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대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건을 고르는 것은 꽤 위험한 행위 입니다. 유명한 만큼 기존에 명성을 날리는 수많은 저작들이 있고 또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경쟁자들이 즐비하니 만큼 상당한 수준이 아닌 이상 쉽게 주목 받지 못하고 묻힐 가능성이 많지요. 이런 점은 군사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일 것 입니다. 2차대전사에 있어서 노르망디 전역이나 벌지 전투를 다루는 서적은 무수히 많지만 흥미를 유발하고 독창적인 책은 상대적으로 적고 종이나 낭비하는 지루하고 개성 없는 저작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차 대전에 있어서 위에서 언급한 것과 유사한 경우를 들라면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솜(Somme) 전투일 것 입니다. 이 전투는 영국군 수뇌부의 어리석은 지휘로 인한 가공할 규모의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전차가 최초로 실전 투입된 전투로도, 그리고 이후 수개월간 이어진 처절한 격전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만큼 이 전투에 대해서는 영어권과 독일어권에서 많은 저작이 쏟아져 나왔으며 요즘도 꾸준히 관련 서적들이 새로 출간되거나 재발간 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평이한 서술방식으로는 주목을 받기가 어려운 분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87년에 처음 발간 된 이 책, The Battle of the Somme : A Topographical History는 꽤 재미있는 방식으로 솜 전투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제가 가지고 있는 2000년 판을 기준으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자가 연대기순의 평이한 기술을 피하고 대신 전투가 벌어진 각 지역을 단위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미리 결론을 내리자면 저자인 Gerald Gliddon의 접근 방식은 상당히 좋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첫 발간 당시의 서평은 많이 읽어 보지 못 했지만 저자가 취하고 있는 참신한 접근 방식은 꽤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저작은 솜 전투에 대해 개괄 이상의 지식을 갖춘 사람에게는 꽤 유용한 참고 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책의 서술은 전투가 벌어진 공간 위주로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Hamel 항목을 보면 Hamel이라는 지역에 대해 지리적인 개괄을 한 뒤 이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를 연대기 순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공간 중심적인 서술 방식 때문에 비교적 많은 양의 지도가 포함되어 있는 점도 좋습니다. 또 책의 뒷 부분에는 솜 전투의 경과를 시기별로 요약해 놓았는데 이것도 꽤 유용합니다. 매일의 기상상태와 온도가 적혀 있어 좋은 자료가 됩니다. 부록으로는 영국군과 독일군의 전투서열이 실려 있는데 평범하지만 정리가 잘 돼서 나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점은 반대로 단점이기도 합니다. 공간 위주의 서술을 하다 보니 내용을 지명의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가 없습니다. 솜 전투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읽는 다면 내용 정리가 제대로 되기 어렵지요. 즉 솜 전투에 대한 개설서로는 부적합 하다고 하겠습니다.
또 서술이 철저히 영국군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점도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저자는 각각의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영국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잘 설명해 놓았지만 독일 측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장점이 많은 책이라 1차대전 사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한번 읽어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