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8일 일요일

어떤 군인의 회고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 특무부대장, 육군 제주도 제1훈련소 부소장 등을 역임한 김종면 장군이 육군사관학교 나종남 교수와 면담한 내용입니다. 이승만 시기에 군 생활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역경을 겪은 탓인지 당시 상황에 대해 시니컬한 평가를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꽤 있습니다. 이 분이 한국전쟁 중 훈련소 부소장으로 있을 당시를 회고한 내용이 꽤 흥미롭더군요. 이 내용을 읽고 나니 군인이야 말로 가장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해당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면담자 : 전쟁 중에 활동했던 다른 상황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김종면 : 전쟁 중에는 주변에서 별 달아 줄 테니까 전선의 사단장으로 나가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전방에는 안 가겠다고 했습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 했다고 그랬지만 우리도 인해전술 많이 썼지요. 
대체로 미군은 산악지역에서는 거의 작전을 하지 않았고, 대체로 한국군이 산악지역 작전을 담당했습니다. 왜 동부전선에는 미군 부대가 없었고 한국군 부대만 작전을 했을까요? 동부지역은 아무래도 지형이 험하고 미군들이 보유하고 있는 무기의 효과가 적었으니, 자신들이 활동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또한 미군들은 어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아서 적을 완전히 초토화 시킨 다음에 그 고지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군은 미군 고문관이 와서 "got damm! 올라가라!" 하면 올라가는 것 입니다. 병사들이 많이 죽어도 올라가는 것 입니다. 내가 사단장으로서 병사들을 고지로 올려 보내는 것이 곧 그들을 죽이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 입니다. 이처럼 부하를 죽이고 나서 계급장이나 훈장을 달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리고 훈장이라는 것도 실제로 전장에서 치열하게 싸운 사람들이 받거나 달아야 할텐데, 항상 후방에 앉아서 사무실에 근무했던 사람들, 자격도 안되는 사람들이 훈장을 달고 다니더군요. 나는 훈장을 받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무실에서 근무한 사람보다는 실제 전장에서 적과 싸웠던 사람들에게 훈장을 줘야지요. 나는 나 스스로에게 6ㆍ25전쟁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할 자격이 있어요? 동작동에 갈 자격도 없는 것이지요. 
면담자 :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김종면 :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가져야 할 정신 자세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적으로 어떤 자세가 되어야 할까요? 1952년에 내가 훈련소 부소장 시절에 부대에서 나에게 훈련병들을 상대로 정신훈화를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구태여 정신훈화 할 것이 있냐? 정신 훈화 할 것이 없다. 정신훈화 한다는 사람들이 백두산 상상봉에 태극기를 꽂자고 이야기 하는데, 백두산 상상봉에 태극기를 꽂을 것이라면 네가 가서 꽂아야지 왜 병사들에게 그런 주문을 하느냐?"라고 대꾸했습니다. 
당시 훈련소에서 많은 병사들이 어려운 훈련을 안 나가려고 취사병에 지원하더군요. 물론 취사장에서는 배 든든하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포복해서 철조망 밑을 지나가는 병사들 중에서는 교관의 숫자가 적으니, 교관 눈치 봐서 빨리 기어가지 않고 뛰어가면서 쉽게 훈련하려는 병사들도 많더군요. 그러니 훈련이 제대로 되겠어요? 
그래서 부대에서는 나에게 정신교육을 시켜달라고 요청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꼭 1~2분 정도 걸쳐서 짤막하게 연설을 하곤 했습니다. 연대의 모든 병력을 모아 놓고, "죽고 싶은 사람 손 들어봐라"라고 하면, 아무도 손드는 사람이 없더군요. "부상당해서 병신되고 싶은 사람 손들어 봐라"라고 해도 손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너희들이 배우고 있는 훈련이 매우 힘들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물론 보리밥에 부식도 시원찮은 것을 먹고, 기운도 없는데 열심히 훈련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나도 이해한다. 나도 그런 것은 하기 싫다. 그런데 왜 어려운 훈련을 해야 하느냐? 전쟁을 하는 것은 내가 적을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적을 죽이는 연습을 하는 것은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훈련인 것이다. 여기서 훈련 제대로 안 받은 사람은 총에 맞아서 병신이 되거나, 상이용사로 돌아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 백골이 되어 돌아오거나, 어떤 사람들은 시신도 못 찾는 것이다. 그래서 훈련을 하는 것이니,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한마디로 훈련을 받고 싶으면 받고 안 받고 싶으면 안 받고, 마음대로 하라는 것 이었습니다. 
내 정신교육이 있은 다음부터는 취사병으로 지원하겠다는 병사들이 줄어들더군요. 그러니까 연대장이 나에게 와서 "부소장님이 정신교육을 시킨 이후에는 취사병 하겠다는 병사가 없다"고 보고하더군요. 취사병은 하사관이나 고참병 해서 하면 되지 신병훈련 받는 녀석들을 골라서 취사병이나 당번병 시키면 훈련할 시간이 없잖아요. 그래서 훈련 효과가 좋아졌다고들 했습니다. 다행이었지요. 

나종남 편집, 『국사편찬위원회 구술사료선집 19 : 한국군 초기 역사를 듣다 - 군사영어학교 출신 예비역 장성의 구술』, (국사편찬위원회, 2012), 242~243쪽

2013년 9월 6일 금요일

독일군의 돌격포에 대한 평가와 돌격포의 교환비에 대한 잡설

윤민혁님 페이스북에서 독일 전차와 돌격포의 교환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생각나는 걸 조금 끄적여 봅니다. 2차대전 후반기에 독일군의 일각에서 돌격포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개인적으로 2차대전 후반기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차 교환비에 대해서 끄적이던 포스팅이 하나 있었는데 자료 정리가 덜 돼서 일단 생각나는 약간의 자료를 가지고 돌격포에 대해서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돌격포는 2차대전 중 많은 무용담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단 한대의 돌격포가 하룻 동안 여러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했다는 이야기는 단골 소재였지요.


먼저 지난번에 소개했었던 NARA소장 독일 기갑총감부 문서, T-78 R619에 들어있는  제200돌격포보충훈련대대Sturmgeschütze Ersatz und Ausbildung Abteilung 200의 대대장이 작성한 보고서에 있는 내용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이 보고서는 제200돌격포보충훈련대대의 대대장이 1943년 8월 30일 부터 9월 22일 까지 동부전선에 배치된 12개 돌격포대대(912, 226, 184, 190, 185, 189, 270, 600, 904, 191, 243, 210)를 시찰한 뒤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포병병과의 입장에서 씌여졌기 때문에 약간 편향적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꽤 흥미로운 자료입니다.


이 보고서에서는 돌격포가 전차보다 우월하다고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당시의 전차 배치 상황이나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비교대상이 된 것은 아마도 3호전차나 4호전차 같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전차는 돌격포에 비해 방어력과 광학장비가 열세하고 높이가 높아서 더 쉽게 피격되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돌격포에 대해서는 방어전투에서 특히 대활약을 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소련 전차를 격파하는데 있어서는 물론 소련 보병의 공격을 격퇴하는데도 유용하다는 것 입니다. 이 보고서에 인용한 익명의 독일군 지휘관들의 평가는 돌격포를 극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1개 기갑사단 보다 1개 돌격포대대가 더 좋다.(Eine Sturmgeschütz-Abteilung ist mir lieber als eine Panzerdivision)” - 익명의 고위 지휘관 

“전차 10대 보다도 돌격포 2대가 낫다.(2 Sturmgeschütze ziehe ich 10 Panzern vor)” - 익명의 보병연대장.1)  

(무슨 홈쇼핑 광고 같군요!)


소련군에 대해서는 전차는 형편없지만 대전차포가 위협적이라고 지적합니다. 특히 소련군이 구경이 더 큰 대전차포를 배치하는 것을 중요하게 꼽고 있습니다. 소련군 전차에 대한 평가는 최악인데 독일군이 노획한 소련군의 명령서에 따르면 일부 소련 전차부대에는 독일군 돌격포와의 교전을 회피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하는군요.2)


보고서에는 돌격포 지원을 늘려달라는 일선 지휘관들의 요청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1943년 여름의 방어전투에서 돌격포 대대들이 혹사당했음을 보여주는 내용도 있습니다. 한 돌격포 대대는 10일간 전투를 치르면서 배속된 사단이 11번이나 바뀌었다고 합니다.3) 그야말로 정신없이 여기 저기 불려다닌 셈입니다.


이 보고서의 결론 부분에는 제200대대장이 시찰한 돌격포대대가 1943년 8월에 거둔 전과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표1. 독일군 돌격포대대의 전과 및 손실(1943년 8월)
돌격포대대
적 전차 격파
돌격포 손실
912
21
0
226
10
2
184
27
0
190
17
0
185
87
4
189
76
0
270
62
2
600
18
1
904
55
7
191
7
1
210
43
1
(표 출처 : “Bericht über die Ostfrontreise des Kommandeurs der Sturmgeschütz Ers. u. Ausb. Abt. 200 vom 30. 8. 1943 bis 22. 9. 1943”, NARA T78 R619, p.7.)


현재 시점에서 러시아 자료와 교차검증을 하기 어려우니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지만 꽤 재미있는 경향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좀 더 정리가 잘 된 통계 하나를 올려 보지요. 1944년 1월 부터 1944년 8월 까지 서부전선을 제외한 전 전선, 주로 동부전선에서 돌격포여단이 거둔 전과와 손실에 대한 독일군 자체 집계입니다. 1944년 6월 부터 8월까지는 잇따른 참패로 인해 집계가 불완전 하지만 표1과 비슷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표2. 1944년 1월 부터 8월까지 전체 돌격포 여단의 전과 및 피해(서부전선 제외)
적 전차 격파
돌격포 손실
1944.1
860
61
1944.2
429
71
1944.3
578
177
1944.4
542
121
1944.5
147
15
1944.6
245
34
1944.7
1019
138
1944.8
847
96
(표 출처 : Peter Müller und Wolfgang Zimmermann, Sturmgeschütz III : Rückgrat der Infanterie Band 1, Geschichte, Entwicklung, Herstellung und Einsatz, (History Facts Dokumentation, 2007), p.265..


작년에 정리했던 통계, “2차대전 후반기 독일군의 전차 및 돌격포 손실률”과 함께 비교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1) “Bericht über die Ostfrontreise des Kommandeurs der Sturmgeschütz Ers. u. Ausb. Abt. 200 vom 30. 8. 1943 bis 22. 9. 1943”, NARA T78 R619, p.3.
2) “Bericht über die Ostfrontreise des Kommandeurs der Sturmgeschütz Ers. u. Ausb. Abt. 200 vom 30. 8. 1943 bis 22. 9. 1943”, NARA T78 R619, p.2.
3) “Bericht über die Ostfrontreise des Kommandeurs der Sturmgeschütz Ers. u. Ausb. Abt. 200 vom 30. 8. 1943 bis 22. 9. 1943”, NARA T78 R619, p.4.

2013년 9월 5일 목요일

나토의 전진방어전략에 대한 체코슬로바키아군의 평가

지난번에 올렸던 “1960년대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방어계획”과 관련해서 포스팅을 하나 합니다. 잠깐 언급했던 1965년에 작성된 체코슬로바키아군 참모부의 정보평가입니다. 1960년대 초반 나토군의 전략 변화에 대해 평가한 내용인데 인용한 책의 해제에 따르면 소련에서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보고서라고 하는군요.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권의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냉전기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는 사료가 많아졌지만 러시아의 자료 공개는 여전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과거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속했던 소련 위성국들의 자료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점은 꽤 아쉬운 점입니다. 아무래도 소련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하위 동맹이었던 국가들의 부분적인 자료를 통해 전체를 재구성 해야 하니 말입니다.


이 보고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나토군의 전략 변화를 공세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즉 독일 영내에서의 방어전 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공세로 이행하기 위한 준비로서 “전진방어”를 채택했다고 보는 것 이지요. 그리고 2차세계대전의 경험을 반영해서 독일군에 대한 평가가 높은 편입니다.


영어 중역인 점을 감안하고 읽어 주십시오. 영어로 번역하면서 편집자가 생략한 부분이 많은게 유감입니다.


[...전략] 나토 사령부는 현재 사회주의 국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의 군사력을 비교하는데 있어 전면적인 핵전쟁은 물론 제한적인 전쟁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에따라 제한전에 대한 이론을 정교하게 가다듬었는데 이 이론은 중부유럽전역의 연합군의 작전 준비태세, 특히 최근 수년간의 준비태세를 반영하고 있다.
[...중략] 제한전쟁은 두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가지는 부여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서 충분한 병력을 신속하게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 문제는 군사력을 운용하면서  제한전쟁이 전면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서방은 유럽에 충분한 재래식 전력을 배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 제한적인 핵무기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중략] 제한전 개념은 특히 미국이 선도하고 있는데 이 개념에서는 군사적인 목적과 정치적인 목적을 점진적으로 달성하는 동시에 전면적인 핵전쟁이 발생할 위험을 최소화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 수뇌부는 전면핵전쟁의 파괴력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나토에서는 국제적인 긴장이 단기간, 혹은 장기간 이어진 이후 전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리한 군사적, 정치적 정세가 조성될 경우 갑작스럽게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본다. 전면 핵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유리한 정세로는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거나 어느 한 진영의 지도국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군사력을 감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경우로는 단계적으로 특정한 제한조건을 넘어서면서 제한전쟁이 전면 핵전쟁으로 발전하는 경우를 꼽을 수 있을 것인데 이 경우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어느 한 참전국이 사용하는 수단에 전혀 다르게 대응하거나, 어떤 징후를 잘못 해석하거나, 사람의 실수나 장비의 오류 때문에 제한전쟁이 전면 핵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 나토군 수뇌부는 기습적인 전면 핵전쟁을 감행하는 계획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중략]  국가안보에 대한 직간접적인 위협에 직면해서 필요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 전쟁 말고는 없을 경우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모호한 개념은 여전히 나토군 수뇌부, 특히 미국이 전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으며 나토가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의 전략개념인 이른바 “유연 대응flexible response”은 제한전, 그리고 유리한 상황이나 어쩔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전면전을 수행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개념은 군사적인 관점과 정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공격적이고, 해로우며 결과적으로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제한전 이론은 이론적인 측면, 특히 전쟁의 정치적, 군사적 목표, 병력과 군사적 수단의 활용, 그리고 목표의 선정이라는 관점에서 봤을때 명확하지 않은 요소로 가득차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나토군 수뇌부는 평화시에도 양 진영의 강력한 군사력이 대치하고 있는 유럽 전역에서 제한전이 적절하게 수행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산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제한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나토군 수뇌부는 나토군이 심각한 손실을 입거나 요충지를 상실하게 될 경우, 혹은 재래식 전쟁으로 의도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경우에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제한전 이론이 특히 중부유럽전역의 정세하에서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많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략…]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과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이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되면서 1963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과 다른 유럽내 나토 가맹국들의 주도로 ‘전진 방어Forward Defense’라는 새로운 개념이 채택되었다. 이 개념에서 다루고 있는 영역은 단지 독일연방공화국의 영토 뿐이다. 본질적으로 전진 방어 개념에는 유럽전역의 환경에 새로운 원칙을 정교하게 가다듬어 적용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개념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영토를 지켜내는 한편 공세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여 단기간 내에 전장을 독일민주공화국과 체코슬로바키아로 옮기기 위해서 독일연방공화국의 동부 국경에서 능동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중략] 나토군의 작전 준비태세에 대한 전략 개념의 영향력. 
연합군의 작전적 준비태세를 보면 전면핵전쟁과 함께 나토군이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를 함께 사용하는 제한전쟁을 감행하는 것을 고려하는 전략 개념을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중략…] 
1960년 경까지 실시되었던 대규모의 훈련들은 동서양진영이 무장 충돌을 하게 된다면 어떠한 경우건 모든 종류의 핵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것에 입각한 “대량보복” 개념에 따라 실시되었으며 병력 동원과 예비 전력의 집결에 필요한 시간을 벌고 반격으로 이행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유연한 방어를 전개하였다. 핵공격을 가하는 수단은 공군이 유일했다.[중략…] 
이 무렵 실시된 훈련들은 모두 방어 작전을 위해 실시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존재하던 개념과 나토 지상군의 임무를 반영한 것이었다. 나토군의 전쟁 시나리오는 전쟁의 위협이 장기간 지속되는 상황을 가정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군부대의 전투 대비태세를 완료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며, 동원에 필요한 일부 조치를 이행할 수 있을 것이고 사전에 준비된 작전 조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핵공격이라는 전략적 수단 중에서 공군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전쟁에서 완벽한 기습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되었다.[중략…]
[...중략] 훈련 시나리오에서 “대량보복” 개념에 입각한 중요한 변화들은 “전진방어” 개념의 채택으로 폐기되었다. 이러한 훈련들은 유럽전역에서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제한적인 전쟁을 수행한다는 나토의 개념을 따른 것이었다. 교전은 방어작전으로서 짧은 기간 동안 수행되었다. 방어작전 단계에서는 재래식무기만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서는 작전-전술단위, 전술단위의 핵무기가 동원되었고 그 시기는 작전이 개시되고 수시간에서 수일이 지난 뒤였다. 나토군은 보통 적군이 선제 핵공격을 실시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했다.
이 시점에서 전쟁의 위협이 증대되는 기간이 훨씬 짧아졌다. 이때문에 전투 준비태세를 갖춰야 할 시간도 훨씬 짧아졌다. 전투 태세를 준비하고 완료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적이 아군의 준비 태세를 감지하는 것과 대응 수단을 마련하는 것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작전적 기습을 가능하게 했다.
“전진방어”를 채택함으로써 군의 작전 편성은 1960년 이전의 군사 훈련에서 적용되었던 것과 비교하여 근본적으로 변화했으며 특히 중부 집단의 경우가 그러하다. [중략...] 적의 일선 제대는 두개의 야전군(미 제7군과 프랑스 제1군)으로 구성되었고 일선제대와는 별도로 1~2개 집단의 제2선 예비 제대가 편성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하는 제1선 제대에 프랑스군 집단(제3기계화사단, 제1기갑사단)이 배치된 것, 또는 독일군 제2군단이 프랑스 제1군의 작전 통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로 필센Plzeň-뉘른베르크Nürnberg와 린츠Linz-뮌헨München 축선의 중부 집단 우익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러한 개념상의 변화는 초기 전투 기간에 작전을 수행하는데도 반영되었다. 지금까지의 군사훈련을 보면 나토 연합군이 초기에는 기동 방어를 실시하고 있지만 갈수록 능동적으로 작전하고 있으며 전체 전투 주기가 (2~3일 정도로 ) 짧아졌다. 또한 후퇴 종심도 (최대 120km 정도로) 현저히 짧아졌다. 비록 반격으로 전환하는 것은 훈련하지 않았지만 이전 보다 더 빨리 반격을 하기 위해서 방어 단계를 강력한 역습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중략] 1962년 이래로 중부유럽전구에서는 제한전 개념에 따라 훈련을 실시했다. 초기에는 1개 집단군 단위의 훈련(그랜드슬램1Grand Slam 1과 그랜드슬램2)에 적용되었으나 1963년 부터는 중부유럽전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훈련(Lion Ver)에, 1964년에는 유럽 전체를 대상으로 한 훈련(Fallex-64)에 적용되었다. 
나토군은 1964년 이전에는 적군이 먼저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에만 핵무기를 사용했다. 1964년 훈련에서는 나토군 방어선의 돌파구를 분쇄하거나 공세를 성공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했다. 이에 대한 적군의 대응, 즉 보복을 위해 핵무기를 무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전면 핵전쟁으로 이어졌다.
[...중략] 1962년의 훈련에서는 전투 작전이 시작된 지 3일차(46시간)에 적을 저지하기 위해 국경에서 50~150km 떨어진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1963년에는 전투 작전이 시작되고 불과 10시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전력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핵무기를 사용했다. 적군의 진격은 30~100km 정도에서 돈좌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나토군의 성과는 무시해도 될 정도였다. 1964년 가을의 기동훈련에서 핵무기는 전쟁이 시작된 지 34시간차에 사용되었으며 이 시점에서 전방의 방어선이 돌파당해 적군은 국경에서 30~80km를 돌파해온 상태였다.
[...중략] 이같은 훈련을 보면 연합군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전투를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전력 격차가 크기 때문이며, 이점은 재래식 전쟁이 시작된 초기에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나토군 수뇌부는 전력격차가 크다는 점 때문에 제한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으로 전면 핵전쟁을 감행할 수 있도록 군의 준비태세를 갖추려 하고 있다. 

[...중략] 요약, 결론.
[...중략] 각 국의 참모진 중에서 이것을 가장 잘 준비하고 있는 것은 독일에 주둔한 미군 참모부다. 독일주둔 미군은 지난 한해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를 했다. 미군은 연합 훈련에 참가하는 것 외에도 자체적으로 대규모의 훈련을 실시했다. 
서독군 참모부는 작전적 준비태세를 갖춘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서독군은 연합훈련을 진행하면서 연합군의 범주 내에서 임무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서독군 참모부의 고급 장교들은 대부분 과거 히틀러 군대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나이가 많기 때문에 얼마 안가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독일군의 작전적 준비태세는 미육군과 거의 맞먹는다. 
프랑스군에서 가장 준비가 잘 된 참모진은 제1군의 참모진이다. 프랑스 본토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의 참모진은 준비태세는 최근에 와서야 강화되었다. 프랑스군은 오랫 동안의 식민지 전쟁으로 생긴 문제점을 없애고 미군과 동등한 수준으로 준비태세를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프랑스군 참모진은 특정한 상황하에서의 전투 행동에 필요한 조직과 운영에 있어서는 많은 경험을 갖추고 있다. 

영문번역 : Marian J. Kratochvil.
“Document No.28 : Warsaw Pact Intelligence on NATO’s Strategy and Combat Readiness, 1965”,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170~173.

2013년 8월 22일 목요일

1960년대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방어계획

Blueprint for Battle : Planning for War in Central Europe, 1948~1968을 읽는 중 입니다. 진도가 더뎌서 이제야 겨우 헬무트 하머리히Helmut Hammerlich가 쓴 제10장 “Fighting for the Heart of Germany”를 읽고 있습니다. 제10장은 1960년대 초반 북독일의 방어를 담당한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전시 방어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방어종심이 짧은 독일의 전략적 고민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더군요.


제10장에서는 1963년 9월에 나온 연합군중부유럽사령부CINCENT, Commander in Chief, Allied Forces Central Europe의 긴급방어계획EDP, Emergence Defense Plan 1-63호 이후의 방어 계획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긴급방어계획 1-63호는 주방어선을 베저Weser-레흐Lech 강을 잇는 선으로 설정해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의 90%를 방어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의 방어계획이 주방어선을 엠스Ems-네카Neckar강으로 설정해서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의 50%를 포기하는 것에 비하면 방어구역을 크게 늘린 것이고 독일이 정치적으로도 용납할 수 있는 범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최대한 전방에서 바르샤바조약군의 주력을 맞아 싸우기 위해서 지연전을 펼쳐야 하기 때문에 작전적 융통성이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토를 최대한 사수해야 하니 선택의 폭은 좁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제1군단, 영국 제1군단, 벨기에 제1군단과 함께 독일 북부의 방어를 담당한 독일연방군 제1군단은 예하에 제3기갑사단, 제1기갑척탄병사단, 제11기갑척탄병사단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제11기갑척탄병사단은 예하의 제33기갑척탄병여단을 나토 북부집단군NORTHAG, NATO’s Northern Army Group 예비대인 제7기갑척탄병사단에 배속하게 되어 있어서 실제 전력은 2개 기갑척탄병여단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이 3개사단의 기갑전력은 전차 600대와 장갑차 700대였습니다. 그런데 독일 제1군단이 1차로 상대하게 될 소련 제3충격군은 4개 전차사단과 1개 차량화소총병사단, 전차 1,600대와 장갑차 1,400대를 보유한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제2파 제대로는 제2근위전차군, 또는 제20근위군 소속의 11개 사단이 투입될 것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전쟁 초반에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를 감당하면서 최대한 좁은 지역에서 적을 저지해야 하는 것 이었습니다. 1965년에 계획을 개정해서 제7기갑척탄병사단을 독일 제1군단 예비대로 지정하기 전 까지는 이렇다 할 예비대가 없었으니 더욱 난감한 계획이었습니다. 기본적인 방어계획은 각 사단이 1개 여단과 사단 기갑수색대대로 지연부대를 편성해 최전방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나머지 2개 여단이 주방어선에서 방어를 준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연부대가 주방어선까지 밀려오면 이것을 후방으로 돌려 사단예비대로 운용하도록 했습니다. 굉장히 협소한 방어구역과 제한된 전력이 결합되어 지휘관이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가 지독하게 적었던 것 입니다.


이런 제약을 상쇄하기 위해 사용된 수단은 잘 알려진 대로 핵병기였습니다. 독일 제1군단 포병의 경우 연합군 유럽최고사령관SACEUR, Supreme Allied Commander Europe의 허가를 받아 10킬로톤까지의 핵포탄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자인 하머리히는 자세한 사격계획이 명시된 사료를 찾지 못해 개략적인 내용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핵 포격과 함께 사용되는 수단은 핵지뢰였습니다. 핵지뢰는 4~5km 간격으로 설치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베저강 서쪽에 설정된 핵지뢰 사용 지대가 120km 가량이었다는 증언을 토대로 독일 제1군단에 할당된 핵지뢰는 30개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여기에 항공지원을 담당한 제2연합전술공군ATAF, Allied Tactical Air Force도 핵폭격을 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전쟁이 터졌다면 전쟁 초반부터 독일은 핵으로 쑥대밭이 될 판이었습니다. 나토측이 전진방어를 채택하면서 핵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은 바르샤바조약기구 측에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주)


사실 독일 본토에서 핵을 사용한다는 것은 독일측으로서도 썩 달가운 방안이 아니었습니다. 박살나는건 독일이니 말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까지 나토 북부집단군 방어구역에서 핵 타격 목표를 선정하는 것은 영국군에 의해 좌우됐고 1966년 이후에야 독일측이 핵무기 사용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독일로서도 뾰족한 대안이 없는 것은 문제였습니다. 당시 독일 제1군단 포병사령관은 작전상 개전 초반부터 핵무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으며 독일군의 전력이 획기적으로 증강되지 않는 이상 재래식 화력전은 어렵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군의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개전 초기에 대량의 핵무기를 사용하는 계획이 계속 수립되었습니다. 1966년 부터 독일공군 참모총장을 맡았던 슈타인호프Johannes Steinhoff는 이런 계획으로는 작전적인 기동이 불가능하다고 비난하고 독일을 파괴하는 전술핵의 대량 사용을 재래식 방어에 포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최대한 많은 영토를 방어하면서도 핵무기 사용은 피해야 한다는 딜레마는 결국 독일이 재래식 전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만듭니다. 사실상 이것이 독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주) “Document No.28 : Warsaw Pact Intelligence on NATO’s Strategy and Combat Readiness, 1965”,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172~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