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5일 수요일

2차대전기 소련의 인명피해를 연구하는데 있어서의 문제점

독소전쟁을 연구하는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전쟁의 방대한 규모 만큼이나 방대한 자료의 신뢰성을 검증하는 문제라 하겠습니다. 작년에 번역해서 소개했던 발레리 자물린의  글에서 잘 설명한 것과 같이, 전쟁 중에 소련군이 작성한 기록들은 신뢰성에 있어 심각한 하자를 가진 경우가 많았고 이런 기록들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에서 무비판적으로 활용한 소련 시기의 연구들은 그러한 문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습니다.

2차대전사 연구에서 중요한 문제인 전사자의 숫자에 대한 통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련이 전쟁 중에 입은 인명손실에 대해서는 연구자별로 추산하는 방식이 다르고 추정치도 편차가 큰 편입니다. 그 중에는 지나치게 과장됐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과격한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원사료가 될 소련의 기록에 내재된 한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소개할 2009년의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2-3호에 실린 보리스 소콜로프의  “How to Calculate Human Losses During the Second World War”는 소련군의 전사자의 규모를 추산하면서 아주 과격한 주장을 하고 있지만 소련군의 자료에 내재된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나 러시아의 관변연구에 대한 비판은 주목할 만 합니다.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소련군 전사자를 추산하는 내용은 생락하고 2차대전기 소련의 전사자 기록에 대한 문제점과 전후 관변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한 부분만 인용해 보려고 합니다. 이 글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2차대전기 소련군의 인명피해를 언급할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크리보셰프의 연구를 비판하는 내용입니다.(이건 영문판도 나와있죠.) 책에 실린 내용간에도 상충되는 서술이 많다는 지적이 흥미롭습니다.

1993년에 Гриф секретности сниат(기밀이 해제되다)라는 책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된 공식 통계에서는 소련군이 1941년 6월 부터 1945년 5월까지 국경수비대와 내무인민위원회 소속의 병력을 포함해 총 8,668,400명의 병력을 잃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는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목숨을 잃은 경우, 질병으로 사망한 경우, 사고로 사망한 경우,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경우, 그리고 소련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 경우, 그리고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뒤에도 서방에 계속 남은 경우를 모두 포함한 것이다. 이 신뢰하기 어려운 통계에는 1945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일본과의 전쟁에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거나 부상, 질병, 사고 등으로 목숨을 잃은 12,031명의 육해공군 병사가 포함되어 있다.39)

하지만 이 책에 실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공식 통계에서는 실제로 소련군이 전쟁중에 입은 인명피해를 크게 축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된 1943년 7월 5일에 소련 중부전선군의 병력은 738,000명이었고 쿠르스크 전투의 방어작전 단계(7월 5일~7월 11일) 에서 33,897명의 영구손실(전사, 치명상, 행방불명)과 의학적인 원인의 손실을 입었다고 되어있다. 중부전선군은 일주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는 동안 사실상 편제가 바뀌지 않았다. 1개 독립전차여단이 증원됐고 2개의 소총병여단이 전출되었다. 이렇게 편제가 변경되면서 전선군의 병력은 5,000~7,000명 정도가 감소했을 것이다.40) 그러므로 산술적인 결과에 따르면 중부전선군이 공세로 전환한 7월 12일에는 전선군의 병력이 704,000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7월 12일에 중부전선군의 병력이 635,000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산술적으로 보나 논리적으로 보나 이 주장을 따른다면 최소 55,000명의 붉은군대 병사들이 나무 한그루 없는 쿠르스크의 평원에서 탈영을 했고 이들을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하지만 사실 이 통계에서 “그냥 사라져버린” 수만명의 병사들은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을 검증한 결과 이것 말고도 더 많은 심각한 통계 오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에는 이런 오류가 너무 흔해서 공식 통계의 신뢰도를 떨어트리고 있다.

붉은군대의 손실 통계는 전반적으로 엉망진창이다. 1939~40년의 소련-핀란드 전쟁이 끝난 뒤에 붉은군대의 사병과 부사관들은 신분증명서를 반납해야 했다. 이것은 사실인데, 1941년 3월 15일 국방인민위원회에서 내린 “전쟁시 붉은군대의 인명손실 및 매장기록에 대한 법령”에 명시되어 있다. 이 법령에서는 모든 병사들에게 “인식표”를 지급해 신원을 증명하는 체제를 도입했는데, 인식표에는 소지자의 기본적인 정보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붉은군대는 “인식표” 체계를 시기 적절하게 도입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남부전선군의 경우에는 1941년 12월까지도 이 명령을 받지 못했다. 1942년 초 까지도 많은 병사들이 인식표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국방인민위원회는 1942년 11월 17일 “인식표” 체제를 폐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조치는 병사들이 전사할 수도 있다는 심리적 부담을 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 취해졌지만 이로 인해 전투 손실을 기록하는데 혼란만 가중됐다.(사실 많은 수의 장성들이 인식표 착용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붉은군대는 1941년 10월 7일부로 군대에 소속된 인원에게 “신상 카드”를 지급하기로 했지만 1942년 초 까지도 많은 병사들이 이것을 지급받지 못했다. 1942년 4월 12일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내린 명령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현역 부대의 인사기록, 특히 인명손실에 대한 기록의 작성 상태가 매우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각급 부대의 사령부는 전사자의 명단을 때맞춰 보고하지 않고 있다. 각급 부대가 사상자 명단을 늦게, 그리고 부실하게 보고하고 있어서 인명손실 통계를 확실하게 집계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 전사자의 3분의 1만 인사기록에 반영되고 있다. 실종자와 포로가 된 자의 숫자도 실제 숫자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4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사기록과 인명손실에 관한 기록의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가 않았다. 전쟁이 종결되기 2개월 전인 1945년 3월 7일에 국방위원회에서 내린 명령에서는 “전선군, 야전군, 군관구들이 이 문제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42)

39) Krivosheev G. (ed.). (1993). Grif sekrenosti sniat: Poteri Vooruzhennykh Sil SSSR v voinakh, boevykh deistviiakh in voennykh konfliktov [기밀이 해제되다 : 전쟁, 전투작전, 무력충돌에서 소련군이 입은 인명피해]. Moscow: Voenizdat, pp. 129, 132. 이 책의 제2판에서도 이 통계를 그대로 싣고 있다. 그리고Rossiia I SSSR v voinakh XX veka [20세기의 전쟁에서의 러시아와 소련]. (Moscow: Olma-Press, 2001), p. 236도 참고하라.
40) Krivosheev, Grif sekrenosti sniat, pp. 188–189.
41) Voprosy istorii (1990) [Questions of history], 199 (6), 185–187; Voenno-istoricheskii zhurnal [군사사저널, 앞으로는 VIZh로 표기한다.] (1990) 6, 185–187; VIZh (1990) 4, 4–5; and VIZh (1992) 9, 28–31.42) Ibid.

pp.448~450

다음으로는 전쟁중 소련이 동원한 병력 통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조금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통계에 잡히지 않아 전사자 집계에 포함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의 규모가 백만단위에 달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신뢰할지의 여부는 차지하고라도 공식통계가 작성되는 과정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타당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전쟁 중에 전사한 소련 군인이 2690만명이라는 가설을 검증하는데 두 가지의 계산 방법을 이용할 수 있다. 하나는 대조국전쟁 박물관의 전산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전쟁 기간 중 전사하거나 실종됐지만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1900만명을 성명순으로 정리한 신상정보에 기반하고 있다. 대조국전쟁 박물관에서는 실종된 일가친척이나 친구의 운명에 대해 문의한 사람 중 수십명에 대한 답변을 하지 못했는데 그 결과 이 박물관이 전쟁 중에 전사한 사람들의 기록을 완전하게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조국전쟁이 끝난지 반백년이 넘었지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명단을 완전히 파악하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예를들어 1994년에서 1995년 사이에 유해를 발굴해서 신원을 파악한 전사자 5,000여명 중에서 30%는 국방부 문서보관소에 기록이 없었으며 이때문에 대조국전쟁 박물관의 데이터베이스에도 이름이 없었다.53)

(중략)

이런 문제에 더하여, 1941년에서 1944년 사이에는 붉은군대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징집하거나 강제로 입대시키는 방식으로) 동원한 지역 주민들의 숫자도 상당히 많기 때문에 전쟁중에 붉은군대에 복무한 사람들의 숫자를 정확하게 산출할 방법이 전무한 실정이다. 게다가 붉은군대는 이런 식으로 징집한 사람들의 숫자를 총괄해서 정리한 기록이 없었다. 그리고 부대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전에 전사한 수십만에서 어쩌면 수백만에 달할지도 모르는 민병대원들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예를들어, 남부전선군은 진격하는 과정에서 1943년 9월에만 115,000명을 현지에서 징집해 보충병으로 충원했는데 이들 중 대다수는 그 이전에 군대에 복무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54) 전쟁 전기간에 걸쳐 소련군이 부대별로 직접 징집한 인원의 총계가 백만명 단위에 이른다는 것은 분명하다.

53) S. D. Mitiagin의 보고.
54) Ibid, p. 72 (TsAMO RF, f. 5 gv. TA, op. 4952, d. 7, l. 3), 그리고 TsAMO RF, f. 69A, op. 10753, d. 442, l. 24.

pp.453~454.

이 논문에서 추산한 소련의 인명피해에 대한 주장은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이지만 2차대전 중 소련의 인명피해에 대한 추정치가 조금씩 상향조정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소련의 기록 작성 방식이나 소련-러시아의 관변연구에 대한 비판은 꽤 적절하다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