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5일 월요일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휴같지 않은 연휴는 잘들 지내셨습니까?

얼마전 이야기 했듯 그동안 남발한 공수표를 조금씩 수습해 볼까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유명한 '슐리펜 계획(Schlieffenplan)'에 대한 한 논쟁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 논쟁은 10년간 계속되면서 매우 재미있는 단행본과 논문들을 생산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간략하게 이 논쟁의 진행상황과 그 부산물(?)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논쟁의 시작

1999년 War in History 6권 3호에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의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습니다. 주버의 이 논문은 매우 논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다른 학술지에서 거부를 당하고 있었는데 War In History의 공동편집자였던 군사사가 휴 스트라찬(Hew Starchan)은 War in History에 이 논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주버의 이 논문은 매우 엄청난 주장을 담고 있었는데 한마디로 '슐리펜 계획'이란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 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오 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슐리펜 계획은 독일군 총참모부 출신의 군인들이 1차대전 직후 군부에 쏟아진 패전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공간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유명한 군사사가이자 군사평론가였던 한스 델브뤽(Hans Delbrück)은 전쟁 기간 중 독일군 총참모부의 전쟁지휘에 대해 비판을 가했고 군부에서는 이러한 민간의 비판에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전쟁후 1차대전 중의 군문서는 기밀로 분류되어 제한적인 장교들만이 접할 수 있었으며 헤르만 폰 쿨(Hermann von Kuhl), 볼프강 푀르스터(Wolfgang Foerster)등 이 문서를 접할 수 있었던 소수의 장교들은 독일군부의 책임을 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슐리펜이 훌륭한 전쟁계획을 남겼으나 후임자인 몰트케가 이를 올바르게 실행하지 못해 전쟁에 승리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초반에 이에 대한 일련의 논쟁이 있었으나 원사료에 접근할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되었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이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작전계획이었다는 점은 정설로 굳어졌다. 이후 1990년대 까지 원사료를 활용한 연구는 1950년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독일 노획문서에서 슐리펜의 (실제로는 1906년 1월 경 작성한 된) 1905년 비망록(Denkschrift)을 발굴한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의 연구가 사실상 유일한 것이었으나 리터 또한 슐리펜 계획이 실제 전쟁계획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이후 1990년대까지 대부분의 연구들은 1920년대에 확립된 시각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된 뒤 냉전기간 동안 기밀로 묶여있던 공산권의 자료들이 대량으로 공개되었다. 경제사가이며 군인이었던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이 1930년대 후반에 작성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연구는 슐리펜이 총참모장 재직기간 중 작성한 작전계획에 대한 여러 비망록을 보여주고 있다. 슐리펜이 1890년대 후반 부터 퇴임 직전까지 작성한 비망록을 분석하면 슐리펜은 다양한 전쟁계획을 검토했으며 서부에 대한 공세 외에도 동부에 대한 공세도 진지하게 검토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또한 1904년에 총참모부가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상정하고 실시한 두차례의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n)은 주공을 우익에 두고있지 않다. 그리고 이 참모부연습에는 실제 편성된 부대 뿐 아니라 편성되지 않은 가상의 부대도 포함되어 있다. 슐리펜이 1905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은 우익에 주력을 집중하는 등 흔히 알려진 '슐리펜 계획'과 비슷한 병력배치를 하고 있지만 프랑스군의 주력이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공세를 개시할 경우 우익에 배치된 병력을 차출해 프랑스군의 좌익을 공격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슐리펜 계획'과 다르다. 결정적으로 슐리펜은 1905년 겨울에 있었던 그의 마지막 참모부연습에서는 '전략방어'를 취했다. 슐리펜이 실시한 여러차례의 참모부연습 중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것은 없다. '슐리펜 계획'이 실제 전쟁계획이었다면 이 계획에 입각한 훈련이 실시되었어야 하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1905년 비망록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부대들 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작전계획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늘날 '슐리펜 계획'으로 알려진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단지 그가 구상한 여러 '참모부연습' 중 하나일 뿐이다. 슐리펜이 사망하기 직전인 1912년에 작성한 비망록은 '슐리펜 계획'의 연장선 상에 있는 자료로 인용되었으나 이 비망록은 슐리펜이 현역 시절 실시했던 여러 참모부연습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으로 실제 결전은 벨기에에서 벌어질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또한 슐리펜의 후임인 소(小) 몰트케가 '슐리펜 계획'을 전쟁계획으로 넘겨받았다면 그가 재임하던 시기에 이 계획, 즉 1905년 비망록에 따라 훈련을 실시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몰트케는 1906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에서 프랑스군이 공세에 나설 경우 슐리펜이 1904년 훈련에서 제안한 바 있었던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 대신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했던 대로 메츠(Metz)를 통한 반격을 실시하고 있다. 몰트케가 실시한 1908년의 참모부연습도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을 개시할 경우 반격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이것은 프랑스가 방어를 취하고 독일이 전략적인 공세로 나선다는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과는 다른 것이다.

주버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슐리펜과 소 몰트케는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을 감행할 경우 반격으로 이것을 격파하고 프랑스 영내로 침공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즉 '슐리펜 계획'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There never was a 'Schlieffen Plan')


홈즈의 반론과 주버의 재반론

이렇게 주버가 새로운 자료에 근거한 '거대한 떡밥'을 던지자 이 바닥에서 침 좀 뱉는다는 인물들이 논쟁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웨 일즈 대학의 테렌스 홈즈(Terence M. Holmes)는 같은 학술지의 2001년 8권 2호에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라는 논문을 기고합니다. 홈즈의 반박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주버의 논문은 '슐리펜 계획'인 1905년 비망록을 슐리펜의 다른 비망록, 또는 참모부연습과는 매우 다른 돌출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주버는 당시의 전략적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먼저 러일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의 군사적 취약성이 명백해 졌으며 이것은 슐리펜이 서부 전선에 주력을 집중하도록 하는데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한데 주버는 이 사실을 축소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의 공세적 작전계획인 12호 계획은 러시아와의 양면 공세를 염두에 둔 것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동원이 완료되기 전에는 실시될 수 없었으며 슐리펜은 이 점을 명백히 간파하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한 것 또한 프랑스군의 공세를 분쇄하더라도 단순히 반격을 통해 독일-프랑스 국경을 돌파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 점은 슐리펜이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강조한 바 있다. 파리 서쪽으로의 대규모 우회기동은 프랑스군 주력을 조기에 격파하지 못하고 이들이 국경지대의 요새로 퇴각해 방어로 전환할 경우, 즉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계획이었다. 주버가 강조한 것과는 반대로 슐리펜은 국경지대의 전투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았다.
'슐리펜 계획'인 1906년 1월의 비망록이 작성된 배경은 슐리펜이 여러 차례의 도상 훈련과 정보를 종합해 국경지대를 통한 반격으로는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인식했다는 데 있다. 슐리펜은 여러차례의 참모부연습을 통해 프랑스군의 주력을 조기에 격파하지 못하고 단계적인 철수를 허용하게 된다면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의 우회기동을 실시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슐리펜이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그가 은퇴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계획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반영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주버는 1904년 참모부연습이 주력을 우익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잘못된 것이다. 1904년 참모부연습은 주력을 우익에 집중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1905년의 참모부연습은 주버의 주장과는 달리 '슐리펜 계획'의 요소들이 잘 나타나고 있다. 1905년 참모부연습의 핵심은 '프랑스군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건 우익의 주력으로 공세를 강행하는 것' 이었다. 슐리펜은 1904년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을 통해 슐리펜 계획이 될 1905년 비망록을 완성한 것이다. 슐리펜 계획의 핵심은 주력을 우익에 집중해 최단시일내에 프랑스군의 주력을 격파하는데 있었으며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은 프랑스군이 방어를 취하며 단계적 후퇴를 실시하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는 방안이었다. 또한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은 당시 존재하지 않던 부대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작전계획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은 슐리펜이 그 계획을 1906년에 즉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군이 충분히 증강될 장래를 예승하고 작성했기 때문으로 해석해야 한다.
주버는 소 몰트케가 초기에 1905년의 비망록에 따른 훈련 대신 1905년 참모부연습을 답습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슐리펜 계획'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으나 소 몰트케가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은 초기에는 그가 벨기에를 통한 대규모 우회 기동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1911년에 이르면 소 몰트케도 1905년의 비망록을 다시 검토한 끝에 슐리펜의 계획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또한 프랑스가 공세적인 계획을 강화함으로써 슐리펜이 우려한 것 처럼 프랑스군이 단계적 철수를 통한 방어를 취할 가능성도 줄어들었다.
주버의 오류는 '슐리펜 계획'의 핵심이 대규모 우회기동으로 파리를 포위하는데 있다고 인식한 데 있다. 파리를 포위하는 것은 프랑스군이 단계적 철수에 성공하는 최악의 경우에 대한 방안이었으며 슐리펜 계획의 고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주버는 이러한 오류 때문에 슐리펜이 실시한 참모부연습과 그가 작성한 비망록을 잘못 해석할 수 밖에 없었다.

주버는 홈즈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War in History 2001년 8권 4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라는 제목의 반박문을 투고합니다. 이 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홈즈는 슐리펜 계획이란 실재로 존재했으나 그 핵심은 어디까지나 우익을 강화하여 파리-베르덩을 잇는 중간선에서 프랑스군의 주력을 포위섬멸하는 것이었으며 파리를 서쪽에서 우회포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대안에 불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슐리펜 계획에 대한 기존의 주장은 슐리펜 계획의 핵심이 강화한 우익으로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1905년 비망록에서 당시 존재하지 않고 있던 부대들을 포함시킨 것은 슐리펜이 앞으로 진행될 독일군의 증강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전쟁 계획은 그 시점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바탕으로 작성되는 것이다. 또한 홈즈는 무리하게 1904년의 참모부연습과 '슐리펜 계획'을 연결하고 있다. 1904년의 참모부연습은 '슐리펜 계획'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홈즈는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군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건 우익의 주력으로 공세를 강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1938년 독일군 장성이었든 폰 죌너(von Zoellner)가 썼던 글의 논지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홈즈는 죌너의 주장에 따라 1905년 참모부연습이 슐리펜 계획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1905년 참모부연습은 주력을 로렌 지방으로 침입한 프랑스군에 돌리고 있다. 그리고 홈즈는 슐리펜의 전략 구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빌헬름 디크만의 연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홈즈에 따르면 소 몰트케는 1911년 경에는 슐리펜 계획을 재검토하고 수용했다고 하지만 이 시점에서도 독일군의 병력은 슐리펜 계획에 명시된 것에는 한참 미치지 못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몰트케는 1914년에 슐리펜 계획을 실행한 것이 아니다. 독일군 제1군의 임무는 독일군의 우익인 세느강 하구를 방어하는 것이었지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후 1904~05년의 참모부연습과 1905년 비망록 등 핵심적인 사료에 대한 해석을 두고 주버와 홈즈간에 논쟁이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이부분은 위에서 진행된 논의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니 '생략'할까 합니다.

한편,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박사학위를 취득한 주버는 자신의 주장을 더 강화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하게 됩니다.


주버의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과 German War Planning

주 버가 2002년에 낸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은 기본적으로 1999년에 발표한 논문의 내용을 더 추가한 것으로 기본적인 골격은 동일한 것 입니다. 중간에 있었던 홈즈와의 논쟁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보충하기 위해 내용이 풍부해졌습니다.

먼저 1장에서는 1차대전 직후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999년의 논문의 내용을 확대한 것으로 1920~30년대의 여러 논쟁들과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이 역사적 사실로 확립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2장과 3장은 슐리펜의 전쟁계획들이 성립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 대 몰트케의 전쟁 계획들과 1880년대 후반의 군사적 상황의 변화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습니다. 1999년의 논문에는 없었던 새로 작성된 부분입니다. 2장에서는 대 몰트케가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양면 전쟁에 대비해 러시아에 주력을 집중하는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버에 따르면 대 몰트케는 1870년대 후반까지는 서부전선에 주력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으나 프랑스가 독일과의 국경지대 요새선을 강화하고 또 러시아의 군사적 취약성이 드러나면서 계획을 수정해 동부전선에 주력하는 계획으로 전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 몰트케의 재임 말기에는 러시아에 대한 신속한 승리도 어렵다는 점이 명백해 졌기 때문에 동부전선에 주력하는 계획이 포기되었다고 합니다. 3장에서는 1880년대 국경지대의 요새와 기술의 발전으로 포병의 파괴력이 강화되는 등 대 몰트케가 다시금 서부전선으로 관심을 돌리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4장은 1999년 논문의 핵심으로 슐리펜이 취임 이후 실시한 참모부연습과 그가 작성한 작전계획을 분석하고 있으며 1905년 비망록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5 장은 소 몰트케 시기의 참모부연습과 작전계획, 그리고 1차대전 초기의 작전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홈즈와의 논쟁에서 지적된 부분을 강화하고 있으며 특히 홈즈의 주장에서 소 몰트케가 슐리펜의 계획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1911년 부터 1914년 까지 프랑스, 러시아의 전쟁계획과 이에 대한 독일군의 정보, 그리고 이것이 이 시기 전쟁계획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1999년의 논문에서 다소 미흡했던 부분이 1차대전 직전 소 몰트케의 작전 계획이 어떻게 수립되어 실행되었는가 였는데 단행본에서는 그점이 보충되었습니다. 주버는 현존하는 1차대전 초기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각 야전군 사령부 작전 명령서를 분석하여 독일 제 1군의 임무는 프랑스군에게 결정타를 날릴 주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일군의 우익을 방어하는 것이었으며 제 2군이 소 몰트케의 1914년 작전계획의 주공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국경지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프랑스 영내로 깊숙히 진격한 것은 '슐리펜 계획'의 실행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경 지대 전투에서 획득한 전과를 확대하기 위해서 프랑스군이 회복되기 전 까지 프랑스 영토를 최대한 점령하려는 의도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서는 기존의 논의를 강화하면서 논문 분량의 제한으로 설명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다루고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1999년의 논문은 '슐리펜 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1914년에 실행된 작전은 도데체 뭐란 말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는데 단행본에서는 그 점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다시 2004년에 German War Planning, 1890~1914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합니다. 이 자료집은 슐리펜이 총참모장에 취임한 다음 부터 1차대전에 발발하는 1914년, 그리고 1차대전 직후 슐리펜의 작전 계획에 대해 전개된 논쟁에 대한 사료를 영어로 번역해 싣고 있으며 각 사료 마다 주버의 간략한 해제가 달려있습니다.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서 언급한 대 몰트케 시기의 작전 계획은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기본적으로 논쟁의 핵심에 대한 자료를 소개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기존 주장들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모범적인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계속되는 논쟁

한편, 이 논쟁은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참여로 근 10여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주 버와 홈즈의 논쟁이 진행되던 와중인 2003년, 역시 1차대전 연구자인 로버트 폴리(Robert T. Foley)가 War in History 10권 2호에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이라는 논문을 기고해 홈즈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논쟁에 참여했으며 2005년에는 아니카 몸바우어(Annika Mombauer)가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Of War Plans and War Guilt: The Debate Surrounding the Schlieffen Plan"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 몸바우어의 논문은 제가 아직 읽어보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에는 게르하르트 그로스(Gerhard P. Groß)가 War in History 15권 4호에 "There Was a Schlieffen Plan: New Sources on the History of German Military Planning"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투고했습니다. 그로스는 주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의 작전계획에 대해서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연구와 해석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반면 독일군 총참모부의 기동계획(Aufmarschpläne)은 검토하지 않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주버는 슐리펜의 1898년 비망록에서 슐리펜은 프랑스군의 선제공격에 대응해 반격을 가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반격을 가하는 것은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동원 완료 이전에 선제공격에 나설 경우에 취할 방안이었으며 이 비망록에서는 두번째 방안으로 독일군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거쳐 공세에 나설 것을 제안하고 있다. 슐리펜의 구상에서 적의 선제공격에 대해 반격에 나서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일군이 적에 비해 숫적으로 열세에 처하는 경우에 한하는 것 이었다. 주버는 1905년의 참모부연습을 슐리펜이 선제공격에 대응한 반격개념을 확립한 것으로 해석했으나 이 참모부연습은 단순히 슐리펜이 참모장교들의 교육을 위해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 실시한 것에 불과하다. 주버는 참모부연습의 성격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
또한 주버는 슐리펜이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으로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기동을 연구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슐리펜은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벨기에를 돌파해 루앙 부근에서 세느강을 도하,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기동을 실시한 바 있다. 주버는 이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주버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대해서 실제 작전계획이라기 보다는 독일 육군의 증강과 동원태세 강화를 위한 계획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슐리펜은 재임 기간 중 육군의 증강에 과도할 정도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무렵에는 전쟁부의 축소된 방안을 수용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주버의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주버는 1905년 비망록에 제시된 병력에는 당시 존재하지 않던 사단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실제 작전계획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슐리펜은 여러 훈련에서 실제 편성되지 않은 부대들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것은 당시 총참모부의 장교들도 쉽게 납득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 서류상의 사단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실제 작전계획은 될 수 없다는 해석은 무리가 있다.
그 리고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의 작전계획은 슐리펜의 다른 작전계획이나 훈련과 동떨어진 존재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설득력이 낮다. 슐리펜의 기동계획, 참모부연습, 전쟁연습 등을 검토하면 슐리펜은 비록 위험하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항상 포위기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슐리펜은 이미 1897년의 비망록에서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새를 돌파하는 것을 포기하고 베르덩 북쪽으로의 우회기동을 진지하게 고려했으며 이 비망록은 벨기에-룩셈부르크 국경의 열악한 교통망 때문에 벨기에 전체를 침공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초기의 우회 기동은 프랑스군을 국경지대에서 포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으나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약체화 되어 프랑스군의 선제공격 가능성이 감소하자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벨기에를 돌파해 대규모 포위기동을 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비록 소 몰트케가 1914년에 취한 계획은 슐리펜의 1905년 계획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서부전선에서 주도적으로 공세를 실시하고 우익을 강화해 대규모 포위기동을 실시한다는 점에서는 슐리펜의 계획을 상당부분 이어받은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주버의 문제 제기를 계기로 10여년간 지속된 이 논쟁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 졌으며 논쟁 참여자 중 한 명인 로버트 폴리의 지적대로 1차대전에 대한 논의를 풍부하게 하는데 일조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 논쟁과 관련해 아직 검토하지 못한 논문이 많다 보니 전체적인 평가를 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주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직까지는 전통적인 해석이 좀 더 타당성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최근 몇 년간 슐리펜 계획과 관련해 주버의 연구 외에도 흥미로운 저작들이 몇 권 등장했는데 이것들은 뒤에 입수하는 대로 평을 해볼까 합니다.(또 공수표 발행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