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26일 목요일

그럴싸한 변명

어떤 논문을 읽다가 웃기는 구절이 있어서...

패배한 이탈리아 군대의 장군들은 놀라울 정도로 패배의 원인을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라 마르모라(Alfonso Ferrero La Màrmora)도 1866년(쿠스토자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패배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도 아도와 전투에서 참패한 뒤 이탈리아인 부대를 탓했다. 그리고 카도르나(Luigi Cadorna)는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렇게 변명했다.

“나는 쿠스토자와 아두와에서 패배했었던 군대를 지휘했을 뿐이다.”

John Gooch, “Italian Military Competence”,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5-2(1982), pp.262-263

비겁한 변명이지만 나름 그럴싸하게 들리는군요.

그럴싸한 변명

어떤 논문을 읽다가 웃기는 구절이 있어서...

패배한 이탈리아 군대의 장군들은 놀라울 정도로 패배의 원인을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라 마르모라(Alfonso Ferrero La Màrmora)도 1866년(쿠스토자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패배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도 아도와 전투에서 참패한 뒤 이탈리아인 부대를 탓했다. 그리고 카도르나(Luigi Cadorna)는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렇게 변명했다.

“나는 쿠스토자와 아두와에서 패배했었던 군대를 지휘했을 뿐이다.”

John Gooch, “Italian Military Competence”,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5-2(1982), pp.262-263

비겁한 변명이지만 나름 그럴싸하게 들리는군요.

'지원병제 군대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 보고서'를 다시 읽으면서

1970년에 나온 ‘지원병제 군대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 보고서(The Report of the President’s Commission on an All-Volunteer Armed Froce)’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몇 년전만 하더라도 이 보고서에서 주장하는 몇몇 논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이 보고서가 예측한 많은 사실들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는 것이라 지금은 약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이 보고서를 읽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베트남전쟁을 겪고 있던 미국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고 게다가 미국이라는 나라는 근대적인 징병제가 시작된 유럽의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정치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징병제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만큼 현재의 우리들도 한번 읽어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보고서는 서두에서 모병제 반대진영에서 제기하는 아홉가지 문제들을 열거한 뒤 모병제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근거가 부족하거나 지나친 걱정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들고 있는 모병제 반대진영의 주요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모병제 문제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쉽게 짐작하실 수 있는 문제들이죠.

1.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유지비가 매우 많이 들어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2.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갑작스러운 위기시에 신속하게 규모를 늘릴 수 있는 유연성이 부족해 질 것이다.
3.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모든 시민은 국가에 헌신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전통적인 믿음을 약화시켜 애국심을 약화시킬 것이다.
4. 징집병은 (군에 대한) 민의 우위, 자유, 그리고 민주적 제도들을 위협하는 독립된 군사문화가 성장하는 것을 막아준다.
5. 지원병제에서 제시하는 높은 급여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계층(미국의 경우 흑인)을 군대에 집중적으로 끌어들일 것이며 이것은 계급적인 약자들에게 국방의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 될 수 있다.
6. 지원병제 하에서는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주를 이룰 것이며 이들은 애국심이 아닌 금전적 보상을 바라고 입대하는 사실상의 용병에 불과할 것이다.
7.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해외에 대한 군사적 모험을 부추기고 무책임한 대외정책을 조성하는 한편 군사력 사용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약화시킬 것이다.
8. 지원병으로 편성한 군대에는 유능한 인재가 들어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군대의 효율성이 저하할 것이다. 군인의 자질이 저하되면 군대의 권위와 존엄성도 떨어지고 이것은 다시 모병에 어려움을 가져올 것이다.
9. 완전한 지원병제를 실시할 만큼 국방예산을 늘리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다른 국방 부문의 예산을 삭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전반적인 국방 태세를 약화 시킬 것이다.

물론 보고서 작성자들은 이 아홉가지 문제 모두가 실제와는 거리가 있으며 지원병제 추진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예언은 틀리기 마련입니다. 언급된 아홉가지 문제 중 아마 2번과 5, 6번 문제는 어느 정도 현실화 된 문제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8번도 해당될 수 있겠군요. 어쨌든 지원병제가 직접적인 경제적 부담이 더 크다는 점과 징병제에 비해 우수한 인력을, 특히 낮은 계급에 충당하는게 어려워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달리 인구와 경제력에서 여유가 없는 한국같은 나라는 더 위험하겠지요.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 도 있을 겁니다. 게다가 경제적, 안보적 환경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징병제를 계속 유지시키는 구실이 되고 있지요. 사실 저도 아직까지는 한국에서 징병제를 불가피하게 유지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한국의 현실에서는 장기적으로 군 복무 단축을 계속해서 12개월에서 18개월 사이로 줄일수만 있어도 다행이겠지요.

하지만 미국의 징병제 폐지론자들이 강하게 주장한 것 처럼 징병제란 아무리 좋게 포장하더라도 국가가 시민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는 제도입니다. 어쩌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나 그린스펀(Alan Greenspan)이 주장한 것 처럼 서구의 근대적인 징병제도 실상은 중세의 군역과 다를바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한국의 징병제 처럼 불합리하게 운영되는 제도는 어떻게 변호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상적인 근대적 징병제라면 무엇보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써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 할 텐데 한국의 실상은 정말 군역에 불과한 수준이니 말입니다. 필요성은 절감하는데 옹호하기 참 어렵습니다.

이 보고서를 처음 읽었을 무렵에는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근대적인 징병제를 비판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요즘은 제 생각도 조금 바뀌었습니다. 얼마전 군복무기간을 다시 24개월로 늘리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반사적으로 화가 치밀더군요.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 징병제에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0년 8월 23일 월요일

악마를 보았다

얼마전 CGV 포인트가 조금 있어서 포인트를 쓸 겸 악마를 보았다를 봤습니다. 한 번 보고 나니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남은 포인트로 한 번 더 봤습니다.

역시 이 영화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은 최민식이 연기한 연쇄살인범 장경철입니다. 열등감에 찌들어 그 불만을 약자에게 쏟아넣는 전형적인 살인마를 재미있게 연기했더군요. 장경철이라는 인물은 큰소리는 뻥뻥치지만 실제로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역겨운 인물입니다. 영화에 묘사되는 모습을 보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별 볼일 없는 인물인데다 가족과도 사이가 나빠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 중간 중간 묘사되는 모습에서 나타나듯 자기 자신에 제법 대단한 인물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고 허세도 쩔죠. 실제로는 아닙니다만. 자신은 잘났지만 세상이 문제가 있어서 꼬였다고 착각하는 인물 같으니 그 불만을 엉뚱한 약자들에게 쏟아 넣을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여태까지 세상에 알려진 한국의 연쇄살인범들과 비슷한 캐릭터입니다.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꽤 그럴싸 합니다. 한국 영화에 한니발 렉터같은 고상하고 “강한” 연쇄살인범을 등장시키면 정말 어색하고 병신같았겠죠. 개인적으로는 이 찌질한 살인마의 살인행각을 더 많이 보여줬더라면 좋았겠습니다만 영화의 핵심은 이병헌이 연기한 김수현의 복수에 있으니 어쩔 수 없겠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영화 중반에 나오는 장경철의 친구도 재미있었습니다. 세븐데이즈에서는 강간살인범을 연기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더군요. 특이한 식성에다가 특이한 동거녀(정황상 살인은 같이 하는 모양이더군요)를 달고 다니는데 이 커플을 가지고 스핀오프를 하나 만들어도 좋을 듯 싶었습니다.

이야기 구조는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뭐 대충 넘어가 줄 만 합니다. 한국에서 만드는 스릴러 치고 이야기 구조가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만들어진 물건이 별로 없잖습니까. 이미 세븐데이즈나 용서는 없다 같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스릴러들이 많았던지라 이 영화는 충분히 봐줄 만 합니다.

이곳 저곳의 영화평을 보니 좀 더 세게 나갔어야 했다는 의견이 꽤 많던데 대한민국의 주류 영화계에서 이 정도 물건을 내놓은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 같습니다. 앞으로 좀 더 유능하고 막나가는 감독이 나타나 한 술 더 뜨는 물건을 내놓았으면 싶군요. 뭐, 사실 제 개인적으로도 감독이 막 나가려다 못 나간듯한 느낌이 들긴 했습니다. 이번 부산영화제에 무삭제판을 내놓는다던데 시간이 된다면 한 번 보러가고 싶군요. 대한민국의 제멋대로 심의기준을 생각하면 DVD판도 무사히 나올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