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권 3호를 훑어보니 제2차세계대전에 대한 글이 많이 실려있어서 즐거웠습니다. 흥미를 끄는 글 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라이프치히 대학의 크리스티안 간처Christian Ganzer가 쓴 “German and Soviet Losses as an Indicator of the Length and Intensity of the Battle for the Brest Fortress (1941)”라는 글이 돋보입니다. 이 글은 간처가 2010년 Osteuropa라는 매체에 기고했던 연구를 보완한 것 인데, 독소전쟁 초기의 유명한 전투인 브레스트 전투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양군의 인명피해 통계를 가지고 분석하는 흥미로운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필자인 간처는 브레스트 요새의 영웅적인 항전을 부각하는 소련의 역사서술에 의문을 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랬을까? 소련의 역사서술에 따르면 브레스트 요새에 포위된 붉은군대 장병들은 한달이 넘도록 독일군의 포위 공격에 맞서 결사적인 항전을 펼쳤고 독일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고 합니다. 브레스트 요새 공격을 담당한 독일 제45보병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전사한 독일군은 453명, 부상자는 668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련 역사가들은 이것이 조작된 것이며 독일군의 전사자는 보고서에 기록된 것의 2~3배에 달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독일군의 보고서에는 7,223명의 포로가 잡힌 것으로 되어 있는데 소련 역사가들은 이것 또한 조작이며 숫자를 과장하거나 브레스트 근처에 거주하던 민간인들을 체포한 것 까지 포함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필자는 이러한 소련측의 서술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필자는 전투의 양상을 재구성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인명피해와 소련군의 피해 양상을 분석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먼저 독일군의 인명손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공식 기록 외에 린츠에 있는 상(上)오스트리아 민속박물관Oberösterreichisches Landesmuseum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후에 작성된 제45보병사단 전사자 명부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 전사자 명부는 사단 소속 장병들의 개별 전사통지서를 정리하여 작성한 것으로 사망자의 출생일, 성명, 소속부대, 사망한 날자와 전사한 장소, 매장지, 사망원인, 인식표의 군번과 가까운 친인척의 소재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필자는 제45보병사단의 기록과 당시 지역신문의 사망자 관련 정보를 교차검증하여 이 명부가 신뢰할 만 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사망자의 숫자입니다. 이 명부에는 브레스트 전투에서 475명이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8명은 전투 이전에 사망했거나 다른 지역에서 사망한 경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투 첫날인 6월 22일에는 314명이 사망했는데 이중에서 제130보병연대의 사망자 30명은 브레스트 요새가 아닌 브레스트 시가지의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10명 정도는 독일군의 포격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합니다. 즉 브레스트 요새 전투의 첫날에 사망한 독일군은 280명 가량이라고 보는 것 입니다. 전투 이틀차 부터는 사망자 숫자가 격감합니다. 23일에는 35명이 사망했으며 이중 14명은 후송된 야전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24일에는 전투가 격렬하게 전개되어 56명이 사망했습니다. 25일에는 21명이 사망했고, 요새내의 거점 대부분이 제압당한 26일에는 13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6월 27일에는 브레스트 요새 전투에서 마지막 사망자가 발생합니다. 필자는 사망 일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사망자 1명을 포함해 총 사망자는 428명이고 이중 86.5%에 해당하는 370명이 전투 초기의 3일간에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부상자 통계를 내는 것은 전사자 통계 보다 어렵지만 전사자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 것으로 파악합니다. 제45보병사단 의무대장의 보고에 따르면 6월 22일 저녁 기준으로 야전병원에 수용된 부상자가 총 312명, 25일에는 총 610명, 28일에는 714명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단장의 보고서와는 차이가 있는 수치인데 필자는 의무대장이 병원에서 사망한 장병의 숫자를 빼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필자는 사단장의 전투보고서에 기록된 부상자 숫자를 기준으로 전체 부상자의 86.2%가 전투 초기 4일동안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소련군의 피해를 정확히 집계하는 것은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1941년 6월 28일까지 약 2천구 가량의 시신을 브레스트 요새에서 확인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필자는 정확한 전사자 집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련군 포로 통계만을 활용하기로 합니다. 포로 통계는 제45보병사단이 상급부대에 보고한 내용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제45보병사단은 브레스트 요새 공격당시 상급부대가 몇차례 바뀌었습니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6월 24일 부터 27일, 그리고 다시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제45사단을 지휘한 제53군단의 기록에서 포로 통계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6월 24일 부터 27일까지는 3,062명이 포로로 잡혔고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는 94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 필자는 다른 기록들을 활용하여 일자별 포로 통계를 산출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6월 22일 부터 7월 1일까지 최소 6,713명, 최대 7,779명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혔을 것이라고 추산합니다. 최저치와 최대치 통계가 큰 차이를 보이는 시기는 6월 22일과 23일인데 전투 초기의 혼란 때문에 정확한 집계가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브레스트 요새와 브레스트 시가지에서 잡힌 포로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어렵긴 해도 브레스트 요새가 단기간내에 고립됐고 브레스트 시가지에서 전투를 벌인 제130보병연대의 경우 22일 이후로는 이렇다 할 전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6월 22일 브레스트 시가지에서 잡힌 400여명의 포로를 제외한 포로는 브레스트 요새 내에서 잡힌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대한 보수적으로 계산한다 해도 브레스트 요새의 병력 9,000여명 중 대부분은 항복했고 포로의 55.90%는 6월 22일 부터 6월 24일 사이에 투항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필자는 이와같은 결과를 토대로 브레스트 요새 전투를 1개월간에 걸친 처절한 항전으로 설명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전투는 6월 24일까지 마무리 되었으며 29일에는 사실상 전투가 종결되었다는 것 입니다. 실제로 제45보병사단은 7월 2일에 제130보병연대 2대대와 제45야전보충대대만 브레스트에 남겨두고 동진했으며 남은 2개대대도 3일 뒤인 7월 5일에는 1개 중대 규모 남짓한 다른 후방 부대에 브레스트 요새를 인계하고 떠났다는 점을 볼때 6월 29일에 전투가 종결됐다는 독일측의 주장은 타당한 것 같습니다. 소련측의 주장대로 한달 동안 격렬하게 저항했다면 제45보병사단의 주력이 그렇게 일찍 브레스트를 떠났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독일측의 기록에 따르면 6월 29일 이후 이렇다 할 교전은 없었고 다만 7월 23일에 한명의 소련군 중위가 독일병사 다섯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생포된 것이 유일한 저항이었다고 합니다.
필자는 소련측 생존자들의 회고에서 최후까지 결사적으로 저항하다가 ‘가까이서 터진 포탄의 충격에 의식을 잃고’ 포로가 되었다는 설명이 많은 이유는 독일군에 생포되었다는 점 때문에 배신자로 몰릴 것을 우려해 자기 변명을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소련측의 서술을 받아들인다면 요새 수비병력의 3분의 2 이상이 포로가 됐고 그중 상당수가 전투 초기의 3일동안 항복한 것을 설명하기가 힘들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