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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24일 월요일

스페인 내전당시 공화파 기갑부대의 작전

소련은 스페인 내전에 약 3,000명의 지원병과 항공기 648~806대, 전차 331~362대, 장갑차 60~120대, 야포 1,044~1,186문, 기관총 15,113~20,486정, 소총 414,645~497,813정, 폭탄 110,000발, 수류탄 500,000발, 포탄 3,400,000발, 소화기 탄약 862,000,000발 등을 지원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전이 진행되던 기간 중 상당 부분은 프랑스와의 국경이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화파에 대한 지원에서 소련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기갑장비에 있어서는 소련의 지원이 더욱 절대적이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어중간한 국력의 국가들은 1920년대에 도입한 프랑스제 르노 FT-17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는데 이 점은 스페인도 마찬가지여서 독일의 1호전차, 이탈리아의 CV-33, 그리고 소련의 T-26이 대량으로 지원되기 전 까지는 양군 모두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소련항공기들이 전쟁 초반을 제외하면 독일측에 별다른 인상을 끼치지 못한 것과 달리 전차는 독일이 지원한 1호전차가 시원찮은 물건이었던 덕분에 전쟁 말기까지도 상당한 활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에 대한 군수물자 지원은 НКВД내의 X과(X는 스페인을 의미)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련의 지원은 1936년 가을과 1937년 초에 집중되었습니다. 1937년 하반기 부터는 공화파가 가진 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더 이상의 지원은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자본주의자 같은 반응을 보였다지요.

소련이 지원한 기갑장비와 인력이 스페인으로 처음 보내진 것은 1936년 9월로 여기에는 50대의 T-26과 전차병 51명, 장갑차 30대, 그리고 탄약 및 유류가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10월 12월에 카르타헤나에 도착, 곧 바로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이어서 10월 말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T-26 111대와 전차병 330명을 파견하자고 건의, 승인을 받습니다. 그리고 스페인 주재 소련무관 고레프(Владимир Горев)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은 전차병 양성을 위해 아르헤나(Archena)에 기갑학교를 창설합니다. 이 학교의 교장은 크리보세인(Семён кривошеин) 여단지휘관이 임명되었습니다. 원래 소련 전차병들은 훈련 임무에만 투입될 계획이었지만 마드리드가 압박 받는 상황 때문에 전차병을 양성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습니다. 결국 고레프는 소련 전차병들이 직접 전차를 운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요.(여기에 약간의 스페인 전차병이 합류합니다.)

T-26의 성능은 의심할 나위 없이 1호전차나 CV-33에 비해 월등했지만 보전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다는 점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전차병은 러시아인인데 보병은 스페인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 통할리가 없었겠지요. 소련이 스페인에 파견한 인력 중 통역병이 204명이나 됐지만 이들이 모든 부대와 전차 한대마다 일일이 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런 문제점은 월등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소련제 전차들이 큰 피해를 입는 원인이 되지요.
T-26이 처음 투입된 1936년 10월 27~29일의 세세냐(Sesena) 전투는 이런 문제점을 확실히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는 소련인 노박(А. Новак)이 지휘하는 BA-3 장갑차 6대와 T-26 7대로 편성된 기갑집단과 스페인인으로 구성된 1개 전차소대, 그리고 아르만(Паул Арман)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이 지휘하는 1개 중대 등 3개의 전차부대가 투입되었습니다. 전투 초기에 아르만은 전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공격에 긍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아르만이 지휘하는 15대의 T-26중 세대가 대전차지뢰로 기동불능이 되었고 또 한대의 전차는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세세냐 외곽의 한 마을로 진입해 화염병을 맞고 격파됐습니다.(이게 스페인 내전에서 최초로 화염병에 의해 전차가 격파된 사례라고 합니다.) 아르만의 중대는 마을을 돌파한 뒤 프랑코군의 야포 1개 포대를 유린했습니다. 이때 3대의 CV-33이 반격해 왔지만 1대가 T-26에 의해 격파되고 한대는 T-26에 들이 받혀 전복(!!!)돼 버립니다. 아르만은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격을 계속했지만 두 대가 더 화염병에 의해 격파되고 세대는 야포에 의해 파괴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는 마드리드가 압박받던 상황에서 공화파의 사기를 높이는 데는 성공적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불합격이었습니다. 특히 보전협동이 되지 않으니 전차들이 적 보병을 몰아내고 특정 지점을 점령하더라도 적이 반격을 해 올 경우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프랑코군은 1938년까지 30개 대전차포 중대(중대당 대전차포 6문)를 편성했는데 이것은 1937~1938년 전역에서 공화파의 전차부대를 저지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이와 함께 지상전에 전용된 88mm 대공포도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세세냐 전투 이후 공화파는 전차와 장갑차를 집결시켜 T-26 48대와 BA-3 장갑차 9대로 대대규모의 기갑전력(아랑훼즈Aranjuez 집단)을 만들기는 했지만 실제 운용은 중대 단위로 보병에 분산 배치되는 방식이 계속됐습니다. 당연히 기갑부대의 집중운용에 따른 파괴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랑훼즈 집단은 11월부터 12월에 걸쳐 마드리드를 둘러싼 공방전에 투입됐습니다. 공화파는 전쟁 이전에 편성된 제 1전차연대(FT-17 장비) 대부분을 예하에 두고 있었고 제 1전차연대는 아랑훼즈 집단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전술적 미숙함과 기계 자체의 신뢰성 미달로 전차의 손실은 매우 컸습니다. 1936년에 지원된 전차 중 52대가 1937년 2월까지 상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937년 9월에 이르면 전차 손실은 170대에 달했습니다.(이때 까지 지원된 전차는 T-26 256대) 흔히 생각하는 것 과는 달리 소련전차들의 기계적 신뢰성은 형편없었는데 T-26의 경우 150시간 마다 정비를 받아야 했으며 600시간 뒤에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습니다.(소련전차의 기계적 신뢰성은 T-34 초기 생산분 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질 연료에다 끊임없는 격전으로 전차부대를 후방으로 돌려 정비할 시간이 없었으니 손실은 지속적으로 높아만 갔습니다. 여기다가 보충도 간헐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전차의 집중운용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아르만의 전차중대는 800시간이 넘도록 정비를 받지 못해 살아남은 전차들도 상당수가 고장으로 운용 불능이 됐습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차병 제 2진을 파견합니다. 제 2진은 전차병 및 정비병 200명으로 벨로루시 군관구의 제 4 독립전차여단에서 차출한 병력이었고 지휘관은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 Павлов) 여단지휘관이었습니다. 소련정부는 기존에 파견된 병력을 파블로프의 부대에 합류시켜 기갑여단으로 개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갑여단의 편성은 난항을 겪었습니다. 먼저 전차의 손실을 막기 위해 경험이 부족한 스페인 전차병은 포탑에 배치하고 숙련도가 높은 소련 전차병이 조종수를 맡는 식으로 여단이 편성되었는데 러시아 전차병들이 모두 조종수는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전차의 손실률이 높아 여단은 편제(96대) 미달이었습니다.

새로 편성된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초부터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이 여단은 크리보세인이 지휘하는 1대대와 페트로프(М. П. Петров) 대대지휘관이 지휘하는 2대대로 편성되었는데 신규편성인 2대대의 전투력이 1대대 보다는 양호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전투에 투입될 당시 47대의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11일 마드리드 서쪽에서 제 12인터내셔널 여단과 제 14인터내셔널 여단이 개시한 반격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은 스페인 사람 보다는 말이 잘 통했는지 보전협동이 원활히 이뤄져 이 반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3일간 계속된 이 전투에서는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는데 바로 독일의 37mm 대전차포 Pak 36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격파된 전차 모두가 이 37mm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7mm 대전차포는 독일이 지원한 지상장비 중 가장 효과적인 물건이었습니다.
이어서 전개된 1월 말의 Jarama강 공세는 보전협동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전차포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잘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 투입된 제 1기갑여단의 전차 60대 중 거의 40%가 격파되었고 이 중 상당수는 대전차포에 의한 것 이었습니다.

1937년 3월의 과달라야라(Guadalajara) 전투는 겨울의 전투에 비하면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주로 상대한 이탈리아군은 T-26을 장비한 부대와 수차례 교전을 벌인 뒤 전투를 회피하게 됐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주요 장비가 CV-33이었으니 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3월 18일의 반격에서 이탈리아군은 T-26을 앞세운 공화파군에게 격파당해 패주합니다. 그러나 제 1기갑여단의 손실도 커서 3월 말에는 가동 가능한 T-26이 9대로 줄어듭니다.

그러나 1937년 3월부터 5월에 걸쳐 150대의 T-26이 보충되면서 제 1기갑여단은 129대의 T-26, 43대의 BA-3 장갑차와 30대의 예비전차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1937년 7월부터 시작된 마드리드 구원 공세에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규모 공세에서도 37mm대전차포의 집중운용은 공화파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공세 첫날인 7월 6일 전투에서는 1문의 대전차포가 12대의 T-26을 격파하기도 했다지요. 피해는 급증해서 7월 11일이 되자 여단의 가동 전차대수는 38대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공세에서 주공을 맡은 5군단과 18군단은 막심한 손실을 입은 끝에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결국 7월 18일부터 프랑코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마드리드 구원공세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프랑코군이 대전차포를 대량으로 운용하면서 보전협동은 더욱 어려워 졌습니다. 전차병들은 대전차포가 조준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최고 속도로 움직였는데 보병들은 이것을 도저히 따라잡을 능력이 없었던 것이죠.

1937년 여름에 소련은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차부대를 지원합니다. 바로 BT-5 전차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로 이 연대는 소련이 특별히 고리키 전차학교에서 교육시킨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과 붉은군대 제 5기계화군단 소속의 전차병으로 편성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스페인인 전차병들이 충원되어 이 부대는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인 전차병의 경우 조종훈련은 충분히 받은 편이지만 소대나 중대단위의 훈련은 전혀 받지 못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BT-5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는 1937년 8월부터 진행되고 있던 사라고사 공방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임무는 제 35보병사단의 공격을 지원, 사라고사를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터내셔널 전차연대가 공격 개시 하루 전날인 10월 12일 밤에야 집결지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작전 명령도 도착 직후에야 전달받았다는 점 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연대참모들은 작전지역에 대한 지형 정찰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개시해야 했습니다. BT-5가 고속전차라는 점 때문에 제 35보병사단장은 전차에 보병을 태워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전투 기동간에 전차에 올라탄 보병 중 상당수가 전차에서 굴러떨어져 다른 전차에 깔려 죽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지형도 전차에 불리하기 짝이 없는 관개시설이 된 경작지였습니다. 결국 첫 번째 공격에서는 탄약을 모두 소모할 정도로 교전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라고사에 대한 공격 이후 공화파의 기갑부대는 별다른 보충을 받지 못 한채 지속적으로 감소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1937년까지도 상당수를 차지하던 소련인 전차병들은 전사하거나 본국으로 귀환해 스페인인들이 전차부대의 중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1937년 10월에 공화국 전차부대를 총괄하는 페랄레스(Sanchez Perales) 대령은 그때까지 살아남은 전차부대를 2개 기갑사단으로 개편했습니다. 이 “기갑사단”은 지원부대가 부족해 거의 전차로만 편성된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1938년에 T-26 25대를 보낸 것을 끝으로 전차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에 새로 편성된 기갑사단은 주로 자동차를 개조한 장갑차를 장비하게 됐습니다. 공화파의 기갑전력은 1938년 5월에 전차 176대와 장갑차 285대였는데 이것이 같은 해 12월에는 전차 126대와 장갑차 291대가 됩니다. 장갑차만이 겨우 보충이 가능했던 것 입니다.

공화파군의 기갑사단이 처음으로 전투에 투입된 것은 1937년 12월 15일로 이때 투입된 기갑사단은 T-26을 장비한 2개 전차대대와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잔존병력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이 사단은 작전 개시 당시 104대의 전차를 보유했는데 대부분의 전차가 기계 수명을 훨씬 초과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63대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현지 부대에서 어떻게든 수리를 해서 쓰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1938년 2월 22일까지 전선에서 활동했는데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련은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전차병 351명을 지원했고 이중 53명이 전사했습니다. 소련은 이 전쟁에서 T-26과 BT-5의 성능이 현대적 대전차 병기를 견디기 어렵다고 보고 신형전차를 개발하는데 더 박차를 가했지만 대규모 전차부대의 운용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스페인 내전이 진행되는 기간 중에 대숙청이 함께 진행된 것도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소련의 전차지휘관들은 예상치 못한 실전 결과 때문에 위축되어 교훈을 도출하기 보다는 실패를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발전하던 대규모 기계화부대의 편성과 교리개발이 일시적으로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실전 경험을 반영해 기계화 부대를 개혁해야 할 기계화부대지도국(Авто-бронетанковое управление)이 숙청으로 풍비박산 난 것은 가장 큰 타격이었습니다.

참고자료

Michael Alpert, "The Clash of Spanish Armies: Contrasting Ways of War in Spain, 1936~1939'", War In History, Vol.6. No.3(1999)
Mary Habeck, Storm of Steel: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G. F. Krivosheev, Soviet Casuali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 Hill Books, 1993, 1997)
Stanley G. Payne, The Spanish Civil War, The Soviet Union, And Communism, (Yale University Press, 2004)
Steven J. Zaloga, "Soviet Tank Operation in the Spanish Civil War",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12. No.3(September 1999)

2006년 12월 29일 금요일

돈 없는 군대의 기계화 : 1930년대 이탈리아군의 사례

한국 군대는 한정된 예산으로 챙겨야 할 게 많다 보니 첨단장비를 도입하면서 기존의 재래식 전력도 양호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어려운 문제에 항상 봉착해 있습니다.

이렇게 예산의 제약을 받는 국가가 방대한 재래식 전력을 유지하면서 또 첨단 전력을 확보하려고 고분 분투한 대표적인 사례라면 1920~30년대의 이탈리아가 생각납니다. 한국과 종종 비교되는 국가이기도 하군요.

이탈리아는 1차 대전 이전에도 가난한 국가였지만 1차 대전으로 막대한 채무를 지게 된데다 전쟁으로 별 재미를 못 봤기 때문에 계속 강대국 행세는 하고 있었지만 그것 조차 위태위태 했습니다. 하다못해 겨우 식민지 전쟁 수준인 이디오피아 전쟁조차 약간 과장을 하면 국가총력전에 가까운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디오피아 전쟁으로 1935/6년과 1936/7년 에는 국방비가 크게 증가해 재정 적자가 십억 리라 단위를 돌파했다지요.

이탈리아와 같이 가난한 국가에서는 자원 배분이 매우 신중하게 이뤄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방대한 규모의 재래식 전력, 즉 보병과 기병이 있었고 이들을 유지하는 것도 이탈리아에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1차 대전 당시 전차를 운용해 본 경험이 있긴 했지만 1920년대 동안은 눈에 띄는 기계화부대의 발전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쾌속사단(Divisione Celeri) 이었습니다. 쾌속사단은 기병을 주축으로 편성됐는데 1933년부터 대대급의 전차부대가 배속됐습니다. 사실 기병과 전차를 결합하는 것은 이 당시 가난한 국가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빈약한 경제력과 공업력을 가졌고 많은 수의 보병과 기병부대를 보유한 폴란드나 루마니아가 비슷한 방법을 모색했지요.
스페인 내전에서는 차량화 부대인 리토리오(Littorio) 사단에 전차대대가 배속돼 기갑사단 비스무리하게 운용됐습니다만 임시 편제였으니 제대로 된 기계화부대로 분류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이탈리아 육군이 제대로 된 정규편제의 기계화부대를 가지게 된 것은 1937년이었는데 이것 조차도 여단급 제대에 불과했습니다.
1937년에 편성된 1 기갑여단(Brigata Corazzata)은 1개 Bersaglieri 연대와 3개 기갑대대, 그리고 기타 직할대로 편성됐는데 1937년에 실시한 여러 차례의 기동훈련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937년 말 까지 2 기갑여단이 편성을 완료해 이탈리아는 2개 여단의 독립 기계화부대를 보유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육군의 기계화를 대규모로 실시하기에는 밑천이 부족한 국가였습니다. 1939년에 이탈리아는 총 71,000대의 차량을 생산했지만 이 중 군에서 징발해서 쓸만한 트럭은 12,000대였고 나머지는 일반 승용차였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탈리아의 자동차 공업은 기술적 수준은 높은 편이었으나 규모가 영세하다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습니다. 숙련된 노동력이 부족하니 전시 동원을 하더라도 생산을 늘리기는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참고로, 이탈리아가 1940년 6월부터 1943년 6월까지 생산한 군용 차량은 최저 83,000대에서 최고 120,000대로 추정됩니다. 전시 동원치고는 형편 없군요.)

공업력은 둘째 치고 이미 많은 수의 보병사단이 있었기 때문에 보병사단의 유지와 장비 교체에 들어가는 예산도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나마 기갑여단이 1937년에 창설된 것도 보병사단의 장비 교체에 우선순위가 밀리던 와중에 된 것이라고 하지요.

이탈리아육군이 본격적으로 사단급 기동부대의 편성을 시작한 것은 1939년 부터였습니다.이탈리아 육군도 자국의 공업력과 경제력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갑부대의 확장은 2개 기갑사단과 2개 차량화 보병사단으로 편성된 기갑군단(Corpo d’Armata Corazzata) 정도에서 마무리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기갑사단은 기존의 기갑여단을 근간으로 확대 편성할 계획이었고 차량화 보병사단은 이미 편성된 부대가 있었으니 참 경제적인 계획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기갑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3개 쾌속사단으로 편성된 쾌속군단(Corpo d’Armata Celere)을 편성해 두 개의 군단으로 기동군을 편성한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습니다. 물론 쾌속사단들도 이미 편성돼 있었으니 기갑여단을 기갑사단으로 확장하는 것 말고는 특별히 예산이 소요될 건덕지가 없었습니다.
아아… 슬픈 이탈리아.

새로 편성되는 기갑사단은 4개 기갑대대를 가진 1개 기갑연대, 1개 Bersaglieri 연대, 1개 포병연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기존의 기갑여단들은 기갑전력과 포병전력을 대폭 증강했는데 쓸만한 중형전차나 중전차가 없었기 때문에 기갑사단들도 어딘가 허전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기갑사단은 그냥 편제만 보더라도 여러모로 부실했습니다. 보병이 1개 연대 뿐인데다가 전차들은 아군에게 더 지장을 주는 경전차 뿐이라 전투력이 매우 떨어졌습니다. 편제상 대수는 184대였는데 전차의 성능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실질적인 전투력은 매우 약했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이 상당한 규모의 기갑전력을 육성한 1939년 까지도 이탈리아에서는 중형전차의 개발과 생산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의 결과 기갑장비의 개선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지만 육군은 보병사단과 쾌속사단의 장비 교체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었습니다. 사실 자원이 부족한 국가는 새로운 실험을 하기 보다는 기존에 있는 수단에 자원을 더 배분하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1930년대의 이탈리아 육군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1933년 부터 이미 2,000대가 넘는 CV33계열 전차(?)가 생산돼 있었기 때문에 기계화부대 편성과 전차 개발에 예산을 더 집어 넣을 명분이 마땅치 않기도 했습니다. 물론 두체가 얼마 안있어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걸 알았다면 장군과 관료들의 생각도 조금은 달라 졌겠지요. 그나마 1939년부터 생산에 들어간 M11/39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물건이었고 그 후속작 M13/40도 별로 나을건 없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CV33 계열은 경전차로 분류하기조차 민망한 물건들이었습니다.
이디오피아 전쟁에서는 전설적인 신화까지 만들어 냈는데 바로 이해 12월 15일에 벌어진 Dembeguina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디오피아군은 이탈리아군 보병들을 쓸어 버린 뒤 고립된 CV33들의 궤도를 별다른 장비도 없이 끊어 버린 다음 간단히 불을 질러서 격파하거나 그냥 전차병들을 끌어내 때려 죽였다고 전해집니다. 선회포탑이 없고 방어력과 무장 모두 부실한 CV33은 보병지원이 없으면 말 그대로 철제 관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여러 차례 피박을 본 이디오피아 전쟁의 결과 겨우 이탈리아 육군은 선회 포탑을 가진 중형전차 개발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기 시작합니다만 그 결과 나온 M11/39는 당시 기준으로 봐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습니다.(3호 전차 같은 걸출한 물건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사족 하나, 일부 군사사가들은 이탈리아 육군이 이디오피아 전쟁에서 이디오피아 육군에 대해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라는 걸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경향도 보이더군요.)

사단 포병은 겨우 24문의 75mm포를 가진 2개 대대가 전부였기 때문에 지원 화력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최저 105mm급을 장비한 독일군 기갑사단과 비교하면 화력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현대적인 대공화기나 대전차포도 부족했습니다. 각 기갑사단은 8문의 대전차포와 16문의 대공포를 보유했는데 대전차포의 부족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장교들이 가장 많이 지적한 문제였습니다. 영국은 1940년 1월에 이탈리아 측에 대공포와 대전차포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전했는데 정작 이탈리아는 자국 군대를 장비할 수량도 채우지 못해 헉헉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무솔리니는 이 거래를 굴욕으로 생각하고 사위인 치아노에게 거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지요.

어쨌거나 뭔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기갑사단 창설은 진행됩니다.
가장 먼저 편성된 기갑사단은 132 기갑사단 Ariete로 제 2 기갑여단을 근간으로 1939년 2월 1일에 편성됐습니다. 두 번째 기갑사단은 131 기갑사단 Centauro로 짐작하시다 시피 제 1 기갑여단을 근간으로 같은 해 4월 20일에 편성됐습니다. 이 두개 기갑사단은 알바니아 침공을 위해 황급히 병력과 장비를 보충 받았는데 1939년 전반기 동안 80% 정도의 편제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이 중 Centauro기갑사단은 알바니아 침공에 투입됐는데 알바니아군의 저항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 고장으로 상당한 수의 장비를 잃었다고 합니다. CV33, L3/35는 산악지형에서 종종 기계고장을 일으켜 행군을 방해했다고 하지요.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귀환한 Littorio사단이 정식 기갑사단으로 승격돼 133 기갑사단 Littorio 가 됐습니다.

두체가 호기롭게 영국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이탈리아군의 기갑사단 중 그나마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것은 132, 133 두개 사단이었습니다. 그러나 133 기갑사단은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투입된 뒤 1941년 말이 돼서야 장비교체를 완료했고 1942년 1월에야 주 전장인 북아프리카로 파견됩니다.
나머지 하나인 131 기갑사단은 1940년 10-11월의 그리스 침공에서 그리스군에게 큰 손실을 입어 12월에는 예비대로 돌려져 재 편성에 들어갔습니다. 이 사단은 1941년 1월 다시 전투에 투입됐고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는 133 기갑사단 Littorio 와 함께 그럭저럭 훌륭하게 작전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마친 뒤 장비교체를 위해 1941년 3월부터 재편에 들어가게 되는데 북아프리카의 전투로 전차 소모가 급증한 결과 장비 보충이 더뎌 1942년이 돼서야 재편성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원래 기갑사단에 배속돼 있던 4개 기갑대대가 이집트 침공을 위해 리비아로 파견되는 바람에 기갑사단들의 편성은 더욱 더 곤란에 빠졌습니다.

결국 실제로 영국과의 전쟁이 개시될 당시 이탈리아군이 투입할 수 있었던 기갑사단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132 기갑사단 Ariete는 1941년 1월, 영국군의 반격으로 먼저 파견된 1, 2, 3, 5 기갑대대가 박살 난 뒤에야 리비아에 도착했습니다.

이탈리아의 기갑부대 창설은 국가의 빈약한 경제력과 공업력, 낙후된 기술수준이 결합돼 처음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열강 행세는 하고 있었지만 고작 여단급 전력에 불과한 기갑사단 3개를 편성하고도 자원이 부족해 허덕였으니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일선의 이탈리아군 병사들은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밑천이 달랑달랑하니 무솔리니가 꿈꾼 기적을 이룰 방법이 없었습니다.

참고서적
Brian R. Sullivan, The Impatient Cat : Assessments of Military Power in Fascist Italy, 1936-1940, Calculations : Net Assessment and the Coming of WW II
Gerhardt Schreiber, Die politische und militaerische Entwicklung im Mittelmeerraum 1940/41, DRZW band 3
Ian W. Walker, Iron Hulls, Iron Hearts : Mussolini’s Elite Armoured Divisions in North Africa
Vera Zamagni, Italy : How to lose the war and win the peace, The Economics of World War 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