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6일 일요일

꽌시(關係)


한국전쟁 당시 국군 제2사단 제17연대에서 학도병으로 복무한 중문학자 김학주 교수의 회고록을 읽다보니 흥미로운 일화가 몇개 보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재미있었던게 황포군관학교 동기를 전쟁 포로로 만난 국군 장교의 이야기 입니다. 이런 우연이 현실에서 일어나는건 꽤 재미있지요. 회고록의 해당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우리를 특공대라고 호칭을 바꾼 목적을 알고 보니 우리를 일선으로부터 후방으로 보내어 후방에 낙오되어 있는 중공군들을 잡아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며칠 동안 국군이 너무 빨리 반격을 하며 진군하는 바람에 우리 후방 산속에 중공군 낙오병들이 무척 많이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역병은 후방으로 빼어 보낼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를 후방으로 보내어 그 낙오병들을 잡아오게 하겠다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그날부터 후방으로 가서 무척 많은 중공군 낙오병을 잡아왔다. 우리 특공대는 후방으로 나가면서 서너 명씩 조를 짜 가지고 패잔병들이 숨어있다고 알려준 지역으로 가서 포로를 잡아오는 작전에 임하였다. 후방으로 나간 우리 친구들이 첫 날 하루에 중공군을 모두 합쳐 60여명이나 잡아왔다. 중공군 낙오병들은 자신들이 후방에 낙오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우리 대원들을 보기만 하면 모두 대항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스스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숨어있던 곳으로 부터 걸어 나왔다고 하였다. 그들을 잡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워오는 것이라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라 하였다. 
(중략) 
잡아온 많은 포로들을 한 곳에 모아놓자 그들은 불안한 듯 웅성거렸다. 그때 우리의 지휘관인 문창덕 중위가 그들 앞에 나서서 유창한 중국말로 일장 연설을 하자 포로들은 모두 안심한 듯 조용해졌다. 문 중위는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으로 해방 전에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자기 형과 함께 형제가 중국으로 도망쳐 우리 임시정부에 의탁하게 되었다 한다. 마침 우리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께서 항일의 중추가 될 광복군을 제대로 조직하고자 하여 광복군의 지휘관인 장교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중국국민당 정부에 청탁하여 장제스 총통이 창설한 황포군관학교에 20여명의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학시켰다고 한다. 그때 문 중위는 자기 형과 함께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고,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에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국군에 복무하게 된 것이라 한다.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중공군 포로들을 무마하는 문 중위의 모습이 무척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이로부터 우리 대원들은 매일 포로 잡아오기에 동원되었다. 6월 3일에는 나도 포로 잡기에 나가서 포로들을 잡아왔다. (중략) 오후 적당한 시기가 되어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각자 잡은 포로들을 데리고 부대로 돌아왔다. 도착하여 내가 문 중위에게 장교 같은 포로를 한 명 잡아왔다고 보고하자 문 중위는 직접 나서서 그 중공군 장교를 쳐다보더니 "너 아무개 아니냐?"고 하면서 서로 알아보고 반기는 것 이었다. 그 중공군 장교는 문 중위와 중국의 황포군관학교 동기생이라는 것이었다. 문 중위는 즉시 내가 갖고 온 그의 권총은 자신이 간수하면서 나보고 그 중국 장교를 개별적으로 일정 기간 잘 데리고 있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문 중위는 가능하면 그를 데리고 있다가 포로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기회가 생기면 후방으로 빼주고 싶으니 기다리면서 기회를 엿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문 중위의 부탁을 따라 그 중국 장교를 데리고 부대원들과 약간 떨어진 조용한 곳을 골라 작은 개인천막을 쳐놓고 둘이 지내면서 개별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낮에는 적당한 곳으로 나와 몸을 숨기고 중공군 장교와 함께 매일 전방에 벌어지고 있는 전투 구겨잉나 하며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 일선에 나가서도 직접 적을 상대로 싸우지는 않고 나처럼 전쟁 구경을 제대로 가까이에서 한 사람은 없으리라고 여겨진다. 다만 중국 친구가 지독히 몸 냄새를 피우면서도 세수조차 잘 하려 들지 않고 계속 음식이 제대로 그에게 맞지 않는 듯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여 함께 지내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골짜기 맑은 시냇물로 데리고 가서 몸을 좀 씻도록 해 보았지만 몸을 제대로 씻으려 들지 않았고 또 씻을 줄도 모르는 사람만 같았다. 그와 지내면서 다만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도 함께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중략) 
문 중위는 여러날을 기다려 보아도 결국 달리 어찌하는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국군 보다는 미군이 포로를 보다 잘 대우한다고 하면서 그를 바로 옆에 있는 미군들에게 넘겨주겠다고 하였다. 먼저 문 중위는 나를 미군들에게 보내어 그가 갖고 있던 리볼버 권총을 미군들에게 기념품으로 팔아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 권총을 들고 미군들에게로 가서 이것은 중공군 장교가 갖고 있던 무기이니 전쟁 참여 기념품으로 사라고 권하였다. 여러 미군들이 서로 자기가 사겠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 나는 미군들에게 경매 방식으로 흥정하여 적지 않은 미국돈을 받고 팔았다. 100불을 넘게 받아 문 중위에게 전달해 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뒤에 다시 미군들에게로 나를 보내어 먼저 팔아넘긴 권총의 주인인 중공군 장교를 포로로 맡아달라고 교섭을 하도록 하였다. 나는 다시 미군들에게로 가서 중공군 장교 포로를 넘겨주는 일을 교섭한 뒤에 그들과 합의한 대로 중공군 장교를 데리고 가서 미군에게 넘겨주었다. 역시 미군들로 부터 포로를 넘겨주는 대가로 미불로 받았는데 얼마나 받았었는지 정확한 액수는 기억에 없다. 다만 이때도 적지 않은 액수의 미불을 받아 문 중위에게 전해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무렵의 6월의 2일, 3일을 전후하여 우리 부대가 머물렀던 곳은 자운리라는 동리이다. 
김학주, 『나와 625사변, 그리고 반년간의 군번없는 종군』, 明文堂 2017, 88~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