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15일 금요일

늙은 사자의 몸부림

2차대전 직후 영국의 안보정책은 매우 재미있는 주제입니다. 1차대전 이후 영국의 안보정책이 몰락해가는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고심의 흔적이라면 2차대전 이후 영국의 안보정책은 영국의 몰락을 인정하고 그 바탕위에서 B급 강대국의 지위를 고수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특히 핵무기의 등장은 다른 강대국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에게 있어서도 꽤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요즘 읽은 논문중에서 처칠이 재집권에 성공한 뒤 총참모부가 작성한 1952년 Global Strategy Paper를 다루고 있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핵무기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냉전에 있어 주된 억제력(main deterrent)이며 전쟁 발발시 연합국의 유일한 공세 수단으로 간주되는 것(즉, 핵무기)을 가지지 못한다면 영국이 미국의 정책과 냉전 계획, 그리고 전시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심각하게 약화될 것이며 이것은 영국이 정책 수립이나 공세 계획에 참여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뜻한다.

(중략)

핵무기를 완전히 미국에 의존하고 (영국이) 자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원자폭탄을 보유하지 않는 심각한 정치적 불이익을 받아들이는 것은 영국에게 가장 현명하지 못한 일로 보아야 한다.

John Baylis·Alan Macmillan, “The British global strategy paper of 1952”,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6: 2, pp.209~210

강대국으로 명함을 내밀기 위해서는 실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핵무기는 그럴수 있는 상징이라는 이야기죠. 2차대전 이전의 전함처럼. 하지만 이후 영국의 핵정책을 보면 안습입니다. 본격적인 핵경쟁에 나서기에는 국력이 모자라고 결국 상징적인 수준의 핵전력을 보유하는 데 그치게 되니 말입니다.(물론 유사시 물귀신작전을 펼 정도는 되겠습니다만)

물론 이때 영국이 확보한 국제적인 지위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안습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역사를 보면 강대국 경쟁에서 탈락한 비참한 패배자들이 산적해 있으니 말입니다. 영국의 몰락정도는 양호한 편이죠.

댓글 9개:

  1. 스카이호크8:00 오전

    그래도 영국은 쪼그라들면서도 가끔씩은 위엄을 보여주는데, 프랑스는 그런 거 없이 자존심만 내세우다 피를 보고 쫓겨가는 일이(...) 분수를 파악하고 그에 맞게 실리를 챙기는 게 보기보다 어렵더군요.

    그러니 우리는 국격드립을 멀리하고...(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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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랑스도 나름 간보기는 잘 하는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하는 짓을 보면. 물론 베트남에서 개망신당한게 너무나 크게 각인되어 있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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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박종민6:58 오후

    핵무기를 보유하기 전의 소련의 대응도 상당히 궁금하군요.

    독일과의 피말리는 싸움을 통해서 간신히 승전했는데, 핵무기라는 통제불가능한 무기가 등장하면서 다시한번 2등국가로 밀려나는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은 영국보다 더 크면 컷지 모자르진 않았을 터인데...

    하기는 그당시의 내부 사정을 잘 알려주는 사료가 얼마나 남아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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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탈린의 경우 미국의 핵실험 성공이후에도 한동안은 재래식 전력에 조금 더 비중을 두는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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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박종민4:24 오전

     죄송한 말인데요,

    2차대전 종전 직후의 핵문제에 관한 책이 있으시면 추천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국내 번역본 이외에도 영문이나 일문정도는 (간신히.....)읽을 수가 있으니 알려주시면 정말로 감사하겠슴니다.

    아참, 여담인데요.

    가끔 들려 포스트를 읽고는 하는 유령 독자입니다만, 가볍거나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포스트만 난무하는 블로그들 중에서 그래도 순수하게 "자신의 것"을 말씀하고 있으신거 같아서  자주 찾아 뵙고 있습니다.

    읽기만하고 도망가는 유령이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찾아오는 저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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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제 블로그는 가벼움을 지향합니다.^^ 진지한 걸 기대하신다면 금방 실망하실 것 같은데요.

      2차대전 종전 직후의 핵문제라. 저도 읽은게 많지는 않은데 일단 제가 읽은 것 중에서는 Campbell Craig와 Sergey Radchenko의 공저인 The Atomic Bomb and the Origins of the Cold War를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분량도 많지 않고 꽤 재미있게 잘 읽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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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뇌향괴년8:38 오후

    영국의 핵정책 하니 일전에 잠깐 훑어본  cabinets and the bomb이라는 책이 생각나군요. 2007년에 나온 책인 데 내용은 1940년대에서 2007년 무렵에 걸쳐 핵무기 및 안보 정책에 관한 영국 정부, 군, 정보기관의 각종 내부 회의, 보고서, 메모 같은 각종 문서 중 비밀불류 해제된 것을 모아서 논평과 해섷을 덧붙인 책입니다. 말 그대로 핵시대의 개막에서 냉전 전 당시의 내부 사정에 대한 1차 사료집인 셈이죠.

     맨해턴 계획 이전 영국의 핵개발 노력이라든지 미국의 핵개발에 대한 영국의 공조 협력- 맥마흔 법안이 나오기 전에 루즈벨트 처칠 양자간의 합의라든지 하는 부분들로부터 시작해서 전후 노동당 집권 시기를 거쳐서 핵정챌을 결정하고 그에 ㄸ른 핵옵션을 선정하고 여기에 맞추어 무기 체계의 개발/포기 결정이라든지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루즈벨트와 처칠 사이의 합의는 양국의 핵공조를 밝히고 해당 병기를 서로 상대국에 대허여 사용하지 않는 것을 물론이고 , 무려 제3자에게 해당 무기를 사용할 때에도 양자가 협의해야 한다는 내용은 꽤 놀라운 감도 들더군요. 실제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에서 처칠이 사전에 이를 통보받았음을 물론이고 -물론 경고 방송 이전의 일이지요- 사실상 공동 지분 소유 자로써  핵공격을 "승인"했다는 표현이 사용되더군요.

    그 밖에 애틀리가 노동당이 집권한 후 여기에 대한 보고를 듣고, 이 것이 향후 전쟁 방식, 세계 정세 그리고 영국의 입지를 완전히 바꾸어놓을 사안이라는 걸 알고 핵능력 확보를 지시하는 장면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전 후 복구자금에서 20억 파운드의 비자금을 조성해서 재처리 건설을 준비시켰다고 나오더군요.

    http://www.britac.ac.uk/pubs/review/perspectives/0711cabinetsandbomb.cfm#conclusion에 해당 도서에 대한 개관과 일부 내용 발췌가 있으니 참고가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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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사합니다. Cabinets and the bomb는 예전에 sonnet님도 추천한 책이라서 한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뇌향괴년님도 추천하시는걸 보니 확실히 괜찮은 책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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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박종민8:07 오후

    저도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의 소위 우파(라고 쓰고 뉴라이트 바보들이라고 읽죠), 이승만 박정희대통령의 핵개발 의지같은 "말빨"먹힐 이야기나 할 것이지,  최근에 나오는 "이승만 국부론"같은 드립질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북의 핵위협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이런 2차 대전 직후의 각국의 긴박함을 '조중동'님들께서 더 자세하게 다루어 주시면 더 좋을 텐데요. 소위 자기들이 주장하는 "국부"께서 이미 핵개발을 지시하시었다라는 식의 말이라면 혹여나 들어주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농담이 지나쳤군요. 좋은 책들 꼭 읽어보겠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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