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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17일 수요일

17-18세기 프랑스 군대와 여성

중세부터 근대 초기까지 유럽 각국의 군대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민간인을 달고 돌아다녔습니다. 여기에는 군대에 식료품을 납품하는 상인, 장인, 그리고 대포를 조작하는 기술자(17세기 이전까지 대포는 민간인 기술자가 발사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체계적으로 포병을 양성한건 프랑스가 최초라고 하지요), 약간의 거지와 건달, 그리고 잡일을 거들거나 매춘을 하는 여성이 포함됐습니다. 16-17세기 유럽 군대를 연구한 저작들을 보면 이 시기의 군대에는 전투원의 1.0~1.5배 정도의 민간인이 따라 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대부분이 여성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숫자였을 것 이라는게 군사사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G. Parker나 J. Lynn등등) 17세기 중반까지도 여성들은 전투 부대를 따라다니며 식사 준비, 빨래, 간호 등의 일을 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 보니 예산을 무지막지 잡아먹었다는 점 입니다.

프랑스 군대도 이 점에서는 다른 유럽 국가의 군대들과 비슷했습니다. 루이 14세 때까지 프랑스군 병사들은 허드렛 일을 거들 하인(goujats)를 거느리는 것을 법으로 허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사관 정도면 두 명 까지 거느릴 수 있었다는군요. 이 경우 여자를 데리고 있는 사례가 간혹 있었던 모양입니다. 뭐, 빨래도 해주고 밤일도 해준다면야 나쁠게 없겠죠. 여기에 외국인 용병들은 가족을 달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이들은 부대를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한 독일인 부대는 부대와 같은 숫자의 가족을 달고 왔다는 이야기도 있죠.
루이 14세는 부대비용 절감을 위해 전투 부대에 딸린 여자의 숫자를 줄여보려 노력했습니다만 이걸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 했습니다. J. Lynn에 따르면 루이 14세가 요단강을 건너간지 한참 지난 1772년의 기록에 프랑스군 전체에 걸쳐 보병 1개 대대당 15명에서 20명 정도의 여성이 잡일에 종사했던 것으로 나와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여성들은 빨래 같은 잡다한 일을 담당했기 때문에 야전 지휘관들은 여자들이 전쟁터로 따라 오는 것을 좋게 봤다지요.
잡일을 거드는 여성 외에 vivandieres라고 불리는 여성 잡상인(?)들도 꽤 많았다고 합니다. 부대를 졸졸 따라다니며 술, 담배를 판매했다고 하는군요. 술과 담배는 병사들에게 필요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이들 잡상인들은 부대 주둔지 내에 천막을 치고 영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야전 지휘관들로부터 보장 받았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병사들의 결혼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일반 사병들은 결혼하는 것이 자유로웠지만 대신 결혼할 경우 진급에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월급도 아까운데 거기다가 입을 더 보태는게 좋게 보일리는 없었겠지요. 특히 탈영을 방지하기 위해서 주둔지의 여성들과 결혼하는 것은 다른 지역 여성과의 결혼보다도 엄격하게 금지됐습니다. 장교도 비슷한 규정을 적용 받았다고 하지요. 기혼자는 모병 대상에서 엄격히 걸러졌기 때문에 루이 14세 재위 기간 동안 프랑스 육군에서 기혼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15% 내외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30년전쟁 시기인 1630~40년대의 프랑스군에서 기혼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40%~45% 정도로 추정되는 것과 비교하면 태양왕 시기에 기혼자 비중이 얼마나 떨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결혼 자체는 엄격하게 통제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할 경우에는 군인 가족의 복지에 일정한 혜택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프랑스 정부는 1706년에 병사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부대 관사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듭니다.

이 밖에 전투원으로 참여한 여성들의 이야기도 있는데 이건 꽤 재미있는 이야기이니 따로 다루는게 좋을 것 같군요.

2006년 12월 6일 수요일

1635~40년 프랑스군의 기병 부족 문제

서유럽에서는 15세기부터 보병이 군대의 중추를 형성하게 되고 기병의 비중이 크게 축소 됩니다. 예를 들어 이베리아 반도에서 재 정복전쟁(reconquista)을 치루고 있던 카스티야 가 대표적인데 그라나다 전투 초기에 아라곤 군(대부분 카스티야에서 동원되었음)은 기병 6,000~10,000명, 보병 10,000~16,000명 으로 편성됐는데 그라나다 전투 말기에는 기병 10,000명, 보병 50,000명으로 그 비율이 1:1 에서 1:5 로 변화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494년 프랑스 국왕이 거느린 군대는 13,000명의 기병과 15,000명의 보병으로 편성돼 있었으나 1552년에는 기병 6,000명과 보병 32,000명으로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이 1:5로 변화합니다.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보병의 중요성은 더더욱 증대됐고 이제 기병은 정찰, 보급 부대 호위 정도의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많은 국가들이 더 많은 보병과 포병을 동원하는데 관심을 가졌고 기병은 부차적인 존재가 됐습니다.

그 결과 17세기 초-중반 프랑스 육군은 기병이 지나치게 축소됐습니다. 1635년 프랑스는 보병 115,000명을 유지할 수 있는 예산을 배정했지만 기병에 배정한 예산은 불과 9,500명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이 이제 1:11에 달한 것 입니다.

30년 전쟁 시기에 주요 교전국들은 기병 전력 증강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 17세기의 전투는 16세기 보다 기동의 중요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황당하지만 보급 문제도 기병의 존재를 부각시켰습니다. 현지 조달에 대한 의존이 높았던 당시의 보급체계는 더 넓은 반경에서 약탈을 수행할 수 있는 기병을 필요로 했던 것 입니다. 독일이 장기간의 전쟁으로 황폐화되자 어처구니 없게도 기병이 좀 더 보급에 유리해 진 것이죠.
그러나 상대적으로 태평했던(?) 프랑스는 이런 움직임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1630년대 내내 주요 야전군에서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은 평균 1:10 에서 1:12 사이였다고 하죠.

그러나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30년 전쟁에 개입하자 기병의 부족은 매우 골치아픈 문제가 됐습니다. 1635~36년에 네덜란드와 북부 프랑스에서 전개된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에스파냐군은 보병 12,000과 기병 13,000명으로 구성돼 프랑스군에 비해 기동에서 압도적이었습니다. 특히 에스파냐군에 소속된 크로아티아 기병대는 이해 8월 기습적으로 파리 교외 지역을 휩쓸어 프랑스인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기도 했지요.

프랑스도 이 무렵 기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병 증강을 꾀했으나 예산은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스파냐 군대의 기병들이 프랑스 북부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 이들은 사실상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상대할 프랑스 기병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정부는 황급히 기병연대 편성을 시작하지만 예산도 불충분한데다 숙련된 기병을 짧은 시간안에 긁어 모으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습니다. 결국 궁색한 상황에 몰린 프랑스 정부는 형식상으로 남아있던 봉건 의무를 귀족들에게 부과합니다. 1636년 프랑스는 왕령으로 아직 군에 있지 않은 귀족들에게 40일간 기병으로 복무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런 궁여지책도 효과가 없었던 것이 이미 봉건적인 군사 의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었던 귀족들은 기병으로 거의 쓸모가 없었습니다. 평시에 훈련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아예 국왕의 소집령에 무시로서 대응하는 귀족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프랑스 국왕은 1638년 까지 계속해서 매년 소집령을 내렸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결국은 정부 예산으로 기병을 증강하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이 해에 프랑스는 6개 중대로 편성된 기병연대를 편성하기 시작했고 1641년이 되면 각 야전군 소속의 기병 전력은 5,000~7,000명 수준으로 증강됐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원정군의 경우 보병 10,855명에 대해 기병은 7,261명 이었다고 하지요. 프랑스 군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1650년대에는 40% 수준에 달했습니다.

비록 전장의 주역은 보병이었지만 기동력이 중요해 지면서 기병도 17세기 초반의 찬밥 대접은 벗어나게 됩니다. 물론 다시는 전장의 주역이 되지는 못 했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