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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19일 목요일

『스탈린의 전쟁』이 간행되었군요.

 열린책들에서 제프리 로버츠의 Stalin's War의 한국어판을 낸 걸 알게 됐습니다. 한국어판은 무려 744쪽에 달하는군요. 영문판의 2배 정도 되는 분량입니다.


스탈린의 전쟁




 이 연구는 스탈린의 전략가적 자질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1941~1942년에 스탈린이 저지른 군사적 실책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43~1944년에 스탈린이 보여준 전략적 식견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1950년대 스탈린 격하운동의 영향으로 스탈린의 군사적 업적은 과도하게 폄하당한 경향이 있는데 로버츠는 이런 비판에 대해서 선을 긋고 있습니다. 로버츠는 1943년 이후 소련군의 반격 과정에서 스탈린이 전략적인 목표를 명확히 제시하고, 때로는 작전술 차원에서도 탁월한 결정을 내렸다고 평가합니다. 이런 스탈린의 전략가적 면모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1944~1945년 소련군의 동유럽 진출 과정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로버츠는 스탈린이 전후 처리 과정에서도 소련의 군사적 성과를 충실하게 활용해 소련의 전략적 입지를 강화했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이 연구는 독일 문제 처리 과정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냉전 초기 단계에서 스탈린의 전략적 결정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에서 스탈린의 의도가 무엇이었는냐는 해석이 주목할 만 합니다. 로버츠는 스탈린이 미국이 유럽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아시아에서 제한적인 군사적 충돌을 구상했고 그 결과물이 한국전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전략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군사작전에 대한 설명은 매우 간략하게 개요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군사작전에 대한 내용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독소전쟁사』를 함께 보시면 보완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2006년에 간행된 저작임에도 군사작전에 대한 몇몇 서술은 모호하거나 다소 부정확해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서술입니다. 저자는 이 전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갔으나 다소 2000년대의 최신 연구경향을 반영하지는 못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전반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연구이기 때문에 저도 번역본으로 한 번 읽어볼 생각이 있습니다. 이제는 간행된지 16년이 넘은 책 이지만 여전히 일독할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1년 9월 6일 월요일

『6.25전쟁 미 공군 항공전사』가 다시 번역되었습니다

 


얼마전 공군본부에서 로버트 퍼트렐(Robert F. Futrell)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을 다시 번역해서 6.25전쟁 미 공군 항공전사』라는 제목으로 간행했습니다. 이번 번역본은 1988년에 나온 개정판을 저본(底本)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어판이 새로 나왔으니 이 책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조금 이야기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미국 공군의 작전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공식 역사서의 틀을 따라가고 있지요. 그래서 전쟁의 주요 국면마다 미국 공군 수뇌부와 극동공군 사령부가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파악하는데 유용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책이 한국전쟁시기 공군의 작전을 다루고 있다는 점 입니다. 미국 공군은 1947년 육군에서 독립한 신생 병종입니다. 한국전쟁은 미국 공군이 독자적인 병종으로 수행한 첫 번째 전쟁입니다. 퍼트렐은 미국 극동공군이 극동군사령부 예하의 전력으로 통합작전의 틀 내에서 공군의 구상을 어떻게 관철시켰는지를 잘 서술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 후방에 대한 항공차단작전 수행을 위해 근접항공지원을 더 선호한 육군지휘관들(맥아더와 워커, 알몬드)을 극동공군 사령관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과 제5공군 사령관 패트리지 장군이 설득하는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미국 공군의 관점에서 집필된 공간사인 만큼 합동군이라는 체제하에서 자군의 논리를 어떻게 관철시켰는가를 중요시 하는 것 같습니다. 합동작전의 틀 내에서 미국 공군이 해군 및 해병항공대 전력과 어떻게 작전을 조율했는지 보여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1951년 추계전역에서 해병대가 해병항공대의 근접지원을 독점하면서 육군에 비해 과도한근접지원을 받게 되자 육군의 리지웨이 장군이 형평성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한 점이 대표적입니다. 이 책은 합동군 체제인 미군의 일부인 미국 공군이 합동작전의 경험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점은 세계적 냉전하에서 한국전쟁의 위치를 보여주는 서술입니다. 저자는 미국 극동공군이 전쟁 발발 이전부터 상대적으로 전략적 우선순위가 낮은 동아시아에 배치되어 있었던 까닭에 충분한 전력을 갖추지 못하고 전쟁에 참여한 점을 지적합니다. 이런 문제점은 전쟁 내내 계속됐습니다. 저자가 잘 지적하고 있듯 유럽 주둔 미국공군의 증강이 최우선 순위였기 때문에 미국극동공군, 그 중에서도 한국전선을 담당한 미국 제5공군은 격전의 와중에서도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제5공군이 한국전선의 제공권을 장악하는데 문제가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미국 공군의 강력함을 과시하는 서술이 인상적입니다. 이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죠. 저자 퍼트렐은 미국 극동공군이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저술하고 있습니다. 비록 미국 공군의 공식 역사서이지만 서술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정치적으로 무승부를 낼 수 밖에 없었던 제한전에서 미국 공군이 실질적 승리를 거뒀음을 보여주려는 서술입니다. 미국의 압도적인 공군력이 공산측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은 것은 냉전 이후 스탈린과 김일성 회담 녹취록들이 공개되면서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퍼트렐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공산측을 압박하기 위해 수행된 폭격작전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그리고 공산군이 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잘 서술하고 있습니다. 1952년 이후 중공군의 방공망이 강화되면서 미국 공군의 작전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습니다.(이 점은 중국측에서 자국의 승리를 주장할 때 내세우는 단골 소재이기도 합니다.) 물론 미국 공군이 이런 난관을 극복하고 폭격을 통해 공산측을 협상장으로 끌어냈음을 강조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1951년 이후 미그 앨리에서 전개된 공중전의 양상입니다. 저자는 미국 공군이 실질적으로 승리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F-86MiG-15의 대결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전쟁 당시에도 유엔군은 승리하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미국 공군의 F-86 부대가 공중전에서 거둔 전과를 선전의 소재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물론 미국 공군의 F-86이 공산군의 MiG-15에 대해 우세한 전과를 거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소련측 자료가 공개되면서 실제로 미국 공군이 생각한 것 만큼 압도적인 승리가 아니었던 게 드러났지요. 이렇게 미국측 자료에만 의존해 집필되다 보니 현재 시각에서 약간 부정확한 서술이 보이는건 아쉬운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 공군의 입장을 대변하는 저작이다 보니 전쟁 기간 중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발생한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점은 김태우의 『폭격』 같은 연구들이 나오면서 극복됐습니다. 민간인 피해를 외면하는 점은 이 책이 냉전시대에 미국 군부의 입장을 대변해 집필됐다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우리는 이런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몇가지 단점이 있지만 훌륭한 저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집필되어 현재의 시각에서는 다소 아쉽지만 그럼에도 오늘날에도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 입니다. 다만 비매품으로 간행되었다 보니 편하게 구하지 못하는 점이 단점입니다.


2021년 7월 13일 화요일

역지사지 - 어떤 육사생도의 실전 경험담

오랫만에 박경석 장군의 회고록 『야전지휘관』을 읽고 있는데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한국전쟁 초기 포천 방면 방어에 투입된 일화가 눈에 들어옵니다. 박경석 장군 본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으로 풀어놓는 서술방식도 재미있네요. 첫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할때의 비참한 심정을 토로하는 내용입니다. 상당히 솔직한 회고담이 아닌가 싶어서 인용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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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장을 빼놓고 그들은 모두 동기생이었다. 1950년 6월 1일 태능 육군사관학교 생도 제2기로 입교하여 청운의 꿈을 안고 교육을 받은지 25일째 되는 날 6ㆍ25가 발발하자 M1소총 조작법도 제대로 모르는 사관생도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생도 제1기생(현 제10기)과 더불어 대대를 편성 포천 방면 전투에 투입되었다.

홍안의 청소년들인 그들은 생도 제1기생이 하라는대로 행동했다. 호를 파라면 호를 팠고 잠복조에 차출하면 잠복근무에 열중했다. 그들은 포천지역에 배치된 능선에 개인호를 파고 M1소총을 겨누면서 북쪽을 향해 응시하고 있었다. 생도 제1기생들은 포천지역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으나 생도 제2기생들은 전혀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생소한 곳 이었다. 동서남북도 잘 알지를 못했으며 겨우 다음날 이른 새벽에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서야 방향을 알 정도였다. 

전선에 배치된 얼마 후 이윽고 멀리서 둔탁한 북소리 같은 것이 울리더니 잠시 뒤 천지를 뒤흔드는 진동과 더불어 '쾅쾅 쿵쾅 쿵쾅...'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진지 주위에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평생 처음 당하는 포탄세례인지라 모두들 호속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감고 이제는 다 죽는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포탄소리가 뜸하면서 곧 이어 따발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따. 따. 따. 따...' 따발총 소리에 기가 질려 어쩔줄을 모르는 생도 제2기생들을 향하여 뒤에서 생도 제1기생의 호령소리가 들려왔다.

"전방 보이는 적, 사거리 500m 사격개시!"

생도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사격을 하면서 자세히 살피니 적이 500미터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멀리 가물가물 메뚜기 같이 뛰었다가 엎드렸다 하면서 달려오는데 약 1키로미터 거리 쯤 되는 것 같았다.

적의 진출 속도는 상당히 느렸다. 그들도 겁이 났는지 별로 계속 전진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사격명령이 내려졌으니 안쏠 수도 없어 무턱대고 방향만 어림잡아 쏘아 대었다. 처음에는 총소리와 진동에 겁이 나는 것 같기도 하더니 몇 크립 정도 쏴보니 신이 나는 것 같았다. 계속 삽탄 장전 하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일부 생도 제2기생들은 M1 8발을 다 쏘고난 다음 장전이 서툴러 호에서 뛰어나와 생도 제1기생 호를 찾아다니며 삽탄장전을 부탁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교전한 지 30분 정도 되었을까 '부릉 부릉 부릉'하는 무거운 금속성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집채만한 괴물이 이쪽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생도 제2기생들은 아무도 그 물체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나 무조건 그 물체를 향해 M1 소총을 쏘아댔다.

"야! 전차닷! M1으론 안돼!"하는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쿵쾅 하는 벼락치는 소리에 뒤이어 "이크! 웅웅"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적의 직사포탄에 의해 아군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다. 바로 옆 개인호 속으로 달려가니 이름모를 동기생 한 명이 죽어있었다.

"전원 후퇴! 화랑대로 집결이닷."

생도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적과 마주치면 죽을때까지 싸우는 것인줄만 알았던 그들에게 후퇴명령이 내려지니 도무지 뭐가 뭔지 알수가 없는 일어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더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육사입교 25일째를 맞이하는 그들인지라 전차의 위력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생도 제1기생들은 전차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맨손으로 개죽음을 당하느니 일단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듬어야 되겠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박생도는 엉엉울면서 뛰기 시작했다. 사관생도의 긍지가 무참히 짓밟힌 것이다. 그 화려하던 꿈이 무너진 것이다. 뛰면서도 박생도는 주마등처럼 어린 시절의 일들이 생각났다. 어린시절에 본 만화책에는 중국군 병사들이 일본군에게 쫒기어 도망가는 그림이 실리곤 했다. 그당시 기억으로는 일본군은 공격만 하는 군인이고 중국군은 도망만 하는 패잔병인 줄만 알았다. 그것이 커가면서 뇌리에 박혀있어 도망은 으례히 중국인만 하는 것으로 인식이 돼 중국집에 음식 먹으러 가면 중국인들이 쏼라쏼라 떠들면서 우동을 나르는 모습과 도망가는 모습을 연상하면서 혼자서 웃기도 하였던 것을 아스라히 생각하면서 지금 박생도는 자신이 전차가 나타났다고 하여 적에게 뒤를 보이며 뛰는 모습이 너무나도 비참하게 느껴지는 것 이었다. 신라의 화랑들처럼 또한 화랑 관창처럼 멋있게 싸우겠다고 다짐한 나이어린 사관생도들의 아름다운 꿈을 무참히 꺾어 버린 것이었다. 박생도는 계속 엉엉울면서 뛰었다.


박경석, 『야전지휘관: 야전지휘관의 사생관』 (서울: 병학사, 1981) 143~147쪽.

2021년 3월 6일 토요일

1950년대 한국 공군 증강과 제트기로의 전환

 계속 일에 치이면서 살다 보니 블로그에 글을 못 올린지 한참 됐습니다. 작년 12월쯤이면 시간 여유가 생길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네요^^ 가끔 안부를 묻는 분들도 계시니 생존 신고(?) 겸해서 제가 2019년 공군본부 행사에서 발표했던 글의 일부분을 고쳐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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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공군력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공군력의 중요성을 보여준 전쟁이기도 합니다. 한국 정부와 공군본부는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공군 양적 증강과 현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북한 공군은 한국전쟁 기간 중 MiG-15 전투기를 보유하여 공군기를 제트기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응하려면 한국 공군도 제트기가 필요했죠. 1952년부터 1954년 한미합의의사록 체결 시 까지 한국 정부는 공군 현대화를 위해 미국 정부에 대규모의 군사 원조를 요구합니다. 이 시기 한국 정부와 한국 공군의 군사원조 요구는 한국전쟁을 통해 축적한 공군 운용 경험과 기획능력에 기반했습니다.

공군본부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공군력 증강 3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미국 정부에 이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미국 국방부는 한국 공군의 3개년 계획에 반대했습니다. 19521022일 로벳(Robert A. Lovett) 국방부장관은 애치슨(Dean Acheson) 국무부장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한국 정부가 요청한 공군력 증강 3개년 계획을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히 합니다. 그는 한국 공군본부의 계획이 비현실적이고, 공군력 증강에 필요한 인력을 수급하기도 어렵다고 평가했습니다. 로벳 장관은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한국 공군의 규모를 현 수준에서 유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한국 공군이 제시한 3개년 계획을 거부하는 대신 미 제5공군예하 6146항공기지부대를 미공군고문단으로 개편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1)

미국 정부 당국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공군력 증강을 위한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손원일(孫元一) 국방부장관은 1953107일과 21일에 미국방부에 다시 군사원조를 요청 합니다. 손원일 장관이 제시한 공군 증강 계획도 기본적으로 1952년에 수립된 공군력 증강 3개년 계획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손원일 장관은 한국 공군의 규모를 5개 전투비행단, 2개 폭격비행단, 1개 정찰비행단, 1개 수송비행대대로 증강하고 동시에 제트기를 도입하고자 했습니다.2) 손원일 국방부장관은 195416일 미합참의장 래드포드(Arthur W. Radford) 해군 대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북한의 공군력과 해군력이 한국군을 능가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북한군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한국 공군과 해군에 대한 원조를 늘려줄 것을 요청했습니다.3) 이승만 대통령도 1954726일부터 813일까지 미국을 방문하여 경제 및 군사원조 문제를 논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육군 뿐 아니라 해군과 공군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원조를 요구했습니다. 19548월 군사원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이형근(李亨根) 합동참모총장과 정일권(丁一權) 육군참모총장은 북한 공군이 255대의 제트전투기와 40대의 Il-28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4)

하지만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의 공군력 증강 요구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미 20개 사단에 달하는 한국 육군을 지원하는데 방대한 예산이 소요되고 있기 때문이죠. 여기에 제트전투기를 추가로 원조할 경우 늘어나는 유지비용을 미국 정부가 부담해야 했습니다. 대한 군사원조 규모를 평가하기 위해 1954년 방한한 밴 플리트 사절단은 한국 공군의 규모를 1개 전투비행단으로 제한한다는 가정 하에 항공기 유지비용을 다음과 같이 산정했습니다. 10전투비행단에서 F-51F-86을 함께 운용할 경우 1957년 회계연도에 F-51 전투기 48대를 운용하는데 연간 1,036,800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같은 기간 F-86 35대를 운용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연간 1,764,000달러가 될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F-86 전투기 1대를 1년간 운용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50,400달러로 F-51 전투기 1대를 1년간 운용하는데 소요되는 21,600달러에 비해 2배 이상 많았기 때문이죠.5)

미국 정부와 군부 내에서는 한국 공군의 규모에 대해 이견이 있었으나 한국 정부가 요구한 것 보다는 작은 규모를 선호했습니다. 1954331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한국공군의 전투부대 규모를 1개 비행단(3개 대대)으로 유지하고, 한국 공군의 전력 부족을 미국 공군으로 보완하면 된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또한 한국 공군 병력을 9,000명으로 삭감하도록 지침을 내립니다. 그러나 한국 공군에 제트 전투기를 원조할 필요성은 인정했습니다.6)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달리 현지의 미군 당국은 합참의 지침이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한국 정부의 군사원조 요구를 접수한 주한미군사고문단과 극동공군사령부는 1954212일 다음과 같은 내용을 미 합동참모본부에 보고했습니다. 극동공군사령부는 한국 공군의 규모를 6개 전투비행대대(2개 비행단), 1개 혼성비행전대, 1개 항공전술통제대대, 1개 전술통제전대, 1개 통신전대로 증강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또한 군사원조예산의 제약을 고려해 한국 공군에 제트기를 지원하는 것은 1956년 회계연도로 연기할 것을 건의 했습니다.7)

미국 극동공군 사령부는 1954611일 약간 수정된 방안을 제시합니다. 미국 극동공군사령부가 제시한 방안은 1956회계연도 1분기와 3분기에 먼저 50대의 F-86을 지원해 2개 전투비행대대를 제트기로 개편한 뒤 1957~1958회계연도에 추가로 4개 전투비행대대 분량의 F-86을 제공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또한 전천후 요격능력을 갖춘 F-94B 1개 대대(25)1956회계연도 3분기에 원조하여 한국 공군을 총 7개 대대의 제트전투기 대대로 증강하도록 제안했습니다. 원조할 비행기는 극동공군사령부 예하 부대가 보유한 중고 기체를 양도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또한 전투기부대의 증강에 맞춰 한국 공군의 총병력을 1958회계연도 4분기 까지 장교 1,973, 부사관 및 사병 17,989명 등 총 19,962명으로 증강하도록 제안했습니다.8) (John E. Hull) 미 극동군사령관은 극동공군사령부의 건의서를 참고하여 1954720일 미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비망록에서 한국 공군을 제트전투기 2개 비행단(6개 비행대대)을 포함한 10개 대대로 증강하고 병력을 20,000명으로 증강하는 방안을 건의합니다.9)

대한군사원조의 적정 수준을 평가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파견한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예비역 대장은 한국 공군을 점진적으로 증강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미 합동참모본부가 결정한 한국 해군과 공군의 규모는 적절한 수준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또한 한국 공군의 전력은 제한적인 수준으로 유지하고 실질적인 공격력은 미국 공군에 의존하도록 하는 방안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밴 플리트도 한국공군이 제트기로 전환하는 것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1956년 회계연도까지 한국 공군에 제트 전투기를 원조할 수 있도록 예산안을 편성해야 한다고 건의합니다. 또한 한국 공군이 1개 제트전투기 비행단을 성공적으로 운용한다면 1개 비행단을 추가로 편성하도록 원조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10) 밴 플리트는 한국 공군의 F-51 비행단을 제트전투기 비행단으로 전환하는데는 최소 1년의 충실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평가했습니다.11)

1953년부터 1954년 까지 한미 양국간에 논의된 한국 공군의 적정 규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측 요구

극동군 사령부 추천안

미 합참의 목표

밴 플리트 사절단 추천안

전천후 전투기 대대

1

1

3

3

주간 전투기 대대

6

6

전투폭격기 대대

6

전술 정찰 대대

4

1

0

1

경폭격기 대대

2

0

0

수송기 대대

2

1

1

1

항공관제 대대

1

1

0

1

총 계

22

10

4

6

[출처: “Report of Ambassador James A. Van Fleet: Korea”(1954. 7. 23), RG218 Entry UD50 Box13, II-9]


한미합의의사록체결을 앞둔 시점에서 미국 정부의 일부 인사들은 대한군사원조에 소극적이었습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당시 이승만 정부의 대외정책에 있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북진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죠. 덜레스 미국 국무부장관은 1954726일 백악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제트전투기와 해군함정을 지원하는 방안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한국 공군에 제트전투기를 지원할 경우 대북 무력 도발에 사용할 위험이 있으며, 한국 해군에 호위구축함(Destroyer Escort)을 제공한다면 이승만 라인에서 일본 어선을 몰아내는데 쓸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그는 한국 공군에 제트전투기를 원조하는데 반대했습니다. 또한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와 어업 문제에 대해 합의하기 전에는 추가 군사원조를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덜레스 장관의 의견에 반대한 것은 미국 군부였습니다. 미국 합참의장 래드포드 제독은 한국 공군이 한국전쟁 기간 중 탁월한 공훈을 세웠기 때문에 제트전투기를 지원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한국의 입장을 옹호합니다.12)

최종적으로 19541117일 한미 양국 정부간에 체결된 경제 및 군사원조에 관한 한미간 합의의사록(이하 한미합의의사록)에서는 1955년 회계연도 예산으로 지원할 한국 공군의 규모를 1개 전투비행단(3개 비행대대), 총병력 16,500명으로 결정합니다. 또한 미국 정부는 1955년 회계연도에 T-33 훈련기 10, F-86F 전투기 30대 등 제트기를 원조하고 추가로 1956년 회계연도에 55대의 F-86F를 제공하기로 했습니다.13) 이로서 한국 공군은 제트전투기를 도입하여 북한 공군에 대응할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미합의의사록체결과 함께 한국 공군의 제트기 도입 계획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19541129일에는 오산에서 한미군사회담 공군분과위원회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서 미국 대표단은 한미합의의사록에 따라 1개 제트비행단을 창설하고 C-46 수송기를 제공하기로 합니다.14) 한미합의의사록체결 이후 한국 공군의 대미 군사원조 요구는 한미합의의사록에 규정된 범위 내로 제한되었습니다. 1955225일 한국공군본부가 작성한 1956회계연도 공군운영계획안은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이 계획안의 골자는 195571일부터 시작되는 1956회계연도의 목표를 공군병력 16,500명의 한도 내에서 F-86F 전투기 도입 등 제한적인 현대화를 추진하는 것 이었습니다. 한미합의의사록은 한국 공군의 병력 상한을 16,500명으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군의 독자적인 작전 능력에 제약을 주었습니다. 공군은 병력 부족으로 인해 장거리 통신망, 방공, 군 의료 등을 육군의 자산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한국 공군은 제한된 병력을 비행부대 유지, 이를 직접적으로 지원할 지상시설 유지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15)

제트전투기를 운용할 인원에 대한 교육은 한미합의의사록이 정식으로 체결되기 전 부터 실시됐습니다. 일부 조종사는 미국 본토에서 F-86 운용교육을 받았으나 대부분은 한국에서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미국 파견 교육을 받은 조종사는 1954년에 2, 1955년에 30, 1956년에 40, 1957년에 25명이었습니다. 한국 내에서의 제트기 전환 교육은 1954129일 오산에서 시작됐습니다. 국내 교육을 통해 1957년 말 까지 100명의 조종사가 제트기 교육을 수료했습니다. 정비사 교육은 195484일 대구 K-2 기지에서 시작됐습니다. 최초의 교육 대상은 49명이었습니다. 이어 19551월에 88, 동년 11월에 96, 19571월에 342명을 대상으로 정비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1957년 까지 199명의 정비사가 해외파견교육을 받았습니다.16)

인력 양성과 함께 1955827일에는 제10전투비행단이 F-86F 전투기 14대와 T-33 훈련기 9대를 미공군으로부터 인수했습니다. 1956년에는 F-86F 68대가 추가로 인도되어 같은 해 41일 제10전투비행단이 제트기로 기종 전환을 완료했습니다.17) 전투기의 제트화와 함께 지원 전력도 강화되었습니다. 1955429C-46D 수송기 6, 같은 해 10월 동형 수송기 11대가 도입되어 제5혼성비행단 예하 제5공수전대로 발족했습니다.18)

195881일에는 김포기지에서 제11전투비행단이 창설됐습니다. 초대 단장은 공군본부 작전국장으로 있던 장지량(張志良) 대령이었습니다. 11전투비행단은 F-86F 기종을 장비하고 전술공군작전을 수행하는 것을 주 임무였습니다. 11전투비행단은 예하에 제111, 112 전투비행대대, 11정비보급전대, 11기지전대, 11의무전대 등의 부대를 두었습니다.19) 11전투비행단은 1958125일 제10전투비행단과 제1훈련비행단에서 T-33 훈련기를 각각 1대씩 인수해 조종사 교육을 시작했고 같은해 1230일에는 최초로 F-86F전투기를 수령했습니다. 1959228일에는 제111전투비행대대가 F-86F 25대를 완편하여 편성을 완료했습니다. 112전투비행대대는 같은 해 730일 편성을 완료했습니다.20)


주석

1) 로벳이 애치슨에게 보낸 서신(1952. 10. 22), RG330 Entry17 Box11.

2) “Memorandum by the Joint Chief of Staff to the Secretary of Defense(Wilson)”(1954. 3. 31), FRUS 1952~1954, Vol.15 Korea part.2, 1783.

3) JCS1776/424 Appendix, Korea Sec.144”, RG218 Entry UD19 Box27 Korea 1954~1956, 2

4) “General Lee, Chairman, Korean Chiefs of Staff; and General Chung Il Kwon, Chief of Staff, Korean Army visit with Admiral Radford”(1954. 8. 23), RG218 Entry UD50 Box13 Admiral Radford, 1.

5) Report of Ambassador James A. Van Fleet Korea”(1954. 7. 23), RG218 Entry UD50 Box13 Admiral Radford, TAB D.

6) “Letter from CINCFE on the Development of ROK Armed Forces”(1954. 7. 9), RG218 Entry UD50 Box13 Admiral Radford, 1.; “Memorandum for the Chief of Staff, U.S. Army”(1955. 2. 12), RG319 Entry A1 2B Box25, 1~2.

7) “Memorandum by the Joint Chief of Staff to the Secretary of Defense(Wilson)”(1954. 3. 31), FRUS 1952~1954, Vol.15 Korea part.2, 1783.

8) “Proposed ROK AF Organization prepared by Headquarters Far East Air Forces”(1954. 6. 11), 1-8.

9) “Memorandum for the Secretary of Defense”(1954. 7. 20), RG218 Entry UD50 Box13 Admiral Radford, 1.; FRUS 1952-1954 Vol.XV Korea Part II, 1854.

10) Report of Ambassador James A. Van Fleet Korea”(1954. 7. 23), RG218 Entry UD50 Box13 Admiral Radford, I-2~I-3.

11) Report of Ambassador James A. Van Fleet Korea”(1954. 7. 23), RG218 Entry UD50 Box13 Admiral Radford, II-15.

12) FRUS 1952-1954 Vol.XV Korea Part II, 1854. 이날 회의에서 래드포드 제독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Koreans had earned consideration for some additional air strength by the excellent work their air force had done.”

13) “Memorandum for the Chief of Staff, U.S. Army”(1955. 2. 12), RG319 Entry A1 2B Box25, 3.

14) 공군사 제2, 76.

15) Headquarters, ROK Air Force, “ROK Air Force Plan for FY1956”(1955. 2. 25), RG341 Entry355 Box882, A1-C1.

16) 공군사 제2, 76~77.

17) 공군사 제2, 77.

18) 공군사 제2, 78.

19) 공군사 제3, 98.

20) 공군사 제3,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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