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7일 일요일

조선족들의 한국전쟁 회고담

한국전쟁에 참전한 조선족들의 회고담 모음집을 읽는 중인데 꽤 재미있습니다. 한국전쟁시기 중국군 수뇌부가 미군의 제공권 장악과 높은 기계화를 두려워 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선 병사들의 기억 속에는 그런 공포가 한층 더 강하게 자리잡았던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흥미롭게 읽은 대목을 조금 인용해 보지요.

적기의 폭격은 영화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더 가렬하였다. 하늘은 타래치는 검은 연기와 뽀얀 먼지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막이 터질듯한 련속적인 폭발소리에 땅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고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다. 아군부대가 마을에 들었다는 소문이 나면 폭격이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폭격이 즘즉해지면 서로 부르는 소리, 우는 소리…… 동네는 처참한 정경으로 수라장을 이루었다. 폭격당할 때에는 살아남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으나 폭격이 끝나고 보면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이 많았다.

(중략)

적기의 공습은 수시로 되였다. 우리는 보총, 기관총으로 낮게 뜨는 적기를 쏘아 떨구겠다고 무등 애를 써보았으나 맞을리가 없었고 정작 공습이 시작되면 폭탄을 피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적들의 공중우세로 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냈는지 몰랐다.

한번은 아군의 야전병원에 적의 전투기 네대가 날아와 기관포사격을 하고 뒤이어 폭격기가 날아와서 폭격하여 우리는 희생자 5명을 내였다. 1차 전역때 남조선에서 참군한 한 전사는 폭격에 목이 거의다 떨어졌다. 그리고 조선 평안남도에서 참군한 리무석이라는 전사는 두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는데 처음에는 정신이 말똥말똥하였다. 담가에 눕혀가지고 얼마 안가니 두 다리가 고무풍선처럼 부어나더니 조금 지나더니 눈을 감고 말았다. 조선전쟁은 전후방이 없었고 죽는데에도 군대와 백성의 구별이 없었다.

적기의 폭격은 전방과 후방을 가리지 않았고 후방에 있는 백성들도 많이 죽었다. 그때 한 전사는 된감기에 걸려 양지쪽 산비탈에 누워서 햇뱇쪼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메터밖에서 터진 포탄파편이 그 전사의 머리를 명중하여 당장에서 즉사하였다. 한 녀성은 아이를 업고 있다가 적기의 공습을 받았는데 적기의 기관포탄알이 그녀의 뒤흉추상부로부터 복부로 관통하여 그 자리에서 죽었으나 업혀있던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

적의 폭격기편대가 앞에 한대, 뒤에 두대 이렇게 사람인자를 이룬 편대로 되여 날아가면 온 하늘이 떨리였다.

배태환 구술, 「정전전후」,  정협 연변조선족자치주 문사자료위원회 편, 『돌아보는 력사』(료녕민족출판사, 2002), 262~265쪽
‘비행기 사냥군조’가 미제의 공중비적을 파리 잡듯 때려잡는 북한 쪽 선전보다는 훨씬 솔직한 이야기 같습니다. 물론 조선족들의 회고담도 선전목적이 있기 때문에 무용담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지만 북한쪽의 기록에 비하면 훨씬 솔직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인민군 5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다른 조선족의 증언도 비슷합니다.

며칠후 상급에서는 우리 부대에 남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밤낮 걸어서 락동강반에 이르렀다. 락동강반에 이르니 우리더러 나가보라는 것 이였다. 우리 진지의 포 42문이 한방도 쏘아보지 못하고 적기의 공습에 몽땅 녹아났다. 망원경으로 내려다보니 강변에 시체가 한벌 깔려있었고 땅우에는 피가 질벅하였다. 도하하던 사람들이 실패한 것이였다. 그때에야 우리는 무엇이 전쟁이란 것을 알게 되였다. 우리는 누구나 말 없이 머리를 떨구고 돌아왔다.

김리정 구술, 「청춘도 사랑도 다 바쳐」, 위의 책 184쪽
몇몇 구술은 미군의 현대화된 무기에 대한 공포가 잘못된 지식과 결합해서 군대괴담 수준이긴 한데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인민군 4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다른 조선족은 미군의 화력과 장비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 수원전투까지는 인민군과 국방군과의 싸움이였다. 그러나 평택전투부터는 전쟁의 성격이 변하였다. 유엔군이 참전하여 전쟁은 국제전쟁으로 승격하였다. 미국 태평양전선사령부는 팬프리트의 륙전대를 부산에 등륙시켰다. 평택까지 다가든 적들은 땅크와 122미리 대포로 우리와 맞섰다. 그들은 매 한메터에 포탄 하나씩 떨구었다. 미 공군도 B-29폭격기로 무차별 폭격을 가하였고 F-48(F-84의 오기인 듯) 전투기는 지면을 누비면서 소사하였다. F-48전투기가 지면을 소사할 때면 매 한메터 사이에 기관포알 하나씩 떨구었다. 적들의 화력 앞에서 우리는 머리를 쳐들 수 없었다.

(중략)

1950년 8월, 우리는 락동강반의 신반리(경상남도 의령군)까지 쳐들어갔다. 락동강전투는 가렬처절하였다. 적들은 원자무기를 제외한 모든 현대화무기를 썼다. 그들은 비행기 폭격을 한 다음 뒤이어 연막탄을 쉬임없이 던졌다. 그러면 옆의 사람마저 보이지 않아 전투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또 세균무기를 썼다. 그러면 전사들은 세균에 감염되어 설사를 하고 토하면서 전투력을 상실하였다. 또 독가스탄을 썼는데 가스탄이 터진후 반시간 동안은 호흡을 할 수 없었다. 병력이 집중되여 있을만한 곳에는 비행기로 류산탄을 투하했다. 류산탄은 공중에서 폭발했기에 파편 쪼각들이 비오듯 쏟아졌고 그 살상력은 다단하였다. 지금도 나의 머리엔 류산탄 파편 두개가 박혀있다.

(중략)

1951년 3, 4월에 서울을 해방하고 부산까지 쳐들어갈 계획이였으나 적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특히는 적들의 공중우세로 하여 아군은 어쩔수 없었다. 우리 부대가 순천에 있을 때 적들은 운수기로 땅크를 투하하였다. 땅크는 공중에서 발동을 걸고 있었는데 땅에 떨어지자마자 앞으로 달리면서 싸울 수 있었다.

류호정 구술, 「피로 바꾸어온 평화」, 앞의 책 232~236쪽

류호정의 구술은 군사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잘못된 점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세부적인 사실에서는 틀린 것이 많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일단 낙동강 전투에 대한 회고 담에서 세균무기와 독가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이 부분은 중국이나 북한측 참전자들이 미국의 세균무기 사용을 어떻게 사실로 받아들이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러운 질병의 창궐은 전쟁터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주입된 여러가지 지식이 결합되면 훗날의 기억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 입니다.

“낙동강 전투 때 설사병이 돌았었지” → “미군이 항미원조전쟁에서 세균전을 했다는군” → “아하. 미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세균무기를 썼구나”

실제로 구술을 받다 보면 당시의 소문에 불과했던 것들이 개인적인 경험과 결합되어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점을 고려하면 류호정의 이상한 회고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중에서 투하되는 전차와 같은 미국의 첨단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1990년대에 운동권에서 많이 읽힌 김진계의 회고록인 『조국』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을 정도로 당시 공산군이 미국의 군사기술을 어떻게 보았는지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김진계의 회고록에서는 헬리콥터가 고지 정상으로 탱크를 실어 나르죠;;;;;)

체르카시 전투에 대한 걸출한 저작을 낸 군사사가 내쉬(Douglas E. Nash)는 기 사예르의 회록에 대한 논쟁에서 참전자들의 기억에 나타나는 군사지식의 오류문제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지적을 한 바 있습니다. 참전자들의 전쟁 기억은 세부적인, 혹은 전문적인 부분에서 종종 부정확하고 엉터리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조선족들의 회고담도 많은 부분에서 오류가 보이고 종종 과장된 내용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