 손실 대수 대 손실율은 이 점을 잘 보여주는데 1944년 8월에는 셔먼 557대 손실에 손실율 21.8%인데 1945년 1월에는 이보다 더 많은 585대를 잃고도 손실율은 12.8%로 훨씬 낮습니다;;;;

아무리 쳐부숴도 꾸역꾸역 밀려드는 셔먼의 대군이 떠오릅니다;;;;

할 말은 그저 이것 뿐.


승리의 셔먼! 승리의 셔먼!



그리고 상대를 잘못 만난 총통께 다시한번 위로를.

2008년 10월 11일 토요일

김홍일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에 이어지는 속편 되겠습니다.

1949년에 출간된 『국방개론(國防槪論)』을 읽다 보니 책의 후반부에 통일 이후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김홍일 소장의 구상이 나와 있었습니다. 기갑사단과 차량화사단의 편성 등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해당 부분을 한번 발췌해 봅니다.

오래된 책이다 보니 맞춤법을 요즘 사용하는 언어에 가깝게 고쳤습니다.

먼저 우리나라는 육군국 일까, 해군국 일까, 아니라면 육해군병진국 일까.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나라는 해안선이 면적에 비하여 과장(過長)함으로 해군국이 될 소질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해외식민지를 가지지 못하였을 뿐더러 장래에도 가질 희망이 박약하다. 인국(隣國)인 소련, 중국이 모두 육군국 이요, 강대한 해군국 이던 일본도 패전으로 다시 해군재건이 불능케 되었다. 이것으로 보면 우리에게 가장 위협이 많은 것은 육군이매 우리는 육군을 주로, 해군은 보조로 국방군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육군은 공세적 작전을 취하야 적을 국내로 들이지 않고 전장을 국외로 정해야 하겠음으로 중급장비사단의 1만2천명을 1개 사단으로 하고 최소 상비군 15개 사단은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 만주와 시베리아의 대평원작전에 최소로써 3개 장갑사단과 3개 모터화사단이 필요하고 국경 산악지대작전에 2개 산악사단이 요구된다.
국력에 비하여 강대한 육군은 짧은 시일 안에 편성키 곤란함으로 통일 전에 남한에서 우선 강고한 기초를 세우고 통일 후에는 3, 4년 예산으로 수보(遂步)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얼마만한 물자와 경제가 필요한가, 그 개념으로 보통 1개 장갑사단의 장비를 열거해 본다.

차량
輕탱크 287량
中탱크 110량
정찰차 276량
運兵트럭 28량
이륜 모터싸이클 408량
삼륜 모터싸이클 201량
화물트럭 1000량

무기
0.30 重기관총 44정
0.30 경기관총 412정
0.50 기관포 113정
37mm 대전차포 36문
60mm 박격포 21문
75mm 평사포 8문
75mm 유탄포 24문
81mm 박격포 16문
105mm 유탄포 12문
※탱크 車上의 기관총과 화포는 計入치 않았다.

이 외에도 병원차, 수리차, 보급차 등 다수 차량이 있다.

金弘一, 『國防槪論』, 高麗書籍株式會社, 1949, 82~85쪽

이 글을 읽은 느낌은 지난번에 썼던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과도 비슷합니다. 김홍일 소장도 이청천과 비슷하게 한국의 주적은 ‘북괴’가 아니라 소련과 중국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래에 건설될 통일 한국군 15개 사단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6개 사단을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작전할 기계화 부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김홍일 소장이 이 글을 쓰던 1948년~1949년 초만 하더라도 남한에서는 북한 인민군은 별볼일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괴뢰들은 제껴 두고 이들의 상전인 중국과 소련을 상대할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것은 이청천의 구상과도 동일한 배경에서 나온 것 입니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점은 기갑사단의 장비 문제입니다. 먼저 과도하게 기계화장비에 대한 의존이 높고 보병의 비율은 기형적일 정도로 작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의 기동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나온 구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비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경전차와 중전차의 비율이 2:1라는 것 입니다.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에서 이청천은 ‘차량화연대’의 경전차와 중전차 비율을 5:1로 잡고 있었는데 이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전차의 비중이 극도로 높습니다. 그리고 정찰용 장갑차까지 경전차에 포함시킬 경우에는 이 비율이 5:1 정도가 되는데 왜 이렇게 남한의 군사지도자들은 경전차에 집착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보병의 비중이 기형적으로 작다 보니 보병 수송용 차량은 28대에 불과한 반면 기갑장비가 많다 보니 보급용 트럭은 무려 1,000대에 달합니다. 보급에 대한 개념은 가지고 있으니 그나마 낫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사단의 편제는 둘째치고 소련을 가상적으로 시베리아 작전까지 상정하고 있는데 고작 6개의 기갑사단과 차량화사단으로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구상하고 있다는 것이 좀 난감합니다. 아무래도 현대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나온 구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해방이후~대한민국 초기 한국의 군사지도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신생국가의 군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희망찬 구상이란 점에서는 좋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군의 최고 수뇌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유감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2008년 8월 21일 목요일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


지난 글에서는 이박사의 허풍 실력을 다뤘습니다. 이미 제 블로그에서는 이박사에 대한 괴이한 이야기들을 짤막하게 몇 번 다룬바 있습니다. 하나 같이 상식을 벗어난 희한한 이야기들이다 보니 반응도 제법 좋더군요.


그런데 40년대 후반의 조선은 매우 어수선한 곳 이었던지라 이박사가 아니더라도 창의적인 발상을 하는 인물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중경 임정의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지청천) 장군 되시겠습니다.

1947년 9월에 이청천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한국 정부 수립 이후의 국군 창설에 대해 자신의 구상을 담은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 서한은 조금 긴 편인데 주한미군 사령부 정보참모부의 주간보고서에 실린 덕에 오늘날 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청천은 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극동 지역에서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이 만든 대동청년단을 주축으로 30만명 규모의 한국군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차피 구상이니 병력 규모가 좀 많은 것은 봐 줄 만 합니다.

표1. 이청천이 주한미군정에 제안한 미래의 한국군 규모

보병연대
차량화연대
항공연대
부대 숫자
15
2
1
장교
10,200
1,200
1,560
부사관/사병
240,000
30,000
10,200
총계
250,200
31,200
11,760
[표 출처 : “Letter from General Lee ChawngChun to General Hodge”(1947. 9. 18), 『在朝鮮 미군 사령부 주간보고서 – 4(G-2 Weekly Summary, HQ. USAFIK)』, 일월서각, 1986, 87쪽]

그런데 중요한 것은 편지에 포함된 이 30만 규모 한국군에 필요한 장비 목록입니다. 이청천이 제시한 30만 규모 한국군에 필요한 군사장비의 수량은 대략 이랬다고 합니다.

표2. 이청천이 주한미군정에 제안한 미래의 한국군 장비 내역

보병연대
차량화연대
항공연대
소총
173,000
15,000
0
자동소총
58,000
1,000
0
권총
62,500
0
3,500
경기관총
1,700
950
0
중기관총
2,000
200
0
12.7mm 기관총
1,150
130
0
60mm 박격포
1,100
80
0
81mm 박격포
550
50
0
57mm 대전차포
400
130
0
75mm 대전차포
130
20
0
75mm 야포
0
40
0
105mm 야포
420
100
0
155mm 야포
210
30
0
경전차
1,600
220
0
중형전차
270
40
0
차량
30,000
6,000
6,000
정찰기/연락기
60
10
200
전투기
0
0
380
공격기
0
0
230
폭격기
0
0
140
[표 출처 : “Letter from General Lee ChawngChun to General Hodge”(1947. 9. 18), 『在朝鮮 미군 사령부 주간보고서 – 4(G-2 Weekly Summary, HQ. USAFIK)』, 일월서각, 1986, 87쪽
]

다른 것은 둘째치고 30만 규모의 군대에 전차는 2,000대가 필요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게다가 공군력의 규모도 장난이 아니지요. 그리고 군 편제도 매우 요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보병연대와 차량화연대, 그리고 항공연대의 편제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름만 연대고 실제로는 사단 급 편제입니다. 항공연대의 규모도 굉장히 커서 1개 연대에 저 많은 항공기를 몰아넣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번역상의 실수는 아닌 것 같고;;;;; 일단 저런 요청을 하면 미국이 순순히 저 막대한 양의 장비를 원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과연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거창한 편지를 보낸건지 궁금하더군요.

이청천이 무슨 생각에서 저런 거창한 제안을 한 것인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이청천은 정규적인 군사경력이 짧았기 때문에 국가정책 단위의 군사적 식견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저런 무리한 발상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강대국의 위협이라는 맥락을 고려한다면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 예전에 한번 언급했었던 상해 임시정부의 군사편제도 이것과 비슷한 어딘가 엉성한 면을 보여주고 있죠. 아무래도 독립운동한 양반들은 군사적 재능은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2007년 9월 24일 월요일

스페인 내전당시 공화파 기갑부대의 작전

소련은 스페인 내전에 약 3,000명의 지원병과 항공기 648~806대, 전차 331~362대, 장갑차 60~120대, 야포 1,044~1,186문, 기관총 15,113~20,486정, 소총 414,645~497,813정, 폭탄 110,000발, 수류탄 500,000발, 포탄 3,400,000발, 소화기 탄약 862,000,000발 등을 지원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전이 진행되던 기간 중 상당 부분은 프랑스와의 국경이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화파에 대한 지원에서 소련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기갑장비에 있어서는 소련의 지원이 더욱 절대적이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어중간한 국력의 국가들은 1920년대에 도입한 프랑스제 르노 FT-17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는데 이 점은 스페인도 마찬가지여서 독일의 1호전차, 이탈리아의 CV-33, 그리고 소련의 T-26이 대량으로 지원되기 전 까지는 양군 모두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소련항공기들이 전쟁 초반을 제외하면 독일측에 별다른 인상을 끼치지 못한 것과 달리 전차는 독일이 지원한 1호전차가 시원찮은 물건이었던 덕분에 전쟁 말기까지도 상당한 활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에 대한 군수물자 지원은 НКВД내의 X과(X는 스페인을 의미)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련의 지원은 1936년 가을과 1937년 초에 집중되었습니다. 1937년 하반기 부터는 공화파가 가진 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더 이상의 지원은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자본주의자 같은 반응을 보였다지요.

소련이 지원한 기갑장비와 인력이 스페인으로 처음 보내진 것은 1936년 9월로 여기에는 50대의 T-26과 전차병 51명, 장갑차 30대, 그리고 탄약 및 유류가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10월 12월에 카르타헤나에 도착, 곧 바로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이어서 10월 말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T-26 111대와 전차병 330명을 파견하자고 건의, 승인을 받습니다. 그리고 스페인 주재 소련무관 고레프(Владимир Горев)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은 전차병 양성을 위해 아르헤나(Archena)에 기갑학교를 창설합니다. 이 학교의 교장은 크리보세인(Семён кривошеин) 여단지휘관이 임명되었습니다. 원래 소련 전차병들은 훈련 임무에만 투입될 계획이었지만 마드리드가 압박 받는 상황 때문에 전차병을 양성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습니다. 결국 고레프는 소련 전차병들이 직접 전차를 운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요.(여기에 약간의 스페인 전차병이 합류합니다.)

T-26의 성능은 의심할 나위 없이 1호전차나 CV-33에 비해 월등했지만 보전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다는 점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전차병은 러시아인인데 보병은 스페인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 통할리가 없었겠지요. 소련이 스페인에 파견한 인력 중 통역병이 204명이나 됐지만 이들이 모든 부대와 전차 한대마다 일일이 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런 문제점은 월등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소련제 전차들이 큰 피해를 입는 원인이 되지요.
T-26이 처음 투입된 1936년 10월 27~29일의 세세냐(Sesena) 전투는 이런 문제점을 확실히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는 소련인 노박(А. Новак)이 지휘하는 BA-3 장갑차 6대와 T-26 7대로 편성된 기갑집단과 스페인인으로 구성된 1개 전차소대, 그리고 아르만(Паул Арман)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이 지휘하는 1개 중대 등 3개의 전차부대가 투입되었습니다. 전투 초기에 아르만은 전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공격에 긍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아르만이 지휘하는 15대의 T-26중 세대가 대전차지뢰로 기동불능이 되었고 또 한대의 전차는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세세냐 외곽의 한 마을로 진입해 화염병을 맞고 격파됐습니다.(이게 스페인 내전에서 최초로 화염병에 의해 전차가 격파된 사례라고 합니다.) 아르만의 중대는 마을을 돌파한 뒤 프랑코군의 야포 1개 포대를 유린했습니다. 이때 3대의 CV-33이 반격해 왔지만 1대가 T-26에 의해 격파되고 한대는 T-26에 들이 받혀 전복(!!!)돼 버립니다. 아르만은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격을 계속했지만 두 대가 더 화염병에 의해 격파되고 세대는 야포에 의해 파괴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는 마드리드가 압박받던 상황에서 공화파의 사기를 높이는 데는 성공적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불합격이었습니다. 특히 보전협동이 되지 않으니 전차들이 적 보병을 몰아내고 특정 지점을 점령하더라도 적이 반격을 해 올 경우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프랑코군은 1938년까지 30개 대전차포 중대(중대당 대전차포 6문)를 편성했는데 이것은 1937~1938년 전역에서 공화파의 전차부대를 저지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이와 함께 지상전에 전용된 88mm 대공포도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세세냐 전투 이후 공화파는 전차와 장갑차를 집결시켜 T-26 48대와 BA-3 장갑차 9대로 대대규모의 기갑전력(아랑훼즈Aranjuez 집단)을 만들기는 했지만 실제 운용은 중대 단위로 보병에 분산 배치되는 방식이 계속됐습니다. 당연히 기갑부대의 집중운용에 따른 파괴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랑훼즈 집단은 11월부터 12월에 걸쳐 마드리드를 둘러싼 공방전에 투입됐습니다. 공화파는 전쟁 이전에 편성된 제 1전차연대(FT-17 장비) 대부분을 예하에 두고 있었고 제 1전차연대는 아랑훼즈 집단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전술적 미숙함과 기계 자체의 신뢰성 미달로 전차의 손실은 매우 컸습니다. 1936년에 지원된 전차 중 52대가 1937년 2월까지 상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937년 9월에 이르면 전차 손실은 170대에 달했습니다.(이때 까지 지원된 전차는 T-26 256대) 흔히 생각하는 것 과는 달리 소련전차들의 기계적 신뢰성은 형편없었는데 T-26의 경우 150시간 마다 정비를 받아야 했으며 600시간 뒤에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습니다.(소련전차의 기계적 신뢰성은 T-34 초기 생산분 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질 연료에다 끊임없는 격전으로 전차부대를 후방으로 돌려 정비할 시간이 없었으니 손실은 지속적으로 높아만 갔습니다. 여기다가 보충도 간헐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전차의 집중운용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아르만의 전차중대는 800시간이 넘도록 정비를 받지 못해 살아남은 전차들도 상당수가 고장으로 운용 불능이 됐습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차병 제 2진을 파견합니다. 제 2진은 전차병 및 정비병 200명으로 벨로루시 군관구의 제 4 독립전차여단에서 차출한 병력이었고 지휘관은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 Павлов) 여단지휘관이었습니다. 소련정부는 기존에 파견된 병력을 파블로프의 부대에 합류시켜 기갑여단으로 개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갑여단의 편성은 난항을 겪었습니다. 먼저 전차의 손실을 막기 위해 경험이 부족한 스페인 전차병은 포탑에 배치하고 숙련도가 높은 소련 전차병이 조종수를 맡는 식으로 여단이 편성되었는데 러시아 전차병들이 모두 조종수는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전차의 손실률이 높아 여단은 편제(96대) 미달이었습니다.

새로 편성된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초부터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이 여단은 크리보세인이 지휘하는 1대대와 페트로프(М. П. Петров) 대대지휘관이 지휘하는 2대대로 편성되었는데 신규편성인 2대대의 전투력이 1대대 보다는 양호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전투에 투입될 당시 47대의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11일 마드리드 서쪽에서 제 12인터내셔널 여단과 제 14인터내셔널 여단이 개시한 반격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은 스페인 사람 보다는 말이 잘 통했는지 보전협동이 원활히 이뤄져 이 반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3일간 계속된 이 전투에서는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는데 바로 독일의 37mm 대전차포 Pak 36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격파된 전차 모두가 이 37mm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7mm 대전차포는 독일이 지원한 지상장비 중 가장 효과적인 물건이었습니다.
이어서 전개된 1월 말의 Jarama강 공세는 보전협동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전차포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잘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 투입된 제 1기갑여단의 전차 60대 중 거의 40%가 격파되었고 이 중 상당수는 대전차포에 의한 것 이었습니다.

1937년 3월의 과달라야라(Guadalajara) 전투는 겨울의 전투에 비하면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주로 상대한 이탈리아군은 T-26을 장비한 부대와 수차례 교전을 벌인 뒤 전투를 회피하게 됐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주요 장비가 CV-33이었으니 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3월 18일의 반격에서 이탈리아군은 T-26을 앞세운 공화파군에게 격파당해 패주합니다. 그러나 제 1기갑여단의 손실도 커서 3월 말에는 가동 가능한 T-26이 9대로 줄어듭니다.

그러나 1937년 3월부터 5월에 걸쳐 150대의 T-26이 보충되면서 제 1기갑여단은 129대의 T-26, 43대의 BA-3 장갑차와 30대의 예비전차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1937년 7월부터 시작된 마드리드 구원 공세에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규모 공세에서도 37mm대전차포의 집중운용은 공화파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공세 첫날인 7월 6일 전투에서는 1문의 대전차포가 12대의 T-26을 격파하기도 했다지요. 피해는 급증해서 7월 11일이 되자 여단의 가동 전차대수는 38대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공세에서 주공을 맡은 5군단과 18군단은 막심한 손실을 입은 끝에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결국 7월 18일부터 프랑코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마드리드 구원공세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프랑코군이 대전차포를 대량으로 운용하면서 보전협동은 더욱 어려워 졌습니다. 전차병들은 대전차포가 조준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최고 속도로 움직였는데 보병들은 이것을 도저히 따라잡을 능력이 없었던 것이죠.

1937년 여름에 소련은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차부대를 지원합니다. 바로 BT-5 전차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로 이 연대는 소련이 특별히 고리키 전차학교에서 교육시킨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과 붉은군대 제 5기계화군단 소속의 전차병으로 편성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스페인인 전차병들이 충원되어 이 부대는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인 전차병의 경우 조종훈련은 충분히 받은 편이지만 소대나 중대단위의 훈련은 전혀 받지 못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BT-5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는 1937년 8월부터 진행되고 있던 사라고사 공방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임무는 제 35보병사단의 공격을 지원, 사라고사를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터내셔널 전차연대가 공격 개시 하루 전날인 10월 12일 밤에야 집결지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작전 명령도 도착 직후에야 전달받았다는 점 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연대참모들은 작전지역에 대한 지형 정찰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개시해야 했습니다. BT-5가 고속전차라는 점 때문에 제 35보병사단장은 전차에 보병을 태워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전투 기동간에 전차에 올라탄 보병 중 상당수가 전차에서 굴러떨어져 다른 전차에 깔려 죽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지형도 전차에 불리하기 짝이 없는 관개시설이 된 경작지였습니다. 결국 첫 번째 공격에서는 탄약을 모두 소모할 정도로 교전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라고사에 대한 공격 이후 공화파의 기갑부대는 별다른 보충을 받지 못 한채 지속적으로 감소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1937년까지도 상당수를 차지하던 소련인 전차병들은 전사하거나 본국으로 귀환해 스페인인들이 전차부대의 중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1937년 10월에 공화국 전차부대를 총괄하는 페랄레스(Sanchez Perales) 대령은 그때까지 살아남은 전차부대를 2개 기갑사단으로 개편했습니다. 이 “기갑사단”은 지원부대가 부족해 거의 전차로만 편성된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1938년에 T-26 25대를 보낸 것을 끝으로 전차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에 새로 편성된 기갑사단은 주로 자동차를 개조한 장갑차를 장비하게 됐습니다. 공화파의 기갑전력은 1938년 5월에 전차 176대와 장갑차 285대였는데 이것이 같은 해 12월에는 전차 126대와 장갑차 291대가 됩니다. 장갑차만이 겨우 보충이 가능했던 것 입니다.

공화파군의 기갑사단이 처음으로 전투에 투입된 것은 1937년 12월 15일로 이때 투입된 기갑사단은 T-26을 장비한 2개 전차대대와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잔존병력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이 사단은 작전 개시 당시 104대의 전차를 보유했는데 대부분의 전차가 기계 수명을 훨씬 초과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63대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현지 부대에서 어떻게든 수리를 해서 쓰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1938년 2월 22일까지 전선에서 활동했는데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련은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전차병 351명을 지원했고 이중 53명이 전사했습니다. 소련은 이 전쟁에서 T-26과 BT-5의 성능이 현대적 대전차 병기를 견디기 어렵다고 보고 신형전차를 개발하는데 더 박차를 가했지만 대규모 전차부대의 운용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스페인 내전이 진행되는 기간 중에 대숙청이 함께 진행된 것도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소련의 전차지휘관들은 예상치 못한 실전 결과 때문에 위축되어 교훈을 도출하기 보다는 실패를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발전하던 대규모 기계화부대의 편성과 교리개발이 일시적으로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실전 경험을 반영해 기계화 부대를 개혁해야 할 기계화부대지도국(Авто-бронетанковое управление)이 숙청으로 풍비박산 난 것은 가장 큰 타격이었습니다.

참고자료

Michael Alpert, "The Clash of Spanish Armies: Contrasting Ways of War in Spain, 1936~1939'", War In History, Vol.6. No.3(1999)
Mary Habeck, Storm of Steel: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G. F. Krivosheev, Soviet Casuali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 Hill Books, 1993, 1997)
Stanley G. Payne, The Spanish Civil War, The Soviet Union, And Communism, (Yale University Press, 2004)
Steven J. Zaloga, "Soviet Tank Operation in the Spanish Civil War",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12. No.3(September 1999)

2007년 8월 14일 화요일

NATO의 군사력에 대한 소련의 추정

아래의 글은 소련이 분석한 NATO 회원국의 군사력 현황 중 일부로 1984년 12월 3일에서 4일에 걸쳐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방장관 회의에서 발표되었습니다.

[전략]

최근 수년간 NATO 회원국들은 이미 자국을 방어하기에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위협적인 수준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계속해서 서유럽에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증강하고 있으며 이것은 바르샤바 조약국들에 대한 전략 핵공격 위협을 높이고 있다. NATO 회원국들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대한) 군사력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1993년을 목표로 한 장기 군사력 강화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NATO의 군사비 지출은 1978년에서 1984년 사이에 17억달러에 달했다. NATO 조약국들의 군사비 지출은 크게 증가했으며 미국 국방비의 50% 수준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출은 80% 증가했으며 서독은 40%,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2.5배 증가했고 터키는 9배나 늘어났다.
이 기간 동안 NATO의 유럽지역 핵전력은 더욱 발전했다. 유럽전역의 병력도 크게 증강됐다. NATO군은 새롭고 현대화된 무기체계로 개편 중이며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고 있다. 조직구조와 지휘통제 체계, 그리고 군사기술 지원체계도 개선되고 있다. 동원 기반도 확충되고 있으며 참모조직과 군부대의 작전 훈련은 횟수도 늘어나고 더욱 심화되었다.

[중략]

1. (서부전역)의 NATO측 핵전력을 살펴보면 핵미사일 운용가능 한 차량이 25% 이상 증가했으며 약 3,600대에 달한다. 이것으로 총 4,200발의 핵탄두를 운용할 수 있다.
2. 새로 증강된 병력은 6개 사단(프랑스 3개 사단,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각 1개 사단)이며 여기에 따로 에스파냐군도 5개 사단이 증강됐다. 이들 국가의 사단별 전투력은 거의 1.5배 늘어났으며 신형 전차와 야포, 미사일, 대전차화기, 신형 지휘통제 체계의 도입으로 질, 양적으로 확충됐다.
[중략]
3. 전투기의 숫자는 1.8배 증가했으며 이중 거의 25%가 신형 전투기이다. 전투기 중 2/3 이상이 다목적 전투기이며 이중 절반은 핵병기 운용이 가능하다. 공군의 전투력은 60% 이상 증가했다.
4. 대서양 동부와 지중해 지역을 관할하는 미 해군의 전력은 신형 수상전투함과 잠수함, 현대화 개장을 받은 전함의 배치, 그리고 핵 및 재래식 대함미사일의 배치로 강화되었다. NATO 가맹국의 해군 중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신형 함대공 미사일과 항공모함의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
5. 유럽 전역의 전자전 부문, 특히 공군과 지상군은 신호 및 무선 정보 능력을 확충함과 동시에 바르샤바 조약군의 무전망을 모든 주파수에 걸쳐 교란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고 있다.
6. 유럽 전역의 방공 체계 중 호크(Hawk) 방공시스템은 개량에 들어갔다. 요격기 중 1/3이 신형으로 교체되었다. 방공 능력은 2~2.5배 이상 강화되었으며 동시에 1,000대의 항공기를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고 있다.
7. 앞에서 살펴본 내용을 기초로 할 때 서부 전역의 NATO군은 총 46개 사단, 51개 독립 부대, 핵탄두 3,600발, 전차 11,000대, 야포 및 박격포, 방사포 9,800문, 대전차 무기 11,500개, 공군의 고정익항공기 2,870대, 육군항공대의 헬리콥터 및 고정익항공기 3,000대, 일선 전투함 480척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중 대략 60%의 전력이 서유럽 전역에 집중되어 있다.
동원에 들어갈 경우 지상군의 전투력은 보병 사단들의 증강에 의해 두 배 이상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서독, 영국, 프랑스 지상군의 전력은 30% 이상 증강될 것이다. 서유럽 전역의 NATO군은 높은 수준의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다. 사실상 거의 모든 상비 사단이 전투 준비를 마치고 있으며 최대 48시간 이내에 전투 태세를 완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해군 또한 지상군과 비슷한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공군은 12시간 이내에 완벽히 전투 태세를 갖출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Simple Alert”에서 “Reinforced Alert”단계로 전환되는데 필요한 시간은 6일에서 4일로 단축되었다.
서유럽 전역에는 30일분의 물자가 비축되어 있으며 미군의 경우 60일분의 물자를 비축하고 있다. 그러나 NATO 공군은 탄약의 경우 90일치를 확보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8. 서부 전역의 NATO 군은 작전 및 전술 훈련을 강화, 심화 함으로서 매우 높은 수준의 대비 태세를 확보했다.

[중략]

서부 전역 NATO군의 전투력

서부 전역의 NATO군은 1990년까지 전투 대비 태세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질적인 향상을 이룩하려 하고 있다.
1990년까지 서부 전역에서 선제 핵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NATO의 전체적인 핵 전력은 40%(6,000발의 핵탄두) 이상 증가할 것으로 보이며 핵미사일 발사 차량을 14%(3,660대에서 4,150대) 이상 증강할 계획이 세워져 있다.
서부 전역의 전략적 상황은 매우 극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NATO의 핵 전력은 서부 전역은 물론 소련의 상당 지역에 걸쳐서 강력히 방어되는 지역을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것으로 예상된다.
서부 전역의 NATO 지상군의 전투력은 새롭고 고성능인 장비를 받아 증가하고 있다.
기갑 장비의 45%가 M 1 및 레오파르트 2, 챌린저, AMX 30B로 구성될 것이며 신형 보병 수송장갑차와 정찰용 항공기가 배치될 계획이다.
포병의 사거리는 30km에서 40km 대로 늘어날 것이며 사거리 연장탄과 유도 포탄, 다탄두식 포탄과 신형 미사일의 도입에 의해 발사 속도는 1.5~2배, 화력의 효율성은 3~5배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지상군 군단은 1980년대 말에 이르면 “Assault Breaker” 정찰-통제 체계를 도입해 최대 200km 거리에서 기갑 장비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미육군의 제 5군단과 제 7군단의 예하 사단들은 1986년형 사단으로 편제개편을 마쳤으며 우리측의 추정에 따르면 기계화보병사단의 전투력은 70%, 기갑사단의 전투력은 40% 이상 증강되었다.
1990년에 이르면 서부전역의 NATO 지상군 전투력은 1984년과 비교해 50% 이상 증강될 것이다.
1990년까지 서부전역의 NATO 공군의 45%가 F-16, F-15, A-10, 토네이도, 미라지 2000및 기타 신형 항공기로 구성될 것이며 이들 신형 항공기는 그 이전 세대의 항공기에 비해 전투력, 특히 무장 탑재 능력이 2~3배 이상 늘어났다. 공군의 전투력은 거의 두 배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다.

[후략]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500~502

러시아어로 된 문서를 영어로 번역한 것을 중역했는지라 문장이 좀 기묘합니다만 전체적인 논조는 NATO의 군사력 증강이 매우 위협적이라는 것 입니다. 특히 신형장비의 도입에 따른 기술력 격차를 우려하는 점이 주목할 만 합니다.

2007년 8월 13일 월요일

중국에서 지른 물건 중...

이번에 중국에서 지른 물건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왜 질렀느냐면 가격이 한국과 비교해 너무나 싸더군요. 처음에는 가격이 한국보다 훨씬 싸서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타미야의 3호전차 75mm 탑재형은 대충 14,000원 정도입니다. 국내에서는 20,000원이 넘지요.


KV중전차는 대충 13,500원 정도입니다. 이것도 국내에서는 19,000원을 넘습니다.

중국의 모형점을 처음 갔을 때는 수입 모형 가격이 한국 보다도 훨씬 싸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순간 지름 충동이 일었더군요. 하지만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을 중국에서 사가지고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마지막날 남은 돈으로 질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제가 좋아하는 하비보스의 물건들은 제가 가본 베이징의 모형점들에서는 취급하지 않더군요.

중국이 한국보다 일제 모형이 싼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환율문제인지 아니면 한국이 쓸데없이 바가지가 심한건지...

2007년 8월 8일 수요일

아뉘(Hannut) 전투에서 독일군이 입은 손실

제가 중국에 있는 동안 페리스코프 포럼에 deSaxe란 분이 질문 하나를 하셨습니다. 당연히 이분이 질문하신 페리스코프 포럼에 답글을 다는게 예의 인데 이상하게도 로그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분에게는 로그인이 되는 대로 답변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소개해 주신 위키피디아의 글이 상당히 흥미롭기 때문에 따로 여기에 글을 조금 적어둘까 합니다.

deSaxe란 분은 제가 예전에 썼던 아뉘 전투에 대한 글, "독일과 프랑스의 군단급 기갑전투 : 독일 16차량화군단과 프랑스 기병군단의 교전사례"가 위키의 내용과는 다르다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분이 인용한 위키피디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When Erich Hoepner's XVI Panzer Corps, consisting of 3rd and 4th Panzer Divisions was over the bridges launched in the direction of the Gembloux Gap, this seemed to confirm the expectations of the French Supreme Command that here would be the German Schwerpunkt. The two French Cavalry armoured divisions, the 2nd DLM and 3rd DLMs (Division Légère Mécanique, "Mechanised Light Division") were ordered forward to meet the German armour and cover the entrenchment of 1st Army. The resulting Battle of Hannut on 12 May-13 May was, with about 1,500 AFVs participating, the largest tank battle until that date. The French lost about a hundred tanks, the Germans lost over 160 but managed on the second day to breach the screen of French tanks, which on 14 May were successfully withdrawn after having gained enough time for the 1st Army to dig in.

이 글에서는 독일군이 160대의 전차를 잃었다(lost)고 적고 있습니다. lost란 단어는 풍기는 뉘앙스가 "완전손실"에 가깝지요.

그런데 독일군의 "손실"이 160대 라는 것은 제가 썼던 글에도 있습니다.

프랑스측은 독일군의 손실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 독일군의 전차 손실 중 완전 손실은 20대 가량에 불과했고 전체 피해는 5월 14일 기준으로 수리가능 한 피해와 고장을 합쳐 160대 정도였습니다.

즉 독일군의 손실이 160대 라는 것은 수리가능한 피해까지 합산한 것 입니다.

아뉘전투와 장블뢰전투가 사실상 끝난 5월 16일까지 독일군의 두 기갑사단의 전차 완전손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 3기갑사단 : 1호전차 10대, 2호전차 6대, 3호전차 2대, 4호전차 1대, 지휘전차 1대
제 4기갑사단 : 1호전차 15대, 2호전차 5대, 3호전차 4대, 4호전차 5대

두개의 전투를 치르고 난 뒤인 16일 까지 두 기갑사단을 합쳐서 49대의 전차를 잃은 것 입니다. 게다가 피해의 상당수가 5월 15일의 전투에서 발생한 것 이기때문에 12~13일의 아뉘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당연히 더 적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전투 피해를 집계할 때 언제나 혼동되는 것 이지만 완전손실과 수리가능한 손실을 혼동할 경우에는 뭔가 이상한 결론이 도출 될 수가 있습니다. 이점에서 위키에서 사용한 "lost over 160"은 약간 무리가 있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군요.

2007년 8월 7일 화요일

베이징 군사박물관

저는 관심사가 관심사이다 보니 어디를 여행하건 전쟁과 관련된 박물관, 기념관이 있으면 최대한 관람을 하는 편 입니다. 게다가 올해는 인민해방군 창군 80주년이니 군사박물관에 뭔가 더 재미있는게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 보다 사람이 많아 돌아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해방군 창군 80주년이라고 무료관람 행사를 하는 통에 가뜩이나 사람 많은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짜 박물관에 몰려든 것이었습니다. 돈을 내지 않는 것은 멋진 일 이었지만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에게 떠밀려 들어가는 것은 아주 고역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금속탐지기로 소지품 검사 같은 것은 일일이 다 하더군요. 그 덕분에 사람도 많은데 대기하는 줄은 더욱 길었습니다.


들어서니 위대하신 마오 주석께서 맞이하시는 군요.


사람이 매우 많아서 제대로 구경은 못 했지만 마음에 드는 전시물이 매우 많았습니다.


일본의 97식 전차도 이렇게 보니 그럭 저럭 봐 줄만 하더군요. 역시 배경화면의 힘이 큰 것 같습니다.


고대 중국의 전차는 아무리 봐도 뭔가 모자란 느낌입니다. 도데체 뭘까요?


이건 당나라 기병이랍니다.


중국군함 중에서는 가장 유명할 듯한 정원(定遠)의 모형입니다. 사진이 잘 안 나왔지만 모형은 꽤 괜찮게 만들었더군요.


신해혁명때 봉기군이 사용한 대포와 같은 모델이랍니다. 관람객들이 열심히 만지고 가동되는 부분은 움직여 대서 불쌍하더군요.


항일전쟁 전시관의 이 조형물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중국 드라마에 나오는 망나니칼(???) 휘두르는 홍군이 전혀 뻥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긴 1차대전 때는 철퇴도 만들어 썼으니 현대전에서 망나니칼(???) 휘두르지 말라는 법은 없겠네요.


이건 그 북새통에도 사람이 거의 없어 한가했던 해방군 장군 서화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별로 볼만하지는 않더군요. 여기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쉬었습니다. 사람이 득시글 대는 건물은 정말 고역이더군요.


야외에는 80주년 특별 전시인지 99식 전차 같은 현용 장비들이 대거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99식을 실제로 보니 사진 보다는 포탑이 조금 더 길어 보이더군요. 물론 그래도 포탑이 너무 작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을 처음 보니 뭔가 느낌(?)이 오는 것 같더군요. 참고로 같이 전시된 장비중에서 99식이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의외로 전차팬이 많은가 봅니다.


이건 해방군 창군 80주년 특별 전시실에 있던 물건인데 미육군 31보병연대의 연대기라고 합니다.

사람이 지독하게 많아서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점을 제외하면 만족스러웠습니다. 한가할 때 천천히 관람해 보면 좋겠더군요.

2007년 7월 4일 수요일

[번역글][재탕] 기술적 충격과 전쟁 초기의 상황 : 1941년 T-34 전차의 사례

이 글은 예전에 페리스코프 포럼에 올렸던 불법 날림번역물입니다. 하드를 정리하다가 발견한김에 다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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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6-4(1993년 12월)에 실린 러시아 군사 전문가 "스티븐 잘로가"가 쓴 Technological Surprise and the Initial Period of War : The Case of the T-34 Tank in 1941을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12년이나 된 오래된 글 이긴 한데 짧고 재미도 있습니다. 각주도 생략한 불법 번역이라서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기술적 충격과 전쟁 초기의 상황 : 1941년 T-34 전차의 사례 
현대 무기는 전쟁 초반의 기습적인 투입으로 전투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 존재를 비밀에 부치는 경우가 많다. 기술적으로 최신일수록 그 존재를 은폐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최근의 사례를 들자면 1991년 페르시아만 전쟁에서 미 공군의F-117 스텔스 전투기의 사용이 있다. 그렇지만 첨단무기를 기습적으로 투입한다고 해서 항상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과거의 사례를 들자면 T-34전차의 사례가 있다. T-34는 흔히 전차 기술에 있어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1941년 바바로사 작전 기간동안에는 별다른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 했다. 기술적 요소는 실전에서 중요한 다른 두가지 요소의 뒷 받침이 없이 성과를 발휘할 수 없다. 그것은 운용할 전술과 승무원의 훈련도이다. 
T-34의 개발은 1937년에 BT기병전차를 대체하기 위한 계획으로 시작되었다. 붉은군대 기갑국은 A-20의 혁신적인 디자인에 대해 높이 평가했지만 이것은 BT기병전차에 비해 방어력이 아주 약간 향상된 것에 불과했다. A-20의 주 무장과 엔진은 BT-7M과 동일한 것 이었다. A-20의 설계팀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부대로 부터 올라온 BT전차의 보고서를 검토한 뒤 붉은 군대 기갑국이 요구하는 사양 이상으로 장갑과 무장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편, 설계국에서 대안으로 내놓은 A-32는 기갑국에서 승인하지 않았지만 스딸린의 승인을 받아서 개발을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A-20과 A-32의 시제품은 1939년 여름에 모스끄바 근교의 꾸빈까 시험장에서 시험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A-32가 A-20을 누르고 선정되었다. 1939년 12월 19일에 A-32는 T-34라는 명칭을 부여 받고 붉은군대의 신형 기병 전차로 채택되었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은 오늘날 T-34의 혁신적인 장점으로 평가 되는 76mm 주포와 강력한 장갑은 당시 붉은 군대 기갑국에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붉은 군대는 세 종류의 신형 전차를 개발하고 있었다. T-50은 T-26보병전차를 대체할 것 이었고 T-34는BT계열의 기병전차를, KV 중전차는 T-28 중형전차와 T-35중전차를 대체할 예정이었다. 이중 T-50은 기술적 결함과 기타 지연 요인으로 1941년 8월에야 비로서 부대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결국 1941년 여름에 독일군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KV와T-34 두 종류의 전차가 되었다. 
비교적 최근까지는 독일군이 1941년에 전투에서 마주치기 전 까지는 T-34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사료에 따르면 비록 일선 부대는 몰랐다 하더라도 독일 국방군의 정보기관은 T-34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9년에서 1941년 사이에 독일과 소련간에 있었던 군사 기술 교류는 현재까지 그 실체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독일은 소련측에 기술 교류의 일환으로 3호 전차를 수 대 제공했는데 여기에 대해 소련은 무엇을 답례로 보냈는지 알 수 없다. 미국의 기자인 마가렛 버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가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부대에 배치된 T-34의 사진을 촬영했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본 필자는 아직 확인해 보지 못 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T-34를 설계한 기술자들이 독일에서 제공받은 전차를 우습게 봤다는 것인데 3호전차를 예쁜 장난감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T-34의 출현에 대한 정보는 독일측에서 특별히 경계할 만한 사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1940년 5월~6월간의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 기갑부대는 Char-1bis 와 S-35를 상대했다. 독일측은 프랑스 전역에서 우수한 기량으로 기술적 열세를 만회했으며 소련의 전차 기술에 대해서는 그저 그런 수준으로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소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자기 만족에 빠져 무사안일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비록 50mm Pak 38의 채용등 대전차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독일 국방군은 프랑스 전역당시 보병들이 프랑스군의 Char-1bis전차와 마주친 뒤 전차 공황에 빠졌던 경험을 무시했다. 독일 국방군은 전차의 주무장을 강화하거나 보병 중대의 대전차 화력을 증대 시키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의 강력한 전차와 교전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소전 개전당시 독일 육군이 보유한 전차들은 프랑스 전역에 투입된 것들에 비해 기술적 진보가 별로 없었다. 
사실 독일측이 소련의 전차 기술에 대해 보인 태도는 그다지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독일은 소련이 초기의 전차 개발 과정에서 서방측의 기술에 과도하게 의존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T-26은 영국의 경전차 기술을 바탕으로 개발됐으며 BT-7은 미국의 크리스티 전차의 개량형에 불과했다. 독일은 스페인 내전당시 소련 전차와 교전한 사례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소련전차들이 영국과 미국의 기술에 의존한 복제품 수준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명백히 독일의 콘도르 군단이 사용한 1호 전차 보다 우수했다. 1939년 폴란드 전역에서 소련 기계화 부대와 접촉한 경험은 소련의 수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만 더 키웠으며 핀란드 전역에서 소련군 기계화 부대가 보인 전과는 그런 시각을 더 굳게 만들었다. 

1941년 소련군의 전차 배치

전쟁 직전 붉은군대는 1861대의 KV와 T-34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막 공장에서 출고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때문에 508대의 KV와 967대의 T-34만이 전쟁 개시당시 서부 지역의 군관구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엄청난 전력이었다. 당시 독일 육군은 불과 1449대의 3호 전차와 517대의 4호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것이 그나마 T-34와 비교할 수 있을 만한 것 이었다. 
최근(1993년)까지 실제 소련군이 어떻게 전차를 배치하고 있었는지는 세부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비교적 근래의 연구에서도 T-34는 독일의 공격이 있을 경우 반격을 위해서 후방의 예비 부대 위주로 배치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많은 러시아 사료의 공개로 전쟁 발발 당시 소련군이 어떻게 전차를 배치하고 있었는지, 특히 T-34와 KV의 배치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태까지는 신형전차들이 29개의 기계화군단에 골고루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신형전차들은 전방에 배치된 군단에 중점적으로 배치 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신형전차를 일정 수량 이상 보유한 군단은 5개 군단에 불과했다. 끼예프 특별 군관구 예하 제 4 기계화 군단과 서부 특별 군관구 예하 제 6 기계화 군단이 신형 전차의 거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 3, 8, 15 기계화 군단이 각각 100대 이상의 신형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부대는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대량의 신형 전차를 보유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장 잘 장비된 부대는 제 4 기계화 군단 예하 32 전차 사단으로 리보프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 32 전차 사단은 1941년 4월에 30 경전차 여단을 개편하여 편성되었으며 사단장은 42세의 예핌 뿌쉬낀 대령, 사단 정치위원은 체삐가였다. 뿌쉬낀 대령은 적백 내전에도 참전한 고참군인으로 1932년부터 기갑병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30 경전차 여단은 사단급 부대에 못 미치는 규모여서 32 전차사단으로 개편될 당시 고급 지휘관(영관급)은 편제의 50%, 초급지휘관(위관급)은 편제의 43%를 채우고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사병의 대다수가 1941년 봄에 징집되어 4월과 5월에 걸쳐 사단에 배속된 신병들 이었다. 사단의 최초의 임무는 이들 신병에게 전차를 어떻게 조종하는지 가르치는 것 이었고 이런 기초적인 훈련조차 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마치지 못 한 상황이었다. 사단이 최초로 T-34를 지급 받은 것은 4월 25일이었고 마지막 차량이 5월 25일에 수령 되었다. 사단은 총 173대의 T-34와 49대의 KV를 보유해서 전쟁 발발 당시 사단급 부대로는 가장 잘 장비된 부대였다. 편제상 1941년의 소련 전차 사단은 210대의 T-34 와 63대의 KV를 장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사단은 다른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차용 무전기는 편제수량의 30%에 불과했으며 사단 공병과 교량 부설 장비는 28%, 사단의 차량은 22%, 전차 수리용 장비는 13%, 전차의 예비 부품은 2%에 불과했다. 사단의 전차병들 중 많은 숫자가 5시간 미만의 조종 시간을 가지고 있었으며 포수들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 까지 실탄 사격을 해 보지도 못 했다. 전차병들은 신형 전차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 했으며 사단의 정비병들도 어떻게 신형 전차를 정비해야 할지 제대로 알지 못 했다. 
32 전차사단만 이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라 다른 부대들도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1940년에 불과 115대의 T-34를 생산해서 부대로 보냈으며 1941년 1월 까지 T-34를 일정 수량 이상 보유한 부대는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붉은 군대에서 가장 잘 준비가 된 부대도 겨우 6개월 정도의 훈련 기간을 가졌다는 것 이다. 1941년 5월 1일까지 생산된 T-34는 655대에 불과했으며 아무리 높게 추정치를 잡더라도 부대에 배치되어 훈련과정에 들어간 것은 500대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즉 전쟁 발발 당시 T-34 승무원의 절반 가량은 기껏해야 한 달에서 두 달 정도의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점은 KV 전차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T-34와 KV 전차포에서 사용할 대전차 철갑탄의 생산이 크게 지연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전차용 탄약은 규정량의 12%정도만 겨우 채우고 있는 상황이었고 게다가 이중 대다수가 고폭탄이어서 대전차 능력이 거의 없었다. 예비 부품은 크게 부족했다. 신형 전차들은 특히 클러치와 기어박스등 동력 계통에서 심각한 기계적 결함이 있었는데 이것은 경험이 부족한 전차병들과 맞물려 도로 행군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KV전차를 위해 새로 생산된 신형 보로쉴로베츠 전차 회수차는 배치량이 크게 부족했다. 만약 전차가 도로 행군 중 고장이 나 버리면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 소련군대의 내부적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1941년의 대 재앙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것 이었다. 부대단위 훈련은커녕 전차병의 기초 훈련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으니 소련 군대의 기갑전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소련 기계화 군단의 실전 사례

북부전선에서 꾸르낀 장군이 지휘하는 제 3 기계화군단은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두 109대의 T-34와 KV를 보유하고 있었다. 군단 예하 제 5 전차 사단은 6월 22일에 니멘강의 일리투스 다리를 건너려는 독일 제 7 기갑사단을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T-34는 확실히 체코에서 개발한 38(t)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독일 공군의 지원으로 제 5 전차 사단은 격퇴되었다. 사단의 T-34 일부는 니멘강 동안에 참호를 파고 들어앉아 토치카로 이용되었다. 1941년 6월에 상실된 38(t)는 총 33대였으니 독일측은 매우 적은 손실을 입은 셈 이었다. 다음날 라쎄냐이에서 개시하기로한 소련측의 반격은 독일군의 신속한 진격으로 시도되지도 못 했다. 6월 24일에 제 2 전차사단 의 잔존 병력은 제 6 기갑사단의 100 차량화 소총연대를 공격해서 독일측의 진격에 약간의 차질을 입혔다. 그러나 연료와 탄약이 부족해서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 했다. 그뒤 이틀간 전차전이 계속됐지만 제 3 기계화군단 소속의 T-34는 소수만이 남게 되었다. 
한편, 벨로루시아에 배치된 소련군 기계화 부대중 가장 강력한 부대인 하츠낄례비치 장군의 제 6 기계화 군단은 총 238대의 T-34와 114대의 KV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군단은 6월 24일까지 전선에 투입되지 못 했다. 24일에 투입된 제 6 군단은 그로드노 서부에서 기갑집단을 후속하던 제 20 군단의 보병 사단들과 격돌했다. 독일측은 순식간에 탄약을 소모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6월 25일에 급강하 폭격기의 지원을 받아서 소련군의 반격을 격퇴했으며 하츠낄례비치 자신도 전사했다. 헤르만 호트의 제 3 기갑집단은 6월 26일에 벨로루시아의 수도인 민스끄에 도착했으며 그동안 소련 제 6 기계화 군단의 저항은 미미했다. 제 6 기계화군단은 제 10군 예하의 부대들과 함께 그로드노 남서쪽에 포위되어 섬멸되었고 군단소속의 전차 중 소수만이 포위망이 좁혀지기 전에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서부 전선군에서 가장 강력한 기갑 전력이었으며 전선에 배치된 T-34의 4분의 1을 보유하고 있던 제 6 기계화 군단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 한채 전멸 당했다. 
T-34가 가장 집중적으로 배치된 부대는 우끄라이나에 배치된 3개 기계화 군단이었다. 리보프에 배치된 블라소프 장군의 4 기계화 군단, 두브노에 배치된 랴비체프 장군의 8 기계화 군단, 지토미르 근교에 배치된 까르뻬조 장군의 15 기계화 군단이 바로 그 것이었다. 이중에서 블라소프가 지휘하는 제 4 기계화 군단이 가장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군단은 총 414대의 T-34와 KV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군단 예하 제 8 전차 사단은 가장 잘 훈련된 부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속히 전진하는 독일군은 블라소프의 군단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전진을 계속했다. 까르페조의 제 15 기계화군단은 135대의 T-34와 KV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전차가 기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에 투입되었고 군단이 보유한 많은 전차를 도하점과 습지대에서 사고로 상실했다. 
독일군은 6월 22일에 우끄라이나 전선에서 최초로 T-34와 격돌했다. 독일 제 11 기갑사단 예하 제 11 기갑연대는 이날 리보프 전차 훈련 연대 소속의 T-34 30대의 공격을 받았다. 이 교전에서 세대의 4호 전차와 두대의 3호 전차가 격파 당했다. 이보다 좀 더 큰 규모의 교전은 라제쿠프 근교에서 6월 23일에 벌어졌다. 3호 전차를 장비한 11 기갑사단의 2개 기갑 대대는 제 10 전차 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독일측은 46대의 BT-7 전차를 격파했지만 소련 32 전차사단 소속의 T-34들의 공격을 받아 많은 전차를 잃었다. 6월 26일에 소련군은 끼예프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서 기갑부대를 대규모로 집결시켜 반격을 시도했다. 1941년에 벌어진 최대규모의 기갑전에서 랴비셰프의 제 8 기계화 군단과 까르페조의 15 기계화 군단의 잔존 전력, 블라소프의 제 4기계화 군단의 일부 전력, 그리고 꼰드루셰프의 22 기계화군단은 브로디와 두브노일대에서 독일 11 기갑사단과 16 기갑사단의 측면을 공격했다. 한편 전력이 약한 로꼬소프스끼의 제 9 기계화 군단과 페끌렌꼬의 19 기계화군단, 치스챠꼬프의 24 기계화 군단은 대부분 주무장으로 “새총”을 달고 있는 구식 T-26과 BT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독일 기갑부대의 측방을 엄호하는 독일 보병사단들을 상대했다. 이 전투에 참가한 독일군 부대의 사단사는 이날의 전투가 매우 치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력한 소련군의 전차는 독일군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T-34와KV는 특히 37mm 대전차포로 무장한 독일 보병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독일군의 37mm 포는 표준 교전 거리에서 소련군의 신형 전차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 했으며 신통치 못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 전차 부대의 공격에 대해 독일군은 사단 포병의 대구경 유탄포와 88mm 고사포로 대응했다. 독일 기갑부대역시 보병부대와 유사한 곤란을 겪었다. 이때문에 독일 전차병들은 최대한 근접하여 공격했다. 3호전차의 주포는 T-34를 측면에서 300~400m정도 거리에서 격파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련군은 우수한 전차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반격에 실패했다. 독일측은 16 기갑사단만 단독으로 293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했다. 전투가 끝난뒤 소련군 기계화 군단은 전투 시작당시의 20% 정도의 전력만 남아 있었다. 우끄라이나의 붉은 군대 기갑국 감독관인 모르구노프 소장은 이 브로디 전투가 끝난지 얼마 뒤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전차 회수차량과 예비부품의 부족에 T-34와 KV의 기계적 결함, 승무원의 훈련 부족이 결합합해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적의 대전차 방어선에 대한 정찰은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각 부대는 행군중에도, 전투중에도 끊임 없이 적 공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선을 향해 800~900km 씩 이동하면서 우리 공군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포병과의 합동 작전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 했습니다. 게다가 작전 지역이 숲과 습지로 전차의 기동에 불리했습니다. 적의 공격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T-34와 KV전차는 대전차 철갑탄이 부족했습니다. 이때문에 기계화군단의 손실이 매우 높았으며 막대한 장비 손실을 입게 됐습니다.” 
1941년 당시의 기술 수준은 오늘날과 비교해서 낮은 수준이었다. 소련의 신형 전차들의 부품 수명은 매우 낮았다. 소련의 전차 엔진은 평균 100시간 정도 사용하면 교체해야 했다. T-34전차는 800km정도 도로주행을 하면 기계적 한계에 도달했다. 1941년 당시 대부분의 기계화군단은 이 이상의 거리를 주행해야 했다. 이런 기계적 결함은 정비 인력의 부족으로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신형 전차를 제대로 다루는 인원은 대대장 정도에 불과했다. 소련측 기록에 따르면 1941년 6월의 전투에서는 경험 많은 장교가 많이 전사했다. 소련 전차 승무원들은 전차가 고장나면 그냥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문에 장교들이 전차를 회수하기 위해 전투 지역으로 들어가야 했으며 많은 수가 전사했다.
다시 제 32 전차 사단의 사례를 보면 그들이 전투 중에 겪은 문제는 새로 편성된 부대들이 흔히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 사단은 두브노-브로디 전투 이전에는 이렇다 할 전투를 거의 겪지 않았지만 매우 빨리 진격하는 독일군 기갑 사단을 요격하기 위해서 강행군을 해야 했다. 전쟁 첫번째 달에 32 전차 사단은 49대의 KV전차중 32대를 잃었고 173대의 T-34 전차중 146대를 잃었으며 전차병중 103명이 전사하고 259명이 부상당했다. 전차 손실중 거의 절반이 기계적 결함이나 부품 부족, 전차 회수 차량의 부족으로 인한 것 이었으며 손실된 전차중 10% 미만이 회수되어 수리를 위해 보내졌다. 전체 손실중 불과 30% 만이 전투로 인한 손실이었으며 10%는 수렁에 처박혀서 상실되었다. 사단은 총 113대의 독일 전차와 96문의 대전차포를 격파했다고 보고했지만 독일군의 전투 보고와 대조해 볼때 이건 터무니 없는 과장이다. 이 사단의 전력과 이 사단이 거둔 성과를 비교해 보면 당황스럽다. 이사단은 매우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전에서 거둔 성과는 형편 없었다. 소련 기갑부대의 전반적인 문제점은 바바로사 작전 기간중 T-34를 날이 무딘 칼로 만들어 버렸다. 

미숙한 기술

1941년에 T-34가 보인 많은 문제점은 확실히 이 시기 소련군의 전차 사단과 기계화 군단 전체어 만연해 있던 문제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T-34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비해 문제가 많았다. 독일측이 Char B-1과 T-34, KV에 대해 우세했던 이유는 독일 전차의 포탑 배치였다. 3호나 4호 전차 같은 독일 전차는 3인용 포탑이었다. 각 전차는 전차장과 포수, 장전수가 타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Char B-1은 1인용 포탑이어서 전차장이 1인 3역을 해야 했다. 소련군의 전차는 둘다 2인용 포탑이어서 전차장이 포수를 겸해야 했다. T-34의 2인용 포탑은 실전에서, 특히 전차끼리의 격돌에서 많은 문제점을 일으켰다. 프랑스나 소련은 소형 포탑이 무게를 줄이면서도 방어력을 높일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포탑이 크다면 방어해야할 면적이 많이지기는 한다. 이런 소형 포탑은 순전히 기술자들의 관점에서 만들어 진 것이었으며 일선 부대의 현실을 무시한 것 이었다. 그렇지만 2차 대전 이전에는 사실상 대규모 전차전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소련 전차의 전차장들은 포탑내의 전투 배치와 형편없는 시야, 포수의 역할을 겸해야 하는 것때문에 상황 판단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실전에서 전차장들은 사격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했으며 이때문에 전차장이 해야할 목표 탐색, 다른 전차와의 합동등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이것이 소대, 나가서 중대급 작전이 된다면 해당 지휘관 전차의 전차장에게는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 졌다. T-34의 광학 장비는 독일군의 그것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 졌다. T-34의 전차장은 독일 전차에 있는 우수한 큐폴라가 없어서 차내에서 좋은 시야를 확보할 수 가 없었다. 그리고 독일 전차와 달리 포탑 해치가 너무 커서 관측을 위해 차체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것도 위험했다. T-34의 해치는 앞으로 열게 되어 있어서 전차장은 몸 전체를 차 밖으로 내밀고 포탑에 걸쳐 앉아야 했다. 
그리고 1941년 여름에는 소수의 소련 전차만이 무전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모든 중형 전차가 무전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1941년 여름에 소련군은 중대장 전차 까지만 무전기를 지급했는데 그 이유는 소련은 신뢰성 높은 무전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소련군 전차 중대장은 전투가 벌어질 경우 사실상 그의 중대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규정상으론느 깃발을 이용해서 신호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건 거의 공상적인 생각이었다. T-34는 시야가 불량한데다가 전차장들은 포를 사격하는데 정신을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중대장이 깃발을 흔드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포탑이 2인용이었기 때문에 무전기는 차체에 탑재해야 했으며 전차장이 무전기를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독일 전차병들은 실전에서 소련 전차와 교전해 본 뒤 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독일 전차병들이 보기에 소련 전차 부대는 무질서하게 흩어져서 전투를 하거나 엄마닭과 병아리 처럼 옹기 종기 몰려 다녔다. 소련 전차 소대는 소대장의 지휘하에 단일 목표를 집중 공격할 수가 없었다. 그결과 소련 전차 소대는 화력의 집중을 달성할 수 없었다. 독일 전차병들은 T-34가 전투시 반응이 매우 느리다는 것을 종종 지적했다. 1941년 여름의 전차전에서 독일 전차병들은 T-34가 한발 발사할때 세발 이상을 쏠 수 있었다. 소련이 이때의 문제점을 수정하는데는 거의 2년이 넘게 걸렸다. 
바바로사 작전 기간 동안 T-34가 보인 실망스러운 전과는 2차 대전당시 다른 신무기들과 비교해 특별히 구별 되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훈련과 우수한 지휘관, 뛰어난 전술이 없다면 신기술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다.

2007년 3월 6일 화요일

1/48 스케일 AFV를 좋아하는 이유

작년 가을 부터 1:48 AFV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제대로 완성한 놈은 하나도 없지만 그럭 저럭 조립까지 해 놓은 녀석들은 몇 놈 있지요.

제가 처음 만든 모형은 아카데미에서 반다이(?)의 금형을 가지고 만든 1:48 M4A1 76mm 탑재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1:48 스케일의 AFV가 이상하게 정이 가더군요.

1:48 AFV가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이것 입니다.


바로 손바닥 안에 쏙 들어 오는 크기라는 점 입니다. 특히 셔먼이나 3호, 4호 계열은 정말 말 그대로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크기죠. Hobby Boss가 쏟아놓은 M4 시리즈는 가격도 적당해서 매우 좋아하는 놈 들입니다.


완소 3돌...

그리고 좋은 점은 1:48 스케일은 저 같은 초보자들에 대한 배려가 잘 돼있다는 점 입니다.


위의 타미야제 티거의 주행륜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부품에다가 조립 순서를 표시해 주니 정말 편하더군요.

시간 여유가 있을 때 마음 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은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타미야의 1:48 AFV들이 시장에서 고전(???) 한다는 소문이 들리는게 많이 섭섭하더군요.

2007년 3월 4일 일요일

독일과 프랑스의 군단급 기갑전투 : 독일 16차량화군단과 프랑스 기병군단의 교전사례

1940년 프랑스 전역은 6주만에 독일의 전무후무한 대승리로 끝났고 유럽 최고의 육군국이라고 자부하던 프랑스는 힘도 쓰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연합군의 주력은 아르덴느 삼림지대 북쪽으로 투입된 반면 독일군의 주공은 아르덴느 삼림지대로 집중됐기 때문에 독일과 프랑스 양군 모두 상당한 규모의 기갑전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급 이상의 기갑전투는 별로 치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군단급 기갑부대가 역시독일군의 군단급 기갑부대와 정면으로 격돌한 사례가 한 건 있긴 합니다. 바로 1940년 5월 12일부터 14일 까지 회프너가 지휘하는 독일 제 16차량화군단(XVI. Armeekorps(mot.)) 소속의 제 3, 4기갑사단이 프랑스 육군 기병군단(Corps de Cavalerie, 지휘관 René Prioux 중장) 소속의 제 2, 3경기계화사단(DLM, Divisions légères mécaniques)과 벌인 전투입니다.
이 외에 독일 제 5, 7기갑사단이 프랑스군 제 1기갑사단과 격돌한 Flavion 전투도 있는데 프랑스군이 1개 사단이므로 군단급 기갑전투라고 하긴 좀 그렇습니다.
이 전투는 1940년 여름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거의 유일한 군단급 기갑전투이기 때문에 독일군과 프랑스군 기동부대의 실력을 살펴보기에 좋은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1. 양 측의 전력

이 전투에 투입된 양측의 기갑전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독일군 제 16 차량화군단

제 3기갑사단(Horst Stumpff 소장) : 1호전차 117대, 2호전차 129대, 3호전차 42대, 4호전차 26대, 지휘전차 27대
제 4기갑사단(Johann Joachim Stever 중장) : 1호전차 135대, 2호전차 105대, 3호전차 40대, 4호전차 24대, 지휘전차 10대
-> Jeffrey A. Gunsburg의 Battle of the Belgian Plain에는 제 4기갑사단이 1호전차 141대, 2호전차 111대, 3호전차 40대, 4호전차 24대, 지휘전차 15대를 보유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프랑스군 기병군단

제 2경기계화사단(Gabriel Bougrain 준장) : S35 87대, H35 및 H39 87대, AMZ-ZT 63대
제 3경기계화사단(Langlois 소장) : S35 87대, H35 및 H39 150대
-> Karl-Heinz Frieser의 Blitzkrieg-Legende 302쪽 에는 이 전투에 프랑스군이 176대의 S35와 239대의 H계열 전차를 투입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전차의 구성을 보면 독일측은 중형전차 64~68대를 보유한 반면 프랑스는 S35만 87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H35나 H39는 모두 37mm 전차포를 탑재하고 있으며 보병지원 용도에 걸맞게 45mm의 정면장갑을 가진 반면 독일 기갑사단의 주력인 1호, 2호는 기껏해야 20mm 미만의 기관포/기관총을 장비했으며 방어력도 소화기나 겨우 막는 수준에 지나지 않은 상황입니다.

또 프랑스군은 사단 마다 독일군의 경전차보다 화력이 우세한 P-178 장갑차를 45대씩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제 3, 4기갑사단은 각각 56대의 정찰용 장갑차를 장비했지만 독일군이 장비한 장갑차들은 모두 20mm 기관포 이상은 장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전차 전력은 독일측이 37mm 대전차포와 47mm 대전차포를, 프랑스군이 25mm 대전차포를 장비하고 있어 독일측이 조금 우세하다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포병의 경우는 독일군 기갑사단의 사단 포병이 최하 105mm급을 장비한 대 반해 프랑스군은 75mm 포를 장비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 합니다.

2. 황색작전 개시와 독일 16차량화군단의 벨기에 국경 돌파

“황색작전”의 1939년 10월 29일 계획안에서 독일 제 6군의 공격 축선에는 5개 기갑사단이 투입될 계획이었지만 최종적으로 아르덴느가 주공 지역으로 결정되면서 이 축선에는 제 3, 4기갑사단만 투입되는 것으로 변경됐습니다. 독일 제 16차량화군단의 2개 기갑사단은 제 6군의 중핵으로 주공 부대가 아르덴느 삼림지대를 돌파하는 동안 연합군 주력을 고착, 견제하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독일 제 6군은 2개 기갑사단으로 연합군, 특히 프랑스군의 기갑부대 주력을 상대해야 하는 것 이었습니다. 회프너의 임무는 Gembloux를 점령하고 연합군 주력을 견제하는 것 이었습니다. 만약 프랑스군의 2개 경기계화사단이 회프너의 군단을 격파한다면 프랑스 제 1군은 병력을 차출해 아르덴느 삼림지대로 돌파하는 독일군을 저지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황색작전 발동과 함께 독일군은 에반 에말(Eben Emael) 요새를 점령하고 알베르 운하를 돌파해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이 교두보를 통해 공격을 개시할 독일군의 선봉은 제 4기갑사단 이었습니다. 독일측의 계획에 따르면 벨기에 영내에 진입하기 전 까지는 4기갑사단이 선봉에 서고 3기갑사단은 4기갑사단을 후속하도록 돼 있었습니다. 4기갑사단은 네덜란드 국경을 돌파한 뒤 신속히 벨기에 영내로 진입할 계획이었으나 네덜란드군이 주요 기동로의 교량을 폭파하면서 후퇴했기 때문에 10일 저녁까지 네덜란드 영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이 벨기에로 진입한 것은 5월 11일 오전이었습니다. 벨기에 영내로 진입하면서 프랑스군 선발대와 교전해 경전차(?) 1대가 격파되긴 했지만 이날 오전 동안 산발적인 연합군의 공습을 제외하면 진격은 순조로운 편 이었습니다.
오후 12시15분에 제 4기갑사단을 제 16차량화군단에 배속시킨다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후 회프너는 계획대로 이 제 3, 4의 두개 기갑사단을 Gembloux를 향해 진격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오후 4시30분 경에 서쪽으로 퇴각는 벨기에군 병력이 포착돼 제 6군 사령부는 제 4기갑사단에 일부 병력을 차출해 벨기에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병력이 벨기에군의 퇴각을 저지하는데 투입됐고 오후 늦게야 원래 계획대로 진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결국 제 16군단이 진격을 재개할 수 있게 된 것은 11일 오후 5시45분이었습니다.

한편, 제 4기갑사단을 후속하는 제 3기갑사단의 진격도 매우 느려서 3기갑사단이 뮤즈(Meuse)강을 도하한 것은 원래 작전계획보다 5시간 30분 늦은 11일 오후 6시 30분이었습니다. 제 3기갑사단의 진격이 늦어졌기 때문에 제 4기갑사단의 우익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제 4기갑사단의 비전투 직할대는 여전히 Maas 동안에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회프너는 상급 사령부의 명령 변경과 제 3기갑사단의 늦은 진격 때문에 이날 밤 9시가 돼서야 제 4기갑사단에 12일의 작전지시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제 4기갑사단이 12일에 확보해야 할 목표는 Hannut였습니다. 11일 저녁, 12일의 사단 주력의 공격에 앞서 사단 기갑수색대대(제 7기갑수색대대)가 Hannut 동쪽 5km인 Geer-Tal 까지 진출해 위력 수색을 실시하고 포로 수 백명을 생포했습니다.

3. 프랑스 기병군단의 대응과 양군의 조우

한편, 프랑스 기병군단은 먼저 선발대인 제 2경기계화사단을 5월 10일 오전 4시 30분에 벨기에 영내로 투입했고 그 뒤를 이어 제 3경기계화사단을 투입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회프너의 2개 기갑사단이 겨우 벨기에 영내로 진입한 11일 오전에 이미 Gembloux 지구에 도착해 방어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프랑스 기병군단장 Prioux는 프랑스 제1군 사령부에 독일군이 알베르 운하와 뮤즈강을 돌파하기 전에 이 선에서 독일군의 도하를 저지하게 해 달라고 건의했으나 벨기에군의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져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Gembloux 지구에 전개해 방어준비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벨기에군은 이 지역에 방어시설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 한 상태였습니다.

한편, 10일과 11일에 진격이 지지부진했던 독일군은 12일 오전 5시 30분 경 Gembloux 북동쪽 30km 지점인 Hannut 근교에 도달했습니다. Hannut는 독일 제 16군단의 1차 목표였고 회프너는 예하의 2개 기갑사단에게 Hannut를 확보한 뒤 여기서 다시 공격을 재개, Gembloux 방향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은 오전 8시 20분경 Hannut 외곽에 진입해 프랑스군의 정찰대와 교전에 들어갔습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장 슈테버(Johann Joachim Stever) 중장은 프랑스군의 기계화 부대가 투입된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접촉한 부대가 제 1경기계화사단이라고 오인 했으며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틀에 걸친 진격으로 연료가 부족해 일단 Hannut 서쪽에 대한 공격은 잠시 보류해야 했습니다. 연료는 12일 오후에야 낙하산으로 보급됐다고 합니다.
이날 첫 번째 전차전은 제 35기갑연대 5중대가 Hannut 서쪽에서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 소속 제 11용기병연대 1대대 소속의 H-35/39 전차와 교전한 것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5중대 소속의 3호전차들이 프랑스 11용기병연대의 전차 7대(독일측은 11대 격파를 주장)를 격파하고 프랑스군을 퇴각시켰습니다. 독일군은 이 교전에서 전차 5대가 피격되고 5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 전차들의 고질적인 약점인 시야 불량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 입니다. 독일측의 보고에 따르면 프랑스 군은 독일 전차들이 100~150m 이내로 접근 할 때 까지도 독일 전차를 발견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한편, 전방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독일 6군 사령부는 회프너에게 “적이 전면 퇴각”하고 있으니 신속히 추격해 Gembloux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이 시각 독일 4기갑사단은 프랑스군 기병군단의 주력과 조우, 본격적인 교전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회프너는 오전 9시 20분에 제 4기갑사단에 Hannut-Braives를 잇는 선을 확보하고 남서쪽 방향으로 위력수색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슈테버 중장은 오전 8시경 공격을 재개, Hannut 남서쪽의 Crehen을 공격했습니다. Crehen은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 소속의 제 5경기계화여단(5e Brigade Légère Mécanique) 2 흉갑기병연대(2e Régiment de Cuirassiers)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오전의 전투로 11~12대의 전차를 잃고 11시 무렵 Merdorp에서 퇴각했습니다. 프랑스 기병군단은 제 5경기계화여단을 지원하기 위해서 오후 3시경 제 2경기계화사단의 1개 전차중대를 투입해 Merdorp를 탈환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오후에 여세를 몰아 Crehen을 공격했지만 보병의 지원 없이 시가지로 진입했다가 S-35 4대를 잃고 다시 Merdorp 방향으로 퇴각합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의 정면에 나타난 것은 완전편제의 2개 경기계화사단 이었기 때문에 슈테버 중장은 4기갑사단 만으로 공격을 계속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10일부터 진격이 지지부진했던 제 3기갑사단이 Hannut 지구에 도착한 것은 이날 오후 8시가 되어서 였습니다.
그리고 이날 저녁 독일 제6군 사령부는 항공정찰을 통해 Gembloux 지구에 프랑스군 차량화 보병사단들이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회프너에게 신속히 프랑스 기병군단을 분쇄한 뒤 프랑스군이 Gembloux 지구의 방어를 굳히기 전에 이 지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12일 독일 제 6군의 상황은 회프너의 제 16차량화군단이 Hannut 지구에서 프랑스군 기동부대와 교전하는 동안 보병으로 편성된 4군단소속의 18보병사단이 이 16군단의 측면을 엄호하기 위해 오고있었고 27군단은 여전히 벨기에군 소탕 때문에 리에쥬(Liege) 북쪽에 묶여있었습니다. 즉 제 16차량화군단의 좌익인 남쪽 측면은 뻥 뚫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2일 오후 8시, 슈테버는 제 4기갑사단의 정면에 프랑스군의 2개 경기계화사단이 나타났다고 보고했고 회프너는 13일 오전을 기해 제 3기갑사단과 함께 공격을 재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날 저녁 양군은 다음날 전투를 위해 Hannut 부근의 촌락들을 둘러싸고 소규모 교전을 계속했습니다. 독일측은 에버바흐 중령의 지휘하에 대대급 전투단을 편성해 Hannut 서쪽의 Thisnes를 점령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에버바흐가 탄 지휘전차가 격파됐지만 결국 프랑스군은 Thisnes를 빼앗기고 퇴각했습니다. 12일 야간과 13일 새벽에 걸쳐 독일군 보병은 오전에 있을 전차부대의 공격을 위해 Hannut 서쪽의 마을들을 공격해 상당수를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
한편, 프랑스군도 12-13일 야간에 독일군의 전차부대가 집결한 곳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교란 사격을 산발적으로 퍼부었고 이로 인해 독일군은 차량 몇 대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4. 독일 3기갑사단의 도착과 13일 전투, 프랑스 기병군단의 퇴각

13일 전투는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시작됐습니다.
프랑스 제 2경기계화사단은 13일 새벽 5시30분에 30대의 S-35 전차를 투입해 Crehen 방향으로 공격을 감행했지만 독일군은 대전차포를 주요 거점에 매복시켜 프랑스군의 전차대를 저지합니다. 프랑스군은 보전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옥을 거점으로 배치된 독일군의 대전차포를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5월 13일 오전, 마침내 독일 제 4군단 소속의 제 18보병사단이 도착해 제 16차량화군단의 우익에 전개하기 시작했고 제 16차량화군단 소속의 2개 기갑사단도 계획에 따라 공격을 재개했습니다. 회프너의 계획은 13일 저녁까지 제 3기갑사단은 Gembloux 동쪽 10km 지점인 Thorenbais, 제 4기갑사단은 Thorenbais 남쪽의 Perwez을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제 3기갑사단의 5, 6기갑연대는 오전 11시 30분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제 3기갑사단을 상대하는 프랑스군의 제 6경기계화여단 소속 제 11차량화용기병연대(11e Régiment de Dragons Portés)는 이미 북쪽의 독일 18보병사단과 교전하고 있는데다가 우세한 독일 기갑부대의 공격을 받자 크게 고전했습니다. 제 6경기계화여단장 Loges 대령은 배속받은 제 1흉갑기병연대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독일군의 근접항공지원과 대전차포에 걸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결국 11용기병연대는 오후 2시경에 우세한 독일군을 상대로 잘 버티다가 탄약이 거의 떨어지자 후퇴하게 됩니다.

제 3기갑사단 좌익(남쪽)의 4기갑사단은 사단의 좌익에 “뤼트비츠 전투단(Gefechtsgruppe Lüttwitz, 사단수색대대, 사단대전차대대 1중대, 9기관총대대(Maschinengewehr-Bataillon 9), 654 대전차대대(Panzerabwehr-Abteilung 654)로 편성됨)과 제 79기갑공병대대를 배치해 프랑스 제 2경기갑사단을 견제하도록 하고 사단 주력은 서쪽으로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전력으로만 보면 뤼트비츠 전투단은 프랑스군 1개 사단을 막기에는 다소 부족했지만 프랑스 전차부대의 공격은 집중적이지 않은 중대 단위의 산발적 공격에 불과해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제 4기갑사단은 먼저 오전 11시 45분부터 15분간 공격준비사격을 퍼부은 뒤 보병을 투입해 촌락들을 제압하고 오후 1시가 돼서야 예비로 있던 2개 기갑연대를 투입했습니다. 서쪽으로 진격하던 35기갑연대는 Merdorp에서 프랑스군의 제 2흉갑기병연대 소속 전차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독일측에게는 다행히도 오전의 공격준비 사격으로 대전차포 진지 다수가 제압 된데다 프랑스군은 보병 매우 부족해 전차들이 보병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독일측은 보병을 투입해 프랑스군 전차들을 격퇴했습니다. Merdorp를 방어하던 프랑스군은 S-35 3대와 6대의 H-35/39를 잃고 후퇴했습니다. 독일측의 주장에 따르면 제 4기갑사단은 Merdorp에서 프랑스군 400명을 생포하고 25mm 대전차포 4문과 전차 5대를 노획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마침내 독일 제 27군단 소속의 제 269보병사단이 제 4기갑사단의 좌익에 도착했습니다. 프랑스 제 2경기계화사단은 독일군의 3개 보병사단을 상대하게 되자 제 4기갑사단을 상대하던 전차부대들을 돌려 제 269보병사단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결국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은 독일군 기갑부대의 주공을 그대로 얻어 맞게 돼 버립니다. 불과 12km밖에 안되는 지구에 독일군 2개 기갑사단의 전차가 집결해 공격을 개시하자 그 효과는 결정적이었습니다.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은 13일까지의 전투에서 총 30대의 S-35와 75대의 H-35/39를 잃었습니다. 독일 3기갑사단은 1호 전차 2대와 2호전차 1대를 잃는데 그쳤고 4기갑사단의 피해는 확실치 4기갑사단의 전차 손실은 확실치 않으나 병력 손실은 12일부터 13일 까지 전사 36명, 부상 104명, 행방불명 13명 이었습니다. 이날의 전투 결과는 독일군의 승리였습니다.
프랑스 제 3경기계화 사단은 독일군 3개 사단(제 3, 제 4기갑사단, 제 18보병사단)에 압도돼 큰 손실을 입고 밀려났으며 프랑스 제 2경기계화 사단은 불과 3개 대대급에 불과한 4기갑사단의 좌익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해 제 3경기계화군단 방어선이 뚫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비록 프랑스군 기병군단의 임무는 보병사단들이 방어선에 전개할 때 까지 시간을 버는 것 이었지만 원래 계획은 15일 까지, 그리고 변경된 계획에서도 14일 까지는 버티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명백히 프랑스군의 패배라고 하겠습니다.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은 예비대를 모두 투입한 상태에서 피해가 가중되자 오후 3시30분 경 군단사령부에 철수허가를 요청합니다. 군단장 Prioux 중장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즉시 철수 명령을 내립니다. 먼저 오후 4시부터 제 3경기계화사단이 교전을 중단하고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이어 5시부터 우익의 제 2경기계화사단도 후퇴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날 저녁 8시 경 Beauvechain-Perwez를 잇는 선 까지 퇴각해 방어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회프너는 프랑스 기병군단이 전면적으로 철수하는 것을 확인한 뒤 제 3, 제 4기갑사단에 추격을 명령합니다.

5. 5월 14일 전투와 프랑스 제 1군 주력과의 교전

13일 전투에서 프랑스 기병군단에 큰 피해를 입힌 독일군은 14일 오전 5시 공격을 재개합니다. 제 4기갑사단은 계속해서 원래 목표인 Gembloux 방향으로 전진했습니다. 슈테버는 36 기갑연대를 선두에 세우고 35 기갑연대가 후속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오전 11시 무렵 숲속에 매복한 프랑스 전차들의 공격으로 전진이 지연됐으며 슈테버는 다시 보병을 투입해 숲에 매복한 프랑스 전차들을 격퇴해야 했습니다.
한편, 3기갑사단은 5기갑연대로 사단 우익(북쪽)을 방어하도록 하고 6기갑연대만 서쪽으로 전진시킬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프랑스군 기계화부대가 출현했다는 잘못된 정보로 공격이 지연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3기갑사단은 프랑스 제 4군단의 모로코 보병사단이 방어하는 Gembloux 북쪽의 Ernage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12일부터 14일 까지 전개된 전투로 프랑스 기병군단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제 3경기계화사단만 보유 전차 중 30대의 S-35와 75대의 H-35/39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측은 독일군의 손실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 독일군의 전차 손실 중 완전 손실은 20대 가량에 불과했고 전체 피해는 5월 14일 기준으로 수리가능 한 피해와 고장을 합쳐 160대 정도였습니다.
독일군의 두 기갑사단은 5월 16일까지 49대의 전차를 "완전손실"로 잃었다고 하며 이 피해의 상당수가 5월 15일부터 16일까지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Hannut 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더 적다고 봐야 할 것 입니다. 프랑스 기계화 부대는 객관적으로는 우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더 큰 피해를 입은 채 퇴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제 1군의 주력인 보병군단들이 Gembloux 지구에 증원돼 전체적으로는 상황이 나아졌습니다. 증원된 부대는 3군단 소속의 제 2북아프리카보병사단(Divisions d’infanterie nord-africaine)과 제 1차량화보병사단(Division d’infanterie motorisee)과 4군단 소속의 모로코 보병사단 및 제 15차량화보병사단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저녁부터 4개 보병사단과 지원 전차부대를 투입해 독일 제 16군단에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회프너는 오후 늦게 까지 큰 피해 없이 진격이 계속되다가 새로운 프랑스군 부대가 출현해 맹렬히 반격을 개시하자 크게 놀랐습니다.

14일 저녁까지 회프너의 2개 기갑사단은 마침내 목표지점인 Gembloux 외곽에 도달했으며 프랑스군 4개 보병사단과 상대하게 됐습니다. 회프너는 14일 오후 동안 공격을 강행할 것인지 아니면 보병사단들이 도착할 때 까지 기다릴 것인지 고민하다가 다음날 공격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3일에 걸친 대규모 전차전은 독일측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기술적으로는 프랑스군이 우세한 것이 확실했지만 전술적으로 봤을 때 제 3경기계화사단은 방어적인 태도를 취해 전차들을 중대 단위로 분산 배치했고 제 2경기계화사단 역시 중대별로 산발적인 공격만 거듭해 성과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독일측은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결정적인 이유가 독일군이 연대단위로 작전하는데 비해 프랑스군은 대대 이하 단위로 작전했다는 점을 꼽고 있습니다. 독일측은 만약 프랑스군이 연대급 이상의 S-35 전차를 집중 운용했다면 상대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소형 포탑에 시계가 불량하고 무전기가 부족한 프랑스 전차들은 무전기를 장비하고 각급 지휘관들의 일사분란한 지시에 따라 단위부대로 전투를 벌이는 독일군의 전차들에게 상대가 되지 못 했습니다. 프랑스군의 전차는 수치상으로는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지만 전차 역시 사람이 타는 물건입니다. 프랑스 전차에 탑재된 47mm포는 1940년 당시의 기준으로는 꽤 쓸만한 물건이었지만 이 전차포가 탑재되는 포탑은 시야가 불량하고 전차장 한명이 지휘부터 사격까지 겸하는 아주 골치 아픈 물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프랑스측의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였습니다. 프랑스군은 기병군단의 임무를 주력 부대가 방어선에 전개할 때 까지 독일군을 저지하는 소극적인 것에 한정했고 이 때문에 11-12일에 전체적으로 프랑스군이 우세한 상황에서 방어로 일관했습니다. 방어적인 태도 때문에 제 2경기계화사단은 제 3경기계화사단을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독일군은 공세적으로 과감하게 작전한 결과 전투 초반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지요.

1941년 여름, 역시 숫적으로 우세했던 소련 전차부대도 막대한 피해를 입고 와해돼 버리는데 소련군 역시 프랑스군 기갑부대와 유사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서적

Karl-Heinz Frieser, Blitzkrieg-Legende(Oldenbourg, 1995)
Jeffrey A. Gunsburg, "The Battle of the Belgian Plain", The Jounal of Military History 56, April 1992
Jeffrey A. Gunsburg, "The Battle of Gembloux", The Jounal of Military History 64, Jan 2000
Thomas Jentz, Panzer Truppen vol.1(Schiffer, 1996)
Ernest R. May, Strange Victory(Hill and Wang, 2000)
Joachim Neumann, Die 4. Panzer-Division 1938-1943 : Bericht und Betrachtung zu zwei Blitzfeldzügen und zwei Jahren Krieg in Russland(Selbstverlag,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