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13일 월요일

목수정과 일부 진보신당 당원의 주장은 왜 불편하게 들리는가

목수정 사태(?!)가 예상외로 장기화 되고 있습니다. 그 발단은 3월 23일에 진보신당 당원인 목수정이 ‘레디앙’에 올린 정명훈에 대한 비난 기사였으니 이미 20일 째로군요. 이번 사태가 장기화 된 데에는 진보신당 당원이나 진보성향의 블로거들이 꾸준히 목수정의 변론에 나선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국립오페라합창단’이 아닌 ‘목수정에 대한 변론’이 이 정도로 질질 끌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참 신기한 일 입니다.

이번 사태는 정명훈의 공식적인 반론이 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목수정의 3월 23일 기사만을 가지고 이야기 해야 합니다. 앞으로도 정명훈이 반론을 제기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판단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은 목수정의 ‘지극히 주관적인’ 기사 뿐이고 그에 대해 판단할 제 3자들은 그 ‘지극히 주관적인 기사’에서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 만을 뽑아내어 판단해야 할 것 입니다.

목수정의 3월 23일 기사에서 알아낼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은 이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1. 2009년 3월 20일, 목수정은 국립오페라합창단원들의 복직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기 위해서 정명훈을 만났다.

2. 정명훈은 목수정의 요청을 거부했다.

목수정의 기사에는 정명훈이 엄청난 폭언과 모욕을 가한 것 처럼 되어 있으나 목수정의 일방적인 주장 뿐이니 그대로 믿긴 어렵습니다. 목수정에 대한 일부 변론자들은 ‘정명훈의 폭언’을 언급하면서 목수정의 과격한 반응을 옹호하고 있는데 목수정의 일방적인 주장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제3자를 납득시키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A가 한 말이 B를 통해 어떻게 왜곡되어 전달되는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목수정의 주장을 교차검증 할 방법이 없는 이상 목수정의 기사에 나타난 ‘정명훈의 폭언’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조금 더 합리적일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수정의 기사’에 실린 정명훈에 대한 내용만을 가지고 목수정의 행동을 변호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진보신당 내부에서 목수정을 옹호하는 당원들을 결집시키기에는 충분한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진보신당이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고 말 그대로 서민을 위한 대중정당을 지향한다면 이런 자폐적인 태도는 버리는 것이 좋을 것 입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사태 전개를 봐서는 목수정을 옹호하는 진보신당 지지자들이 그럴 생각이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대략 20일 동안 사태의 전개를 지켜본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평가한다면 목수정과 진보신당 지지자들은 대중의 지지를 잃고 거부감만 일으킨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국립오페라합창단원들의 복직 문제는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으니 원래 목수정이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목수정과 그를 변호하는 진보신당 지지자들이 국립오페라합창단원들의 복직을 지원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목수정은 기사 하나를 정명훈에 대한 비난에 할애했기 때문에 정작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던 국립오페라합창단원의 복직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애초에 좋은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들의 행동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은 다른 문제겠지요. 왜 온라인 진보들의 대중을 향한 외침은 정작 그 대상인 대중들에게 불편하게 들릴까요?

목수정 사태를 계기로 많은 분들이 그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capcold님의 경우 이것을 ‘지사정신’이라는 단어로 설명하셨고 sonnet님은 ‘길거리 전도에 나선 종교인’의 예를 들어 설명하셨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sonnet님의 종교인에 대한 비유가 흥미롭습니다.

재미있게도 목수정을 변론하는 블로거들은 약자의 ‘연대’를 강조하면서 목수정의 글을 비판하는 제 3자도 언젠가는 ‘자본’의 희생양이 되어 ‘연대’를 필요로 하는 약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동시에 지금 ‘연대’ 하지 않으면 훗날 누가 당신을 위해 ‘연대’에 참여하겠느냐는 위협으로 들립니다. 이것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지옥의 유황불’ 이야기를 하면서 신앙을 강요하는 길거리 전도사의 태도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상대가 바보라면 모를까, 공공연히 ‘공포’를 조장하는데 누가 기분 좋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목수정의 태도도 매우 우려 스럽습니다. 인터넷 언론의 ‘기사’라는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목수정의 기사는 정명훈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길거리 전도사가 자신의 신앙을 거부하는 다른 종교 신도를 저주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목수정의 글을 읽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할 것 입니다. 훗날 ‘연대’를 필요로 하게 될 사람도 있겠지만 ‘연대’의 필요성이 거의 없는 사회적 강자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런 불특정 다수를 향해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방법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연대’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사람이라도 대놓고 협박하면 듣기 싫을 것이고 ‘연대’가 필요 없는 사람은 속으로 비웃겠지요.

현재의 진보신당 지지자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소통방식이 필요합니다. 진보신당 내부의 논리는 진보신당 내부에서나 통할 뿐 입니다.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싶다면 진보신당 외부의 제 3자도 동의할 수 있는 논리와 소통방법을 강구해야 겠지요. 목수정에 대한 비판에 대해 비판자들이 잘못됐다는 방식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왜 비판자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목수정과 그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좁은 의미의 ‘사회적 연대’를 목표로 하는 것 이라면 그들의 전술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넓은 ‘사회적 연대’를 필요로 한다면 자신들만의 소통방식이 아닌 조금 더 광범위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소통방식을 강구해야 할 것 입니다. 길거리 전도사들이 1년 365일 지옥의 공포를 조장하며 돌아다니고 있지만 왜 호응이 낮은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활동이라고 별 다를거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