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12일 목요일

어떤 영국 장군의 대인관계에 대한 이야기 : Hubert Gough의 사례

뭐랄까, 게으른 데다가 이런 저런 일들의 압박으로 글을 제대로 못 쓰고 있습니다. 결국 또 번역입니다. 고프라는 대인관계가 불량한 장군의 이야기이긴 한데 영국 육군 장교단의 골치였던 파벌 문제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프와 동료 장교들간의 관계(Relations with Fellow Officers)

1차 대전 이전의 영국 장교단은 매우 소규모 집단이었고 몇 개의 파벌(cliques)로 나뉘어 있었다.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했을 때 고프(Hubert Gough)는 이미 나중에 그와 함께 서부전선의 고급 지휘관이 될 장교들과 (좋건 나쁘건 간에)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프가 참모대학에서 교관으로 있을 때 참모대학장은 훗날 제 4군 사령관이 되는 헨리 롤린슨(Henry Rawlinson) 소장이었다. 고프의 동료 교관으로는 전쟁 당시 군단장을 역임한 헤이킹(Richard Haking)과 두케인(John du Cane), 그리고 고프의 바로 전에 제 7사단장을 지낸 ‘토미’ 캐퍼(Capper)가 있었다. 이 외에는 나중에 고프의 참모장이 된 키젤(Launcelot Kiggel)이 있었다. 고프는 말년에 키젤에 대해서 별다른 이유 없이 “약해 빠지고 우유부단”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참모대학의 학생으로는 고프의 동생 조니(Johnnie Gough)가 있었다.
1914년의 커래이(Curragh) 사건은 육군을 분열시켜 놓았다. 커래이 캠프에 주둔하고 있던 제 3기병여단 소속을 포함해서 더블린에 있던 대부분의 장교들은 얼스터의 신교도들과 충돌할 것을 우려해서 직위에서 물러나라는 압력을 받았다. 여기에 강력히 저항한 장교들 중에는 고프 형제가 있었다. 뒤에 영국육군 총사령관(Chief of the Imperial General Staff)을 지낸 ‘울리’ 로버트슨(William Robertson)이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와 반대되는 입장에 선 장교로는 프렌치(Sir John French)원수, 제 4경기병 연대(4th Hussar)의 하웰(Phillip Howell) 중령이 있었다. 고프는 1915년 말 프렌치 원수가 영국원정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자 “건방지고 보잘 것 없는 바보(an ignorant little fool)”라고 조롱하며 즐거워 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고프 형제와 절교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윌슨(Henry Wilson)이 있었다. 윌슨은 커래이 사건에서 약간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윌슨은 1916년 10월 제 4군단장으로 임명돼 당시 예비야전군을 지휘하고 있던 고프의 명령을 받게 됐다. 비록 윌슨은 특별히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지만 고프는 약간은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윌슨의 지휘 능력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고프는 전쟁이 끝난 뒤 그가 제 3차 이프르 전투의 책임 문제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희생양이 된 것은 모두 윌슨이 뒤에서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고프는 윌슨에 대한 적대감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고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 장(chapter)를 할애해 윌슨을 비난했고 1963년 사망하기 직전에 출연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는 윌슨에 대해 이렇게 빈정거렸다.

“(한때) 윌슨이 내 지휘하에 들어온 일이 있었지. 그는 나를 철저히 기만했어. 뭔가 쓸만한 일이라고는 하지 않았고. 그리고 자신의 집무실서 자신과 친한 높은 신분의 여자들에게 편지만 쓰고 앉아 있었지.”

영국 육군이 배출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치군인”이었던 윌슨과 비교하면 고프의 정치적 능력은 보잘 것 없었다. 1918년 3월, 윌슨은 육군 총사령관으로 진급해서 고프에게 받은 빚을 갚아줬다.

나중에 야전군 사령관이 된 고프, 바잉(Julian Byng), 버드우드(Willian Birdwood)는 1900년의 보어전쟁에서 같이 복무했다. 이 무렵 고프는 자신의 일기에 바잉에 대해 혹평을 늘어놓았다. 훗날 바잉의 전기 작가는 고프는 괴상하고 의심많은 성격 때문에 친밀한 친구를 가지기 어려웠다고 평가했다. 확실히, 고프의 바잉에 대한 질투는 1차 대전이 끝난 뒤에 그의 언행을 통해 잘 드러난다. 고프는 바잉의 능력은 (1915년부터 1917년 까지 캐나다 군단을 지휘했을 때를 지적하며) “식민지 친구들과 죽이 잘 맞는 것이었을 뿐이며 그 친구는 군사 지식이 빈곤한데다 뇌를 가졌는지 의심스러웠다”고 혹평했다. 그리고 1918년 독일의 춘계 대공세에서 바잉이 후퇴한 것에 대해서는 “병신같이 무능했다”고 비난했다. 1916년에 바잉의 캐나다 군단은 고프의 지휘하에 들어왔고 두 사람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바잉이 고프의 말대로 뇌가 있건 없건간에 1917년 4월 바잉이 지휘한 비미 계곡 전투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1918년 춘계공세에서의 퇴각 역시 바잉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은 지휘였다. 전쟁이 끝난 뒤 바잉이 명예와 부를 얻고 마침내 1920년에 캐나다 총독으로 임명되자 고프는 이것을 아주 신경 썼으며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고프는 나중에 야전군을 지휘하게 된 기병장교 “황소” 알렌비(Edmund Allenby)와는 어정쩡한 관계였다. 고프와 알렌비는 부하들을 극도로 긴장시키는 공통점이 있었다. 본(John Bourne)은 두 장군에 대해서 “지나치게 요구하는 것이 많은 폭군”이었다고 평했다. 고프는 1차대전 이전에 알렌비의 휘하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고프는 알렌비의 성격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한 반면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고프는 서부전선에 복무하던 당시 알렌비는 “특별한 이유없이 융통성 없는 명령만 남발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알렌비의 성격에 대해서는 “매우 공정했고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부하들에게도 나쁘게 대하지는 않았다”고 평했다. 최소한 알렌비는 1차 대전당시의 기병병과 출신 장군들 중에서는 가장 평이 좋은 편이었다. 고프는 또 다른 기병출신 장군인 체트워드(Philip Chetwode)에 대해서는 “게을러 터졌으며 얼간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고프는 보어전쟁에서 자신의 상관이었던 던도날드(Dundonald)에 대해서도 비난했다. 앵글시(Anglesey)는 고프의 이런 태도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고프가 인정했듯이 그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진급한 것이 (대인관계에) 가장 큰 원인이 됐다. 고프는 46세에 야전군 사령관이 됐는데 롤린슨이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은 53세였다. 군단장으로 복무할 당시 고프는 키치너가 하는 말 때문에 자신이 부하들의 비웃음 거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시시콜콜하게 간섭하는 고프의 지휘스타일은 고프가 자신과 동기이거나 더 선배인 장교들을 다루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졌다고 보고 있다. 이야기를 좀 더 공정하게 하기 위해 한 초급장교의 경험을 소개하겠다. 그 장교는 서부전선에서 고프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을 때 고프의 태도가 매우 정중했기 때문에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고 한다. 비록 전쟁 뒤에 고프가 한 발언들은 그가 1918년에 지휘관 직위에서 면직된 것 때문에 느낀 실망감과 분노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고프는 그다지 훌륭한 지휘관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Gary Sheffield, An army commander on the Somme : Hubert Gough; Command and Control on the Western Front : The british army’s experience 1914-18, Spellmount, 2004, pp74-76

역시 어디건 간에 인간 관계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