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22일 목요일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군인들

한국전쟁은 여러모로 괴상한 전쟁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에게는. 근대화된 전쟁을 치를 능력은 커녕 제대로 된 군대조차 조직할 능력이 없었던 한국에게 전쟁은 대재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전쟁이 터졌으니 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싸워야지요.

가장 큰 문제는 갑자기 늘어난 군대를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이 시절 한국의 처지는 그야말로 딱해서 군인들을 먹이는 것 조차 똑바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한국전쟁 이전에도 군인들을 배불리 먹일 능력이 없었으니 전쟁이 터지고 군대가 늘어난 상황에서는 안봐도 뻔한 상황이 연출 될 수 밖에요. 1948년 9월 26일의 미군사고문단 기록을 보면 이범석 국방부장관이 국회에 사병의 급식 개선을 위해 추가 예산 편성을 요청하면서 병사 한 명의 일일 칼로리 섭취량이 육군의 기준치인 3,162칼로리에 못 미치는 2,322칼로리에 불과하다는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1) 한국전쟁 당시 미육군의 일일 칼로리 섭취량은 4200~4500칼로리 정도였으니 창군 초기의 한국군의 급양  수준은 미군의 절반 수준을 약간 웃도는 정도였습니다.2) 사실 식단의 질로 따지면 더 형편 없었겠지요. 예전에 썼던 ‘한국군 5사단의 일일 식량 지급’ 이 라는 글에서  한번 다루었지만 전쟁 초기 한국군 전투부대의 일일 칼로리 섭취량은 대략 3100칼로리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식단을 보면 영양소의 대부분을 밥에 의존하는 형편이지요. 보급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훈련소 같은 곳에서는 3600칼로리 수준이었던것 같습니다.3)

먹는게 형편없으니 군대가 제대로 돌아가긴 어려웠을 겁니다. 전쟁 당시 한국군의 비전투 장비손실 중 상당수가 춥고 배고픈 병사들이 장비를 팔아 먹을것이나 땔감을 구입했기 때문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미군사고문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많은 한국군 병사들이 음식이나 땔감을 구하기 위해 소총까지 팔아 치웠으며 자신의 소총을 팔아버린 뒤에는 다른 사람의 소총을 훔쳐 채워넣는 사고가 꽤 많았다고 합니다.4) 가난한 한국군 병사들이 배를 곯는 동안 돈 많은  미군들은 전투식량이 맛이 없어 내다버리고 있었다죠.  백선엽의 회고록에는 포로수용소를 가 보니 포로들이 한국군 보다 더 잘 먹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는 일화까지 있을 정도죠.5) 1953년 5월 12일에 의무병과 선임고문관이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군병원에 입원한 한국군 병사 중 7.6%가 영양실조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양부족으로 인한 질병인 결핵환자도 포함하면 이 수치는 조금 더 높아집니다. 여기에 11.9%의 결핵환자까지 합하면 거의 20%에 육박하는 수준입니다.6) 게다가 이 외에도 많은 질병이 영양실조가 주된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었으니 꽤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이것도 그나마 보급체계가 정비되고 미국의 원조가 꽤 들어온 1953년 5월의 상황이니 1950~1951년 경에는 더 심각했을 것 입니다.

병사들에게 밥도 제대로 못주는 형편이었으니 봉급도 제대로 챙겨주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한국군의 비참한 상황은 미국도 우려하는 문제였습니다. 전쟁 통이라 군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챙겨줘야 할 판인데 줄게 없을 정도로 엉망이니;;;; 아주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한국군의 비참한 실정 때문에 미국측에서 한국군이 각종 부대사업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을 묵인해 줄 정도였지요.

1953년 기준으로 한국군의 급여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7)

1953년도 기준 한국군의 급여
계급
급여(원화)
실질급여
급여(달러환산)
대장
90,000
85,400
14.23
중장
72,000
68,000
11.35
소장
66,000
62,500
10.41
준장
60,000
56,800
9.46
대령
56,100
53,400
8.90
중령
51,300
48,835
8.14
소령
46,500
44,275
7.38
대위
38,100
36,457
6.07
중위
35,700
34,126
5.68
소위
33,300
31,801
5.30
준위
32,300
30,937
5.15
일등상사
26,100
25,012
4.17
이등상사
24,300
23,171
3.86
일등중사
7,200
7,200
1.20
이등중사
6,000
6,000
1.00
하사
4,500
4,500
0.75
일병
3,600
3,600
0.60
이병
3,000
3,000
0.50

대한민국 육군 대장의 급여가 14달러 밖에 안되는 것도 안습입니디만 이것은 그나마 공정환율인 1달러당 6,000원으로 계산한 것 입니다. 1953년 초 암시장 환율은 1달러당 21,000~25,000원이었으니 이 환율을 적용하면 한국군 대장의 한달 급여가 3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이 되는 것 이었습니다. 육군 이등병은 한달 50센트에 목숨을 걸어야 하니 정말 비참하지요.

글자 그대로 외부의 원조가 없으면 당장 붕괴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로 전쟁을 위한 대규모 동원을 해야 했으니 국가는 물론이고 동원되는 국민으로서도 난감할 수 밖에요. 국민방위군 같은 대규모 동원계획이 참사로 끝난데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무능이 한 몫 했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자체가 그러한 대규모 동원을 할 역량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게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 ‘Supplemental Budget - FY 1948/1949’(1948. 9. 29), RG 338, PMAG 1948-49/KMAG 1948-53 Box 1
2) ‘Ration for the Armed Force, Korea’ Current ROKA-KMAG Problems(1953. 2. 8), RG 338, KMAG, Box 61 Plan for the Organization of a ROK Field Type Army
3) ‘Ration for the Armed Force, Korea’ Current ROKA-KMAG Problems(1953. 2. 8), RG 338, KMAG, Box 61 Plan for the Organization of a ROK Field Type Army
4) ‘Individual Rifles for ROK Army Soldiers’ Current ROKA-KMAG Problems(1953. 2. 22), RG 338, KMAG, Box 61 Plan for the Organization of a ROK Field Type Army. 이 보고서에 따르면 장비가 부족했던 국립경찰이 병사들의 소총을 강제로 빼앗은 사례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5) 백선엽, 『군과 나』(서울, 시대정신, 2009) 299~300쪽
6) ‘Alleged Undernourishment of ROK Army Patients’(1953. 5. 12), RG 338, KMAG, Box 61 Plan for the Organization of a ROK Field Type Army
7) ’Pay of ROK Army’ Current ROKA-KMAG Problems(1953. 2. 22), RG 338, KMAG, Box 61 Plan for the Organization of a ROK Field Type Army

댓글 24개:

  1. 6.25 전쟁 당시 국군의 비참한 상황을 이렇게 수치로 설명을 들어 보니 정말 피부에 와 닿는군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병대 상병이었던 유진 슬레지가 1달에 60달러를 받았다고 하던데..
    대장이 3달러라..
    저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대한민국을 수호하여 오늘날의 번영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신 참전용사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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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랫분 말대로 저런 상황에서도 이 나라를 지켜주신 참전용사분들께 감사를 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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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국가의 자원은 극도로 한정된 상태인데 전쟁이 터지는 경우는 아주 골치아프지요. 자원을 최대한 전쟁에 쏟아넣어야 하고 그 중에서도 직접 전투와 연관된 곳에 쏟아넣어야 하니 말입니다. 1930년대의 소련처럼 군인의 생활수준은 개판이지만 탱크와 비행기는 차곡차곡 쌓이는 사례는 그나마 양호하지만 한국처럼 군인의 생활수준도 개판인데다 소총도 제대로 못갖추는 경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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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제 관심을 끈 것은 가난한 나라의 총력전 체제라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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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같은 말이 나왔는지 당최 모를 일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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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군인은 자원봉사야, 돈 맛을 알아서는 안되에~"는 그래도 너무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별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에서의 허세성 발언일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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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이랬던 한국군이 잔반이 남아도는게 문제가 될 정도가 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네요. 병사들에 대한 처우는 아직 문제가 많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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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새삼 60년전 한국을 구해주신 분들에게 머리숙여 감사드릴 수밖에 없는 마음이 드는 군요.. 그야말로 '맨주먹과 몸뚱이 하나밖에 없다!' 의 현실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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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여러 분들 말씀처럼, 우리 할아버지들은 기적을 이뤄내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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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1949년 상황에서는 국내 여론 안정을 위해서라도 허세를 부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장 옆동네 장개석이 박살났는데 우리나라 군대가 병신이라고 솔직히 이야기했다간 어떤 꼴이 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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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이승만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희생을 당연히 여긴 인간이었으니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이야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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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굉장한 발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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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사실상 사람 말곤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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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저는 미국의 막대한 원조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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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리박사에게는 이세상 모든 직업이 다 자신에게 무료로 봉사하는 자원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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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이박사는 전근대사회에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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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그런데 전쟁 상대방도 능력이 없기는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오히려 미국의 원조가 있는 이쪽이 훨씬 유리한 상황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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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가난한 나라사람에게는 무얼하든지 힘드네요. 현대 인도의 사병들도 낮은 임금과 대우로 고생을 많이한다던데, 나라가 잘 살고볼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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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이건 북한이랑 비교하는 글이 아닙니다. 당시 한국이 미국없인 아무것도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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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아래로 내려갈 수록 고통이 가중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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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span><span>답이 안 나오는군요. 미국의 원조도 중요했지만, 지원없이 나가려는 스스로의 의지도 있었던 행운이 오늘같이 감사한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필이면 오늘은 그 51주년이군요.]</span></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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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저 당시 근대화에 대한 열망은 꽤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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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깜빡군11:14 오전

    <span>상대방도 소련, 중국의 막대한 원조로 버티고 있었죠. 북한도 밑천없기는 마찬가지인데 그거없이 전쟁했겠습니까? </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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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이거 보면, 참... 갑갑하네요. 이거랑 비슷한 예로는 임진왜란때 벌어진 계갑대기근정도일까요?
    계사, 갑오년간에 기근이 들어 전쟁수행은 커녕 곡물이 없어 국가의 구조 자체가 무너질 정도였다고 하니까요.
    명나라에 식량 구걸하는데 그 문장이 참 아름다워(...) 가져와 봤습니다.
    "(왜군의) 창끝과 화살촉을 겨우 면한 끝에 거듭 기근이 드니 만약 몇 달이
    지나면 적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저희 나라의 존망이 결단 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형세는 물이 말라가는 수레바퀴자국 속의 물고기들이
    입김에서 나온 거품으로 서로 적시다가 끝내는 말라죽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한 나라의 죽어가는 목숨을 구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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