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사 서적을 꾸준히 간행하는 길찾기 출판사에서 독일 국방군의 유명한 '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 『진흙속의 호랑이』 완역판을 냈습니다. 몇 년 전 영어 중역판이 오역을 비롯한 몇가지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상업성을 고려해야 하는 출판사 입장에서 처음 부터 새로 번역을 하는 일은 힘들었을 텐데 대단합니다. 『전격전의 전설』, 『독일 국방군의 신화와 진실』 등 다수의 군사서적을 번역한 육군대학의 진중근 중령님이 번역을 담당하셨습니다. 오토 카리우스는 매우 유명한 '전차 에이스'여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이름을 들어 봤을 겁니다. 카리우스의 회고록은 일찌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어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한국어판이 간행되기 전에도 카리우스의 회고록을 원서나 다른 언어의 번역판으로 접한 분이 많았지요.
카리우스의 회고록은 서독 사회가 패전의 상처를 어느 정도 수습하고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던 시점에 집필되었습니다. 이 점은 카리우스가 회고록의 서문에서 독일 국방군을 비판하는 서독 사회 일각의 기류를 불편해 하면서 비난하는 내용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참전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입장은 물론 전우들의 '명예'를 옹호하기 위해서 회고록을 집필했습니다. 카리우스가 독일 국방군을 옹호하는 태도는 현재 시점에서 제3국의 입장으로 볼 때 다소 불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회고록은 자신에 대한 방어를 위해 쓰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점을 차치하고 보면 이 회고록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료입니다.
카리우스의 회고록은 대부분의 내용이 1943~1944년 제502중전차대대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카리우스가 군인으로서 정점에 있었던 시기입니다. 아마 저자에게 있어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때 일 겁니다. 카리우스는 유능한 전술 지휘관 답게 자신이 전장에서 겪은 여러 경험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전술적 교훈을 도출하려 합니다. 저자는 회고록의 곳곳에서 '당시'의 독일연방군 장병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교훈을 주려고 합니다. 특히 1944년 7월 소련군의 전략적 대공세를 맞아 혼란에 빠져 있을 당시 제227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을 수행한 경험이 대표적입니다. 저자는 제227보병사단의 어떤 연대장과 함께 사단장 빌헬름 베를린 장군을 설득해서 문제가 있는 작전을 철회시킨 일화를 소개합니다. 카리우스는 이 일화를 통해 '독일 국방군'의 임무형 전술이 실전에서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이런 장점을 '독일 연방군'의 '후배'들이 계승하기를 희망합니다. 이 회고록은 독일 국방군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집필되었지만 적군이었던 소련군에 대해서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전후에 간행된 독일 국방군 고급장교 출신자들의 회고록이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소련군을 폄하하는 경향을 강하게 드러냈던 것과 비교하면 제법 '공정한' 시각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당시 전쟁영웅으로 주목을 받던 인물이다 보니 전투 이외에도 흥미로운 일화가 많습니다.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휴양을 하던 중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를 만나 대화를 나눈 일화가 대표적입니다. 카리우스가 힘러를 만났을 당시 힘러는 친위대 외에도 정규군의 보충군 사령관을 겸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1944년 7월 20일 쿠데타 이후 친위대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정규군에 대해 정치적으로 우위에 선 시점입니다. 카리우스와 힘러의 대화는 정규군이 정치 싸움에서 친위대에 밀리는 상황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입니다. 이 외에도 나르바 전투 당시 유명한 기갑부대 지휘관인 슈트라흐비츠 '백작'이 지휘하는 전투단에 배속되었을 당시의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슈트라흐비츠 '백작'은 쿠르스크 전투 당시 지휘로 많은 비판을 받은바 있는데 카리우스는 나르바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슈트라흐비츠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독일어 원판을 번역한 만큼 번역은 전체적으로 좋다고 생각됩니다. 역자가 독일어 원판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고심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독일 국방군'식의 군사용어 표기를 잘 살린 부분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독일이 전후 나토에 가입하면서 많은 군사용어가 미국-나토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예를들어 미터법을 사용하더라도 독일 국방군에서는 화포의 구경을 cm로 표기하지만 독일 연방군에서는 mm로 표기합니다. 카리우스는 독일 국방군 경험만 있고 전후에는 연방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회고록은 전쟁 당시의 용례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역자는 이 점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영어 번역판은 원서에서 화포 구경을 cm로 표기한 것을 mm로 바꾸고 있고 영어 중역판은 이걸 그대로 따라갔지요. 또한 역자는 불가피한 예가 아니라면 최대한 많은 용어를 현대 한국군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맞춰 한국 독자들을 배려하고 있습니다. 또한 카리우스가 잘못 회고한 내용에 대해서는 역자주를 통해 내용을 보강하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는 서적을 번역할 때 해당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역자가 필요한 이유를 잘 보여주는 번역입니다. 인공지능 번역의 품질이 급속히 향상되고 있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것 처럼 아직은 전문적인 번역가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